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와 시민에게 주는 삼촌의 교양편지(3)

김용만2009.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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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와 시민에게 주는 삼촌의 교양편지(3)

첫째 모듬 현대사회와 대중문화 modern society & mass culture

사랑하는 조카 민주야, 시민아,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대중문화가 어떤 명암을 가진 것인지 지난 두 번의 편지를 통해 대략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 우리는 대기를 숨쉬며 살아가고 물을 먹어야 생존하는 것처럼 의식하든 못하든 이미 상업주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 이런 존재론적 반성이 먼저 선행해야 이제부터 이야기할 사회학적 응용도 수용가능할 것이라 생각되는구나. 

 

세 번째 생각할 거리 = 현대사회에서 문화는 신분이다?

- 아우라의 상실(Loss of Aura)과 문화자본, 문화계급

󰁴 아우라의 상실 시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만 해도 “신을 닮은 인간의 형상은 신적 영감을 받은 예술가들만 제대로 표현될 수 있다.”는 생각이 아직 남아 있었어. 예수님이나 성모 마리아, 부처님을 그린 그림을 보면 머리 뒤에 둥그런 원이 있지? 원광, 후광이라고도 불리우는 그게 바로 ‘아우라’를 표현한 거지. ‘바로 앞에 있어도 아득하게 멀게 생각되는 단 한 번의 만남’, ‘무엇인가 고귀하고 품격이 느껴지는 현상’을 ‘아우라’라고 하는 거야.
“장동건은 멀리서 봐도 얼굴에서 빛이 나”, “김혜수의 섹시 포스 죽이지 않아?” 이런 식의 말들 많이 하고 살지? ‘뽀다구’나 ‘간지’ 이런 말도 뭔가 관련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아?

[해설] 아우라(aura) 後光, 광채 등의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예술작품이 갖는 유일무이한 일회적 현존성(現存性), 모나리자의 원작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세상에 딱 한 점만 그린 작품으로 一回性을 가져야 이런 후광효과가 생긴다고 한다.

그런데 20세기 독일의 예술비평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원작이 보여주는 ‘아우라’는 ‘예술이 아직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던 시절의 흔적’이라고 주장했어. ‘예배 가치’를 잃은 원작은 ‘전시가치‘만을 갖게 되었다는 거야. 요즘은 보기도 힘들어진 이발소 벽에 걸려서 먼지가 뽀얗게 않은 밀레의 ‘만종’ 복제품을 생각해봐. 요즘은 토마스 맥나이트의 포스터 같은 팝 아트가 더 많아졌으니 그걸로 이야기해야 할까?  
벤야민은 또 사진(Photo)과 영화(Cinema)의 기술적 가능성이 인간의 창조력을 해방시킨다고 생각했어. 그가 한창 활동하던 시절에 사진과 영화가 등장했잖아. ‘아우라’의 파괴를 이야기한 것이지.

[해설]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1892-1940) 유대계 독일 사회학자 겸 사회비평가. 유물사관과 형이상학을 결합시키는 연구를 했고 좌익운동과 시오니즘에도 관여했다. , , 가 있다. 나치에 추적당하던 중 자살했다. 

벤야민은 ‘아우라의 상실이야말로 진보적(進步的) 현상’이라는 관점을 갖고 있었어. 새로운 미디어가 기존의 ‘아우라’를 파괴하고 일반 대중도 예술의 수용과 연출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예술작품의 아우라 상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이다. 이러한 과정자체는 징후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지니는 의미는 예술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복제 기술은 –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 복제된 것을 전통의 영역으로부터 분리시킨다. 복제기술은 복제품을 대량생산함으로써 일회적 산물을 대량 제조된 산물로 대치시킨다. 복제기술은 수용자로 하여금 그때그때의 개별적 상황 속에서 복제물과 대면하게 함으로써 그 복제물을 현재화한다.

이 두 과정, 즉 복제품의 대량생산과 복제품의 현재화는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것을 마구 뒤흔들어 놓았다. 이러한 전통의 동요는 현재의 인류가 처하고 있는 위기와 변혁의 또 다른 이면(裏面)이기도 하다. (위기이면서도 진보를 내포한)

그리고 이러한 위기와 변혁은 오늘날의 대중운동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영화는 이러한 대중운동의 가장 강력한 매개체이다. 영화의 사회적 의미는 그 적극적인 양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적극적 양상 속에서 – 여기에는 파괴적인 면까지도 포함된다. – 영화의 ‘카타르시스’적 면, 다시 말해 문화적 유산이 지니는 전통적 가치의 청산이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위대한 역사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 벤야민  

화가가 제작한 판화(版畵)는 한 점이 아니라 복제를 하지만 그 것도 수량은 제한하잖아. 복제조차도 원판에 가까운 순서로 서열이 있지. 하지만 필름에서 인화한 수많은 사진들은 어느 것이 원작이지? 디카는 말할 것도 없고. 전국의 수많은 개봉관에서 동시에 상영하는 영화 ‘괴물’, ‘트랜스포머’ 필름은 어느 것이 원작일까?

이렇게 ‘원작 없는 복제’, ‘복제의 복제(複製)’를 시뮬라크르 (Simulacre)라고 하는 거야. 수천, 수만, 무한개의 복제가 존재하는데 원작의 ‘아우라’가 있겠어? 사라지고 만 것이지.

여기서 몽타주(Montage)를 생각해보자.  몽타주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지? ‘Wanted' 하고 현상금이 붙은 사진 말이야.

범인을 잡기 위해 목격자가 본 대로 얼굴형과 코와, 입과, 눈을 그려 넣은 사진이잖아. 전체적인 얼굴은 떠오르지 않아도 부분을 합치면 범인의 얼굴과 비슷한 모습이 그려지잖아. 이 사진은 2007년 300만이 넘게 본 화제의 영화 의 범인을 추정해서 그린 몽타주야.

이번엔 다른 이야기 한번 해볼까? 이효리의 눈, 손담비의 코, 윤은혜의 입술을 각각 보여주고 마지막에 서인영의 얼굴을 보여주면 관객 대다수는 눈, 코, 입술이 다 서인영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거야.
이처럼 전혀 다른 이미지를 결합하면 다른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을 몽타주라고 해. 영화에서는 editing_편집 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거야. 일종의 짜깁기야. 같은 그림이라도 배치의 순서나 방법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들이 나오는 현상 역시 몽타주라고 해. a→b→c→d의 합이 e라면 b→d→c→a의 합은 전혀 다른 z가 될 수 있어. 이처럼 이미 존재하는 실존도 그것을 구성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서 왜곡되고, 변형되고, 재창조될 수 있다는 거지.

생각해봐.

1. 조용필의 콘서트 모습, 2. 다수 군중 3. 신인여가수의 모 행사 출연모습 4. 소수 군중

1+2+3+4의 순서로 편집했을 때와 1+4+3+2로 편집했을 때를 말이야. 이처럼 부분은 사실이지만 총체는 거짓일 수 있어. 바로 사실은 진실인가? 라는 물음을 가져볼 수 있는 사례야. 존재한다고 모두 진실은 아니고 일어났다고 모두 사건이 아닌 거야. 편집자의 맘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

‘하버드대학교’란 제목의 사진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밤늦도록 불이 켜진 도서관의 모습을 찍은 사진과 클럽에서 난장판 파티를 벌이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다 ‘하버드대학교’라고 제목을 붙일 수 있겠지. 누가? 사진기자가. 캠퍼스 사진과 세미나 장면을 이어놓고 ‘하버드대학교’라고 제목을 단 것을 본 사람, 그리고 캠퍼스와 난장판 파티 장면을 이어놓고 ‘하버드대학교’라고 제목을 단 것을 본 사람이 있다 치자. 그들은 하버드 대학생에게 어떤 이미지를 가질까?

이처럼 부분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진기자의 주관에 따라서 보게 된 ‘이미지’를 ‘진실’이라고 믿게 되는 거야.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을 바꾸어보면 부분을 가지고 새로운 진실도 창조할 수 있는 것이지. 물론 이것이 언론에서 악용되면 안 되겠지만 예술에서는 또 다른 창조의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야.

영화도 마찬가지지.
명화를 볼 때에 우리는 작가의 생각과 사상을 그림을 통해서 수동적으로 보게 되지만 영화를 볼 때에는 우리가 만들지 않았지만 카메라의 앵글에 따라서 출연자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게 되는 거야. 도둑의 발걸음을 잡고 있는 앵글에서 우리는 도둑의 마음이 되고, 열쇠구멍으로 엿보는 장면에서 우리는 두근거림과 설레임을 갖게 되지.
수동적이지만 능동적이고 느끼는 역설. 명품을 감상하는 수동적 존재에서 수없는 카피지만 영화를 보는 대중들이 느낌을 공유하는 거야. 또 다른 아우라지. 

자.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지?
아우라의 상실이 탄식의 원인일 뿐인가를 이야기하는 거야.

󰁴 복제와 문화 민주화

복제는 藝術과 人間을 더욱 가깝게 한다?

현대에는 명작이 갖고 있는 아우라가 얼마든지 복제나 편집에 의해서 복제품도 ‘아우라’를 가질 수 있게 되었어. 오히려 예전에는 명작을 보기 위해서 루브르 박물관에 가야 했지만, 이제는 많은 다중이 그 곳에 가지 않고도 작품을 볼 수 있고, 네트워크를 통해서 전송할 수도 있는 시대가 된 거지. 아우라가 복제되고 있는 거야.

‘시뮬라크르’는 바로 모든 실재하는 것에 대한 복제물을 말하는 것이야. 디즈니랜드 같은 경우가 시뮬라크르의 완벽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지.

시뮬라크르의 극단

“디즈니랜드는 모든 종류의 얽히고설킨 시뮬라크르들의 완벽한 모델이다. 우선 환상과 공상의 유희이다. 해적, 국경선, 미래 세계 등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이 상상 세계가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군중을 끄는 것은 틀림없이 상상보다는 훨씬 더 이곳이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이다. 실제 미국사회가 가하는 통제 그리고 그 사회가 제공하는 기쁨을 축소시켜 경험하는 데에서 오는 근엄한 즐거움이다. 당신은 밖에다 주차를 한 다음 안에서 줄을 서며, 출구에서는 완전히 버림받는다. 이 상상 세계에서 유일한 환상은 군중의 본래의 부드러움과 열정이며 다양함에 대한 욕구를 유지하는 데 적합한 충분하고 과도한 양의 잡동사니이다. 진짜 집중의 장소인 주차장의 절대적인 고독과 이 세계와의 대비는 완전하다.

- 장 보드리야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