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ange"

제병진2009.08.03
조회216
"orange"

 


1.

 

푸우ㅡ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생각이나질 않았다. 요즘은 늘 이런 식이다. 

어제 저녁 즈음에 집에 돌아오다가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오늘 아침이 되서야 찝찝하게 괴롭히다니.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것 같은데. 

 

어제는. 

그녀와 술을 마셨다.  

 

"술 마시러 가자." 

"벌써?" 

오후 3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그녀가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옆 집에 사는데, 혼자는 뭐든 하기 싫어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말은 놔. 그냥 편하게 지내자구." 

2년전 이사 오던 날 부터 우리 집을 찾아와서는. '옆집사는데요.'라며 이틀에 한 번 꼴로 뭔가를-별로 쓸모 없는 것들이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빌려 달라고 했었다. 빌린 물건을 돌려줄 때는 고맙다며 항상 오렌지를 두 개씩 들고왔다. 그렇게 친해졌다. 나이는 26. 나보다 한 살 많다. 꼭 아이같이 제 멋대로인 사람이다.  

 

"나, 이제 그 일 관두기로 했어. 젠장." 

그녀는 담배를 물고 말했다. 

그녀는 별 인기 없는 한 월간지의 표지사진을 찍는 일을 하고있었다. 지난번 애인과 헤어진 후, 다른 남자와 함께 집에 오는 것을 자주 보았는데, 그가 그녀가 일하던 잡지사의 작가였나 그랬다. 그런데 그 남자와도 잘 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는 예쁘장한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알 수 없는 성격탓인지 헤어져도 금방 다른 남자가 생겼다.

'이제 또 다른 놈이 생기겠지 뭐.' 

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남의 사랑문제에 끼어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아무말 않고, 그녀가 하는 말에 "그래, 응" 이정도 대꾸만 하고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그 놈의 치부를 하나 둘 씩 알아가는 도중에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는 몸을 뒤로 젖혀 숨을 크게 마신 후에 전화기를 얼굴 정면에다 두고 소리쳤다. 

"다시는 전화 하지마, 이 개자식아!" 

그러고는 전화기 베터리를 빼 놓았다. 얼굴을 가리고 훅훅거리며 숨을 고르더니, 나를 보고는 금새 다시 웃는다. 

 

"휴우ㅡ" 

한 숨을 길게 내쉰다.  

"술이나 마시자."  

2병을 다마시고 소주 한 병을 더 열었다. 나도 이제 슬슬 얼굴이 뜨끈해져 오는게 느껴진다.  

"이제 난 그만." 

말의 4분의 1정도는 혀가 꼬인 발음으로 계속 얘기하던 그녀는 말을 멈추고 날 한참을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자기 잔에 술을 따른다. 

"아, 내가 따라줄께." 

술병을 받아 술을 따랐다. 그녀의 동작들이 커져간다. 잔을 아랫입술에 붙이더니 입을 벌리고 고개를 뒤로 휙 젖혔다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어느 정도 취한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마셔라."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빈 잔을 내민다. 그녀는 다시 잔을 아랫입술에 붙인다. 고개를 뒤로 젖힐까 하다 그냥 잔을 내려 놓았다. 

"집에갈래." 

 

우리는 술 집을 나와 집으로 걸었다.  

"나.." 

"응." 

"나... 나 오늘부터 니 여자친구 할까? 너 애인도 없으니까 잘됐지 않아? 이정도 여자라면 넌 얼씨쿠나 해야된다." 

"아.." 

뭐라고 말하기가.. 아니, 할 말이 없었다. 술 때문에 머리 속이 복잡하게 섞이는 것인지, 하얗게 되어가는 것인지도 헷갈렸다. 

그 뒤로 집 앞에 설 때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멍하니. 

"잘자." 

"응." 

그녀는 나에게 살짝쿵 뽀뽀를 해주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아. 이것이 이 여자가 남자를 유혹 하는 기술인가. 하고 술에 젖은 뇌로 생각했다. 나도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냥 잠들었다. 

 

일어나서 담배를 들고 창문을 열었다.  

 

아. 그녀랑 나는 그렇게 사귀게 된 것인지, 그냥 술 취해 없는 정신에 말해 놓고는 잊어버린 것인지. 그 일 때문이다. 그래, 그 일 때문에 이 아침부터 이렇게 찝찝한 기분이 담배 연기를 따라 폐 속으로, 머리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필터 바로 위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창 밖으로 멀리 튕겼다.  

 

 

2.

 

물이 없다. 목이 마른데 물이 없다. 시원한 깨끗한 생수가 마시고 싶은데, 집에 마실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물을 사러 나가려고 지갑을 찾는데, 지갑도 없다. 어디 있겠지. 침대말고는 전부 옷이랑 잡동사니들이 일부러 깔아놓은 것 같이 널부러져있다.  

'휴, 다녀와서 청소해야겠다.' 

잔돈이 조금 들어있는 저금통이 보여서 얼른 뜯어버렸다. 740원. 그걸 들고 편의점으로 갔다. 물. 물. 

 

편의점 옆에 과일노점상이 있었다. '맛있는 오렌지 하나에700원 6개 4000원'.노란 판자에 검은색 글씨로 쓰여있었다. 하나 먹을까 하다가, 쓰여있는 것 처럼 맛있어 보이지도 않고, 저 조그만한 오렌지 하나 먹는다고 갈증이 확 풀릴 것 같지않았다. 길에서 껍질을 까기도 귀찮고. 물을 한 병사서 벌컥벌컥 마시고 편의점을 나오는데,  

'4000원인데 사다줄까?'  

오렌지 좋아할 텐데. 아, 지갑을 놓고왔다. 그냥 지나쳤다.  

 

 

3.

 

딩동.딩동.

똑.똑.똑.

똑.똑.똑.

쾅.쾅.

 

"누구야?"

문이 열렸다.

그녀가 눈을 하나만 뜬 채로 문을 열었다.

"아. 미안해. 혹시, 내 지갑.."

"들어와."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간편한 복장으로, 자다가 막 일어난 것 같다. 다시 침대로 들어가 눕는다. 방 바닥엔 말라가는 오렌지 껍질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저기.. 혹시 내 지갑 못 봤어? 짙은 갈색인데.."

이불더미에서 손만 삐죽 튀어나와 가방을 가리킨다.

"가방."

"그럼, 실례."

그녀의 가방 안을 봤다. 있다.

내 지갑이 이 안에 있었다. 어제 무슨일이 있었는지 그녀의 가방안에 있었다. 먼저 지갑을 열었다. 2000원.

"어제 술 값, 내가 냈어?"

"응. 이제 나가봐. 나 더 잘래."

이런. 역시 그랬다니..

"근데 우리, 어제 얼마나 마신거야? 난 기억이 안나서."

"소주 백 병. 이제 나가봐."

"흐. 알았음. 잘자. 나 간다."

대답 하나하나가 귀찮음에 흠뻑 젖었다. 그래도 그렇지 백 병이라니.

가벼운 내 지갑을 들고 그녀의 집을 나왔다.

그런데 왜 내 지갑이 그 가방에 들어가서 그녀의 집으로 갔는지, 그 걸 물어봤어야 했는데. 흥.

 

아무튼 지갑을 찾았으니 다행이다. 그녀를 못 믿어서라기 보다는 혹시나 빠뜨린 것들이 있는지 지갑 안을 확인했다. 술 값을 내고 남은 돈 2000원, 신용카드 몇 장,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그리고 별 의미 없는 명함들. 다들 그대로 있었다.

다시 집으로 들어와 쓰러졌다.

 

 

4.

 

배가 꾸루룩.

오늘은 물 말고는 먹은게 없다. 속도 쓰리고, 그녀 말 대로라면 난 어제 소주 100병을 마신 몸이다. 흥. 아침 부터 지갑을 찾느라 방 청소도 하고, 난리법석을 떨었더니 배가 고프다. 밥을 할까, 라면을 끓여 먹을까 하다가. 쌀 씻기가 귀찮아서 냄비에 물을 받아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 불을 켰다.

"딩동"

그녀가 들어왔다.

"나도 배고파."

냄비에 물을 조금 더 받았다. 그녀는 내 침대 이불속으로 폭 들어가버린다.

 

"잘먹었습니다."

국물까지 깨끗이 비우고, 창가에 담배를 집어 물었다. 불을 붙이고 라이터는 침대에 던진다. 설겆이를 하고 있는데, 그녀가 말했다.

"우리 방 합치면 어때? 이 정도면 둘이 살기에도 충분히 넓은데."

"뭐?"

"방 새는 반반씩. 돈도 아끼고 좋잖아."

"여기서 살고 싶어?"

"응. 그러자. 그럼 나도 오늘부터 여기서 사는 거야. 짐은 다음 달에 방 뺄꺼니까, 그 때 옮기기로 하고. 걱정마. 카메라만 빼면 얼마 안돼."

"그럴까?"

"땡큐. 남자친구랑 동거!"

이 날 부터 그녀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5.

 

2인용 자전거 타기. "나 오렌지 1개만 사주세요." 옥상에서 맥주 마시기. 오렌지 쥬스 만들어 먹기. 커플 속옷 맞추기. 극장에서 손 잡고 영화 시작해서 끝날때까지 놓지 않기. 서로 발 껴안고 잠자기. "오렌지 3개만 사줘." 캬라멜 같은 키스. 뒷산 정상에서 아래까지 2인3족으로 달려 내려오기. 빨대 하나로 음료수 마시기. 담배 한 개비 나누어 피기. 집에서 음악 틀고 같이 댄스. "오렌지 먹자." 축구 비디오게임 같이하기. 쇼핑. 꼭 껴안고 번지 점프. 베게싸움. "오렌지 좀 사와." 같이 샤워하기.

그리고 섹스. 섹스.

 

 

6.

 

오렌지. 그녀는 오렌지를 정말 좋아한다.

그녀와 동거를 시작하고, 한달 안에 오렌지를 100개는 먹은 것 같다. 원래 오렌지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자꾸 먹다보니까 나도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집에가는 길에 전화가 온다.

"들어올 때, 오렌지 2개만 사와."

오늘도 어김 없이 오렌지다.

"오늘은 다른 거 먹자."

"싫어. 오렌지. 오렌지."

"야. 이제 물릴 때도 됐어."

"싫어. 무조건 오렌지."

"휴. 알았어."

과일가게에 들렀다. 오렌지를 고르다가. 키위가 보였다. 키위가 어떤 맛이더라.. 오렌지를 다시 봤다. 역시 키위가 더 맛있었던 것 같다. 키위 맛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응. 오늘은 키위를 사야지. 매일 오렌지였으니, 키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키위 6개 주세요."

 

"나 왔어."

"오렌지는?"

"키위로 샀어."

"야! 나 안먹어."

"그러지 말고. 키위도 맛있어. 내일은 오렌지 사올께."

"됐어. 안먹어. 키위는 너혼자 먹어."

 

 

7.

 

"왜 그래?"

소리를 지른다. 그녀가 내 집에 들어온지 벌써 두달이 지났다.

"너나 잘해."

처음 한 달은 괜찮았다. 그녀는 그 다음 달부터 일주일에 이삼일은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그런 날은 전화도 받지 않는다. 친구 집에 있었단다. 어제 밤에도 술 취한 그녀를 같은 잡지사의 동료라는 남자가 집에 데려다 줬었다.

"어제는 그냥 직장동료라고 했잖아."

"난 그 사람 오늘 처음봤어."

"그럼 앞으로 계속 만날꺼란 얘기야?"

"무슨 소리야. 너 왜그래?"

오늘 편의점에 물이랑 라면을 사오는 길에, 집 앞에서 아랫집에 오늘 이사 온 사람이라는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동네 비디오 가게 위치를 설명 해 주다가 어찌나 답답한지 5분을 설명해줘도 못 알아들어서 그녀를 데리고 비디오 가게에 다녀왔다. 그 때 위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야. 다 봤어!"

어떤 여자 이길래 그렇게 친절하게 길 안내를 해 주냐고. 그 때 부터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있다니.

 

이제는 말도 안하고, 리모컨으로 티비 소리를 최대로 올리기 시작한다.

"소리 좀 줄여."

그래도 티비 화면에 소리 막대는 점점 길어진다.

난 티비를 꺼 버렸다. 그녀는 리모컨으로 티비를 다시 켠다. 난 다시 끈다. 그녀는 다시 켠다. 나는 다시 끈다.

그녀가 리모컨을 이불 더미에 던지고, 밖으로 나갔다.

"야, 어디가?"

 

쾅.

 

알아서 풀고 들어오겠지.

나도 골치가 아파서 그냥 누워버렸다.

 

사막이었다. 낙타가 나타났다. 오아시스와 반대쪽으로 막 달려간다.

 

벌떡 일어났다. 깜깜하다. 잠들었나보다. 새벽 4시 26분. 그녀는 아직도 안들어왔다. 

열쇠는 가지고 나갔나. 현관문을 확인 해봤다. 열려있다. 그 때.

덜컹하고 문이 열렸다.

큰 트렁크를 들고 그녀가 나타났다.

"이제 왔어?"

아무말도 없다. 그녀의 옷을 그 트렁크에 담기 시작한다.

"나갈꺼야?"

아무말도 없다.

"우리 이렇게 헤어져?"

"응. 말시키지마. 너랑 나는 그냥 다른 종류야."

그런가봐. 다른 종류.

다시 쾅.

 

그녀는 나가버렸다.

이유를 모르겠다. 내가 미안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잘못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뇌가 오렌지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배가 고팠다. 햄버거가 먹고 싶어서 맥도날드로 뛰어갔다. 햄버거를 먹지 않으면 미쳐버려야 될 것만 같아서 막 뛰어갔다. 역시 문이 닫혀있다. 맥도날드 안은 깜깜했다. 문을 막 때렸다. 눈물이났다. 맥도날드는 열리지 않는다. 왜 울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머리 속 오렌지를 꽉 쥐어짰다. 그 과즙이 눈으로 흘러 나온다. 눈물이 그냥 나오는데, 흘려야 될 것 같아서 닦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편의점 앞에서 납작해진 오렌지 박스가 보였다. 그냥 가지고 집으로 왔다. 흙을 털고 벽에 붙였다.

난 이제 오렌지는 안 먹어야지.

 

 

 

 

 

-end-

 

 

written by jem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