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3-44화> 안군의기억2

바다의기억2006.10.16
조회6,747

월요일입니다.

 

다들 활기찬 한 주의 시작 되시길

 

========================== 멀고 먼 토요일 ============================

 

 

사채업자 같이 생긴 외모에


하는 짓은 어리버리하기 짝이 없고,


항상 칙칙한 검은색 옷만 입고 다니던 녀석.


위아래를 온통 검은색으로 도배해 놓으니


오늘 입은 옷이 어제 입은 옷이랑


다른 옷인지 어쩐지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과연 센스가 얼마나 없으면


저런 식으로 옷을 입고 다니게 될까?



라이벌이 될 것을 직감하기엔 너무나 초라했던 그.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존재를 잊어갈 때 즈음,


그가 내게 물었다.



= 혹시 민아양.... 지금 남자친구 있습니까?



....... =개나 소나=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어디다 머리를 들이밀어?


낄 데 안 낄 데를 모르고 어슬렁거리는 그에게


feroce(거칠게)하게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일단은 이미지 관리를 위해


comodo(평온하게)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 없어... 그런데.... 포기하는 쪽이 나을 걸?



그 땐 전혀 예상도 못했다.


녀석이 그녀와 친구 이상의 관계에 근접해지리라는 걸 말이다.



= 야, 소문 들었냐? 민아랑 같이 시험 보러 들어온 남자애 이야기?


= 응, 둘이 사귄다고 하던데?


= 뭐어? 그럼 결국 얼음이 깨진 거야?



그동안 각계각층의 수많은 남성들이 깨져온 만큼


그녀의 소식은 일파만파로 퍼져 내 귀까지 들어왔다.



어째서?!


그건 지난 4개월간 온갖 궁리를 해온 나에겐


봉변이나 마찬가지였다.



난 angoscioso(고뇌에 차서)해서 생각했다.


대체 녀석의 어떤 점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걸까?


오직 검정색으로 밀어붙이는 패션?


사채업자 같은 얼굴?


항상 무덤덤한 표정?


대체 저놈이 내세울만한 게 뭐지?



일단은 쉽게 시도 가능한 것부터 테스트해보기로 한 나.


처음엔 all black 패션부터 따라 해보기로 했다.


혹시 민아가 검은색 마니아라


검은색만 보면 끌리는 건 아닐까?


물론, 그럴 가능성이야 희박하겠지만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그런 부분까지 고려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혹여 녀석과 마주쳐서 커플룩 소리를 듣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하며 학교 안을 돌아다니던 중,


마침 민아와 만나게 된 나.


과연 그녀는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나의 옷에 관심을 드러냈다.



= 오....오빠.


= 응, 연극 준비는 잘 돼가?


= 네... 그런데.... 오늘.... 장례식장 가세요?


= ......... 응,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그렇다.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오히려 평소에 이렇게 입는 쪽이 비정상이다.


괜히 상처받을 필요 없다.



이후로도 난 녀석의 말투나 행동양식을 예의주시하며


분석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성과는 제로나 마찬가지였다.


딱 봐도 끌릴 구석이 없는데


뭐 대단한 비결이 숨어있었겠는가?



녀석은 giocoso(익살스럽게)하게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brillante(재치있게)하고 dolcezza(달콤하게)하게


사람을 녹이는 것과는 완전 동떨어진 인간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맨땅에 헤딩하는 사이에도


녀석과 민아의 관계는 veloce(빠르게)하게 발전해나가고 있었다.



= 어제 민아가 기억이한테 뽀뽀했거든!



덜컥 마음이 급해진 난 서둘러 작전을 변경했다.


힌트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래선 녀석이 먼저 게임을 끝내버릴 기세다.



작전 자체는 늘 써오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슬슬 만날 때마다 속을 긁어 furioso(난폭하게)하게 만든 다음,


알아서 자폭하기를 기다리는 것.



= 이야~ 나 보자마자 표정이 삭 바뀌는데?

민아 혼자 올 줄 알고 있다가 실망한 거야?

친구들은 어떻게 하고 혼자 이렇게 서있나?



일단 내 심중을 알게 된 녀석은


거의 짐승 같은 적의를 뿜으며 날 경계했다.


금방이라도 feroce(광폭하게)하게 덤벼들 것 같던 녀석은


생각 외로 소심한 구석이 있는지


사고는 쉽게 터지지 않았다.


난 신중한 녀석의 대응에 답답해했지만,


그 소심함이 민아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걸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졌다.


아마 당분간 이대로 내버려 둬도 별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은 터졌다.



= 내게..... 키스해주겠어?



수백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본에도 없던 키스신을 감행했던 녀석.


그것이 사전에 이야기가 되었던 것인지


독단으로 밀어붙인 것인지는 몰라도,


민아는 그와 공개적인 입맞춤을 나누었고,


난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야 난 그의 무기를 어렴풋이 파악했다.


그것은 =의외성=.


평소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아 보이면서


돌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자잘한 행동들이


그녀의 라인을 불시에 허물었던 것이다.



이후 녀석은 내 신경전에도 제법 익숙해졌는지


제법 강도 있는 반격까지 해가며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민아에 이어 녀석까지 변종 같은 반응을 보이자


난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결국 시간은 흐르고 흘러 해를 넘기게 되었고,


5월 달이 되어서도 별 다른 진척은 없었다.


정말 포기하는 수밖에 없는 걸까.


슬슬 오기란 것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할 즈음,


하늘이 내린 듯한 기회가 내게 찾아왔다.



= 남자 중에 룸바 출줄 아는 사람?



아버지의 지극히 고상한 악취미로 인해


어려서부터 사교댄스에 몸 담아왔던 나.


파티문화라곤 눈곱만큼도 정착되어있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그걸 어디다 써먹나 했더니....


이럴 때가 또 오는 구나.



난 난생 처음


돈 쓸 때를 제외하고 아버지에게 감사하며 앞으로 나섰다.


당연히 반응은 압권.


난 살기로 번뜩이는 녀석의 눈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그녀와 룸바를 추는 행운을 잡을 수 있었다.


arditamente(대담하게), cantabile(선율적으로).



그래, 그녀의 가장 큰 빈틈인 연극이 있었다.


연극연습 안에 포함된 거라면


앞 뒤 안보고 OK를 외치는 그녀와 달리


기억이 녀석은 내 행동 전반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편이었기에


이 불협화음을 잘 이용하면


의외의 가능성이 보일 것도 같았다.



= 저도.... 기사역에 지원합니다.



물론, 녀석이 기사역에 지원한 건 좀 의외였다.


딱 봐도 아닌 게 분명한 역에 덤벼들어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몰라도


말릴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장려해 마땅한 무모함이었다.


만약 그의 오기로 연극 준비를 망치게 된다면,


그보다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었다.



= 이거....역시나 안 되겠는데.


= 이거 참 어찌해야 할지....



역시나 초기부터 삐걱삐걱 마찰음이 나기 시작한 연습.


몸치는 아닌 것 같았지만


춤이라는 건 그렇게 단시간에


우격다짐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동작 자체를 외우는 것보다 중요한 건


그 흐름을 체득하는 거다.


머릿속에 온통 y=f(x)밖에 없는 것 같은 녀석이


그런 Groove를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녀석이 룸바에서 쩔쩔매는 사이,


난 착실하게 분열공작을 추진하고 있었다.


댄스부 지원군이 일찍 돌아가던 날,


기억이 녀석도 일이 있다며 귀가를 서둘렀고


이런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었다.



= 가희야, 너도 룸바 배워보지 않을래?


= 예? 정말요?



민아에게 직구를 던졌다간


되받아친 공에 맞아 부상을 당할 수도 있었기에


난 한 다리 건너서 돌아가는 쪽을 택했다.



= 오른발부터 빠지는 거야. 원투쓰리포~원... 이렇게.


= 이렇게요?



다른 여자애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황홀경에 빠져있는 가희.


그녀에겐 참 미안한 일이지만....



= 그래, 그다음 오른쪽으로 빙글 빠지면서....

잠깐, 여기서 여자 스텝이 어떻게 되더라?

민아야, 여기 잠깐만 봐줄래?



결국 본 목적은 가희를 가르쳐준다는 명목으로


민아를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 네, 무슨 일이세요?


= 여기서 여자 스텝이 어떻게 되지?


= 원, 투, 쓰리, 찍고, 이쪽으로...


= 아유- 그렇게 해서 어떻게 알아?

복습하는 셈 치고 잠깐만 보여줘.



그렇게 그녀는 내 함정에 걸려들었다.



= 어? 그 스텝이 맞아? 여기서 남자가 왼발이 나가는데....

발목이 걸리잖아?


= 네? 아.... 그러네요.


= 내가 잘못 외우고 있는 건가?

아닌데.... 왼발로 한 번 돌아볼래?


= ...... 이렇게요?


= 응, 내 생각엔 그게 맞는 것 같아.

가희야, 네가 보기에도 이게 자연스럽지?



스텝이 바뀌어도 어색하지 않은 곳을 골라 지뢰를 심어놓은 나.


그 폭탄이 터진 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 민아야, 미안하다. 역시 그때 내 스텝이 잘못 되었던 건가봐.



민아에겐 몹시 억울한 상황이겠지만,


변명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 순간 기억이 녀석의 표정이란....


아주 짜릿할 정도로 살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