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색(探索) >- - 지금 고객이 통화 중이오니 소리 샘으로..... "제길 ..." 계속해서 휴대폰의 통화버튼을 눌렀지만, 여전히 그녀는 통화 중이었다. ‘대체 무슨 전화를 이렇게 써대는 거야 ……’ 염치 없이 나는 그녀에게 불만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연주가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계속 달릴 수만은 없잖아 … ’ 혼이 빠진 듯 차를 몰고 달리던 나는 드디어 이성적인 생각과 타협을 하기 시작했다. 내 가 동문 주소록에서 발췌를 해 온 것은 단지 핸드폰 번호와 이 메일 그리고 그녀의 현재 서울에서의 현재 직장뿐이었다. 나는 휴대폰의 소리 샘을 통해 내 핸드폰 번호와 간략한 음성 메시지를 남겨두고 잠시 차 를 도로변에 세웠다. 터질듯한 가슴을 안고 주머니에서 이제 몇 가치 남지 않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녀는 천당에 가 있을까? …… ’ 종교가 없는 나였지만 떠오르는 그녀의 모습들을 추억하며 잠시 몽상에 빠져 있었다. ‘그 고통스러운 표정은 ……’ 그녀의 마지막 얼굴에 남았던 표정이 또다시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기를 낳는 것은 선통(仙痛)에 비교 하곤 하였다는 이야기가 문득 생각 났다. 신선만이 감내 할 수 있는 고통이라 하여 선통(仙痛)이라 했다는데 …… ‘부디 좋은 곳에 가 있으면 좋으련만 ...... ’ - 따르릉 … 따르릉 … 점점 짧아지던 담배가 나의 손가락을 위협할 무렵 무미 건조한 나의 핸드폰 벨 소리가 나 를 현실로 데려왔다. "네, 여보세요... 호출하신 분 계세요?"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난 그녀를 기억 해 낼 수 있었다. “연주야 ...... 나야 ... 기억나니 ... 나 윤수야 ...” 나는 평소에 별다른 연락이나 교류가 없었던 동기이기에 다소 멋 적은 어투로 그녀에게 나의 존재를 확인시켰다. "어라 윤수니? 이야 ... 오랜만인걸 ... 그 동안 연락도 안하고 말이야! " 그녀는 마치 친한 친구인양 나를 반갑게 맞이 해 주었다. “연주야 … 너 지금 어디니? 서울이니? ” 그녀의 반가움에 가득 찬 인사와는 달리 나는 막무가내로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 급하게 물어대기 시작했다. "너 결혼했다며? 유부남이 야밤에 처녀 사는 곳은 왜 묻고 그래? 그나저나 너 애는 있 냐? 애 딸린 유부남은 정말 최악인데......" 나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래간만에 통화가 된 친구와의 재회가 마냥 재 미있는 듯 나에게 농을 건네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의 농을 받아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나의 목소리는 점점 더 다 급 해 졌다. "나 너 좀 급히 봐야 할 것 같다. 지금 어디니? 집이니? 내가 갈 테니까 지금 있는 곳 주 소를 좀 불러봐 ... " 펜팔을 하기 위해 주소를 받는 것도 아닌데 난 다짜고짜 주소부터 부르라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런 나의 반응에 연주 역시 몹시 당황한 것 같았다. 한참 동안 그렇게 말이 없던 연주 는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무슨 일 있니? ...... 나 지금 서울대학병원 병리학 실이야 ...... 오늘은 여기서 야근 해야 할 것 같은데... 급한 일이면 혜화동 서울대학병원으로 와 ......" 나는 ‘서울대학 병원’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래 알았어 곧 갈게 ……” 라는 짤막 한 한마디만을 그녀에게 남겼다. '그녀를 만난다고 죽은 연주가 돌아오는 것도 아닐 텐데 ...... ' 연주를 향해 고속도로를 빠져나갈 무렵 나는 그녀를 찾아가는 것에 대한 잠시간의 망설 임 이 밀려 왔지만 이내 나의 차는 그렇게 서울의 혜화동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의 목숨을 한 번 구해줬던 그녀라면 ……’ 그녀와의 학교에서의 첫 인연이 머리 속에 잔상 속에 떠오르며, 그녀라면 나의 이 고통 스 럽고 답답한 심정과 현실에 대해 무슨 대안을 내 줄 것 같다는 기대를 안고 자동차의 엑 셀레이터를 더욱 더 밟아 갔다. - < 회상 : 생명의 은인(恩人) > - 대학교 2학년 때였다. 강도 높은 수업과 과제에 찌들어 있던 우리에게 중간 고사를 끝내고 나서의 휴식의 시간 에는 많은 신입생 환영회와 동아리 모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MR[Micro Robot]’이라고 하는 로봇을 만드는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었다. 내가 가 입한 동아리는 신입부원과의 첫 조우를 죽음의 7단계라 불리는 7차까지의 술 마시는 코 스 로 규격화 시켜놓고 있었다. 1학년들을 직접적으로 통제 해야 하는 학번이 우리였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의 7차까지의 술자리를 버티기 위해 중간 고사가 끝나자마자 몸 만들기까지 해 가며 준비 해 오던 터 였 다. "자. 우리의 구호! 시~~작 " "아자! 부어라! 마셔라! 그리고 다 함께 죽자! " 힘찬 구호와 함께 우리는 소주에 맥주에 양주를 끝없이 마셔 댔다. 드디어 마지막 코스인 노래방에 들렸을 때는 술이 약한 나로서는 거의 탈진한 상태에 이 르렀다. - 우웩 ... 우웩 ...컥 .. 컥 .. 한참 ‘오바이트’를 해 대던 나는 갑자기 숨이 막히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난 입 주변의 지저분한 흔적들을 채 지우지도 못한 상태로 벌개진 얼굴을 하며 목을 두 손으로 움켜 쥐고 너무나 괴롭게 화장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하늘은 노랗게만 보였고 숨은 점점 더 쉬기 어려워졌다. 그때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꿈 결 처럼 들려왔다. - 야! 야! 정신차려 …… 숨쉬기 조차 어려웠던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 앞에 보이는 여자의 얼굴이 점점 노란 화면으로 바뀌며 의식을 잃어가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단지 화장실 앞 계단에 버려 둔 뒤 어디론가 달라갔다. - 퍼억 …… 난 의식을 잃어가는 순간이었지만 무엇인가가 내 목을 찔렀다는 느낌이 왔다. 하지만 나 의 느낌도 잠시였고 단지 목에 작은 통증이 전달되는 순간 나의 의식은 꺼져가고 있었 다. - 토사물이 심하게 엉켜서 기도가 온통 폐쇄됐군요. 조금만 늦었으면 꼼짝없이 사망신고 할 뻔 했네요. 남자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내가 죽은 건가?’ 하지만 눈 앞의 시뿌연 화면은 내가 병원에 실려 왔음을 인지시켜 주었다. "다행히 누군지는 몰라도 응급처치를 잘 했네요. 목에 구멍을 내서 빨대로 기도에서 확 보 하지 못한 산소통로를 확보 했으니 말이에요. 위험한 처지 이긴 한데 거의 완벽하군요." 말하고 있는 남자는 흰 가운을 입은 것이 의사인 것 같았다. ‘내 목에 구멍을? 그럼 내 목에 구멍이 났단 말인가?’ 나는 알 수 없는 남자의 말에 너무나 의아했지만 숙취로 인해 아직도 머리는 지근거렸 고, 숨을 쉬기가 불편하여 여전히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의식이 돌아 온 나는 시야만 은 점점 또렷해 지고 있었다. 내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의사와 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정말 학생이 응급처치를 한 건가?” 의사는 진지하게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네, 일단 전에 책에서 읽어 둔 바가 있어서요. 근데 제가 그날 별다른 도구가 없어서 칼과 젓가락을 이용했는데 별다른 감염이 없었는지 …… " 그와 대화를 하고 있는 여자가 내 목에 구멍을 냈다는 사람인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말게. 아주 훌륭한 솜씨인데 … 뒤처리도 깔끔하고 중요 혈관도 대부분 피해 갔고 말이야. 아주 훌륭하구먼 … 자네 혹시 의대에 다니는가?" "아니요, KAIST 생명 과에 재학 중에 있습니다. 충남대 의대 쪽에서 의학에 관한 수업을 몇 가지 청강했던 게 있어서요 ……" 의사로 보이는 남자는 놀라웠다는 듯이 그녀를 칭찬했고, 그와 그녀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외면한 체 무언가 전문적인 용어가 섞인 이야기를 계속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죽어 가던 날 살려 준 사람이 바로 우리 학번의 최고 엘리트라는 ‘전연주’라는 여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가 병원에서 퇴원할 무렵이었다. - < 진실의 문 > - 내가 혜화동에 도착한 것은 거의 새벽이 다 되어서였다. 오랜 운전에 중간에 휴게소에서 쉬지도 않고 밟았던 터라 나는 거의 녹초가 되어 있었지만, 서둘러 연주가 근무하고 있 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향했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 병리학 실을 좀 찾고 싶은데요…" 나는 늦게 까지 병원을 지키고 있는 안내데스크의 여자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누구를 찾으시죠? 거긴 일반인은 출입 금지인데요." 그녀는 뜻밖의 방문객이 귀찮다는 듯이 성의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전연주 박사를 찾아 왔는데요." 나는 그녀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지금 그녀를 만나야 한다는 강한 욕구에만 사로잡혀 있 을 뿐이었다. 하지만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그녀는 내 입에서 ‘전연주 박사’라는 대답이 나오자 눈 이 휘둥그래 지면서 나한테 다시 정중한 말투로 되물었다. “미국에서 오신 전연주 박사님 말씀이신가요?” 그녀의 갑작스런 정중한 말투에 난 오히려 당황했지만 내가 찾는 연주가 이 여자가 말하 는 ‘전연주 박사님’임에는 틀림 없는 것 같았다. “네, 맞는데요 ……” 데스크의 여자는 너무나 공손한 태도로 돌변하여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누군가를 불러 나를 안내하라고 지시했다. ‘콧대 높은 병원에서 황송한 대접을 받는군 ......’ 미국에서 돌아 온 연주가 이곳에서 받는 대접을 상상할 수 있었다. ‘정말 성공해서 돌아 왔나 보네 ……’ 그녀의 학교 다닐 때의 재능이라면 뭔가 학계에서 높은 대접을 받는 것이 틀림 없어 보 였 다. 회색 유니폼을 입은 건장한 남성이 나를 [관계자 외 출입엄금]이라는 표지판이 입구에서 노려보고 있는 [특수병리실]이란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 삐이 삐이 삐이 … 컴퓨터로 출입 통제가 되고 있는 듯한 자동문이 열리고 어둠 속에서 낯선 얼굴이 나타났 다. “어이~ 이게 누구야 내가 목에 빵꾸 내준 나의 친구 윤수 아냐 ~! 그 동안 잘 지냈 어?” 그녀는 오랜만에 만난 내가 정말로 반가운 듯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나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곤 두 팔을 벌려 나를 진심으로 환영 해 주었다. “음 ...... 연주야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 하자.” 그녀의 반응 과는 달리 나는 너무나 담담하게 이야기 하였다. 이런 나의 태도에 맥이 빠 졌는지 그녀는 아무 대답 없이 출입문을 열더니 나를 자기 개인 실험실로 안내했다. 연주의 개인 실험실로 보이는 공간은 꽤 넓어 보였다. 각종 실험장비와 화학 약품 냄새 로 가득 찬 방은 들어가자 마자 괴상한 '덩어리'들이 내 눈에 괴롭혔지만, 잔혹한 장면 이 라면 신물이 났던 나로서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익숙해졌다. 실험실 안에서 바라 본 그녀는 대학시절과 달리 많이 변해 있었다. 둥 그스름 하고 귀여 운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앳돼 보였지만, 그때 보다 훤칠해 보이는 키와 항상 안경을 벗 은 눈은 훨씬 여성스러워 진 것 같았다. 학창시절 허리까지 기르던 긴 머리는 아주 짧게 커트하여 도시적이고 이지적인 귀여운 여성의 풍모를 잔뜩 풍기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새벽부터 날 그렇게 애타게 찾은 거야? 하지만 나한테 개인적인 관 심 이라면 삼가 해주렴 … 나는 유부남한테는 관심이 없으니까 … 호호호 …” 그녀는 농담을 섞어가며 나의 애타는 방문에 대한 궁금증을 표출했다. “그나저나 결혼도 했다면서 귀띔 한 번 안 해주고 청첩장 한 장 보내주지도 않고 말이 야 … 정말 서운 했던 거 알지?” 그녀의 눈 빛에는 정말로 서운함이 비쳐 지나갔다. 그녀는 KAIST를 통틀어 가장 우수한 학생 중 하나였고 거의 전과목을 ‘A’로 도배한 괴 물 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교우관계는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나 역시 그녀와 그렇게 친한 편도 아니었으며 항상 그렇게 공부만 하는 그녀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란 다소 껄 끄 러운 면이 많았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 모습은 사회생활에서 묻어 나오는 자연스러움 때문인지 사교성도 좋 고 너무나 친근해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평소 친하지 않아서 소홀히 대했던 친 구에게 갑작스런 부탁 때문에 늦은 시각에 달려온 점이 그녀의 서운한 표정을 보자 더욱 더 마음에 걸렸다. 나의 어색한 침묵 때문에 실험실 안의 공기는 얼어 붙는 듯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명랑 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더욱 더 심란해진 표정이 되어버린 나는 무 겁게 입을 열었다. "저기 ... 나 ... 실은 윤정이랑 결혼 했었어 ..." 사실 나와 윤정의 결혼 사실을 아는 학교 친구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윤정이는 학번 내 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했지만, 그녀의 결혼과 불행한 남편의 죽음에 대해 말 이 많았기 때문에 친한 친구 몇을 제외하고 난 그녀와의 결혼을 숨겼던 것이다. “어라? 정말? ... 그럼 니가 결혼한 여자가 윤정이었단 말이야?”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태곤 선배는? 윤정이는 태곤 선배랑 결혼했다고 그러던데?" 나의 심각한 표정을 지켜보던 그녀는 내가 하는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듯 진 지하게 물었다. “태곤 선배는 죽었어 ...” 나의 말을 들은 연주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퍼져 나갔다. 과거 태곤 선배 역시 학교 내에서 유명인이었다. 연주만큼은 아니어도 태곤 선배 역시 물 리학과에서는 한 가닥 한다는 소위 ‘천재’학생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죽음 을 전해 들은 연주의 표정에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했다. "정말? 그 건강하던 태곤 선배가 죽었단 말이야? 왜? 무슨 일로? 무슨 병이라도 걸렸던 거니?" 그녀는 뜻 밖의 소식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태곤 선배는 항상 내가 어려운 걸 물어 보러 가면 자상히 가르쳐 주곤 했는데. 그런 선 배가 죽었다니 ……" 끝끝내 연주는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런 연주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 다. 그녀가 더욱 충격을 받을 거라는 걸 알지만 나는 내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윤정이도 죽었어. 불과 1주일 전에 ... " 연주는 나의 말에 더더욱 충격을 받았는지, 이젠 눈물을 멈춘 채 나의 눈동자만을 응시 했 다. "대체 무슨 전염병이라도 돈 거야? 어떻게 사람의 죽음이 그렇게 장난처럼 일어나 버린 거야?" 허탈한 듯한 그녀의 절규하는 목소리는 실험실 안을 울리는 듯 했다. '하긴 지금 내가 말한 사람들, 마치 언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다 죽었으니 까 ... 갑자기 그 이야기를 듣는 연주로선 혼란스럽겠지 ...... ' 나는 연주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야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아니야, 태곤 선배의 죽음은 나도 이유를 몰라. 하지만 연주의 죽음은 ......" 그녀에게 꼭 이 말을 해야겠다고 달려 온 나였지만 나의 입은 차마 떼어지지 않았다. 나의 눈에도 어느덧 눈물이 고인 듯 눈 앞이 뿌옅게 흐려져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너한테 부탁을 좀 하러 왔어. 니가 미국 NIH라는 곳에서 아주 뛰어난 병리 및 희 귀 질병 관련 학자라는 페이퍼를 읽은 적이 있거든 ..." 나의 진지한 목소리의 부탁에 연주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지워진 화장은 신경 쓰지 도 않은 채 나를 바라보며 고개만을 끄덕였다. "그래,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도와 줄게. 내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 근데 제법이나 너 ... 언제 생물학 페이퍼도 읽고 … 넌 전자공 학도 아냐?" 아직도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는 그녀였지만 이젠 애써 명랑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나를 위한 배려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질문에 나는 윤정이와 보내왔던 시간들이 머리 속에 그려졌다. "응, 윤정이의 박사논문을 도와주다가 ... 봤거든......" 연주는 나의 풀 죽은 목소리를 듣고선 내게 힘내라는 듯 눈을 찡긋 하더니 터벅터벅 실 험 실 한 켠으로 가서 향긋한 냄새가 나는 원두커피를 가져왔다. "일단 힘내고, 나한테 차분히 이야기를 좀 해봐 ...... 내가 들어야 하니까." 나는 여태까지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그리고 나의 머리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을 모조리 연주에게 이야기 했다. 마치 잘못한 일을 엄마한테 고해성사하듯이 나는 그렇게 그녀에게 모든걸 쏟아냈다. 내 이야기를 듣던 연주는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하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일단 니가 집에서 가져 왔다는 그것들을 내게 좀 가져다 줄래?" 이제 그녀의 눈빛은 확실한 학자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미리 준비 했다는 듯이 그녀에게 물건을 건넸다. "응, 여기 다 들어 있어 ......" 그걸 받아 든 그녀는 어느새 그걸 실험대 위에 올려 놓곤 이것 저것 준비하고 있었다. 그 렇게 내가 준 것을 뒤척거리더니 갑자기 나를 돌아 보며 물었다. "야야 ... 윤수야 ... 무슨 개미를 담아 왔다면서?" 실험실 한구석에서 나를 부르는 윤정의 목소리에 담배를 한대 꺼내 들고 입안에서 불을 붙이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리고 있던 나는 그녀의 갑작스런 질문에 놀라 담배를 바닥에 떨어 뜨린 채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응, 녹색 개미 였어... 아니면 다른 곤충이었을지도 모르지만 ... 개미치고는 무척 컸 으 니까......" 나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녀가 꺼낸 까만 필름 통에서는 개미가 아닌 진줏빛이 나는 둥 근 지름 0.8 cm 정도의 물체가 들어 있었다. "어라.. 저기에는 개미가 ......" 나는 좀 당황했다. 틀림없이 이상한 곤충을 담았던 검은 필름 통에는 알 수 없는 덩어리 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의 머리 속에는 식탁 위에 있던 통에 한 마리를 더 담았던 것이 떠올랐다. "거기 말고 내 차에 가면 하나 더 있거든 내가 지금 가서 가지고 올게 …… " 이상하게 나의 마음을 파고드는 불안한 마음에 그녀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한달음 에 차로 달려갔다. - 으응 …… 이건 ? 내가 이상한 곤충을 담아 두었던 그 투명 한 통에는 역시 다른 물질이 들어 있었다. 어 떻 게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을 수도 있지만 나의 가슴은 ‘쿵쾅쿵쾅’거리며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지?’ 이상하게 불안해 져 오는 마음 때문에 차 앞에서 가만히 서있던 내게 연주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야! 너 그냥 그렇게 뛰쳐 나가면 어떻게 해?" 그녀는 나를 따라 실험실을 뛰어나온 모양이었다. "이거야 니가 잡은 그 개미 라는게?" 그녀는 투명한 하얀 통에 담긴 초록색의 젤리 같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며 말했 다. "으응 ... 그게 ... 틀림없이 살아 움직이는 개미 같은 거 였는데 ... " 나는 또다시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현실과 꿈 그리고 내가 겪은 일에 대한 상식이 자 꾸 만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나의 당황스러워 하는 표정을 한참을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하여간 너의 옷에서 나온 거라고 하니 내가 분석을 좀 해 볼게 …… " 점점 혼란스러워져만 가는 나와 그런 나를 지켜보던 연주는 서로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실 험실로 다시 들어갔다. 그녀는 실험실 서랍에서 하얀 알약으로 보이는 것을 두 개 끄집 어 내더니 나에게 건네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먹고 저기 왼쪽 구석으로 가면 간이 숙소가 있거든 … 거기 가서 좀 자구와 … 그 동안 내가 네가 가져 온 것들을 좀 볼게 ……” 그녀의 진지한 목소리는 알 수 없는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난 그녀의 권유를 거부하 지 못하고 알약 두 알을 입에 털어 넣은 채 그녀가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그녀가 간이 숙소라 부른 그 작은 방에는 얇은 이불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이불을 덥고 누우려는 순간 난 몰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져서 잠들고 말았다. "이거야 … 맞아 … 찾아냈다 … 유레카 … !! " 한 참을 자고 있던 나의 귀에 그녀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몇 시간이나 잔 걸까 ...... 우욱...' 약을 먹고 잤기 때문인지 머리가 몽롱했고 속이 무척 쓰렸다. 점점 맑아지는 정신에 난 그녀의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를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많 은 실험장비들이 웅웅대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내가 부스럭 거리며 깨어 난 인기척을 들 었는 지 큰 소리로 나를 불러 댔다. - 야, 윤수야! 일어났으면 빨리 이리 좀 와봐 ......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 보다 조금 들 떠 있었고 무엇인가 흥분 된 듯 해 보였다. “어 알았어 지금 갈게 …… ” 짤막한 대답과 함께 나는 그녀의 흥얼 거리고 있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신은 몽롱했지만 그녀가 나의 악몽 같은 이상한 저주의 열쇠를 열어 줄 것만 같다는 희망이 발걸음을 옮길수록 더욱 더 강해져만 갔다. ============================================================ zhuntersz@daum.net , zhuntersz@yahoo.co.kr http://cafe.daum.net/zhunters 공식 연재는 웃대! 웃긴대학 공포란에요~.. ~~ (www.humoruniv.com) ============================================================ 16
(퍼옴) [Particles] #9 운명의 문
-< 탐색(探索) >-
- 지금 고객이 통화 중이오니 소리 샘으로.....
"제길 ..."
계속해서 휴대폰의 통화버튼을 눌렀지만, 여전히 그녀는 통화 중이었다.
‘대체 무슨 전화를 이렇게 써대는 거야 ……’
염치 없이 나는 그녀에게 불만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연주가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계속 달릴 수만은 없잖아 … ’
혼이 빠진 듯 차를 몰고 달리던 나는 드디어 이성적인 생각과 타협을 하기 시작했다. 내
가 동문 주소록에서 발췌를 해 온 것은 단지 핸드폰 번호와 이 메일 그리고 그녀의 현재
서울에서의 현재 직장뿐이었다.
나는 휴대폰의 소리 샘을 통해 내 핸드폰 번호와 간략한 음성 메시지를 남겨두고 잠시
차
를 도로변에 세웠다. 터질듯한 가슴을 안고 주머니에서 이제 몇 가치 남지 않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녀는 천당에 가 있을까? …… ’
종교가 없는 나였지만 떠오르는 그녀의 모습들을 추억하며 잠시 몽상에 빠져 있었다.
‘그 고통스러운 표정은 ……’
그녀의 마지막 얼굴에 남았던 표정이 또다시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기를 낳는 것은 선통(仙痛)에 비교 하곤 하였다는 이야기가 문득 생각 났다. 신선만이
감내 할 수 있는 고통이라 하여 선통(仙痛)이라 했다는데 ……
‘부디 좋은 곳에 가 있으면 좋으련만 ...... ’
- 따르릉 … 따르릉 …
점점 짧아지던 담배가 나의 손가락을 위협할 무렵 무미 건조한 나의 핸드폰 벨 소리가
나
를 현실로 데려왔다.
"네, 여보세요... 호출하신 분 계세요?"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난 그녀를 기억 해 낼 수 있었다.
“연주야 ...... 나야 ... 기억나니 ... 나 윤수야 ...”
나는 평소에 별다른 연락이나 교류가 없었던 동기이기에 다소 멋 적은 어투로 그녀에게
나의 존재를 확인시켰다.
"어라 윤수니? 이야 ... 오랜만인걸 ... 그 동안 연락도 안하고 말이야! "
그녀는 마치 친한 친구인양 나를 반갑게 맞이 해 주었다.
“연주야 … 너 지금 어디니? 서울이니? ”
그녀의 반가움에 가득 찬 인사와는 달리 나는 막무가내로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
급하게 물어대기 시작했다.
"너 결혼했다며? 유부남이 야밤에 처녀 사는 곳은 왜 묻고 그래? 그나저나 너 애는 있
냐? 애 딸린 유부남은 정말 최악인데......"
나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래간만에 통화가 된 친구와의 재회가 마냥
재
미있는 듯 나에게 농을 건네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의 농을 받아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나의 목소리는 점점 더
다
급 해 졌다.
"나 너 좀 급히 봐야 할 것 같다. 지금 어디니? 집이니? 내가 갈 테니까 지금 있는 곳
주
소를 좀 불러봐 ... "
펜팔을 하기 위해 주소를 받는 것도 아닌데 난 다짜고짜 주소부터 부르라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런 나의 반응에 연주 역시 몹시 당황한 것 같았다. 한참 동안 그렇게 말이 없던 연주
는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무슨 일 있니? ...... 나 지금 서울대학병원 병리학 실이야 ...... 오늘은 여기서 야근
해야 할 것 같은데... 급한 일이면 혜화동 서울대학병원으로 와 ......"
나는 ‘서울대학 병원’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래 알았어 곧 갈게 ……” 라는 짤막
한 한마디만을 그녀에게 남겼다.
'그녀를 만난다고 죽은 연주가 돌아오는 것도 아닐 텐데 ...... '
연주를 향해 고속도로를 빠져나갈 무렵 나는 그녀를 찾아가는 것에 대한 잠시간의 망설
임
이 밀려 왔지만 이내 나의 차는 그렇게 서울의 혜화동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의 목숨을 한 번 구해줬던 그녀라면 ……’
그녀와의 학교에서의 첫 인연이 머리 속에 잔상 속에 떠오르며, 그녀라면 나의 이 고통
스
럽고 답답한 심정과 현실에 대해 무슨 대안을 내 줄 것 같다는 기대를 안고 자동차의 엑
셀레이터를 더욱 더 밟아 갔다.
- < 회상 : 생명의 은인(恩人) > -
대학교 2학년 때였다.
강도 높은 수업과 과제에 찌들어 있던 우리에게 중간 고사를 끝내고 나서의 휴식의 시간
에는 많은 신입생 환영회와 동아리 모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MR[Micro Robot]’이라고 하는 로봇을 만드는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었다. 내가
가
입한 동아리는 신입부원과의 첫 조우를 죽음의 7단계라 불리는 7차까지의 술 마시는 코
스
로 규격화 시켜놓고 있었다.
1학년들을 직접적으로 통제 해야 하는 학번이 우리였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의 7차까지의
술자리를 버티기 위해 중간 고사가 끝나자마자 몸 만들기까지 해 가며 준비 해 오던 터
였
다.
"자. 우리의 구호! 시~~작 "
"아자! 부어라! 마셔라! 그리고 다 함께 죽자! "
힘찬 구호와 함께 우리는 소주에 맥주에 양주를 끝없이 마셔 댔다.
드디어 마지막 코스인 노래방에 들렸을 때는 술이 약한 나로서는 거의 탈진한 상태에 이
르렀다.
- 우웩 ... 우웩 ...컥 .. 컥 ..
한참 ‘오바이트’를 해 대던 나는 갑자기 숨이 막히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난 입 주변의 지저분한 흔적들을 채 지우지도 못한 상태로 벌개진 얼굴을 하며 목을 두
손으로 움켜 쥐고 너무나 괴롭게 화장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하늘은 노랗게만 보였고 숨은 점점 더 쉬기 어려워졌다. 그때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꿈
결
처럼 들려왔다.
- 야! 야! 정신차려 ……
숨쉬기 조차 어려웠던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 앞에 보이는 여자의 얼굴이 점점
노란 화면으로 바뀌며 의식을 잃어가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단지 화장실 앞 계단에 버려 둔 뒤 어디론가 달라갔다.
- 퍼억 ……
난 의식을 잃어가는 순간이었지만 무엇인가가 내 목을 찔렀다는 느낌이 왔다. 하지만 나
의 느낌도 잠시였고 단지 목에 작은 통증이 전달되는 순간 나의 의식은 꺼져가고 있었
다.
- 토사물이 심하게 엉켜서 기도가 온통 폐쇄됐군요. 조금만 늦었으면 꼼짝없이 사망신고
할 뻔 했네요.
남자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내가 죽은 건가?’
하지만 눈 앞의 시뿌연 화면은 내가 병원에 실려 왔음을 인지시켜 주었다.
"다행히 누군지는 몰라도 응급처치를 잘 했네요. 목에 구멍을 내서 빨대로 기도에서 확
보
하지 못한 산소통로를 확보 했으니 말이에요. 위험한 처지 이긴 한데 거의 완벽하군요."
말하고 있는 남자는 흰 가운을 입은 것이 의사인 것 같았다.
‘내 목에 구멍을? 그럼 내 목에 구멍이 났단 말인가?’
나는 알 수 없는 남자의 말에 너무나 의아했지만 숙취로 인해 아직도 머리는 지근거렸
고, 숨을 쉬기가 불편하여 여전히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의식이 돌아 온 나는 시야만
은 점점 또렷해 지고 있었다.
내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의사와 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정말 학생이 응급처치를 한 건가?”
의사는 진지하게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네, 일단 전에 책에서 읽어 둔 바가 있어서요. 근데 제가 그날 별다른 도구가 없어서
칼과 젓가락을 이용했는데 별다른 감염이 없었는지 …… "
그와 대화를 하고 있는 여자가 내 목에 구멍을 냈다는 사람인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말게. 아주 훌륭한 솜씨인데 … 뒤처리도 깔끔하고 중요 혈관도 대부분 피해
갔고 말이야. 아주 훌륭하구먼 … 자네 혹시 의대에 다니는가?"
"아니요, KAIST 생명 과에 재학 중에 있습니다. 충남대 의대 쪽에서 의학에 관한 수업을
몇 가지 청강했던 게 있어서요 ……"
의사로 보이는 남자는 놀라웠다는 듯이 그녀를 칭찬했고, 그와 그녀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외면한 체 무언가 전문적인 용어가 섞인 이야기를 계속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죽어 가던 날 살려 준 사람이 바로 우리 학번의 최고 엘리트라는 ‘전연주’라는
여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가 병원에서 퇴원할 무렵이었다.
- < 진실의 문 > -
내가 혜화동에 도착한 것은 거의 새벽이 다 되어서였다. 오랜 운전에 중간에 휴게소에서
쉬지도 않고 밟았던 터라 나는 거의 녹초가 되어 있었지만, 서둘러 연주가 근무하고 있
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향했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 병리학 실을 좀 찾고 싶은데요…"
나는 늦게 까지 병원을 지키고 있는 안내데스크의 여자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누구를 찾으시죠? 거긴 일반인은 출입 금지인데요."
그녀는 뜻밖의 방문객이 귀찮다는 듯이 성의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전연주 박사를 찾아 왔는데요."
나는 그녀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지금 그녀를 만나야 한다는 강한 욕구에만 사로잡혀 있
을 뿐이었다.
하지만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그녀는 내 입에서 ‘전연주 박사’라는 대답이 나오자 눈
이 휘둥그래 지면서 나한테 다시 정중한 말투로 되물었다.
“미국에서 오신 전연주 박사님 말씀이신가요?”
그녀의 갑작스런 정중한 말투에 난 오히려 당황했지만 내가 찾는 연주가 이 여자가 말하
는 ‘전연주 박사님’임에는 틀림 없는 것 같았다.
“네, 맞는데요 ……”
데스크의 여자는 너무나 공손한 태도로 돌변하여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누군가를 불러
나를 안내하라고 지시했다.
‘콧대 높은 병원에서 황송한 대접을 받는군 ......’
미국에서 돌아 온 연주가 이곳에서 받는 대접을 상상할 수 있었다.
‘정말 성공해서 돌아 왔나 보네 ……’
그녀의 학교 다닐 때의 재능이라면 뭔가 학계에서 높은 대접을 받는 것이 틀림 없어 보
였
다.
회색 유니폼을 입은 건장한 남성이 나를 [관계자 외 출입엄금]이라는 표지판이 입구에서
노려보고 있는 [특수병리실]이란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 삐이 삐이 삐이 …
컴퓨터로 출입 통제가 되고 있는 듯한 자동문이 열리고 어둠 속에서 낯선 얼굴이 나타났
다.
“어이~ 이게 누구야 내가 목에 빵꾸 내준 나의 친구 윤수 아냐 ~! 그 동안 잘 지냈
어?”
그녀는 오랜만에 만난 내가 정말로 반가운 듯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나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곤 두 팔을 벌려 나를 진심으로 환영 해 주었다.
“음 ...... 연주야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 하자.”
그녀의 반응 과는 달리 나는 너무나 담담하게 이야기 하였다. 이런 나의 태도에 맥이 빠
졌는지 그녀는 아무 대답 없이 출입문을 열더니 나를 자기 개인 실험실로 안내했다.
연주의 개인 실험실로 보이는 공간은 꽤 넓어 보였다. 각종 실험장비와 화학 약품 냄새
로 가득 찬 방은 들어가자 마자 괴상한 '덩어리'들이 내 눈에 괴롭혔지만, 잔혹한 장면
이
라면 신물이 났던 나로서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익숙해졌다.
실험실 안에서 바라 본 그녀는 대학시절과 달리 많이 변해 있었다. 둥 그스름 하고 귀여
운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앳돼 보였지만, 그때 보다 훤칠해 보이는 키와 항상 안경을 벗
은 눈은 훨씬 여성스러워 진 것 같았다. 학창시절 허리까지 기르던 긴 머리는 아주 짧게
커트하여 도시적이고 이지적인 귀여운 여성의 풍모를 잔뜩 풍기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새벽부터 날 그렇게 애타게 찾은 거야? 하지만 나한테 개인적인 관
심
이라면 삼가 해주렴 … 나는 유부남한테는 관심이 없으니까 … 호호호 …”
그녀는 농담을 섞어가며 나의 애타는 방문에 대한 궁금증을 표출했다.
“그나저나 결혼도 했다면서 귀띔 한 번 안 해주고 청첩장 한 장 보내주지도 않고 말이
야 … 정말 서운 했던 거 알지?”
그녀의 눈 빛에는 정말로 서운함이 비쳐 지나갔다.
그녀는 KAIST를 통틀어 가장 우수한 학생 중 하나였고 거의 전과목을 ‘A’로 도배한 괴
물 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교우관계는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나 역시 그녀와 그렇게
친한 편도 아니었으며 항상 그렇게 공부만 하는 그녀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란 다소 껄
끄
러운 면이 많았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 모습은 사회생활에서 묻어 나오는 자연스러움 때문인지 사교성도 좋
고 너무나 친근해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평소 친하지 않아서 소홀히 대했던 친
구에게 갑작스런 부탁 때문에 늦은 시각에 달려온 점이 그녀의 서운한 표정을 보자 더욱
더 마음에 걸렸다.
나의 어색한 침묵 때문에 실험실 안의 공기는 얼어 붙는 듯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명랑
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더욱 더 심란해진 표정이 되어버린 나는 무
겁게 입을 열었다.
"저기 ... 나 ... 실은 윤정이랑 결혼 했었어 ..."
사실 나와 윤정의 결혼 사실을 아는 학교 친구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윤정이는 학번 내
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했지만, 그녀의 결혼과 불행한 남편의 죽음에 대해
말
이 많았기 때문에 친한 친구 몇을 제외하고 난 그녀와의 결혼을 숨겼던 것이다.
“어라? 정말? ... 그럼 니가 결혼한 여자가 윤정이었단 말이야?”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태곤 선배는? 윤정이는 태곤 선배랑 결혼했다고 그러던데?"
나의 심각한 표정을 지켜보던 그녀는 내가 하는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듯
진
지하게 물었다.
“태곤 선배는 죽었어 ...”
나의 말을 들은 연주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퍼져 나갔다.
과거 태곤 선배 역시 학교 내에서 유명인이었다. 연주만큼은 아니어도 태곤 선배 역시
물
리학과에서는 한 가닥 한다는 소위 ‘천재’학생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죽음
을 전해 들은 연주의 표정에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했다.
"정말? 그 건강하던 태곤 선배가 죽었단 말이야? 왜? 무슨 일로? 무슨 병이라도 걸렸던
거니?"
그녀는 뜻 밖의 소식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태곤 선배는 항상 내가 어려운 걸 물어 보러 가면 자상히 가르쳐 주곤 했는데. 그런 선
배가 죽었다니 ……"
끝끝내 연주는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런 연주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
다.
그녀가 더욱 충격을 받을 거라는 걸 알지만 나는 내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윤정이도 죽었어. 불과 1주일 전에 ... "
연주는 나의 말에 더더욱 충격을 받았는지, 이젠 눈물을 멈춘 채 나의 눈동자만을 응시
했
다.
"대체 무슨 전염병이라도 돈 거야? 어떻게 사람의 죽음이 그렇게 장난처럼 일어나 버린
거야?"
허탈한 듯한 그녀의 절규하는 목소리는 실험실 안을 울리는 듯 했다.
'하긴 지금 내가 말한 사람들, 마치 언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다 죽었으니
까 ... 갑자기 그 이야기를 듣는 연주로선 혼란스럽겠지 ...... '
나는 연주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야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아니야, 태곤 선배의 죽음은 나도 이유를 몰라. 하지만 연주의 죽음은 ......"
그녀에게 꼭 이 말을 해야겠다고 달려 온 나였지만 나의 입은 차마 떼어지지 않았다.
나의 눈에도 어느덧 눈물이 고인 듯 눈 앞이 뿌옅게 흐려져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너한테 부탁을 좀 하러 왔어. 니가 미국 NIH라는 곳에서 아주 뛰어난 병리 및
희
귀 질병 관련 학자라는 페이퍼를 읽은 적이 있거든 ..."
나의 진지한 목소리의 부탁에 연주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지워진 화장은 신경 쓰지
도 않은 채 나를 바라보며 고개만을 끄덕였다.
"그래,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도와 줄게. 내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 근데 제법이나 너 ... 언제 생물학 페이퍼도 읽고 … 넌 전자공
학도 아냐?"
아직도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는 그녀였지만 이젠 애써 명랑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나를 위한 배려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질문에 나는 윤정이와 보내왔던 시간들이 머리 속에 그려졌다.
"응, 윤정이의 박사논문을 도와주다가 ... 봤거든......"
연주는 나의 풀 죽은 목소리를 듣고선 내게 힘내라는 듯 눈을 찡긋 하더니 터벅터벅 실
험
실 한 켠으로 가서 향긋한 냄새가 나는 원두커피를 가져왔다.
"일단 힘내고, 나한테 차분히 이야기를 좀 해봐 ...... 내가 들어야 하니까."
나는 여태까지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그리고 나의 머리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을 모조리 연주에게 이야기 했다. 마치 잘못한 일을 엄마한테 고해성사하듯이 나는
그렇게 그녀에게 모든걸 쏟아냈다.
내 이야기를 듣던 연주는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하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일단 니가 집에서 가져 왔다는 그것들을 내게 좀 가져다 줄래?"
이제 그녀의 눈빛은 확실한 학자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미리 준비 했다는 듯이 그녀에게 물건을 건넸다.
"응, 여기 다 들어 있어 ......"
그걸 받아 든 그녀는 어느새 그걸 실험대 위에 올려 놓곤 이것 저것 준비하고 있었다.
그
렇게 내가 준 것을 뒤척거리더니 갑자기 나를 돌아 보며 물었다.
"야야 ... 윤수야 ... 무슨 개미를 담아 왔다면서?"
실험실 한구석에서 나를 부르는 윤정의 목소리에 담배를 한대 꺼내 들고 입안에서 불을
붙이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리고 있던 나는 그녀의 갑작스런 질문에 놀라 담배를 바닥에
떨어 뜨린 채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응, 녹색 개미 였어... 아니면 다른 곤충이었을지도 모르지만 ... 개미치고는 무척 컸
으
니까......"
나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녀가 꺼낸 까만 필름 통에서는 개미가 아닌 진줏빛이 나는 둥
근 지름 0.8 cm 정도의 물체가 들어 있었다.
"어라.. 저기에는 개미가 ......"
나는 좀 당황했다. 틀림없이 이상한 곤충을 담았던 검은 필름 통에는 알 수 없는 덩어리
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의 머리 속에는 식탁 위에 있던 통에 한 마리를 더 담았던 것이 떠올랐다.
"거기 말고 내 차에 가면 하나 더 있거든 내가 지금 가서 가지고 올게 …… "
이상하게 나의 마음을 파고드는 불안한 마음에 그녀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한달음
에 차로 달려갔다.
- 으응 …… 이건 ?
내가 이상한 곤충을 담아 두었던 그 투명 한 통에는 역시 다른 물질이 들어 있었다. 어
떻
게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을 수도 있지만 나의 가슴은 ‘쿵쾅쿵쾅’거리며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지?’
이상하게 불안해 져 오는 마음 때문에 차 앞에서 가만히 서있던 내게 연주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야! 너 그냥 그렇게 뛰쳐 나가면 어떻게 해?"
그녀는 나를 따라 실험실을 뛰어나온 모양이었다.
"이거야 니가 잡은 그 개미 라는게?"
그녀는 투명한 하얀 통에 담긴 초록색의 젤리 같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며 말했
다.
"으응 ... 그게 ... 틀림없이 살아 움직이는 개미 같은 거 였는데 ... "
나는 또다시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현실과 꿈 그리고 내가 겪은 일에 대한 상식이 자
꾸
만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나의 당황스러워 하는 표정을 한참을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하여간 너의 옷에서 나온 거라고 하니 내가 분석을 좀 해 볼게 …… "
점점 혼란스러워져만 가는 나와 그런 나를 지켜보던 연주는 서로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실
험실로 다시 들어갔다. 그녀는 실험실 서랍에서 하얀 알약으로 보이는 것을 두 개 끄집
어 내더니 나에게 건네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먹고 저기 왼쪽 구석으로 가면 간이 숙소가 있거든 … 거기 가서 좀 자구와 …
그 동안 내가 네가 가져 온 것들을 좀 볼게 ……”
그녀의 진지한 목소리는 알 수 없는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난 그녀의 권유를 거부하
지 못하고 알약 두 알을 입에 털어 넣은 채 그녀가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그녀가 간이 숙소라 부른 그 작은 방에는 얇은 이불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이불을 덥고
누우려는 순간 난 몰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져서 잠들고 말았다.
"이거야 … 맞아 … 찾아냈다 … 유레카 … !! "
한 참을 자고 있던 나의 귀에 그녀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몇 시간이나 잔 걸까 ...... 우욱...'
약을 먹고 잤기 때문인지 머리가 몽롱했고 속이 무척 쓰렸다.
점점 맑아지는 정신에 난 그녀의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를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많
은 실험장비들이 웅웅대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내가 부스럭 거리며 깨어 난 인기척을 들
었는 지 큰 소리로 나를 불러 댔다.
- 야, 윤수야! 일어났으면 빨리 이리 좀 와봐 ......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 보다 조금 들 떠 있었고 무엇인가 흥분 된 듯 해 보였다.
“어 알았어 지금 갈게 …… ”
짤막한 대답과 함께 나는 그녀의 흥얼 거리고 있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신은 몽롱했지만 그녀가 나의 악몽 같은 이상한 저주의 열쇠를 열어 줄 것만
같다는 희망이 발걸음을 옮길수록 더욱 더 강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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