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at! You are so gorgeous! How beautiful you are!"
나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English converstion을 열심히 repeat after중이다. 시대는 바야흐로 국제화 시대가 도래하는 만큼 나의 프로의식은 끝없는 자기발전과 도약을 위해 채찍질당하고 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늘 자신을 가꾸어 가는 건 프로의 기본아닐까? 난 이렇듯 끊임없이 노력한다. 난 사업가니까...
[따르르릉]
전화가 온다.
"Hello, 당신의 빈자리를 책임지겠습니다."
"당신이 빈자리맨인가요?"
뜻밖의 남자고객이다. 그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그렇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오늘 미팅이 있는데 자리 좀 채워주실래요?"
감히 나에게.. 미팅의 빈자리를 메우라니.. 이건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미팅에선 본인들이 튀기위해 폭탄을 설치해야 정석일 것이다. 그렇다면 번지수를 잘 못 찾아도 perfect하게 잘못 찾은 것이다. 나는.. completely 다른 과니까.
"저.. 그렇다면 저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의구심을 느끼며 좀 처럼 하지 않던 질문까지 한다. 나의 역할에 대한 질문이라
니.. 프로인 나로서는 부끄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여자들을 사로잡아요. 알겠어요? 단 한명도 빠짐없이 말이야."
반말을 섞는 이 인간.. 그의 목소리는 마치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듯 더욱 격해지고 있다. 이 남자는 대체 나에게 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인가?
"만약 그 놈에게 한명이라도 뺏기면 국물도 없을 줄 아쇼. 대신 성공하면 사례는 톡톡히 할테니."
아하! 그럼 그렇지.. 이유인 즉슨 이렇다. 고객의 친구놈중에 한놈이 자신의 인기를 엄청 거들먹거린단
다. 게다가 최근 들어서는 고객의 여자친구가 사실 자기를 좋아했었다며 고객을 도발시켰다나? 그 이후 그 놈 기를 팍 죽여놓을 사람을 찾던 중 나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라고.. 역시 그럼 그렇지.. 이거.. 다시 한번 나의 능력을 검증받는 순간이 아닌가?
자 그럼 나의 자존심에 오해를 풀어주었으니 이제부터 오늘의 스타일을 완성시켜 보아야겠군. 4대4 미팅.. 오늘의 미팅 상대는 꽃다운 24살의 간호사들이다. 백의의 천사들이라.. 아직 꿈을 꾸는 순수한 아가씨들일게다. 난 오늘 4명의 천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이런 자리에서 너무 formal한 의상은 오히려 그녀들로부터 거부감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대로 후줄근해서는 안된다. 패셔너블한 감각을 부각시키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네츄럴함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쉽지않다. 그러나 나는 노련한 분석력과 동물적인 감각으로 한세트의 옷을 뽑아낸다. 약간 물이 빠진듯 하나 시원한 느낌을 자아내는 라이트 블루의 여유있는 청바지를 입고 상의로는 얼마전 사 두었던 고급스런 느낌의 인디언 핑크빛 폴로 셔츠를 걸쳤다. 뽀얀 내 피부와 핑크빛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어내며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다. 머리는 방금 일어난 듯 부시시하지만 묘한 섹시함을 주도록 왁스로 손질했다. 그리고 귀엔 작고 깜찍한 은빛 피어싱으로 마무리 한다. 풋풋하고 상큼한 이미지와 함께 섹시하면서도 력셔리한 느낌을 동시에 발산하기란 과연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것을 완벽히 소화하고 있지 않느냐! 마지막으로 전신거울의 내 모습을 확인한다. 아깝다.. 아까워.. 정말 아깝다. 사진기라는 문명의 도구가 없었다면 그냥 흘려보내고 말았을 이 완벽함이 생각만 해도 아까울따름이다. 나는 나의 소중한 아름다움을 디카에 담고 철저한 프로의식으로 무장한 채 심플한 로퍼를 신고 사무실을 나선다.
여기는 강남의 모자이크 커피숖앞.. 나는 고객이 요구한 대로 바닥에 오른쪽 발로 원을 그리고 있다. 꽤 멋있는 자태가 나올 것이라 기대했지만 계속 이 자세를 유지하자니 무슨 무용동작을 하는 양 좀 우스운 꼴이 되는 느낌이다. 빨리 고객이 나타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휘리휘리"
저음의 남자목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힌다. 나는 그제서야 민망한 동작을 멈추고 옆을 바라본다. 머리를 삐죽삐죽 세우고 새빨간 스웨터를 걸친 이 남자는 심심하게 생긴 멀건 얼굴을 하고 완벽한 내 모습을 노골적으로 훑어본다.
"음.. 이만하면 머.. 괜찮군요."
남자는 심히 만족스러우나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는 양 얼굴근육을 열심히 잠재우고 있다.
"미팅은 지금부터 30분 후인 7시부터 시작입니다.입을 맞춰야 겠죠?"
고객은 프로인 나보다 더 노련해 보이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고객은 왕이다. 고객의 눈높이에 맞추어 주자. 나는 나이 27세의 나이에 이 남자와 직장동료다. 나는 증권회사에 다니며 여자친구가 없다. 나는 고급 오피스텔에서 혼자서 살고 있으며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덕에 부유하게 자랐다. 나는 이남 중 차남이며 형은 미국에서 변호사일을 하고 있다. 사실 이 남자에겐 이와 똑같은 조건의 실제 직장동료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반토막키에 머리가 급격히 벗겨지는 중이라고.. 나는 나의 조건을 숙지하며 그 남자와 나를 일치화 시키는 작업에 즉각 돌입한다. 나는 워낙 프로라 30분이면 이미 완벽한 그 남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의뢰인과 함께 커피숖 쇼파에 자리를 잡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남자 2명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둘 다 아주 Normal한 의상에 그야말로 보편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전혀 신경쓸 이유가 없는 인물들이다. 헌데.. 그 요주의 인물은 좀 늦는다고 했다나? 그는 분명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만화속 주인공처럼 머리를 휘날리며 들어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속셈인 것이다. '주인공은 언제나 늦는 법'이란 명제를 곱씹으며 말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는 것도 모른 체..
"어, 여긴 처음보지? 인사해 여긴 내가 말했던 그 직장동료.."
고객은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적극적으로 나를 소개한다. 일순간 친구들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버린다. 고객과 친구들의 우정이 염려되기까지 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내 임무는 고객만족이 아니던가? 그들의 우정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이렇게 고객의 친구들로부터 소외된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백의의 천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휘날리며 사뿐사뿐 걸어오는 천사들을 보라.. 곧 새초롬히 자리에 앉은 그들의 시선은 역시나 일제히 나에게 집중되고 있다. 나는 한 떨기 싱그러운 장미보다 화사하게 웃는 그녀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한다. 꽃분홍빛의 레이스가 화려하게 장식된 까만 원피스를 입은 그녀,, 하지만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꽃분홍빛 여드름들이 그녀의 양볼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지 않느냐.. 까만 물방울 무늬가 잔뜩 박힌 눈부신 흰 투피스의 그녀, 그러나 그 보다 더욱 눈부신 교정기가 그녀의 입술속에서 번쩍이고 있다. 그리고 실크소재의 다크블루 원피스를 입은 그녀.. 그 매끈한 원피스를 뚫고 나올 듯 글래머러스한 가슴으로 우리를 잔뜩 흥분케 한 그녀이지만 잔뜩 찢어놓은 눈과 코 끝을 뚫고 나올 듯한 실리콘이 우리의 시선을 가슴에만 머물 수 밖에 없게 만들고 있다. 어.. 한데.. 3명?
"한 분은.."
"걘 좀 늦는데요.."
천사들이 입을 삐죽거리며 답한다. 혹시 마지막 그녀도 주인공병이 있는 건 아닐까?
"자, 그럼 우선 소개나 하지?"
주선자인 나의 고객이 제안한다.
"안녕하십니까? 박주성이라고 합니다. 이 자식(주선자)이랑은 고등학교때부터 친구구요. 지금은 은행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금융쪽으로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죠. 궁금한 거 있음 언제든 물어보세요."
잔뜩 주눅들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폐기넘치는 목소리의 소유자다. 하지만 여자들의 반응은 스산할 정도로 고요하다. 그는 그야말로 주눅든 표정으로 조용해 지고 만다.
"전 얼마전 7급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예비 공무원 고영호입니다. 제 미래는 그야말로 믿을 수 있는 보험같다고나 할까요? 하하하"
그러나 웃고 있는 건 그 혼자라는 걸 곧 깨닫고 만다. 자! 드디어 나의 차례가 왔다.
"안녕하십니까? 주선자와는 직장동료구요.. 이관희라고 합니다."
"어머 이름 너무 이쁘시다."
순간 무관심 한 척 손톱만 뜯고 있던 여드름녀가 호들갑이다.
"그럼 27이겠네요? 3살차이는 궁합도 안본다던데.. 호호호.."
교정녀가 한껏 환하게 웃어 보인다.
"얘는? 그건 4살차이지! 내가 7살에 학교를 들어가서 23인데.. 저랑 4살차이네요?"
왕가슴녀가 지지 않으려는 듯 더욱 적극적으로 나선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마지막 카운트 다운을 맞추려는 듯 다급히 들어선다.
"어이.. 미안 내가 좀 늦었지?"
주의를 끌려는 상투적 인삿말.. 일 순간 여자들의 시선이 그에게 꽂힌다. 그가 바로.. 오늘의 내 라이벌이다.
그는 조금 신경이 쓰인다. 훤칠한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가 우선 거슬렸으며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목소리가 또한 거슬렸다. 그리고 카키색 셔츠에 옅은 감색의 면바지를 입은 감각또한 거슬렸다. 그러나... 여자들의 시선은 마치 부메랑처럼 일제히 나에게 돌아온다. 마치 누가 왔었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조용히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가 인사할 틈도 주지 않는 그녀들... 곧 그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마치 나를 원망하는 듯한.. 그렇다! 그가 아무리 날린다 해도 그건 일반인의 수준에 비추었을 때 통용되었던 것! 이미 고등학교 시절 우리학교 킹카에게 인정받았던 내 외모는 그 수준을 초월하는 것이리라. 내 외모의 진가를 너무 늦게 깨달은 탓일까? 난 가끔 조금 전 그 순간처럼 나의 외모에 대한 객관적 혼란을 느끼곤 한다.
나의 의뢰인을 보라 귀까지 찢어질 듯 늘어나는 입술을 힘겹게 오므리고 있는 저 모습.. 오늘 그는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거래를 했는지 절실히 깨닫고 있겠지? 뿌듯함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부터 밀려온다. 이럴 때 난 살아가는 의미를 찾곤 한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지.. 매력은 외모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지 않더냐? 유머와 매너.. 그리고 카리스마.. 그것이 어우러질때 진정한 인기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관희씬 왜 여자친구 없으세요?"
교정녀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묻는다.
"많이 바빴어요.. 우선 자리를 잡아야 했거든요. 한번 여자친구한테 빠지면 헤어나질 못할 것 같아서.."
그리고 난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여자들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그럼 이제 준비가 되셨나요?"
하고 노골적인 질문을 해온다.
"그러니까 나온 거 아니겠습니까?"
부드러운 목소리와 감미로운 미소로 답한다. 여자들은 거의 넋을 잃고 만다. 그 요주의 인물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자리를 메우고 있을 뿐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는 걸 완벽히 깨달은 모양이다.
그 순간, 카페문이 열리고 한 소녀가 문을 들어선다. 그 소녀는 단번에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니 카페에 있는 모두의 시선을.. 아주 짧은 초컬릿빛 컷트머리가 세련되게 어울리는 소녀.. 그녀의 이미지는 미소년을 연상케 한다. 브라운 체크의 클래식한 쇼트남방에 캐러멜빛의 스커트를 입은 소녀.. 마치 우리가 유럽에 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아주 작고 마른 소녀.. 그 소녀가 어느 순간 내 앞에 통 튀어오르듯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렇다면 이 소녀가 마지막 천사인가?
"안녕하세요?"
망설임 없는 목소리.. 익숙한 당당함. 환상적인 눈동자.. 앗! 이 소녀는.. 그녀.. 클럽 의뢰인이 아닌가!
"뭐에요? 혹시.. 아는 사이?"
난감한 순간이다! 눈치빠른 왕가슴녀가 나의 당황한 눈빛을 캐치한 것이다. 식은 땀이 바짝난다. 빨려들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 그 소녀앞에서 나는 뭐라고 해야 할 것이냐. 내 정체가 이대로 밝혀지는 것이냐! 소녀는 재밌다는 듯,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쇼파 등받이로 털썩 등을 기대며 '몰라'하며 관심없다는 듯 물컵을 집어든다. 소녀는 물을 들이키며 한쪽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나한테 반했나 본데?"
하며 큭큭거린다. 나머지 천사들의 얼굴이 굳어진다. 소녀는 다리를 꼬고 앉아 남자들을 쭉 둘러본다. 다들 넋이 나간 듯 그녀를 바라본다. 사람같지 않은.. 만화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그녀를..
다른 천사들이 갑자기 거인이 되어버렸다. 그녀들 사이에 있는 소녀는 마치 작은 요정같다. 우리와는 동떨어진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요정.. 오직 그녀만이 보인다. 신비로운 엄지공주..
"뭐야? 재미없게 커피나 마시구.. 우리 술 마시러 가는게 어때요?"
그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우리를 리드한다. 언제나 먼저 나를 이끄는 그녀.. 난 아주 익숙한 듯, 1등으로 그녀를 따른다.
독일식 맥주집.. 우리는 잔 가득 맥주를 따르고 Cheers를 외치며 맥주를 들이킨다. 소녀가 벌컥벌컥 단번에 한잔을 비운다.
"오~ 잘 마시는데요?"
남자들이 감탄스럽다는 듯 말한다.
"아.. 너무 갈증났거든요."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 앞에 빈 맥주잔을 들어보인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에게 맥주를 따른다. 그런데 자꾸 손이 떨린다. 이런 약한 모습은 곤란하다. 이럴 땐 무척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단 말이다.
"어. 그만!"
여드름녀와 교정녀 그리고 왕가슴녀가 동시에 소리를 꽥 지른다. 맥주가 넘쳐 어느새 소녀의 손을 타고 흐르고 있다. 한데 소녀는 아무런 동요없이 웃고있다. 나는 당황하여 맥주통을 내려놓고 더듬더듬 냅킨을 찾는다.
"아.. 이거 죄송합니다."
식은 땀이 흐르는 순간이다. 이런 바보같은 모습을.. 맥주 한 잔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말이다!
"저한테 사랑이 넘치시는 가봐요?"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롭게 맥주한모금을 마신다.
"이것봐.. 이 친구 얼굴 빨개졌는걸? 하하하.."
요주의 인물이 나를 놀리며 넘어갈 듯 과장된 박장대소를 터뜨린다. 그러자 normal하게 생긴 나머지 인간들도 고소하다는 듯 낄낄 거린다. 이런 사소한 농담하나 받아치지 못하고 얼굴이 빨개져 버리다니.. 이대로 광대가 되고 말 것인가? 아니.. 그럴 순 없다. 나도 만만치 않은 놈 아니더냐?
"이런.. 들켜버린 건가요?"
나는 이열치열의 방법으로 그들에게 반격한다. 소녀가 나의 반응에 흠짓 나를 쳐다보는가 싶더니 쿡하고 웃어버린다. 그러나 나머지 천사들의 얼굴은 더욱 굳어간다. 하지만 주선자는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이미 이 자리를 뜬 상태.. 더 이상 나머지 천사들을 배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곧이어 술자리 게임계의 전통.. 왕게임이 시작되었다. 8개의 쪽지에 1부터 7까지의 숫자와 '왕'자를 채워넣고 뽑기를 한다. 게임계의 지존인 내가 새삼스레 두근두근 긴장이 된다. 모두들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이 뽑은 쪽지를 펼쳐본다. 첫 번째 왕은 요주의 인물이 당첨이다. 요주의 인물은 씨익하고 변태적인 웃음을 흘리더니 느끼한 목소리로 명령을 시작한다.
"1번 4번 서로 목덜미에 키스하기.. 으흐흐.."
"우.. 누구야 누구?"
모두가 잔뜩 긴장하여 두리번 거리기 시작한다.
"나.. 제가 1번입니다."
normal남 1번이 수줍게 고백한다. 하지만 뒤이어..
"헉!"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두번째 normal 남이 4번쪽지를 떨어뜨린다. 우리는 결국 차마 못 볼 광경에 비위가 상해버린다.
"자.. 자.. 다시! 다시!"
우리는 쪽지를 모아 다시 뽑기를 시작한다. 이번 왕은... 왕가슴녀다. 왕가슴녀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명령을 시작한다.
"3번이 6번 귓볼깨물기.."
우.. 하는 신음소리들이 새어나온다.
"내가 3번이야.. 6번 누구세요?"
엄지공주가 자신의 쪽지를 펼쳐보이며 묻는다. 식은땀이 난다. 혹시나 내 쪽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나는.. 5번이다.
"에구.. 제가 6번입니다."
아뿔싸! 요주의 인물이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엄지공주를 바라보고 있다. 심장이 타오르는 것만 같다. 하지만 난.. 엄지공주의 조막만한 얼굴이 번들번들 느끼한 요주의 인물의 불타는 볼을 스치고, 그녀의 앵두같이 귀여운 입술이 그의 기름기 가득한 귓볼을 깨무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다. 나는 애써 시선을 외면한다. 하지만 그 순간 엄지공주의 뜨거운 시선을 느꼈던 건 나의 착각일까?
어쨌거나 요주의 인물은 뽕이라도 맞은 것 마냥 헤롱헤롱 제 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인단 말인가! 비즈니스시엔 감정따위 키우지 않는 냉혈한! 그게 바로 나 아니었더냔 말이다!
"오우 분위기 무르익고~ 한판 더!"
요주의 인물은 흥분이 극에 치달은 표정으로 쪽지를 모아 허겁지겁 섞기 시작한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의 표정.. 더 이상 봐 줄 수가 없다.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고 만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꽃혀버리는 순간이다.
"저기.. 화장실좀.."
나는 맥없이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에 들어가 애꿎은 담배만 피다 다시 화장실을 나온다.
"헉!"
나는 얕은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일 순간..아주 작은 무언가가 내 허리를 꼭 잡고 화장실로 돌격해 들어온 것이다. 나는 얼떨결에 화장실로 다시 밀려들어온다. 그 작은 물체는 좁은 변기칸으로 나를 밀어넣고 문을 잠궈버린다. 나는 그제서야 아래를 내려다본다. 내 앞엔 엄지공주가.. 그 화려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당신.."
"오늘은 누구꺼에요?"
엄지공주의 목소리에 냉기가 서려있다.
"네?"
"현정이? 자영이? 연희?"
"그게 무슨.."
"누구랑 파트너 해 주려구 나왔냐구요.."
"저.. 그게 아니라.."
엄지공주는 그 서늘한 눈빛으로 한 동안 나를 쏘아보다 휙 하고 나가 버린다. 알 수 없는 엄지공주.. 나는 왜 그녀 앞에만 서면 머저리가 되는 것인가.
나는 한 동안 나의 감정을 추스린 후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어이.. 이거 왜 이렇게 늦어셨나! 한창 재미있는 순간에!"
요주의 인물은 정말 원망스럽단 말투로 내게 궁시렁거린다. 재수없는 인간.. 한편 엄지공주는 방금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앉아있다. 마치 나 혼자 꿈이라도 꾸었던 것 마냥..
"자~ 자~ 다시 시작합니다."
요주의 인물이 쪽지를 내려놓자 마자 각자 쪽지를 집어든다. 이번 왕은.. 그녀.. 엄지공주다. 엄지공주는 좌중을 둘러보며 씨익 웃고는 앵두같은 입술로 명령을 시작한다.
"2번 5번 키스해요.. 뽀뽀말구 키스에요.. 아주 진하게.."
오우.. 우.. 가벼운 함성과 함께 모두가 2번과 5번을 찾아 혈안이 된다.
"저.. 제가 2번이네요..후.."
교정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수줍은 듯 말한다.
"5번.. 5번 누구야?"
하지만 5번은 좀 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아.. 누구야 이거.."
사람들은 급기야 짜증을 내며 서로의 쪽지를 공개하기 시작한다. 나는 무심코 나의 쪽지를 펼쳐본다. 어차피 엄지공주가 왕이 된 이상 난 쪽지를 확인하지도 않았더랬다. 헌데.. 헌데! 내가 5번이었단 말인가!
"저.. 죄송합니다. 제가 5번이네요.."
힘겹게 마른침을 삼킨다.
"어머.."
교정녀는 벌어지는 입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느 때 보다 더욱 번쩍이는 교정기를 과시하고 있다. 나는 침 조차 삼키지 못한 채 얼어버린다.
"키스 해! 키스해!"
잔뜩 숨을 죽이고 있는 girl들과는 대조적으로 man들은 오늘 만난 이래 가장 즐거운 함성을 토해내며 구호를 맞추고 있다. 난감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나도 모르게 엄지공주쪽을 바라본다. 얼어붙은 그녀의 강렬한 눈빛이 나의 눈과 마주쳐버렸다. 어디 해 볼테면 해보라는 그녀의 도전적인 눈빛에 자극되어 나는 반항하듯 교정녀 에게로 얼굴을 돌린다. 교정녀는 내가 어찌할 새도 없이 어느 새 내 코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그리고 어찌 할 틈도 없이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 대담하리만치 깊은 키스를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교정기가 혀에 닿는 순간 순간 쩌릿쩌릿 감전이 되는 느낌이다. 1초가 1년만 같은 순간.. '우..우..'하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아득히 들려온다. 빨리 이 순간이 끝나기만을 기도한다. 드디어 교정녀가 나를 놓아 주고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 나는 깊은 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엄지공주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하지만 그 곳엔.. 그녀가 없다. 엄지공주가 사라졌다.
빈자리맨 - 미팅메이트
2. 미팅 메이트
"Great! You are so gorgeous! How beautiful you are!"
나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English converstion을 열심히 repeat after중이다.
시대는 바야흐로 국제화 시대가 도래하는 만큼 나의 프로의식은 끝없는 자기발전과 도약을 위해 채찍질당하고 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늘 자신을 가꾸어 가는 건 프로의 기본아닐까? 난 이렇듯 끊임없이 노력한다. 난 사업가니까...
[따르르릉]
전화가 온다.
"Hello, 당신의 빈자리를 책임지겠습니다."
"당신이 빈자리맨인가요?"
뜻밖의 남자고객이다. 그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그렇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오늘 미팅이 있는데 자리 좀 채워주실래요?"
감히 나에게.. 미팅의 빈자리를 메우라니.. 이건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미팅에선 본인들이 튀기위해 폭탄을 설치해야 정석일 것이다. 그렇다면 번지수를 잘 못 찾아도 perfect하게 잘못 찾은 것이다. 나는.. completely 다른 과니까.
"저.. 그렇다면 저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의구심을 느끼며 좀 처럼 하지 않던 질문까지 한다. 나의 역할에 대한 질문이라
니.. 프로인 나로서는 부끄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여자들을 사로잡아요. 알겠어요? 단 한명도 빠짐없이 말이야."
반말을 섞는 이 인간.. 그의 목소리는 마치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듯 더욱 격해지고 있다. 이 남자는 대체 나에게 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인가?
"만약 그 놈에게 한명이라도 뺏기면 국물도 없을 줄 아쇼. 대신 성공하면 사례는 톡톡히 할테니."
아하! 그럼 그렇지.. 이유인 즉슨 이렇다. 고객의 친구놈중에 한놈이 자신의 인기를 엄청 거들먹거린단
다. 게다가 최근 들어서는 고객의 여자친구가 사실 자기를 좋아했었다며 고객을 도발시켰다나? 그 이후 그 놈 기를 팍 죽여놓을 사람을 찾던 중 나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라고.. 역시 그럼 그렇지.. 이거.. 다시 한번 나의 능력을 검증받는 순간이 아닌가?
자 그럼 나의 자존심에 오해를 풀어주었으니 이제부터 오늘의 스타일을 완성시켜 보아야겠군. 4대4 미팅.. 오늘의 미팅 상대는 꽃다운 24살의 간호사들이다. 백의의 천사들이라.. 아직 꿈을 꾸는 순수한 아가씨들일게다. 난 오늘 4명의 천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이런 자리에서 너무 formal한 의상은 오히려 그녀들로부터 거부감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대로 후줄근해서는 안된다. 패셔너블한 감각을 부각시키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네츄럴함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쉽지않다. 그러나 나는 노련한 분석력과 동물적인 감각으로 한세트의 옷을 뽑아낸다. 약간 물이 빠진듯 하나 시원한 느낌을 자아내는 라이트 블루의 여유있는 청바지를 입고 상의로는 얼마전 사 두었던 고급스런 느낌의 인디언 핑크빛 폴로 셔츠를 걸쳤다. 뽀얀 내 피부와 핑크빛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어내며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다. 머리는 방금 일어난 듯 부시시하지만 묘한 섹시함을 주도록 왁스로 손질했다. 그리고 귀엔 작고 깜찍한 은빛 피어싱으로 마무리 한다. 풋풋하고 상큼한 이미지와 함께 섹시하면서도 력셔리한 느낌을 동시에 발산하기란 과연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것을 완벽히 소화하고 있지 않느냐! 마지막으로 전신거울의 내 모습을 확인한다. 아깝다.. 아까워.. 정말 아깝다. 사진기라는 문명의 도구가 없었다면 그냥 흘려보내고 말았을 이 완벽함이 생각만 해도 아까울따름이다. 나는 나의 소중한 아름다움을 디카에 담고 철저한 프로의식으로 무장한 채 심플한 로퍼를 신고 사무실을 나선다.
여기는 강남의 모자이크 커피숖앞.. 나는 고객이 요구한 대로 바닥에 오른쪽 발로 원을 그리고 있다. 꽤 멋있는 자태가 나올 것이라 기대했지만 계속 이 자세를 유지하자니 무슨 무용동작을 하는 양 좀 우스운 꼴이 되는 느낌이다. 빨리 고객이 나타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휘리휘리"
저음의 남자목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힌다. 나는 그제서야 민망한 동작을 멈추고 옆을 바라본다. 머리를 삐죽삐죽 세우고 새빨간 스웨터를 걸친 이 남자는 심심하게 생긴 멀건 얼굴을 하고 완벽한 내 모습을 노골적으로 훑어본다.
"음.. 이만하면 머.. 괜찮군요."
남자는 심히 만족스러우나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는 양 얼굴근육을 열심히 잠재우고 있다.
"미팅은 지금부터 30분 후인 7시부터 시작입니다.입을 맞춰야 겠죠?"
고객은 프로인 나보다 더 노련해 보이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고객은 왕이다. 고객의 눈높이에 맞추어 주자. 나는 나이 27세의 나이에 이 남자와 직장동료다. 나는 증권회사에 다니며 여자친구가 없다. 나는 고급 오피스텔에서 혼자서 살고 있으며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덕에 부유하게 자랐다. 나는 이남 중 차남이며 형은 미국에서 변호사일을 하고 있다. 사실 이 남자에겐 이와 똑같은 조건의 실제 직장동료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반토막키에 머리가 급격히 벗겨지는 중이라고.. 나는 나의 조건을 숙지하며 그 남자와 나를 일치화 시키는 작업에 즉각 돌입한다. 나는 워낙 프로라 30분이면 이미 완벽한 그 남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의뢰인과 함께 커피숖 쇼파에 자리를 잡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남자 2명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둘 다 아주 Normal한 의상에 그야말로 보편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전혀 신경쓸 이유가 없는 인물들이다. 헌데.. 그 요주의 인물은 좀 늦는다고 했다나? 그는 분명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만화속 주인공처럼 머리를 휘날리며 들어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속셈인 것이다. '주인공은 언제나 늦는 법'이란 명제를 곱씹으며 말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는 것도 모른 체..
"어, 여긴 처음보지? 인사해 여긴 내가 말했던 그 직장동료.."
고객은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적극적으로 나를 소개한다. 일순간 친구들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버린다. 고객과 친구들의 우정이 염려되기까지 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내 임무는 고객만족이 아니던가? 그들의 우정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이렇게 고객의 친구들로부터 소외된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백의의 천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휘날리며 사뿐사뿐 걸어오는 천사들을 보라.. 곧 새초롬히 자리에 앉은 그들의 시선은 역시나 일제히 나에게 집중되고 있다. 나는 한 떨기 싱그러운 장미보다 화사하게 웃는 그녀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한다.
꽃분홍빛의 레이스가 화려하게 장식된 까만 원피스를 입은 그녀,, 하지만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꽃분홍빛 여드름들이 그녀의 양볼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지 않느냐..
까만 물방울 무늬가 잔뜩 박힌 눈부신 흰 투피스의 그녀, 그러나 그 보다 더욱 눈부신 교정기가 그녀의 입술속에서 번쩍이고 있다.
그리고 실크소재의 다크블루 원피스를 입은 그녀.. 그 매끈한 원피스를 뚫고 나올 듯 글래머러스한 가슴으로 우리를 잔뜩 흥분케 한 그녀이지만 잔뜩 찢어놓은 눈과 코 끝을 뚫고 나올 듯한 실리콘이 우리의 시선을 가슴에만 머물 수 밖에 없게 만들고 있다. 어.. 한데.. 3명?
"한 분은.."
"걘 좀 늦는데요.."
천사들이 입을 삐죽거리며 답한다. 혹시 마지막 그녀도 주인공병이 있는 건 아닐까?
"자, 그럼 우선 소개나 하지?"
주선자인 나의 고객이 제안한다.
"안녕하십니까? 박주성이라고 합니다. 이 자식(주선자)이랑은 고등학교때부터 친구구요. 지금은 은행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금융쪽으로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죠. 궁금한 거 있음 언제든 물어보세요."
잔뜩 주눅들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폐기넘치는 목소리의 소유자다. 하지만 여자들의 반응은 스산할 정도로 고요하다. 그는 그야말로 주눅든 표정으로 조용해 지고 만다.
"전 얼마전 7급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예비 공무원 고영호입니다. 제 미래는 그야말로 믿을 수 있는 보험같다고나 할까요? 하하하"
그러나 웃고 있는 건 그 혼자라는 걸 곧 깨닫고 만다. 자! 드디어 나의 차례가 왔다.
"안녕하십니까? 주선자와는 직장동료구요.. 이관희라고 합니다."
"어머 이름 너무 이쁘시다."
순간 무관심 한 척 손톱만 뜯고 있던 여드름녀가 호들갑이다.
"그럼 27이겠네요? 3살차이는 궁합도 안본다던데.. 호호호.."
교정녀가 한껏 환하게 웃어 보인다.
"얘는? 그건 4살차이지! 내가 7살에 학교를 들어가서 23인데.. 저랑 4살차이네요?"
왕가슴녀가 지지 않으려는 듯 더욱 적극적으로 나선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마지막 카운트 다운을 맞추려는 듯 다급히 들어선다.
"어이.. 미안 내가 좀 늦었지?"
주의를 끌려는 상투적 인삿말.. 일 순간 여자들의 시선이 그에게 꽂힌다. 그가 바로.. 오늘의 내 라이벌이다.
그는 조금 신경이 쓰인다. 훤칠한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가 우선 거슬렸으며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목소리가 또한 거슬렸다. 그리고 카키색 셔츠에 옅은 감색의 면바지를 입은 감각또한 거슬렸다. 그러나...
여자들의 시선은 마치 부메랑처럼 일제히 나에게 돌아온다. 마치 누가 왔었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조용히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가 인사할 틈도 주지 않는 그녀들... 곧 그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마치 나를 원망하는 듯한.. 그렇다! 그가 아무리 날린다 해도 그건 일반인의 수준에 비추었을 때 통용되었던 것! 이미 고등학교 시절 우리학교 킹카에게 인정받았던 내 외모는 그 수준을 초월하는 것이리라. 내 외모의 진가를 너무 늦게 깨달은 탓일까? 난 가끔 조금 전 그 순간처럼 나의 외모에 대한 객관적 혼란을 느끼곤 한다.
나의 의뢰인을 보라 귀까지 찢어질 듯 늘어나는 입술을 힘겹게 오므리고 있는 저 모습.. 오늘 그는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거래를 했는지 절실히 깨닫고 있겠지? 뿌듯함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부터 밀려온다. 이럴 때 난 살아가는 의미를 찾곤 한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지.. 매력은 외모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지 않더냐? 유머와 매너.. 그리고 카리스마.. 그것이 어우러질때 진정한 인기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관희씬 왜 여자친구 없으세요?"
교정녀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묻는다.
"많이 바빴어요.. 우선 자리를 잡아야 했거든요. 한번 여자친구한테 빠지면 헤어나질 못할 것 같아서.."
그리고 난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여자들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그럼 이제 준비가 되셨나요?"
하고 노골적인 질문을 해온다.
"그러니까 나온 거 아니겠습니까?"
부드러운 목소리와 감미로운 미소로 답한다. 여자들은 거의 넋을 잃고 만다. 그 요주의 인물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자리를 메우고 있을 뿐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는 걸 완벽히 깨달은 모양이다.
그 순간, 카페문이 열리고 한 소녀가 문을 들어선다. 그 소녀는 단번에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니 카페에 있는 모두의 시선을.. 아주 짧은 초컬릿빛 컷트머리가 세련되게 어울리는 소녀.. 그녀의 이미지는 미소년을 연상케 한다. 브라운 체크의 클래식한 쇼트남방에 캐러멜빛의 스커트를 입은 소녀.. 마치 우리가 유럽에 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아주 작고 마른 소녀.. 그 소녀가 어느 순간 내 앞에 통 튀어오르듯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렇다면 이 소녀가 마지막 천사인가?
"안녕하세요?"
망설임 없는 목소리.. 익숙한 당당함. 환상적인 눈동자.. 앗! 이 소녀는.. 그녀.. 클럽 의뢰인이 아닌가!
"뭐에요? 혹시.. 아는 사이?"
난감한 순간이다! 눈치빠른 왕가슴녀가 나의 당황한 눈빛을 캐치한 것이다. 식은 땀이 바짝난다. 빨려들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 그 소녀앞에서 나는 뭐라고 해야 할 것이냐. 내 정체가 이대로 밝혀지는 것이냐! 소녀는 재밌다는 듯,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쇼파 등받이로 털썩 등을 기대며 '몰라'하며 관심없다는 듯 물컵을 집어든다. 소녀는 물을 들이키며 한쪽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나한테 반했나 본데?"
하며 큭큭거린다. 나머지 천사들의 얼굴이 굳어진다. 소녀는 다리를 꼬고 앉아 남자들을 쭉 둘러본다. 다들 넋이 나간 듯 그녀를 바라본다. 사람같지 않은.. 만화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그녀를..
다른 천사들이 갑자기 거인이 되어버렸다. 그녀들 사이에 있는 소녀는 마치 작은 요정같다.
우리와는 동떨어진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요정.. 오직 그녀만이 보인다. 신비로운 엄지공주..
"뭐야? 재미없게 커피나 마시구.. 우리 술 마시러 가는게 어때요?"
그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우리를 리드한다. 언제나 먼저 나를 이끄는 그녀.. 난 아주 익숙한 듯, 1등으로 그녀를 따른다.
독일식 맥주집..
우리는 잔 가득 맥주를 따르고 Cheers를 외치며 맥주를 들이킨다. 소녀가 벌컥벌컥 단번에 한잔을 비운다.
"오~ 잘 마시는데요?"
남자들이 감탄스럽다는 듯 말한다.
"아.. 너무 갈증났거든요."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 앞에 빈 맥주잔을 들어보인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에게 맥주를 따른다. 그런데 자꾸 손이 떨린다. 이런 약한 모습은 곤란하다. 이럴 땐 무척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단 말이다.
"어. 그만!"
여드름녀와 교정녀 그리고 왕가슴녀가 동시에 소리를 꽥 지른다. 맥주가 넘쳐 어느새 소녀의 손을 타고 흐르고 있다. 한데 소녀는 아무런 동요없이 웃고있다. 나는 당황하여 맥주통을 내려놓고 더듬더듬 냅킨을 찾는다.
"아.. 이거 죄송합니다."
식은 땀이 흐르는 순간이다. 이런 바보같은 모습을.. 맥주 한 잔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말이다!
"저한테 사랑이 넘치시는 가봐요?"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롭게 맥주한모금을 마신다.
"이것봐.. 이 친구 얼굴 빨개졌는걸? 하하하.."
요주의 인물이 나를 놀리며 넘어갈 듯 과장된 박장대소를 터뜨린다. 그러자 normal하게 생긴 나머지 인간들도 고소하다는 듯 낄낄 거린다. 이런 사소한 농담하나 받아치지 못하고 얼굴이 빨개져 버리다니.. 이대로 광대가 되고 말 것인가? 아니.. 그럴 순 없다. 나도 만만치 않은 놈 아니더냐?
"이런.. 들켜버린 건가요?"
나는 이열치열의 방법으로 그들에게 반격한다. 소녀가 나의 반응에 흠짓 나를 쳐다보는가 싶더니 쿡하고 웃어버린다. 그러나 나머지 천사들의 얼굴은 더욱 굳어간다. 하지만 주선자는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이미 이 자리를 뜬 상태.. 더 이상 나머지 천사들을 배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곧이어 술자리 게임계의 전통.. 왕게임이 시작되었다. 8개의 쪽지에 1부터 7까지의 숫자와 '왕'자를 채워넣고 뽑기를 한다. 게임계의 지존인 내가 새삼스레 두근두근 긴장이 된다. 모두들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이 뽑은 쪽지를 펼쳐본다. 첫 번째 왕은 요주의 인물이 당첨이다. 요주의 인물은 씨익하고 변태적인 웃음을 흘리더니 느끼한 목소리로 명령을 시작한다.
"1번 4번 서로 목덜미에 키스하기.. 으흐흐.."
"우.. 누구야 누구?"
모두가 잔뜩 긴장하여 두리번 거리기 시작한다.
"나.. 제가 1번입니다."
normal남 1번이 수줍게 고백한다. 하지만 뒤이어..
"헉!"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두번째 normal 남이 4번쪽지를 떨어뜨린다. 우리는 결국 차마 못 볼 광경에 비위가 상해버린다.
"자.. 자.. 다시! 다시!"
우리는 쪽지를 모아 다시 뽑기를 시작한다. 이번 왕은... 왕가슴녀다. 왕가슴녀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명령을 시작한다.
"3번이 6번 귓볼깨물기.."
우.. 하는 신음소리들이 새어나온다.
"내가 3번이야.. 6번 누구세요?"
엄지공주가 자신의 쪽지를 펼쳐보이며 묻는다. 식은땀이 난다. 혹시나 내 쪽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나는.. 5번이다.
"에구.. 제가 6번입니다."
아뿔싸! 요주의 인물이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엄지공주를 바라보고 있다. 심장이 타오르는 것만 같다. 하지만 난.. 엄지공주의 조막만한 얼굴이 번들번들 느끼한 요주의 인물의 불타는 볼을 스치고, 그녀의 앵두같이 귀여운 입술이 그의 기름기 가득한 귓볼을 깨무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다. 나는 애써 시선을 외면한다. 하지만 그 순간 엄지공주의 뜨거운 시선을 느꼈던 건 나의 착각일까?
어쨌거나 요주의 인물은 뽕이라도 맞은 것 마냥 헤롱헤롱 제 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인단 말인가! 비즈니스시엔 감정따위 키우지 않는 냉혈한! 그게 바로 나 아니었더냔 말이다!
"오우 분위기 무르익고~ 한판 더!"
요주의 인물은 흥분이 극에 치달은 표정으로 쪽지를 모아 허겁지겁 섞기 시작한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의 표정.. 더 이상 봐 줄 수가 없다.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고 만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꽃혀버리는 순간이다.
"저기.. 화장실좀.."
나는 맥없이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에 들어가 애꿎은 담배만 피다 다시 화장실을 나온다.
"헉!"
나는 얕은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일 순간..아주 작은 무언가가 내 허리를 꼭 잡고 화장실로 돌격해 들어온 것이다. 나는 얼떨결에 화장실로 다시 밀려들어온다. 그 작은 물체는 좁은 변기칸으로 나를 밀어넣고 문을 잠궈버린다. 나는 그제서야 아래를 내려다본다. 내 앞엔 엄지공주가.. 그 화려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당신.."
"오늘은 누구꺼에요?"
엄지공주의 목소리에 냉기가 서려있다.
"네?"
"현정이? 자영이? 연희?"
"그게 무슨.."
"누구랑 파트너 해 주려구 나왔냐구요.."
"저.. 그게 아니라.."
엄지공주는 그 서늘한 눈빛으로 한 동안 나를 쏘아보다 휙 하고 나가 버린다. 알 수 없는 엄지공주.. 나는 왜 그녀 앞에만 서면 머저리가 되는 것인가.
나는 한 동안 나의 감정을 추스린 후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어이.. 이거 왜 이렇게 늦어셨나! 한창 재미있는 순간에!"
요주의 인물은 정말 원망스럽단 말투로 내게 궁시렁거린다. 재수없는 인간.. 한편 엄지공주는 방금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앉아있다. 마치 나 혼자 꿈이라도 꾸었던 것 마냥..
"자~ 자~ 다시 시작합니다."
요주의 인물이 쪽지를 내려놓자 마자 각자 쪽지를 집어든다. 이번 왕은.. 그녀.. 엄지공주다. 엄지공주는 좌중을 둘러보며 씨익 웃고는 앵두같은 입술로 명령을 시작한다.
"2번 5번 키스해요.. 뽀뽀말구 키스에요.. 아주 진하게.."
오우.. 우.. 가벼운 함성과 함께 모두가 2번과 5번을 찾아 혈안이 된다.
"저.. 제가 2번이네요..후.."
교정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수줍은 듯 말한다.
"5번.. 5번 누구야?"
하지만 5번은 좀 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아.. 누구야 이거.."
사람들은 급기야 짜증을 내며 서로의 쪽지를 공개하기 시작한다. 나는 무심코 나의 쪽지를 펼쳐본다. 어차피 엄지공주가 왕이 된 이상 난 쪽지를 확인하지도 않았더랬다. 헌데.. 헌데!
내가 5번이었단 말인가!
"저.. 죄송합니다. 제가 5번이네요.."
힘겹게 마른침을 삼킨다.
"어머.."
교정녀는 벌어지는 입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느 때 보다 더욱 번쩍이는 교정기를 과시하고 있다. 나는 침 조차 삼키지 못한 채 얼어버린다.
"키스 해! 키스해!"
잔뜩 숨을 죽이고 있는 girl들과는 대조적으로 man들은 오늘 만난 이래 가장 즐거운 함성을 토해내며 구호를 맞추고 있다. 난감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나도 모르게 엄지공주쪽을 바라본다. 얼어붙은 그녀의 강렬한 눈빛이 나의 눈과 마주쳐버렸다. 어디 해 볼테면 해보라는 그녀의 도전적인 눈빛에 자극되어 나는 반항하듯 교정녀 에게로 얼굴을 돌린다. 교정녀는 내가 어찌할 새도 없이 어느 새 내 코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그리고 어찌 할 틈도 없이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 대담하리만치 깊은 키스를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교정기가 혀에 닿는 순간 순간 쩌릿쩌릿 감전이 되는 느낌이다. 1초가 1년만 같은 순간.. '우..우..'하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아득히 들려온다. 빨리 이 순간이 끝나기만을 기도한다. 드디어 교정녀가 나를 놓아 주고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 나는 깊은 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엄지공주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하지만 그 곳엔.. 그녀가 없다. 엄지공주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