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완연해진 허공가득 투명하고 시린 기운이 손에 잡힐듯 느껴졌다. 등판을 할퀴고 지나치는 서늘한 기운이 서럽게 느껴지는 날들의 한 가운데 서있는 느낌이 었다. 린다가 그렇게 사라지고 난 후 추림은 꼬박 하루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처해있는 입장을 외며한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지만 지치고 무너지는 마음은 무기 력하기만했다. 이른 새벽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뜻하지 않은 인연이 되어 묘한 관계를 가진 린다가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것 같아 추림은 자꾸 뒤돌아 보았었다. 처음이었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포기했던적은. 결코 길지 않은 인생에서 자신이 지키고자, 스스로 맹세했던 신념을 외면하고 도망치듯 어 디론가 떠나는 실패자의 심정이었다. 청량리에 도착했다. 목적지없이 온 길이라 막막한 심정이었다. 누가 기다려 주지도 않았고 어딘가를 찾아갈 목적 지는 더욱 없었다. 이른 시간 술에 젖어든것은 어쩜 너무도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제의 추림이라는 남자가 더이상 아니듯 어제의 삶또한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세상을 더 겪고 경험했다면 이정도일에 흔들리지 않았을 터였지만 아무리 강한척해도 추림 의 나이 이제 불과 약관에 접어든 애송이에 불과한지도 몰랐다. 취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줄기차게 자작한 시간이 세시간이 넘을 정도로 술을 마셔댔지만 이상하게 정신은 멀쩡했다. 저녁 일곱시가 지나갈무렵.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에 어떤 심정을 느낀 추림은 어깨를 가느다랗게 떨어댔다. 없었다. 친구가 많다 여겼고 반겨 줄 이 많다 여겼었는데 막상 이렇게 덩그러니 혼자 남고 보 니 주위에 남은 이들이 아무도 없게 여겨졌다. 그것은 추림의 착각이었다. 자신의 처지를 내보이기 싫은 본능에서 비롯된 몹쓸 생각에 불과 했지만 추림 그 본인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움추려져 있었다. 많은 이들의 얼굴이 뇌리속으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원하지 않았던 인연들이 참으로 많았던 지난 날들이었다. 선주의 해맑은 모습이 떠올랐다. 단 한번도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해 얼마나 미안했던가! 순진하다 싶을정도의 그녀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그 진실 하나만을 맹신하고 고집하려 했었다. 그로인해 겪어야했을 부침들은 이루 말할수 없는 상처였지만 그녀는 끝내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한국을 떠났다. 어쩜 그것은 자신에게 평생의 미안함으로 남을듯 싶었다. 대담하고 담백한 성품의 시연과 진규... 아마 그들은 연인사이로 발전했을 것이라 생각되었 다. 인연이 아닌것을 굳이 인연으로 연계시켜 자신을 유혹했던 시연... 어쩌면 자신이 그때 그녀의 유혹에 넘어갔더라면 지금보다 더 행복한 날을 맞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연... 그녀는 자신이 만났던 여자들 중 가장 완벽한 여자로 기억되었다. 수연... 친구이면서 친구 이상의 것을 바라던 녀석. 유일하게 진정한 사내로 기억되던 친구 영호, 젊은 날 목숨을 다해야했던 녀석이 남긴 상처 는 감당못할만큼 커다란 것이었다. 그녀의 연인이었던 명숙... 한때 그녀를 좋아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영호 녀석이 그것을 알고 장난처럼 '너 갖을래' 하며 아무렇지도않게 말했을 때 얼마나 당황 했던가. 목숨을 줘도 아깝지 않은 친구가 영호였는데...... 믿음과 배신의 갈등을 선사했던 성규와 그의 애인 명화 지닌 재주가 많아 팔자가 박복하다 입버릇처럼 말한 성규의 말처럼 놈은 진정 재주가 많은 놈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놈에게 남이 갖지 못한 재주가 많았지만 남이 갖지 못한 방탕함도 지니고 있었다. 놈이 진정으로 삶을 살아가길 원했다. 더구나 명화는 놈이 아무렇게나 생각할만큼 가벼운 여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여자였다. 대준... 죽음뒤에 안식과 또다른 무언가가 있다면 대준 그는 지금 하늘에서 평온할까? 이상에 치우쳐 현실에 순응하지 못했던 남자였다. 보고싶었다. 스피드를 즐기고 유럽여행을 꿈꾸던 대준이었는데 그가 남긴것은 단순히 그의 죽음만이 아니었다. 죽은이들은 알까? 자신들은 떠나지만 남겨진 자들이 저들 떠난 자리에 남아 힘겨워 할 일들 을, 어쩜 죽음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진실일지도모른다. 숫한 이들의 모습과 일들이 떠올랐다가 명멸해갔다. 그리고 그 끝에 어김없이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작이면서 끝이라 여겨지는 존재! "큭큭큭... 왜 안되는건데? 왜? 왜 안되는건데 왜?" 술과 안주가 어지럽게 올려진 테이블을 움켜쥐고 괴소를 흘리던 추림이 발악하듯 외쳤다. "뭐야? 새끼가 술집 전세냈어? 조용히 처먹고......!" "놀랐잖아. 미친놈......"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썅! 아가리닥쳐 니들이 뭘 안다고 지랄들이야? 알아? 내심정을 아냐고?" 버럭 맞고함을 질러낸 추림의 눈동자가 희번덕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새까 안되겠구만! 젊은놈이 싸가지가 영 글러먹었어." 몇몇의 사내들이 거칠게 말하며 추림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추림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따르릉 따르릉...... '...연고지도없고 간단한일도 아니라서... 겨우 김석호씨 연락처를 알아냈습니다. 급하지 않다 면 이리로 와주시면... 지금 정신없이 자고 있습니다. 예. 예. 빨리 오셔야... 합의를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사실 이추림씨는 집행유예 중... 기다리겠습니다.' 청량에 위치한 파출소 앞에 택시가 요란한 굉음을 내며 멈추었다. 곧 날듯이 내린 사람이 파출소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곧바로 정복차림의 순경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제가 김석홉니다. 연락받고 오는 길인데... 저어기 이추림이라고 제 친굽니다." 벌개진 얼굴의 김석호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순경에게 말하자 순경이 고개짓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석호의 눈에 비친 한 부랑자 차림이 남자가 보였다. 앳되지만 정리되지 않은 머리결과 거친 얼굴, 한눈에 봐도 아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설마 그런 모습이 추림이라고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예전부터 고향이나 사회에서 이추림을 말하면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하나 있었다. 정정당당! 절대남아! 비겁한 행위뒤에 하늘을 보지 않는다. 무슨 무협소설에서나 나오는 말같지만 실지로 추림의 행동이 그랬다. 부끄러운 모습 보이지 않는 남자. 자존심을 함부로 도용하지 않는 남자. 타인의 아픔을 제것 인양 떠안는 남자! 남을 울릴지 모르는 남자가 바로 이추림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초라하고 남루한 모습이라니... 석호는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그리고 바로 눈시울이 시큰거리며 가슴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얼마만에 보는 추림인지 몰랐다. 그토록 찾고 찾다가 기어이 찾았을때 그는 구속된 몸이었었다. 그가 퇴소했다는 사실을 알았 을때 녀석은 또다시 사라졌다. 바람같다는 말 그대로 놈은 정말 바람처럼 사라졌었다. 전혀 뜻밖의 모습으로 나타날줄은 상상도못한 일이었건만... 이런 모습이길 바라지 않았고 생 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김석호씨?" 감정이 겪해져 숨이 막혀옴을 겨우 참아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애써 마음을 추 스렸다. "예. 제가 김석홉니다. 죄송합니다." 어깨에 나뭇잎 세개가 올려진 중년이 경찰이 다가오며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에... 참으로 웃긴 상황이라서요. 이추림 20세 얼마전에 폭력으로 미결구속 후 출소, 그리고 다시 폭력사건... 이게 뭘 뜻하는건지 아십니까?" 그러면서 한쪽을 힐긋 바라보았다. 석호의 눈이 자연스레 그쪽을 바라보았는데 긴 나무 의자에 삼십대로 보이는 네명이 사내들 이 얼굴이 퉁퉁 부은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 무지한게 아니다. 당연히 알아야 할 일들을 지식으로 삼아 살아가야 할 것이 있는 반면에 몰 라도 될것들이 있다. 석호같은 사람들의 입장에선 미결이 뭐고 집행유예가 뭔지 몰라도 사는 것과는 하등 문제가 없는 것이다. "추림이 저 아저씨들을... 그러니까... 합의하면 되는건가해서요." 분위기를 보아 대충 상황을 유츄한 석호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도대체 이 상황이 이해가되나?" 어느새 말을 놓으며 석호에게 묻는 경찰의 얼굴에 왠지 장난끼가 묻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 다. "예? 아 그것이......" 말문이 막혔다. 싸움질을 무척이나 잘하는 놈인데요하고 말할 입장이 아니다. 다행이 경찰은 더이상 호기를 부리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우선되는 일이 먼저였다. "대충봐도 알겠지만 이추림...씨보다 저분들이 많이 다쳤어. 뭐 서로 치고받았으니 쌍방정도 되겠지만 불리한건 이추림씨란 말야. 미결이지만 집유기간이라 야짤없다고. 합의해." "예. 그러겠습니다. 어떻해... 얼마나?" 물로 돈 이야기지만 괜히 마음이 움츠러 드는것은 어쩔수 없었다. 이쪽으로 전혀 경험이 없으니 합의금의 액수가 얼마나 되는지 유추해 볼수도 없는 것이다. 알고 있는 지식내에서 보자면 그리 많을것도 같지 않은데 상황이 불리하다 하니까 무리한 요구가 있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석호의 어색해진 얼굴을 보고 왜 그런지 감을 잡은 경찰이 풀썩 웃었다. "큰 상처도 아니니까. 찰과상 정도지만 그것도 상처는 상처지. 원래 법이 정하는 합의금이 있지만 그런거 따지면 이놈의 나라에서 살겠어? 대충 합의하라고. 이봐 당신들 이리좀 와바." 경찰관이 거침없이 반말로 뚱하게 앉아있는 사내들을 불렀다. 추춤거리며 사내들이 다가오자 경찰관이 한심하다는듯 쳐다보았다. "나 이런 사람들하곤. 그래 사지 멀쩡한 양반들이 넷씩이나 덤벼 그런 얼굴이 되셨다고?" 경찰관의 말에 곤혹스런 얼굴로 사내들이 고개를 숙였다. 어찌되었든간에 남자입장에서 창피해도 보통 창피한 일이 아닌것이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석호는 그제서야 뭔가 느껴졌다. 별반 큰 상처는 아니지만 경찰이 개입된 사건이면 일단 법적 문제가 된다. 헌데 별로 큰 폭력 사건이 아니면 왠만한 일들은 파 출로 내에서 해결되기마련이다. 사내들은 사건이 유아무아 덥어지길 바란것이다. 욱해서 싸움을 벌였지만 골치아프게 진술이니 뭐니해서 시간 죽이는 일도 귀찮을거고 더구나 넷이서 한명을 상대로 싸워 졌다는 부끄러움이 창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한 상처가 있고 졌다는 부끄러움이 화가되어 합의니 뭐니 하면서 버틴 마음이 서서 히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합의해. 대충 하고 잊는게 낳을듯 싶은데. 어때 당신들? 아니면 당신들 보호자 오라고 하고 지역관할서로 넘길테니까 빨리 결정하라고." 그말에 석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석호보다 더 사색된 얼굴로 사내들이 흠칫거렸다. 가정을 가진 삼십대의 대한민국 남 자들의 초라한 모습이 저런 것이다. "됐수다. 합의는 무슨... 어디 다친것도 아니고." 한명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하곤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말이 있고나서 상황은 급진전 되었다. 간단한 서류에 지장을 찍고 담당 경찰관과 몇다디 나 눈 그들은 잠든 추림을 한참 노려보다가 파출소를 나가 사라졌다. 다행스런 일이었다. 긴장이 풀린 석호가 잠든 추림의 곁에 가서 앉았다. 조금전 경찰관이 커피 두잔을 들고 다가왔다. "너 이놈 친구냐?" 커피 한잔을 건네며 대뜸 옆집 아저씨 같은 투로 물어와 석호가 놀란 얼굴로 경찰관을 바라보 았다. "이추림 저놈이 복은 있나보다. 퇴소하고 나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짓거리를 저질렀지만 그 장소가 여긴것이 말이다." 모를 소리였다. 마치 추림을 잘 아는 사람같은 말투처럼 들렸다. "저놈 본지가 이년만이다. 내가 본서에 있을때 저놈이랑 마신술이 말술이란 말이다." "예에? 그럼 추림을 알고 있었다는... 어떻게?" 정말 놀라운 사실이었다.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경찰관이 피식하고 웃음을 보였다. "처음엔 아들같다가 다음엔 동생같았고 그 다음엔 친구같은 괴물같은 놈이었는데 이제보니 형같은 모습이라... 봐라 세상 다 산놈같은 모습이지 않아?" "......?" "허. 뭘 그렇게 놀라서 보냐? 너 장영호라고 알지?" 중년 경찰의 그 한마디에 석호의 눈이 커질대로 커졌다. 너무 잘아는 이름이 나온 것이다. 그것도 전혀 상관없을 사람의 입에서. "그놈이 죽기전에 나랑 인연이 깊었다. 그놈덕에 저놈도 자연스레 알았으니까. 그런데 다시 는 못볼것 같던 놈을 이렇게 한직에서 물러나 있을때 본것이 나도 신기하군." 그제서야 석호는 어느정도 이해가 갔다. 영호는 고향에서도 가끔 회자되는 사움꾼이었다. 그가 사회에 나와 가담했던 조직폭력의 일. 폭력배와 경찰의 사이는 멀고도 가까운 관계였다. 장영호와 이추림! 그 둘의 우정은 같은 친구들이 보아도 질투가 날만큼 각별한 것이었었다. 누가 진정한 사내냐 하는 내기가 있을만큼 어릴적 꼬마시절부터 유명한 그들이었다. "돌고도는 것이 인연이라지만 참으로 묘하군. 파출소로 발령난지 며칠만에 저놈을 만났으니 다행스런 일인지 모르겠단 말이다. 저놈이 사내놈만 아니였으면 이렇게 일이 끝나지 않았겠 지?" "윽!" 석호의 등짝을 후려갈기며 경찰관이 씨익 웃어보였다. 그가 말한 사내의 의미가 어떤것인지 희미하게 느껴진 석호가 다시 곁에서 잠든 추림을 바라 보았다. ************************** 주말이어서 거리는 사람들로 넘치고 북적거렸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종로 피카디리 극장을 지나쳐 걷자 간밤에 석호가 정한 약속 장소가 보였 다. 한참 유행중인 수입커피 전문점의 육중한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벌써 히터를 틀어놓았는지 따듯한 기운이 가게안에 가득했다. 얼굴을 찡그리며 커피샵을 두리번 거렸다. 지난밤에 있었던 일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폭음중에 사내들과 벌였던 난투극과 파출소로의 연행, 그뒤로 생각은 단절되었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석호가 곁에 있었고 자신은 어느 여관 에 누워있었다. 두통이 있는탓에 머리를 지긋이 누르며 석호를 찾았다. 커다란 열대수에 가려진 창가에 앉아있는 석호가 보였다. 그를 확인한 추림이 다가갔다. 친구들을 보고싶지는 않았지만 작은 사고가 석호를 연결시켜주는 고리가 되어버렸다. 상관은 없었다. 어색하고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석호는 어릴적부터 가장 친했고 믿으며 지낸 몇놈중 하나였다. 석호는 혼자가 아니었다. 곁에 앉은 이는 흰 피부에 둥근 얼굴의 영진이고 그 건너편에 자리한 두명의 여자중 한명은 차가운 얼굴의 김수연이었다. 문득,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다 여긴 추림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보이기 싫었다. 자신이 언제 이렇게 허술한 모습을 보인적이 있단 말인가. 단 한번도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 로 친구들 앞에 나선적이 없었다. 추림은 피식하고 웃었다. 자신의 처지를 너무 과장되게 생각하고 있는건 아닌가하는 생각에 서였다. "어? 추림이 왔다." 서있는 추림을 발견한 석호가 말하며 웃어보였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추림에게 모여들었다. "야. 이추림 오랜만이다." 영진이 일어서며 손을 내밀었다. 영진의 손을 잡아 흔들며 추림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수연을 바라보았다. 이런... 수개월동안 어딘가 모르게 수척해진 수연의 눈가에 그렁한 눈물이 맺혀있었다. 이미 울었는지 눈이 붉게 변해있었다. '개자식. 혼자 나올것이지.' 속으로 석호를 욕한것은 수연의 눈물탓이었다. 몇개월이 흘렀는지 모른다. 이렇게 이들을 본것이 수년. 수십년만에 보아도 그저 그런 관계가 있는 반면에 며칠만에 보아도 무척이나 오래된듯한 관계가 있다. 수연이 추림에겐 그런 친구였다. 어려운 시기에 만나게된 오랜 고향친구 김수연. 어떻게 대해야할지 순간 망설여졌다. "앉지. 조금 늦었구나." 석호의 말이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수연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지며 추림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추림이 살짝 웃어주며 석호가 내준 자리에 앉았다. "모두 오랜만이구나. 다들 잘 지냈니?" 추림이 조용하게 인삿말을 건네며 특유의 부드러운 시선으로 주위를 쓸어보았다. "추림아 인사해라. 이쪽은 미진씨라고한다. 이새끼랑 살짝 어울리는 사이다." 석호가 수연의 곁에 앉은 여자를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쁘장하지만 어딘가 유약해보인다. "추림입니다." 인사가 오가고 차를 한잔 마실동안 어색한 침묵이 오갔다. 그 침묵의 동기는 당연히 추림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난 이를 대하는 자세를 이들은 아직 배우지 못했다. 만약 추림이 반대 입장이라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좌중을 이끄는 분위기와 힘은 타고나거나 만들어지는 것이다. 성품. 성정. 카리스마를 내뿜기에는 석호도 영진도 아직 앳된 애송이었다. 결국 한동안의 침묵은 추림에의해 변하되기 시작했다. "근 오개월여만인것 같다. 미안하다. 걱정하고 생각했을 너희들인데... 좀 많은 일들이 있었다. 황당하고 어려웠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게되어 진심으로 기쁘다." "그래. 새끼야. 참 엿같은 일이었어. 니가 그렇게 사라지고 난리가 아니었다. 엇그제 추석때도 온통 니얘기가 난무했다. 죽었다는둥 해외로 나갔다는둥... 후... 난 솔직히 네놈안테 서운한게 아주 많다. 그래도 난 널 친구로 생각했는데 니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을때 나안테만은 연락 하 겠지하고 생각했거든. 친구를 친구답지 못하게 만든 너의 행동은 경솔했어. 알고있어?" 석호가 정말 서운하고 화가난 얼굴로 입을열어 말하자 영진이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추림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마음은 메마른 대지와같이 변해있지만 그런 모습을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앞에서 보일수는 없었다. "할말없구나. 하지만 너희들을 잊은것은 아니었어. 나도 내가 겪은 일이 무언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야. 갑자기라기보다 기다렸던 일을 겪었다고 생각했거든. 다시말하지만 정말 미안하다."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지며 대화가 오가는동안 수연은 두근거리며 터질듯한 심장을 달래고 있었다. 어제 밤 늦은 시간에 석호에게 연락을 받고 밤새 한숨도 못자고 오지 않을것 같은 지금의 순 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어떤 모습일까. 그는여전할까. 온통 추림의 생각만으로 밤을 하얗게 새우며 울었다. 석호에게 들었던 추림의 현실. 그리고 지금의 추림. 믿을수가 없었다. 가끔 꿈에 나타났던 추림의 모습과 많이도 닮아 있었다. 수도없이 꿈에 나타났던 추림은 헐벗고 굶주린 모습이었다. 피투성이였고 상처투성이었다. 무엇에 그리 분노하고 있는지 무서운 얼굴로 끝없이 무언가를 찾고 헤매는 모습이었다. 사랑. 이제는 확신한다. 더이상 그를 두고 왜? 라는 의문은 필요없다. 수개월동안 가슴에 두고 묻고 또 물었던 의문의 진실은 올곧은 사랑이었다. 어떤 질문도 의문도 필요없는 사랑을 두고 고민하지 않기로했다. 그리고 찾아든 그리움. 미쳐버릴듯한 추림에대한 그리움이 날카로운 칼에 베인것처럼 상처되고 고통되어 숱한 날을 울게 만들었다. 끝없는 기다림은 기약없이 이어졌고 마치 시한부를 살아가는 것처럼 내일이 두렵게만 느껴졌 다. 오늘 그에대해 아무런 흔적을 알지 못하고 또다시 내일을 오늘처럼 기다릴 것이 두렵게 여 겨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만이 남음을 알았다. 그를 언젠가 만난다면 그토록 힘에 겨웠던 날들에 대한 상처를 잊을것 같은 희망을 품었다. 사랑에 대한 댓가는 상상보다 더 시련이 컸고 커다란 댓가를 요구했다. 황폐화. 세상이 그토록이나 삭막하고 두렵게 느껴질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를 만났는데,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얼굴을 뒤덮을 정도로 자라 헝크러진 머리와 수척하고 까칠해진 얼굴모습. 우수에 젖고 깊은 슬픔에 지배당한 눈빛. 가슴이 터져나갈것 같은 아픔이 전해졌다. 어떤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모습과 느낌이 변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차분한 얼굴로 말하고 있는 추림의 모습때문에... 힘에 겨워하는 내면의 소리가 울리고 있는데도 견디고있는 그의 모습때문에 더 마음이 갈라 지고 무너져내렸다. 단 한번이라도 좋았다. 여기 있는 친구들 중 아무에게나 기대어 지쳐버린 현실을 목놓아 토해놓기라도 하지. 소리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도 닦아도 멈추지 않음이 끝내 견딜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갈수 밖에 없었다. "나가봐라. 너없는동안 저녀석 엉망이었다. 살아도 사는게 아니었단 말이다. 가서 한번이라도 안아줘라. 그게 친구든 뭐든 상관없이 말이다." 수연의 상태를 애써 외면하고 있던 석호가 수연이 자리를 씁쓸하게 바라보다가 추림에게 넌즈 시 말했다. "잠깐 나갔다오마." "다녀와라. 술이나한잔하러가자." 영진의 말을 뒤로하고 추림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수연은 삼층으로 향하는 건물의 계단 빈공간에 등을 기대로 울고 있었다. 추림은 그런 수연을 바라보며 뭐라 말못할 착찹한 심정이 되었다. 그녀가 진즉에 자신을 남달 리 생각하고 있던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까지인줄 몰랐다. 하지만 누구보다 수연의 지금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 추림이었다. 자신이 유미를 그랬고 선주가 자신을 그랬듯이 수연의 가슴앓이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양날의 검같은 것이다. 서로사랑이면 다치지 않겠지만 외사랑은 온통 상처만 남긴다. 자신의 지금처럼 말이다. 수연에게 조용히 다가간 추림이 수연의 어깨를 당겼다. 저항없이 다가온 수연을 가슴에 묻었다. "하아!" 긴 한숨을 토하며 수연을 안은 추림은 수연의 등을 가만히 다독거렸다. "흑흑. 나쁜놈! 나쁜놈!" 투정인듯 앙탈인듯 추림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수연이 그렇게 흐느꼈다. "그래. 난 나쁜놈이다. 이렇게 졸렬하잖아. 그까짓 사랑을 받아들이지도 잊지도 못하고 난 바 보 병신처럼 이렇게 용기없는 놈인가보다." 추림역시 슬펐다. 자신의 슬픔을 누군가 대신해줄수만 있다면 모두 떠넘기고 싶을만큼 힘에 겨웠다. 하지만 자신과같이 아픔을 겪고있는 수연을 대하니 자신의 고통이 고통이 아닌듯 느 껴졌다. 무겁다.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다. 자신으로인한 업이다. 여기 또하나의 사랑이 울고있다. 둘이어야 하는 사랑이 하나여서 서러 워하고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서러워하는 영혼이있다. 찾지도 주지도 못하는 심정을 어찌 감당하란 말인가? 도저히 이겨내지 못할 시련이었다. "이게뭐야. 얼굴이 이게 뭐냐고? 너 추림맞는거야? 이렇게 변할려고 떠돌았니? 왜 멀리있는 것을 쫒니 왜? 니곁에 소중한 이들도 가치도 있는데... 왜?" 마치 어미가 자식을 그러하듯 추림의 얼굴을 만지고 쓸어보던 수연이 다시 눈물을 흘리며 격 정을 토해냈다. 차라리 눈을 감아버린 추림은 어금니를 악물고 치미는 서글픔을 달래고만 있었다. '수연아. 신은 내게 이미 정해진 운명의 굴레를 씌우셨다. 난...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지닌 마음의 끝에 기다릴 것이 어떤것인지.' 차마 말할수 없는 것을 속으로 뇌까리 추림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추림아, 나 할말이 있어. 그말을 꼭 해야겠어. 아무것도 원하지않아. 단지 기다릴께. 내가 그 애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겠어. 십년. 백년이 흘러도 기다릴꺼야. 죽어서라도 기 다릴수있어." 안다. 수연이 무엇을 말하려하는지. 하지만 그럴수없다. 정애의 목마름은 영혼이 파괴되는 고 통이다. 육신의 고통이 아닌 인간의 근본을 갉아먹는 괴물인 것이다. 수연이 자신을 그리 사랑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그럴수 없었다. 그럴수록 자신과 수연은 멀어질 뿐인것을...... "수연아. 그러지 말자. 난 네게......" "아니. 나... 너. 이추림을 사랑할거야. 사랑해! 내 의지마저 안된다고 하지마. 알아 니가 사랑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라는거. 그래 날 사랑해 달라고 하지않아. 내 사랑은 그 애하곤 다를 거야. 난 널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수 있어. 너의 소식을 들으며 올바른 너의 현실을 기 꺼워하며 널 사랑할꺼야. 그것도 안된다고 하지마. 대신 너의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 내가 사 랑하는 사람의 모습은 이런게 아니야. 당당하고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란 말이야." 수연의 고백과 말은 추림의 심장을 후벼파는 것이었다. 사람은 모습이 변하는게 아니다. 인성이 무너지고 심성이 분열하는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변하 는 것이다. 그 모습이 추림이 지니고 있는 현실이었다. "하아......"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수가 없었다. 무엇이 이렇게 힘들고 복잡한 것인지 삶을 처음부터 다시 산다고해도 이렇게 어렵지 않을것 같았다. 허탈한 추림의 모습을 야무진 얼굴로 올려다보던 수연이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보고싶었어. 미치도록 보고싶었어. 다시는 떠나지마 다시는... 용서하지 않을거야. 다시는 떠 나지마." 가슴에 못이 박힌다는 말이있다. 진짜 못이 박히는것이 아니다. 멀쩡한 생살을 뚫고 박히는 쇠붙이가 전하는 고통과도 같은 것 을 이르는 말이다. 가슴이 천근만근이라는 말이있다. 감당못할 고통의 무게를 표현한 느낌을 이르는 말이다. 추림이 그랬다. 가슴에 못이 박히고 만근의 거석이 얹혀진 것처럼 아프고 무거웠다. 머리속이 하얗게 비워가는느낌이 들었다. 어리석다. 건너지 못할 강 한가운데 떠있는 느낌. "허허... 으하하하......!" 가슴에 수연을 안은 추림은 끝내 한줄기 눈물을 흘리며 긴 탄식과 함께 허망함이 가득한 비탄 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53장에 계속)
유리사랑 (52장/ 수연과의 만남) <실극화>
가을이 완연해진 허공가득 투명하고 시린 기운이 손에 잡힐듯 느껴졌다.
등판을 할퀴고 지나치는 서늘한 기운이 서럽게 느껴지는 날들의 한 가운데 서있는 느낌이
었다.
린다가 그렇게 사라지고 난 후 추림은 꼬박 하루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처해있는 입장을 외며한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지만 지치고 무너지는 마음은 무기
력하기만했다.
이른 새벽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뜻하지 않은 인연이 되어 묘한 관계를 가진 린다가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것 같아 추림은
자꾸 뒤돌아 보았었다.
처음이었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포기했던적은.
결코 길지 않은 인생에서 자신이 지키고자, 스스로 맹세했던 신념을 외면하고 도망치듯 어
디론가 떠나는 실패자의 심정이었다.
청량리에 도착했다.
목적지없이 온 길이라 막막한 심정이었다. 누가 기다려 주지도 않았고 어딘가를 찾아갈 목적
지는 더욱 없었다.
이른 시간 술에 젖어든것은 어쩜 너무도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제의 추림이라는 남자가 더이상 아니듯 어제의 삶또한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세상을 더 겪고 경험했다면 이정도일에 흔들리지 않았을 터였지만 아무리 강한척해도 추림
의 나이 이제 불과 약관에 접어든 애송이에 불과한지도 몰랐다.
취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줄기차게 자작한 시간이 세시간이 넘을 정도로 술을 마셔댔지만
이상하게 정신은 멀쩡했다.
저녁 일곱시가 지나갈무렵.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에 어떤 심정을 느낀 추림은 어깨를 가느다랗게 떨어댔다.
없었다. 친구가 많다 여겼고 반겨 줄 이 많다 여겼었는데 막상 이렇게 덩그러니 혼자 남고 보
니 주위에 남은 이들이 아무도 없게 여겨졌다.
그것은 추림의 착각이었다. 자신의 처지를 내보이기 싫은 본능에서 비롯된 몹쓸 생각에 불과
했지만 추림 그 본인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움추려져 있었다.
많은 이들의 얼굴이 뇌리속으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원하지 않았던 인연들이 참으로 많았던 지난 날들이었다.
선주의 해맑은 모습이 떠올랐다. 단 한번도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해 얼마나 미안했던가!
순진하다 싶을정도의 그녀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그 진실 하나만을 맹신하고 고집하려 했었다.
그로인해 겪어야했을 부침들은 이루 말할수 없는 상처였지만 그녀는 끝내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한국을 떠났다.
어쩜 그것은 자신에게 평생의 미안함으로 남을듯 싶었다.
대담하고 담백한 성품의 시연과 진규... 아마 그들은 연인사이로 발전했을 것이라 생각되었
다. 인연이 아닌것을 굳이 인연으로 연계시켜 자신을 유혹했던 시연... 어쩌면 자신이 그때
그녀의 유혹에 넘어갔더라면 지금보다 더 행복한 날을 맞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연... 그녀는 자신이 만났던 여자들 중 가장 완벽한 여자로 기억되었다.
수연... 친구이면서 친구 이상의 것을 바라던 녀석.
유일하게 진정한 사내로 기억되던 친구 영호, 젊은 날 목숨을 다해야했던 녀석이 남긴 상처
는 감당못할만큼 커다란 것이었다.
그녀의 연인이었던 명숙... 한때 그녀를 좋아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영호 녀석이 그것을 알고 장난처럼 '너 갖을래' 하며 아무렇지도않게 말했을 때 얼마나 당황
했던가. 목숨을 줘도 아깝지 않은 친구가 영호였는데......
믿음과 배신의 갈등을 선사했던 성규와 그의 애인 명화 지닌 재주가 많아 팔자가 박복하다
입버릇처럼 말한 성규의 말처럼 놈은 진정 재주가 많은 놈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놈에게 남이 갖지 못한 재주가 많았지만 남이 갖지 못한 방탕함도 지니고 있었다.
놈이 진정으로 삶을 살아가길 원했다. 더구나 명화는 놈이 아무렇게나 생각할만큼 가벼운
여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여자였다.
대준... 죽음뒤에 안식과 또다른 무언가가 있다면 대준 그는 지금 하늘에서 평온할까?
이상에 치우쳐 현실에 순응하지 못했던 남자였다. 보고싶었다. 스피드를 즐기고 유럽여행을
꿈꾸던 대준이었는데 그가 남긴것은 단순히 그의 죽음만이 아니었다.
죽은이들은 알까? 자신들은 떠나지만 남겨진 자들이 저들 떠난 자리에 남아 힘겨워 할 일들
을, 어쩜 죽음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진실일지도모른다.
숫한 이들의 모습과 일들이 떠올랐다가 명멸해갔다.
그리고 그 끝에 어김없이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작이면서 끝이라 여겨지는 존재!
"큭큭큭... 왜 안되는건데? 왜? 왜 안되는건데 왜?"
술과 안주가 어지럽게 올려진 테이블을 움켜쥐고 괴소를 흘리던 추림이 발악하듯 외쳤다.
"뭐야? 새끼가 술집 전세냈어? 조용히 처먹고......!"
"놀랐잖아. 미친놈......"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썅! 아가리닥쳐 니들이 뭘 안다고 지랄들이야? 알아? 내심정을 아냐고?"
버럭 맞고함을 질러낸 추림의 눈동자가 희번덕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새까 안되겠구만! 젊은놈이 싸가지가 영 글러먹었어."
몇몇의 사내들이 거칠게 말하며 추림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추림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따르릉 따르릉......
'...연고지도없고 간단한일도 아니라서... 겨우 김석호씨 연락처를 알아냈습니다. 급하지 않다
면 이리로 와주시면... 지금 정신없이 자고 있습니다. 예. 예. 빨리 오셔야... 합의를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사실 이추림씨는 집행유예 중... 기다리겠습니다.'
청량에 위치한 파출소 앞에 택시가 요란한 굉음을 내며 멈추었다.
곧 날듯이 내린 사람이 파출소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곧바로 정복차림의 순경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제가 김석홉니다. 연락받고 오는 길인데... 저어기 이추림이라고 제 친굽니다."
벌개진 얼굴의 김석호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순경에게 말하자 순경이 고개짓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석호의 눈에 비친 한 부랑자 차림이 남자가 보였다.
앳되지만 정리되지 않은 머리결과 거친 얼굴, 한눈에 봐도 아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설마 그런 모습이 추림이라고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예전부터 고향이나 사회에서 이추림을 말하면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하나 있었다.
정정당당! 절대남아!
비겁한 행위뒤에 하늘을 보지 않는다.
무슨 무협소설에서나 나오는 말같지만 실지로 추림의 행동이 그랬다.
부끄러운 모습 보이지 않는 남자. 자존심을 함부로 도용하지 않는 남자. 타인의 아픔을 제것
인양 떠안는 남자! 남을 울릴지 모르는 남자가 바로 이추림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초라하고 남루한 모습이라니... 석호는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그리고 바로 눈시울이 시큰거리며 가슴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얼마만에 보는 추림인지 몰랐다.
그토록 찾고 찾다가 기어이 찾았을때 그는 구속된 몸이었었다. 그가 퇴소했다는 사실을 알았
을때 녀석은 또다시 사라졌다. 바람같다는 말 그대로 놈은 정말 바람처럼 사라졌었다.
전혀 뜻밖의 모습으로 나타날줄은 상상도못한 일이었건만... 이런 모습이길 바라지 않았고 생
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김석호씨?"
감정이 겪해져 숨이 막혀옴을 겨우 참아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애써 마음을 추
스렸다.
"예. 제가 김석홉니다. 죄송합니다."
어깨에 나뭇잎 세개가 올려진 중년이 경찰이 다가오며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에... 참으로 웃긴 상황이라서요. 이추림 20세 얼마전에 폭력으로 미결구속 후 출소, 그리고
다시 폭력사건... 이게 뭘 뜻하는건지 아십니까?"
그러면서 한쪽을 힐긋 바라보았다.
석호의 눈이 자연스레 그쪽을 바라보았는데 긴 나무 의자에 삼십대로 보이는 네명이 사내들
이 얼굴이 퉁퉁 부은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
무지한게 아니다. 당연히 알아야 할 일들을 지식으로 삼아 살아가야 할 것이 있는 반면에 몰
라도 될것들이 있다. 석호같은 사람들의 입장에선 미결이 뭐고 집행유예가 뭔지 몰라도 사는
것과는 하등 문제가 없는 것이다.
"추림이 저 아저씨들을... 그러니까... 합의하면 되는건가해서요."
분위기를 보아 대충 상황을 유츄한 석호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도대체 이 상황이 이해가되나?"
어느새 말을 놓으며 석호에게 묻는 경찰의 얼굴에 왠지 장난끼가 묻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
다.
"예? 아 그것이......"
말문이 막혔다. 싸움질을 무척이나 잘하는 놈인데요하고 말할 입장이 아니다.
다행이 경찰은 더이상 호기를 부리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우선되는 일이 먼저였다.
"대충봐도 알겠지만 이추림...씨보다 저분들이 많이 다쳤어. 뭐 서로 치고받았으니 쌍방정도
되겠지만 불리한건 이추림씨란 말야. 미결이지만 집유기간이라 야짤없다고. 합의해."
"예. 그러겠습니다. 어떻해... 얼마나?"
물로 돈 이야기지만 괜히 마음이 움츠러 드는것은 어쩔수 없었다.
이쪽으로 전혀 경험이 없으니 합의금의 액수가 얼마나 되는지 유추해 볼수도 없는 것이다.
알고 있는 지식내에서 보자면 그리 많을것도 같지 않은데 상황이 불리하다 하니까 무리한
요구가 있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석호의 어색해진 얼굴을 보고 왜 그런지 감을 잡은 경찰이 풀썩 웃었다.
"큰 상처도 아니니까. 찰과상 정도지만 그것도 상처는 상처지. 원래 법이 정하는 합의금이
있지만 그런거 따지면 이놈의 나라에서 살겠어? 대충 합의하라고. 이봐 당신들 이리좀 와바."
경찰관이 거침없이 반말로 뚱하게 앉아있는 사내들을 불렀다.
추춤거리며 사내들이 다가오자 경찰관이 한심하다는듯 쳐다보았다.
"나 이런 사람들하곤. 그래 사지 멀쩡한 양반들이 넷씩이나 덤벼 그런 얼굴이 되셨다고?"
경찰관의 말에 곤혹스런 얼굴로 사내들이 고개를 숙였다.
어찌되었든간에 남자입장에서 창피해도 보통 창피한 일이 아닌것이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석호는 그제서야 뭔가 느껴졌다. 별반 큰 상처는 아니지만 경찰이
개입된 사건이면 일단 법적 문제가 된다. 헌데 별로 큰 폭력 사건이 아니면 왠만한 일들은 파
출로 내에서 해결되기마련이다.
사내들은 사건이 유아무아 덥어지길 바란것이다.
욱해서 싸움을 벌였지만 골치아프게 진술이니 뭐니해서 시간 죽이는 일도 귀찮을거고 더구나
넷이서 한명을 상대로 싸워 졌다는 부끄러움이 창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한 상처가 있고 졌다는 부끄러움이 화가되어 합의니 뭐니 하면서 버틴 마음이 서서
히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합의해. 대충 하고 잊는게 낳을듯 싶은데. 어때 당신들? 아니면 당신들 보호자 오라고 하고
지역관할서로 넘길테니까 빨리 결정하라고."
그말에 석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석호보다 더 사색된 얼굴로 사내들이 흠칫거렸다. 가정을 가진 삼십대의 대한민국 남
자들의 초라한 모습이 저런 것이다.
"됐수다. 합의는 무슨... 어디 다친것도 아니고."
한명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하곤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말이 있고나서 상황은 급진전 되었다. 간단한 서류에 지장을 찍고 담당 경찰관과 몇다디 나
눈 그들은 잠든 추림을 한참 노려보다가 파출소를 나가 사라졌다.
다행스런 일이었다.
긴장이 풀린 석호가 잠든 추림의 곁에 가서 앉았다.
조금전 경찰관이 커피 두잔을 들고 다가왔다.
"너 이놈 친구냐?"
커피 한잔을 건네며 대뜸 옆집 아저씨 같은 투로 물어와 석호가 놀란 얼굴로 경찰관을 바라보
았다.
"이추림 저놈이 복은 있나보다. 퇴소하고 나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짓거리를 저질렀지만 그
장소가 여긴것이 말이다."
모를 소리였다.
마치 추림을 잘 아는 사람같은 말투처럼 들렸다.
"저놈 본지가 이년만이다. 내가 본서에 있을때 저놈이랑 마신술이 말술이란 말이다."
"예에? 그럼 추림을 알고 있었다는... 어떻게?"
정말 놀라운 사실이었다.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경찰관이 피식하고 웃음을 보였다.
"처음엔 아들같다가 다음엔 동생같았고 그 다음엔 친구같은 괴물같은 놈이었는데 이제보니
형같은 모습이라... 봐라 세상 다 산놈같은 모습이지 않아?"
"......?"
"허. 뭘 그렇게 놀라서 보냐? 너 장영호라고 알지?"
중년 경찰의 그 한마디에 석호의 눈이 커질대로 커졌다.
너무 잘아는 이름이 나온 것이다. 그것도 전혀 상관없을 사람의 입에서.
"그놈이 죽기전에 나랑 인연이 깊었다. 그놈덕에 저놈도 자연스레 알았으니까. 그런데 다시
는 못볼것 같던 놈을 이렇게 한직에서 물러나 있을때 본것이 나도 신기하군."
그제서야 석호는 어느정도 이해가 갔다.
영호는 고향에서도 가끔 회자되는 사움꾼이었다. 그가 사회에 나와 가담했던 조직폭력의 일.
폭력배와 경찰의 사이는 멀고도 가까운 관계였다.
장영호와 이추림!
그 둘의 우정은 같은 친구들이 보아도 질투가 날만큼 각별한 것이었었다.
누가 진정한 사내냐 하는 내기가 있을만큼 어릴적 꼬마시절부터 유명한 그들이었다.
"돌고도는 것이 인연이라지만 참으로 묘하군. 파출소로 발령난지 며칠만에 저놈을 만났으니
다행스런 일인지 모르겠단 말이다. 저놈이 사내놈만 아니였으면 이렇게 일이 끝나지 않았겠
지?"
"윽!"
석호의 등짝을 후려갈기며 경찰관이 씨익 웃어보였다.
그가 말한 사내의 의미가 어떤것인지 희미하게 느껴진 석호가 다시 곁에서 잠든 추림을 바라
보았다.
**************************
주말이어서 거리는 사람들로 넘치고 북적거렸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종로 피카디리 극장을 지나쳐 걷자 간밤에 석호가 정한 약속 장소가 보였
다.
한참 유행중인 수입커피 전문점의 육중한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벌써 히터를 틀어놓았는지
따듯한 기운이 가게안에 가득했다.
얼굴을 찡그리며 커피샵을 두리번 거렸다.
지난밤에 있었던 일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폭음중에 사내들과 벌였던 난투극과 파출소로의
연행, 그뒤로 생각은 단절되었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석호가 곁에 있었고 자신은 어느 여관
에 누워있었다.
두통이 있는탓에 머리를 지긋이 누르며 석호를 찾았다.
커다란 열대수에 가려진 창가에 앉아있는 석호가 보였다. 그를 확인한 추림이 다가갔다.
친구들을 보고싶지는 않았지만 작은 사고가 석호를 연결시켜주는 고리가 되어버렸다.
상관은 없었다. 어색하고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석호는 어릴적부터 가장 친했고 믿으며
지낸 몇놈중 하나였다.
석호는 혼자가 아니었다.
곁에 앉은 이는 흰 피부에 둥근 얼굴의 영진이고 그 건너편에 자리한 두명의 여자중 한명은
차가운 얼굴의 김수연이었다.
문득,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다 여긴 추림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보이기 싫었다.
자신이 언제 이렇게 허술한 모습을 보인적이 있단 말인가. 단 한번도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
로 친구들 앞에 나선적이 없었다.
추림은 피식하고 웃었다. 자신의 처지를 너무 과장되게 생각하고 있는건 아닌가하는 생각에
서였다.
"어? 추림이 왔다."
서있는 추림을 발견한 석호가 말하며 웃어보였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추림에게 모여들었다.
"야. 이추림 오랜만이다."
영진이 일어서며 손을 내밀었다. 영진의 손을 잡아 흔들며 추림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수연을 바라보았다.
이런... 수개월동안 어딘가 모르게 수척해진 수연의 눈가에 그렁한 눈물이 맺혀있었다.
이미 울었는지 눈이 붉게 변해있었다.
'개자식. 혼자 나올것이지.'
속으로 석호를 욕한것은 수연의 눈물탓이었다.
몇개월이 흘렀는지 모른다. 이렇게 이들을 본것이 수년. 수십년만에 보아도 그저 그런 관계가
있는 반면에 며칠만에 보아도 무척이나 오래된듯한 관계가 있다.
수연이 추림에겐 그런 친구였다.
어려운 시기에 만나게된 오랜 고향친구 김수연. 어떻게 대해야할지 순간 망설여졌다.
"앉지. 조금 늦었구나."
석호의 말이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수연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지며 추림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추림이 살짝 웃어주며 석호가
내준 자리에 앉았다.
"모두 오랜만이구나. 다들 잘 지냈니?"
추림이 조용하게 인삿말을 건네며 특유의 부드러운 시선으로 주위를 쓸어보았다.
"추림아 인사해라. 이쪽은 미진씨라고한다. 이새끼랑 살짝 어울리는 사이다."
석호가 수연의 곁에 앉은 여자를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쁘장하지만 어딘가 유약해보인다.
"추림입니다."
인사가 오가고 차를 한잔 마실동안 어색한 침묵이 오갔다.
그 침묵의 동기는 당연히 추림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난 이를 대하는
자세를 이들은 아직 배우지 못했다. 만약 추림이 반대 입장이라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좌중을 이끄는 분위기와 힘은 타고나거나 만들어지는 것이다.
성품. 성정. 카리스마를 내뿜기에는 석호도 영진도 아직 앳된 애송이었다.
결국 한동안의 침묵은 추림에의해 변하되기 시작했다.
"근 오개월여만인것 같다. 미안하다. 걱정하고 생각했을 너희들인데... 좀 많은 일들이 있었다.
황당하고 어려웠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게되어 진심으로 기쁘다."
"그래. 새끼야. 참 엿같은 일이었어. 니가 그렇게 사라지고 난리가 아니었다. 엇그제 추석때도
온통 니얘기가 난무했다. 죽었다는둥 해외로 나갔다는둥... 후... 난 솔직히 네놈안테 서운한게
아주 많다. 그래도 난 널 친구로 생각했는데 니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을때 나안테만은 연락 하
겠지하고 생각했거든. 친구를 친구답지 못하게 만든 너의 행동은 경솔했어. 알고있어?"
석호가 정말 서운하고 화가난 얼굴로 입을열어 말하자 영진이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추림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마음은 메마른 대지와같이 변해있지만 그런 모습을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앞에서 보일수는 없었다.
"할말없구나. 하지만 너희들을 잊은것은 아니었어. 나도 내가 겪은 일이 무언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야. 갑자기라기보다 기다렸던 일을 겪었다고 생각했거든. 다시말하지만
정말 미안하다."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지며 대화가 오가는동안 수연은 두근거리며 터질듯한 심장을 달래고
있었다.
어제 밤 늦은 시간에 석호에게 연락을 받고 밤새 한숨도 못자고 오지 않을것 같은 지금의 순
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어떤 모습일까. 그는여전할까. 온통 추림의 생각만으로 밤을 하얗게 새우며 울었다.
석호에게 들었던 추림의 현실. 그리고 지금의 추림. 믿을수가 없었다.
가끔 꿈에 나타났던 추림의 모습과 많이도 닮아 있었다.
수도없이 꿈에 나타났던 추림은 헐벗고 굶주린 모습이었다. 피투성이였고 상처투성이었다.
무엇에 그리 분노하고 있는지 무서운 얼굴로 끝없이 무언가를 찾고 헤매는 모습이었다.
사랑.
이제는 확신한다. 더이상 그를 두고 왜? 라는 의문은 필요없다.
수개월동안 가슴에 두고 묻고 또 물었던 의문의 진실은 올곧은 사랑이었다.
어떤 질문도 의문도 필요없는 사랑을 두고 고민하지 않기로했다. 그리고 찾아든 그리움.
미쳐버릴듯한 추림에대한 그리움이 날카로운 칼에 베인것처럼 상처되고 고통되어 숱한 날을
울게 만들었다.
끝없는 기다림은 기약없이 이어졌고 마치 시한부를 살아가는 것처럼 내일이 두렵게만 느껴졌
다. 오늘 그에대해 아무런 흔적을 알지 못하고 또다시 내일을 오늘처럼 기다릴 것이 두렵게 여
겨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만이 남음을 알았다.
그를 언젠가 만난다면 그토록 힘에 겨웠던 날들에 대한 상처를 잊을것 같은 희망을 품었다.
사랑에 대한 댓가는 상상보다 더 시련이 컸고 커다란 댓가를 요구했다.
황폐화. 세상이 그토록이나 삭막하고 두렵게 느껴질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를 만났는데,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얼굴을 뒤덮을 정도로 자라 헝크러진 머리와 수척하고 까칠해진 얼굴모습. 우수에 젖고 깊은
슬픔에 지배당한 눈빛. 가슴이 터져나갈것 같은 아픔이 전해졌다.
어떤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모습과 느낌이 변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차분한 얼굴로 말하고 있는 추림의 모습때문에...
힘에 겨워하는 내면의 소리가 울리고 있는데도 견디고있는 그의 모습때문에 더 마음이 갈라
지고 무너져내렸다.
단 한번이라도 좋았다.
여기 있는 친구들 중 아무에게나 기대어 지쳐버린 현실을 목놓아 토해놓기라도 하지.
소리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도 닦아도 멈추지 않음이 끝내 견딜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갈수 밖에 없었다.
"나가봐라. 너없는동안 저녀석 엉망이었다. 살아도 사는게 아니었단 말이다. 가서 한번이라도
안아줘라. 그게 친구든 뭐든 상관없이 말이다."
수연의 상태를 애써 외면하고 있던 석호가 수연이 자리를 씁쓸하게 바라보다가 추림에게 넌즈
시 말했다.
"잠깐 나갔다오마."
"다녀와라. 술이나한잔하러가자."
영진의 말을 뒤로하고 추림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수연은 삼층으로 향하는 건물의 계단 빈공간에 등을 기대로 울고 있었다.
추림은 그런 수연을 바라보며 뭐라 말못할 착찹한 심정이 되었다. 그녀가 진즉에 자신을 남달
리 생각하고 있던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까지인줄 몰랐다.
하지만 누구보다 수연의 지금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 추림이었다.
자신이 유미를 그랬고 선주가 자신을 그랬듯이 수연의 가슴앓이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양날의 검같은 것이다.
서로사랑이면 다치지 않겠지만 외사랑은 온통 상처만 남긴다. 자신의 지금처럼 말이다.
수연에게 조용히 다가간 추림이 수연의 어깨를 당겼다.
저항없이 다가온 수연을 가슴에 묻었다.
"하아!"
긴 한숨을 토하며 수연을 안은 추림은 수연의 등을 가만히 다독거렸다.
"흑흑. 나쁜놈! 나쁜놈!"
투정인듯 앙탈인듯 추림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수연이 그렇게 흐느꼈다.
"그래. 난 나쁜놈이다. 이렇게 졸렬하잖아. 그까짓 사랑을 받아들이지도 잊지도 못하고 난 바
보 병신처럼 이렇게 용기없는 놈인가보다."
추림역시 슬펐다. 자신의 슬픔을 누군가 대신해줄수만 있다면 모두 떠넘기고 싶을만큼 힘에
겨웠다. 하지만 자신과같이 아픔을 겪고있는 수연을 대하니 자신의 고통이 고통이 아닌듯 느
껴졌다.
무겁다.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다.
자신으로인한 업이다. 여기 또하나의 사랑이 울고있다. 둘이어야 하는 사랑이 하나여서 서러
워하고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서러워하는 영혼이있다.
찾지도 주지도 못하는 심정을 어찌 감당하란 말인가?
도저히 이겨내지 못할 시련이었다.
"이게뭐야. 얼굴이 이게 뭐냐고? 너 추림맞는거야? 이렇게 변할려고 떠돌았니? 왜 멀리있는
것을 쫒니 왜? 니곁에 소중한 이들도 가치도 있는데... 왜?"
마치 어미가 자식을 그러하듯 추림의 얼굴을 만지고 쓸어보던 수연이 다시 눈물을 흘리며 격
정을 토해냈다.
차라리 눈을 감아버린 추림은 어금니를 악물고 치미는 서글픔을 달래고만 있었다.
'수연아. 신은 내게 이미 정해진 운명의 굴레를 씌우셨다. 난...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지닌
마음의 끝에 기다릴 것이 어떤것인지.'
차마 말할수 없는 것을 속으로 뇌까리 추림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추림아, 나 할말이 있어. 그말을 꼭 해야겠어. 아무것도 원하지않아. 단지 기다릴께. 내가 그
애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겠어. 십년. 백년이 흘러도 기다릴꺼야. 죽어서라도 기
다릴수있어."
안다. 수연이 무엇을 말하려하는지. 하지만 그럴수없다. 정애의 목마름은 영혼이 파괴되는 고
통이다. 육신의 고통이 아닌 인간의 근본을 갉아먹는 괴물인 것이다.
수연이 자신을 그리 사랑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그럴수 없었다. 그럴수록 자신과
수연은 멀어질 뿐인것을......
"수연아. 그러지 말자. 난 네게......"
"아니. 나... 너. 이추림을 사랑할거야. 사랑해! 내 의지마저 안된다고 하지마. 알아 니가 사랑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라는거. 그래 날 사랑해 달라고 하지않아. 내 사랑은 그 애하곤 다를
거야. 난 널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수 있어. 너의 소식을 들으며 올바른 너의 현실을 기
꺼워하며 널 사랑할꺼야. 그것도 안된다고 하지마. 대신 너의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 내가 사
랑하는 사람의 모습은 이런게 아니야. 당당하고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란 말이야."
수연의 고백과 말은 추림의 심장을 후벼파는 것이었다.
사람은 모습이 변하는게 아니다. 인성이 무너지고 심성이 분열하는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변하
는 것이다. 그 모습이 추림이 지니고 있는 현실이었다.
"하아......"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수가 없었다.
무엇이 이렇게 힘들고 복잡한 것인지 삶을 처음부터 다시 산다고해도 이렇게 어렵지 않을것
같았다.
허탈한 추림의 모습을 야무진 얼굴로 올려다보던 수연이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보고싶었어. 미치도록 보고싶었어. 다시는 떠나지마 다시는... 용서하지 않을거야. 다시는 떠
나지마."
가슴에 못이 박힌다는 말이있다.
진짜 못이 박히는것이 아니다. 멀쩡한 생살을 뚫고 박히는 쇠붙이가 전하는 고통과도 같은 것
을 이르는 말이다.
가슴이 천근만근이라는 말이있다.
감당못할 고통의 무게를 표현한 느낌을 이르는 말이다.
추림이 그랬다. 가슴에 못이 박히고 만근의 거석이 얹혀진 것처럼 아프고 무거웠다.
머리속이 하얗게 비워가는느낌이 들었다.
어리석다. 건너지 못할 강 한가운데 떠있는 느낌.
"허허... 으하하하......!"
가슴에 수연을 안은 추림은 끝내 한줄기 눈물을 흘리며 긴 탄식과 함께 허망함이 가득한 비탄
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53장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