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지상명령 성서구절은 첨가된 것

교독기2006.09.15
조회266

대자보 사이트 펌..

 

***

 

한국 개신교의 아프가니스탄 '평화축제' 유감
 
[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한국 교회여, 차라리 ‘선교활동’을 포기하라
 
류상태  
 
‘아시아협력기구’라는 개신교 단체가 주최한 ‘평화축제’가 결국 좌초되고 말았다.
 
이 행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8월 5일부터 4일간 2000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행사로 기획되었다.

 

그러나 8월 3일(현지 시간),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입국한 수백명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출국명령을 내림으로써 이 행사는 시작 단계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이들에게 출국명령을 내리면서 밝힌 추방의 이유는

 

 “이슬람 문화를 훼손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 기독교권 이외에서 이들의 활동을 보는 눈은 여타 보수 개신교

 

 선교단체를 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유세프 스타네자이 아프간 내무부 대변인은 “한국인들이 관광비자로 입국했지만

 

이들의 활동을 보면 관광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평화축제 참가 학생들이 아프간 바미얀 지역에서

 

 현지인들에게 한글로 된 기독교 복음 관련 전단을 배포하여 말썽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혹 아시아협력기구가 순수한 인도적 봉사 차원에서 행사를 추진했다

 

하더라도 보수 개신교인들의 ‘선교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통제하지 못하였음을 말해준다.
 
이 행사를 주최한 사람들은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4년 동안 많은 기독교신자들이

 

 아프간을 방문하여 문화와 스포츠 활동을 했지만 사고는 한 건도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행사를 주최한 분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왜 이런 무모한 대규모 행사를 기획하였는가?

 

 예수님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왜 4년 동안 아무 문제가 없었던 방식, 즉 ‘조용한 봉사 활동’을 계속할 것이지

 

2000명에 이르는 대규모 행사를 추진하였는가.
 
‘기독교’라는 이름을 내걸지 않고 그냥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종교를 묻지 않고

 

 형제로 대해주는 너그러운 사람들이 무슬림(이슬람교인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이슬람)에 대해 조금이라도 도전하거나 훼손하려 한다는 느낌이

 

들면 결코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이 또한 무슬림이다.

 

그들은 그만큼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를 남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꾸란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번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권에서 벌어지는

 

 ‘선교 행태’에 대해 차분히 짚어보고 싶은게 있다.
 
기독교인이라면 거의 예외없이 ‘선교적 사명감’을 갖고 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독교인이 좋게 말해서 ‘선교적 사명감’,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선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성서, 특히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선교를 독려하는 내용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선교적 사명감에 불타는 기독교인들이 특히 마음에 새기는

 

대표적 성경 구절로 다음 두가지를 들 수 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장 18~20절)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디모데후서 4장 1~2절)
 
기독교인으로서, 예수 최후의 명령이며, 바울에 의해 재차 승인된 선교 명령을 외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마태복음 끝에 첨부된 이 구절은, 예수에 의해 직접 선포된 말씀이 아니라

 

그로부터 백여년 이상 지난 이후,

 

즉 교회가 조직화되고 권력체로 자라기 시작한 시대에

 

복음서에 뒤늦게 첨가된 구절이며, 디모데서 역시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

 

 바울의 이론을 따르는 제자들

 

(그들은 자신의 글을 바울에게 헌정하다 못해,

 

바울의 저작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이 교회 확장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물론 이런 해석은 기독교권에서 폭넓게 지지받는 공인된 학설이 아니라,

 

 보수 신앙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의 교계 현실에서는 ‘사이비 이단사설’이라고 정죄되는

 

 ‘성서비평학’을 비롯한 현대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다.

 

그러나 나는 “내 주장이 절대로 맞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또 하나의 독선일 뿐이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은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선교적 사명을 가져야 한다”는

 

 전제 역시 하나의 견해일 뿐이지 절대적 명제일 수 없다는 점이다.
 
성경은 시대의 산물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과 입장, 사상이 녹아있다.

 


신약성서가 강력하게 요구하는 ‘선교적 사명’은 ‘하느님의 요구’가 아니라

 

조직체의 확장을 필요로 했던 그 당시, 즉 그 구절이 기록되던 당시 ‘교회의 요구’라고

 

  
‘선교’라는 말에는, “나는 당신들이 갖지 못한 좋은 것을 갖고 있다”는 전제가 담겨있는 듯 하다.

 

또한 “당신들은 부족한 것이 있다. 받아야 할 그 무엇이 있다”는 전제가 담겨있는 듯 하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없는 그것, 혹은 당신에게는 부족한 그것이 나에게는 있다.

 

그것을 너에게 주겠다”는,

 

 너그러운 듯하지만,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못하고 자기 기준에 맞추려는

 

오만이 담겨있는 듯하다.

 

게다가 그 의식에 집착하여 “반드시 주고 싶다” 혹은 “반드시 주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더해지면 그것은 상대방의 문화를 해치는 폭력으로 나타나기 쉽다.

 

그러니 더 이상은 ‘선교’라는 말을 쓰지 말자.

 

그냥 이웃끼리 서로 돕고 사는 것은 당연하니까, ‘봉사’라고 하던가 ‘서로 돕기’라는 말을 쓰자.
 
그리고 제발, 도와야 한다면, ‘기독교’라는 이름을 접고 그냥 도우라.

 

 예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16609&section=section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