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3-33화> 한나의기억1

바다의기억2006.09.04
조회7,574

9월입니다.

 

대부분의 학교가 개학을 했는데

 

다들 적응은 잘 하고 계신지.

 

모쪼록 하루 속히 올빼미 생활을 청산하고

 

아침형 인간으로 거듭나시길 바라겠습니다.

 

========================== 주말 마다 생활 패턴이 바뀌는 난.... =========================

 

 

우리 가족은 늘 두 명이었다. 아빠, 그리고 나.


그건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오래된 사실이었기에


자라면서도 별다른 불만은 없었다.


엄마가 없다는 건 가끔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 사실을 커버하고 남을 만큼 아빠는 능력 있고,


멋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은행에서 굉장히 높은 사람이었던 아빠는 늘 바빴고,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뉴욕에서, 싱가포르로, 다시 호주로....



= 한나야, 새로운 학교 가서도 잘 할 수 있지?


= 응, 맡겨만 둬.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아빠를 따라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던 나에겐


정말 친하다고 할만한 친구들이 없었다.


같은 이유로 내가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없었고,


나를 엄마 없는 아이라고 놀릴 사람도 없었다.


모두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던 나의


극복할 수 없는 결점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난 늘 아빠에게 고마워했다.



11살이 되던 해,


난 캔버라를 떠나 처음으로 아버지의 모국인


한국이라는 나라에 오게 되었다.


처음 공항에 내려섰을 때부터


코를 자극하던 매캐한 공기.


조악한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갑갑하기 짝이 없는 거리는


내 마음 속에 있던 환상을 순식간에 박살내 주었다.


고작 이런 나라에 오기 위해 아빠는


내게 늘 한국말을 가르친 걸까?



= 오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새로운 친구가 전학을 왔어요.

한나야, 자기소개 하렴.


= Hello everyone, my name is Hanna-Yoon.

It is because of my dad's business

that I came to this school in the countryside.

I don't really want to stay in this rural place

but I don't really care

because I am moving somewhere else soon.

So do not count me in any of your activities

and carry on with your normal lives.

(모두 안녕, 내 이름은 윤한나야.

이런 시골 학교에 오게 된 건 아빠의 일 때문이야.

난 여기 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어차피 금방 떠날 거니까 별로 신경은 안 써.

그러니까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들이나 열심히 해 줘.)


한시도 이런 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던 난


전학첫날부터 그렇게 귀를 막고, 입을 닫았다.


처음엔 호기심에 접근해오던 아이들도


=What? Do you speak english?=


한 마디면 더듬더듬


=Yes, just a little=


따위를 늘어놓다가 제풀에 떨어져 나갔다.



한 두 달만 잘 버티면 다시 예전에 살던 곳으로...


아니면 최소한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나지만,


3개월이 지나고, 4개월이 지나도록 이사 소식은 없었다.


견디다 못한 난 매일 저녁 아빠를 졸랐지만,


그 때마다 돌아온 건 따끔한 호통 뿐.


결국 백기를 들고 만 난


울며 겨자 먹기로 한국생활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한국말이야 아빠한테 귀에 못이 박히게 배웠으니


적당히 못하는 척 흉내만 내면 될 일이었다.



= 한나야, 밥 같이 먹을래?


= What? 아... Okay, 그러자.



그런 생활을 하면서


난 이곳 아이들이 생각보다 유머 있고 착하다는 걸 알았다.


아직 한국말이 서툰 흉내를 내던 난


아이들 사이에서 정말 웃긴 개그가 나올 때면


웃음을 참느라 한참을 고생해야 했다.


특히 최불암 시리즈와 사오정 시리즈는 최고였다.



한국에 온지 9개월 째,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한국 생활에


인간의 적응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새삼 느낄 때 쯤,


아빠가 내게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 인사하렴, 앞으로 네 엄마가 될 사람이란다.


= 엄마?


= 그래, 한나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지?



난 그제야 아빠가 한국에 온 진짜 목적을 알 것 같았다.


도수 높은 안경에 양 갈래로 땋은 머리,


센스 없는 원피스를 입은 아줌마의 첫 모습은


한마디로 비호감이었다.


미남에, 부자에, 옷도 늘 멋있게 입는 아빠가


확실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때 기분으론


=아냐, 아빠, 조금 더 생각해봐. 내가 더 좋은 사람 소개시켜 줄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 ......



바로 아줌마의 손을 잡고 서있는 내 또래의 여자 아이.


한쪽 팔엔 자기 키의 반은 됨직한 인형을 꼭 끌어안고


초롱초롱한 눈방울을 빛내는 그녀는


동생 삼으면 정말 좋을 것 같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


이거.... 본래 상품보다 사은품이 더 끌리는 꼴이잖아?



= 음? 한나는 민아가 마음에 들었나본데?


= 민아야, 안녕해봐. 한나라고, 네 동생이 될 거야.



잠깐, 내가 동생이라고?


도저히 그렇겐 안 보이는데?


키도 내가 훨씬 크고.... 동생이면 몰라도...


저런 꼬마를 어떻게 언니라고 불러?



= 아....안녕.... 이거.... 너 줄게.


= 응?


= 얘 이름은 헤라클레스야. 잘 보살펴 줘....



과연 3년 안에 저 꼬마가


내가 꿈꾸는 언니상에 도달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는 사이


안고 있던 토끼 인형을 넘겨주고


쪼르르 아줌마에게 돌아가는 그녀.



= 어머? 민아도 한나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원래 다른 사람은 자기 인형에 손도 못 대게 하는데...


= 그것 참 다행인데?



잠...잠깐! 난 아직 이 꼬마를 좋다고 말한 적 없어!


게다가 이 축 늘어진 토끼 인형 이름이


헤라클레스인 건 아무도 신경 안 쓰는 거야?


이 맥아리 없는 인형이 전설의 초인 허큘리스라고!!



= .......



아냐, 도저히 아냐! 동생으론 딱일지 몰라도


언니론 정말 아니라고~!!


아빠, 우리 협상해요!


둘이 결혼하는 대신 언니 동생 순서는 바꿔줘!



내가 그녀의 존재를 놓고 갈등하는 사이,


어느새 아빠는 그 아줌마와 결혼해버렸고....


우리 가족은 순식간에 둘에서 넷으로 늘어났다.



= 하, 한나야....


= 왜.


= .... 우리 인형놀이 할래?



우리 집에 함께 살게 된 뒤로


시도 때도 없이 그로테스크한 인형을 들고 와


인형놀이를 하자며 조르는 그녀.


정말.... 외모로 보나 행동으로 보나 언니로 인정할 수 없는 요소뿐이다.



= 시.... 싫으면 어쩔 수 없고.



특히 저 엄청나게 내성적인 성격!


3초만 아무 대답 없이 보고 있어도


기가 죽어서 밖으로 나가는 그녀는


불쌍하리만치 소심한 성격이었던 것이다!


그 풀죽은 뒷모습을 보는 건 나도 마음이 아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형놀이는 심했지 않은가?



12살이나 되었다면서


밖에 나갈 때도 인형을 손에서 놓지 않는 그녀.


외모가 8~9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탓에


주변에선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 눈에 그 인형들은 가시 같은 존재였다.



무엇보다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암담한 작명센스!


그녀가 내게 줬던 헤라클레스는 게 중 양반이었다.


머리 큰 사자 인형 이름은 아수라였고,


공룡인형 이름은 마르두크(메소포타미아신화에 신의 이름)였다.


인형 수가 많다보니 그런 이상한 이름이 붙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하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 어울리면서,


들으면 알만한 이름을 붙여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나자


드디어 그녀도 포기를 한 것인지


더 이상 내 방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이제 더는 그로테스크한 인형들의 압박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편안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있으니


문득 그녀가 뭘 하고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살금살금 그녀의 방문 앞으로 다가가자


안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둘리! 이러면 안돼요, 아버지가 용서하지 않으실 거예요!


= 캔디... 내 눈을 봐 캔디. 내 사랑이 거짓 같아?


=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하지만....

우린 절대 만나선 안 될 운명이었어요!


=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마.

가문이니, 운명이니 하는 건 이제 잊어버려!

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도 나를 사랑해.

그 사실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는 거야?


= 나는 모두에게 축복받는 사랑을 하고 싶어요.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살고 싶진 않다고요!


= 그럼 도망치자,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 아뇨, 아버지는 반드시 절 찾아낼 거예요.

어디로 도망친다 한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어쩐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인형놀이보다는


상당히 고차원적인 대화.


분위기와 안 맞는 이름만 어떻게 한다면


충분히 흥미진진하게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 네 이놈! 여기서 지금 뭐하는 짓이냐!


= 앗... 아버지!


= 캔디.... 내가 더글라스가문 인간들과는

상종을 하지 말라 누누이 이야기했거늘....

지금 이 아비 얼굴에 먹칠을 할 셈이냐!!


= 죄송해요 아버지. 하지만 둘리씨는 달라요.

제발 우리의 사랑을 이해해 주세요!



아, 처음 알았다. 둘리의 성은 더글라스였구나. 더글라스 둘리.....



=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이리 오지 못해!


= 아버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한번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 누가 네 아버님이냐! 이봐, 당장 저 녀석을 끌어내!


= 둘리씨! 흑흑....


= 이것 놓지 못해! 이야아아압!!


= 크앗, 으엇.... 배...백작님 저희 힘으론 녀석을 감당할 수가....!!


= 아, 아니 뭐야? 저, 저놈이...저놈이.... 억!!


= 꺄악! 아버지!!



응? 뭐야, 캔디 아빠가 화나서 쓰러진 거야?


무슨 인형놀이에 고혈압까지 나와?



= 이게 다 둘리씨 때문이에요!

이래서 모두에게 축복받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고 한 건데....!


= 캐....캔디....!!


= 가요! 이제 다신 둘리씨를 보고 싶지 않아요!



이후로도 반전과 위기를 거듭하며 계속되어가는 이야기.


스토리 자체도 상당히 흥미 있었지만


압권이었던 건 소름이 돋을 만큼 실감나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어느새 남자주인공이 초록색 3등신 파충류고,


여자주인공이 거울속의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도 잊은 채 이야기에 몰두해버린 나.



= 캔디야.....


= 예, 아버지.


= 더글라스 그 놈이 그렇게 좋으냐?


= ......


= 내 서재에 있는 책상에 보면 통장이랑 도장이 하나 있다....

나중에 네가 결혼 할 때 주려고 모아둔 것이지....

그걸 가지고 떠나거라.


= 아... 아버지!!


= 어서, 네 엄마가 알기 전에... 아, 통장 비밀번호는 6789란다.



2년에 걸친 기나긴 설득 끝에


둘리와 캔디의 사랑을 인정한 아버지.


혹시라도 계좌에서 돈을 못 찾을까봐


비밀번호까지 잊지 않고 알려주는 그의 세심한 배려에 코끝이 찡해졌다.


이제야 둘이 행복하게 살겠구나....



= 둘리씨! 둘리씨!


= 앗...캐...캔디!


= 드디어 아버지가 승낙해주셨어요! 그런데.... 옆에 있는 건 누구에요?


=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오빠, 저 사람 누구야?


= 아.... 그.... 그게.....


= 둘리씨,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난 2년간 줄곧 이 날만을 기다리면서...


= 캔디, 정말 미안해.

하지만 2년이란 시간은 내게 너무 길었어.

게다가 아버님이 쓰러지시던 날 분명히 나한테 그랬잖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 어떻게...어떻게 당신이 이럴 수가..... 흑!!


= 하핫! 거봐라! 내가 더글라스 가문 놈들은 믿지 말라고 했었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캔디야, 이제 저놈의 실체를 알겠니?


=고혈압을 위장한 아버지의 계략으로

바람둥이 더글라스 가문의 실체를 알게 된 캔디는

이후 남자들을 믿지 못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의지할 건 돈 뿐이라는 생각이 든 그녀는

아버지가 주었던 결혼 자금으로 부동산 산업에 뛰어들어...



잠....잠깐 뭐? 뭐가 어쩌고 어째?


운명의 굴레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에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야?


참다 못한 난 그녀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소리쳤다.



= 대체 그 이야기가 왜 그렇게 끝나는 거야!

둘은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새롭게 행복한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돼야지!!


= 응? 하..한나야, 언제부터 듣고 있었어?


= 둘리가 캔디한테 도망가자고 할 떄부터!


= ..... 그렇지만 그렇게 끝내면 너무 반전이 없잖아.

이제부터 캔디가 부동산계의 큰손이 되고,

사업의 실패로 가산을 탕진한 둘리가

그녀를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계속...


= 인형놀이 가지고 이상하게 현실적으로 가지 마!

아까 거기서 이런 식으로 마무리를 지어야....


그렇게 난 그녀와 처음으로 인형놀이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