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입니다.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고 계신지... 밤 사이 내린 비에 주변이 시원해서 참 기분이 좋습니다. 조금 있다가 산책이라도 나갔다 오고 싶군요. ================== 땀띠야 가라 =========================== 일단 한 번만 고비를 넘기면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나. 하지만 그날 이후 민아는 병실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설마.. 정말 이렇게 끝나버리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덜컥 겁부터 났다. 이 일을 대체 어찌한단 말인가? 역시 내가 너무 오버한 건가? 하지만 한편으론, 그 상황에서도 연습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가 괘씸했다. 그녀에게 연극이 중요한 일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한 번 정도는 접을 수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한참을 이 문제로 고심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손을 놓아 버렸다. 시간이 약이라고.... 공연이 끝나는 게 먼저일지, 범인들이 잡히는 게 먼저일진 몰라도 둘 중 하나만 해결 되도 만사형통일 것이다. 일단 지금 제일 급한 문제는.... 기억 - 오늘은 어떻게 할 거야? 한나 - 몰라요, 다 오빠 때문이야. 기억 - ....... 또 여기서 자려고? 한나 - 그럼 어떡해요! 당장 길바닥에서 자는 수밖에 없는데! 민아와 나의 혈전 이후 하루아침에 갈 곳 잃은 어린 새가 되어버린 한나. 난 급한 데로 근처 친구 집이나 기숙사에라도 몸을 맡기길 권했지만, 그녀는 일일이 사정 설명하가며 남에게 빌붙기는 싫다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게다가 오늘 오전엔 민아가 집을 비운 틈을 타 옷부터 게임기까지 살림 일체를 챙겨다 내 병실에 자리를 잡은 걸보면, 아무래도 이곳에서 장기투숙하기로 마음을 굳힌 듯하다. 기억 - 그러다 민아 오면 뭐라고 하려고? 한나 - 그땐 오빠 말대로 사정 설명 해야죠. 시말서를 쓰든, 사건 경위서를 쓰든... 일단 그녀가 이런 처지가 된 데는 내 잘못이 제일 컸던 만큼, 그녀의 행동을 뭐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날 밤, 한나는 다른 병실에서 매트리스까지 가져다가 침대 밑에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병실에 불이 모두 꺼지고 링거에서 떨어지는 약물 소리만 시계 초침소리처럼 들려오는 가운데, 난 한참동안 잠을 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새벽녘이 다돼서야 설핏 잠이 들었다. .......... = 죽어! 죽어 이 새끼야! = = 완전히 조져버려! = 의식이 몸으로부터 멀어졌다고 느낀 순간, 갑작스러운 악몽들이 나를 덮쳐왔다. 사방으로부터 쏟아지는 발길질, 뼈와 딱딱한 무언가가 부딪히는 느낌, 사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들이 생생히 살아났다. = 또 날뛰어 봐! 뛰어보라고 인마! = 꿈이라는 건 인식할 수 있었지만 눈은 떠지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소리라도 지르려 했지만 목을 꽉 죄고 있는 무언가로 인해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 야, 야, 더 까불어 보라니까? = 도와줘.... 누가... 좀.... 누가.... 누가 날 좀 도와줘.... = 야, 비켜봐. 다다다... 빠샤! = 도와줘!!!!!!! 기억 - ........!! =따닥따다다닥따다닥따닥.....= 마지막 순간, 전기에 감전 된 듯 몸을 떨며 잠에서 깨어난 나. 떨리는 턱 때문에 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등에서 흥건하게 베어 나오는 식은땀과 엉망으로 헝클어져버린 이부자리가 그간 내 몸부림을 짐작케 했다. 울음이라도 나올 만큼 무서웠다. 어두운 방안 어디선가 녀석들이 다시 뛰어나올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느껴진 냉기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주섬 주섬 주변의 이불을 끌어다 몸을 덮던 난 결국 한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기억 - 한나야...... 한...한나야.... 한나 - ......에....예? 무슨 일이세요? 기억 - 부...불 좀 켜줘..... 불.... 아직도 턱이 덜덜 떨리는 탓에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내 목소리에서 이상을 느낀 그녀는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불을 켜주었다. 한나 - 꺅! 오빠, 무슨 땀을 그렇게 흘려요? 기억 - 아...악, 악몽을 꿨어. 악몽.... 굳이 그녀의 표정을 살피지 않아도 지금 내 몰골이 얼마나 엉망일지는 대충 감이 왔기에 난 애써 내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도움이었다. 그것이 동정이건 무엇이건 상관없었다. 한나 - ......... 내 말을 들은 그녀는 몹시도 서글픈 얼굴로 내 머리를 감싸 안아 주었다. 깁스 안 구석구석까지 소름이 돋아있던 피부에 따듯한 온기가 전해지자 한 결 마음이 놓이는 게 느껴졌다. 기억 - 흑.... 한나야...... 흑흑..... 조금씩 떨림이 잦아들면서 그 부산물 같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창피할 것도 쪽팔릴 것도 없었다. 단지 그녀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고마웠고, 안심이 되었다. 난 분명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처지였고, 내 곁에 있는 건 한나밖에 없었다. =짹짹짹= 언제 다시 잠이 들었는지는 몰라도,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다.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느낀 점은 베게의 촉감이 예전과는 많이 바뀌었다는 것. 아직 몸을 일으킬 수 없었던 난 고개를 돌려 내 머리맡에 베어져 있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다. 그리고 곧장 한나의 막강한 바스트와 조우하게 되었다. 기억 - ........ 내 머리 위쪽에 몸을 뉘인 채 조금 구부정한 자세로 잠이 들어 있는 그녀. 아마 어제 밤 소동이 끝난 뒤 그대로 잠이 들어 버린 것 같다.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던 내 오른팔은 그녀의 허리 밑에 들어가 있었고, 고개는 그녀가 두 팔로 감싸고 있었기에 실상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 그런대로 가만있으면 될 일이지만 문제는 지금 자세가 여러모로 부담스럽다는 점. 특히나 가슴계곡이 정면으로 보이는 이 상황만큼은 올바른 정신건강을 위해 반드시 타개해야했다. 한나 - 음..... 그때, 그녀가 옅은 신음을 내며 내 고개를 그녀 쪽으로 끌어 당겼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내 얼굴은 그녀의 가슴 사이에 묻혀버렸다. 기억 - ......... 거대한 케이크에 얼굴을 파묻은 듯한 촉감은 결코 나쁘지 않았지만... 치명적으로 숨을 쉴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기억 - 음! 으으음!! 으음! 결국 난 목조르기에 걸린 격투기 선수처럼 매트를 두드리며 기브업을 외쳤다. 필사적인 내 몸부림에 잠에서 깨어난 그녀. 이후 상황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병실에 한 바탕 작은 소란이 일고야 그녀는 준비를 마치고 학교로 떠났다. 그녀가 자리를 비우고 얼마 안 되어 병실로 들어오신 어머니는 밤사이 많이 바뀌어 버린 주변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어머니 - 이 짐들은 다 뭐니? 기억 - 민아랑... 민아 동생 짐인데요, 아무래도 여기 오래 있다 보니까 필요한 물건들이 많아서... 어머니 - 그랬구나. 늘 고마워서 어떻게 한다니. 만약 어머니께 민아와 다퉜다는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단번에 =네가 무슨 배짱으로 그러니?= 같은 말씀이 나오지 않을까? 입원 8일 째. 난 양다리에 했던 임시 깁스를 제거 했고 붓기가 빠진 왼팔엔 완전한 깁스를 해야 했다. 어차피 통증으로 인해 활동을 할 수는 없었지만 옆으로 돌아누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기억 - 으이짜짜짜짜..... 다리 깁스를 푼 기념으로 침대 발치에 묶어진 끈을 잡고 몸을 일으키는 연습을 시작한 나. 아직 성치 않은 갈비뼈는 이렇게 힘을 쓸 때마다 괴로운 비명을 질러 댔지만, 이렇게 운동을 해주는 게 회복에 더 도움이 된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을 믿고 참아보기로 했다. 한나 - 조금만 더요! 조금만 더! 그렇죠! 조금만~!! 한나는 벌써 4일 째 내 병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재활을 돕고 있다. 그녀가 매일 조금씩 가져다 나른 가재는 어느새 병실 한쪽 벽면을 차지했고, 이젠 샤워실을 비롯한 병원 시설을 이용하는 데도 아무 거리낌 없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처음엔 몇 번이나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던 나지만 부쩍 자주 꾸기 시작한 악몽과 거듭되는 괴로운 물리치료에 점차 그녀를 의지하게 되었다. 한나 - 그렇죠! 꺄악~! 오빠 너무 잘했어요~!! 기억 - 하아.... 하아.... 하아..... 어우 죽겠다. 무엇보다... 이렇게 뭔가 하나를 해낼 때 마다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재활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한나 - 등 닦아 줄까요? 기억 - 후우.... 나야 고맙지. 고작 자리에 일어나 앉는 것만으로 땀으로 범벅이 돼버린 나는 기꺼이 웃옷을 벗고 그녀에게 등을 맡겼다. 이 기회에 등에 바람 좀 제대로 쐬고 햇빛도 좀 보여줘야겠다. 한나 - ...... 오빠 등 참 잘생긴 거 알아요? 기억 - 응? 등이 잘 생겼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한나 - 겉에서 보기보다 널찍하고, 모양도 잘 잡혔고... 딱 업히고 싶게 생겼어요. 기억 - 하핫, 그래서 공주가 꼭 술 취하면 업어달라고 한 건가? 한나 - 나중에 몸 다 나으면 저도 한 번 업어줄래요? 기억 - 그러지 뭐, 이렇게 도움을 받았는데.... 또 바라는 거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다 들어줄게. 최근 그녀에게 받은 도움을 생각하면 업었다 놨다를 360번 해줘도 모자랄 나였기에, 몸만 나으면 영화건 놀이동산이건 그녀가 가자는 데로 갈 요량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녀는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한나 - 그럼.... 나 용서해줄 수 있어요? 기억 - 응?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또 나와~. 그런 소린 그만 하자니까. 한나 - 나.... 정말 오빠한테 잘못한 거 많은데.... 기억 - 에이 됐어, 장난 몇 번 친 걸 가지고.... 그런 거 이미 다 잊었어. 한나 - 오빠.... 내 등을 닦던 한나의 손이 작게 떨렸다. 기억 - 그런 거 다 잊었어. 지금은... 그저 고마울 뿐이야. 유독 하늘도 푸르고 바람도 시원했던 그날. 하늘을 떠가는 구름 속에서도 민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3-31화> 재활
일요일입니다.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고 계신지...
밤 사이 내린 비에 주변이 시원해서
참 기분이 좋습니다.
조금 있다가 산책이라도 나갔다 오고 싶군요.
================== 땀띠야 가라 ===========================
일단 한 번만 고비를 넘기면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나.
하지만 그날 이후 민아는
병실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설마.. 정말 이렇게 끝나버리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덜컥 겁부터 났다.
이 일을 대체 어찌한단 말인가?
역시 내가 너무 오버한 건가?
하지만 한편으론,
그 상황에서도 연습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가 괘씸했다.
그녀에게 연극이 중요한 일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한 번 정도는 접을 수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한참을 이 문제로 고심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손을 놓아 버렸다.
시간이 약이라고....
공연이 끝나는 게 먼저일지,
범인들이 잡히는 게 먼저일진 몰라도
둘 중 하나만 해결 되도 만사형통일 것이다.
일단 지금 제일 급한 문제는....
기억 - 오늘은 어떻게 할 거야?
한나 - 몰라요, 다 오빠 때문이야.
기억 - ....... 또 여기서 자려고?
한나 - 그럼 어떡해요! 당장 길바닥에서 자는 수밖에 없는데!
민아와 나의 혈전 이후
하루아침에 갈 곳 잃은 어린 새가 되어버린 한나.
난 급한 데로 근처 친구 집이나 기숙사에라도
몸을 맡기길 권했지만,
그녀는 일일이 사정 설명하가며
남에게 빌붙기는 싫다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게다가 오늘 오전엔 민아가 집을 비운 틈을 타
옷부터 게임기까지 살림 일체를 챙겨다
내 병실에 자리를 잡은 걸보면,
아무래도 이곳에서 장기투숙하기로 마음을 굳힌 듯하다.
기억 - 그러다 민아 오면 뭐라고 하려고?
한나
- 그땐 오빠 말대로 사정 설명 해야죠.
시말서를 쓰든, 사건 경위서를 쓰든...
일단 그녀가 이런 처지가 된 데는
내 잘못이 제일 컸던 만큼,
그녀의 행동을 뭐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날 밤, 한나는 다른 병실에서
매트리스까지 가져다가 침대 밑에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병실에 불이 모두 꺼지고
링거에서 떨어지는 약물 소리만
시계 초침소리처럼 들려오는 가운데,
난 한참동안 잠을 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새벽녘이 다돼서야 설핏 잠이 들었다.
..........
= 죽어! 죽어 이 새끼야! =
= 완전히 조져버려! =
의식이 몸으로부터 멀어졌다고 느낀 순간,
갑작스러운 악몽들이 나를 덮쳐왔다.
사방으로부터 쏟아지는 발길질,
뼈와 딱딱한 무언가가 부딪히는 느낌,
사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들이 생생히 살아났다.
= 또 날뛰어 봐! 뛰어보라고 인마! =
꿈이라는 건 인식할 수 있었지만 눈은 떠지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소리라도 지르려 했지만
목을 꽉 죄고 있는 무언가로 인해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 야, 야, 더 까불어 보라니까? =
도와줘.... 누가... 좀.... 누가.... 누가 날 좀 도와줘....
= 야, 비켜봐. 다다다... 빠샤! =
도와줘!!!!!!!
기억 - ........!!
=따닥따다다닥따다닥따닥.....=
마지막 순간,
전기에 감전 된 듯 몸을 떨며 잠에서 깨어난 나.
떨리는 턱 때문에 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등에서 흥건하게 베어 나오는 식은땀과
엉망으로 헝클어져버린 이부자리가
그간 내 몸부림을 짐작케 했다.
울음이라도 나올 만큼 무서웠다.
어두운 방안 어디선가 녀석들이 다시 뛰어나올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느껴진 냉기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주섬 주섬 주변의 이불을 끌어다 몸을 덮던 난
결국 한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기억 - 한나야...... 한...한나야....
한나 - ......에....예? 무슨 일이세요?
기억 - 부...불 좀 켜줘..... 불....
아직도 턱이 덜덜 떨리는 탓에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내 목소리에서 이상을 느낀 그녀는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불을 켜주었다.
한나 - 꺅! 오빠, 무슨 땀을 그렇게 흘려요?
기억 - 아...악, 악몽을 꿨어. 악몽....
굳이 그녀의 표정을 살피지 않아도
지금 내 몰골이 얼마나 엉망일지는 대충 감이 왔기에
난 애써 내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도움이었다.
그것이 동정이건 무엇이건 상관없었다.
한나 - .........
내 말을 들은 그녀는 몹시도 서글픈 얼굴로
내 머리를 감싸 안아 주었다.
깁스 안 구석구석까지 소름이 돋아있던 피부에
따듯한 온기가 전해지자 한 결 마음이 놓이는 게 느껴졌다.
기억 - 흑.... 한나야...... 흑흑.....
조금씩 떨림이 잦아들면서
그 부산물 같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창피할 것도 쪽팔릴 것도 없었다.
단지 그녀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고마웠고, 안심이 되었다.
난 분명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처지였고,
내 곁에 있는 건 한나밖에 없었다.
=짹짹짹=
언제 다시 잠이 들었는지는 몰라도,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다.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느낀 점은
베게의 촉감이 예전과는 많이 바뀌었다는 것.
아직 몸을 일으킬 수 없었던 난
고개를 돌려 내 머리맡에 베어져 있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다.
그리고 곧장 한나의 막강한 바스트와 조우하게 되었다.
기억 - ........
내 머리 위쪽에 몸을 뉘인 채
조금 구부정한 자세로 잠이 들어 있는 그녀.
아마 어제 밤 소동이 끝난 뒤 그대로 잠이 들어 버린 것 같다.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던 내 오른팔은
그녀의 허리 밑에 들어가 있었고,
고개는 그녀가 두 팔로 감싸고 있었기에
실상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 그런대로 가만있으면 될 일이지만
문제는 지금 자세가 여러모로 부담스럽다는 점.
특히나 가슴계곡이 정면으로 보이는 이 상황만큼은
올바른 정신건강을 위해 반드시 타개해야했다.
한나 - 음.....
그때, 그녀가 옅은 신음을 내며
내 고개를 그녀 쪽으로 끌어 당겼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내 얼굴은 그녀의 가슴 사이에 묻혀버렸다.
기억 - .........
거대한 케이크에 얼굴을 파묻은 듯한 촉감은
결코 나쁘지 않았지만...
치명적으로 숨을 쉴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기억 - 음! 으으음!! 으음!
결국 난 목조르기에 걸린 격투기 선수처럼
매트를 두드리며 기브업을 외쳤다.
필사적인 내 몸부림에 잠에서 깨어난 그녀.
이후 상황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병실에 한 바탕 작은 소란이 일고야
그녀는 준비를 마치고 학교로 떠났다.
그녀가 자리를 비우고 얼마 안 되어
병실로 들어오신 어머니는
밤사이 많이 바뀌어 버린 주변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어머니 - 이 짐들은 다 뭐니?
기억
- 민아랑... 민아 동생 짐인데요,
아무래도 여기 오래 있다 보니까 필요한 물건들이 많아서...
어머니 - 그랬구나. 늘 고마워서 어떻게 한다니.
만약 어머니께 민아와 다퉜다는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단번에
=네가 무슨 배짱으로 그러니?=
같은 말씀이 나오지 않을까?
입원 8일 째.
난 양다리에 했던 임시 깁스를 제거 했고
붓기가 빠진 왼팔엔 완전한 깁스를 해야 했다.
어차피 통증으로 인해 활동을 할 수는 없었지만
옆으로 돌아누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기억 - 으이짜짜짜짜.....
다리 깁스를 푼 기념으로
침대 발치에 묶어진 끈을 잡고
몸을 일으키는 연습을 시작한 나.
아직 성치 않은 갈비뼈는
이렇게 힘을 쓸 때마다 괴로운 비명을 질러 댔지만,
이렇게 운동을 해주는 게 회복에 더 도움이 된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을 믿고 참아보기로 했다.
한나 - 조금만 더요! 조금만 더! 그렇죠! 조금만~!!
한나는 벌써 4일 째
내 병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재활을 돕고 있다.
그녀가 매일 조금씩 가져다 나른 가재는
어느새 병실 한쪽 벽면을 차지했고,
이젠 샤워실을 비롯한 병원 시설을 이용하는 데도
아무 거리낌 없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처음엔 몇 번이나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던 나지만
부쩍 자주 꾸기 시작한 악몽과
거듭되는 괴로운 물리치료에 점차 그녀를 의지하게 되었다.
한나 - 그렇죠! 꺄악~! 오빠 너무 잘했어요~!!
기억 - 하아.... 하아.... 하아..... 어우 죽겠다.
무엇보다... 이렇게 뭔가 하나를 해낼 때 마다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재활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한나 - 등 닦아 줄까요?
기억 - 후우.... 나야 고맙지.
고작 자리에 일어나 앉는 것만으로
땀으로 범벅이 돼버린 나는 기꺼이 웃옷을 벗고
그녀에게 등을 맡겼다.
이 기회에 등에 바람 좀 제대로 쐬고 햇빛도 좀 보여줘야겠다.
한나 - ...... 오빠 등 참 잘생긴 거 알아요?
기억 - 응? 등이 잘 생겼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한나
- 겉에서 보기보다 널찍하고,
모양도 잘 잡혔고... 딱 업히고 싶게 생겼어요.
기억 - 하핫, 그래서 공주가 꼭 술 취하면 업어달라고 한 건가?
한나 - 나중에 몸 다 나으면 저도 한 번 업어줄래요?
기억
- 그러지 뭐, 이렇게 도움을 받았는데....
또 바라는 거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다 들어줄게.
최근 그녀에게 받은 도움을 생각하면
업었다 놨다를 360번 해줘도 모자랄 나였기에,
몸만 나으면 영화건 놀이동산이건
그녀가 가자는 데로 갈 요량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녀는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한나 - 그럼.... 나 용서해줄 수 있어요?
기억
- 응?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또 나와~.
그런 소린 그만 하자니까.
한나 - 나.... 정말 오빠한테 잘못한 거 많은데....
기억
- 에이 됐어, 장난 몇 번 친 걸 가지고....
그런 거 이미 다 잊었어.
한나 - 오빠....
내 등을 닦던 한나의 손이 작게 떨렸다.
기억 - 그런 거 다 잊었어. 지금은... 그저 고마울 뿐이야.
유독 하늘도 푸르고 바람도 시원했던 그날.
하늘을 떠가는 구름 속에서도
민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