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시나 되었을까? 새벽 5시 12분이였다. 항상 틀에 박혀 돌아가는 시계처럼 하루도 어김없이 제 시간에 현의 몸은 깨어났다. 할 일이 없었다. 평일같으면 일본어 회화학원에 가야하는데,오늘이 일요일이었기에. 다시 누워도 잠이 올것 같지 않았다. 아직 도서관 개관까지 이른시간이었다. 목욕이라도 갈까, 공부를 할까, 잠시 망설여졌다.
운동이 하고 싶어졌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약수터까지라도 다녀와야지 하는 마음에 준비를 했다. 그냥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새벽공기가 온몸을 휘감는듯 했다. 약수터를 향해 몇 발자국 걷자 뒤에서 누군가 현을 불렀다.
"새벽부터 어디가나?"
현이 뒤돌아 보았다. 소장님이었다.
"안녕하세요."
"일찍일어났네?"
"어제 저녁에 너무 일찍 자서 그런지....."
"운동 갈려구?"
"네. 마땅히 할 게 없어서......"
"잘됐네. 나랑 조기축구회 가자. 오늘 상가 번영회팀이랑 시합이 있거든."
소장님은 매주 일요일마다 조기축구를 하신다. 몇해전 교통사고이후 눈이오던 비가오던 매주 조기축구에 흠뻑 빠져 사셨다. 물론 담배도 끊으셨고, 술도 많이 줄였다.
현도 축구를 좋아했지만 그것마저 현에게는 사치였다. 일과 공부외에 남들이 아주 평범하게 하더라도 현에겐 시간 낭비였고 사치였을 뿐이었다.
축구 경기를 하는 초등학교 운동장에 들어서자 새벽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아빠가 경기하는 모습을 보러온 꼬마 아이들도 있었고, 가족 모두를 데려온 사람도 있었다.
차를 타고 오면서 소장님에게 축구의 테크닉부터 경기방식, 소장님의 무용담을 귀담아 들었다.
물론 현이 고등학교 시절, 도내 최강의 고교팀이 현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축구부였다.
현도 공을 차는 솜씨가 제법이라 축구부에 선발되었지만, 가정 형편상 축구를 할 수 없었다.
2학년이 되면서 축구보다 공부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소장님의 얘기를 들으면서 잠깐동안 추억속에 현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햇살이 대지에 내려앉자 축구 시합이 시작되었다. 아마추어 축구 시합이지만 양팀 모두 다 열심히 경기를 했다. 소장님도 운동장을 열심히 뛰어 다니셨다. 꼬마 아이들이 자기 아빠가 공을 잡자 '와' 하며 함성을 내질렀다. 소장님이 소속된 배달의 기수팀이 상가 번영회팀에게 선취골을 내어줬다. 경기가 시작된지 10분만에. 상가 번영회팀 선수들이 얼싸안으며 함성을 질렀고, 응원석에서도 함성이 터져나왔다. 현이 소장님의 얼굴을 보자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전반전 종료를 알리는 주심의 휘슬이 있었고, 전반전까지 결과가 2:0으로 배달의 기수팀이 일방적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땀으로 흠뻑 젓어 힘없이 소장님이 현에게 다가왔다.
"멎진 모습 보여 줄려고 했는데, 잘 안 풀리네."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잘 하시던걸요." 현이 힘을 실어주는듯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이고, 후반전에 못 뛰지 싶다. 너무 많이 뛰어다녔더니 다리에 무리가 오네."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다시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운동장으로 나가시는 소장님의 발걸음이 너무 무거워 보였다. 그러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골문을 향해 대시하던 소장님을 상대수비수가 뒤에서 무리한 태클을 걸었다. 소장님이 왼쪽 장딴지를 손으로 감싸하며 운동장에 나뒹굴었다. 현이 타올을 들고 운동장안으로 뛰어갔다. 장단지에 어느새 검붉은 피멍이 들었다.
같은 팀 선수들이 소장님을 부축해서 밖으로 나가려했지만 일어서지를 못했다. 현이 등에 업고 겨우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경기가 중단되었다. 후보선수가 없는 배달의 기수팀으로서 2:0으로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공격의 핵이던 소장님의 부상으로 더이상 경기를 끌고 나갈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소장님의 생각은 다른듯 했다.
"총무. 어..떻..게 든 경...기는 끝...내." 고통스러운듯 신음소리를 토하며 말을 겨우 이었다.
"하지만 후보도 없고 지고 있는 경기를 어떻게 합니까?" 소장님보다 서넛살 어려보이는 총무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말했다.
"얌마. 여기서... 끝내면 상가에 물건 받으러 갈때마다....." 고통스러운듯 더이상 말씀을 잇지 못했다.
"제가 뛰겠습니다. 그냥 머리수만 채우는 거라면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현이 말했다.
소장님이 고개를 끄덕였고, 총무가 주심에게 뭐라 얘기를 한 후 손짓을 하자 현이 운동장으로 뛰어들어갔다. 평소 안면이 있는 분도 계셨다. 현이 가볍게 목례를 했다.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미 후반전도 20분을 훌쩍 넘어버린 상황이라 상가 번영회팀의 경기 진행이 느슨했다. 후보 선수를 교체하면서 약을 올리는 듯 했다. 승리의 여신이 마져도 배달의 기수팀을 버렸는지 공격의 실마리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총무가 공을 몰아 미더필드를 넘자 배달의 기수팀이 골키퍼와 현을 남겨두고 전원이 공격에 가담을 했다. 현도 공격에 가담하고 싶었지만 축구화가 아닌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그저 머리수만 채우려고 했기때문에 공격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실패였다. 상대 수비수에 막힌 공이 제빠르게 상대 공격수에게 넘겨졌고, 공이 어느새 문전까지 다달아 있었다. 배달의 기수팀 선수들이 수비진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후반들어 체력 저하로 뛰어오는 속도가 늦었다.
위기였다. 상대 공격수를 현이 가로막자 가소롭다는듯이 '씨-익' 웃었다.
공격수가 제법 빠른 발놀림으로 현을 제치려했지만 공은 어느새 현의 발아래 있었다.
수비진영으로 내려오던 선수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다시 공격진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패스 할 맘이 없었다. 단독 드리블로 상대 문전까지 다다르자 현이 중거리 슛을 날렸고 골네트를 흔들었다. 자리에 주저앉아 경기를 보던 소장님이 벌떡 일어서서 운동장으로 뛰어 들어왔다.
" 우와. 대단한데. 정말 멎진 골이었어."
배달의 기수팀 선수들뿐만 아니라 상대 상가 번영회팀 선수들도 현에게 칭찬을 했다.
그 후로 몇번의 득점 기회가 있었지만 배달의 기수팀의 만회골도 상가 번영회팀의 추가골도 없이 경기가 끝났다. 소장님이 장딴지에 경련이 일어나며 고통스러워 하자 현이 땀 닦을 겨를 없이 병원으로 향했다.
햇살이 창문을 두드리자 지은이 침대에서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어제 만날 수도 있었던 현의 그림자를 놓쳐버린 아쉬움에 밤새 뒤척였다. 그래도 희망은 생겼다. 상우에게 연락을 한다던 후임병이 반가운 소식을 전해 줄 것만 같았다.
일층으로 내려오자 지은의 어머니께서 TV를 보고 계셨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점심식사 하자." 지은의 어머니가 TV를 끄시며 말했다.
지은이 주방으로 들어서자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식사 준비를 하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늦잠을 잔 모양이네요."
"네." 지은이 물컵에 물을 따르면서 대답했다.
"사모님 식사 준비 다 되었습니다."
시간이 벌써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지은은 늦잠을 잔 관계로 아침 겸 점심식사였다.
마당에서 골프 연습을 하시던 아버지가 식탁에 앉으시자 점심식사가 시작되었다.
"지은아. 오후에 특별한 약속있니?"
"아뇨. 사진동아리 모임말곤 없습니다."
"오늘 아빠랑 라운딩 가면 안될까?"
"조금 곤란한데, 제가 동아리 총무라서......"
"오늘 아빠 친목계에서 라운딩 하시는데, 자녀 동반이란다. 웬만하며 같이 가지."
지은의 어머니가 모임의 중요성을 설명하듯 말씀하셨다.
"그럼 식사 끝나고 회장한테 전화해서 뒤로 미룰께요." 지은이 대수롭지 않다는듯 말했다.
식사를 마치고 지은이 아버지와 함께 골프장으로 향했다.
현이 병원에서 나온 시간이 12시 30분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샤워를 했다. 옷을 벗자 진한 땀냄새와 함께 모처럼 격한 운동을 해서 그런지 온 몸에 가벼운 통증이 왔다.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자 시장기가 돌았다. 축구 시합전 아침을 먹긴 했지만 한창 먹을 나이에 배고픈게 당연한 일이었다. 식당에 가기위해 일층으로 내려오자 텔릭스 사장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순간 머리속에 잊고 있던 약속이 생각났다. 아무렇지도 않은듯 현이 텔릭스 사장님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현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김군. 내가 10분 일찍왔네. 오늘 오후에 스케줄이 어떻게 되나?" 텔릭스 사장님이 현의 인사를 받으며 말했다.
"오후 시간은 비어있습니다."
"그러면 오후 시간을 나한테 할애해주지 않겠나?"
"무슨 일이라도."
"오늘 중요한 모임이 있는데, 자녀 동반이라 그러네."
현이 소장님을 병원으로 데려가면서 들은 얘기가 있었다. 텔릭스 사장님 즉 김윤호 사장님은 자녀가 없었다. 몇해전 소장님이 교통사고 나던 그 해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나서 먼저 세상을 하직했단다. 그 얘기를 듣자 현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릴적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일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죽는다는게 살아있는 사람에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현은 잘 알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현이 흔쾌히 승낙을 했다.
"고맙네. 미안하지만 이 옷으로 갈아 입어 주겠나. 골프복이네." 김윤호 사장이 차에서 종이가방을 꺼내 현에게 주었다.
"네?" 현이 놀라며 말했다.
"놀랐는가? 그럼 미안하네. 내키지 않으면 혼자가도 된다네." 김윤호 사장이 미안해 했다.
"아, 아닙니다." 현이 손사래를 치며 종이가방을 들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현이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자 역시 지난 토요일처럼 김윤호 사장이 아래 위를 훑어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현이 탄 차가 교외로 들어서자 도심과 달리 공기가 아주 맑았다. 날씨마져도 겨울이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따뜻했다.
세상에 태어나 골프장에 처음 와 보았다. 아니 골프라는 운동자체가 낯설었다.
입고 있는 옷이 작거나 크지 않았음에도 어색했다. 골프장에 간다는 자체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김윤호 사장이 차를 주차장에 세우자, 누군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김사장님." 김윤호 사장을 잘 알고 있다는듯 여자분이 차로 다가오며 말했다.
"미향씨. 오랜만이네." 김윤호 사장이 반가운듯 말했다.
"오늘 다 모이시나봐요. 방금전에 박사장님도 따님과 함께 오셨어요."
"그래. 나도 오늘 아들이랑 왔지." 김윤호 사장이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며 말했다.
"어머머 미남이시다." 여자가 현에게 다가오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현이 목례를 했다. 후에 라운딩을 하면서 방금전에 여자가 캐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윤호 사장이 가벼운 식사라도 하자며 골프장내에 마련된 라운지로 들어서자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을 흔들었다. 김윤호 사장이 눈인사를 하며 다가갔다. 현이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려고 얼굴에 미소를 짓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박사장님. 오랜만입니다." 김윤호 사장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얼굴 잊어버리겠습니다. 얼마만입니까?"
"현아. 인사드려라. 이분은 동방전자 박원규 사장님이시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현이라고 합니다."
현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반가워요. 아버지를 닮아 호남아일세." 박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혼자 오셨습니까?"
"아니요. 딸 아이랑 같이 왔는데, 전화 통화한다고 잠시 나갔습니다."
"그래 지금 어느 학교에 다니는가?" 박사장이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현에게 물었다.
"서울대에 다닙니다. 얼마전 전역하고 3월에 복학합니다."
"오호." 박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박사장님 식사 준비 되었습니다." 방금전 주차장에서 만났던 캐디가
옆 테이블을 가르키며 말했다.
"식사 안 하셨으면 같이 하시죠?"
"아직 식사전이오? 어서 가서 드세요. 우린 먹고 왔습니다."
현이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박사장의 딸로 보이는 예쁜 아가씨가 들어왔다.
박사장이 김윤호 사장에게 딸을 인사시켰고 현이 목례를 했다.
박사장이 먼저 라운딩간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현과 김윤호 사장이 뒤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지은이 아버지를 따라 나오면서 계속 뒤돌아 보았다. 방금전 인사를 나누었던 김윤호 사장의 아들이 낯설지 않았다. 어디서 많이 본 듯 했다. 김현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인사만 나누고 이름을 물어보지 않은게 후회가 되었다. 다시 들어가 물어보려 했지만 두 사람이 식사중이라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이따 라운딩하다 만나면 물어볼 생각에 아버지를 따라갔다.
식사를 마친 현과 김윤호 사장도 라운딩을 하기 위해 1번 코스로 들어섰다. 박사장의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현은 김윤호 사장이 골프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여전히 어색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지은이 주위를 계속 두리번 거렸다. 벌써 마지막 코스를 돌고 있었지만 김사장의 일행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체념을 했다. 상우의 말대로라면 그저 닮은 사람일 뿐이었다.
어릴적 부모님을 교통사고로 모두 잃었고, 전역후 복학 학비를 벌고 있다고 했다.
상쾌한 하루였다. 비록 닮은 사람이었지만, 지은은 아직도 현을 잊지 않은 마음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모처럼 아빠랑 함께한 시간이어서 더욱 행복했다.
사진(#7)
얼마나 잤을까? 눈이 번쩍 뜨였다. 창문너머 밖은 아직 어두운데, 핸드폰을 찾았다.
몇 시나 되었을까? 새벽 5시 12분이였다. 항상 틀에 박혀 돌아가는 시계처럼 하루도 어김없이 제 시간에 현의 몸은 깨어났다. 할 일이 없었다. 평일같으면 일본어 회화학원에 가야하는데,오늘이 일요일이었기에. 다시 누워도 잠이 올것 같지 않았다. 아직 도서관 개관까지 이른시간이었다. 목욕이라도 갈까, 공부를 할까, 잠시 망설여졌다.
운동이 하고 싶어졌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약수터까지라도 다녀와야지 하는 마음에 준비를 했다. 그냥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새벽공기가 온몸을 휘감는듯 했다. 약수터를 향해 몇 발자국 걷자 뒤에서 누군가 현을 불렀다.
"새벽부터 어디가나?"
현이 뒤돌아 보았다. 소장님이었다.
"안녕하세요."
"일찍일어났네?"
"어제 저녁에 너무 일찍 자서 그런지....."
"운동 갈려구?"
"네. 마땅히 할 게 없어서......"
"잘됐네. 나랑 조기축구회 가자. 오늘 상가 번영회팀이랑 시합이 있거든."
소장님은 매주 일요일마다 조기축구를 하신다. 몇해전 교통사고이후 눈이오던 비가오던 매주 조기축구에 흠뻑 빠져 사셨다. 물론 담배도 끊으셨고, 술도 많이 줄였다.
현도 축구를 좋아했지만 그것마저 현에게는 사치였다. 일과 공부외에 남들이 아주 평범하게 하더라도 현에겐 시간 낭비였고 사치였을 뿐이었다.
축구 경기를 하는 초등학교 운동장에 들어서자 새벽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아빠가 경기하는 모습을 보러온 꼬마 아이들도 있었고, 가족 모두를 데려온 사람도 있었다.
차를 타고 오면서 소장님에게 축구의 테크닉부터 경기방식, 소장님의 무용담을 귀담아 들었다.
물론 현이 고등학교 시절, 도내 최강의 고교팀이 현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축구부였다.
현도 공을 차는 솜씨가 제법이라 축구부에 선발되었지만, 가정 형편상 축구를 할 수 없었다.
2학년이 되면서 축구보다 공부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소장님의 얘기를 들으면서 잠깐동안 추억속에 현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햇살이 대지에 내려앉자 축구 시합이 시작되었다. 아마추어 축구 시합이지만 양팀 모두 다 열심히 경기를 했다. 소장님도 운동장을 열심히 뛰어 다니셨다. 꼬마 아이들이 자기 아빠가 공을 잡자 '와' 하며 함성을 내질렀다. 소장님이 소속된 배달의 기수팀이 상가 번영회팀에게 선취골을 내어줬다. 경기가 시작된지 10분만에. 상가 번영회팀 선수들이 얼싸안으며 함성을 질렀고, 응원석에서도 함성이 터져나왔다. 현이 소장님의 얼굴을 보자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전반전 종료를 알리는 주심의 휘슬이 있었고, 전반전까지 결과가 2:0으로 배달의 기수팀이 일방적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땀으로 흠뻑 젓어 힘없이 소장님이 현에게 다가왔다.
"멎진 모습 보여 줄려고 했는데, 잘 안 풀리네."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잘 하시던걸요." 현이 힘을 실어주는듯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이고, 후반전에 못 뛰지 싶다. 너무 많이 뛰어다녔더니 다리에 무리가 오네."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다시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운동장으로 나가시는 소장님의 발걸음이 너무 무거워 보였다. 그러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골문을 향해 대시하던 소장님을 상대수비수가 뒤에서 무리한 태클을 걸었다. 소장님이 왼쪽 장딴지를 손으로 감싸하며 운동장에 나뒹굴었다. 현이 타올을 들고 운동장안으로 뛰어갔다. 장단지에 어느새 검붉은 피멍이 들었다.
같은 팀 선수들이 소장님을 부축해서 밖으로 나가려했지만 일어서지를 못했다. 현이 등에 업고 겨우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경기가 중단되었다. 후보선수가 없는 배달의 기수팀으로서 2:0으로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공격의 핵이던 소장님의 부상으로 더이상 경기를 끌고 나갈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소장님의 생각은 다른듯 했다.
"총무. 어..떻..게 든 경...기는 끝...내." 고통스러운듯 신음소리를 토하며 말을 겨우 이었다.
"하지만 후보도 없고 지고 있는 경기를 어떻게 합니까?" 소장님보다 서넛살 어려보이는 총무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말했다.
"얌마. 여기서... 끝내면 상가에 물건 받으러 갈때마다....." 고통스러운듯 더이상 말씀을 잇지 못했다.
"제가 뛰겠습니다. 그냥 머리수만 채우는 거라면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현이 말했다.
소장님이 고개를 끄덕였고, 총무가 주심에게 뭐라 얘기를 한 후 손짓을 하자 현이 운동장으로 뛰어들어갔다. 평소 안면이 있는 분도 계셨다. 현이 가볍게 목례를 했다.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미 후반전도 20분을 훌쩍 넘어버린 상황이라 상가 번영회팀의 경기 진행이 느슨했다. 후보 선수를 교체하면서 약을 올리는 듯 했다. 승리의 여신이 마져도 배달의 기수팀을 버렸는지 공격의 실마리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총무가 공을 몰아 미더필드를 넘자 배달의 기수팀이 골키퍼와 현을 남겨두고 전원이 공격에 가담을 했다. 현도 공격에 가담하고 싶었지만 축구화가 아닌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그저 머리수만 채우려고 했기때문에 공격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실패였다. 상대 수비수에 막힌 공이 제빠르게 상대 공격수에게 넘겨졌고, 공이 어느새 문전까지 다달아 있었다. 배달의 기수팀 선수들이 수비진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후반들어 체력 저하로 뛰어오는 속도가 늦었다.
위기였다. 상대 공격수를 현이 가로막자 가소롭다는듯이 '씨-익' 웃었다.
공격수가 제법 빠른 발놀림으로 현을 제치려했지만 공은 어느새 현의 발아래 있었다.
수비진영으로 내려오던 선수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다시 공격진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패스 할 맘이 없었다. 단독 드리블로 상대 문전까지 다다르자 현이 중거리 슛을 날렸고 골네트를 흔들었다. 자리에 주저앉아 경기를 보던 소장님이 벌떡 일어서서 운동장으로 뛰어 들어왔다.
" 우와. 대단한데. 정말 멎진 골이었어."
배달의 기수팀 선수들뿐만 아니라 상대 상가 번영회팀 선수들도 현에게 칭찬을 했다.
그 후로 몇번의 득점 기회가 있었지만 배달의 기수팀의 만회골도 상가 번영회팀의 추가골도 없이 경기가 끝났다. 소장님이 장딴지에 경련이 일어나며 고통스러워 하자 현이 땀 닦을 겨를 없이 병원으로 향했다.
햇살이 창문을 두드리자 지은이 침대에서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어제 만날 수도 있었던 현의 그림자를 놓쳐버린 아쉬움에 밤새 뒤척였다. 그래도 희망은 생겼다. 상우에게 연락을 한다던 후임병이 반가운 소식을 전해 줄 것만 같았다.
일층으로 내려오자 지은의 어머니께서 TV를 보고 계셨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점심식사 하자." 지은의 어머니가 TV를 끄시며 말했다.
지은이 주방으로 들어서자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식사 준비를 하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늦잠을 잔 모양이네요."
"네." 지은이 물컵에 물을 따르면서 대답했다.
"사모님 식사 준비 다 되었습니다."
시간이 벌써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지은은 늦잠을 잔 관계로 아침 겸 점심식사였다.
마당에서 골프 연습을 하시던 아버지가 식탁에 앉으시자 점심식사가 시작되었다.
"지은아. 오후에 특별한 약속있니?"
"아뇨. 사진동아리 모임말곤 없습니다."
"오늘 아빠랑 라운딩 가면 안될까?"
"조금 곤란한데, 제가 동아리 총무라서......"
"오늘 아빠 친목계에서 라운딩 하시는데, 자녀 동반이란다. 웬만하며 같이 가지."
지은의 어머니가 모임의 중요성을 설명하듯 말씀하셨다.
"그럼 식사 끝나고 회장한테 전화해서 뒤로 미룰께요." 지은이 대수롭지 않다는듯 말했다.
식사를 마치고 지은이 아버지와 함께 골프장으로 향했다.
현이 병원에서 나온 시간이 12시 30분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샤워를 했다. 옷을 벗자 진한 땀냄새와 함께 모처럼 격한 운동을 해서 그런지 온 몸에 가벼운 통증이 왔다.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자 시장기가 돌았다. 축구 시합전 아침을 먹긴 했지만 한창 먹을 나이에 배고픈게 당연한 일이었다. 식당에 가기위해 일층으로 내려오자 텔릭스 사장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순간 머리속에 잊고 있던 약속이 생각났다. 아무렇지도 않은듯 현이 텔릭스 사장님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현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김군. 내가 10분 일찍왔네. 오늘 오후에 스케줄이 어떻게 되나?" 텔릭스 사장님이 현의 인사를 받으며 말했다.
"오후 시간은 비어있습니다."
"그러면 오후 시간을 나한테 할애해주지 않겠나?"
"무슨 일이라도."
"오늘 중요한 모임이 있는데, 자녀 동반이라 그러네."
현이 소장님을 병원으로 데려가면서 들은 얘기가 있었다. 텔릭스 사장님 즉 김윤호 사장님은 자녀가 없었다. 몇해전 소장님이 교통사고 나던 그 해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나서 먼저 세상을 하직했단다. 그 얘기를 듣자 현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릴적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일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죽는다는게 살아있는 사람에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현은 잘 알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현이 흔쾌히 승낙을 했다.
"고맙네. 미안하지만 이 옷으로 갈아 입어 주겠나. 골프복이네." 김윤호 사장이 차에서 종이가방을 꺼내 현에게 주었다.
"네?" 현이 놀라며 말했다.
"놀랐는가? 그럼 미안하네. 내키지 않으면 혼자가도 된다네." 김윤호 사장이 미안해 했다.
"아, 아닙니다." 현이 손사래를 치며 종이가방을 들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현이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자 역시 지난 토요일처럼 김윤호 사장이 아래 위를 훑어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현이 탄 차가 교외로 들어서자 도심과 달리 공기가 아주 맑았다. 날씨마져도 겨울이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따뜻했다.
세상에 태어나 골프장에 처음 와 보았다. 아니 골프라는 운동자체가 낯설었다.
입고 있는 옷이 작거나 크지 않았음에도 어색했다. 골프장에 간다는 자체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김윤호 사장이 차를 주차장에 세우자, 누군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김사장님." 김윤호 사장을 잘 알고 있다는듯 여자분이 차로 다가오며 말했다.
"미향씨. 오랜만이네." 김윤호 사장이 반가운듯 말했다.
"오늘 다 모이시나봐요. 방금전에 박사장님도 따님과 함께 오셨어요."
"그래. 나도 오늘 아들이랑 왔지." 김윤호 사장이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며 말했다.
"어머머 미남이시다." 여자가 현에게 다가오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현이 목례를 했다. 후에 라운딩을 하면서 방금전에 여자가 캐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윤호 사장이 가벼운 식사라도 하자며 골프장내에 마련된 라운지로 들어서자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을 흔들었다. 김윤호 사장이 눈인사를 하며 다가갔다. 현이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려고 얼굴에 미소를 짓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박사장님. 오랜만입니다." 김윤호 사장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얼굴 잊어버리겠습니다. 얼마만입니까?"
"현아. 인사드려라. 이분은 동방전자 박원규 사장님이시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현이라고 합니다."
현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반가워요. 아버지를 닮아 호남아일세." 박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혼자 오셨습니까?"
"아니요. 딸 아이랑 같이 왔는데, 전화 통화한다고 잠시 나갔습니다."
"그래 지금 어느 학교에 다니는가?" 박사장이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현에게 물었다.
"서울대에 다닙니다. 얼마전 전역하고 3월에 복학합니다."
"오호." 박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박사장님 식사 준비 되었습니다." 방금전 주차장에서 만났던 캐디가
옆 테이블을 가르키며 말했다.
"식사 안 하셨으면 같이 하시죠?"
"아직 식사전이오? 어서 가서 드세요. 우린 먹고 왔습니다."
현이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박사장의 딸로 보이는 예쁜 아가씨가 들어왔다.
박사장이 김윤호 사장에게 딸을 인사시켰고 현이 목례를 했다.
박사장이 먼저 라운딩간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현과 김윤호 사장이 뒤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지은이 아버지를 따라 나오면서 계속 뒤돌아 보았다. 방금전 인사를 나누었던 김윤호 사장의 아들이 낯설지 않았다. 어디서 많이 본 듯 했다. 김현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인사만 나누고 이름을 물어보지 않은게 후회가 되었다. 다시 들어가 물어보려 했지만 두 사람이 식사중이라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이따 라운딩하다 만나면 물어볼 생각에 아버지를 따라갔다.
식사를 마친 현과 김윤호 사장도 라운딩을 하기 위해 1번 코스로 들어섰다. 박사장의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현은 김윤호 사장이 골프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여전히 어색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지은이 주위를 계속 두리번 거렸다. 벌써 마지막 코스를 돌고 있었지만 김사장의 일행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체념을 했다. 상우의 말대로라면 그저 닮은 사람일 뿐이었다.
어릴적 부모님을 교통사고로 모두 잃었고, 전역후 복학 학비를 벌고 있다고 했다.
상쾌한 하루였다. 비록 닮은 사람이었지만, 지은은 아직도 현을 잊지 않은 마음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모처럼 아빠랑 함께한 시간이어서 더욱 행복했다.
김윤호 사장이 라운딩을 마쳤다.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마음속에 잔잔한 갈등이 생겨났다. 라운지에서 봤던 박사장님의 따님이 머리속에 그려졌다.
김윤호 사장님의 제안도 현의 마음을 복잡하게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