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들 있어. 가방 챙겨서 내려올게."민혁은 치과 대 건물 본관 내 의자에서 채현과 현주가 앉아 기다리도록 하고 바쁘게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미안해.." 계단을 올라가는 민혁을 보던 채현이 혼잣말로 나직이 말했다. 채현의 말에 현주가 이상하다 싶어 옆으로 돌려다 봤다. "오빠가.. 다시 나갔어." 채현의 말에 놀란 현주는 몸을 고쳐 앉으며 채현의 그 다음 말에 온 신경을 모았다. "무현오빠..다시 나갔어, 현주야. 아무 말도 없이.. 그리곤 지금까지 소식도 없다. 티 안 내려고 하는데도 티가 나나봐. 민혁오빠 그 때문에 신경 쓰여서 오늘 이러는 걸 꺼야." 채현은 현주를 보며 힘없는 쓴웃음을 지었다. "무현..오빠 언제 나간.. 건데?" 현주는 너무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2주 됐어. 아빠한테 붙잡히다 시피 들어온 후로 방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왔거든. 그러더니 나한테도 아무런 말없이 그 다음 다음날인가 나가선 지금까지야.." 현주는 갑자기 쿵하며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늘 이런 식으로 듣게 되는 무현오빠의 일들에 이번에는 또 어떤 일 때문일까 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달리 어떤 방법으로든 무현을 걱정하거나 곁에서 도움이 되어 주지도 못하는 자신에게 또 한번 슬퍼졌다. 다만 채현에게서 다시 오빠가 돌아왔다거나 아무 일 없이 어디서든 잘 있다는 말의 전화라도 있었다는 말을 하루라도 빨리 듣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뿐이 없었다. "현주야." 채현은 현주의 초점 잃은 얼굴을 쳐다보며 불렀고, 현주는 어색하게 채현의 눈을 마주했다. "괜히 너까지 불편하게 하나봐, 내가" 채현은 전혀 현주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아니야, 무슨..그런 생각마! 정, 미안하면 민혁오빠 앞에서나 속상한 티내지마. 그 일 때문에 신경 써 주는 것 같다면서.." 현주는 잠시 잠깐 이였지만, 혹여라도 채현이가 눈치라도 챘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닌 것 같아 마음을 놓으며 말을 돌렸다. "그렇지? 그래야겠다, 정말." 채현의 표정이 조금 전과 조금 달라졌다. "민혁오빠네 집하고 너희 집 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던데 언제부터야? " "음... 오빠네 아빠가 운영하시는 스포츠 센터가 있거든? 그 건물을 우리 아빠회사에서 지으셨어. 그래서 두 분이 가까워지신 걸로 알아." "그래? 그랬구나.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자식들까지 친해진다는 건 좀.. 민혁오빠랑 너, 사촌이나.. 친형제 같이 보일 때가 많거든." "사촌? 그렇게 보이나..?" 채현은 민혁과의 사이가 사촌 같은 느낌이 든다는 현주의 말이 재밌었는지 다시 물었다. "어." "이웃 사촌. 뭐 그래서 그런가?" 채현이 웃었다. "민혁오빠가 외아들이야. 우리도 친척들이 다 외국에 살고 있으니깐. 뭐 없다고 봐야지. 그러니깐 서로 의지하고 그런 건 있었을 거야. 가까이에서 산 게..민혁오빠네가 우리 동네로 이사 오게 되면서부터니깐 벌써..얼마야? 와 - 10년이 넘었네. 10년 넘게 마주하고 살았는데 그렇게 보이는 게 당연할 수도 있다. 얘." 채현은 불연 떠오른 옛 기억 때문인지 표정이 아주 밝아졌다.
"야, 너희들 거기 안서?" 집 앞에서 동네 개구쟁이들에게 떠밀려 넘어졌던 채현은 우르르 도망가는 애들을 향해 소리지르는 목소리에 울음을 멈추었다. "많이 다쳤니? 어, 피 나네." 넘어지면서 까졌는지 어린 채현의 무릎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채현은 멀뚱하게 있다가 피가 난 다는 소리에 다시 크게 울기 시작했다. "왜, 그래 채현아." 대문으로 나오던 무현이 주저 않아 우는 채현에게로 가까이 갔다. "울지마, 채현아. 됐어, 오빠가 왔으니깐. 혼내줄게." 무현은 채현을 달랬다. "너야? 너가 우리 채현이 넘어뜨리고 울린 거야?" 무현은 채현의 울음소리가 다소 약해지자 그제서야 꼼짝 않고 우는 채현을 보고 있는 남자아이를 향해 화를 내며 쳐다봤다. "아니요. 난, 얘가 울어서 피난다고 한 것밖에 없어요." 아이는 무현의 화난 표정에 움찔했지만, 겁먹지 않고 똑똑하게 말했다. "오 - 빠. 쟤가 그런 게 아니야." 채현은 울음 딸꾹 지를 하며 말했다. 무현은 채현이 하는 말에 무섭게 쳐다보던 얼굴 표정을 바꾸더니 채현을 일으켜 세워 업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대 문 앞에서 잠시 동안을 서 있다가 대문 앞으로 내려놓은 계단을 밟고 올라가 까치발로 초인종을 눌렀다. "민혁아!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왔어. 바로 뒤 따라 들어오는 줄 알았는데.." 채현의 집 거실 쇼파에 앉아 있던 민혁의 부모가 일어나서 현관 앞에 서 있는 민혁을 데리고 거실 안쪽으로 왔다. "이 사장님. 우리 아들입니다. 같이 오다가, 요 녀석이 반 친구를 만나서, 잠깐 얘기하고 들어오라고 했더니만, 이제야 왔네요. 민혁이 인사 드려야지." "안녕하세요, 장민혁입니다." 민혁은 소파에 앉은 다른 어른들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민혁이가 4학년이라고 했나?" 채현의 아빠가 민혁아빠를 보며 물었다. "예, 그렇죠." "그럼 우리 무현이가 형이되고, 채현이가 동생이 되네. 앞으로 같은 동네에서 사이좋게 지내라." 채현의 아빠가 호탕하게 웃으며 기분 좋게 말했다. 무현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있던 채현은 민혁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아까는 몰라서 그랬어.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 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민혁에게 가까이 가서 손을 잡았다. 민혁은 반갑게 무현의 손을 잡고 웃는 동시에 무현의 뒤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채현에게도 환하게 웃어주었다.
현주는 채현의 알 수 없이 지어지는 미소를 보다가 저 앞에서 다가오는 민혁을 보자, 채현을 불렀다. "채현아, 민혁오빠 온다." 채현은 고개를 들었다. 민혁이 가방을 양 쪽 어깨로 메며 걸어오고 있었다. 현주와 채현은 의자에서 일어나 민혁이 오는 방향으로 가까이 갔다. "많이 기다리지는 않았지? 빠르게 정리하고 나온다고 나온 건데." "숙녀를 10분 이상 기다리게 하는 건 실례라구." 눈을 동그랗게 뜨며 채현은 민혁에게 말했다. "그 - 래? 숙년한테란 말이지..? 그럼 채현이 넌 말고. 현주한테는 미안하네.. 숙녀 분을 앞으로 한 5분 더 기다리게 해야 해서" 민혁은 채현을 향해 놀리듯 말했다. "뭐라구? 어휴.. 정말 저 능청스러움 못 말려. 근데 왜?" 채현이 아랫입술을 물며 민혁에게 눈 흘기며 물었다. "어, 친구 한 녀석 좀 동행시키려구. 같이 나오다가 잠깐 교수님께 제출해야 할 레포트가 있다고 해서 갔으니깐, 그 정도 시간이 걸리지 않을 까 싶다." "오빠, 친구 누구?" "한번도 못 봤겠네. 대학친구니깐. 우리 치대의 기대주이자, 킹카 중의 킹카다. 채현이 너 또 눈 휘둥그레지겠네, 어째." 궁금해하는 채현이를 향해 민혁이 한번 더 약 올리며 말했다. "치. 킹카는 무슨.. 언제는 자기가 최고의 킹카라고 했으면서." "물론 나도 킹카지. 다만 겨룰 수 없을 만큼 비등한 그런 킹카 친구라는 거지. 유유상종, 끼리끼리 몰라?" 민혁의 계속되는 장난기와 그에 대응하며 꼬리의 꼬리를 부는 채현의 말들이 현주를 사이에 두고 이어졌다. 현주는 채현과 민혁을 보고 있자니 마치 연인들의 사랑싸움처럼 보여지는 것 같아 그 느낌이 더 재밌어서 웃고 있었다. "민혁아." "왔냐." 현주의 옆으로 지나치며 말을 건넨 사람에게 민혁이 반가워했다. "너, 이 후환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제 나타나냐? " 민혁의 눈이 채현을 가리켰다. "교수님 말씀이 좀 길어지셨어." 민혁을 따라 채현을 보던 시선은 현주에게도 잠시 머물었다. "미안하면 밥 사라." "밥 사는 걸로 용서가 된다면 그렇게 하지, 뭐." "어 - 어, 그래 소개할게." 채현이 민혁을 향해 소개시키지 않고 뭐하냐는 눈치를 줬다. "여긴 내 동기 정민. 우린 민이라고 불러 이 집안 형제의 이름이 모두 외자야." 민혁이 정민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반가워요." 정민은 민혁을 보고 웃더니 현주와 채현을 향해 인사했다. "그리고.. 여긴." "어, 오빠. 내 소개는 내가 할게." 채현이 민혁의 말을 끊고, 직접 소개하겠다고 말했다. 현주는 그런 채현을 놀라 쳐다봤다. "전, 여기 장민혁 오빠와 으르렁대면서도 안 볼 수 없는 이웃 사촌이면서 무용과 신입생 이채현입니다.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요, 민이오빠. 민혁 오빠 말대로 킹카시네요, 정말." 채현의 시원시원하면서도 기분 좋은 억양의 소개에 놀란 건 인사를 받은 정민 뿐만이 아니라, 옆에 선 민혁과 현주에게도 의아한 사건과 부딪히게 된 것처럼 쇼킹하게 만들었다. "뭐가... 잘못 된 거야?" 채현은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시선이 돌아오자, 채현은 그게 더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아 - 민이 오빠한테 바로 오빠라는 호칭 써서 다들 이러는 거야? 어차피 그렇게 부르게 될 건데, 뭐하러 어색하게 첨, 나중 이런걸 나눠. 안 그래, 오빠?" 채현이 민혁을 봤다. "그렇지, 그렇긴.."민혁은 채현이 말뜻에 동감하듯 말했지만, 그래도 좀 얼떨떨하게 보는 건 마찬가지였다. "현주 너도 니가 직접 소개해."채현이 현주를 툭 건드렸다. ".. 안녕하세요. 무용과 1학년 김현주입니다." 현주는 인사를 하면서 어색해지는 기분에 그만 채현의 얼굴을 보고 말해버렸다. "김현주, 왜 날 보고 인사를 해.. 널 처음 보는 분은 바로 저기 정민 오빠라구." 채현은 엉뚱한 현주의 행동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현주를 향해 말했다. 현주는 채현의 그 말에 얼굴로 오르는 창피함의 열 오름 때문에 달리 어쩌지를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늘 이렇게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게 되면 들통나는 사교성 없는 성격 때문에 현주는 채현과 비교되어지는 기분으로 더 그 창피함이 커지는 기분이 들었다. "너처럼 낮 안 가리는 아가씨나 텀벙텀벙 말 잘 하는 거지. 웬만한 성격이 아니고서야 어디 처음 보는 사람 대하는 게 쉽다니?" 민혁의 말에 채현은 입을 내밀며 현주와 민혁을 번갈아 보았다. "그럼, 멤버 소집은 다 끝났으니깐 어디든 가자. 이 곳에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잖어."민혁이 두 어번 박수소리를 내며 집중시키고 먼저 걸어 나갔다. "가자, 현주야. 민이 오빠도 얼른 따라오세요." 채현이 현주의 팔을 잡으며 민혁을 따라 걸었고, 정민도 바로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민은 뒤에서 보이는 현주와 채현의 외형상 모습은 크게 달라 보이진 않지만, 성격만큼은 판이하게 다르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 전 ....입니다로 소개하던 현주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 보며 혼자 가볍게 웃었다.
"근데 어디로 가야 되냐?" 민혁은 차에 시동을 걸며 혼잣말처럼 작게 말했다. "오빠가 책임지고 오늘 재밌게 해준다고 했으니깐, 어디 보겠어." "아니, 10년이 넘게 그렇게 보고도 아직 볼게 남았니, 채현아?" "어 - 휴, 어 - 휴. 느물거리기는." 채현이 못 당하겠는지, 먼저 포기하고 얼굴을 돌리자, 민혁이 돌아보며 현주에게 질끈 눈을 감고 웃었다. 현주는 정말이지 민혁과 채현의 사이가 궁금했다. 마냥 편하게 지내는 동생 사이이기보다는 감정이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사이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현주는 창으로 고개 돌리고 있는 채현을 다시 쳐다봤다.
"야, 날씨는 점점 좋아져 나른해지고 사람 미치겠다, 정말. 이럴 땐 밖으로 맘 편하게 다니면서 학점 챙기는 준이가 제일 부럽네. 안 그래?" 차가 주차장을 출발해서 중앙 도서관 건물을 돌 때쯤 넋두리 섞인 말을 하는 민혁을 보고 정민은 조용히 웃기만 했다. "그나저나 준이 녀석은...어?" 민혁의 말이 끊김과 동시에 차가 멈췄다. "쟤가, 또 양반은 못 된다." 민혁의 말에 정민은 반가워하며 창문을 얼른 내렸고, 민혁도 그런 정민 쪽으로 몸을 재 빨리 옮겼다. "야, 정준." "준이야" 민혁과 정민이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채현도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운전석 쪽 창문을 유심히 보았다. "수업 끝나고 나가는 거야?" 민혁의 차 반대 방향으로 차를 멈춘 준은 창 밖으로 고개를 살짝 빼며 말했다. "수업 있니?" 정민이 물었다. "아니. 작업한 거 수정 보자고 해서 왔어." 준은 자연스럽게 보이는 차의 뒤 좌석으로 시선을 옮기며 대답했다. "동생들이야. 봄바람이나 쐬려구. 같이 가면 좋겠는데, 안되겠네?"민혁이 말했다. "진짜로 나 끼워줄 생각으로 하는 말이야, 아님 그냥 하는 소리야?" "같이 갈 수 있으면 가자, 준아." 정민이 준에게 물었다. "안돼, 지금은.. 저, 민혁이 녀석은 신경 안 쓰이는데, 형은 좀 걱정된다.. 적당히 바람 쐬고 들어와. 또 괜히 휴우증 남기는 일 생기지 않게. 노는 것도 놀던 사람이나 노는 거라구." 준이의 말에 민이 웃어 넘겼다. "어서, 가. 뒤에 차 나온다." 앞에서 차 나오는 게 보이자, 준은 민혁이 출발하게 했다. 민혁과 정민은 준에게 다시 한번 손짓을 하고 출발했다. 민혁의 차가 먼저 빠지기를 기다리던 준은 민혁의 차가 지나칠 때 조수석 정민의 뒤로 앉은 현주의 얼굴과 스쳤다. 준은 고개를 갸웃 거렷다. 순간적으로 아주 짧게 스친 현주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게 느껴졌던 그 기분에...
"오빠, 누구야?" 민혁의 차가 다시 출발하기가 무섭게 채현은 얼른 민혁의 의자 뒤로 바싹 다가앉으며 물었다. "민이 쌍둥이 동생! 민이가 2분 먼저 형이거든." 민혁은 재밌다고 웃었다. "우리학교 다녀?" "어. 사진과. 예술 하는 녀석처럼 폼 나지 않든?" "그렇구나... 사진과." 채현은 점점 작아지는 말소리로 몸을 뒤로하며 앉았다. 민혁은 룸 밀어로 채현의 모습을 살폈다. "현주야." "어 -어."현주는 갑작스레 놀라며 채현을 봤다. 학교 주차장에서 나와 강당 아래 잔디밭을 지나갈 때 현주는 입학식 때 무현으로부터 받은 꽃다발을 안고 사진 찍던 일들이 생각나서 민혁의 차가 잠시 멈춰서 준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다, 아니야."채현은 뭔가 하려던 말을 그만두고 다시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주는 채현이 왜 그러나 싶어 다시 물으려다가 그만 두었다.
"정말 인물 사진으로 정할 거야, 너?" "글세... 그러고 싶은데. 나온 거 보니깐. 막막하네." 준은 현상이 끝난 사진들을 이리저리 찾아 살펴봤다. "이번 주제를 꼭 인물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정하고 찍으니깐, 오히려 안 되는 거 같애." 성민은 '물'의 표현을 인물에서 찾아보려고 했던 준이의 의도를 처음엔 찬성했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절단되어지는 사진들을 보게되자, 준이 못지 않게 안타까웠다. "너, 기대 갖고 왔나본데, 이래서 어쩌냐." "내가 느낀 분위기가 안 나온걸 어쩌겠냐. 구상부터 다시 시작해야지." 준은 책상 위에 널려져 있는 사진들을 통으로 밀어 버리고 나서 책상에 앉았다. "나가자. 삼겹살에 소주나 한잔하게." 성민은 준의 어깨를 툭 밀쳐보았다. "이 시간에? 아니, 난 됐어. 생각 있으면 넌 그렇개 해. 어차피 구성 안은 내가 해야 할 일이잖아." "...너 혼자 두고 나가는 게 좀 걸리긴 하지만, 니말대로 구성안은 니 몫인데 옆에 내가 있다고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갈게, 난." 성민은 가방을 챙겨 나갔다. 성민이 나가자 준이는 바로 책상으로 쓸어졌다. 될 듯 될 듯 , 잡힐 듯 잡힐 듯 하다가도 뿌옇게 희미해져서 사라지고 마는 생각 속의 구상 때문에 준은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으 - 으.." 준은 소리를 치며 고개를 들고서 책상 위로 보이는 고무줄 하나를 집어, 머리를 하나로 가볍게 묶으며 의자에서 일어나 나갔다.
(연재) 투데이... 8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들 있어. 가방 챙겨서 내려올게."민혁은 치과 대 건물
본관 내 의자에서 채현과 현주가 앉아 기다리도록 하고 바쁘게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미안해.." 계단을 올라가는 민혁을 보던 채현이 혼잣말로 나직이 말했다.
채현의 말에 현주가 이상하다 싶어 옆으로 돌려다 봤다.
"오빠가.. 다시 나갔어."
채현의 말에 놀란 현주는 몸을 고쳐 앉으며 채현의 그 다음 말에 온 신경을 모았다.
"무현오빠..다시 나갔어, 현주야. 아무 말도 없이.. 그리곤 지금까지 소식도 없다. 티 안 내려고 하는데도 티가 나나봐. 민혁오빠 그 때문에 신경 쓰여서 오늘 이러는 걸 꺼야." 채현은 현주를 보며 힘없는 쓴웃음을 지었다.
"무현..오빠 언제 나간.. 건데?" 현주는 너무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2주 됐어. 아빠한테 붙잡히다 시피 들어온 후로 방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왔거든. 그러더니 나한테도 아무런 말없이 그 다음 다음날인가 나가선 지금까지야.."
현주는 갑자기 쿵하며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늘 이런 식으로 듣게 되는 무현오빠의 일들에 이번에는 또 어떤 일 때문일까 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달리 어떤 방법으로든 무현을 걱정하거나 곁에서 도움이 되어 주지도 못하는 자신에게 또 한번 슬퍼졌다. 다만 채현에게서 다시 오빠가 돌아왔다거나 아무 일 없이 어디서든 잘 있다는 말의 전화라도 있었다는 말을 하루라도 빨리 듣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뿐이 없었다.
"현주야."
채현은 현주의 초점 잃은 얼굴을 쳐다보며 불렀고, 현주는 어색하게 채현의 눈을 마주했다.
"괜히 너까지 불편하게 하나봐, 내가" 채현은 전혀 현주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아니야, 무슨..그런 생각마! 정, 미안하면 민혁오빠 앞에서나 속상한 티내지마. 그 일 때문에 신경 써 주는 것 같다면서.."
현주는 잠시 잠깐 이였지만, 혹여라도 채현이가 눈치라도 챘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닌 것 같아 마음을 놓으며 말을 돌렸다.
"그렇지? 그래야겠다, 정말." 채현의 표정이 조금 전과 조금 달라졌다.
"민혁오빠네 집하고 너희 집 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던데 언제부터야? "
"음... 오빠네 아빠가 운영하시는 스포츠 센터가 있거든? 그 건물을 우리 아빠회사에서 지으셨어. 그래서 두 분이 가까워지신 걸로 알아."
"그래? 그랬구나.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자식들까지 친해진다는 건 좀.. 민혁오빠랑 너, 사촌이나.. 친형제 같이 보일 때가 많거든."
"사촌? 그렇게 보이나..?" 채현은 민혁과의 사이가 사촌 같은 느낌이 든다는
현주의 말이 재밌었는지 다시 물었다.
"어."
"이웃 사촌. 뭐 그래서 그런가?" 채현이 웃었다.
"민혁오빠가 외아들이야. 우리도 친척들이 다 외국에 살고 있으니깐. 뭐 없다고 봐야지. 그러니깐 서로 의지하고 그런 건 있었을 거야. 가까이에서 산 게..민혁오빠네가 우리 동네로 이사 오게 되면서부터니깐 벌써..얼마야? 와 - 10년이 넘었네. 10년 넘게 마주하고 살았는데 그렇게 보이는 게 당연할 수도 있다. 얘." 채현은 불연 떠오른 옛 기억 때문인지 표정이 아주 밝아졌다.
"야, 너희들 거기 안서?"
집 앞에서 동네 개구쟁이들에게 떠밀려 넘어졌던 채현은 우르르 도망가는 애들을 향해 소리지르는 목소리에 울음을 멈추었다.
"많이 다쳤니? 어, 피 나네."
넘어지면서 까졌는지 어린 채현의 무릎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채현은 멀뚱하게 있다가 피가 난 다는 소리에 다시 크게 울기 시작했다.
"왜, 그래 채현아." 대문으로 나오던 무현이 주저 않아 우는 채현에게로 가까이
갔다.
"울지마, 채현아. 됐어, 오빠가 왔으니깐. 혼내줄게." 무현은 채현을 달랬다.
"너야? 너가 우리 채현이 넘어뜨리고 울린 거야?" 무현은 채현의 울음소리가 다소 약해지자 그제서야 꼼짝 않고 우는 채현을 보고 있는 남자아이를 향해 화를 내며 쳐다봤다.
"아니요. 난, 얘가 울어서 피난다고 한 것밖에 없어요." 아이는 무현의 화난 표정에 움찔했지만, 겁먹지 않고 똑똑하게 말했다.
"오 - 빠. 쟤가 그런 게 아니야." 채현은 울음 딸꾹 지를 하며 말했다.
무현은 채현이 하는 말에 무섭게 쳐다보던 얼굴 표정을 바꾸더니 채현을 일으켜 세워 업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대 문 앞에서 잠시 동안을 서 있다가 대문 앞으로 내려놓은 계단을 밟고 올라가 까치발로 초인종을 눌렀다.
"민혁아!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왔어. 바로 뒤 따라 들어오는 줄 알았는데.."
채현의 집 거실 쇼파에 앉아 있던 민혁의 부모가 일어나서 현관 앞에 서 있는 민혁을 데리고 거실 안쪽으로 왔다.
"이 사장님. 우리 아들입니다. 같이 오다가, 요 녀석이 반 친구를 만나서, 잠깐 얘기하고 들어오라고 했더니만, 이제야 왔네요. 민혁이 인사 드려야지."
"안녕하세요, 장민혁입니다." 민혁은 소파에 앉은 다른 어른들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민혁이가 4학년이라고 했나?" 채현의 아빠가 민혁아빠를 보며 물었다.
"예, 그렇죠."
"그럼 우리 무현이가 형이되고, 채현이가 동생이 되네. 앞으로 같은 동네에서 사이좋게 지내라." 채현의 아빠가 호탕하게 웃으며 기분 좋게 말했다.
무현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있던 채현은 민혁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아까는 몰라서 그랬어.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 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민혁에게 가까이 가서 손을 잡았다.
민혁은 반갑게 무현의 손을 잡고 웃는 동시에 무현의 뒤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채현에게도 환하게 웃어주었다.
현주는 채현의 알 수 없이 지어지는 미소를 보다가 저 앞에서 다가오는 민혁을 보자, 채현을 불렀다.
"채현아, 민혁오빠 온다."
채현은 고개를 들었다. 민혁이 가방을 양 쪽 어깨로 메며 걸어오고 있었다.
현주와 채현은 의자에서 일어나 민혁이 오는 방향으로 가까이 갔다.
"많이 기다리지는 않았지? 빠르게 정리하고 나온다고 나온 건데."
"숙녀를 10분 이상 기다리게 하는 건 실례라구." 눈을 동그랗게 뜨며 채현은 민혁에게 말했다.
"그 - 래? 숙년한테란 말이지..? 그럼 채현이 넌 말고. 현주한테는 미안하네.. 숙녀 분을 앞으로 한 5분 더 기다리게 해야 해서" 민혁은 채현을 향해 놀리듯 말했다.
"뭐라구? 어휴.. 정말 저 능청스러움 못 말려. 근데 왜?" 채현이 아랫입술을 물며 민혁에게 눈 흘기며 물었다.
"어, 친구 한 녀석 좀 동행시키려구. 같이 나오다가 잠깐 교수님께 제출해야 할 레포트가 있다고 해서 갔으니깐, 그 정도 시간이 걸리지 않을 까 싶다."
"오빠, 친구 누구?"
"한번도 못 봤겠네. 대학친구니깐. 우리 치대의 기대주이자, 킹카 중의 킹카다. 채현이 너 또 눈 휘둥그레지겠네, 어째." 궁금해하는 채현이를 향해 민혁이 한번 더 약 올리며 말했다.
"치. 킹카는 무슨.. 언제는 자기가 최고의 킹카라고 했으면서."
"물론 나도 킹카지. 다만 겨룰 수 없을 만큼 비등한 그런 킹카 친구라는 거지. 유유상종, 끼리끼리 몰라?"
민혁의 계속되는 장난기와 그에 대응하며 꼬리의 꼬리를 부는 채현의 말들이 현주를 사이에 두고 이어졌다.
현주는 채현과 민혁을 보고 있자니 마치 연인들의 사랑싸움처럼 보여지는 것 같아 그 느낌이 더 재밌어서 웃고 있었다.
"민혁아."
"왔냐."
현주의 옆으로 지나치며 말을 건넨 사람에게 민혁이 반가워했다.
"너, 이 후환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제 나타나냐? " 민혁의 눈이 채현을 가리켰다.
"교수님 말씀이 좀 길어지셨어." 민혁을 따라 채현을 보던 시선은 현주에게도 잠시 머물었다.
"미안하면 밥 사라."
"밥 사는 걸로 용서가 된다면 그렇게 하지, 뭐."
"어 - 어, 그래 소개할게." 채현이 민혁을 향해 소개시키지 않고 뭐하냐는 눈치를 줬다.
"여긴 내 동기 정민. 우린 민이라고 불러 이 집안 형제의 이름이 모두 외자야." 민혁이 정민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반가워요." 정민은 민혁을 보고 웃더니 현주와 채현을 향해 인사했다.
"그리고.. 여긴."
"어, 오빠. 내 소개는 내가 할게."
채현이 민혁의 말을 끊고, 직접 소개하겠다고 말했다. 현주는 그런 채현을 놀라 쳐다봤다.
"전, 여기 장민혁 오빠와 으르렁대면서도 안 볼 수 없는 이웃 사촌이면서 무용과 신입생 이채현입니다.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요, 민이오빠. 민혁 오빠 말대로
킹카시네요, 정말."
채현의 시원시원하면서도 기분 좋은 억양의 소개에 놀란 건 인사를 받은 정민 뿐만이 아니라, 옆에 선 민혁과 현주에게도 의아한 사건과 부딪히게 된 것처럼 쇼킹하게 만들었다.
"뭐가... 잘못 된 거야?" 채현은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시선이 돌아오자, 채현은 그게 더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아 - 민이 오빠한테 바로 오빠라는 호칭 써서 다들 이러는 거야? 어차피 그렇게 부르게 될 건데, 뭐하러 어색하게 첨, 나중 이런걸 나눠. 안 그래, 오빠?"
채현이 민혁을 봤다.
"그렇지, 그렇긴.."민혁은 채현이 말뜻에 동감하듯 말했지만, 그래도 좀 얼떨떨하게 보는 건 마찬가지였다.
"현주 너도 니가 직접 소개해."채현이 현주를 툭 건드렸다.
".. 안녕하세요. 무용과 1학년 김현주입니다." 현주는 인사를 하면서 어색해지는 기분에 그만 채현의 얼굴을 보고 말해버렸다.
"김현주, 왜 날 보고 인사를 해.. 널 처음 보는 분은 바로 저기 정민 오빠라구." 채현은 엉뚱한 현주의 행동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현주를 향해 말했다.
현주는 채현의 그 말에 얼굴로 오르는 창피함의 열 오름 때문에 달리 어쩌지를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늘 이렇게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게 되면 들통나는 사교성 없는 성격 때문에 현주는 채현과 비교되어지는 기분으로 더 그 창피함이 커지는 기분이 들었다.
"너처럼 낮 안 가리는 아가씨나 텀벙텀벙 말 잘 하는 거지. 웬만한 성격이 아니고서야 어디 처음 보는 사람 대하는 게 쉽다니?"
민혁의 말에 채현은 입을 내밀며 현주와 민혁을 번갈아 보았다.
"그럼, 멤버 소집은 다 끝났으니깐 어디든 가자. 이 곳에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잖어."민혁이 두 어번 박수소리를 내며 집중시키고 먼저 걸어 나갔다.
"가자, 현주야. 민이 오빠도 얼른 따라오세요." 채현이 현주의 팔을 잡으며 민혁을 따라 걸었고, 정민도 바로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민은 뒤에서 보이는 현주와 채현의 외형상 모습은 크게 달라 보이진 않지만, 성격만큼은 판이하게 다르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 전 ....입니다로 소개하던 현주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 보며 혼자 가볍게 웃었다.
"근데 어디로 가야 되냐?"
민혁은 차에 시동을 걸며 혼잣말처럼 작게 말했다.
"오빠가 책임지고 오늘 재밌게 해준다고 했으니깐, 어디 보겠어."
"아니, 10년이 넘게 그렇게 보고도 아직 볼게 남았니, 채현아?"
"어 - 휴, 어 - 휴. 느물거리기는."
채현이 못 당하겠는지, 먼저 포기하고 얼굴을 돌리자, 민혁이 돌아보며 현주에게 질끈 눈을 감고 웃었다. 현주는 정말이지 민혁과 채현의 사이가 궁금했다. 마냥 편하게 지내는 동생 사이이기보다는 감정이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사이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현주는 창으로 고개 돌리고 있는 채현을 다시 쳐다봤다.
"야, 날씨는 점점 좋아져 나른해지고 사람 미치겠다, 정말. 이럴 땐 밖으로 맘 편하게 다니면서 학점 챙기는 준이가 제일 부럽네. 안 그래?"
차가 주차장을 출발해서 중앙 도서관 건물을 돌 때쯤 넋두리 섞인 말을 하는 민혁을 보고 정민은 조용히 웃기만 했다.
"그나저나 준이 녀석은...어?" 민혁의 말이 끊김과 동시에 차가 멈췄다.
"쟤가, 또 양반은 못 된다."
민혁의 말에 정민은 반가워하며 창문을 얼른 내렸고, 민혁도 그런 정민 쪽으로 몸을 재 빨리 옮겼다.
"야, 정준." "준이야"
민혁과 정민이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채현도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운전석 쪽 창문을 유심히 보았다.
"수업 끝나고 나가는 거야?"
민혁의 차 반대 방향으로 차를 멈춘 준은 창 밖으로 고개를 살짝 빼며 말했다.
"수업 있니?" 정민이 물었다.
"아니. 작업한 거 수정 보자고 해서 왔어."
준은 자연스럽게 보이는 차의 뒤 좌석으로 시선을 옮기며 대답했다.
"동생들이야. 봄바람이나 쐬려구. 같이 가면 좋겠는데, 안되겠네?"민혁이 말했다.
"진짜로 나 끼워줄 생각으로 하는 말이야, 아님 그냥 하는 소리야?"
"같이 갈 수 있으면 가자, 준아." 정민이 준에게 물었다.
"안돼, 지금은.. 저, 민혁이 녀석은 신경 안 쓰이는데, 형은 좀 걱정된다.. 적당히 바람 쐬고 들어와. 또 괜히 휴우증 남기는 일 생기지 않게. 노는 것도 놀던 사람이나 노는 거라구."
준이의 말에 민이 웃어 넘겼다.
"어서, 가. 뒤에 차 나온다." 앞에서 차 나오는 게 보이자, 준은 민혁이 출발하게 했다.
민혁과 정민은 준에게 다시 한번 손짓을 하고 출발했다.
민혁의 차가 먼저 빠지기를 기다리던 준은 민혁의 차가 지나칠 때 조수석 정민의 뒤로 앉은 현주의 얼굴과 스쳤다. 준은 고개를 갸웃 거렷다. 순간적으로 아주 짧게 스친 현주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게 느껴졌던 그 기분에...
"오빠, 누구야?" 민혁의 차가 다시 출발하기가 무섭게 채현은 얼른 민혁의 의자 뒤로 바싹 다가앉으며 물었다.
"민이 쌍둥이 동생! 민이가 2분 먼저 형이거든."
민혁은 재밌다고 웃었다.
"우리학교 다녀?"
"어. 사진과. 예술 하는 녀석처럼 폼 나지 않든?"
"그렇구나... 사진과." 채현은 점점 작아지는 말소리로 몸을 뒤로하며 앉았다.
민혁은 룸 밀어로 채현의 모습을 살폈다.
"현주야."
"어 -어."현주는 갑작스레 놀라며 채현을 봤다.
학교 주차장에서 나와 강당 아래 잔디밭을 지나갈 때 현주는 입학식 때 무현으로부터 받은 꽃다발을 안고 사진 찍던 일들이 생각나서 민혁의 차가 잠시 멈춰서 준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다, 아니야."채현은 뭔가 하려던 말을 그만두고 다시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주는 채현이 왜 그러나 싶어 다시 물으려다가 그만 두었다.
"정말 인물 사진으로 정할 거야, 너?"
"글세... 그러고 싶은데. 나온 거 보니깐. 막막하네."
준은 현상이 끝난 사진들을 이리저리 찾아 살펴봤다.
"이번 주제를 꼭 인물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정하고 찍으니깐, 오히려 안 되는 거 같애."
성민은 '물'의 표현을 인물에서 찾아보려고 했던 준이의 의도를 처음엔 찬성했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절단되어지는 사진들을 보게되자, 준이 못지 않게 안타까웠다.
"너, 기대 갖고 왔나본데, 이래서 어쩌냐."
"내가 느낀 분위기가 안 나온걸 어쩌겠냐. 구상부터 다시 시작해야지."
준은 책상 위에 널려져 있는 사진들을 통으로 밀어 버리고 나서 책상에 앉았다.
"나가자. 삼겹살에 소주나 한잔하게." 성민은 준의 어깨를 툭 밀쳐보았다.
"이 시간에? 아니, 난 됐어. 생각 있으면 넌 그렇개 해. 어차피 구성 안은 내가 해야 할 일이잖아."
"...너 혼자 두고 나가는 게 좀 걸리긴 하지만, 니말대로 구성안은 니 몫인데 옆에 내가 있다고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갈게, 난." 성민은 가방을 챙겨 나갔다.
성민이 나가자 준이는 바로 책상으로 쓸어졌다. 될 듯 될 듯 , 잡힐 듯 잡힐 듯 하다가도 뿌옇게 희미해져서 사라지고 마는 생각 속의 구상 때문에 준은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으 - 으.." 준은 소리를 치며 고개를 들고서 책상 위로 보이는 고무줄 하나를 집어, 머리를 하나로 가볍게 묶으며 의자에서 일어나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