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복 편 지 12

수호천사200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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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복 편 지 12

 

 

 

 

 

 

 

 

『심청전』 - 윤제림(1959~ ) - 봄꽃 피어나는 것 열댓번쯤 보았을 처녀애가 꽃피는 구경 한번도 못해본 아버지 손을 붙들고 꽃밭엘 나왔습니다. 세세연년 수도 없이 피었다 진 꽃들이 이제 처음으로 피어난 꽃들에게 그 처녀애의 이름을 알려줍니다. 머지않아 꽃이 될 처녀애가 아버지 귀에 꽃을 그립니다. 아버지 얼굴에 꽃이 피어납니다. '심청전' 전문

 

 

 

심봉사가 젖동냥으로 키운 열다섯살 딸애의 효도를 누리는 장면, 이보다 아름다운 무엇이 있으랴. 눈먼 아버지의 귀에 안 보이는 꽃을 그려드리는 청이의 언어야말로 얼마나 기막힌 시였을까! 딸의 설명을 듣는 심봉사의 얼굴에 피어나는 웃음꽃보다 더 향기롭고 눈부신 꽃이, 더 이상의 절창시(絶唱詩)가 또 있기나 할까?. 두 눈 멀쩡한데도 자식을 버리는 이 시대여, 맹인 심학규를 부러워하는 고아 아닌 시설고아들을 한번쯤은 찾아봐야 한다. 세상의 아비들이여 어미들이여, 그리고 아들 딸들이여! 이제는 부디 봉사 심학규와 심청이가 됩시다. - 유안진<시인> -

 

 

 

 

 

 

 

『치명적』 - 한영옥(1951~ ) - 임자 없는 옷 한 벌 짓느라 오래도록 정신 팔고 품팔았다. 고단하여 잠시 누웠던 꽃나무 밑 잠 꽃봉오리가 터지며 나도 터졌다. 치명적 도약이었다. 규정이 확 터졌다. 풀어진 이마에서 쏟아지는 푸른 기억의 송곳에 한번 더 깊숙이 찔린다. '치명적' 부분

 

 

 

태풍이 휩쓸고간 다음의 고요가 아닌가. 갈망의 처음에서 마지막 끝까지의 도약과정에서, 그 뜨거운 갈망이 자신의 내부를 돌고 도는, 반복적인 것인 줄을 알아버린 뒤의 적막함에서 깨닫는 허탈, 허망, 붙잡고 안달하던 모든 것을 놓아버린 순간에는 스스로 다그치던 규정도 한순간에 무너진다. 한꺼번에 터진다. 시는 어느 순간 이런 깨달음이고 도약이 아니던가. 안간힘 써온, 견디어온 의지와 열망 사이의 갈등은 드디어 곪아 터져, 더 이상은 도리없게 되고 마는 바로 그 폭발하는 순간에 이 시가 탄생되었구나. - 유안진<시인> -

 

 

 

 

 

 

 

『비』 - 이동백(1945~ ) - 이윽고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지상의 아랫도리가 버티다 못해 젖어들고, 구름이 승천의 길목에서 목을 꺾고 말았다. '비' 전문

 

 

 

목숨마다 제가 흘린 눈물을 마시며 산다. 지상의 슬픔이란 슬픔이 모두 승천되게 마련이다. 상제님께 호소하려고? 따지려고? 탄원하려고? 아무려나 목숨의 눈물은 괴로운 지상을 버리고 승천하지만, 끝내는 스스로를 가눌 수 없어 하늘까지 다가가는 길목에서 목을 꺾고 만다. 다시 눈물이 되어 제 몸을 적시며 제 영혼을 말려준다. 초목이든 짐승이든 인간이든 간에 모름지기 목숨이란 제가 흘린 눈물에 밥말아 먹고서야 생기가 회복된다. 겨울 찬비, 늦가을이 밤비에 몸서리치는 마른 풀들도 승천하다말고 목이 꺾인다. 되돌아 와 제뿌리를 적셔주는 하늘의 이치를 섭리라는가. 그리고서야 다음이 있다지. - 유안진<시인> -

 

 

 

 

 

 

 

『밤기차』 - 안상학(1962~ ) - 칠흑 같은 밤 그대에게 가는 길 이마에 불 밝히고 달리는 것은 길을 몰라서가 아니라 멀리서 기다리는 그대에게 쓸쓸하지 말라고 쓸쓸하지 말라고 내 사랑 별빛으로 먼저 보내는 것이다. '밤기차' 전문

 

 

 

그대에게 가는 연인의 이마에는 불이 켜있다. 칠흑 어둠을 뚫고 한사코 달리는 밤기차다. 그대에게로 가는 오로지 외길사랑, 외줄기로 뻗쳐간, 갈래길이 전혀 없는 사랑이여. 밤기차가 되는 사랑, 조급하고 성급한 마음 먼저 별빛으로 보내며, 어젯밤도 밤새도록 달려와준 그대를 위하여, 첫차로 도착한 신새벽 길을 마중가야 하리, 사랑하는 이들이여, 그대들은 모두 밤기차로 달리고 있다. - 유안진<시인> -

 

 

 

 

 

 

 

『난파선』 - 김상미(1957~ ) - 그와 내가 닮은 점은 부서지고 가라앉으면서도 서로를 열렬히 원한다는 점이다. 사랑을 가지고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할 때 나약한 인간들은 자신을 거세하고 사랑의 통증이 헌신적으로 심신을 좀먹는 걸 그냥 두고 즐기지만 세상엔 아무리 더럽히려 해도 더럽혀지지 않는 게 있다. '난파선' 부분

 

 

 

세상은 더러워서 더렵혀질 수 없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사랑이란 묘약이 있어서, 절대로 더럽혀질 수 없는지도 모른다. 죽고 싶다고 악을 쓰면서도 사랑하는 너와 나의 세상에 살고 싶다. 우리 선조들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극락'이라 했으니, 얼마나 현실적인 가치인가. 천국이 좋다는데 왜들 죽어 하늘나라 가는 것을 애통해 하는가. 부서져 가라앉아도 좋은 사랑이 있어 세상은 세상답다. 함께 살 수 있는 지상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하느님의 아드님은 얼마나 대단하신 참인간이신가. 인생이 송두리째 난파되어도 여한이 없는 사랑 한번 그립구나 나도. - 유안진<시인> -

 

 

 

 

 

 

 

『무지개』 - 최 승호(1954~ ) - 흰 대머리바위들을 적시며 한차례 소나기가 지나가더니 인왕산 위에 무지개가 떴다 동물원 우리에서 보았던 앞뒤가 영 딴판인 공작새 부채 같은 꼬리깃털들 떠오른다. 굳이 새삼스럽게 말을 하자면 내 몸 안에도 무지개가 있는데 다름 아닌 오욕칠정(五慾七情)이 나의 무지개 처연할 때 있다 음울할 때도 있다. '무지개' 전문

 

 

 

무지개! 내 몸 안에 있는 무지개를 보아내지 못하고, '워즈워스의 무지개'만 되뇌이곤 했으니, 재산·색정·음식·명예와 수면의 오욕은 불교의 오진(五塵), 즉 다섯가지 티끌 같은 헛것이라 했지만, 희노애락 애오욕(喜怒哀樂 愛惡慾)의 일곱 가지로 때로는 음울하고 때로는 슬픈 탄식도 되는 사람이여, 진실로 사람일 수밖에 없는 무지개를 지우기는커녕, 제 마음 속에서 키우고 살찌우기 바쁜 일상의 연속을 깨우치는 이 시인은 이미 사제이자 승려의 생애를 거쳐와 시인이 되었구나. - 유안진<시인> -

 

 

 

 

 

 

 

『장가계(張家界) 사가족(士家族)2』 - 강현국(1949~ ) - 그리운 사람들 거기 삽니다. 아버지 어머니 죽은 누이도 난전에 모여 앉아 옹기종기 삽니다. 메뚜기 땅콩 옥수수 송사리 망고 풋대추와 더불어 땡볕과 더불어 파리떼와 더불어 뚜뚜따리리리 피리 불며 삽니다. 대낮부터 술 취한 당신 대낮 쪽으로 비틀 시간의 골짜기가 환했습니다. '장가계(張家界) 사가족(士家族)2' 전문

 

 

 

저도 장가계에 가봤지요. 거기 사는 사람들 모습이 내 혈친들의 옛 모습과 어찌 달랐겠어요. 땡볕, 파리떼, 뚜뚜 피리 불며, 더불어 어울려 더울려, 어렵사리 서럽사리 함께 난전에 모여 모여, 별의별 것들을 팔고 사는 볼 장 다 본 듯한 이들의 모습들이라니, 불과 이삼십년 전 우리네 모양새 그대로였지요. 대낮부터 술 취하지 않고는 살아낼 수 없는 당신, 당신, 당신들이 모두 우리 우리 우리였지요. 시간의 골짜기가 우리 쪽으로 훠언하게 기울어질 수밖에요. 어딜 가도 가난 위에 얹힌 모습은 우리 모습이었지요. - 유안진<시인> -

 

 

 

 

 

 

 

『당신의 난로-드디어 나는 눈이 멀었다-나의 말』 - 김종해(1941~ ) - 나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난로를 보아요 연기마저 보이지 않는 불꽃 다른 이에겐 보이지 않는 화염을 나는 당신에게서 보아요 당신 곁에 있으면 나는 늘 화상을 입어요 나는 보아요 영원의 한순간을 지상의 사랑이 떠올라 별이 되는 것을 나는 보아요. '당신의 난로-드디어 나는 눈이 멀었다-나의 말' 전문

 

 

 

한 몸이 통째로 난로가 되었다. 야단났다. 연기도 나지 않는 불꽃으로 타오르는 난로를 이 시인만이 볼 수 있단다. 사랑하는 이의 눈이 아닌가. 보기만 해도 화상을 입는단다. 지상의 사랑은 불타서 마침내 하늘의 별이 된단다. 모름지기 사랑은 비극적인가?. 희극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희롱이거나 코미디일까? 시인의 사랑은 비극적이어서 시로 다시 태어난다. 온 몸이 잉걸불 펄펄 불꽃피는 당신의 난로가 되어, 당신이라는 난로가 있어줘서 올 겨울 삼동 추위를 이겨내고 싶다. - 유안진<시인> -

 

 

 

 

 

 

 

『침묵의 거리』 - 이승하(1960~ ) - '그'는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 단말마의 비명 눈여겨본 차 번호판 4613 뺑소니를 놓는 차, 뒤꽁무니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 한순간에 한 사람이 사라져 하나뿐인 소우주가 폭발하였다 '그'는 틀림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며칠 후 그 거리에는 <목격자를 찾습니다> 플래카드 외롭게 펄럭이고 색 바래고 '침묵의 거리' 부분

 

 

 

인간의 마을에 밤은 언제 오는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때 밤이 온다. 천하보다 귀한 한 목숨이, 그의 하나뿐인 생애가, 그의 전 우주가 통째로 폭파된 그 참혹함을 목도한 증인은 끝내 나타나지 않고, 애타는 플래카드만 퇴색되도록 저홀로 통곡하는 목쉰 울음. 화 있을진저 이 시대의 냉혈 도시인들, 과연 특별한 시민이구나! - 유안진<시인> -

 

 

 

 

 

 

 

『마이산 능소화』 - 김완하(1958~ ) - 주말에 아내와 열살, 여섯살 두 아들과 마이산에 갔다. 계단을 오르자 금실 좋은 암마이봉과 수마이봉 두 바위 웅장하게 솟아 그 언어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말의 귀, 때로는 그렇게 몸이 더 정확한 이름이 된다. 마이봉은 통째로 하나의 커다란 귀 산도 한세상 스스로를 지키기에 그토록 큰 귀가 필요했던가! '마이산 능소화' 부분

 

 

 

산도 한세상을 지키려면 커다란 귀가 필요했으리라. 천상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바다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여성과 남성, 아이와 어른의 소리를 들어야 했으리. 그래서 봉우리가 통째로 귀 하나가 되었으리. 음양의 조화가 산봉우리에도 필요했으리. - 유안진<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