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3-43화> 안군의기억1

바다의기억2006.10.13
조회5,656

어느덧 평일도 다 지나고

 

금요일이 되었습니다.

 

다들 즐거운 마음으로 깔끔한 마무리를....

 

============================ 그리고 다가올 주말 ===========================

 

 

외모, 능력, 재력, 권력....


모든 건 처음부터 갖춰져 있었다.


그것들이 얼마나 유용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써야하는 것인지 알게 된 건


사춘기를 지나 이성에 눈을 뜨게 되면서였던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다.


모든 면에서 완벽이나 마찬가지였던 난


여성들에게 있어


왠지 좋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존재였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이성은 나를 좋아한다.=


그건 일부 매우 독특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하곤


공통으로 적용할 수 있는 법칙 같은 것이었다.


남은 건 선택의 문제.


바로 =내가 누구를 좋아할 것인가?=뿐이었다.



그 선택의 대상에 남자친구의 존재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선택하기만 하면


그들은 알아서 사라져 주었다.


내가 약간의 언질을 주는 것만으로도


열등감에 사로잡힌 수컷들은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해 하다가


그의 여자친구를 못살게 굴었고,


그 천박한 행각은 나에게 선택된 여성에게 있어


충분한 이별사유가 되어주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자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이 법칙에도 예외는 있었다.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더 열심히


갖은 정성을 다 쏟는 이들도 있었고,


무관심한척 연기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정성을 쏟는 이들은 너무 자신을 구속한다는 이유로 이별을 당했고,


무관심했던 이들은 그 무관심을 이유로 이별을 선고 받았다.



결국 내 선택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것이 효력을 발휘하는 데 걸리는 시간에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지금껏 이 법칙에서 벗어난 예는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거기 있었다.


너무 절대적이었다는 것.


조마조마하고 가슴 떨리고 설렘에 밤잠을 설치는


아기자기한 풋사랑 이야기는


나에게 있어 너무나 먼 나라 이야기였다.


내게 연애만큼 쉬운 일은 없었다.


문제는 적당한 상대를 찾는 것까지이고,


그다음부턴 늘 탄탄대로였다.


그건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분명해졌고,


오히려 힘든 건 적당히 지겨워졌을 때


뒤탈 없이 이별하는 일이었다.


다른 후보들을 선택하는 데 장해가 되지 않도록 말이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난 그런 연애에 지쳐버렸다.


a piacere(악상기호 : 연주자 마음대로) 기호뿐인


세레나데 같은 연애엔 신물이 났다.


뭔가 색다른 자극이 될 만한 일이 필요했다.


tutta la forza(온힘을 다하여),


acceso(불같이),


abbandonamente(몰두하여)


즐길 수 있는 그런 연애가 하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적당한 상대를 만났다.



=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가입하게 된

영문학부 00학번, 윤민아라고 합니다.



좀 덜 성숙한 감은 있지만 발랄한 외모에,


어디 가서 미움 받지 않을 착한 심성,


소문에 따르면 집안도 괜찮은 듯 하고....


무엇보다 세상물정 따윈 하나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입학 2개월 만에 =얼음마녀=라는


살벌한 별명까지 달게 될 만큼


남자에게 무관심하다는 게 매력 포인트였다.



일단은 가벼운 입질부터 시작했다.



= 어? 민아야. 식사하러 왔어?


= 아, 안녕하세요. 오빠도 여기서 식사하시나 봐요?


= 응, 괜찮으면 자리 좀 같이 앉아도 될까?

지금 혼자 밥먹어야할 처지라....


= 네 그러세요.



잔뜩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김빠질 만큼 순순히 미끼를 무는 그녀.


이후 난 몇 번이나 그녀에게 접근해 탐색전을 벌였지만


그 때마다 돌아온 대답은 =No problem= 뿐이었다.



비싸게 구는 것도, 튕기는 것도 없이 그냥 =Yes=.


얼음마녀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그녀는 다정다감하고 순종적인 성격이었다.


결국 상대 가려가면서 튕겼던 것뿐인가?



이내 그녀로부터 흥미를 잃어버린 난


곧장 다른 목표를 찾아 눈을 돌리려 했지만,


그 전에 그녀의 악명을 깨트릴 필요성이 있었다.


반은 내 명성을 위해서,


반은 내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한데 대한 책임으로 말이다.



= 민아야,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있어?


= 네? 무슨 일이세요?


= 옷 좀 사러가려는 데 같이 봐줬으면 해서.

대신 저녁은 근사하게 살게.


= 음.... 죄송해요. 저 남자 옷은 잘 볼 줄 모르는데다....

저녁은 선약이 있거든요.


= 아~ 그거 아쉬운 걸. 그럼 다음 기회에 부탁하지 뭐.



오호라.... 이제 좀 튕겨보시겠다 이거구만.


발칙하기까지 한 그녀의 태도 전환에


난 내심 속이 끓는 걸 느꼈다.


마냥 순한 얼굴로 =Yes= 일변도를 가다가


중요한 순간에선 =No= 라니...


완전 선수 아냐?


그래도 조급해할 건 없었다.


일단 한 번만 넘어오면


그 때부턴 튕기고 싶어도 튕길 수가 없을 테니까...


그 때가 언제인지가 문제일 뿐.



이제 그녀가 본색을 드러낸 것이라 확신한 난


수시로 밑밥을 뿌리며 그녀가 바늘을 물기를 기다렸다.


쇼핑, 영화, 각종 전시회와 박람회까지


갖은 명분을 다 동원했던 나.


하지만 그녀는 단 한번도 바늘 근처에 오는 법이 없었다.



그제야 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다.


상대 가려가며 튕기는 거라면


두 번째 내지 세 번째엔 바늘을 물었어야 했다.


아니면 최소한 언제는 된다고 하는 언질 정도는 흘려야 했다.


하지만 일언반구도 없이


distinto(또렷하게)하게 =No=를 외치는 그녀는


내 행동을 막막하게 했다.


튕기는 것도 이정도 되면


애가 타는 게 아니라 짜증이 나는 법이다.



일단 잠시 slentando(속도를 늦춰서)하고


그녀의 행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난


곧장 그녀와 연락을 끊고 반응을 기다렸다.


만약 여기서 그녀가 먼저 접근해온다면 결론은 뻔한 것이었다.


그녀는 상대가 진이 빠질 때까지 말린 뒤


슬쩍 빈틈을 보여 상대를 목메게 만드는


가장 잔인한 형태의 여우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 아, 오빠. 오랜만이네요. 옆에 자리 있어요?



아니나 다를까,


곧장 affabile(애교스럽게)하게 자세를 낮추고


작업에 돌입해오는 그녀.


옆엔 친구까지 달고 온 게 본 목적을 감추려는 의도가 다분했지만,


결국 그녀도 내 손바닥 위에 있을 뿐이었다.


자, 어디 한 번 볼까?



= 다음 수업은 어느 쪽으로 가세요?


= 응? 저쪽.... 철학과 쪽인데.


= 아아, 저흰 경제학과 쪽인데... 반대방향이네요.

이따 연습실에서 뵐게요.



= 그래. 나중에 보자.



하지만.... 그녀는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강의실로 헤어질 때까지


아무 단서를 남기지 않았다.


나의 예상이 또 빗나간 걸까?



그날 이후 난 몇 가지 실험을 반복하면서


최대한 객관적인 기준으로


그녀의 행동 패턴을 분석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너무나 간단했다.



Yes = 밥 같이 먹기, 대중교통 같이 이용하기, 연극 연습하기.

No = 일시 불문하고 따로 만나기. Yes 에 속하지 않는 대부분의 일.



대체 뭔가 이건?


난 이 결과를 부정하기 위해 갖은 시도를 다 해봤지만


그럴수록 확신만 강해질 뿐,


빈틈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일단 분위기 잡을만한 상황에 나오질 않으니


스킨십 같은 것도 불가능했고,


관계진전이라는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얼음마녀.


그녀는 만년설로 둘러싸인 얼음성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마녀였다.



=연애란 이렇게 짜증나는 것이었구나=


하는 걸 그때 처음 느꼈다.


제 아무리 난공불낙의 요새라도


이렇게 시작도 못해보고 밖에서 빙빙 돌 줄은 몰랐다.


상황이 이쯤 되자 처음의 의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무리 고난이도라고 해도 깰 가능성은 보여야지,


시작하자마자 벽에 가로막혀


게임오버만 계속 당하는 게 무슨 게임인가?



더 심각한 문제는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고 발을 빼려고 해도


미련이 남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모두가 깰 수 없다고 단정하고 포기한 게임을


유유히 클리어한 살아있는 전설이 되고 싶었다.


상황이 힘들다고 느낄수록 그 뒤에 느낄 성취감이 기대되었다.



결국.... 난 장장 4개월 동안을


ostinato(끈덕지게)하게 그녀 주위에서 맴도는 바보짓을 했다.


뭐.... 그 기간 동안


다른 사람을 사귀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물론, 빈틈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뮤지컬과 오페라를 굉장히 좋아했고,


같이 보러간 적도 몇 번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2번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는,


그녀가 늘 표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보통의 경우 VIP석 입장권으로 유인해서,


공연이 끝나면 와인이 곁들여진 멋진 저녁식사를 하고,


그 다음은 분위기를 봐서 결정할 일인데.....


그녀는 늘 한 발 앞서 공연표를 가지고 있었고,


난 간신히 그녀의 옆자리 표를 구해


기막힌 우연이라며 동석할 수 있었을 뿐이다.


사정이 이러니 그녀가 저녁식사를 거절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외에 기회라면


공연 연습을 하면서 있었던 스킨십이나 단체 회식 정도.


하지만 이 또한 돌파 가능한 빈틈을 만들어 주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