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3-37화> 교차

바다의기억2006.09.17
조회6,311

가을입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모두들 하루 속히 솔로탈출하셔서

 

옆구리 동상을 예방하시기 바랍니다.

 

겨울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 넌 탈출했냐 =========================

 

 

불필요할 만큼 사색할 시간이


많이 주어졌던 병원생활 동안,


난 계속해서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리고 한나의 조언을 바탕삼아


깔끔하게 그 생각들을 정리했다.



안군이건 연극이건 관객들이건


그녀가 나 대신 다른 것을 택한 건 확실했고,


그건 앞으로도 내가 그녀를 대함에 있어


지대한 감정의 골을 만들 것이 분명했다.


난 그런 균열을 가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대할 만큼 호인이 아니었다.


내 처절한 부르짖음에도


=나중에 다시 찾으러 오면 되겠지=


하는 식으로 등을 돌려버렸던


그녀에게 난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민아

- 그..... 그런...... 기억아,


범인들도 안군 오빠가 시킨 일 아니라고 했다며,


연습하는 동안에도 아무 일 없었어.


정말이야, 맹세할게.



기억 - 걱정하지 마, 그거랑 상관없이 내린 결론이니까.


민아

- 그럼... 왜? 고작 2주였잖아.


그 정도는.... 기다려 줄 수 있는 거 아니었어?



기억

- 응, 널 위해서라면 2주가 아니라


2년이라도 기다릴 수 있었어.


그런데 문제는, 지난 2주가


내 인생에 가장 힘들고, 외롭고,


밤마다 꾸는 악몽에 미쳐버릴 것 같았던 2주였다는 거야.


내가 너를 가장 필요로 했던 그 때....


넌 날 버려두고 떠났어.


그걸로 납득해주면 안될까?



민아 - ...........


기억 - 이해해 준 것 같아 다행이네. 한나야, 그만 가자.



순간 캡쳐라도 당한 듯


굳어버린 민아의 곁을 지나 밖으로 향하면서도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


아니, 오히려 홀가분할 정도로 가벼웠다.


좀 시원섭섭한 기분도 없잖아 들었지만


그것도 아쉬운 대로 괜찮은 것 같았다.



한나 - ....... 오빠...... 정말.... 괜찮아요?


기억 - 응. 괜찮아. 저기 택시 있다.



한나는 계속 뒤를 돌아보며


민아를 신경 쓰는 듯 했지만,


이제 더 이상 내게 미련 같은 건 없었다.


설사 미련이 있다 한들,


로우포맷한 하드를 어떻게 복구한단 말인가?


그냥 잊고 새 출발하는 수밖엔...



그렇게 모두 훌훌 털고 병실로 돌아온 나.


이제 더 이상 고민할 것도,


미련 가질 것도 없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눈앞이 부옇게 흐려왔다.



기억 - 어? 뭐야? 이거.... 왜 갑자기....


한나 - 오빠....


기억

- 흑? 아니, 잠깐.... 보지 말아 봐.


이게.. 왜.... 뜬금없이.... 내가....



한나 - 오..... 오빠........!


기억

- 흑, 흑, 헉.... 하아....흑, 하아.... 아니 지금.....


내가.... 이러려고 이러는 게....흑....


아니 보지 말라니까.... 흑....허허헉.....허헉....



문을 닫고 병실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정신없이 쏟아져 나오는 눈물.


숨쉬기도 버거울 만큼 목 바로 밑까지 차오른 울음은


아무리 참으려 해도 울컥 울컥 쏟아져 나와


내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예상 못한 추태에 민망해진 난


몸 둘 곳을 못 찾고 허둥거렸지만


한나는 이런 내 머리를 끌어안으며 등을 다독여 주었다.



한나 - 괜찮아요.... 괜찮아요. 오빠, 잘했어요...


기억 - 꺽....꺼억..... 나는.... 나는.....!! 꺽.......


한나 - 오빠, 오빠? 오빠!!


기억 - .......나는....꺽......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내 뇌와 근육은 간절하게 산소를 갈망하는 신호를 보내왔지만


폐를 수축시키고 팽창시키려 할 때마다


극심한 통증만 따라올 뿐,


기관지를 따라 이동하는 공기는 형편없이 적은 양이었다.


점점 의식이 흐릿해지는 가운데 고통만이 또렷해져왔다.


전신으로 번진 통증은


사지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광역적이고 애매한 것이어서


몽롱한 느낌까지 들었다.



우주 공간 속에 혼자 버려진 듯


눈앞에 까뭇까뭇하게 반짝이는 별들과


아득히 멀어지는 청각 신호.


아.... 이 느낌.... 기억났다.


처음 민아에게 키스 신청했던 날도 이랬었지.


하지만.... 그땐 이렇게 괴롭지 않았는데....


이렇게.... 아프지 않았는데.... 그래도 좋았는데....



한나 - 간호사!!! 간호사~!!! 어디 있어요!! 의사 선생님~!!!



그 땐.... 아파도 행복했던 걸까? 응? 민아야.....



= 버석.... 버스럭 버스럭.... 버스럭.... 푸읍....버스럭....=


아무래도 잠깐 의식이 끊어졌던 듯,


난 어느새 종이봉투 같은 걸로 내 입을 막고 있는


다른 사람의 손을 인식할 수 있었다.



기억 - ..... 잠깐, 잠깐, 치워 봐요. 뭐야 이건.


의사 - 정신이 들었군요. 다행입니다.


기억 - 켈룩, 아우 머리야....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한나 - 오빠, 괜찮아요?



간신히 한 숨 돌리고 몸을 일으키는 내게 한나가 뛰어왔다.


손끝은 아직 저릿하게 떨리고 있었고


머리는 지끈하게 아파왔지만 의식은 정상이었다.


잠시 내 상태를 지켜보던 의사가 내게 물었다.



의사

- 과호흡증후군입니다.


증상으로 봐선 상당히 오래 진행된 듯한데,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요?



기억 - 예? 아니, 아녜요. 요즘 기가 허해서 그래요.


의사 - 혹시 모르니 일단 검사를 받아보고.....


기억 - 아뇨, 정말 괜찮습니다. 괜한 민폐를 끼쳤네요.



어느새 내 병실에


바글바글 모여들어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낸 난


엉망이 되어버린 주위를 둘러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무리였던 걸까?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와 이별하는 건...



일단 한 차례 호된 신고식을 치르고 나서인지


기분은 말끔하게 가셔 있었다.


이젠 정말 괜찮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입원 20일 째.


어느 정도 몸을 가눌 수 있게 된 난


2인실로 병실을 옮겼다.


같은 방을 쓰는 환자는 40대 초반의 아저씨로


좀체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이전처럼 숙식해결을 하기가 껄끄러워진 한나는


긴 가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 말론 들어가서도 아무 일 없었다고 했지만...


정말 그랬을지는 의문이다.



기억 - 이제 이러게 안 와도 돼. 지내는 데 큰 지장도 없고....


한나 - 괜찮아요, 집에 있는 것 보다 여기가 편하니까.


기억 - 그래도.... 여기 뭐 재미있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한나 - 오빠랑 있는 거 나름대로 재밌어요. 보람도 있고.



물론 나로서도 한나가 곁에 있어주는 쪽이 좋았다.


아무리 상태가 나아졌다고 해도


물 한잔을 마시기 위해 자리에서 움직이느니


누워있는 쪽을 택하는 게 속편한 게 현실이었기에


그녀가 떠난 뒤 내 생활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그녀를 계속 잡아 두기엔


정말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기억 - 난... 모르겠어. 네가 왜 이렇게까지 해 주는지.


한나 - 궁금해요?


기억 - 응.


한나 - 나 오빠 좋아해요. 그래서 그래요.


기억 - ........ 뭐?


한나

- 나 오빠 좋아한다고요. 잘 안 들려요?


아아, 나, 오빠, 좋아해요. Okay?



옆에서 사과를 깎고 있던 한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렇게 말했다.


마치 =그냥= 이나 =심심해서= 라고 대답하는 듯한 말투.


너무나 태연한 그녀의 표정에 내 귀를 의심했다.



기억 - 저.....저기..... 일단..... 그러니까...... 일단 진지하게.....


한나

- 됐어요, 딱히 생각나는 말 없으면 하지 마요.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는 것뿐이니까.


천천히 생각하고.... 일단 사과나 먹어요.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난 아직도 공황상태에 빠져 할 마을 못 찾고 있었지만,


그녀는 휑하고 자리를 떠버렸다.


혼자 병실에 남겨진 난 한참동안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그 진의를 파악하려 애썼다.



=좋아한다.= 와 =사랑한다.= 는 다르다 뭐 그런 건가?


단지 인간 대 인간으로서 호감을 가지고 있다거나....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마지막에 했던 말이 걸리는 데...


그녀는 정말로...?



그녀가 다시 돌아온 건 한 시간이 훌쩍 지난 뒤였다.



한나 - 뭐 하고 있었어요?


기억 - 응? 새.... 생각.


한나 - 무슨 생각이요? 설마 아까 그거?


기억 - ..... 응.


한나

- 으아~ 오빠 너무 진지하다.


그걸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기억 - 아니... 그게 뭐랄까... 찬찬히 고찰해볼 필요가 있는 문제 같아서...


한나 - 그래서, 결론은요?


기억 - ...... 이거 대답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한나

- Me, too. 면 서로 좋은 게 좋은 거고....


I'm sorry but~. 이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거죠.



기억 - 자꾸 그렇게 말하지 말고....


한나

- 그럼, 어떻게 말해줘요?


나도 그 말 해놓고 지금까지 밖에 앉아서


후회막급하면서 가슴 졸이다 왔다고 해줘요?


나 정말 진심인데,


오빠가 놀랠까봐 장난처럼 이러는 거라고


꼭 말해줘야 알아요?



어느새 그녀는 침대 커버를 꼭 움켜쥐고


작게 소리치고 있었다.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