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입니다. 체력적으로 몹시 빡센 요즘이군요. 몸보신이라도 좀 해야 하나.... 그래도 더위는 한결 수그러 들어서 밤엔 잘 잘 것 같습니다. ============================ 선풍기 내 사랑 ============================ 입원 후 4일이 지났다. 이젠 얼굴에 붓기도 많이 빠졌고, 옆구리에서 나오던 피도 스실스실 줄어들어 이젠 크게 걱정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은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지만, 그래도 이래저래 요령이 붙어서 많이 편해진 상태였다. 민아 - 오른쪽 다 됐다, 이제 왼쪽~. 기억 - 으차.... 민아 - 옳지~. 시원해? 기억 - 응. 일단 가장 크게 변한 건 나 혼자 몸을 틀 수 있게 되었다는 점. 민아나 한나에겐 거의 중노동이나 가깝던 일이 사라진 만큼 내 마음도 홀가분했다. 이제 어지간한 일은 한 사람만 곁에 있어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민아 - 저.... 기억아. 기억 - 응? 민아 - 이제... 이렇게 몸 닦고 하는 거... 한 사람만 도와줘도 될 것 같지? 이런 내 마음과 같았는지, 조심스레 말을 꺼내는 그녀. 난 민아가 계속 한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라 짐작하고 혼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 - 응, 뭐 이제 몸에 힘도 조금씩 돌아오고 있고.. 조만간 일어나 앉을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민아 - 그럼.... 저기.... 공연 끝날 때까지... 오후엔 한나랑 있으면 안 될까? 연습 끝나면 바로 뛰어올 테니까... 하지만 민아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예상 밖의 말이었다. 요는, 그녀는 한나에게 내 간병을 맡기고 연극부에 연습하러 가겠다는 건가? 아니지, 설마 그런 뜻이겠는가? 아무리 그녀가 내 심정을 모른다 한들.... 기억 - 무슨 소리야? 그게... 민아 - 어제 연출오빠한테 연락이 왔는데... 새로운 역할 배정도 끝났고 대본도 다시 수정되었데. 이제 공연까지 시간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나도 다시 참가를..... 기억 - 잠깐만, 그러니까, 나를 남겨두고, 연극 연습을 가겠다고? 민아 - 아까 기억이도 이제 한 사람만 도와줘도 될 것 같다고 했잖아. 그래서.... 기억 - 그거야 네가 있을 줄 알고 그런 거지! 한나가 내 여자친구야? 왜 한나가 여길 지키고 있어? 민아 - 어제 한나하고도 이야기 해봤는데..... 한나가 그렇게 해준다고.... 기억 - 됐어, 필요 없고, 힘들면 그냥 집에 가서 쉬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민아 -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연극 준비 때문에.... 기억 - 지난번에 말했잖아! 나 이렇게 만든 놈 안군이라고! 어차피 범인들만 잡히면 다 밝혀질 일이라 그냥 참고 있었더니 이젠 제 발로 그놈 입안으로 걸어 들어가겠... 켈록! 아악... 이런 염ㅂ..... 얼마나 화기가 치밀었는지 멈췄던 피가 왈칵 쏟아지면서 입에선 단 한번도 담아본 적 없는 욕설이 허리까지 튀어나왔다. 난 간신히 남은 욕을 속으로 삼키며 기분을 진정시켰지만, 이미 그녀의 눈은 화등잔만큼 커진 뒤였다. 기억 - 아무튼 절대 안 돼. 범인들 잡히고, 안군 그놈이랑 나란히 감방 간 뒤에는 가든 말든 마음대로 하고. 민아 - 난 아무리 생각해도... 한나야, 네 생각에도 안군오빠가 그런 것 같아? 다시 나에게 말대꾸를 하기가 겁이 났는지, 그녀는 구석에 얌전히 앉아있는 한나에게 질문을 돌렸다. 한나 - 저도.... 오빠 같은 상황이면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요. 민아 - 아니, 난 순수한 네 생각을 묻고.... 기억 - 그만해! 나 분명히 가지 말라고 했어, 가면 그날로 끝이야. 민아 - ....뭐? 끝이라니? 기억 - ....... 난 내심 속으로 철렁했지만 애써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잠시 무릎을 꽉 움켜지고 날 지켜보던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민아 - ...... 이내 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버리는 그녀. 가슴 안쪽에서 아릿한 아픔이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내가 너무 심한 걸까? 그녀가 병실 밖으로 나간 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한나가 내게 다가왔다. 한나 - 괜찮겠어요? 기억 - 안 괜찮아도 어쩔 수 없잖아. 양보할 일이 따로 있지. 한나 - 정말로..... 안군 오빠가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기억 - 그럼 누가 있는데? 지난 번 일도 그렇고 분명 계획적으로 누가 지시한 거야. 절대 자기들끼리 그런 게 아니라고. 한나 - ....... 기억 - 그리고.... 미안하지만 통 좀 받쳐줄래? 아까부터 급했는데... 솔직한 심정으로는 민아를 따라 나가고 싶었다. 좀 더 차분하게 그녀를 설득하고 싶었다. 하지만 실상으론 혼자 볼일도 못 봐서 한나의 도움을 받고 있다. 왜 내가 이런 처지가 되어버린 걸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게 다 안군 때문이다. 한나 - 정말 안 되겠어요? 언니한텐... 정말 중요한 일인데... 기억 - 아무리 그래도 안돼.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거길 보내? 한나 - 그럼.... 차근차근 부탁을 해봐요. 그렇게 화만 내지 말고... 기억 - ........ 알았어. 하지만, 그날 그녀는 병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다음날 아침 내가 눈을 떴을 때 머리맡에 메모 한 장이 놓여있었을 뿐... =미안해, 하지만 이번 공연을 위해 애써온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진 않아. 연습 끝나면 금방 달려올게. 언제나 기억이를 사랑하는 공주가= 뭐,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아무리 말려도 그녀는 연극연습을 하러 가게 되리란 걸.... 하지만 그게 이렇게 일방적인 방법이 될 줄은 몰랐다. 저녁 무렵, 병실을 찾아온 건 역시나 한나 혼자였다. 기억 - 민아는? 연습? 한나 - ...네. 기억 - ....... 등 좀 닦아 줄래? 혼자 나를 간호하는 내내 그녀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내가 무료하지 않을 정도만 말상대를 해주며 과일을 깎아주고, 땀에 전 팔다리를 닦아 줬을 뿐. 기억 - 민아는 네가 뭔 잘못을 했다고 이런 일을 맡긴다니? 한나 - 잘못이야 했죠, 그 때 저만 없었어도.... 기억 - 그런 이야기는 말자. 그전에 내가 네 이야기를 한 게 실수였어. 한나 - 아녜요, 제가 괜히 불꽃놀이 가자고 한 것 때문에... 기억 - 에휴, 그것도 내가 쓸데없는 부탁을 한 탓에 그런 거잖아. 다 내가 자초한 일이지 뭐.... 한나 - 아뇨, 그 전에 제가.... 기억 - 그만 그만 그만~.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거야? 지금 이런 이야기 해봤자 바뀌는 것도 없고, 진짜 잘못한 놈은 따로 있는데 우리끼리 잘잘못 따질 이유가 없잖아.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난 잠시 동안 민아의 일에 대해 고민했다. 난 과연 그녀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프로세스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난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나? 어차피 연극과 나는 사용하는 주파수 대역이 다른 am, fm 같은 관계일 수 있으니.... 하지만 건 내가 아무 이유 없이 그녀를 막은 것도 아니고, 다 그녀의 안부가 걱정돼서 한 일인데, 내 말은 믿을 생각도 않고 늘 안군만 두둔하고 나선 데다 끝끝내 한나만 내 곁에 남겨둔 채 연습실로 가버리고..... 분명 문제를 제기해 마땅한 일이다. 분명 가면 끝이라고 까지 이야기 했는데.... 그녀는 내 말을 우습게 생각한 걸까? 갑자기 서글픈 기분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왜 이럴까. 몸이 이렇게 되니 마음까지 약해진 걸까? 한나 - ... 오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요? 기억 - 큼, 아, 아냐, 아무것도.. 지금 몇시지? 한나 - ..... 8시 40분이요. 조금 있으면 언니 오겠네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를..... 난.... 대체..... 기억 - ..... 한나야. 한나 - 네. 기억 - 문...... 잠가버려.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한나 - ..... 예? 기억 - 잠그라고!! 빨리!! 주춤주춤 행동을 망설이던 그녀는 내가 버럭 역정을 내자 마지못해 병실 문을 잠그고 돌아왔다. 이번 한 번만은..... 내 고집을 부릴 거다. 절대로 굽히지 않고 내 의견을 관철시킬 거다. =철컥. 철컥 철컥.=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누군가 문을 열기 위해 애쓰는 소리가 들렸다. 민아 - 어? 기억아~. 기억아, 안에 있어? 기억아~. 한나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찾는 그녀. 점점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한 압박감이 나를 괴롭혔지만, 문을 열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나 - 오, 오빠.... 안 열어 줄 거예요? 기억 - 내버려 둬. 이번은 절대 양보 못해. =쿵쿵쿵= 민아 - 기억아~ 기억아, 안에 없어? 안에서 아무 응답이 없자 민아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두드림이 가슴에 와 닿은 것인지, 정말 진동 때문에 상처가 울리는 것인지 몰라도 옆구리에 난 상처가 욱신하게 아파왔다. 결국 견디다 못한 난 밖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기억 - 그래! 있다! 민아 - ..... 어? 기억아, 무, 문이 잠겼어! 옆에 한나 없어? 기억 - 일부러 잠근 거야! 이제 올 필요 없으니까 오지 말라고! 민아 - 무, 무슨 소리야, 그게? 한나야! 너 옆에 있지! 빨리 문 안 열어? 기억 - 한나 없어! 내가 잠근 거야! 민아 -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한나 너 정말 이럴 거야? 빨리 문 열어! 기억 - 왜 말이 안 돼! 사람 반병신 되니까 그것도 못할 것 같았어? 이제 혼자 잘~먹고 잘 살 수 있으니까 가서 연극 연습이나 실컷 해!! 민아 - 기.... 기억아, 너 갑자기 왜 그래? 어서 문 열어줘~. 기억 - 갑자기라니? 분명 이야기 했잖아! 가면 끝이라고! 민아 - 그, 그런 게 어디 있어! 기억아, 이러지 마, 우리 다시 이야기를... 기억 - 됐으니까! 가!! 가라고!!! 가....아아아악...아악.... 쿨룩! 아악.... 아무래도 무리를 한 것인지, 거친 기침과 함께 튜브 끝에서 피가 츄르륵- 하고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흘러나왔다. 난 몸을 웅크리며 통증을 참으려 했지만 극대값에서 f'(x)=0 으로 변해버린 통증곡선은 내려올 줄 몰랐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만 조금씩 그 통증을 덜어주는 듯 했다. 민아 - 기억아, 괜찮아? 빨리 문 열어봐~! 한나 너 옆에 있잖아! 문 열어!! 빨리 문 열어~!! 한나 - 오, 오빠 괜찮아요? 무.. 문 열어 줄게요.... 기억 - 열지 마! 정말 사람 죽는 꼴 보기 싫으면..... 으흐으윽.... 수십 개의 송곳이 가슴 속에 박혀있는 것 같았다. 심장이 발랑거릴 때마다 그 표면을 찔러서 핏방울을 맺히게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만은 굽힐 수 없었다. 이번만은 절대로.... 민아 - 한나 너 정말 혼날래?! 너까지 이러기야! 한나 - 어, 언니 미안해! 그치만 오빠가...!! 민아 - 너 거기 꼼짝 말고 있어! 금방 열쇠 가져다가.... 기억 - 이미 끝났다는 데 애꿎은 한나한테 왜 그래?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민아 - 흑...... 기억아.... 정말 왜 그래.... 왜.....! 기억 - .....너....너야말로.... 왜 그랬어....! 내가...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난 이불을 악물고 울음소리가 새는 걸 참았다. 이번 한 번만 독해지자.... 이번 한 번만.....!! 민아가 병실 앞을 떠난 건 밤 11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그 사이 병원관계자며 경비며 수많은 사람이 병실 안으로 들어오려 했지만, 난 그때마다 농성하는 철거민처럼 배수진을 치고 그들의 진입을 막았다. 결국 남은 것은 나와 한나 뿐. 기억 - 이제 들어가 봐.... 한나야. 한나 - .... 농담해요? 그 난리를 치고 어딜 들어가요? 언니한테 죽으라고요? 기억 - ........ 그... 그런가? 한나 - 어떻게 할 거예요! 책임져요!! 민아와 내가 싸우는 사이에 끼어 오도 가도 못하고 된서리를 맞은 그녀는 우느라 퉁퉁 부은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빽 고함을 질렀다. 기억 - 사건 경위서라도 써줄까? 다 내가 시킨 거라고... 한나 - 지금 그런 게 통할 것 같아요? 기억 - 그럼....어쩌지? 한나 - 몰라요,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 테니까, 그런 줄 알아요. 기억 - ....... 아..... 알았어. 끊임없이 불만을 툴툴거리며 내 침대 옆에 이부자리를 펴는 그녀. 이거 정말 그녀에겐 미안한 일을 시킨 것 같다. 1
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3-30화> 배수진
월요일입니다.
체력적으로 몹시 빡센 요즘이군요.
몸보신이라도 좀 해야 하나....
그래도 더위는 한결 수그러 들어서
밤엔 잘 잘 것 같습니다.
============================ 선풍기 내 사랑 ============================
입원 후 4일이 지났다.
이젠 얼굴에 붓기도 많이 빠졌고,
옆구리에서 나오던 피도 스실스실 줄어들어
이젠 크게 걱정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은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지만,
그래도 이래저래 요령이 붙어서 많이 편해진 상태였다.
민아 - 오른쪽 다 됐다, 이제 왼쪽~.
기억 - 으차....
민아 - 옳지~. 시원해?
기억 - 응.
일단 가장 크게 변한 건
나 혼자 몸을 틀 수 있게 되었다는 점.
민아나 한나에겐 거의 중노동이나 가깝던 일이 사라진 만큼
내 마음도 홀가분했다.
이제 어지간한 일은 한 사람만 곁에 있어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민아 - 저.... 기억아.
기억 - 응?
민아
- 이제... 이렇게 몸 닦고 하는 거...
한 사람만 도와줘도 될 것 같지?
이런 내 마음과 같았는지,
조심스레 말을 꺼내는 그녀.
난 민아가 계속 한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라 짐작하고
혼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
- 응, 뭐 이제 몸에 힘도 조금씩 돌아오고 있고..
조만간 일어나 앉을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민아
- 그럼.... 저기.... 공연 끝날 때까지...
오후엔 한나랑 있으면 안 될까?
연습 끝나면 바로 뛰어올 테니까...
하지만 민아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예상 밖의 말이었다.
요는, 그녀는 한나에게 내 간병을 맡기고
연극부에 연습하러 가겠다는 건가?
아니지, 설마 그런 뜻이겠는가?
아무리 그녀가 내 심정을 모른다 한들....
기억 - 무슨 소리야? 그게...
민아
- 어제 연출오빠한테 연락이 왔는데...
새로운 역할 배정도 끝났고 대본도 다시 수정되었데.
이제 공연까지 시간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나도 다시 참가를.....
기억 - 잠깐만, 그러니까, 나를 남겨두고, 연극 연습을 가겠다고?
민아
- 아까 기억이도 이제 한 사람만 도와줘도
될 것 같다고 했잖아. 그래서....
기억
- 그거야 네가 있을 줄 알고 그런 거지!
한나가 내 여자친구야?
왜 한나가 여길 지키고 있어?
민아
- 어제 한나하고도 이야기 해봤는데.....
한나가 그렇게 해준다고....
기억
- 됐어, 필요 없고, 힘들면 그냥 집에 가서 쉬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민아 -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연극 준비 때문에....
기억
- 지난번에 말했잖아! 나 이렇게 만든 놈 안군이라고!
어차피 범인들만 잡히면
다 밝혀질 일이라 그냥 참고 있었더니
이젠 제 발로 그놈 입안으로 걸어 들어가겠...
켈록! 아악... 이런 염ㅂ.....
얼마나 화기가 치밀었는지 멈췄던 피가 왈칵 쏟아지면서
입에선 단 한번도 담아본 적 없는 욕설이 허리까지 튀어나왔다.
난 간신히 남은 욕을 속으로 삼키며 기분을 진정시켰지만,
이미 그녀의 눈은 화등잔만큼 커진 뒤였다.
기억
- 아무튼 절대 안 돼. 범인들 잡히고,
안군 그놈이랑 나란히 감방 간 뒤에는
가든 말든 마음대로 하고.
민아
- 난 아무리 생각해도... 한나야,
네 생각에도 안군오빠가 그런 것 같아?
다시 나에게 말대꾸를 하기가 겁이 났는지,
그녀는 구석에 얌전히 앉아있는 한나에게 질문을 돌렸다.
한나 - 저도.... 오빠 같은 상황이면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요.
민아 - 아니, 난 순수한 네 생각을 묻고....
기억 - 그만해! 나 분명히 가지 말라고 했어, 가면 그날로 끝이야.
민아 - ....뭐? 끝이라니?
기억 - .......
난 내심 속으로 철렁했지만 애써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잠시 무릎을 꽉 움켜지고 날 지켜보던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민아 - ......
이내 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버리는 그녀.
가슴 안쪽에서 아릿한 아픔이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내가 너무 심한 걸까?
그녀가 병실 밖으로 나간 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한나가 내게 다가왔다.
한나 - 괜찮겠어요?
기억 - 안 괜찮아도 어쩔 수 없잖아. 양보할 일이 따로 있지.
한나 - 정말로..... 안군 오빠가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기억
- 그럼 누가 있는데?
지난 번 일도 그렇고 분명 계획적으로 누가 지시한 거야.
절대 자기들끼리 그런 게 아니라고.
한나 - .......
기억 - 그리고.... 미안하지만 통 좀 받쳐줄래? 아까부터 급했는데...
솔직한 심정으로는 민아를 따라 나가고 싶었다.
좀 더 차분하게 그녀를 설득하고 싶었다.
하지만 실상으론 혼자 볼일도 못 봐서 한나의 도움을 받고 있다.
왜 내가 이런 처지가 되어버린 걸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게 다 안군 때문이다.
한나 - 정말 안 되겠어요? 언니한텐... 정말 중요한 일인데...
기억 - 아무리 그래도 안돼.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거길 보내?
한나 - 그럼.... 차근차근 부탁을 해봐요. 그렇게 화만 내지 말고...
기억 - ........ 알았어.
하지만, 그날 그녀는 병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다음날 아침 내가 눈을 떴을 때
머리맡에 메모 한 장이 놓여있었을 뿐...
=미안해, 하지만 이번 공연을 위해 애써온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진 않아.
연습 끝나면 금방 달려올게.
언제나 기억이를 사랑하는 공주가=
뭐,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아무리 말려도 그녀는 연극연습을 하러 가게 되리란 걸....
하지만 그게 이렇게 일방적인 방법이 될 줄은 몰랐다.
저녁 무렵, 병실을 찾아온 건 역시나 한나 혼자였다.
기억 - 민아는? 연습?
한나 - ...네.
기억 - ....... 등 좀 닦아 줄래?
혼자 나를 간호하는 내내 그녀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내가 무료하지 않을 정도만 말상대를 해주며
과일을 깎아주고, 땀에 전 팔다리를 닦아 줬을 뿐.
기억 - 민아는 네가 뭔 잘못을 했다고 이런 일을 맡긴다니?
한나 - 잘못이야 했죠, 그 때 저만 없었어도....
기억 - 그런 이야기는 말자. 그전에 내가 네 이야기를 한 게 실수였어.
한나 - 아녜요, 제가 괜히 불꽃놀이 가자고 한 것 때문에...
기억
- 에휴, 그것도 내가 쓸데없는 부탁을 한 탓에 그런 거잖아.
다 내가 자초한 일이지 뭐....
한나 - 아뇨, 그 전에 제가....
기억
- 그만 그만 그만~.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거야?
지금 이런 이야기 해봤자 바뀌는 것도 없고,
진짜 잘못한 놈은 따로 있는데
우리끼리 잘잘못 따질 이유가 없잖아.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난
잠시 동안 민아의 일에 대해 고민했다.
난 과연 그녀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프로세스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난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나?
어차피 연극과 나는 사용하는 주파수 대역이 다른
am, fm 같은 관계일 수 있으니....
하지만 건 내가 아무 이유 없이 그녀를 막은 것도 아니고,
다 그녀의 안부가 걱정돼서 한 일인데,
내 말은 믿을 생각도 않고 늘 안군만 두둔하고 나선 데다
끝끝내 한나만 내 곁에 남겨둔 채 연습실로 가버리고.....
분명 문제를 제기해 마땅한 일이다.
분명 가면 끝이라고 까지 이야기 했는데....
그녀는 내 말을 우습게 생각한 걸까?
갑자기 서글픈 기분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왜 이럴까. 몸이 이렇게 되니 마음까지 약해진 걸까?
한나 - ... 오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요?
기억 - 큼, 아, 아냐, 아무것도.. 지금 몇시지?
한나 - ..... 8시 40분이요. 조금 있으면 언니 오겠네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를..... 난.... 대체.....
기억 - ..... 한나야.
한나 - 네.
기억 - 문...... 잠가버려.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한나 - ..... 예?
기억 - 잠그라고!! 빨리!!
주춤주춤 행동을 망설이던 그녀는
내가 버럭 역정을 내자 마지못해 병실 문을 잠그고 돌아왔다.
이번 한 번만은..... 내 고집을 부릴 거다.
절대로 굽히지 않고 내 의견을 관철시킬 거다.
=철컥. 철컥 철컥.=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누군가 문을 열기 위해 애쓰는 소리가 들렸다.
민아 - 어? 기억아~. 기억아, 안에 있어? 기억아~. 한나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찾는 그녀.
점점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한 압박감이 나를 괴롭혔지만,
문을 열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나 - 오, 오빠.... 안 열어 줄 거예요?
기억 - 내버려 둬. 이번은 절대 양보 못해.
=쿵쿵쿵=
민아 - 기억아~ 기억아, 안에 없어?
안에서 아무 응답이 없자 민아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두드림이 가슴에 와 닿은 것인지,
정말 진동 때문에 상처가 울리는 것인지 몰라도
옆구리에 난 상처가 욱신하게 아파왔다.
결국 견디다 못한 난 밖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기억 - 그래! 있다!
민아 - ..... 어? 기억아, 무, 문이 잠겼어! 옆에 한나 없어?
기억 - 일부러 잠근 거야! 이제 올 필요 없으니까 오지 말라고!
민아 - 무, 무슨 소리야, 그게? 한나야! 너 옆에 있지! 빨리 문 안 열어?
기억 - 한나 없어! 내가 잠근 거야!
민아 -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한나 너 정말 이럴 거야? 빨리 문 열어!
기억
- 왜 말이 안 돼! 사람 반병신 되니까 그것도 못할 것 같았어?
이제 혼자 잘~먹고 잘 살 수 있으니까 가서 연극 연습이나 실컷 해!!
민아 - 기.... 기억아, 너 갑자기 왜 그래? 어서 문 열어줘~.
기억 - 갑자기라니? 분명 이야기 했잖아! 가면 끝이라고!
민아 - 그, 그런 게 어디 있어! 기억아, 이러지 마, 우리 다시 이야기를...
기억 - 됐으니까! 가!! 가라고!!! 가....아아아악...아악.... 쿨룩! 아악....
아무래도 무리를 한 것인지,
거친 기침과 함께 튜브 끝에서
피가 츄르륵- 하고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흘러나왔다.
난 몸을 웅크리며 통증을 참으려 했지만
극대값에서 f'(x)=0 으로 변해버린 통증곡선은 내려올 줄 몰랐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만 조금씩 그 통증을 덜어주는 듯 했다.
민아
- 기억아, 괜찮아? 빨리 문 열어봐~!
한나 너 옆에 있잖아! 문 열어!! 빨리 문 열어~!!
한나 - 오, 오빠 괜찮아요? 무.. 문 열어 줄게요....
기억 - 열지 마! 정말 사람 죽는 꼴 보기 싫으면..... 으흐으윽....
수십 개의 송곳이 가슴 속에 박혀있는 것 같았다.
심장이 발랑거릴 때마다 그 표면을 찔러서
핏방울을 맺히게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만은 굽힐 수 없었다. 이번만은 절대로....
민아 - 한나 너 정말 혼날래?! 너까지 이러기야!
한나 - 어, 언니 미안해! 그치만 오빠가...!!
민아 - 너 거기 꼼짝 말고 있어! 금방 열쇠 가져다가....
기억
- 이미 끝났다는 데 애꿎은 한나한테 왜 그래?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민아 - 흑...... 기억아.... 정말 왜 그래.... 왜.....!
기억 - .....너....너야말로.... 왜 그랬어....! 내가...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난 이불을 악물고 울음소리가 새는 걸 참았다.
이번 한 번만 독해지자.... 이번 한 번만.....!!
민아가 병실 앞을 떠난 건 밤 11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그 사이 병원관계자며 경비며
수많은 사람이 병실 안으로 들어오려 했지만,
난 그때마다 농성하는 철거민처럼
배수진을 치고 그들의 진입을 막았다.
결국 남은 것은 나와 한나 뿐.
기억 - 이제 들어가 봐.... 한나야.
한나 - .... 농담해요? 그 난리를 치고 어딜 들어가요? 언니한테 죽으라고요?
기억 - ........ 그... 그런가?
한나 - 어떻게 할 거예요! 책임져요!!
민아와 내가 싸우는 사이에 끼어
오도 가도 못하고 된서리를 맞은 그녀는
우느라 퉁퉁 부은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빽 고함을 질렀다.
기억 - 사건 경위서라도 써줄까? 다 내가 시킨 거라고...
한나 - 지금 그런 게 통할 것 같아요?
기억 - 그럼....어쩌지?
한나 - 몰라요,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 테니까, 그런 줄 알아요.
기억 - ....... 아..... 알았어.
끊임없이 불만을 툴툴거리며 내 침대 옆에 이부자리를 펴는 그녀.
이거 정말 그녀에겐 미안한 일을 시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