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후, 김주하 아나운서가 얘기했던 것처럼 아기를 직접 낳아보니, 아이 둘 셋 기르는 엄마가 얼마나 대한 분들 인줄 알게 되었다는 고백처럼 앞으로 내가 겪어야 하고, 또 겪어내야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을지 기대반 걱정반이다.
온통 머리속에 취업 생각뿐이다.
집중과 나태가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도 직업이라는 단어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켜 주지않는다.
잠시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려 한다.
고등학교 2학년.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아버지가 병을 앓게 되셨다는. 며칠 뒤엔 돌아가실 수도 있다 는 받아드리고 싶지 않은 통보였다. 당시 아버지의 연세는 47세. 인생의 3분지 2도 채 안되는 나이에인생을 마감해야 하는 아버지가 처음으로 가엾고 불쌍한 한 없이나약한 존재로 다가오던 순간들이었다.
비슷한 시기.. 교회 목사님이 소식을 접하시고는 함께 기도에 동참해 주셨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김규운 목사님.. 정말 열심히 기도했다. 당시에는 그것이 기복적인 신앙이라는 것도인지하지 못한채 새벽 시간내내 불쌍한 나의 아버지가 좀 더 오래살 수 있도록 하늘의 신께서 아량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했다.
눈물이 눈물을 겹치는 나날들이었다. 두달여 시간이 흘렀나. 믿기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가족들의 세심한 배려만 있다면약물 치료가 가능할 것 같다는 통보였다. 행복했다. 그리고 나의 마음속에는 한없는 기쁨이 넘쳐났다. 이때쯤이었다. 하나님의 종이 되겠노라 다짐했던 때도..
내가 다니던 학교는 일요일에도 학교에 학생들을 소집해 놓고 입시 공부를 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활동을 하는 친구들이 있는 이유로 교회출석 후에 돌아와서 자율학습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우리 반 담임선생님 만큼은 완강하셨다. 모든 종교활동을 금했고 10분의 지각도 지각으로 체크하시는 정확한 분이셨다. 장점과 동시에 단점이었다. 불호령이 있음에도 다른 반 친구들이 교회를 다녀오니, 괜찮겠지 생각하며 일요일에 몰래 교회를 다녀왔다. 월요일 아침.. 담임 선생님이 체벌을 가하셨다. 명령을 어겼다며 매질을 하셨다. 하지만 뜻을 굽힐 수 없었다.
다음 주, 그다음주, 또 그다음주.. 매주 교회를 다녀왔다. 3학년 선생님들이 순번을 정해놓고 일요일마다 학교에 나오셨는데 다른 반 순찰할때 몰래 도망나가는 학생이 바로 나였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ㅋ
그리곤 매주 월요일 아침엔 매타작이 이어졌고, 1교시 수업전 0교시 자율학습시간엔 매번 복도에 '엎드려 뻗쳐'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드디어 담임선생님이 두손을 드셨다. 수요일엔 학교수업때문에 예배참석을 못드리니, 주일 예배만큼은허락해 달라는 나의 손을 마침내 들어주셨던 것이다.
고등학교에서도 동아리 활동을 했었는데, 지금와서 보면 그렇게 기억에 남는 활동들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교회활동은 너무나 즐거웠다. 뮤지컬을 연습하고 찬양하며 기도하는 모습이 정말이지 행복했다.
그러나, 막상 대학 입시에 내 뜻을 펴치 못했다.
아버지의 반대가 너무 크셨다. 매도 참 많이 맞았다. 평범한 아들이길 바라셨는데, 사서 고생을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결국 나도 뜻을 굽힐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순천대학교 경제회계학부에 입학했다. 고3때 성적이 많이 떨어진 이유였다. 엊그제 성적증명서를 봤더니 고3 성적이 고2성적에 정확이 두배 떨어졌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학교 1학년. 자유라면 표현이 되나. 모든게 새로웠고 반대로 낫설었다. 과대에 자원했다. 선배들과 그리고 동기들과 좀 더 빨리 친해지고 싶었던 단순한 이유였다. 당시 지프차를 타고 다녔어서 친구들과 이곳 저곳 참 놀러도 많이 다녔다. 죽도봉에, 바다에 등등으로 기름값만 모이면 이동하곤 했었다.조금씩 조금씩 회비를 모아 승용차를 렌트해서 멀리 여행도 갔었더랬다. 그 친구들과 6년만에 추석을 맞아 첫모임을 가지려 한다.00학번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1학년 2학기.. 동아리 활동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기독동아리에 가입했다. 인생의 첫번째 전환점이었다. 젊음이라는 패기에 빠져 과생활보다 동아리생활에 흠뻑 빠져지냈다. 당연히 과친구들에게 소홀 할 수 밖에 없었다. 과친구들의 야유가 있었지만 동아리 활동이 더 크게 다가오던 나날들이었다. 직접 동아리방을 꾸며도 보고 아르바이트로 활동비도 벌어가면서 여름방학에는 아예 동아리방이나 과실을 내 방 삼아 숙식을 해결하면서 청춘을 불태웠다.
그리고는 학교를 옮기기에 이르렀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아가며설득을 했고 마침내는 허락하셨다. 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는 역시 선배들과 동료들과 가까워지려는 단순한 이유로 과대를 자청했다. 그런 나였다. 내성적이면서도 외진곳을 싫어했던..ㅋ 신학대학교에서는 학교신문사에서 활동했다. 사진도 찍고, 답사도 떠나고, 기사도 직접 썼다. 내 사진이 곁들여진 학교 신문은 또 다른 묘미였다. 이건 좀 쑥쓰러운데, 신문사 전화가 공짜였기 때문에 밤에는 이 사람 저 사람과 수다도 떨곤 했었다. 아르바이트가 필요할땐 지역내 신문사에서 당일 알바를 뛰기도 했었다. 비전이 있는가도 살펴보면서.. ㅋ
군 입대를 했다. 1년여 기간의 PX병 그리고 보직을 바꿔 이후론 행정병으로 군을 제대했다. 물론 학교생활과 군생활 중간중간에도 몇몇 에피소드가 있지만 큰 물줄기에는 끼지 못하는 고로 생략한다 ㅋ
지금까지의 시기.. 그러니까 20살의 나이부터 24살의 나이를 먹는 동안이 내 청춘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이면서도 가장 생각이 복잡하고, 또 눈물도 많이 흘린, 가슴도 많이 아팠던 기간이었다.빠른 82라 때론 23살까지라고 나이를 낮춰보기도 한다.^^
군 제대 후. 3개월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구청 정보통신실에선가 주민대상으로 정보화교육 보조로 일했다. 기억에 한달에 67만원인가 받았던 것 같다. 군대에서 받았던 월급과 용돈은 그때 그때 쓰기 바뻐서 모아둔 돈이 한푼도 없었는데 구청에서 알바하는 3개월 동안엔 저축을 해두었다. 비상금이라는 명목하에..
구청에 출근할때 오토바이를 구입해서 이동했었다. 지금도 기억한다. 그게 이름이 뭐더라.. 있잖는가 중국집 배달할때 타는거..갑자기 기억이 안나지만 그래도 상태가 꽤 양호한 빨간색 오토바이었다. 학교가 언덕에 있어서 자전거가 벅차 구입했던 오토바이었다.
아르바이트하는 동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니까 그때가 2004년 6월부터 9월까지의 기간이다. 2004년 6월 17일에 제대했걸랑..
구청에서 근무하다 보니 이것 저것 듣고 보는 것도 생기게 되었고 이윽고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인터넷과 일반전화를 내맘대로 사용할 수가 있었어서 이곳 저곳 공무원 사이트며 학원 사이트를 찾아보았다. 빠른 82라 생각하니 23살 이라는 내 나이도 강점으로 여겨졌었다.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생각이 혼잡하고 또 나 혼자였던 시기..감히 벼랑의 끝을 걸어보았노라 허세를 부려보면서 조심스레 아버지와 어머니께 나의 생각을 전했다. 며칠 후 아버지는 학교는휴학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보기를 권하셨다.
결론은 같았지만, 나는 학교를 자퇴하기로 마음먹었다.
학교에서도 휴학을 권했지만 개인적인 사유로 핑계대고 자퇴를 하고 그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학점은행제로 학점인정을 신청하는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5학기를 인정받았다. 시간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곳의 공기가 싫었다.
원룸의 전세기간이 1년여 남았지만 방이 나가는 대로 전세금을 돌려받기로 하고, 또 오토바이도 처분했다. 그리고 생각을 단순화하기로 하고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서울 노량진과 부산, 그리고 진주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은 공무원 수험가의 메카라 끌렸고, 부산은 우리나라 동부 최대도시라는 이유가 끌렸으며, 진주는 두 곳보다는 못했지만 부모님이 사시는 구례에서 가장 가까운 고장이라는 이유로 끌렸었다. 진주로 이사하기로 마음먹고 처음 학원은 노량진으로 택했다.
대학교 1학년 동아리 MT로 가보았던 촉석루의 기억을 더듬어 하루 진주에 가서 하루만에 가계약을 끝냈다. 그렇게 부랴부랴 터전을 옮겼다. 2004년 10월 1일에 처음 학원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지금에 이르렀다. 인문계열이라 용어가 낫설지만은 않았지만 움직이기 좋아하던 사람이 책상에 앉아 있으려니 좀이 쑤셔 속된 표현으로 죽는 줄 알았다. 두달여 책을 한번 떼고 나니 그제서야 책상에 좀 앉아있을 수 있었다.
터전을 옮긴 후 2005년 6월달까지 교회에 다닐 수 없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회의감과 더불어 취업에 대한 압박 때문이었다. 2004년 10월 말에 큰형이 결혼식을 올렸고, 비슷한 시기 작은형이 농협공채에 최종합격했다. 작은 형이 고흥으로 발령이나 구례 가까이 방을 얻은 것이 잘됐다 생각했다. 20살때 타던 지프차를 진주로 가지고 와서 집 생각이 나거나 외로울 때면 구례 시골집에 다녀오곤 했다. 2005년 10월.. 공부 시작한지 1년이 되었고 몇번의 특채와 공채 시험에 낙방했다. 주위에선아직 나이가 있으니 포기하지 말라고 기운을 북돋아 주셨다. 아.. 중간 2005년 6월경 부터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여유를 찾고 싶었고 뭐랄까 마음의 안식도 필요했다. 주일성수 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불안감도 컸다.
그렇게 교회활동을 시작했지만 아버지께는 비밀로 했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한다는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수험생활에 매달리는 수험생의 입장에서도 나의 생활을 어찌 보면 한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찾은 기쁨이었고 무엇보다 정신적인 안정을 회복한 행복이 더 컸다. 도서관에서 내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진주의 학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랑 같지만 이게 나의 큰 실수였다. 사람을 가려서 사귀는 것처럼 비겁한 것도 없겠지만 무분별한 인간관계는 계획의 차질을 빚기 마련이었다. 식사약속, 모임, 또 모임.. 수험생활을 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었지만 때로 도가 넘는 백수들의 모임이 되어 갔다.
큰형과 작은형이 자리를 잡아간다고 생각하니 나태해질 대로 나태해 졌고, 불규칙한 생활습관, 게다가 사람좋아하지. 공부가 제대로 될 수가 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차도 바꾼터라 나름대로 여자들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더 큰 문제는 학원모의고사 성적은 또 잘 나왔다..
그러던 올해 2월. 집에서 한통의 전화가 왔다.
수험생활 1년 반이 다 되어가던 때였다. 아버지가 수술을 하시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머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곧장 시골집으로 향했다. 요즘 부쩍 업무에 스트레스가 심하신가 싶더니 업무 실수로 돈을 물어내기도 해야할 뿐만 아니라, 기억력이 자꾸 감퇴되고, 자꾸 멍해지신다는 말씀이셨다.
고등학교 이후로 계속 알약을 복용해 오신 터라 예상은 되었던 터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지금까진 서울 삼성병원에서 정기적인 검진과 함께 약물치료를 해 오셨었는데, 예약이 쉽지 않아 순천성가롤로 병원에 입원검사를 하기로 하셨다. 1주일여의 검사가 끝난 상황에서 병원에서 전병원과 다른 검진결과가 나왔다. 서울 삼성병원의 검진이 오진이라는 것이었다. 비슷한 약을 쓰고 있는 건 맞지만 발생원인에 대한 오진을 말하는 것이었다. 웃음이 나왔다. 지난 8년간 진단받은 병명이 오진이라는 것에 황당했고, 이런 오진이 있을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는 현재 55세의 나이시니
당장의 수술없이 약물치료 계속하고, 퇴직 후에 수술로 완쾌하시는 것도 괜찮다며 약물치료를 권해왔다.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검진결과였다. 당황스러웠지만 약 자체가 잘못 된건 아니라는 의사의 말과 작은형, 어머니의 상의 끝에 서울 삼성병원에 대한 법적책임은 묻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도 계속 직장에 출근하셨다. 그런데 두달여 후.. 그러니까 올해 4월 도저히 머리가 아파서 안되겠다시면서 아버지가 한번더 검사를 받아보겠노라 말씀을 꺼내셨다. 직장 생활이 너무 버겁다시면서 매우 신경질적인 성격을 보이셨다. 이렇게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던터라 당황스러웠지만 난폭해진 아버지의 모습이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큰형이 동원됐다. 큰형과 가족들이 이곳 저곳 병원을 알아봤고 현재 뇌 쪽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전북대학교병원 최하영 교수팀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검사예약을 하고 또다시 10여일간 입원검사를 시작했다. 이곳에서도 성가롤로 병원과 같은 검사결과가 나왔다.
검진기간동안 업무스트레스에서 일시 해방되셨던 건지 아버지가 평온한 것처럼 보였고 아버지도 수긍을 하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다. 이때부터 줄곧 구례 시골집에 있었다.
이때 우린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남향으로 자꾸 이사가고 싶다고 하셔서 남향으로 주택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부모님 두분이 사시기에 아파트도 적당했지만, 일조량이 적고 꽤 소음이 있어서 이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남향에 있는 한 곳을 구입했다. 이렇게 저렇게 하루 이틀이 가는데, 아버지의 짜증스러운 듯한 말투와 거칠어진 행동이 다시 시작되셨다. 그리고는 1주일쯤 뒤 도저히 버거워서 안되겠다 시면서 수술하면서 조금 쉬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조금 인내하실 수 없겠느냐며 달래려 하셨지만 무엇보다 아버지의 힘겨움이 생각보다 컸다.
서둘러 수술 날짜를 잡고, 수술 후에 시간이 안 날것 같아 서둘러 이사를 마쳤다. 전북대병원에 수술을 위해 입원했다. 수술을 위해서는 수술을 위한 검사가 또 필요하댄다. 검사를 마치고 나서 생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 검사를 해보니, 상황이 심각하단다.
수술을 안할수도 없는게, 수술을 안하고 가만두면 점점 상황이 안좋아지신단다. 수술을 해도 완치는 어렵단다. 수술부위를 모두 제거할 수는 있지만 모두 제거할 경우 일부 뇌의 기능을 잃는다." 는 통보였다. 가족들의 항의가 이어졌다. 작은형은 직설적인 성격이라 강하게 의사에게 어필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제와서 또 병원을 옮길 수도 없지 않느냐며 화를 누그러뜨리셨고 이윽고 10여일 후 수술대에 오르셨다. 이때가 5월이다. 난 수술검사부터 수술일까지 전북대 병원에 있지 못했다. 6월 11일 경남지방직 시험을 앞두고 입원하실때 모셔다 드리고는 곧장 진주로 내려와 시험을 준비했다. 위의 일련의 소동들은 어머니의 제안으로 나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시험을 앞두고 있다는 이유로 숨기셨던 것이다.
시험을 마치고 전북대병원으로 곧장 이동했다. 그리고 위의 소식을 처음 접했다. 당황스러워 눈물이 났다. 숨겼던 가족들도 미웠다.
하지만 정작 힘드실 아버지 앞에서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그나마 다행일까? 뇌를 건드리는 수술은 기본적인 의식을 회복하는 대도 꽤 오랜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아버지의 수술이 잘 되셨단다. 그리고 지금까지 잔병치레 하나 없으셨던 건강한 몸이라 회복이 빠르단다. 수술 다음날 바로 의식을 회복하셨다. 하지만 우리를 알아 보시지 못했다.
그때 다시 알았다. 연약한 인간의 모습과 수많은 수술대기자들..그리고 내 손으로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6월 20일께 진주로 돌아와서 바로 짐을 꾸렸다. 시골로 돌아와야 했다. 물론 교회에서의 인수인계 절차도 충실히 밟았다. 그리고 30일 시험발표. 3점차 낙방이었다. 이를 꾹 물고 지인의 도움을 받아 이사를 했다. 이사 하루 전날, 어머니께서 구례로 이사오는 것을 반대하셨다. 담당의사가 회복이 빠르다고도 말씀하셨다면서 취업을 앞두고 열악한 구례보다는 순천이나 남원으로 이사오라셨다. 그래서 택한 곳이 남원이다.
남원 도서관 옆에 하루 전날 방을 얻어놓고, 짐을 옮겨 놓기 바쁘게 시골로 향했다. 전주대학병원에는 수술대기자가 많아 병실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머리 아픈사람들이 많을 줄이야.. 그래서 회복단계만 필요하다고 해서 구례병원으로 모셨다.
시간이 흘렀다. 수술후 5개월..
아버지의 기억은 차츰 회복되셨다. 가끔 짜증도 부리고 난폭함도 보이셨지만 전보다 대화하는 횟수도 늘어갔다. 직장은 병가와 휴가를 낸 상태.. 올해로 30년 근속이셨는데 알아보니 그동안 정기휴가를 한번도 안 쓰셨단다. 그만큼 직장과 가족밖에 모르셨던 분이다.
정기휴가로 100여일이 나왔다. 100% 유급으로 말이다.
여행을 많이 보내드렸다. 그리고 병원에 있는동안 큰형의 아들 그러니까 아버지가 손자가 태어났었어서 자주 서울로 모셨다. 어머니는 체력회복과 건강을 위해 갖은 약제로 아버지를 모셨고, 나와 큰형, 그리고 작은형도 정기적으로 아버지를 찾아뵈면서 안정을 유지하실 수만 있다면 하는 심정으로 모셨다.
직장에서 노골적으로 명예퇴직을 권해왔다. 1년치의 월급과 퇴직금의 지급을 제시해 왔다. 하지만 유보했다. 일할 수 있는 나이에 일할 수 없음이 괴로움이라 생각해서였다.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2개월 병가를 신청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복직하기에 이르셨다. 지난 9월 25일. 5개월여만에 복직하셨다. 그리고 병원에 계실때부터 지금까지 주일이면 교회에 출석하신다. 몸이 아파보니 경준이 네가 왜 그토록 교회에 열중했었는지 이해하게 되셨단다. 칭찬인지 질책인지 구별 할 수는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아버지가 종교를 가지신것에 대해선 대찬성이다. 그리고 첫출근 하신 지난 25일 저녁.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가 뒤에 버티고 있을테니깐, 하던 공부 열심히 해라"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 추석이 되면 가족들이 함께 모여 지난 아픔을 안주삼아 소주 한잔을 돌릴 생각이다. 틈틈이 용돈을 모아 부모님 드릴 선물도 사두었다.
아버지가 집에서 요양하실 동안, 나에게도 특별한 시간들이 있었다.
바로 고등학교 친구들과 대학교 1학년 친구들과의 만남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대학 진학하게 되면서 관계가 소원해졌고,
순천대 1학년 친구들과는 동아리 활동과 학교를 옮기게 되면서 소원해 졌었다. 과거로의 여행을 생각하며 친구들과 연락을 하게 되었고, 이번 추석을 핑계삼아 모임도 갖기로 했다. 아버지의 건강이 나에게도 모처럼의 기쁨을 주었다.
오늘은 특별히 진주에서 같이 공부하던 지인들에게서 10월 1일에 있을 시험 잘보라며 전화가 몇 통 왔다.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다들 형이고 누나들인데, 내가 먼저 연락해도 부족할 판에 시험 잘보라며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즐겁다.
세상을 살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만들어 가며 산다.학교와 직업, 공동체 등으로 맺으진 인연이 있기에 인생이 또한 즐겁지 않나 생각해 본다. 이 곳 남원에 이사 온지도 벌써 3개월이 다 되간다. 그리고 수험생활도 내일모레면 2년이 되간다. 자신감 상실이니, 능력 부족이니 해도 정말 중요한건 그만큼의 노력 부족이 정확한 표현같다.
그만큼의 공을 들이지 않았는데, 별을 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나이 25(빠른 나이로 ㅋ). 인생의 3분의 1을 소화한 이 때..
과거로의 여행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잠시라도 멈출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출산 후, 김주하 아나운서가 얘기했던 것처럼
아기를 직접 낳아보니, 아이 둘 셋 기르는 엄마가 얼마나 대한 분들 인줄 알게 되었다는 고백처럼
앞으로 내가 겪어야 하고, 또 겪어내야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을지 기대반 걱정반이다.
온통 머리속에 취업 생각뿐이다.
집중과 나태가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도 직업이라는 단어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켜 주지않는다.
잠시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려 한다.
고등학교 2학년.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아버지가 병을 앓게 되셨다는. 며칠 뒤엔 돌아가실 수도 있다
는 받아드리고 싶지 않은 통보였다.
당시 아버지의 연세는 47세. 인생의 3분지 2도 채 안되는 나이에인생을 마감해야 하는 아버지가 처음으로 가엾고 불쌍한 한 없이나약한 존재로 다가오던 순간들이었다.
비슷한 시기.. 교회 목사님이 소식을 접하시고는 함께 기도에 동참해 주셨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김규운 목사님..
정말 열심히 기도했다. 당시에는 그것이 기복적인 신앙이라는 것도인지하지 못한채 새벽 시간내내 불쌍한 나의 아버지가 좀 더 오래살 수 있도록 하늘의 신께서 아량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했다.
눈물이 눈물을 겹치는 나날들이었다. 두달여 시간이 흘렀나.
믿기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가족들의 세심한 배려만 있다면약물 치료가 가능할 것 같다는 통보였다. 행복했다. 그리고 나의 마음속에는 한없는 기쁨이 넘쳐났다. 이때쯤이었다. 하나님의 종이 되겠노라 다짐했던 때도..
내가 다니던 학교는 일요일에도 학교에 학생들을 소집해 놓고
입시 공부를 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활동을 하는 친구들이 있는 이유로 교회출석 후에 돌아와서 자율학습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우리 반 담임선생님 만큼은 완강하셨다. 모든 종교활동을 금했고 10분의 지각도 지각으로 체크하시는 정확한 분이셨다.
장점과 동시에 단점이었다.
불호령이 있음에도 다른 반 친구들이 교회를 다녀오니, 괜찮겠지 생각하며 일요일에 몰래 교회를 다녀왔다.
월요일 아침.. 담임 선생님이 체벌을 가하셨다. 명령을 어겼다며 매질을 하셨다. 하지만 뜻을 굽힐 수 없었다.
다음 주, 그다음주, 또 그다음주.. 매주 교회를 다녀왔다.
3학년 선생님들이 순번을 정해놓고 일요일마다 학교에 나오셨는데 다른 반 순찰할때 몰래 도망나가는 학생이 바로 나였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ㅋ
그리곤 매주 월요일 아침엔 매타작이 이어졌고, 1교시 수업전 0교시 자율학습시간엔 매번 복도에 '엎드려 뻗쳐'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드디어 담임선생님이 두손을 드셨다.
수요일엔 학교수업때문에 예배참석을 못드리니, 주일 예배만큼은허락해 달라는 나의 손을 마침내 들어주셨던 것이다.
고등학교에서도 동아리 활동을 했었는데, 지금와서 보면 그렇게 기억에 남는 활동들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교회활동은 너무나 즐거웠다. 뮤지컬을 연습하고 찬양하며 기도하는 모습이 정말이지 행복했다.
그러나, 막상 대학 입시에 내 뜻을 펴치 못했다.
아버지의 반대가 너무 크셨다. 매도 참 많이 맞았다. 평범한 아들이길 바라셨는데, 사서 고생을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결국 나도 뜻을 굽힐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순천대학교 경제회계학부에 입학했다.
고3때 성적이 많이 떨어진 이유였다. 엊그제 성적증명서를 봤더니 고3 성적이 고2성적에 정확이 두배 떨어졌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학교 1학년.
자유라면 표현이 되나. 모든게 새로웠고 반대로 낫설었다.
과대에 자원했다. 선배들과 그리고 동기들과 좀 더 빨리 친해지고 싶었던 단순한 이유였다. 당시 지프차를 타고 다녔어서 친구들과 이곳 저곳 참 놀러도 많이 다녔다.
죽도봉에, 바다에 등등으로 기름값만 모이면 이동하곤 했었다.조금씩 조금씩 회비를 모아 승용차를 렌트해서 멀리 여행도 갔었더랬다. 그 친구들과 6년만에 추석을 맞아 첫모임을 가지려 한다.00학번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1학년 2학기.. 동아리 활동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기독동아리에 가입했다. 인생의 첫번째 전환점이었다.
젊음이라는 패기에 빠져 과생활보다 동아리생활에 흠뻑 빠져지냈다. 당연히 과친구들에게 소홀 할 수 밖에 없었다.
과친구들의 야유가 있었지만 동아리 활동이 더 크게 다가오던 나날들이었다. 직접 동아리방을 꾸며도 보고 아르바이트로 활동비도 벌어가면서 여름방학에는 아예 동아리방이나 과실을 내 방 삼아 숙식을 해결하면서 청춘을 불태웠다.
그리고는 학교를 옮기기에 이르렀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아가며설득을 했고 마침내는 허락하셨다. 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는 역시 선배들과 동료들과 가까워지려는 단순한 이유로 과대를 자청했다. 그런 나였다. 내성적이면서도 외진곳을 싫어했던..ㅋ
신학대학교에서는 학교신문사에서 활동했다. 사진도 찍고, 답사도 떠나고, 기사도 직접 썼다. 내 사진이 곁들여진 학교 신문은 또 다른 묘미였다. 이건 좀 쑥쓰러운데, 신문사 전화가 공짜였기 때문에 밤에는 이 사람 저 사람과 수다도 떨곤 했었다. 아르바이트가 필요할땐 지역내 신문사에서 당일 알바를 뛰기도 했었다. 비전이 있는가도 살펴보면서.. ㅋ
군 입대를 했다. 1년여 기간의 PX병 그리고 보직을 바꿔 이후론 행정병으로 군을 제대했다. 물론 학교생활과 군생활 중간중간에도 몇몇 에피소드가 있지만 큰 물줄기에는 끼지 못하는 고로 생략한다 ㅋ
지금까지의 시기.. 그러니까 20살의 나이부터 24살의 나이를 먹는 동안이 내 청춘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이면서도 가장 생각이 복잡하고, 또 눈물도 많이 흘린, 가슴도 많이 아팠던 기간이었다.빠른 82라 때론 23살까지라고 나이를 낮춰보기도 한다.^^
군 제대 후. 3개월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구청 정보통신실에선가 주민대상으로 정보화교육 보조로 일했다. 기억에 한달에 67만원인가 받았던 것 같다. 군대에서 받았던 월급과 용돈은 그때 그때 쓰기 바뻐서 모아둔 돈이 한푼도 없었는데 구청에서 알바하는 3개월 동안엔 저축을 해두었다. 비상금이라는 명목하에..
구청에 출근할때 오토바이를 구입해서 이동했었다. 지금도 기억한다. 그게 이름이 뭐더라.. 있잖는가 중국집 배달할때 타는거..갑자기 기억이 안나지만 그래도 상태가 꽤 양호한 빨간색 오토바이었다. 학교가 언덕에 있어서 자전거가 벅차 구입했던 오토바이었다.
아르바이트하는 동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니까 그때가 2004년 6월부터 9월까지의 기간이다. 2004년 6월 17일에 제대했걸랑..
구청에서 근무하다 보니 이것 저것 듣고 보는 것도 생기게 되었고 이윽고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인터넷과 일반전화를 내맘대로 사용할 수가 있었어서 이곳 저곳 공무원 사이트며 학원 사이트를 찾아보았다. 빠른 82라 생각하니 23살 이라는 내 나이도 강점으로 여겨졌었다.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생각이 혼잡하고 또 나 혼자였던 시기..감히 벼랑의 끝을 걸어보았노라 허세를 부려보면서 조심스레 아버지와 어머니께 나의 생각을 전했다. 며칠 후 아버지는 학교는휴학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보기를 권하셨다.
결론은 같았지만, 나는 학교를 자퇴하기로 마음먹었다.
학교에서도 휴학을 권했지만 개인적인 사유로 핑계대고 자퇴를 하고 그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학점은행제로 학점인정을 신청하는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5학기를 인정받았다. 시간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곳의 공기가 싫었다.
원룸의 전세기간이 1년여 남았지만 방이 나가는 대로 전세금을 돌려받기로 하고, 또 오토바이도 처분했다. 그리고 생각을 단순화하기로 하고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서울 노량진과 부산, 그리고 진주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은 공무원 수험가의 메카라 끌렸고, 부산은 우리나라 동부 최대도시라는 이유가 끌렸으며, 진주는 두 곳보다는 못했지만 부모님이 사시는 구례에서 가장 가까운 고장이라는 이유로 끌렸었다.
진주로 이사하기로 마음먹고 처음 학원은 노량진으로 택했다.
대학교 1학년 동아리 MT로 가보았던 촉석루의 기억을 더듬어
하루 진주에 가서 하루만에 가계약을 끝냈다. 그렇게 부랴부랴 터전을 옮겼다. 2004년 10월 1일에 처음 학원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지금에 이르렀다. 인문계열이라 용어가 낫설지만은 않았지만 움직이기 좋아하던 사람이 책상에 앉아 있으려니 좀이 쑤셔 속된 표현으로 죽는 줄 알았다. 두달여 책을 한번 떼고 나니 그제서야 책상에 좀 앉아있을 수 있었다.
터전을 옮긴 후 2005년 6월달까지 교회에 다닐 수 없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회의감과 더불어 취업에 대한 압박 때문이었다. 2004년 10월 말에 큰형이 결혼식을 올렸고, 비슷한 시기 작은형이 농협공채에 최종합격했다. 작은 형이 고흥으로 발령이나 구례 가까이 방을 얻은 것이 잘됐다 생각했다. 20살때 타던 지프차를 진주로 가지고 와서 집 생각이 나거나 외로울 때면 구례 시골집에 다녀오곤 했다. 2005년 10월.. 공부 시작한지 1년이 되었고 몇번의 특채와 공채 시험에 낙방했다. 주위에선아직 나이가 있으니 포기하지 말라고 기운을 북돋아 주셨다. 아.. 중간 2005년 6월경 부터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여유를 찾고 싶었고 뭐랄까 마음의 안식도 필요했다. 주일성수 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불안감도 컸다.
그렇게 교회활동을 시작했지만 아버지께는 비밀로 했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한다는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수험생활에 매달리는 수험생의 입장에서도 나의 생활을 어찌 보면 한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찾은 기쁨이었고 무엇보다 정신적인 안정을 회복한 행복이 더 컸다.
도서관에서 내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진주의 학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랑 같지만 이게 나의 큰 실수였다. 사람을 가려서 사귀는 것처럼 비겁한 것도 없겠지만 무분별한 인간관계는 계획의 차질을 빚기 마련이었다.
식사약속, 모임, 또 모임.. 수험생활을 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었지만 때로 도가 넘는 백수들의 모임이 되어 갔다.
큰형과 작은형이 자리를 잡아간다고 생각하니 나태해질 대로 나태해 졌고, 불규칙한 생활습관, 게다가 사람좋아하지. 공부가 제대로 될 수가 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차도 바꾼터라 나름대로 여자들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더 큰 문제는 학원모의고사 성적은 또 잘 나왔다..
그러던 올해 2월. 집에서 한통의 전화가 왔다.
수험생활 1년 반이 다 되어가던 때였다. 아버지가 수술을 하시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머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곧장 시골집으로 향했다. 요즘 부쩍 업무에 스트레스가 심하신가 싶더니 업무 실수로 돈을 물어내기도 해야할 뿐만 아니라, 기억력이 자꾸 감퇴되고, 자꾸 멍해지신다는 말씀이셨다.
고등학교 이후로 계속 알약을 복용해 오신 터라 예상은 되었던 터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지금까진 서울 삼성병원에서 정기적인 검진과 함께 약물치료를 해 오셨었는데, 예약이 쉽지 않아 순천성가롤로 병원에 입원검사를 하기로 하셨다. 1주일여의 검사가 끝난 상황에서 병원에서 전병원과 다른 검진결과가 나왔다. 서울 삼성병원의 검진이 오진이라는 것이었다. 비슷한 약을 쓰고 있는 건 맞지만 발생원인에 대한 오진을 말하는 것이었다. 웃음이 나왔다. 지난 8년간 진단받은 병명이 오진이라는 것에 황당했고, 이런 오진이 있을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는 현재 55세의 나이시니
당장의 수술없이 약물치료 계속하고, 퇴직 후에 수술로 완쾌하시는 것도 괜찮다며 약물치료를 권해왔다.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검진결과였다. 당황스러웠지만 약 자체가 잘못 된건 아니라는 의사의 말과 작은형, 어머니의 상의 끝에 서울 삼성병원에 대한 법적책임은 묻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도 계속 직장에 출근하셨다. 그런데 두달여 후..
그러니까 올해 4월 도저히 머리가 아파서 안되겠다시면서
아버지가 한번더 검사를 받아보겠노라 말씀을 꺼내셨다.
직장 생활이 너무 버겁다시면서 매우 신경질적인 성격을 보이셨다. 이렇게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던터라 당황스러웠지만 난폭해진 아버지의 모습이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큰형이 동원됐다. 큰형과 가족들이 이곳 저곳 병원을 알아봤고 현재 뇌 쪽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전북대학교병원 최하영 교수팀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검사예약을 하고 또다시 10여일간 입원검사를 시작했다. 이곳에서도 성가롤로 병원과 같은 검사결과가 나왔다.
검진기간동안 업무스트레스에서 일시 해방되셨던 건지 아버지가 평온한 것처럼 보였고 아버지도 수긍을 하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다. 이때부터 줄곧 구례 시골집에 있었다.
이때 우린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남향으로 자꾸 이사가고 싶다고 하셔서 남향으로 주택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부모님 두분이 사시기에 아파트도 적당했지만, 일조량이 적고 꽤 소음이 있어서 이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남향에 있는 한 곳을 구입했다. 이렇게 저렇게 하루 이틀이 가는데, 아버지의 짜증스러운 듯한 말투와 거칠어진 행동이 다시 시작되셨다. 그리고는 1주일쯤 뒤 도저히 버거워서 안되겠다 시면서 수술하면서 조금 쉬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조금 인내하실 수 없겠느냐며 달래려 하셨지만 무엇보다 아버지의 힘겨움이 생각보다 컸다.
서둘러 수술 날짜를 잡고, 수술 후에 시간이 안 날것 같아 서둘러 이사를 마쳤다. 전북대병원에 수술을 위해 입원했다. 수술을 위해서는 수술을 위한 검사가 또 필요하댄다. 검사를 마치고 나서 생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 검사를 해보니, 상황이 심각하단다.
수술을 안할수도 없는게, 수술을 안하고 가만두면 점점 상황이 안좋아지신단다. 수술을 해도 완치는 어렵단다. 수술부위를 모두 제거할 수는 있지만 모두 제거할 경우 일부 뇌의 기능을 잃는다." 는 통보였다. 가족들의 항의가 이어졌다. 작은형은 직설적인 성격이라 강하게 의사에게 어필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제와서 또 병원을 옮길 수도 없지 않느냐며 화를 누그러뜨리셨고 이윽고 10여일 후 수술대에 오르셨다. 이때가 5월이다. 난 수술검사부터 수술일까지 전북대 병원에 있지 못했다. 6월 11일 경남지방직 시험을 앞두고 입원하실때 모셔다 드리고는 곧장 진주로 내려와 시험을 준비했다. 위의 일련의 소동들은 어머니의 제안으로 나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시험을 앞두고 있다는 이유로 숨기셨던 것이다.
시험을 마치고 전북대병원으로 곧장 이동했다. 그리고 위의 소식을 처음 접했다. 당황스러워 눈물이 났다. 숨겼던 가족들도 미웠다.
하지만 정작 힘드실 아버지 앞에서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그나마 다행일까? 뇌를 건드리는 수술은 기본적인 의식을 회복하는 대도 꽤 오랜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아버지의 수술이 잘 되셨단다. 그리고 지금까지 잔병치레 하나 없으셨던 건강한 몸이라 회복이 빠르단다. 수술 다음날 바로 의식을 회복하셨다. 하지만 우리를 알아 보시지 못했다.
그때 다시 알았다. 연약한 인간의 모습과 수많은 수술대기자들..그리고 내 손으로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6월 20일께 진주로 돌아와서 바로 짐을 꾸렸다. 시골로 돌아와야 했다. 물론 교회에서의 인수인계 절차도 충실히 밟았다. 그리고 30일 시험발표. 3점차 낙방이었다. 이를 꾹 물고 지인의 도움을 받아 이사를 했다. 이사 하루 전날, 어머니께서 구례로 이사오는 것을 반대하셨다. 담당의사가 회복이 빠르다고도 말씀하셨다면서 취업을 앞두고 열악한 구례보다는 순천이나 남원으로 이사오라셨다. 그래서 택한 곳이 남원이다.
남원 도서관 옆에 하루 전날 방을 얻어놓고, 짐을 옮겨 놓기 바쁘게 시골로 향했다. 전주대학병원에는 수술대기자가 많아 병실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머리 아픈사람들이 많을 줄이야.. 그래서 회복단계만 필요하다고 해서 구례병원으로 모셨다.
시간이 흘렀다. 수술후 5개월..
아버지의 기억은 차츰 회복되셨다. 가끔 짜증도 부리고 난폭함도 보이셨지만 전보다 대화하는 횟수도 늘어갔다. 직장은 병가와 휴가를 낸 상태.. 올해로 30년 근속이셨는데 알아보니 그동안 정기휴가를 한번도 안 쓰셨단다. 그만큼 직장과 가족밖에 모르셨던 분이다.
정기휴가로 100여일이 나왔다. 100% 유급으로 말이다.
여행을 많이 보내드렸다. 그리고 병원에 있는동안 큰형의 아들 그러니까 아버지가 손자가 태어났었어서 자주 서울로 모셨다. 어머니는 체력회복과 건강을 위해 갖은 약제로 아버지를 모셨고, 나와 큰형, 그리고 작은형도 정기적으로 아버지를 찾아뵈면서 안정을 유지하실 수만 있다면 하는 심정으로 모셨다.
직장에서 노골적으로 명예퇴직을 권해왔다. 1년치의 월급과 퇴직금의 지급을 제시해 왔다. 하지만 유보했다. 일할 수 있는 나이에 일할 수 없음이 괴로움이라 생각해서였다.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2개월 병가를 신청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복직하기에 이르셨다.
지난 9월 25일. 5개월여만에 복직하셨다. 그리고 병원에 계실때부터 지금까지 주일이면 교회에 출석하신다. 몸이 아파보니 경준이 네가 왜 그토록 교회에 열중했었는지 이해하게 되셨단다. 칭찬인지 질책인지 구별 할 수는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아버지가 종교를 가지신것에 대해선 대찬성이다.
그리고 첫출근 하신 지난 25일 저녁.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가 뒤에 버티고 있을테니깐, 하던 공부 열심히 해라"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 추석이 되면 가족들이 함께 모여
지난 아픔을 안주삼아 소주 한잔을 돌릴 생각이다. 틈틈이 용돈을 모아 부모님 드릴 선물도 사두었다.
아버지가 집에서 요양하실 동안, 나에게도 특별한 시간들이 있었다.
바로 고등학교 친구들과 대학교 1학년 친구들과의 만남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대학 진학하게 되면서 관계가 소원해졌고,
순천대 1학년 친구들과는 동아리 활동과 학교를 옮기게 되면서 소원해 졌었다. 과거로의 여행을 생각하며 친구들과 연락을 하게 되었고, 이번 추석을 핑계삼아 모임도 갖기로 했다. 아버지의 건강이 나에게도 모처럼의 기쁨을 주었다.
오늘은 특별히 진주에서 같이 공부하던 지인들에게서 10월 1일에 있을 시험 잘보라며 전화가 몇 통 왔다.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다들 형이고 누나들인데, 내가 먼저 연락해도 부족할 판에 시험 잘보라며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즐겁다.
세상을 살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만들어 가며 산다.학교와 직업, 공동체 등으로 맺으진 인연이 있기에 인생이 또한 즐겁지 않나 생각해 본다.
이 곳 남원에 이사 온지도 벌써 3개월이 다 되간다.
그리고 수험생활도 내일모레면 2년이 되간다.
자신감 상실이니, 능력 부족이니 해도 정말 중요한건 그만큼의 노력 부족이 정확한 표현같다.
그만큼의 공을 들이지 않았는데, 별을 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나이 25(빠른 나이로 ㅋ).
인생의 3분의 1을 소화한 이 때..
조금더 세상에 너그러워 져서 인생의 벗들과 함께 세 번째 전환점에 나는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