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의 설날은 좀 싱거운편이다. 갈 고향도 없고 찾아 뵐 친척도 별로없다. 그나마 장가를 가니 처가라는 가족이 늘었지만 어릴적에는 인사할 친척이 적어 동네 어른이라도 찾아 세배를 드려야 간신이 세배돈 목표액수를 채울수가 있었다. 울 아버지는 외 아들이시다. 밑으로 고모 한분이 계시지만 옛날분이라는걸 감안 하면 형제가 없으신 편이다. 아버지는6.25 전쟁중에 군인이셨다. 장교가 아닌 그냥 하사관이라고 하셨다. 전쟁이 나고 우리군대가 9.28 서울 수복후 북진에 북진을 거듭하다가 드디어 아버지가 계신 부대가 평양까지에 이르렀을때 당시 평양의 방귀께나 뀌고 사셨다는 우리 외가에 들리시게 됬고 공산치하에서 시달리던 외가에서는 군인들을 극진이 도와 주셨다고 한다. 그런 외가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아버지는 그집 둘째딸인 우리 어머님을 꼬셨고 -어머님 증언으로는 아버지집이 남한 갑부라 했단다.- 외가에서는 서둘러 후퇴하는 아버지에게 딸을 맡기셨고 곧 다시 만날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아버지를 따라나서신 어머니는 그길로 외가와는 영영 이별이 됬다. 그전쟁중에 어머니를 데리고 후퇴하는 아버지는 6.25가 낳은 최고의 로맨티스트였다. 그 총탄과 포탄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어머니를 사랑하셨고 중공군이 개입된 1951년 전쟁중에 형을 만드셨으니 얼마나 대단하신 분이신가. 그런데 그 담대함과 지극한 여성사랑의 마음이 오늘 유독 나에게만 전해 내려와 나 지금도 여자라면 정신 못차린다. 하여간 아버지의 그런 로맨스로 인하여 우린 외가 마저 없다. 어느정도 우리들이 성장했을때 외가를 찾기로 했고 KBS이산가족찾기,이북 5도청을 뒤지기 등등의 노력끝에 작은 이모를 찿았는데 이모마저 가까이 사시니 명절에 하루면 다 돈다 모든 일가 친척을.... 하여간 우리 아버지 그렇게 해서 어머니를 꼬셔 내려오는데 까지는 성공 하셨지만 전쟁 끝났고 귀향은 해야 했는데 그동안 어마니에게 한 거짓말때문에 귀향을 차일피일 미루며 경남 밀양에 계셨단다. 할머님은 휴전후에도 안오는 외아들 걱정에 밀양으로 고모를 보내셨고 그통에 모든것이 드러나 수원으로 올라오긴 하셨지만 하여간 무지 오랜세월 어머니는 그때의 일을 단골 메뉴에 올리시며 부부싸움때 최후의 보검으로 사용하셨고. 아버지는 "과거는 흘러갔다"만 연신부르시는데 이쯤되면 싸움은 아버지의 판정패로 끝나는거다. 수원으로 오실때 어머니는 나를 갖고 계셨는데 나만 없었으면 도망가고 싶었단다.-무서운 할머니때문에- 난 밀양에서 제조되서 수원에서 출고한 셈인데 그래도 고향이 수원이 맞나? 아버지는 내가 군대가던 해에 돌아가셨다. 평소 호탕하고 술과 노래를 즐기시던 아버지는 유원지에 놀러 가셨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돌아 가셨다. 지금도 우리 집안에서는 고혈압이 가장 무서운 병인줄로 알고 있는데. 형제중 내가 음주가무를 즐긴다.울 마눌 항상 걱정이다.(갈꺼면 나 나이 더 먹기전 가야하는디) 아버지는 삼형제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셨다. 머리는 형, 음주가무는 나,허풍은 동생. 내가 나이가 들고 애들이 커갈수록 보고싶어지는 날들이 많아진다. 특히 명절에는 아버지의 노래소리가 더욱더 그립다.11
울 아버지
우리 가족의 설날은 좀 싱거운편이다.
갈 고향도 없고 찾아 뵐 친척도 별로없다.
그나마 장가를 가니 처가라는 가족이 늘었지만 어릴적에는 인사할 친척이 적어
동네 어른이라도 찾아 세배를 드려야 간신이 세배돈 목표액수를 채울수가 있었다.
울 아버지는 외 아들이시다.
밑으로 고모 한분이 계시지만 옛날분이라는걸 감안 하면 형제가 없으신 편이다.
아버지는6.25 전쟁중에 군인이셨다.
장교가 아닌 그냥 하사관이라고 하셨다.
전쟁이 나고 우리군대가 9.28 서울 수복후 북진에 북진을 거듭하다가
드디어 아버지가 계신 부대가 평양까지에 이르렀을때
당시 평양의 방귀께나 뀌고 사셨다는 우리 외가에 들리시게 됬고
공산치하에서 시달리던 외가에서는 군인들을 극진이 도와 주셨다고 한다.
그런 외가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아버지는 그집 둘째딸인 우리 어머님을 꼬셨고
-어머님 증언으로는 아버지집이 남한 갑부라 했단다.-
외가에서는 서둘러 후퇴하는 아버지에게 딸을 맡기셨고
곧 다시 만날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아버지를 따라나서신 어머니는
그길로 외가와는 영영 이별이 됬다.
그전쟁중에 어머니를 데리고 후퇴하는 아버지는 6.25가 낳은 최고의 로맨티스트였다.
그 총탄과 포탄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어머니를 사랑하셨고
중공군이 개입된 1951년 전쟁중에 형을 만드셨으니 얼마나 대단하신 분이신가.
그런데 그 담대함과 지극한 여성사랑의 마음이 오늘 유독 나에게만 전해 내려와
나 지금도 여자라면 정신 못차린다.
하여간 아버지의 그런 로맨스로 인하여 우린 외가 마저 없다.
어느정도 우리들이 성장했을때 외가를 찾기로 했고
KBS이산가족찾기,이북 5도청을 뒤지기 등등의 노력끝에 작은 이모를 찿았는데
이모마저 가까이 사시니 명절에 하루면 다 돈다 모든 일가 친척을....
하여간 우리 아버지 그렇게 해서 어머니를 꼬셔 내려오는데 까지는 성공 하셨지만
전쟁 끝났고 귀향은 해야 했는데 그동안 어마니에게 한 거짓말때문에 귀향을 차일피일 미루며
경남 밀양에 계셨단다. 할머님은 휴전후에도 안오는 외아들 걱정에 밀양으로 고모를 보내셨고
그통에 모든것이 드러나 수원으로 올라오긴 하셨지만 하여간 무지 오랜세월
어머니는 그때의 일을 단골 메뉴에 올리시며 부부싸움때 최후의 보검으로 사용하셨고.
아버지는 "과거는 흘러갔다"만 연신부르시는데 이쯤되면 싸움은 아버지의 판정패로 끝나는거다.
수원으로 오실때 어머니는 나를 갖고 계셨는데 나만 없었으면 도망가고 싶었단다.-무서운 할머니때문에-
난 밀양에서 제조되서 수원에서 출고한 셈인데 그래도 고향이 수원이 맞나?
아버지는 내가 군대가던 해에 돌아가셨다.
평소 호탕하고 술과 노래를 즐기시던 아버지는 유원지에 놀러 가셨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돌아 가셨다.
지금도 우리 집안에서는 고혈압이 가장 무서운 병인줄로 알고 있는데.
형제중 내가 음주가무를 즐긴다.울 마눌 항상 걱정이다.(갈꺼면 나 나이 더 먹기전 가야하는디)
아버지는 삼형제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셨다.
머리는 형, 음주가무는 나,허풍은 동생.
내가 나이가 들고 애들이 커갈수록 보고싶어지는 날들이 많아진다.
특히 명절에는 아버지의 노래소리가 더욱더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