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한것은 시간뿐... 당연한거지만 추림은 그 변한 시간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아니 적응하지 못하는것이 아니라 거부하고 있었다. 세상을 산다는것은 너무 커다란 모험과도 같은 일이다. 그 모험의 순간속에 추림은 진정 너무도 거대한 것들과 부딪히고 싸워야했다. 유미의 일이 아니더라도 추림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많은 일들을 경험하고 견뎌내야 했다. 하지만 추림에게 운명은 더 많은 시련을 명하고 있었다. 그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 없는 추림은 세상에 동화되어가기 위한 작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추석을 휑한 빌라에서 시체처럼 잠으로 보냈다. 전화로 울고불고 난리치시는 어머니를 간신히 위로하고 사죄하며 결국 고향으로 가기를 거부 했다. 남영기업을 찾아 인사하고 왠지 거리감이 생겨 서먹한 입장에 놓인 추림은 박부장과 술자리를 가졌다. 사내다움을 유독 강조하는 박부장은 예전의 그가 아닌듯 여겨졌다. 여전히 다부지고 우악스런 분위기였지만 추림은 느끼고 있었다. 당신은 내게 더이상 예전의 당신이 아니야...... 박부장과 술자리 내내 불편한 심경이었던 추림의 마지막은 전격적인 퇴사였다. 박부장도 이부장도 그랬을게다. 더이상 추림을 잡을 면목도 입장도 아니었을것이다. 오랫동안 정들었던 곳을 떠나기란 쉬운일이 아니었다. 추림의 퇴사는 조용하고 쓸쓸하게 끝이났다. 예전같으면 여러사람이 울고불고 난리였을지 모르지만 세월이란 모든것을 덤덤하게 만드는지 몰랐다. 그의 수감생활 수개월동안 그의 출근일지는 기록되었다. 다른것이 아니다. 仁과義가 인정되었는지 아니면 박부장의 조화였는지 몰랐다. 인과 의를 논하기 우스운 일이지만 추림은 정당하고 용기있는 행동을 했던것은 분명했다. 격전을 치른 당사자는 다름이 아닌 남영기업의 실세였다. 그를 돕고자 추림이 벌인 행위를 회 사가 인정했던 모양이었다. 퇴직후 추림은 무기력증과 혼란한 날들을 보냈다. 퇴소후 첫날 유미에게 전하했을 때, 유화가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는 의미를 아직도 그는 이해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화가 그랬다. 자신과 유미의 중간에서 연결고리같은 역활을 하던 유화였 기에 그 충격은 더욱 더 컸다. 가을비가 소리없이 쏟아지던 시월의 어느날 추림은 작은 손가방 하나만을 든채 조용히 무덤같 은 빌라를 나섰다. ********************** 남도의 밤바다는 암울한 기운에 덥힌채 끝없이 일렁거렸다. 목포 신안.... 유미의 고향이라했다. 왜 자신이 이곳에 오게되었는지 알고싶지 않았다. 영등포역에서 무작정 기차에 몸을 실었을 뿐이다. 지친 몸을 잠속에 묻어두고 시간이 흘렀다. 어느순간 누군가 깨워 눈을뜨니 목포였다. 다시 배를 타고 신안으로 들어와 작고 아기자기한 마을을 보았다. 왠지 모를 정취가 느껴졌고 가슴가득 따듯한 기운이 만연해옴을 느꼈다. 유미, 그녀의 어린시절이 남아있는 곳. 그래서 그런지 추림이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작은 포구에 모여있는 배들과 분주한 어부들의 일상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 날이 좋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게 가을의 시작은 비였다. 덕분에 어부들은 때아닌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신안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가을의 길목에 들어선 때라 주위는 온통 풍요롭고 생명의 마지막 기운이 생동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곳이다. 그녀의 어린 시절이 이곳이었다는게 자못 신기하게 느껴졌다. 어떤 감흥이 일기도해서 추림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누런 들판을 가로지르며 오랜동안 걸었다. 유미 신안에 와 있습니다. 당신의 어린시절이 있을 이곳에 오니 세삼 당신의 모습이 떠오르고 못내 그리워 집니다. 어쩌면 다시 볼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글이라도 쓰고 싶은 심정은 차라리 불타버려 재만 남은 허무와도 같습니다. 어떻게 지내는지... 아픈곳은 없는지 모든게 궁금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다가갈수 없음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만날수 없을뿐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지난 수개월동안 내 안에 있었습니다. 내곁에 언제나 당신이 존재했고 머물렀음을 당신은 모를 겁니다. 결코 잊을수 없는 당신... 그저 자유로이 사랑해도 될것 같습니다. 바다가 무척이나 푸르고 자유롭게 느껴집니다. 인간의 삶이 얼마나 하찮은지 바다를 보면 느껴 지고 깨달아집니다. 마음속에 가득한 더러운것들... 이곳에 버리고 가려합니다.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삿되게 여겼 던 내 옹졸함을 이곳에 버리고 투명하게 사랑할 무언가를 가지고 갈 겁니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고 슬퍼집니다. 내가 내밀었던 손을 결국 잡아주지 않은 당신이어서가 아닙 니다. 어쩌면 인연이 아닌 운명같아서입니다. 이어지지 않을 운명을 왜 만나게 했는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어느순간 작아진 날 스스로 다독이며 살아갈 자신이 없군요. 하지만 살아야 한다면 지금같은 모습이 아니길 다짐합니다. 유미씨. 부디 건강하시고 웃는 모습이길 바랍니다. 숙소로 정한 민박집의 방 한켠에서 이틀동안 밖으로 한걸음조차 나가지 않은 추림이 걱정되어 서인지 주인 아주머니가 두어번 다녀갔다. 어둠에 가리워진 방 천장을 멍하게 올려다보는 추림은 이상한 충동에 휩싸였다. 짙은 어둠처럼 영혼도 그것과 같다면 편할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느낌이란 어떤 것일까? "풋!" 실소가 터져나왔다. 젊고 젊은 놈이 생각할 일이 고작 그런 한심한 것이라니... 부질없는 일이었다. 사는거... 그거 별거 없었다. 남들 사는것과 다르지 않는데 무에가 그리 힘겨워 헛생각 망상에 젖어 바보된단 말인가. "나도 마음내키는데로... 살아도 될까? 쿡쿡." 목포에서 일주일을 보낸 추림이 서울로 돌아가기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서울로 갈수 없었다. 짠 내음이 벤 바람을 느끼며 목포 시내를 걷고 있을 때였다. 시간은 막 오후로 접어드는 때고 비가 간간히 내리고 있었다. 추림의 곁을 한 여자가 빠르게 달려 지나치고 뒤에서 소란스런 고함이 들리며 들리더니 서너명 의 사내들이 누군가를 쫒듯이 달려 나갔다. 어리둥절해진 추림이 어깨를 으슥거리고 무심하게 길을 따라 걷다가 우측으로 꺽인 골목길을 힐긋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눈을 치떴다. 방금전에 보았던 여자와 남자들이 한데 모여있었는데 그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여자는 벽을 등지고 쓰러져 있고 남자들이 그녀를 빙 둘러싼채 손길 발길로 무참하게 구타하고 있었다. "젠장." 이런일에 휩쓸리는 것을 아주 꺼리는 추림이었다. 하지만 그런일을 지나칠 추림이 아니다. 다만 왜 이런일이 자신에게 자주 일어 나는지 못마땅했다. 무슨 사연인지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사내들이 여성을 구타하는것 자체가 더러운 일일뿐이 다. 네놈이었다. 덩치와 기세가 나 건달이요하는 모양새들이어서 대충 짐작할 만한 일이었다. "그만하지!" 추림이 빽 소리지르며 골목길로 들어섰다. 라이타를 꺼내쥔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막상 마주하고보니 만만치 않은 놈들같아 보였다. 타지에서 이런일은 무척 위험한 일인것이다. 주먹의 고장 호남땅이었다. "시방 우리보고 그런 것이여?" 진득한 남도 사투리가 들리며 사내들이 추림을 쏘아보았다. "워메 신발놈! 긍게 지금 우리보러 고만하고 꺼져부러라 이 말인거제?" "그런거 같구마이. 무서버서라도 그렇게 해야것는데?" 장난치고있다. 그도 그럴것이다. 누가봐도 추림은 이런일에 어울리지 않는다. 행색이 덥수룩하지만 본래가 곱상한 외모에 호리호리한 체구의 추림이었다. "......?" 여자를 얼마나 때렸는지 얼굴이 깨지고 입에서 선지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신은 있는지 쓰러진 채 추림을 촛점없는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십대 중반 정도 되어보였는데 상당한 미모의 여자였다. 아니다. 외국인이었다. 국내인이 아닌 외국인을 그것도 여성을 집단 구타하는 일이 무얼까라는 생각이 순간 스쳤다. "그냥. 쪽팔리게 여자를 넷이서 구타하는게 재밌니?" 이미 벌어진 일이다. 추림이 겁도없이 그들에게 다가가자 사내들이 황당했는지 서로를 바라보 며 어이없어했다. "이 씨벌......!" "빨리 끝내자. 니들이 이곳 주먹들인거 알고 있는데, 쎈놈이 저 여자 데려가는거 맞나?" 추림의 침착한 행동에 무언가가 있음을 알았는지 사내들이 안색을 굳혔다. "하유. 이 씨벌놈이 말도 잘허네. 요 잡것을... 큭!" 한놈이 추림에게 다가와 손을 올려 한대라도 쥐어박으려 하다가 허리를 숙이고 바닥으로 꼬꾸라 졌다. 추림의 무릎이 사내의 낭심을 올려쳤다. 이놈은 앞으로 며칠은 제대로 걷지도 못할 것이다. "뭐?" "뭔일?" 사내들이 놀라 눈을 치뜰때 추림의 몸이 빠르게 그들을 향해 쇄도했다. 추림의 몸 놀림은 그저 몸 놀림이 아니다. 단련되고 수련한 동작이었다. 구름밟기 보법을 이용한 발검음은 백미터를 11초대에 달리는 그의 폭팔력을 집중해서 단거리 를 압축해 들어갔다. 엄청난 빠르기로 보였을 것이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내가 대응해 왔다. 하지만 움직임이 굼떴다. 느닷없는 행동에 놀란 탓이 다. "흐합!" 추림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오고 낮추었던 자세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꼿꼿하게 펼쳐진 추림의 수도가 환힌 열린 놈의 목으로 파고들었다. 퍽! "크흡!" 둔탁한 소리와 비명이 터지며 놈이 목을 부여잡고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남은 두놈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이 보였다. 연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속전속결! 하지만 놈들이 정신을 차렸다. 늦었다. 이제 모험하는 수밖에 없다. "씨벌놈! 조져!" 새하얗게 빛나는 회칼을 꺼낸 덩치가 추림의 면전으로 다가오며 칼을 휘둘렀다. 기세가 느껴졌다. '읍!' 훈련 받은 놈들이었다. 어중이 떠중이가 아니다. 시간끌면 불리하다. "차합!" 다시 기성을 터트린 추림이 건물의 벽을 타고 날아 올랐다. 그러면서 손에 쥐고있던 라이타를 집어던졌다. 짜여진 동작이었다. 날아든 라이타에 놀란 놈이 추춤했다. 그것으로 결정이 났다. 퍽! 추림의 공중 가위차기가 덩치의 가슴에 박히고 바닥으로 착지한 추림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매섭게 놈의 열린 턱에 작렬했다. "크억!" 맷집이 좋은 놈이다. 비틀거리며 쓰러지지도 않았고 눈에 불을켜고 있었다. 더구나 칼까지 휘둘러댔다. 하지만 곧 놈의 눈동자가 변하면서 바닥으로 풀썩 꼬꾸라졌다. "......?"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남은 한놈이 멍하니 추림을 바라보았다. 넷 중 가장 기세가 약한 놈! 힐긋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도 놀랐는지 벽에 힘겹게 기대고 추림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동 자에 어떤 기대감이 일렁거렸다. "자 어떡할거냐? 싸울거냐? 아니면 이대로 돌아갈거냐?" 추림이 조금 다가가며 말하자 추춤거리며 놈이 뒤로 물러섰다. "그냥 보내준다고?" "물론. 하지만 왠지 위험한 생각이 드는데? 아무래도 당신들이 위험해보여서 말이지. 죽여야 하 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야." 추림의 허세에 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놈들을 보내주면 그 뒤의 일은 뻔하다. 이런 자들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추림인지라 아마도 한 시간도 안되서 자신을 찾아다니고도 남을 것이다. "어이. 아가씨 그만 가지요?" 추림이 떨고 있는 여자를 부르며 다가갔다. 등을 내준채 여자에게 다가갔을 때였다. 일말의 기척이 느껴지며 차가운 느낌이 다가들었다. '병신!' 추림의 속내야 어쨌든간에 놈의 공격이 감행되었다. 하지만! 쩌억! "크흑!" 돌려차기 한방이었다. 일부러 빈틈을 보였는데 걸려든 것이다. 옆구리를 걷어차인 놈이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다시 뒤꿈치로 놈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후두부를 걷어차인 놈이 정신을 잃고 비속에 잠겨버렸다. 단순한 일전 같았지만 위험한 순간이었다. 빠른 판단과 대응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빌어먹을. 집행유예인것을 잊었군.' 그랬다. 다시 어떤 사건과 연류된다면 추림의 구속은 불가피했다. **************************** "그러니까 놈들이 당신의 업소를 뺏으려했고 당신은 도망만 쳤단 말입니까?" 여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추림은 황당해서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재산을 빼으려 하는데 그게 두려워 도망만 친다는게 황당한 일이었던 것이다. 여자를 업고 도망치듯 현장을 벗어나 낯선 모텔을 찾아 들었다. 여자의 상처를 약국에서 구입한 의료용품으로 치료하고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자신 을 린다라고 소개한 여자의 사연이 참으로 기구했다. 생김새는 분명 러시아계였다. 그런데 국적은 한국인게 신기했다. 그녀는 러시아부와 한국모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다. 나이 스믈일곱에 러시아명 블라디미르 린다 한국명 이선경이라 했는데 대체로 린다라는 짧은 이름으로 불린다고 했다. 힘들게 살았을 그녀의 삶 끝에 남은것은 제법 커다란 술집이었는데 그곳을 건달들이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주자니 아깝고 안주자니 폭력앞에 무기력했고. 그래서 도망치듯 숨어 살았다는 것이다. 차라리 도망치려면 이곳을 벗어날 것이지... 허나 그녀는 이곳에서 태어나 목포외에 다른곳을 가 본적도 가고자 했던적도 없었다했다. 그녀의 이모가 그것을 거부하게 만들었는데 추림은 이해가갔다. 특이한 외모로 살아가기엔 사회가 너무 냉소적이었을 터였다. 결국에 하류계속에서 전전했을 고 단한 삶이었을 것이다. 눈물로 자신의 사연을 말한 린다는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구타에 상처입은 얼굴인데도 그녀의 외모는 확실히 타고났는지 무척이나 세련된 미모였다. 그런데 웃겼다. 자국인이 아닌데 한국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것이 무척 이질적으로 느껴진 탓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러시아어는 물론 일어와 영어도 능숙하게 구사했다. 언어능력을 타고났는지 그것을 혼자 배웠다니 환경만 좋았다면 능히 큰 배움을 가졌을 그녀라 느껴졌다. 잠든 그녀를 놓고 잠시 밖에 나간 추림이 혼비백산해서 튀어들어왔다. 역시나 시내엔 건달들이 눈에띄게 늘어나 있었다. 도대체 린다의 업소가 어떤 의미기에 수십명 이나 동원될까라는 호기심이 생겼다. "린다. 린다!" 방으로 돌아온 추림이 난감해져서 잠든 린다를 깨웠다. 자고 일어난 린다는 한결 차분해진 얼굴로 추림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린다의 정체가 뭡니까? 겨우 업소 하나 먹자고 놈들이 이리떼처럼 시내를 쑤시고 다닐 리가 없잖습니까? 난 지금 서울로 가는 길인데... 일이 이상하게 되어버렸단 말입니다." 추림의 말에 불안한 얼굴이 된 린다는 뭔가 생각하는듯 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우선 절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제게 고마우신 분이지만... 솔직히 당신을 믿지 못한것도 맞아요. 남자들이건 누구든 항상 절 욕심냈거든요."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다. 물건인가? 욕심낸다는게 마치 그렇게 느껴졌다. "누가 누굴 오해해요? 난 다만 황당할 뿐입니다. 당신을 알고싶지도 알지도 못한단 말입니다." 조금 화가난 추림이 퉁명하게 말하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아버지 얼굴을 한번도 본적없이 자랐어요. 몸이 허약했던 엄마는 제가 스므살 무렵에 돌아가셨 는데... 삼년전에 아버지를 잘 아는 사람이 찾아왔어요. 러시아 사람이었는데, 자신은 변호사고 아버지의 유언을 전하러 왔다고 했어요." 여전히 알송달송한 말이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더 듣고 볼일이었다. 린다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린다의 눈빛이 빛을 머금었다. "아버지는 러시아에서 유명한 마피아였다고... 사고로 돌아가셨데요. 아버지의 재산 중 일부가 제게 돌아왔어요. 참 웃긴 일이지 않아요? 생면부지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죽고나서 그 소식을 들려주다니." 놀라운 말이었다. 러시아는 제국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나라였다. 거대하고 엄청난 자원을 소유 한 얼음의 나라. 하지만 공산주의와 냉전이라는 문재를 해결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엄청 혼란 스런 나라였다. 러시아는 딱 두가지로 대변되는데 그 하나가 나라를 이끄는 이면에 존재하는 어둠, 마피아였다. 정치든 군부든 기업이든 어디에도 그들은 있고 존재했다.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마피아 조직을 지닌 나라, 마피아가 군을 장악하고 정치를 좌지우지 하는 괴상한 나라였다. "여자 혼자서 수십억의 돈을 지니고 혼자 살아가는게 쉬운 일이 아니란걸 절실히 깨달았어요. 그들이 처음에 다가왔을때 이러지 않았어요. 아주 근사한 남자가 접근하고 절 유혹했는데 하마 터면 속을뻔했죠. 제가 그들의 속셈을 알자 저들은 절... 당신도 그들과 같나요?" 추림의 머리속이 환해졌다. 놀라운 일이었다. 아버지의 유산이 수십억이 된다는것과 그 소유자 린다. 그리고 하이에나떼들 의 야비함. 추림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해가 간 동시에 엉뚱한 일에 휘말린 느낌이 들었다. "바보같이. 법에 도움을 요청해보지 그랬습니까?" 답답한 마음에 추림이 말하자 린다의 고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해봤죠. 하지만 믿을게 못 되더군요. 이곳을 뜨려다가 보다시피 이렇게 되었어요. 그들의 뒤에 있는자가 누구라는것을 안다면 이해할 거예요." 추림은 린다의 말에 직감적으로 이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것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거물이 있다면 린다의 싸움은 생각보다 더 흉험할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라는 사람이 남긴것이 불행이라니 참으로 웃긴 일이네요." 웃기지도 않은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린다의 말이 사실로 여겨지는데는 촌각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거리로 나선 추림의 눈에 나 건달이요하는 자들이 활보하고 다니는것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린다를 이대로 놔둔채 자신만 몸을 빼면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추림이라는 이 괴이한 놈은 절대 그런것과는 체질적으로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삼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모텔에서 생면부지의 사람과 동거아닌 동거가 시작된 내내 추림과 린다는 모호한 경계를 진 채 근심을 떠앉고 지냈다. 린다의 눈에 비친 추림! 이리같고 승냥이 같은 남자들만을 봐온 그녀의 눈에는 추림이 무척이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자신보다 어리지만 무언가 큰것을 지닌 남자였다. 자신을 건들려하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 알고있었다. 자신의 외모가주는 매력을, 백이면 백명 모두 자신을 가지려했던 남자들. 그는 창밖을 내다보며 온통 어떤 생각에 빠져 있는듯 보였다. 자신의 처지는 하루이틀이 아니어서 이제 만성이 된 터였다. 거의 포기하고 싶은 심정에서 만난 추림은 린다에게 어떤 희망이 생기기 시작한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것이다. 그에게 기대도 될까? 살아온 인생이 너무도 척박하고 험하기만 했던 날이었다. 배신이 판을치고 이익에 따라 움지이는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살수 있다는 현실이 더욱 더럽고 추악스러웠다. 한명 정도는 제대로 된 이가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있었는 데...... 하늘에 별이 유난히도 찬란한 시월의 어느날 밤. 잠든 추림을 응시하던 린다의 눈이 반짝하고 빛을 머금었다. (51장에서 계속)1
유리사랑 (50장/ 린다) <실극화>
변한것은 시간뿐... 당연한거지만 추림은 그 변한 시간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아니 적응하지 못하는것이 아니라 거부하고 있었다.
세상을 산다는것은 너무 커다란 모험과도 같은 일이다.
그 모험의 순간속에 추림은 진정 너무도 거대한 것들과 부딪히고 싸워야했다.
유미의 일이 아니더라도 추림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많은 일들을 경험하고 견뎌내야 했다.
하지만 추림에게 운명은 더 많은 시련을 명하고 있었다. 그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 없는 추림은 세상에 동화되어가기 위한 작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추석을 휑한 빌라에서 시체처럼 잠으로 보냈다.
전화로 울고불고 난리치시는 어머니를 간신히 위로하고 사죄하며 결국 고향으로 가기를 거부
했다.
남영기업을 찾아 인사하고 왠지 거리감이 생겨 서먹한 입장에 놓인 추림은 박부장과 술자리를
가졌다.
사내다움을 유독 강조하는 박부장은 예전의 그가 아닌듯 여겨졌다.
여전히 다부지고 우악스런 분위기였지만 추림은 느끼고 있었다.
당신은 내게 더이상 예전의 당신이 아니야......
박부장과 술자리 내내 불편한 심경이었던 추림의 마지막은 전격적인 퇴사였다.
박부장도 이부장도 그랬을게다. 더이상 추림을 잡을 면목도 입장도 아니었을것이다.
오랫동안 정들었던 곳을 떠나기란 쉬운일이 아니었다.
추림의 퇴사는 조용하고 쓸쓸하게 끝이났다.
예전같으면 여러사람이 울고불고 난리였을지 모르지만 세월이란 모든것을 덤덤하게 만드는지
몰랐다.
그의 수감생활 수개월동안 그의 출근일지는 기록되었다.
다른것이 아니다. 仁과義가 인정되었는지 아니면 박부장의 조화였는지 몰랐다.
인과 의를 논하기 우스운 일이지만 추림은 정당하고 용기있는 행동을 했던것은 분명했다.
격전을 치른 당사자는 다름이 아닌 남영기업의 실세였다. 그를 돕고자 추림이 벌인 행위를 회
사가 인정했던 모양이었다.
퇴직후 추림은 무기력증과 혼란한 날들을 보냈다.
퇴소후 첫날 유미에게 전하했을 때, 유화가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는 의미를 아직도 그는 이해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화가 그랬다. 자신과 유미의 중간에서 연결고리같은 역활을 하던 유화였
기에 그 충격은 더욱 더 컸다.
가을비가 소리없이 쏟아지던 시월의 어느날 추림은 작은 손가방 하나만을 든채 조용히 무덤같
은 빌라를 나섰다.
**********************
남도의 밤바다는 암울한 기운에 덥힌채 끝없이 일렁거렸다.
목포 신안.... 유미의 고향이라했다.
왜 자신이 이곳에 오게되었는지 알고싶지 않았다.
영등포역에서 무작정 기차에 몸을 실었을 뿐이다.
지친 몸을 잠속에 묻어두고 시간이 흘렀다. 어느순간 누군가 깨워 눈을뜨니 목포였다.
다시 배를 타고 신안으로 들어와 작고 아기자기한 마을을 보았다.
왠지 모를 정취가 느껴졌고 가슴가득 따듯한 기운이 만연해옴을 느꼈다.
유미, 그녀의 어린시절이 남아있는 곳. 그래서 그런지 추림이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작은 포구에 모여있는 배들과 분주한 어부들의 일상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
날이 좋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게 가을의 시작은 비였다. 덕분에 어부들은 때아닌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신안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가을의 길목에 들어선 때라 주위는 온통 풍요롭고 생명의 마지막 기운이 생동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곳이다. 그녀의 어린 시절이 이곳이었다는게 자못 신기하게 느껴졌다.
어떤 감흥이 일기도해서 추림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누런 들판을 가로지르며 오랜동안 걸었다.
유미
신안에 와 있습니다.
당신의 어린시절이 있을 이곳에 오니 세삼 당신의 모습이 떠오르고 못내 그리워 집니다.
어쩌면 다시 볼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글이라도 쓰고 싶은 심정은 차라리 불타버려 재만
남은 허무와도 같습니다.
어떻게 지내는지... 아픈곳은 없는지 모든게 궁금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다가갈수 없음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만날수 없을뿐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지난 수개월동안 내 안에 있었습니다. 내곁에 언제나 당신이 존재했고 머물렀음을 당신은 모를
겁니다. 결코 잊을수 없는 당신... 그저 자유로이 사랑해도 될것 같습니다.
바다가 무척이나 푸르고 자유롭게 느껴집니다. 인간의 삶이 얼마나 하찮은지 바다를 보면 느껴
지고 깨달아집니다.
마음속에 가득한 더러운것들... 이곳에 버리고 가려합니다.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삿되게 여겼
던 내 옹졸함을 이곳에 버리고 투명하게 사랑할 무언가를 가지고 갈 겁니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고 슬퍼집니다. 내가 내밀었던 손을 결국 잡아주지 않은 당신이어서가 아닙
니다. 어쩌면 인연이 아닌 운명같아서입니다.
이어지지 않을 운명을 왜 만나게 했는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어느순간 작아진 날 스스로 다독이며 살아갈 자신이 없군요.
하지만 살아야 한다면 지금같은 모습이 아니길 다짐합니다.
유미씨. 부디 건강하시고 웃는 모습이길 바랍니다.
숙소로 정한 민박집의 방 한켠에서 이틀동안 밖으로 한걸음조차 나가지 않은 추림이 걱정되어
서인지 주인 아주머니가 두어번 다녀갔다.
어둠에 가리워진 방 천장을 멍하게 올려다보는 추림은 이상한 충동에 휩싸였다.
짙은 어둠처럼 영혼도 그것과 같다면 편할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느낌이란 어떤 것일까?
"풋!"
실소가 터져나왔다.
젊고 젊은 놈이 생각할 일이 고작 그런 한심한 것이라니... 부질없는 일이었다.
사는거... 그거 별거 없었다. 남들 사는것과 다르지 않는데 무에가 그리 힘겨워 헛생각 망상에
젖어 바보된단 말인가.
"나도 마음내키는데로... 살아도 될까? 쿡쿡."
목포에서 일주일을 보낸 추림이 서울로 돌아가기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서울로 갈수 없었다.
짠 내음이 벤 바람을 느끼며 목포 시내를 걷고 있을 때였다.
시간은 막 오후로 접어드는 때고 비가 간간히 내리고 있었다.
추림의 곁을 한 여자가 빠르게 달려 지나치고 뒤에서 소란스런 고함이 들리며 들리더니 서너명
의 사내들이 누군가를 쫒듯이 달려 나갔다.
어리둥절해진 추림이 어깨를 으슥거리고 무심하게 길을 따라 걷다가 우측으로 꺽인 골목길을
힐긋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눈을 치떴다.
방금전에 보았던 여자와 남자들이 한데 모여있었는데 그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여자는 벽을 등지고 쓰러져 있고 남자들이 그녀를 빙 둘러싼채 손길 발길로 무참하게 구타하고
있었다.
"젠장."
이런일에 휩쓸리는 것을 아주 꺼리는 추림이었다. 하지만 그런일을 지나칠 추림이 아니다.
다만 왜 이런일이 자신에게 자주 일어 나는지 못마땅했다.
무슨 사연인지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사내들이 여성을 구타하는것 자체가 더러운 일일뿐이
다.
네놈이었다. 덩치와 기세가 나 건달이요하는 모양새들이어서 대충 짐작할 만한 일이었다.
"그만하지!"
추림이 빽 소리지르며 골목길로 들어섰다.
라이타를 꺼내쥔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막상 마주하고보니 만만치 않은 놈들같아 보였다.
타지에서 이런일은 무척 위험한 일인것이다. 주먹의 고장 호남땅이었다.
"시방 우리보고 그런 것이여?"
진득한 남도 사투리가 들리며 사내들이 추림을 쏘아보았다.
"워메 신발놈! 긍게 지금 우리보러 고만하고 꺼져부러라 이 말인거제?"
"그런거 같구마이. 무서버서라도 그렇게 해야것는데?"
장난치고있다. 그도 그럴것이다. 누가봐도 추림은 이런일에 어울리지 않는다.
행색이 덥수룩하지만 본래가 곱상한 외모에 호리호리한 체구의 추림이었다.
"......?"
여자를 얼마나 때렸는지 얼굴이 깨지고 입에서 선지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신은 있는지 쓰러진 채 추림을 촛점없는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십대 중반
정도 되어보였는데 상당한 미모의 여자였다. 아니다. 외국인이었다. 국내인이 아닌 외국인을
그것도 여성을 집단 구타하는 일이 무얼까라는 생각이 순간 스쳤다.
"그냥. 쪽팔리게 여자를 넷이서 구타하는게 재밌니?"
이미 벌어진 일이다. 추림이 겁도없이 그들에게 다가가자 사내들이 황당했는지 서로를 바라보
며 어이없어했다.
"이 씨벌......!"
"빨리 끝내자. 니들이 이곳 주먹들인거 알고 있는데, 쎈놈이 저 여자 데려가는거 맞나?"
추림의 침착한 행동에 무언가가 있음을 알았는지 사내들이 안색을 굳혔다.
"하유. 이 씨벌놈이 말도 잘허네. 요 잡것을... 큭!"
한놈이 추림에게 다가와 손을 올려 한대라도 쥐어박으려 하다가 허리를 숙이고 바닥으로 꼬꾸라
졌다.
추림의 무릎이 사내의 낭심을 올려쳤다. 이놈은 앞으로 며칠은 제대로 걷지도 못할 것이다.
"뭐?"
"뭔일?"
사내들이 놀라 눈을 치뜰때 추림의 몸이 빠르게 그들을 향해 쇄도했다.
추림의 몸 놀림은 그저 몸 놀림이 아니다. 단련되고 수련한 동작이었다.
구름밟기 보법을 이용한 발검음은 백미터를 11초대에 달리는 그의 폭팔력을 집중해서 단거리
를 압축해 들어갔다. 엄청난 빠르기로 보였을 것이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내가 대응해 왔다. 하지만 움직임이 굼떴다. 느닷없는 행동에 놀란 탓이
다.
"흐합!"
추림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오고 낮추었던 자세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꼿꼿하게 펼쳐진 추림의 수도가 환힌 열린 놈의 목으로 파고들었다.
퍽!
"크흡!"
둔탁한 소리와 비명이 터지며 놈이 목을 부여잡고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남은 두놈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이 보였다.
연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속전속결! 하지만 놈들이 정신을 차렸다. 늦었다. 이제 모험하는 수밖에 없다.
"씨벌놈! 조져!"
새하얗게 빛나는 회칼을 꺼낸 덩치가 추림의 면전으로 다가오며 칼을 휘둘렀다.
기세가 느껴졌다.
'읍!'
훈련 받은 놈들이었다. 어중이 떠중이가 아니다. 시간끌면 불리하다.
"차합!"
다시 기성을 터트린 추림이 건물의 벽을 타고 날아 올랐다.
그러면서 손에 쥐고있던 라이타를 집어던졌다. 짜여진 동작이었다.
날아든 라이타에 놀란 놈이 추춤했다. 그것으로 결정이 났다.
퍽!
추림의 공중 가위차기가 덩치의 가슴에 박히고 바닥으로 착지한 추림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매섭게 놈의 열린 턱에 작렬했다.
"크억!"
맷집이 좋은 놈이다. 비틀거리며 쓰러지지도 않았고 눈에 불을켜고 있었다.
더구나 칼까지 휘둘러댔다. 하지만 곧 놈의 눈동자가 변하면서 바닥으로 풀썩 꼬꾸라졌다.
"......?"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남은 한놈이 멍하니 추림을 바라보았다. 넷 중 가장 기세가 약한 놈!
힐긋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도 놀랐는지 벽에 힘겹게 기대고 추림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동
자에 어떤 기대감이 일렁거렸다.
"자 어떡할거냐? 싸울거냐? 아니면 이대로 돌아갈거냐?"
추림이 조금 다가가며 말하자 추춤거리며 놈이 뒤로 물러섰다.
"그냥 보내준다고?"
"물론. 하지만 왠지 위험한 생각이 드는데? 아무래도 당신들이 위험해보여서 말이지. 죽여야 하
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야."
추림의 허세에 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놈들을 보내주면 그 뒤의 일은 뻔하다. 이런 자들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추림인지라
아마도 한 시간도 안되서 자신을 찾아다니고도 남을 것이다.
"어이. 아가씨 그만 가지요?"
추림이 떨고 있는 여자를 부르며 다가갔다.
등을 내준채 여자에게 다가갔을 때였다. 일말의 기척이 느껴지며 차가운 느낌이 다가들었다.
'병신!'
추림의 속내야 어쨌든간에 놈의 공격이 감행되었다.
하지만!
쩌억!
"크흑!"
돌려차기 한방이었다.
일부러 빈틈을 보였는데 걸려든 것이다. 옆구리를 걷어차인 놈이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다시 뒤꿈치로 놈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후두부를 걷어차인 놈이 정신을 잃고 비속에 잠겨버렸다.
단순한 일전 같았지만 위험한 순간이었다. 빠른 판단과 대응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빌어먹을. 집행유예인것을 잊었군.'
그랬다. 다시 어떤 사건과 연류된다면 추림의 구속은 불가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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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놈들이 당신의 업소를 뺏으려했고 당신은 도망만 쳤단 말입니까?"
여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추림은 황당해서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재산을 빼으려 하는데 그게 두려워 도망만
친다는게 황당한 일이었던 것이다.
여자를 업고 도망치듯 현장을 벗어나 낯선 모텔을 찾아 들었다.
여자의 상처를 약국에서 구입한 의료용품으로 치료하고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자신
을 린다라고 소개한 여자의 사연이 참으로 기구했다.
생김새는 분명 러시아계였다. 그런데 국적은 한국인게 신기했다.
그녀는 러시아부와 한국모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다.
나이 스믈일곱에 러시아명 블라디미르 린다 한국명 이선경이라 했는데 대체로 린다라는 짧은
이름으로 불린다고 했다.
힘들게 살았을 그녀의 삶 끝에 남은것은 제법 커다란 술집이었는데 그곳을 건달들이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주자니 아깝고 안주자니 폭력앞에 무기력했고. 그래서 도망치듯 숨어 살았다는 것이다.
차라리 도망치려면 이곳을 벗어날 것이지... 허나 그녀는 이곳에서 태어나 목포외에 다른곳을 가
본적도 가고자 했던적도 없었다했다.
그녀의 이모가 그것을 거부하게 만들었는데 추림은 이해가갔다.
특이한 외모로 살아가기엔 사회가 너무 냉소적이었을 터였다. 결국에 하류계속에서 전전했을 고
단한 삶이었을 것이다.
눈물로 자신의 사연을 말한 린다는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구타에 상처입은 얼굴인데도 그녀의 외모는 확실히 타고났는지 무척이나 세련된 미모였다.
그런데 웃겼다. 자국인이 아닌데 한국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것이 무척 이질적으로 느껴진
탓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러시아어는 물론 일어와 영어도 능숙하게 구사했다.
언어능력을 타고났는지 그것을 혼자 배웠다니 환경만 좋았다면 능히 큰 배움을 가졌을 그녀라
느껴졌다.
잠든 그녀를 놓고 잠시 밖에 나간 추림이 혼비백산해서 튀어들어왔다.
역시나 시내엔 건달들이 눈에띄게 늘어나 있었다. 도대체 린다의 업소가 어떤 의미기에 수십명
이나 동원될까라는 호기심이 생겼다.
"린다. 린다!"
방으로 돌아온 추림이 난감해져서 잠든 린다를 깨웠다.
자고 일어난 린다는 한결 차분해진 얼굴로 추림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린다의 정체가 뭡니까? 겨우 업소 하나 먹자고 놈들이 이리떼처럼 시내를 쑤시고 다닐
리가 없잖습니까? 난 지금 서울로 가는 길인데... 일이 이상하게 되어버렸단 말입니다."
추림의 말에 불안한 얼굴이 된 린다는 뭔가 생각하는듯 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우선 절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제게 고마우신 분이지만... 솔직히 당신을 믿지 못한것도
맞아요. 남자들이건 누구든 항상 절 욕심냈거든요."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다. 물건인가? 욕심낸다는게 마치 그렇게 느껴졌다.
"누가 누굴 오해해요? 난 다만 황당할 뿐입니다. 당신을 알고싶지도 알지도 못한단 말입니다."
조금 화가난 추림이 퉁명하게 말하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아버지 얼굴을 한번도 본적없이 자랐어요. 몸이 허약했던 엄마는 제가 스므살 무렵에 돌아가셨
는데... 삼년전에 아버지를 잘 아는 사람이 찾아왔어요. 러시아 사람이었는데, 자신은 변호사고
아버지의 유언을 전하러 왔다고 했어요."
여전히 알송달송한 말이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더 듣고 볼일이었다.
린다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린다의 눈빛이 빛을 머금었다.
"아버지는 러시아에서 유명한 마피아였다고... 사고로 돌아가셨데요. 아버지의 재산 중 일부가
제게 돌아왔어요. 참 웃긴 일이지 않아요? 생면부지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죽고나서 그 소식을
들려주다니."
놀라운 말이었다. 러시아는 제국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나라였다. 거대하고 엄청난 자원을 소유
한 얼음의 나라. 하지만 공산주의와 냉전이라는 문재를 해결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엄청 혼란
스런 나라였다.
러시아는 딱 두가지로 대변되는데 그 하나가 나라를 이끄는 이면에 존재하는 어둠, 마피아였다.
정치든 군부든 기업이든 어디에도 그들은 있고 존재했다.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마피아 조직을 지닌 나라, 마피아가 군을 장악하고 정치를 좌지우지 하는
괴상한 나라였다.
"여자 혼자서 수십억의 돈을 지니고 혼자 살아가는게 쉬운 일이 아니란걸 절실히 깨달았어요.
그들이 처음에 다가왔을때 이러지 않았어요. 아주 근사한 남자가 접근하고 절 유혹했는데 하마
터면 속을뻔했죠. 제가 그들의 속셈을 알자 저들은 절... 당신도 그들과 같나요?"
추림의 머리속이 환해졌다.
놀라운 일이었다. 아버지의 유산이 수십억이 된다는것과 그 소유자 린다. 그리고 하이에나떼들
의 야비함.
추림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해가 간 동시에 엉뚱한 일에 휘말린 느낌이 들었다.
"바보같이. 법에 도움을 요청해보지 그랬습니까?"
답답한 마음에 추림이 말하자 린다의 고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해봤죠. 하지만 믿을게 못 되더군요. 이곳을 뜨려다가 보다시피 이렇게 되었어요. 그들의 뒤에
있는자가 누구라는것을 안다면 이해할 거예요."
추림은 린다의 말에 직감적으로 이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것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거물이 있다면 린다의 싸움은 생각보다 더 흉험할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라는 사람이 남긴것이 불행이라니 참으로 웃긴 일이네요."
웃기지도 않은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린다의 말이 사실로 여겨지는데는 촌각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거리로 나선 추림의 눈에 나 건달이요하는 자들이 활보하고 다니는것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린다를 이대로 놔둔채 자신만 몸을 빼면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추림이라는 이 괴이한 놈은 절대 그런것과는 체질적으로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삼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모텔에서 생면부지의 사람과 동거아닌 동거가 시작된 내내 추림과 린다는 모호한 경계를 진 채
근심을 떠앉고 지냈다.
린다의 눈에 비친 추림!
이리같고 승냥이 같은 남자들만을 봐온 그녀의 눈에는 추림이 무척이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자신보다 어리지만 무언가 큰것을 지닌 남자였다.
자신을 건들려하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
알고있었다. 자신의 외모가주는 매력을, 백이면 백명 모두 자신을 가지려했던 남자들.
그는 창밖을 내다보며 온통 어떤 생각에 빠져 있는듯 보였다.
자신의 처지는 하루이틀이 아니어서 이제 만성이 된 터였다. 거의 포기하고 싶은 심정에서 만난
추림은 린다에게 어떤 희망이 생기기 시작한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것이다.
그에게 기대도 될까?
살아온 인생이 너무도 척박하고 험하기만 했던 날이었다.
배신이 판을치고 이익에 따라 움지이는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살수 있다는
현실이 더욱 더럽고 추악스러웠다. 한명 정도는 제대로 된 이가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있었는
데......
하늘에 별이 유난히도 찬란한 시월의 어느날 밤.
잠든 추림을 응시하던 린다의 눈이 반짝하고 빛을 머금었다.
(51장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