1999년 7월 20일 전 국가 주석 장쩌민은 파룬궁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99년 이전까지 중국인들에게 폭넓은 인기를 끌었던 심신수련법 파룬궁은 권력의 야욕과 질투심에 불탄 한 사람 때문에 졸지에 불법단체로 규정됐다. 역사적으로 보기 드문 대규모 탄압이 시작됐다. 부당함을 청원하러 간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갔고,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 먹구름은 걷히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사람은 두려움에 '파룬궁'이란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용기 있는 이들은 진실을 말한다는 이유로 노교소에 수감되거나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2001년 한국으로 온 파룬궁 수련생 권청자(68) 씨. 같이 탈출하지 못한 아들 김학철(38)씨는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7년째 수감중이다.ⓒ 정인권 기자
파룬궁 수련생 권청자(68) 씨는 2001년 2월 28일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건너왔다. 하지만, 미처 중국서 탈출하지 못한 그의 아들 김학철(38) 씨는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중국 지린성 스핑시 스링 감옥에 7년째 감금되어 있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권씨. 그의 기억 속에서 7.20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99년 7월 20일, 어디에 있었나?
지린성 위수시에 살았다. 원래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새벽 5시에 연공을 했는데, 당일 새벽, 나는 연공을 하러 가지 못했다. 7월 초쯤 사복경찰 두 명이 와서 연공 중에 카세트를 빼앗아 갔고, 공안국에서 못하게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지역의 연공장에서도 연공을 방해하는 일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었다.
-7월 20일 부터가 아니라 그 전에도 탄압이 있었다는 건가?
그렇다. 4월 25일 중난하이에 파룬궁 수련생 만 여명이 가서 청원을 한 사건이 발생한 후로, 각지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영향을 주는 일들이 발생했다. 7월에는, 보도원(輔導員·파룬궁 동작을 지도하는 자원 봉사자)들이 잡혀가는 일들이 발생했다. 연속적으로 이런 일이 생겼다.
-4월 25일 사건은 무엇인가?
4월 11일 톈진교육대학의 허쩌슈라는 사람이 '청소년과기박람'지에 파룬궁 창시자 리훙쯔 선생님과 파룬궁에 대해서 모함하는 글을 올렸다. 하지만, 그 내용은 사실이 아니었다.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수련생 진상을 알렸다. 그런데, 4월 23일과 24일 양일 동안 톈진시 공안국은 무장경찰을 동원하여 상황을 알리던 파룬궁 수련생을 구타했다. 수련생들은 피를 흘리는 등 부상을 당했고 45명이 체포됐다.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4월 25일 수련생 만 여명이 중난하이에 찾아간 것이다. 이후 각 지에서 암암리에 파룬궁 수련에 방해를 받았다. 많은 수련생은 자발적으로 베이징이나 각 성 정부에 가서 수련생들을 풀어주고, 합법적으로 연공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당신도 청원하러 갔나?
지린성 정부에 갔다. 당시 7월 20일 베이징에서는 수련생들이 청원하기 위해 찾아갔고, 지린성에서는 다음날인 21일 저녁 수련생들이 길림성정부로 찾아갔다. 각 현에서 온 수련생들 수천 명이 모였다. 나는 아들, 며느리와 지린성 정부 뒷문 길옆에 앉아서 기다렸다. 수련생들이 계속해서 오다 보니 길이 꽉 찰 정도였다.
-평화적인 시위였나?
대표를 성 정부에 파견해서 보내고, 남은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서 기다렸다. 길에 종이 한 장도 버리지 않았다. 몇몇 수련생들이 비닐을 들고 다니면서 행인들이 떨어뜨리고 간 담배꽁초도 다 주워서 쓰레기통도 버렸다.
-그곳에서 탄압이 있었나?
이튿날인 22일 새벽, 갑자기 큰 버스 10여대가 앉아있는 곳 가까이 왔다. 경찰들은 여기서 이러면 안된다며 빨리 집으로 가라고 했다. 그때 우리는 정부로부터 소식을 기다리고 있어서 갈 수 없었다. 그러자, 경찰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마치 짐을 싣듯이 버스에 실었다.
-어디로 갔나?
장춘시에 큰 체육관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실려 갔다. 버스가 와서 싣고 또 와서 싣기를 계속했다. 각 현에서 사람들이 오는 대로 계속 버스에 타게 했다.
-당신과 함께 간 가족들도 그곳으로 이송됐나?
우리 가족은 여러 차에 나뉘어 잡혀갔다. 그 바람에 아들과 며느리를 놓쳤다. 나는 동네 사람들과 함께 경찰학교 마당에 내려졌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아들은 다른 차에 실려 가다가 창문으로 뛰어내려 탈출했고, 며느리는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에 내려졌다고 했다.
-경찰은 잡힌 수련생들에게 어떻게 했나?
어느 곳에서 왔는지 물었다. 많은 수련자는 가족에게 피해를 줄까 봐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다. 주소를 말한 사람들은 그 지역의 공안국에서 끌고 갔고, 감시대상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주소를 말하지 않은 사람들은 또 다른 곳으로 이송됐다.
-당신은 탈출했나?
아들과 며느리도 잡혀 있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가지고 간 옷을 갈아입고, 화장과 머리를 다시 했다. 당당하게 걸어 나오자, 경찰들이 나를 보고도 주소를 물어보지 않았다. 겨우 빠져나와서 아들과 며느리를 찾아갔다. 혹시 체육관에 있나 해서 가보니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경찰들은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다. 결국, 찾지 못했다. 오후가 되자 체육관에 있는 사람들이 또 다시 버스에 실려 어느 곳으로 갔다.
-어디로 갔나?
모른다. 그 수천 명의 사람들이 어디로 실려 갔는지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버스가 움직이던 것을 멈췄다. 그리고 매우 큰 소리로 방송이 나왔다. '파룬궁은 불법 단체다, 파룬궁을 해체하기로 중앙에서 결정했다, 파룬궁을 수련하면 안 된다.' 라는 내용이었다.
-심경이 어땠나?
맥이 풀렸고, 답답했다. 심신 건강에 좋고, 좋은 사람 되는 이토록 좋은 수련을 못하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아들과 며느리는 찾았나?
같이 있었던 장소로 다시 돌아오니 조금 있다 학철이가 왔다. 그리고 다시 길을 가다 며느리를 찾았다. 다들 어렵게 빠져나온 상황이었다.
-또 다른 위협은 없었나?
그날 저녁, 수십 명의 무장경찰들이 트럭 위에 올라가서 총을 겨눴다.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파룬궁을 해체해야 한다면서 빨리 흩어지라고 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억울해서 주변 사람에게 파룬궁은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주변 이웃 중에 경찰에 끌려간 사람들이 많았나?
그렇다. 잡혀가서 이름을 대지 않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이름을 댄 사람은 돌아와서 감시대상명단에 올랐다.
-이후로 단체 연공을 하지 못했나?
전혀 할 수 없었다. 공안국에서 활동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23일 새벽에도 못 나갔나?
못 나갔다. 초기에는 아주 공포상태였다. 무장경찰들이 지키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무서워서 나가지 못했다.
-그래도 청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지 않나.
탄압받는 자체가 너무 억울해서 많은 수련생은 목숨을 걸고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 하지만 파룬궁 수련생이라는 것을 알면 기차도 타지 못하게 하고, 차표도 끊어주지 않았다. 천안문에 가면 정부민원실이 있는데, 그곳에 가서 청원하다 파룬궁 수련생이라는 것을 알면 무조건 잡아갔다. 각지에 이미 파룬궁 수련생을 탄압하는 '6.10 사무실'을 차려놓았기에, 그 수련생이 잡히면 소속된 곳에서 잡아갔다. 당시 경찰들이 청원하는 수련생들을 때리는 상황도 많았다.
-당신은 보도원이었나? 집을 수색 당하지는 않았나?
보도원이 아니었다. 학철이도 아니었다. 그래서 집까지 수색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학철이가 베이징에 청원하러 두 번 간 적이 있기에 소속파출소에서는 아들과 며느리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과 며느리는 거주지를 옮겨 다니면서 생활해야 했다.
-한국으로 오게 된 이유가 탄압 때문이었나?
그렇다. 탄압 이후로 억울한 마음이 항상 마음속에 있었다. 자유롭게 단체 연공도 못하고 수련도 할 수 없었다. 한국은 민주국가이기 때문에, 한국에 가면 자유롭게 수련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이 함께 올 수는 없었나?
당시 아들은 공안국을 피해 다니는 상황이어서 한국에 나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공안국에서 절차를 밟아야 여권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공안국에서 당신이 파룬궁 수련생인지 몰랐기에 가능했나?
몰랐다. 물론 파출소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감시대상명단에 오르지도 않고 근거가 없었기에 나를 잡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 수련생들은 신분증을 모두 몰수당했다. 하지만 나는 신분증을 압수당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한국에 오기 전 아들을 만났나?
중국을 나오기 며칠 전 학철이를 만났다. 그런데 서로 끌어안고 우느라고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다. 우리가 먼저 한국에 나와서 어떤 방법으로든 아들과 며느리를 데려오고 싶었다. 하지만, 나와 남편이 한국에 온 지 정확히 2년 만에, 학철이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들 학철 씨가 어떤 형을 선고받았나?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게 이유였다. 사법경찰에게 잡혀갔고, 10년형 선고를 받았다. 아들은 지금까지 7년째 지린성 스핑시 스링감옥에 갇혀 있다.
-다른 이유는 없었나?
없었다. 아들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출근하면서 성실하게 근무했다. 부모님에게도 효도하는 착하고 평범한 젊은이였다.
-당시 학철 씨 말고도 주변에 수감된 수련생들이 많았나?
학철이와 같이 수련하는 사람들도 잡혀간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당시 99년부터 탄압을 했으니까 이제까지 정말 많은 사람이 잡혀갔다.
-학철씨도 다른 수련생들처럼 혹독한 고문을 당했나?
수감될 당시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두 손을 등 뒤로 해서 쇠고랑을 채우고, 구타당해서 두 팔이 다 부러졌다. 전기몽둥이로 예민한 부분을 지져서 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비닐봉지를 머리에 씌워서 질식시키는 등 매우 악랄했다.
-죄가 없는데 항소할 수는 없었나?
장춘시 중국인민법원서 10년 판결을 내린 후로, 아들은 지린성고급법원에 항소했다. 그러나 원심을 유지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최고급법원에도 재소했지만, 최고급법원에서도 접수처리도 하지 않고 내려 보냈다.
-지금 학철 씨의 건강상태는 어떤가?
만나보지 못해서 구체적인 정황은 알지 못한다.
-살아 있나?
살아 있다. 며느리가 한 달에 한번 면회를 간다. 하지만, 죄 없는 사람이 갇혀 있을 곳이 아니다. 아들을 만나지 못한지도 벌써 9년째다.
-아들 구명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해오고 있지 않나.
그렇다. 학철이가 2003년도에 잡혔을 때, '김학철구명대책위원회' 회원들과 함께 부산에서 서울까지 도보로 구명운동을 시작했다. 김학철 구명과 파룬궁 수련자 박해 중지를 내용으로 한 달 동안 도보로 진상을 알렸다. 시청, 구청, 언론단체, 방송사에 이 사실을 알렸고, 서명도 받았다. 도보로 알릴 때 사복경찰들이 우리를 보호해주었는데, 중국경찰들과 완전히 달랐다.
-지금도 하고 있나?
그렇다. 탤런트 서갑숙 씨와 '김학철구명대책위원회' 회원들과 같이 다니면서 알리고 있다. 시의회, 구의회, 도의회를 다니면서 의원님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결과 73개 의회와 시민단체, 사회단체에서 결의안과 건의문이 채택됐다.
-작년 5월 국적을 회복했다고 들었다.
이 활동을 시작할 당시 나는 불법체류자 신분이었다. 떳떳하게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국적회복을 신청했다. 구명운동을 하러 다닐 때, 만나는 사람마다 힘내라고 고무격려를 해주어서 감사했고, 큰 힘이 됐다. 많은 분이 지지해주고 도와줘서 조속하고 원만하게 국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제 당당히 한국인의 아들을 구해달라고 호소할 수 있다. 국적을 회복해서 학철이는 당당히 한국인의 아들이 됐다.
-지금도 청와대 앞에서 매일 청원하는데, 반응은 어떤가?
주위 경찰들도 많은 동정과 관심을 보였다. 비가 오면 우산을 씌워주고, 때가 되면 밥을 먹었느냐고 물어보며 관심을 보인다. 많은 감동을 받았다. 현재까지 14만 명이 자필로 서명을 해주었다. 인터넷 김학철 사이트에 1천2백 명 정도, 엽서로 받은 서명도 4천 통 이다.
-파룬궁 박해 10주년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한국정부와 시민이 지지해준 힘을 얻어 아들이 얼른 풀려나와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지금 중국에서 여전히 탄압받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석방되고, 자유롭게 수련할 수 있으면 좋겠다.
"탄압 10년…믿을 수 없는 사실"
"탄압 10년…믿을 수 없는 사실"
아들 7년째 중국서 수감중인 파룬궁 수련생 권청자 씨
등록일: 2009년 07월 16일 12시 41분 38초
1999년 7월 20일 전 국가 주석 장쩌민은 파룬궁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99년 이전까지 중국인들에게 폭넓은 인기를 끌었던 심신수련법 파룬궁은 권력의 야욕과 질투심에 불탄 한 사람 때문에 졸지에 불법단체로 규정됐다. 역사적으로 보기 드문 대규모 탄압이 시작됐다. 부당함을 청원하러 간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갔고,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 먹구름은 걷히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사람은 두려움에 '파룬궁'이란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용기 있는 이들은 진실을 말한다는 이유로 노교소에 수감되거나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99년 7월 20일, 어디에 있었나?
지린성 위수시에 살았다. 원래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새벽 5시에 연공을 했는데, 당일 새벽, 나는 연공을 하러 가지 못했다. 7월 초쯤 사복경찰 두 명이 와서 연공 중에 카세트를 빼앗아 갔고, 공안국에서 못하게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지역의 연공장에서도 연공을 방해하는 일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었다.
-7월 20일 부터가 아니라 그 전에도 탄압이 있었다는 건가?
그렇다. 4월 25일 중난하이에 파룬궁 수련생 만 여명이 가서 청원을 한 사건이 발생한 후로, 각지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영향을 주는 일들이 발생했다. 7월에는, 보도원(輔導員·파룬궁 동작을 지도하는 자원 봉사자)들이 잡혀가는 일들이 발생했다. 연속적으로 이런 일이 생겼다.
-4월 25일 사건은 무엇인가?
4월 11일 톈진교육대학의 허쩌슈라는 사람이 '청소년과기박람'지에 파룬궁 창시자 리훙쯔 선생님과 파룬궁에 대해서 모함하는 글을 올렸다. 하지만, 그 내용은 사실이 아니었다.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수련생 진상을 알렸다. 그런데, 4월 23일과 24일 양일 동안 톈진시 공안국은 무장경찰을 동원하여 상황을 알리던 파룬궁 수련생을 구타했다. 수련생들은 피를 흘리는 등 부상을 당했고 45명이 체포됐다.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4월 25일 수련생 만 여명이 중난하이에 찾아간 것이다. 이후 각 지에서 암암리에 파룬궁 수련에 방해를 받았다. 많은 수련생은 자발적으로 베이징이나 각 성 정부에 가서 수련생들을 풀어주고, 합법적으로 연공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당신도 청원하러 갔나?
지린성 정부에 갔다. 당시 7월 20일 베이징에서는 수련생들이 청원하기 위해 찾아갔고, 지린성에서는 다음날인 21일 저녁 수련생들이 길림성정부로 찾아갔다. 각 현에서 온 수련생들 수천 명이 모였다. 나는 아들, 며느리와 지린성 정부 뒷문 길옆에 앉아서 기다렸다. 수련생들이 계속해서 오다 보니 길이 꽉 찰 정도였다.
-평화적인 시위였나?
대표를 성 정부에 파견해서 보내고, 남은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서 기다렸다. 길에 종이 한 장도 버리지 않았다. 몇몇 수련생들이 비닐을 들고 다니면서 행인들이 떨어뜨리고 간 담배꽁초도 다 주워서 쓰레기통도 버렸다.
-그곳에서 탄압이 있었나?
이튿날인 22일 새벽, 갑자기 큰 버스 10여대가 앉아있는 곳 가까이 왔다. 경찰들은 여기서 이러면 안된다며 빨리 집으로 가라고 했다. 그때 우리는 정부로부터 소식을 기다리고 있어서 갈 수 없었다. 그러자, 경찰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마치 짐을 싣듯이 버스에 실었다.
-어디로 갔나?
장춘시에 큰 체육관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실려 갔다. 버스가 와서 싣고 또 와서 싣기를 계속했다. 각 현에서 사람들이 오는 대로 계속 버스에 타게 했다.
-당신과 함께 간 가족들도 그곳으로 이송됐나?
우리 가족은 여러 차에 나뉘어 잡혀갔다. 그 바람에 아들과 며느리를 놓쳤다. 나는 동네 사람들과 함께 경찰학교 마당에 내려졌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아들은 다른 차에 실려 가다가 창문으로 뛰어내려 탈출했고, 며느리는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에 내려졌다고 했다.
-경찰은 잡힌 수련생들에게 어떻게 했나?
어느 곳에서 왔는지 물었다. 많은 수련자는 가족에게 피해를 줄까 봐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다. 주소를 말한 사람들은 그 지역의 공안국에서 끌고 갔고, 감시대상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주소를 말하지 않은 사람들은 또 다른 곳으로 이송됐다.
-당신은 탈출했나?
아들과 며느리도 잡혀 있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가지고 간 옷을 갈아입고, 화장과 머리를 다시 했다. 당당하게 걸어 나오자, 경찰들이 나를 보고도 주소를 물어보지 않았다. 겨우 빠져나와서 아들과 며느리를 찾아갔다. 혹시 체육관에 있나 해서 가보니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경찰들은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다. 결국, 찾지 못했다. 오후가 되자 체육관에 있는 사람들이 또 다시 버스에 실려 어느 곳으로 갔다.
-어디로 갔나?
모른다. 그 수천 명의 사람들이 어디로 실려 갔는지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버스가 움직이던 것을 멈췄다. 그리고 매우 큰 소리로 방송이 나왔다. '파룬궁은 불법 단체다, 파룬궁을 해체하기로 중앙에서 결정했다, 파룬궁을 수련하면 안 된다.' 라는 내용이었다.
-심경이 어땠나?
맥이 풀렸고, 답답했다. 심신 건강에 좋고, 좋은 사람 되는 이토록 좋은 수련을 못하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아들과 며느리는 찾았나?
같이 있었던 장소로 다시 돌아오니 조금 있다 학철이가 왔다. 그리고 다시 길을 가다 며느리를 찾았다. 다들 어렵게 빠져나온 상황이었다.
-또 다른 위협은 없었나?
그날 저녁, 수십 명의 무장경찰들이 트럭 위에 올라가서 총을 겨눴다.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파룬궁을 해체해야 한다면서 빨리 흩어지라고 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억울해서 주변 사람에게 파룬궁은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주변 이웃 중에 경찰에 끌려간 사람들이 많았나?
그렇다. 잡혀가서 이름을 대지 않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이름을 댄 사람은 돌아와서 감시대상명단에 올랐다.
-이후로 단체 연공을 하지 못했나?
전혀 할 수 없었다. 공안국에서 활동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23일 새벽에도 못 나갔나?
못 나갔다. 초기에는 아주 공포상태였다. 무장경찰들이 지키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무서워서 나가지 못했다.
-그래도 청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지 않나.
탄압받는 자체가 너무 억울해서 많은 수련생은 목숨을 걸고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 하지만 파룬궁 수련생이라는 것을 알면 기차도 타지 못하게 하고, 차표도 끊어주지 않았다. 천안문에 가면 정부민원실이 있는데, 그곳에 가서 청원하다 파룬궁 수련생이라는 것을 알면 무조건 잡아갔다. 각지에 이미 파룬궁 수련생을 탄압하는 '6.10 사무실'을 차려놓았기에, 그 수련생이 잡히면 소속된 곳에서 잡아갔다. 당시 경찰들이 청원하는 수련생들을 때리는 상황도 많았다.
-당신은 보도원이었나? 집을 수색 당하지는 않았나?
보도원이 아니었다. 학철이도 아니었다. 그래서 집까지 수색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학철이가 베이징에 청원하러 두 번 간 적이 있기에 소속파출소에서는 아들과 며느리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과 며느리는 거주지를 옮겨 다니면서 생활해야 했다.
-한국으로 오게 된 이유가 탄압 때문이었나?
그렇다. 탄압 이후로 억울한 마음이 항상 마음속에 있었다. 자유롭게 단체 연공도 못하고 수련도 할 수 없었다. 한국은 민주국가이기 때문에, 한국에 가면 자유롭게 수련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이 함께 올 수는 없었나?
당시 아들은 공안국을 피해 다니는 상황이어서 한국에 나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공안국에서 절차를 밟아야 여권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공안국에서 당신이 파룬궁 수련생인지 몰랐기에 가능했나?
몰랐다. 물론 파출소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감시대상명단에 오르지도 않고 근거가 없었기에 나를 잡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 수련생들은 신분증을 모두 몰수당했다. 하지만 나는 신분증을 압수당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한국에 오기 전 아들을 만났나?
중국을 나오기 며칠 전 학철이를 만났다. 그런데 서로 끌어안고 우느라고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다. 우리가 먼저 한국에 나와서 어떤 방법으로든 아들과 며느리를 데려오고 싶었다. 하지만, 나와 남편이 한국에 온 지 정확히 2년 만에, 학철이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들 학철 씨가 어떤 형을 선고받았나?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게 이유였다. 사법경찰에게 잡혀갔고, 10년형 선고를 받았다. 아들은 지금까지 7년째 지린성 스핑시 스링감옥에 갇혀 있다.
-다른 이유는 없었나?
없었다. 아들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출근하면서 성실하게 근무했다. 부모님에게도 효도하는 착하고 평범한 젊은이였다.
-당시 학철 씨 말고도 주변에 수감된 수련생들이 많았나?
학철이와 같이 수련하는 사람들도 잡혀간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당시 99년부터 탄압을 했으니까 이제까지 정말 많은 사람이 잡혀갔다.
-학철씨도 다른 수련생들처럼 혹독한 고문을 당했나?
수감될 당시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두 손을 등 뒤로 해서 쇠고랑을 채우고, 구타당해서 두 팔이 다 부러졌다. 전기몽둥이로 예민한 부분을 지져서 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비닐봉지를 머리에 씌워서 질식시키는 등 매우 악랄했다.
-죄가 없는데 항소할 수는 없었나?
장춘시 중국인민법원서 10년 판결을 내린 후로, 아들은 지린성고급법원에 항소했다. 그러나 원심을 유지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최고급법원에도 재소했지만, 최고급법원에서도 접수처리도 하지 않고 내려 보냈다.
-지금 학철 씨의 건강상태는 어떤가?
만나보지 못해서 구체적인 정황은 알지 못한다.
-살아 있나?
살아 있다. 며느리가 한 달에 한번 면회를 간다. 하지만, 죄 없는 사람이 갇혀 있을 곳이 아니다. 아들을 만나지 못한지도 벌써 9년째다.
-아들 구명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해오고 있지 않나.
그렇다. 학철이가 2003년도에 잡혔을 때, '김학철구명대책위원회' 회원들과 함께 부산에서 서울까지 도보로 구명운동을 시작했다. 김학철 구명과 파룬궁 수련자 박해 중지를 내용으로 한 달 동안 도보로 진상을 알렸다. 시청, 구청, 언론단체, 방송사에 이 사실을 알렸고, 서명도 받았다. 도보로 알릴 때 사복경찰들이 우리를 보호해주었는데, 중국경찰들과 완전히 달랐다.
-지금도 하고 있나?
그렇다. 탤런트 서갑숙 씨와 '김학철구명대책위원회' 회원들과 같이 다니면서 알리고 있다. 시의회, 구의회, 도의회를 다니면서 의원님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결과 73개 의회와 시민단체, 사회단체에서 결의안과 건의문이 채택됐다.
-작년 5월 국적을 회복했다고 들었다.
이 활동을 시작할 당시 나는 불법체류자 신분이었다. 떳떳하게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국적회복을 신청했다. 구명운동을 하러 다닐 때, 만나는 사람마다 힘내라고 고무격려를 해주어서 감사했고, 큰 힘이 됐다. 많은 분이 지지해주고 도와줘서 조속하고 원만하게 국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제 당당히 한국인의 아들을 구해달라고 호소할 수 있다. 국적을 회복해서 학철이는 당당히 한국인의 아들이 됐다.
-지금도 청와대 앞에서 매일 청원하는데, 반응은 어떤가?
주위 경찰들도 많은 동정과 관심을 보였다. 비가 오면 우산을 씌워주고, 때가 되면 밥을 먹었느냐고 물어보며 관심을 보인다. 많은 감동을 받았다. 현재까지 14만 명이 자필로 서명을 해주었다. 인터넷 김학철 사이트에 1천2백 명 정도, 엽서로 받은 서명도 4천 통 이다.
-파룬궁 박해 10주년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한국정부와 시민이 지지해준 힘을 얻어 아들이 얼른 풀려나와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지금 중국에서 여전히 탄압받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석방되고, 자유롭게 수련할 수 있으면 좋겠다.
김학철구명위원회 http://www.hckim.net/
조윤덕 기자 http://www.epochtimes.co.kr/news/article.html?no=14680 조윤덕 기자의 전체기사보기
변화하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창 <대기원시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