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이 사라진 사회, 토종이 사라져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사회,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지금 우리는 …….’
위의 글은 황대권님이 쓴 “야생초 편지”에 나오는 한 구절을 메모해 둔 글이다. 누구나 쓸 수 있는 평범한 글이지만 야생초 편지를 읽으면서 그 분위기의 느낌에 공감하며 읽었을 때 받는 감정은 여간 다른 느낌이 아니다.
또 이런 구절도 있다.
“우리 인간만이 생존 경쟁을 넘어서서 남을 무시하고 제 잘난 맛에 빠져 자연의 향기를 잃고 있다. 남과 나를 비교하여 나만이 옳고 잘났다고 뻐기는 인간들은 크고 작건 못생겼건 잘생겼건 타고난 제 모습의 꽃만 피워 내는 야생초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새삼스러운 말이라 할 것도 없다. 본연의 형질로 변함없이 제 모습으로만 피는 야생초는 언제나 우리의 산야에 예전의 모습으로 피고 진다.
나는 우리 야생초와 야생화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특별한 동기가 있어서 야생초를 좋아 하는 것도 아니고 태생이 시골인지라 어릴 때부터 친근하게 보면서 자란 탓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 오년 전 충남 공주시 우성면이라는 시골에서 살았을 때 우리집 주위 산자락과 들에는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고지고 했다. 나를 매혹시켜온 순박한 야생화는 지금 살고 있는 경주로 이사를 와서도 늘 내 곁에서 수줍은 모습으로 시절 따라 피고 지고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많이 띄는 꽃들은 패랭이, 민들레, 씀바귀, 할미꽃, 제비꽃, 인동초, 구절초, 개망초, 나팔꽃 따위를 캐어다 화단에 옮겨 심었는데 그 종류가 제법 쏠쏠하니 많았다. 야생화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끈질긴 생명력과 아무런 꾸밈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야생초를 볼 때마다 항상 말할 수 없이 놀라운 감정에 붙들리고야 마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야생초는 인위적인 손을 타지 않고 구태여 힘들여 비료를 주거나 물을 주거나 김을 맬 일손이 없어도 알아서 때가 되면 피거나 지거나 한다. 그리고 제 한 몸 씨내릴 곳만 있다면 박토건 옥토건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끈질긴 씨내림으로 종족을 보존하려는 본능의 소산이다. 또 야생 꽃은 꽃이 필 시기를 스스로 택해서 피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초지상적인, 비현세적인 인상을 내 마음속에 매혹적으로 던져 주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도저히 식물이 자라나지 못할 시멘트의 틈새나 심지어 사람들이 수없이 걸어 다니는 보도블록의 사이에 뿌리를 내려 그곳이 원래의 제자리인 듯이 동화되어 자리 잡은 야생초를 볼 때, 절벽 바위틈새에, 혹은 찬 눈밭에 핀 산(山)꽃들을 보면 경이로울 뿐이다. 처연히 조응된 야생화를 보게 될 때, 우리는 과연 야생화가 살아 숨쉬는 산천의 주인으로 꼽히는 이유를 잘 알 수 있겠지만, 그들에게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푸른 공기와 맑은 하늘을 대비적 배경으로 삼은 다음에라야만 고요히 피는 이 들꽃의 한없이 장엄하고 숭고한 기세에는, 친화한 동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굴복 감을 나는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야생초가 피우는 꽃의 향내는 확실히 사람의 손길에 개량되어 채색된 아름다운 인공적인 꽃보다야 다르지만 산야를 바탕삼아 때 맞는 계절에 수더분히 피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명적인 꽃이 아닌가 한다. 이 들풀 들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초고하고 견개한 정절의 꽃이 아니라하면 안 될 것이다.
모든 고난과 고통을 어려움으로 여기지 않는 불굴의 영혼에서 피어오르는 꽃이 바로 야생초, 야생화이다. 나는 그래서 야생초를 사랑한다. 그리고 불굴의 도전정신과 질긴 인내를 찾아보기도 하고 조건에 순응되어 살아가는 조화의 미덕을 찾아보기도 한다.
그 야생초, 야생화가 화려하거나 품새가 좋거나 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질박한 인정과 청초하고 때 묻지 않고 청순함이 넘칠 뿐 아니라, 만약 기품과 모양새가 볼 품 없다 해도 도전자적 성격과 불굴의 기질만은 인위적으로 사람의 손을 통해 전래의 형질을 빼앗겨 개량된 온실의 꽃과는 절대적으로 다르다. 그 인내의 패기와 그 끝없는 본능에서 도전자로서의 고충을 흠뻑 상징함이겠고, 말할 수 없이 끈끈한 인내의 아름다움을 표하고 있는 것마저 내가 야생초, 야생화에 흠뻑 빠진 이유이다.
근래에 와서 우리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뒤늦게 발견한 많은 이들이 특별한 관심 속에 찬양되며 보급되고 있다. 그것은, 정말로 바람직한 일이다. 야생초, 야생화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뒤늦게나마 우리 것에 대한 열정이 이름 없는 들꽃에 까지 관심을 갖게 된 것, 그것이 나는 고마울 따름이다.
야생초는 그 초성(草性)자체가 비할 수 없이 강인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 고유의 우리종이 풍요롭게 보급되고 번성하여 외래의 꽃을 능가 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는 상상을 나는 가끔 한다. 우리 야생초, 야생화의 상태를 보더라도, 이 들풀, 들꽃들이 다른 손질된 꽃들에 비해서 얼마나 생명력 왕성한 식물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독특한 아름다움과 특종의 성분, 특정의 기질을 가지고 우리의 귀중한 토종의 특화된 자산이 되어 우리들의 으뜸한 초본으로, 꽃으로 세계인의 귀여움 받는 우리 꽃으로 알려졌으면 하는, 그것이 소박한 마음으로 내가 소망하는 일이라 하겠다.
여기서 중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왜 우리 야생초에 관심을 두어야하나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식물의 자본성에 일찍 눈을 뜬 서구 여러 나라들이 세계 각지로부터 수집한 식물의 종을 본질을 특화 발전 변형시켜 개량한 뒤 그것은 바로 자원이 되어 부를 축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 결론적으로 뒤늦게나마 우리 것에 대한 보존에 열성을 더 해야만 할 본질적인 이유인 것이다.
나는 우리 야생초, 야생화만큼 한국적인 인상을 주는 꽃을 달리 알지 못한다. 특히 담담한 가운데 수더분한 노련미가 보이는 지순한 할미꽃을 무척 좋아한다. 할미꽃, 그 할미꽃이 보여주는 말할 수 없이 인정스럽고 따뜻한 할머니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서 그래서 좋다. 할미꽃 이름도 얼마나 좋은가?
우리집 넓은 마당에 금년에도 야생초들이 피운 꽃들로 향 가득하여 새와 벌과 나비가 다시 찾아와서 일상에 찌든 나에게 싱그러운 평화와 뿌듯한 풍요를 줄 것이다.
2003, 03, 04 화요일 부산에서
<할미꽃> :
섬집아이 신청해 주셨는데요... 경음악이라 가사는 제가 올립니다... 근데요...제가 알고 있는 가사라서...^^
♬ 1절: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 팔베고 스르르르...잠이듭니다...
♬ 2절: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여/ 다 못 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야생초를 보는 마음
야생초를 보는 마음
‘토종이 사라진 사회, 토종이 사라져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사회,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지금 우리는 …….’
위의 글은 황대권님이 쓴 “야생초 편지”에 나오는 한 구절을 메모해 둔 글이다. 누구나 쓸 수 있는 평범한 글이지만 야생초 편지를 읽으면서 그 분위기의 느낌에 공감하며 읽었을 때 받는 감정은 여간 다른 느낌이 아니다.
또 이런 구절도 있다.
“우리 인간만이 생존 경쟁을 넘어서서 남을 무시하고 제 잘난 맛에 빠져 자연의 향기를 잃고 있다. 남과 나를 비교하여 나만이 옳고 잘났다고 뻐기는 인간들은 크고 작건 못생겼건 잘생겼건 타고난 제 모습의 꽃만 피워 내는 야생초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새삼스러운 말이라 할 것도 없다. 본연의 형질로 변함없이 제 모습으로만 피는 야생초는 언제나 우리의 산야에 예전의 모습으로 피고 진다.
나는 우리 야생초와 야생화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특별한 동기가 있어서 야생초를 좋아 하는 것도 아니고 태생이 시골인지라 어릴 때부터 친근하게 보면서 자란 탓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 오년 전 충남 공주시 우성면이라는 시골에서 살았을 때 우리집 주위 산자락과 들에는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고지고 했다. 나를 매혹시켜온 순박한 야생화는 지금 살고 있는 경주로 이사를 와서도 늘 내 곁에서 수줍은 모습으로 시절 따라 피고 지고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많이 띄는 꽃들은 패랭이, 민들레, 씀바귀, 할미꽃, 제비꽃, 인동초, 구절초, 개망초, 나팔꽃 따위를 캐어다 화단에 옮겨 심었는데 그 종류가 제법 쏠쏠하니 많았다. 야생화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끈질긴 생명력과 아무런 꾸밈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야생초를 볼 때마다 항상 말할 수 없이 놀라운 감정에 붙들리고야 마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야생초는 인위적인 손을 타지 않고 구태여 힘들여 비료를 주거나 물을 주거나 김을 맬 일손이 없어도 알아서 때가 되면 피거나 지거나 한다. 그리고 제 한 몸 씨내릴 곳만 있다면 박토건 옥토건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끈질긴 씨내림으로 종족을 보존하려는 본능의 소산이다. 또 야생 꽃은 꽃이 필 시기를 스스로 택해서 피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초지상적인, 비현세적인 인상을 내 마음속에 매혹적으로 던져 주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도저히 식물이 자라나지 못할 시멘트의 틈새나 심지어 사람들이 수없이 걸어 다니는 보도블록의 사이에 뿌리를 내려 그곳이 원래의 제자리인 듯이 동화되어 자리 잡은 야생초를 볼 때, 절벽 바위틈새에, 혹은 찬 눈밭에 핀 산(山)꽃들을 보면 경이로울 뿐이다. 처연히 조응된 야생화를 보게 될 때, 우리는 과연 야생화가 살아 숨쉬는 산천의 주인으로 꼽히는 이유를 잘 알 수 있겠지만, 그들에게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푸른 공기와 맑은 하늘을 대비적 배경으로 삼은 다음에라야만 고요히 피는 이 들꽃의 한없이 장엄하고 숭고한 기세에는, 친화한 동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굴복 감을 나는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야생초가 피우는 꽃의 향내는 확실히 사람의 손길에 개량되어 채색된 아름다운 인공적인 꽃보다야 다르지만 산야를 바탕삼아 때 맞는 계절에 수더분히 피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명적인 꽃이 아닌가 한다. 이 들풀 들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초고하고 견개한 정절의 꽃이 아니라하면 안 될 것이다.
모든 고난과 고통을 어려움으로 여기지 않는 불굴의 영혼에서 피어오르는 꽃이 바로 야생초, 야생화이다. 나는 그래서 야생초를 사랑한다. 그리고 불굴의 도전정신과 질긴 인내를 찾아보기도 하고 조건에 순응되어 살아가는 조화의 미덕을 찾아보기도 한다.
그 야생초, 야생화가 화려하거나 품새가 좋거나 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질박한 인정과 청초하고 때 묻지 않고 청순함이 넘칠 뿐 아니라, 만약 기품과 모양새가 볼 품 없다 해도 도전자적 성격과 불굴의 기질만은 인위적으로 사람의 손을 통해 전래의 형질을 빼앗겨 개량된 온실의 꽃과는 절대적으로 다르다. 그 인내의 패기와 그 끝없는 본능에서 도전자로서의 고충을 흠뻑 상징함이겠고, 말할 수 없이 끈끈한 인내의 아름다움을 표하고 있는 것마저 내가 야생초, 야생화에 흠뻑 빠진 이유이다.
근래에 와서 우리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뒤늦게 발견한 많은 이들이 특별한 관심 속에 찬양되며 보급되고 있다. 그것은, 정말로 바람직한 일이다. 야생초, 야생화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뒤늦게나마 우리 것에 대한 열정이 이름 없는 들꽃에 까지 관심을 갖게 된 것, 그것이 나는 고마울 따름이다.
야생초는 그 초성(草性)자체가 비할 수 없이 강인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 고유의 우리종이 풍요롭게 보급되고 번성하여 외래의 꽃을 능가 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는 상상을 나는 가끔 한다. 우리 야생초, 야생화의 상태를 보더라도, 이 들풀, 들꽃들이 다른 손질된 꽃들에 비해서 얼마나 생명력 왕성한 식물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독특한 아름다움과 특종의 성분, 특정의 기질을 가지고 우리의 귀중한 토종의 특화된 자산이 되어 우리들의 으뜸한 초본으로, 꽃으로 세계인의 귀여움 받는 우리 꽃으로 알려졌으면 하는, 그것이 소박한 마음으로 내가 소망하는 일이라 하겠다.
여기서 중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왜 우리 야생초에 관심을 두어야하나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식물의 자본성에 일찍 눈을 뜬 서구 여러 나라들이 세계 각지로부터 수집한 식물의 종을 본질을 특화 발전 변형시켜 개량한 뒤 그것은 바로 자원이 되어 부를 축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 결론적으로 뒤늦게나마 우리 것에 대한 보존에 열성을 더 해야만 할 본질적인 이유인 것이다.
나는 우리 야생초, 야생화만큼 한국적인 인상을 주는 꽃을 달리 알지 못한다. 특히 담담한 가운데 수더분한 노련미가 보이는 지순한 할미꽃을 무척 좋아한다. 할미꽃, 그 할미꽃이 보여주는 말할 수 없이 인정스럽고 따뜻한 할머니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서 그래서 좋다. 할미꽃 이름도 얼마나 좋은가?
우리집 넓은 마당에 금년에도 야생초들이 피운 꽃들로 향 가득하여 새와 벌과 나비가 다시 찾아와서 일상에 찌든 나에게 싱그러운 평화와 뿌듯한 풍요를 줄 것이다.
2003, 03, 04 화요일 부산에서
<할미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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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집아이 신청해 주셨는데요... 경음악이라 가사는 제가 올립니다...
근데요...제가 알고 있는 가사라서...^^
♬ 1절: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 팔베고 스르르르...잠이듭니다...
♬ 2절: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여/
다 못 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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