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주차 기본정훈 유구한 우리의 역사 (제2과 )

오두영2009.07.20
조회407
제29주차 기본정훈 유구한 우리의 역사 (제2과 )







고려의 북진정책과 구국항쟁의 정신



 











최근 방영된 TV드라마 중에는 우리의 민족사를 바꾼 인물을 주제로 한 역사드라마가 많은 국민들의 주목을 받았다.

대표적인 예가 태조 왕건, 대조영, 불멸의 이순신, 주몽, 해신(장보고), 태왕사신기(광개토대왕) 등이다.


이러한 드라마의 공통된 교훈은 우리 조상들의 호국사상과 상무정신이었다.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천추태후 또한 이러한
교훈을 담고 있다. 천추태후(헌애왕후, 964년∼1029년)는 고려의 5대 왕 경종(景宗)의 세 번째 왕비이다. 7대왕 목종의
모후로, 태조의 아들인 대종과 선의태후에게서 출생하였다.

이 드라마는 大 고려의 이상을 품고 황제국을 선언한
천추태후와 강동6주를 우리 강토로 만든 협상의 귀재 서희 장군, 귀주대첩으로 거란에 최악의 패배를 맛보게 한 강감찬 장군의
위용을 오늘에 되살려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자존심을 높여 준다.

Ⅰ.고려 태조의 북진정책

거란이
926년 발해를 멸하고 고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거란의 태종은 사신을 파견해 낙타 50필을 고려에 보내왔다. 그러나 평소
거란에 격렬한 적개심을 갖고 있던 태조는 사절단 30명을 모조리 섬으로 유배시키고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서 굶겨 죽였다. 또한
태조는 ‘훈요십조’에서 ‘거란은 바로 금수의 나라’라고 낙인 찍고 경계할 것을 당부했다.

태조는 고구려의 옛
서울인 서경(평양)을 중요시해 그 복구에 노력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찾는 일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태조의 북진정책은 그
후 그대로 계승되어 정종은 서경천도를 계획해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킨 일이 있었고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광군 30만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압록강을 향해 진출하기 위한 시책으로 청천강 건너에 많은 성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Ⅱ.서희 장군의 외교활동


1차 거란의 침입은 고려 성종12년(993년)에 일어났다. 거란의 장수 소손녕은 실제로는 6만의 군사에 불과하면서도 80만
대군을 이끌고 왔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고려에 항복을 강권하였다. 항복의 조건은 첫째, “고구려의 옛 땅을 내 놓을 것” 둘째,
“거란과 국교관계를 맺고 송과 국교를 단절할 것”이었다.

이에 고려의 서희 장군은 조정을 대표하여 소손녕과 만나
담판을 벌였다. 서희 장군은 첫째, “고려는 그 국호에 나타난 바와 같이 고구려의 계승자라는 것”을 강조했다. 둘째, “거란과
국교를 맺지 못하는 것은 여진이 그 통로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희 장군의 외교적 활동으로 거란의
군대는 물러갔다. 그 결과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과 맞닿게 되었으며 지금의 평안북도 일대의 군사·교통상의 요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강동6주란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구성), 곽주(곽산)를 말하는데, 뒤에
북방민족의 침략을 방어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중요한 군사기지가 되었다.

Ⅲ.강동6주 반환 요구

거란은
제1차 침입이 오히려 고려의 영토 확장과 국방력 강화의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강동육주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
무렵 고려의 강조가 목종을 폐위시키고 김치양 일파를 제거한 뒤 현종을 새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거란은 강조를 문책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현종 1년(1010년)에 거란의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으로 제2차 침입을 감행했다.

강조는 거란을
맞아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적을 업신여긴 나머지 거란의 성종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거란의 성종은 강조에게 자신의 신하가
될 것을 요구하지만 강조는 “나는 고려 사람이다. 고려 사람인 내가 어찌 너의 신하가 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며 끝내 죽음을
택하게 된다.

이때 고려의 현종은 난을 피해 멀리 나주까지 내려갔으며, 수도 개경은 거란의 침략군에게 유린된다. 그러나 거란군은 별다른 소득 없이 현종의 입조를 조건으로 철군했다. 그렇지만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Ⅳ.강감찬 장군의 활약


종 9년(1018년) 거란의 성종은 소배압을 도통으로 삼아 고려원정군을 편성하여 제3차 침입을 감행했다. 고려도 거란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비하여 강감찬 장군을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삼아 방어의 진용을 갖추었다. 마침내 그해 12월 10일 소배압이 1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20만 8000명으로 대적했다.


감찬 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여 영주(안주)에 주력군을 주둔시켜 흥화진(의주)까지 이르게 하고, 기병 1만 2000명을
선발하여 산중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굵은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의 동쪽을 흐르는 대천의 물을 막고 기다리게 했다가 거란이
쳐들어오자 일시에 막았던 물을 터놓게 했다. 강감찬 장군은 적이 뜻밖의 기습에 당황하여 큰 혼란에 빠진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
명령을 내려 수많은 적을 무찔렀다.

거란의 주력부대는 그대로 개경에 육박하고자 계속 남진하다가 자주 내구산(평남
순천)의 남쪽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고 난 뒤 마탄(대동강의 나루터)에서 조원에 의해 1만여 명이 참살당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소배압은 개경을 위협하려 했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수도(개경) 방어에
만전을 기하고 주위 도성 밖의 백성들을 성안으로 철수시켜 이른바 청야전술(淸野戰術)로 응수했다. 거란군은 거듭되는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반면, 고려는 수도 일대의 방비가 철통 같았으므로 소배압은 개경의 공략이 불가능함을 알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 10년(1019년) 2월 초하룻날, 거란군은 회군하는 길에 귀주를 지나다가 강감찬 장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참담한 패배를
맛보았다. 아군은 승세를 몰아 분전하니 용기가 스스로 배가되었고 북으로 달아나는 적을 맹렬히 추격했다.

Ⅴ.고려의 구국정신 계승


려는 거란보다 우월한 문화대국임을 자부하고 또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려는 의지가 넘쳤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고려는 민족의
정통성을 계승·보존하였다. 국토가 모두 전쟁터가 되고 수도가 적에 점령되었으면서도 서희 장군과 강감찬 장군의 결사항전의 의지와
휘하 병졸들의 목숨을 돌보지 않는 구국항쟁의 정신이 있었기에 거란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역사란 어제를 바탕으로 더
나은 오늘을 만들고 오늘을 바탕으로 보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다. 우리는 후손들에게 영광된 미래를 물려주기 위해서
조상들이 피와 땀으로 일구어 놓은 찬란한 문화와 유구한 역사를 바탕으로 자랑스러운 역사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국방부 국방교육정책관실>



2009.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