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지우기 싫다고 대신 너한테 부담주기도 싫다고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헤어지자고 헤어지고나서 지우고싶으면 내가 지우겠다고 지우라고 너한테 돈만 딸랑 보낸 너의 어머니나 줬다고 그대로 전하는 너나 다 보기싫다고 했죠.그리고 헤어질 결심을 했습니다.19살이니 남친이나 나나 어렸죠.아주 저한테 남은건 자존심밖에 없었습니다.평소 책임감없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던제가 무모히 임신한 10대가 됐다는게 그당시에도 죽고싶을 정도로 자존심상하고 싫었어요.하지만 남친을 사랑했고 결혼해도 감수하고 살자신이 있었죠.미적미적 남친과도 거의 안만나며 여름 방학이라 집에만 있었습니다.나오는 배를 압박붕대로 감고 커다란 멜빵바지로 커버했습니다.먹고싶은게 너무 많았지만 그게 아이를 가져서 먹고싶은지 몰랐죠.다행히 엄마 아버지는 칼국수집을 하셔서 두분다 가게에 매달려있었습니다. 전 전공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집에 은둔해있었습니다. 봉긋히 솟아오르는 배를 보는 하루하루가 너무 무서웠죠.그렇게 2달정도를 보냈습니다.매일밤 울었습니다.동생이랑 티브이를 보다 나온 피자선전에 무심결에 먹고싶다 말을했고 그말에 중학생 여동생은 자기 용돈을 털어 사주더군요.진짜 지금생각해도 걸신들린듯먹었나봅니다. 지금 대학3학년인 동생은 그때 언니 무서웠어 피자좋아도 안하는 사람이 ....다음날 남친한테 전화가 왔죠.운전면허 따느라고 전화도 제대로 못했다고 집나가자고 나가면 택시운전이라도 해서 너랑 애기랑 먹여살린다고 전화에 대고 엉엉 울었어요.감동해서도 아니고 좋아서도 아닌 그냥 혼자 불안하고 무서웠는데 나갈 수 있다는 나말고도 아길 낳고 같이 봐줄 사람이 있다는 안도감에 엉엉 울었습니다.그리고 다음날 아침 우린 서울로 갔습니다.버스안에서 계속 눈물이 흘렀습니다.난 항상 부모의 아들같은 딸이었는데 동생들에게도 무서운 범생이 큰언니였는데 내가 부모가슴에 이렇게 못박을 짓을 할줄은 동생들을 황당하게 만드는게 너무 미안하고 앞으로의 내인생을 점칠수없다는것도 앞날없이 그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슬퍼서 눈물이 났죠.서울로 간 다음날 압박붕대를 처음으로 풀렀습니다.배는 하루아침에 정말 거짓말처럼 솟아올랐습니다.그때가 6개월이었다는 것도 그당시는 몰랐습니다. 병원을 가본적이 없었으니까요.6개월까지 압박붕대에 먹고싶은것도 못먹고 마음 편히 몸펴고 있지도 못했던 아이에게 미안했습니다. 서울 여관비는 너무 비싸더군요.어쩔수없이 우린 떨어져있었어요.남친은 국민대 다니는 길음동 친구 자취집에 저는 장안동에 있는 고등학교 동창의 친구집에 얼굴한번 안봤던 친구였지만 그친구는 친구의 친구는 다 친구라면서 저에게 정말 잘해줬던 고마운 친구입니다. 자신은 주점에 다니는 힘들고 가망없는 생활을 하던 그 쪼그만하고 까만 인형같은 친구 저에게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씻어준 친구입니다. 돈한푼 안내고 더부살이 하는 제가 눈치볼까봐 같이 장보고 같이 목욕가고 가서도 배부른 제가 힘들다고 때밀이 아줌마에게 돈을 주면서 절 밀어주라 그러는 몸은 작지만 마음은 큰 그친구가 보고싶네요.(지금은 일본에 있다는데 연락이 안되요)몇칠에 한번 길음동에 남친을 보러갔어요.남자애들 소굴이었습니다. 술병에 담배꽁초에 라면봉다리에 다들 2학년 1학기 시작전이라 노가다도 나가고 집에 틀어박혀 전기기타에 술에 담배에 동갑이라고 절 편히 친구라 대해 주었지만 남친이랑 같이 있지는 못했죠.우리 아이 태교음악은 그친구들 덕에 모짜르트도 베토벤도 아닌 퀸이었어요.지금도 퀸의 노래를 들으면96년도 여름이 떠오르네요.그러다 남편은 자기 집에 가자고 했고 전 자신없었지만 남편의 말에 일단 저의 사촌 언니한테 먼저 갔어요.언니가 없던 저랑 친형제같이 자란 사촌언니라 언니는 저를 보고 울더니 병원으로 데리고 갖고 병원에서 처음으로 아이의 초음파사진을 봤습니다. 우습게도 이미 7개월이었고 의사는 화를 내더군요.기형아 검사도 뭐도 이렇게 아무 것도 안한 엄마가 있냐고 아기한테 미안했어요.이미 사람형태의 아기를 보니 초음파 검사대에 누워 또한번 눈물이 주르륵 소리없이 흘러내렸어요.
언니가 엄마한테 연락해 엄마가 달려왔고 엄마는 나를 잡아 끌고 병원에가 아이지우자고 엄마말 들으라고 엄마같이 결혼일찍해서 왜 고생할려고 하냐고 하면서 절 잡아끌었고 엄마에게 전 엄마 그러지마 라는 말밖에는 하지 못했습니다.엄마는 울면서 너 마음 독하게 먹어라 에미된다는거 쉬운것도 즐거운것만도 아니라고 니인생 반절은 포기해야한다고 그말에 제가 할수 있는건 고개를 끄덕이는 일밖에는 없었습니다.9월1일 남편의 손을 잡고 시댁에 갔죠.가슴이 두근거리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설마 배부른 절 때리지는 않겠지 하는 마음에 갔죠.어머니와 큰누나가 있었어요.시집간 큰누나는 막 둘째를 낳아 몸조리를 하러 왔고 (아기가 1달정도 됐을때)어머니는 그냥 절 회피하고싶었나봅니다.그때 거실문이 열리면서 신랑같이 커다란키에 살만 붙었을 뿐이지 사람좋게 생긴거까지 똑같은 시아버지가 등장하셨고 화내실줄 알았는데 저를 보시더니 환하게 웃으시더군요.그동안 먹고싶은거 없었냐는 물음에 바보같이 울어버렸습니다.마음이 놓여서요.아버님의 그런반응에 냉정하게 보이는 어머니는 포기하신듯 다른 방으로 가셨고 어렵게 같이 점심을 먹었죠.아버님은 절 보시더니 계속 웃으시더라고요.그런 아버님이 좋았습니다.20만원을 주시더군요.임부복들좀 사입으라고 그게 화근이었습니다.울 신랑 누나만해도 위로 4명인데 말했듯이 큰누나는 아이 낳은지 한달되고 둘째누나는 그때 임신 8개월 저랑 한달 차이였어요.셋째누나는 결혼을 5개월남겨두고 있고 막내누나는 대학4학년 .아버님이 저를 보고 웃으실때마다 뒤통수가 따가웠습니다. 처음으로 시댁에서 자는날 밥을 먹고 치우니 어머닌 신랑한테 저를 집에 데려다 주고 너는 집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신랑은 어떻게 그러냐고 이제 내사람인데 왜 따로 지내야 하냐고 엄마에게 항의 아닌 항의를 했고 전 듣고만 서있었죠.마지못해 시댁에서 잤고 어머닌 저의 잠자리를 따로 마련하시더군요.처음 자는 시댁에서 전 커다란 방에서 혼자 잠을 잤습니다.어린 마음에 일단 아이를 낳을수 있다는 마음에 그냥 편안한 상태로 지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뒤하루도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8년.이젠 나가래요.두번째
아기지우기 싫다고 대신 너한테 부담주기도 싫다고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헤어지자고 헤어지고나서 지우고싶으면 내가 지우겠다고 지우라고 너한테 돈만 딸랑 보낸 너의 어머니나 줬다고 그대로 전하는 너나 다 보기싫다고 했죠.그리고 헤어질 결심을 했습니다.19살이니 남친이나 나나 어렸죠.아주 저한테 남은건 자존심밖에 없었습니다.평소 책임감없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던제가 무모히 임신한 10대가 됐다는게 그당시에도 죽고싶을 정도로 자존심상하고 싫었어요.하지만 남친을 사랑했고 결혼해도 감수하고 살자신이 있었죠.미적미적 남친과도 거의 안만나며 여름 방학이라 집에만 있었습니다.나오는 배를 압박붕대로 감고 커다란 멜빵바지로 커버했습니다.먹고싶은게 너무 많았지만 그게 아이를 가져서 먹고싶은지 몰랐죠.다행히 엄마 아버지는 칼국수집을 하셔서 두분다 가게에 매달려있었습니다. 전 전공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집에 은둔해있었습니다. 봉긋히 솟아오르는 배를 보는 하루하루가 너무 무서웠죠.그렇게 2달정도를 보냈습니다.매일밤 울었습니다.동생이랑 티브이를 보다 나온 피자선전에 무심결에 먹고싶다 말을했고 그말에 중학생 여동생은 자기 용돈을 털어 사주더군요.진짜 지금생각해도 걸신들린듯먹었나봅니다. 지금 대학3학년인 동생은 그때 언니 무서웠어 피자좋아도 안하는 사람이 ....다음날 남친한테 전화가 왔죠.운전면허 따느라고 전화도 제대로 못했다고 집나가자고 나가면 택시운전이라도 해서 너랑 애기랑 먹여살린다고 전화에 대고 엉엉 울었어요.감동해서도 아니고 좋아서도 아닌 그냥 혼자 불안하고 무서웠는데 나갈 수 있다는 나말고도 아길 낳고 같이 봐줄 사람이 있다는 안도감에 엉엉 울었습니다.그리고 다음날 아침 우린 서울로 갔습니다.버스안에서 계속 눈물이 흘렀습니다.난 항상 부모의 아들같은 딸이었는데 동생들에게도 무서운 범생이 큰언니였는데 내가 부모가슴에 이렇게 못박을 짓을 할줄은 동생들을 황당하게 만드는게 너무 미안하고 앞으로의 내인생을 점칠수없다는것도 앞날없이 그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슬퍼서 눈물이 났죠.서울로 간 다음날 압박붕대를 처음으로 풀렀습니다.배는 하루아침에 정말 거짓말처럼 솟아올랐습니다.그때가 6개월이었다는 것도 그당시는 몰랐습니다. 병원을 가본적이 없었으니까요.6개월까지 압박붕대에 먹고싶은것도 못먹고 마음 편히 몸펴고 있지도 못했던 아이에게 미안했습니다. 서울 여관비는 너무 비싸더군요.어쩔수없이 우린 떨어져있었어요.남친은 국민대 다니는 길음동 친구 자취집에 저는 장안동에 있는 고등학교 동창의 친구집에 얼굴한번 안봤던 친구였지만 그친구는 친구의 친구는 다 친구라면서 저에게 정말 잘해줬던 고마운 친구입니다. 자신은 주점에 다니는 힘들고 가망없는 생활을 하던 그 쪼그만하고 까만 인형같은 친구 저에게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씻어준 친구입니다. 돈한푼 안내고 더부살이 하는 제가 눈치볼까봐 같이 장보고 같이 목욕가고 가서도 배부른 제가 힘들다고 때밀이 아줌마에게 돈을 주면서 절 밀어주라 그러는 몸은 작지만 마음은 큰 그친구가 보고싶네요.(지금은 일본에 있다는데 연락이 안되요)몇칠에 한번 길음동에 남친을 보러갔어요.남자애들 소굴이었습니다. 술병에 담배꽁초에 라면봉다리에 다들 2학년 1학기 시작전이라 노가다도 나가고 집에 틀어박혀 전기기타에 술에 담배에 동갑이라고 절 편히 친구라 대해 주었지만 남친이랑 같이 있지는 못했죠.우리 아이 태교음악은 그친구들 덕에 모짜르트도 베토벤도 아닌 퀸이었어요.지금도 퀸의 노래를 들으면96년도 여름이 떠오르네요.그러다 남편은 자기 집에 가자고 했고 전 자신없었지만 남편의 말에 일단 저의 사촌 언니한테 먼저 갔어요.언니가 없던 저랑 친형제같이 자란 사촌언니라 언니는 저를 보고 울더니 병원으로 데리고 갖고 병원에서 처음으로 아이의 초음파사진을 봤습니다. 우습게도 이미 7개월이었고 의사는 화를 내더군요.기형아 검사도 뭐도 이렇게 아무 것도 안한 엄마가 있냐고 아기한테 미안했어요.이미 사람형태의 아기를 보니 초음파 검사대에 누워 또한번 눈물이 주르륵 소리없이 흘러내렸어요.
언니가 엄마한테 연락해 엄마가 달려왔고 엄마는 나를 잡아 끌고 병원에가 아이지우자고 엄마말 들으라고 엄마같이 결혼일찍해서 왜 고생할려고 하냐고 하면서 절 잡아끌었고 엄마에게 전 엄마 그러지마 라는 말밖에는 하지 못했습니다.엄마는 울면서 너 마음 독하게 먹어라 에미된다는거 쉬운것도 즐거운것만도 아니라고 니인생 반절은 포기해야한다고 그말에 제가 할수 있는건 고개를 끄덕이는 일밖에는 없었습니다.9월1일 남편의 손을 잡고 시댁에 갔죠.가슴이 두근거리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설마 배부른 절 때리지는 않겠지 하는 마음에 갔죠.어머니와 큰누나가 있었어요.시집간 큰누나는 막 둘째를 낳아 몸조리를 하러 왔고 (아기가 1달정도 됐을때)어머니는 그냥 절 회피하고싶었나봅니다.그때 거실문이 열리면서 신랑같이 커다란키에 살만 붙었을 뿐이지 사람좋게 생긴거까지 똑같은 시아버지가 등장하셨고 화내실줄 알았는데 저를 보시더니 환하게 웃으시더군요.그동안 먹고싶은거 없었냐는 물음에 바보같이 울어버렸습니다.마음이 놓여서요.아버님의 그런반응에 냉정하게 보이는 어머니는 포기하신듯 다른 방으로 가셨고 어렵게 같이 점심을 먹었죠.아버님은 절 보시더니 계속 웃으시더라고요.그런 아버님이 좋았습니다.20만원을 주시더군요.임부복들좀 사입으라고 그게 화근이었습니다.울 신랑 누나만해도 위로 4명인데 말했듯이 큰누나는 아이 낳은지 한달되고 둘째누나는 그때 임신 8개월 저랑 한달 차이였어요.셋째누나는 결혼을 5개월남겨두고 있고 막내누나는 대학4학년 .아버님이 저를 보고 웃으실때마다 뒤통수가 따가웠습니다. 처음으로 시댁에서 자는날 밥을 먹고 치우니 어머닌 신랑한테 저를 집에 데려다 주고 너는 집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신랑은 어떻게 그러냐고 이제 내사람인데 왜 따로 지내야 하냐고 엄마에게 항의 아닌 항의를 했고 전 듣고만 서있었죠.마지못해 시댁에서 잤고 어머닌 저의 잠자리를 따로 마련하시더군요.처음 자는 시댁에서 전 커다란 방에서 혼자 잠을 잤습니다.어린 마음에 일단 아이를 낳을수 있다는 마음에 그냥 편안한 상태로 지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뒤하루도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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