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동쪽 대륙에 자리 잡고 있는 레드아이라는 왕국에는 못된 마녀로부터 저주에 걸린 왕자님이 살고 계신단다.. 왕자님의 곁에는 그를 믿고 따르는 신하들이 아주 많았지. 그중엔 왕자님의 저주를 풀기 위해 밤 12시가 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서쪽대륙으로 넘어와 왕자님의 신붓감을 찾는 아주 괴상한 모습을 한 남자가 있었단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흔히 붉은 신사라고 부르곤 했었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붉은 옷으로 치장을 하고 행여나 누군가가 자신의 발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날까 염려한 나머지 하늘 위를 자유로운 새처럼 사뿐사뿐 걸어 다니며 자신이 모시는 왕자님의 신붓감을 찾아 다녔단다... 그를 보고 싶다고?... 그렇다면.. 오늘밤 잠들지 말고 시계 초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렴.. 밤 12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누군가가 너의 이름을 부를 것이란다.
로이안대륙
때는 하나였던 로이안 대륙이 둘로 갈라져 동쪽과 서쪽으로 구분이 되던 시대였다.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갈라졌는지 알려진 바는 없었으나 서쪽 대륙에서는 이를 두고 무수한 추측들이 난무했다. 떠들기 좋아하는 어떤 이는 앞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더 갈라질 것 이라고 주장했고 또 어떤 종교적 사상이 강한 이는 신이 무지한 인간들을 벌하기 위해 갈라놓은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허나 몇몇의 의견이었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어떤 추측과 주장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거나 손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다만 오래 세월 전부터 입과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동쪽대륙의 웅장한 전설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소문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대하고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었기에 사람들은 감히 전설이라는 말을 붙여 동경하는 마음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전설에 대해서 잠시 몇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다음과 같았다. 하늘엔 붉은 달과 푸른 태양이 낮과 밤을 나누어 솜털처럼 가벼운 구름 위에 떠있고 땅에선 네발 달린 짐승들이 차가운 동굴이나 풀숲이 아닌 인간처럼 굴뚝이 있는 집을 짓고 기름진 빵과 고소한 우유를 먹고살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영리한 머리와 희한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며 또 간간히 홍해라고 하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신기하게도 낮에는 분홍빛을, 밤에는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으며 한 번도 보지 못한 신비한 능력과 괴상한 모습을 한 다양한 종족들이 각자의 무리를 이루며 살고 있다는 아주 기묘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야기였다. 이는 이를 실제로 접해보지 못했던 서쪽 대륙의 사람들에겐 놀라움과 논쟁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서쪽대륙의 사람들은 이렇듯 베일에 싸여 있는 동쪽대륙에 대해 막연한 환상과 끝없는 동경에 젖어 있었으며 또한 이제 이 소설에서 전개될 이야기는 서쪽대륙에 자리 잡고 있는 애르나 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동쪽대륙의 또 하나의 신비한 전설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episode.1 (붉은신사)
어두운 밤이 분주했던 서쪽 대륙의 조용한 마을을 잠재우고 어느 이름 없는 거렁뱅이의 낡은 시계의 바늘이 서둘러 12시를 향할 때까지 내 눈은 초롱초롱 하기만 하였다. 낮부터 마을 이 곳 저곳을 헤집고 다녔음에도 여리기만 한 7살, 이 작은 몸뚱이는 어느 한군데 피로에 지친 모습이라곤 찾아보기 힘들만큼 생기로 가득했다.. 방 한구석에 고이 자리 잡은 좁은 침대를 이리저리 뒹굴 거리다 애꿎은 곰 인형 토마스를 던져도 보고 대답 없을 물음인줄 알면서도 너스레 섞인 질문을 되풀이 해보기도 하며 슬며시 시간이 데려올 꿈나라를 기다려 보지만 내 눈꺼풀은 솜털처럼 가볍기만 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마을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었기에.. 서둘러 잠이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나였다... 건넛방 할배는 하나밖에 없는 손녀의 애타는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굳게 닫힌 방문 밖으로 둔탁한 기계 소리를 내며 세상을 등진 듯, 일에만 열중해 계신다. 할배가 두드리는 망치소리는 종종 내 작은 심장소리와 맞물려 절묘하게 박자를 맞추는 듯 했고 내 귀로 하여금 나를 유혹하는 작은 속삭임처럼 들리기에 충분했다. 나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 속삭임에 반응하듯 묘한 감정에 이끌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을 한 걸음씩 살포시 내딛으며 조심스럽게 할배의 방까지 향했다. 할배의 방문 앞에 들어선 나는.. 짧게 숨을 한번 내뱉은 뒤 조용히 방문을 열고 할배의 등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할배를 불러보았다. 처음에는 연장소리가 내는 쇳소리에 내 목소리가 묻혀버린 듯 할배는 쉽사리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지 않았고 몇 초간의 짧은 적막의 흐름을 틈타 이번엔 조금은 야살스러운 목소리로 두 번, 세 번 할배를 불러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하나밖에 없는 손녀의 투정어린 부름이 들려왔을까.. 할배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내게 환한 미소를 보내기 시작했다. 나는 입안 한가득.. 헛바람을 물곤 어느 이름 모를 바다에 사는 물고기 흉내를 내며 할배를 향해 돌진했다..
“ 할배~ 나 잠이 오질 않아 ”
배부른 소녀의 하찮은 투정이었다.. 나는 최대한 몸을 비비꼬며 할배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곤 곰처럼 불룩 튀어나온 할배의 배를 내 조막만한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낮에 마을 이 곳 저곳을 누비고 다녔던 이야기를 마치 용사의 무용담인양 늘어놓기 시작했다..
빵집을 하고 있는 제라드 아저씨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가발을 몰래 훔쳐다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빵 굽는 화로에 던져버린 이야기와 마을 최고의 새침때기 미인이었던 라미야드의 얼굴에 호수에서 산란중인 개구리를 잡아다 올려놓은 일, 옆집 술주정뱅이 포비 아저씨의 술병 속에 한 움큼 소금을 넣어버린 이야기를 마치 자랑이라도 되는 듯, 입에 침이 마르도록 쉬지 않고 쏟아냈다.. 할배는 미처 내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큼지막한 손으로 자신의 무릎을 수차례 치며 어색한 함지박한 웃음을 내질렀다...
“ 허허허~ 우리 귀여운 손녀딸 애니~ 오늘도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장난을 친
모양이구나?.. 익살꾸러기 같으니라고.. “
“ 헤헤~ 할배, 나 대단하지? 할배도 나한테 잘 보이면 다음에 끼워줄 용의가 있어.. 요즘
뚱보 마리가 내 말을 잘 안 듣고 있어서 벼르고 있거든... “
“ 허허허~ 글쎄 나도 끼고 싶지만... 장난을 치고 도망가기엔 이 할아버지는 살이 너무
많이 쪘는걸.~ “
할배는 낮에 내가 저지른 장난들을 꾸지람하려는 듯 살짝 미간의 주름을 지으며 듬직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금세 얼굴을 타고 내려와 살며시 내 볼을 꼬집었다. 많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발그레 닳아 볼 때문이었을까.. 금세 눈물이 눈가를 감돌았다..
“ 힝~ 할배 아파~.... 나 잠이 오질 않는단 말이야~”
칭얼대는 내 목소리에 흠칫 놀란 듯 할배는 이내 내 붉게 닳아 오른 볼에서 살며시 손을 떼고 걱정스런 말투로 내게 말했다..
“ 흠~ 착한 아이는 12시전에 잠을 자는 거란다”
“ 싫어... 난 그리 착한 아이가 아니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다고!! ”
할배는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평소대로라면 12시 이전에 벌써 꿈나라로 향해 있어야할 착한 손녀였기에 낯선 투정이 어리둥절하고 당황스러운 모양 이었다 ..그리고 못내 잠시 고민에 빠지는 듯, 내 초롱초롱한 눈빛을 주시하고서는 작은 목소리로 슬그머니 내 귓가에 다가와 속삭이기 시작했다.
“흠~ 우리 귀여운 꼬마아가씨가 왜 12시가 다 되도록 꿈나라로 가질 못했을까? 꿈나라로 가는 마차를 놓치셨나요?“
왠지 놀리는 듯한, 말투였다.. 나에게 있어 지금의 이 답답한 고민은 할배에겐 밤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춤사위쯤 되 보이는 듯 했다. 나는 괜스레 심통이 났고.. 내 커다란 눈은 금세 작디작은 실눈이 되어버렸다.. 불만 가득한 감정을 고스란히 표정에 그려낸 나는..여가 없이 얼굴이 용광로처럼 변했고 앵두처럼 조그만 한 내 입은 고양이에게 어미젖을 빼앗긴 새끼 강아지처럼 끙끙 앓는 소리와 함께 씩씩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할배는 또 한 번 호탕한 웃음을 내질렀고 한참을 웃다가 나를 놀린 것이 미안했는지.. 뜬금없이 옛날이야기를 해 주겠다 권하기 시작했다.. 할배가 해주는 옛날이야기라고 해봤자.. 모두 할배가 지어낸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나는 일찍이 5살 때부터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마땅히 할 것도.. 볼 것도 없었던 나는 잠시 눈을 치켜뜨며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하는 수 없이 할배의 권유를 받아 들였다.
“ 좋아.. 이번 한번만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리다... ”
나는 왕이 신하를 대하 듯 거만한 태도로 할배의 배를 쓰다듬었다.
“자~ 그럼 우리 귀여운 손녀딸 애니윈스터 양을 위해서.. 오늘은 할아버지가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이야기 해주어야겠구나.~”
뜻밖이었다.. 분명 할배는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라고 말했다...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대해선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예전에 잠시 100년 전 마을에 나타나 마을 사람들을 개구리로 만든 푸른 마녀의 저주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지만 그 외에는 전설다운 전설을 들어 본적이 내겐 분명히 없었다.
“ 할배? 우리 마을에도 전설 같은 것이 있어?”
나는 속으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게 없었던 것이 할배는 유난히 내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한번 숲에는 어린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요정이 산다는 말만 믿고 친구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갔다가 길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
“응~ 그럼 있다마다.. 이 서쪽대륙에, 특히 우리 애르나 마을에만 전해져 내려오는 아주
오래된 전설이지...100년 전 마을에 푸른 마녀가 나타나기 이전의 이야기란다..”
왠지 강한 믿음은 가지 않았지만 일단 들어나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할배의 거창한 옛날이야기는 “옛날 옛적에”로부터 시작되었다..
“ 옛날 우리 애르나 마을엔 밤 12시만 되면 붉은 옷을 입은 신사가 나타나곤 했단다.. 사람 들은 흔히 그를 가리켜 붉은 신사라고 통칭해서 부르곤 했단다.. ”
“ 붉은 신사.... ? ”
속으론 할배가 이번엔 또 무슨 거짓말을 할까 하며 밀려오는 코웃음 억지로 억누르곤 최대한 심각한 표정으로 할배의 이야기에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할배는 곧 붉은 신사의 생김새에 대해 비교적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는데....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머리엔 붉은 신사 모자를 쓰고 옷은 붉은 정장을 입었으며 그의 피부는 광채 나는 진한 회색빛을 띄었고.. 보통 사람과는 달리 코가 아주 길어서 마치 텃밭에서 기르는 오이나 가지와 같았고 또 그의 눈은 동공이 없었으며 그저 계란의 노란 자위처럼 아주 노랗기만 하였고 희한하게도 입이 없음에도 그의 목소리는 새벽에 우는 수탉의 울음처럼 깊고 쩌렁쩌렁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키가 굉장히 커서 발끝에서 그의 얼굴을 훑어보는 것 또한 보통사람에겐 굉장히 목이 아픈 일이었다고 말했다.. 왠지 지금까지 들어온 옛날이야기와는 달리 확실히 치밀하고 색다른 전개였다.. 붉은 신사? 그리고 난 난생 처음 듣는 그 말이 순간 가슴 한편을 깊게 파고드는 것 같았고 요동치듯 심장에 메아리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루할 것이라 예상했던 나의 판단과는 달리, 나는 금세 귀를 쫑긋 세우곤 할배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 붉은 신사는 밤마다 마을 돌아다니며 12시가 넘어도 잠들지 않은 어린 소녀들을 찾아다 니곤 했지.. 마을 곳곳을 누비며 아직 잠들지 않은 소녀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 이곤 했단다.. ”
할배는 작은 손동작 등을 섞어가며 이야기가 아주 극적으로 꾸며지기를 원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노력에 응답하듯 약간은 움츠려드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할배의 이야기 중간 중간에 질문을 던지기도 하였다.
“ 마을의 소녀들을?. 왜요? 무슨 이유로 붉은 신사는 소녀들의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인
거야? “
“ 그건 말이다.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단다.. 애니야.. ”
할배는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내게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허나 그 이유는 정말 난감할 정도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할배는 붉은 신사가 밤 12시가 넘도록 마을에서 잠이 들지 않은 소녀를 찾아내 자신이 살고 있는 동쪽대륙으로 데려간다고 말했다.. 언젠가 동쪽대륙은 버려진 땅이며 악마들의 낙원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어렴풋했다... 그래서였을까 왠지.. 무서운 감정이 폭풍우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할배는 설상가상 낮은 음색으로 내 온몸을 서서히 차갑게 엄습했고 나의 두 손과 두발을 거침없이 굳어지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기껏 할배의 옛날이야기라고 해봤자..누구나 흔히들 엄마나 아빠가 아이가 옆에서 잠잘 때 해주는 그저 그런 이야기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기에..오늘의 이 색다른 이야기는 나를 서서히 흥분시키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어 보였다.. 할배는 내가 조금은 무서워 한다는 것을 눈치를 챘으면서도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 붉은 신사의 발걸음은 언제나 조용하고 차가웠지...텅 빈 마을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쉽사리 그 고요함을 놓지 않았단다....왜냐고?... 왜냐하면 마을 사람들은 오로지 붉은 신사로부터 소녀들을 지켜야 한다는 확고한 일념이 있었거든... 지키고 싶어 했던 것이야.
자신의 딸과 또 손녀들을 말이지.... “
“ 할배~ 그럼 우리 마을에 붉은 신사에게 잡혀 동쪽 대륙으로 간 소녀가 있어? ”
“글쎄...?”
글쎄??? 확실히 석연치 않은 대답이었다..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나로썬 아리송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초조한 마음에 할배를 붙잡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할배~ 빨리 대답해주세요~ 붉은 신사에게 잡혀간 소녀가 있었어? 응?”
“ 애니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렴.”
나는 소녀들을 잡아간다는 말에 단지 옛날이야기 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금방이라도 붉은 신사가 문을 열고 나타나서 나를 갑자기 어디론가 잡아갈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등 뒤에선 오싹함 마저 느껴지고 내 심장소리는 보통 때보다 더 빨리 뛰고 있음을.. 조금씩 느끼려는 찰나에 할배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 이야기를 계속하기 시작했다.
“ 아뿔싸!.. 아뿔싸.... 마을엔 아직 잠이 들지 않은 소녀가 한명 있었단다.~!.. 저녁부터 인형 을 가지고 놀다가!!.. 그만.... 밤 12시가 되어버린걸 몰랐던 것이지.. 소녀는 인형을 이리 저리 가지고 놀며 마을이 떠나가라 웃음소리를 내뱉었단다... 꺄르르~ 꺄르르~...”
“ 밤 ...... 12시가 넘도록 인형을 가지고 논거야? 할배?!”
“ 아주 정신없이 시간을 망각한 체 인형 놀이에 빠져있었단다. ”
마치 나를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였을까.. 할배의 이야기는 이젠 생동감마저 느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럴수록 내 공포감은 빠른 속도로 극으로 치닿고 있었다.
“ 그...그래서 할배?..”
어느 덧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 소녀의 커다란 웃음소리는 붉은 신사의 청각을 자극시키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었단다..”
“ 붉은 신사가 그 소녀의 웃음소리를 들은 거야?! ”
할배의 말에 나도 모르게 두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 7살 어린 나이에 그 이야기를 듣는 것 마저 감당이 되지 않아서였을까.. 한 번도 본적 없는 붉은 신사가 내 눈앞에 서있는 것만 같았고, 이젠 할배의 말보다 콩닥콩닥 뛰는 내 심장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할배는 야속하게도 이야기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 붉은 신사는 소녀의 웃음소리를 미친 듯이 쫓기 시작했단다. 한 마리의 매서운 독수리가
먹이를 쫓는 것처럼 그의 움직임은 마치 새가 된 듯 빠르고 가벼웠지.. 또 혹자의 말로는
달빛에 비친 붉은 신사의...우아한 자태를 목격한 이들은 한동안 넋을 잃고 붉은 신사를 찾아 헤매 이기도 했다고 하더구나..”
“ 할배... 붉은 신사는 아름답고 신비한 사람이에요?... ”
“ 아마도?....신비한 매력을 가진 사람이겠지. 아니 매력을 넘어서 마력을 가진 남자랄까? ”
할배는 누군가의 목격담을 이야기에 섞어가며.. 붉은 신사의 움직임을 열심히 묘사하는 듯 했다. 그리고 한때 빵집을 하고 있는 제라드 아저씨의 할배의, 할배가 우연히 달빛에 비친 붉은 신사의 모습을 보게 된 후 생업을 포기하고 몇 년간을 이곳저곳을 방황하며 그를 찾아 다녔다고 말했다.
“ 마을 사람들은 그때 제라드 집안의 빵집이 영영 사라지는 줄 알았다고 하더구나.. ”
“ 으앙~ 할배~ 어떻게 된 거야~ 그 소녀는 붉은 신사에게 잡히고 만 거야? ”
그랬다.. 정작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붉은 신사의 목격담이나 그의 신비한 모습이 아닌 그에게 잡혀간 마을의 소녀가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 애니야.. 어떻게 되었을까?.....”
할배는 뜸을 들이고 있었다.. 쉽사리 이야기 해줘서는 안 될 이야기인지 아니면 더 이상 이야기를 지어낼 자신이 없었던 건지.. 그것도 아니면 나의 애타는 모습을 속으로 즐기고 있었는지.. 어느 쪽이든 나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 빨리 말해죠 할배~ 결국 그 소녀는 붉은 신사에게 끌려가고 만 거야?”
할배는 더 이상 나의 애타는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었는지.. 주춤거렸던 이야기의 전개를
다시 추슬러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이야기를 중간 생략이라도 하듯 내 궁금증의 해답을 주기에 이르렀다.
“ 애니야.. 붉은 신사는 소녀를 데려가지 않았단다..”
“ 엥?!... 하지만... 분명히 잡아간다고 했잖아요?. ”
의외에 결말이었다.. 당연히 잡혀갔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을까? 아니면 결말 외에 또 다른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것이었을까? 슬며시 의문에 찬 눈빛으로 할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할배의 표정은 간단명료했다. 막연히 나도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반전일까?.. 아니면 그 뒤의 이야기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을까?.. 할배는 그 뒤로도 나의 질문에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할배의 모습을 바라보며 몇 가지 의문점 품게 되었다.. 붉은 신사는 왜 밤늦게 까지 잠들지 않는 소녀들을 동쪽대륙으로 데려가는지 또 데려가서는 소녀들을 어떻게 하는지.. 밀려오는 궁금증에 나는 더욱더 잠이 오질 않았다. 한 번 더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참지 못한 채 할배에게 다시 묻기 시작했다.
“할배.. 붉은 신사는 왜 소녀들을 동쪽 대륙으로 잡아가려고 했어?..”
사소한 것 하나에도 민감한 나였기에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오늘밤을 편안하게 잠들지 못할 것이라 생각됐다. 확실한 대답을 듣지 않고는 절대 잠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이며 할배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 애니야.. 정말 알아야 하겠니?...”
이건 무슨 소리일까?.. “정말 알아야 하겠니?” 정말 알고 싶니 라는 말이 아니라.. 애써 알지 않아도 되는 것을 무리해서 들어야 하겠냐는 말투였다. 반발심이었을까? 아니면.. 궁금증에 목말라서였을까.. 나는 당당히 “응” 이라고 대답했다..
“ 붉은 신사는 소녀를 잡아다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왕자님께 신부로 바친단다..”
“ 뭐? 정말?! 그럼 왕자님의 신부가 되는 거야? ”
“ 그렇단다. 저주에 걸린 왕자를 구하게 되는 것이지. ”
할배는 붉은 신사가 저주에 걸린 왕자를 구하기 위해 이곳 서쪽대륙으로 건너와 밤 12시가 되면 왕자님의 신부가 될 소녀를 찾아 동쪽대륙으로 데려 간다고 말했다.
“ 왕자님의 신부?.. ”
일반적인 상식으로 봤을 때 아무리 저주에 걸려있다고 하기로서니 왕자님의 신부가 된다는 건 여느 소녀들에겐 달콤한 꿈과 같은 이야기였다. 그러하였기에 마을이 붉은 신사로부터 소녀를 지키려고 했다는 할배의 말은 도통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왜 소녀를 지키려했을까? 왕자님의 신부가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영광스러운 일일 텐데.. 알면 알아갈수록 내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혹시 왕자가 추남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아주 고약한 성격을 가지고 있거나.... 나는 속으로 여러 가지 이유들을 만들어 궁금증에 끼워 넣으며 답을 찾으려고 애썼다. 허나 도무지 내 모자란 머리로는 그 답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 할배... 왕자님의 신부가 된다는 건 행복한 것 아냐? ”
“ 사랑하는 손녀딸 애니야.... 그건 절대 그렇지가 않단다.. 진정 행복할 수가 없었어...”
역시 추남에 고약한 성격을 가진 무늬만 왕자인 것인가? ...나 스스로 내 추측들이 맞는 것이 라고 단정 지을 때쯤... 할배는 내게 뜻밖의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 모든 것은 그렇게 누군가가 정해놓은 순리대로만 돌아가지는 않는단다.. 붉은 신사는...
왕자에게 소녀를 바치지만.. 저주에 걸려있는 왕자는 그 소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소녀를 그 자리에서 잡아먹는단다....”
순간 치명적인 무엇인가가 내 뇌리를 번쩍이며 스쳐지나갔다..
“꺄악~~!!!!!.....꺄악!!!! ”
나는 왕자님이 소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잡아먹는 말에 가차 없이 경악하고 또 경악했다. 여러 갈래로 찢어질듯 한 내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으며 내 공포는 마침내 극에 달했고 내 눈망울은 세상에 처음 태어나 눈을 뜬 망아지의 눈처럼 두려움으로 사로잡혀..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 왕자님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이랄까? 그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으앙~ 할배.. 그런 거 싫어.. 으앙”
"이런~ 이런~ 내 사랑하는 손녀딸 애니윈스터~ 울지 말거라..“
“ 으앙~ 그게 뭐야~ 신붓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잡아먹는다니 나쁜 사람이잖아~
왕자님이 아니라 괴물이잖아!!! “
그 순간 할배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원망스러워 보였다. 차라리 듣지 않았으며.. 언젠가는 잠이 들었을 텐데 오늘밤은 편안히 잠을 자기는 틀린 것 같았다..
“ 우리 애니가 많이 놀란 모양이지? ”
할배는 나를 기만하고 있었다. 분명 내가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계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몰라~ 할배.. 무섭단 말이야 그런 이야기는 ..”
내 얼굴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한가득 이었다.. 아무리 닦아내도 다시금 눈물은 잔혹하게 내 뺨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 자~ 이제 옛날이야기도 해줬으니 .. 방에 들어가서 자야지? ”
할배는 나를 극도의 흥분상태로 몰아넣고는 이제 벼랑 끝에서 밀치려 하고 있었다.. 문득 차라리 절벽에서 잠을 자라고 하는 편이 더 배려있는 말처럼 생각되었다.
“싫어~! 할배! 이제 어떻게 자라고 .. 무서워서 못자~ 책임져!”
“ 저런~ 이거 큰일이구나. 우리 애니가 이 할아버지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더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지?.“
할배는 정말 내가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얘기 한 것처럼 보였다. 사람은 후회할 짓을 하지 말아야하고 또 지나간 일에 후회를 느껴서도 안 된다던 할배의 말이 무참히 깨지는 듯 했다. 오늘 들었던 이 이야기는 한 동안 나를 내방에서 혼자 자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섬뜩한 예감이 들어왔다.. 7살이나 되었는데 무서워서 할배 옆에서 잔다고 하면 할배는 나를 놀리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밤늦게 조용한 내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 할배의 이야기를 회상하며 내방 창문과 낡은 나무 바닥에 귀를 기울일 나를 생각하니 ..참으로 아찔하다.. 놀림을 받더라도.. 오늘 밤은 편안하게 잠을 자고 싶었다..
“ 나 오늘 할배 옆에서 잘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뭐라고 하지마.~!”
“ 음~ 7살이나 되었으면서~ ..귀여운 숙녀님이 다 늙은 할배 옆에서 잔다고 하면 ..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 텐데?....“
역시나.... 그 말이 나올 줄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문득 할배는 겉으로 보이는 푸근하고 자상한 인상과는 달리 얄미운 여우같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싫어~! 몰라~ 몰라~!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할배 옆에서 꼭 잠들고 말테야!”
내가 생각해봐도 이젠 막무가내였다.. 그래도 밤 세 가슴 두근거리는 것보다야 낫겠다는 생각에 눈앞에 뻔히 보이는 결과를 알면서도 무모하게 용기를 내고 있었다.
“ 애니~! .. 지금 시간이 몇 신지 아니? 벌써 12시가 넘었단다.~”
나는 할배의 말에 무심코 책상에 놓여진 탁상시계로 눈을 돌렸다.
“ 어?! 정말이잖아!. ”
순간 머릿속에 붉은 신사의 모습이 그려졌다. 붉은 신사모자에.. 붉은 정장을 입고.. 광채 나는 진한 회색빛 피부를 가졌으며.. 코는 아주 길고 동공이 없는 눈은 계란 노른자위처럼 아주 노랗고 키는 올려다보기 힘들 정도로 아주 컸으며.. 목소리는 새벽 수탉의 울음처럼 쩌렁쩌렁하다.. 아까 한번 들었을 뿐인데 단번에 각인이 되어 버렸다. 당연히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눈은 자꾸 시계를 향하고 있었다.
“ 지금 잠들지 않으면.. 붉은 신사가 우리 귀여운 손녀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텐데
어쩌지?. 그렇게 되면 이 할아버지도 애니를 지켜줄 수가 없단다.. ”
다시금 내 맥박이 엄청난 속도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오감은 겁에 질려 하나 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 그리곤 우리 애니를 동쪽대륙으로 데려가서는 왕자님께 바칠 것이고.. 헌데..!!
왕자님이 우리 애니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어쩌나?..”
“ 할배!!!! ... 끝까지 이렇게 비협조 적으로 나올 거야?!! ”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지금 당장 서둘러 잠자리에 들어야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할배의 눈을 쳐다보았지만 냉정하게도 얄짤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축 늘어진 어깨로 할배의 인도를 받아 내 방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어떡하겠는가..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되뇌고 되뇌어 봐도 이미 머릿속에 각인된 붉은 신사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 것을.. 나는 내 침대에 들어서자마자 쏜살같이 이불 안으로 파고들고는 마음속으로 건넛집 해랄드 아줌마가 기르는 양들을 떠올리며 한 마리씩 세기 시작했다. 이윽고 할배는 내 이마에 작은 입맞춤을 하고는 내 방을 나가버렸다. 그날 밤 나는 가슴을 졸인 채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꿈나라로 떠날 수 있었다..
REDEYE (1부 붉은신사)
(프롤로그)
저 멀리 동쪽 대륙에 자리 잡고 있는 레드아이라는 왕국에는 못된 마녀로부터 저주에 걸린 왕자님이 살고 계신단다.. 왕자님의 곁에는 그를 믿고 따르는 신하들이 아주 많았지. 그중엔 왕자님의 저주를 풀기 위해 밤 12시가 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서쪽대륙으로 넘어와 왕자님의 신붓감을 찾는 아주 괴상한 모습을 한 남자가 있었단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흔히 붉은 신사라고 부르곤 했었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붉은 옷으로 치장을 하고 행여나 누군가가 자신의 발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날까 염려한 나머지 하늘 위를 자유로운 새처럼 사뿐사뿐 걸어 다니며 자신이 모시는 왕자님의 신붓감을 찾아 다녔단다... 그를 보고 싶다고?... 그렇다면.. 오늘밤 잠들지 말고 시계 초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렴.. 밤 12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누군가가 너의 이름을 부를 것이란다.
로이안대륙
때는 하나였던 로이안 대륙이 둘로 갈라져 동쪽과 서쪽으로 구분이 되던 시대였다.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갈라졌는지 알려진 바는 없었으나 서쪽 대륙에서는 이를 두고 무수한 추측들이 난무했다. 떠들기 좋아하는 어떤 이는 앞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더 갈라질 것 이라고 주장했고 또 어떤 종교적 사상이 강한 이는 신이 무지한 인간들을 벌하기 위해 갈라놓은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허나 몇몇의 의견이었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어떤 추측과 주장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거나 손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다만 오래 세월 전부터 입과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동쪽대륙의 웅장한 전설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소문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대하고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었기에 사람들은 감히 전설이라는 말을 붙여 동경하는 마음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전설에 대해서 잠시 몇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다음과 같았다. 하늘엔 붉은 달과 푸른 태양이 낮과 밤을 나누어 솜털처럼 가벼운 구름 위에 떠있고 땅에선 네발 달린 짐승들이 차가운 동굴이나 풀숲이 아닌 인간처럼 굴뚝이 있는 집을 짓고 기름진 빵과 고소한 우유를 먹고살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영리한 머리와 희한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며 또 간간히 홍해라고 하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신기하게도 낮에는 분홍빛을, 밤에는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으며 한 번도 보지 못한 신비한 능력과 괴상한 모습을 한 다양한 종족들이 각자의 무리를 이루며 살고 있다는 아주 기묘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야기였다. 이는 이를 실제로 접해보지 못했던 서쪽 대륙의 사람들에겐 놀라움과 논쟁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서쪽대륙의 사람들은 이렇듯 베일에 싸여 있는 동쪽대륙에 대해 막연한 환상과 끝없는 동경에 젖어 있었으며 또한 이제 이 소설에서 전개될 이야기는 서쪽대륙에 자리 잡고 있는 애르나 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동쪽대륙의 또 하나의 신비한 전설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episode.1 (붉은신사)
어두운 밤이 분주했던 서쪽 대륙의 조용한 마을을 잠재우고 어느 이름 없는 거렁뱅이의 낡은 시계의 바늘이 서둘러 12시를 향할 때까지 내 눈은 초롱초롱 하기만 하였다. 낮부터 마을 이 곳 저곳을 헤집고 다녔음에도 여리기만 한 7살, 이 작은 몸뚱이는 어느 한군데 피로에 지친 모습이라곤 찾아보기 힘들만큼 생기로 가득했다.. 방 한구석에 고이 자리 잡은 좁은 침대를 이리저리 뒹굴 거리다 애꿎은 곰 인형 토마스를 던져도 보고 대답 없을 물음인줄 알면서도 너스레 섞인 질문을 되풀이 해보기도 하며 슬며시 시간이 데려올 꿈나라를 기다려 보지만 내 눈꺼풀은 솜털처럼 가볍기만 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마을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었기에.. 서둘러 잠이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나였다... 건넛방 할배는 하나밖에 없는 손녀의 애타는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굳게 닫힌 방문 밖으로 둔탁한 기계 소리를 내며 세상을 등진 듯, 일에만 열중해 계신다. 할배가 두드리는 망치소리는 종종 내 작은 심장소리와 맞물려 절묘하게 박자를 맞추는 듯 했고 내 귀로 하여금 나를 유혹하는 작은 속삭임처럼 들리기에 충분했다. 나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 속삭임에 반응하듯 묘한 감정에 이끌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을 한 걸음씩 살포시 내딛으며 조심스럽게 할배의 방까지 향했다. 할배의 방문 앞에 들어선 나는.. 짧게 숨을 한번 내뱉은 뒤 조용히 방문을 열고 할배의 등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할배를 불러보았다. 처음에는 연장소리가 내는 쇳소리에 내 목소리가 묻혀버린 듯 할배는 쉽사리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지 않았고 몇 초간의 짧은 적막의 흐름을 틈타 이번엔 조금은 야살스러운 목소리로 두 번, 세 번 할배를 불러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하나밖에 없는 손녀의 투정어린 부름이 들려왔을까.. 할배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내게 환한 미소를 보내기 시작했다. 나는 입안 한가득.. 헛바람을 물곤 어느 이름 모를 바다에 사는 물고기 흉내를 내며 할배를 향해 돌진했다..
“ 할배~ 나 잠이 오질 않아 ”
배부른 소녀의 하찮은 투정이었다.. 나는 최대한 몸을 비비꼬며 할배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곤 곰처럼 불룩 튀어나온 할배의 배를 내 조막만한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낮에 마을 이 곳 저곳을 누비고 다녔던 이야기를 마치 용사의 무용담인양 늘어놓기 시작했다..
빵집을 하고 있는 제라드 아저씨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가발을 몰래 훔쳐다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빵 굽는 화로에 던져버린 이야기와 마을 최고의 새침때기 미인이었던 라미야드의 얼굴에 호수에서 산란중인 개구리를 잡아다 올려놓은 일, 옆집 술주정뱅이 포비 아저씨의 술병 속에 한 움큼 소금을 넣어버린 이야기를 마치 자랑이라도 되는 듯, 입에 침이 마르도록 쉬지 않고 쏟아냈다.. 할배는 미처 내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큼지막한 손으로 자신의 무릎을 수차례 치며 어색한 함지박한 웃음을 내질렀다...
“ 허허허~ 우리 귀여운 손녀딸 애니~ 오늘도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장난을 친
모양이구나?.. 익살꾸러기 같으니라고.. “
“ 헤헤~ 할배, 나 대단하지? 할배도 나한테 잘 보이면 다음에 끼워줄 용의가 있어.. 요즘
뚱보 마리가 내 말을 잘 안 듣고 있어서 벼르고 있거든... “
“ 허허허~ 글쎄 나도 끼고 싶지만... 장난을 치고 도망가기엔 이 할아버지는 살이 너무
많이 쪘는걸.~ “
할배는 낮에 내가 저지른 장난들을 꾸지람하려는 듯 살짝 미간의 주름을 지으며 듬직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금세 얼굴을 타고 내려와 살며시 내 볼을 꼬집었다. 많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발그레 닳아 볼 때문이었을까.. 금세 눈물이 눈가를 감돌았다..
“ 힝~ 할배 아파~.... 나 잠이 오질 않는단 말이야~”
칭얼대는 내 목소리에 흠칫 놀란 듯 할배는 이내 내 붉게 닳아 오른 볼에서 살며시 손을 떼고 걱정스런 말투로 내게 말했다..
“ 흠~ 착한 아이는 12시전에 잠을 자는 거란다”
“ 싫어... 난 그리 착한 아이가 아니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다고!! ”
할배는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평소대로라면 12시 이전에 벌써 꿈나라로 향해 있어야할 착한 손녀였기에 낯선 투정이 어리둥절하고 당황스러운 모양 이었다 ..그리고 못내 잠시 고민에 빠지는 듯, 내 초롱초롱한 눈빛을 주시하고서는 작은 목소리로 슬그머니 내 귓가에 다가와 속삭이기 시작했다.
“흠~ 우리 귀여운 꼬마아가씨가 왜 12시가 다 되도록 꿈나라로 가질 못했을까? 꿈나라로 가는 마차를 놓치셨나요?“
왠지 놀리는 듯한, 말투였다.. 나에게 있어 지금의 이 답답한 고민은 할배에겐 밤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춤사위쯤 되 보이는 듯 했다. 나는 괜스레 심통이 났고.. 내 커다란 눈은 금세 작디작은 실눈이 되어버렸다.. 불만 가득한 감정을 고스란히 표정에 그려낸 나는..여가 없이 얼굴이 용광로처럼 변했고 앵두처럼 조그만 한 내 입은 고양이에게 어미젖을 빼앗긴 새끼 강아지처럼 끙끙 앓는 소리와 함께 씩씩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할배는 또 한 번 호탕한 웃음을 내질렀고 한참을 웃다가 나를 놀린 것이 미안했는지.. 뜬금없이 옛날이야기를 해 주겠다 권하기 시작했다.. 할배가 해주는 옛날이야기라고 해봤자.. 모두 할배가 지어낸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나는 일찍이 5살 때부터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마땅히 할 것도.. 볼 것도 없었던 나는 잠시 눈을 치켜뜨며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하는 수 없이 할배의 권유를 받아 들였다.
“ 좋아.. 이번 한번만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리다... ”
나는 왕이 신하를 대하 듯 거만한 태도로 할배의 배를 쓰다듬었다.
“자~ 그럼 우리 귀여운 손녀딸 애니윈스터 양을 위해서.. 오늘은 할아버지가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이야기 해주어야겠구나.~”
뜻밖이었다.. 분명 할배는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라고 말했다...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대해선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예전에 잠시 100년 전 마을에 나타나 마을 사람들을 개구리로 만든 푸른 마녀의 저주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지만 그 외에는 전설다운 전설을 들어 본적이 내겐 분명히 없었다.
“ 할배? 우리 마을에도 전설 같은 것이 있어?”
나는 속으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게 없었던 것이 할배는 유난히 내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한번 숲에는 어린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요정이 산다는 말만 믿고 친구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갔다가 길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
“응~ 그럼 있다마다.. 이 서쪽대륙에, 특히 우리 애르나 마을에만 전해져 내려오는 아주
오래된 전설이지...100년 전 마을에 푸른 마녀가 나타나기 이전의 이야기란다..”
왠지 강한 믿음은 가지 않았지만 일단 들어나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할배의 거창한 옛날이야기는 “옛날 옛적에”로부터 시작되었다..
“ 옛날 우리 애르나 마을엔 밤 12시만 되면 붉은 옷을 입은 신사가 나타나곤 했단다.. 사람 들은 흔히 그를 가리켜 붉은 신사라고 통칭해서 부르곤 했단다.. ”
“ 붉은 신사.... ? ”
속으론 할배가 이번엔 또 무슨 거짓말을 할까 하며 밀려오는 코웃음 억지로 억누르곤 최대한 심각한 표정으로 할배의 이야기에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할배는 곧 붉은 신사의 생김새에 대해 비교적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는데....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머리엔 붉은 신사 모자를 쓰고 옷은 붉은 정장을 입었으며 그의 피부는 광채 나는 진한 회색빛을 띄었고.. 보통 사람과는 달리 코가 아주 길어서 마치 텃밭에서 기르는 오이나 가지와 같았고 또 그의 눈은 동공이 없었으며 그저 계란의 노란 자위처럼 아주 노랗기만 하였고 희한하게도 입이 없음에도 그의 목소리는 새벽에 우는 수탉의 울음처럼 깊고 쩌렁쩌렁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키가 굉장히 커서 발끝에서 그의 얼굴을 훑어보는 것 또한 보통사람에겐 굉장히 목이 아픈 일이었다고 말했다.. 왠지 지금까지 들어온 옛날이야기와는 달리 확실히 치밀하고 색다른 전개였다.. 붉은 신사? 그리고 난 난생 처음 듣는 그 말이 순간 가슴 한편을 깊게 파고드는 것 같았고 요동치듯 심장에 메아리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루할 것이라 예상했던 나의 판단과는 달리, 나는 금세 귀를 쫑긋 세우곤 할배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 붉은 신사는 밤마다 마을 돌아다니며 12시가 넘어도 잠들지 않은 어린 소녀들을 찾아다 니곤 했지.. 마을 곳곳을 누비며 아직 잠들지 않은 소녀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 이곤 했단다.. ”
할배는 작은 손동작 등을 섞어가며 이야기가 아주 극적으로 꾸며지기를 원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노력에 응답하듯 약간은 움츠려드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할배의 이야기 중간 중간에 질문을 던지기도 하였다.
“ 마을의 소녀들을?. 왜요? 무슨 이유로 붉은 신사는 소녀들의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인
거야? “
“ 그건 말이다.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단다.. 애니야.. ”
할배는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내게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허나 그 이유는 정말 난감할 정도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할배는 붉은 신사가 밤 12시가 넘도록 마을에서 잠이 들지 않은 소녀를 찾아내 자신이 살고 있는 동쪽대륙으로 데려간다고 말했다.. 언젠가 동쪽대륙은 버려진 땅이며 악마들의 낙원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어렴풋했다... 그래서였을까 왠지.. 무서운 감정이 폭풍우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할배는 설상가상 낮은 음색으로 내 온몸을 서서히 차갑게 엄습했고 나의 두 손과 두발을 거침없이 굳어지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기껏 할배의 옛날이야기라고 해봤자..누구나 흔히들 엄마나 아빠가 아이가 옆에서 잠잘 때 해주는 그저 그런 이야기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기에..오늘의 이 색다른 이야기는 나를 서서히 흥분시키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어 보였다.. 할배는 내가 조금은 무서워 한다는 것을 눈치를 챘으면서도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 붉은 신사의 발걸음은 언제나 조용하고 차가웠지...텅 빈 마을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쉽사리 그 고요함을 놓지 않았단다....왜냐고?... 왜냐하면 마을 사람들은 오로지 붉은 신사로부터 소녀들을 지켜야 한다는 확고한 일념이 있었거든... 지키고 싶어 했던 것이야.
자신의 딸과 또 손녀들을 말이지.... “
“ 할배~ 그럼 우리 마을에 붉은 신사에게 잡혀 동쪽 대륙으로 간 소녀가 있어? ”
“글쎄...?”
글쎄??? 확실히 석연치 않은 대답이었다..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나로썬 아리송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초조한 마음에 할배를 붙잡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할배~ 빨리 대답해주세요~ 붉은 신사에게 잡혀간 소녀가 있었어? 응?”
“ 애니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렴.”
나는 소녀들을 잡아간다는 말에 단지 옛날이야기 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금방이라도 붉은 신사가 문을 열고 나타나서 나를 갑자기 어디론가 잡아갈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등 뒤에선 오싹함 마저 느껴지고 내 심장소리는 보통 때보다 더 빨리 뛰고 있음을.. 조금씩 느끼려는 찰나에 할배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 이야기를 계속하기 시작했다.
“ 아뿔싸!.. 아뿔싸.... 마을엔 아직 잠이 들지 않은 소녀가 한명 있었단다.~!.. 저녁부터 인형 을 가지고 놀다가!!.. 그만.... 밤 12시가 되어버린걸 몰랐던 것이지.. 소녀는 인형을 이리 저리 가지고 놀며 마을이 떠나가라 웃음소리를 내뱉었단다... 꺄르르~ 꺄르르~...”
“ 밤 ...... 12시가 넘도록 인형을 가지고 논거야? 할배?!”
“ 아주 정신없이 시간을 망각한 체 인형 놀이에 빠져있었단다. ”
마치 나를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였을까.. 할배의 이야기는 이젠 생동감마저 느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럴수록 내 공포감은 빠른 속도로 극으로 치닿고 있었다.
“ 그...그래서 할배?..”
어느 덧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 소녀의 커다란 웃음소리는 붉은 신사의 청각을 자극시키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었단다..”
“ 붉은 신사가 그 소녀의 웃음소리를 들은 거야?! ”
할배의 말에 나도 모르게 두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 7살 어린 나이에 그 이야기를 듣는 것 마저 감당이 되지 않아서였을까.. 한 번도 본적 없는 붉은 신사가 내 눈앞에 서있는 것만 같았고, 이젠 할배의 말보다 콩닥콩닥 뛰는 내 심장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할배는 야속하게도 이야기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 붉은 신사는 소녀의 웃음소리를 미친 듯이 쫓기 시작했단다. 한 마리의 매서운 독수리가
먹이를 쫓는 것처럼 그의 움직임은 마치 새가 된 듯 빠르고 가벼웠지.. 또 혹자의 말로는
달빛에 비친 붉은 신사의...우아한 자태를 목격한 이들은 한동안 넋을 잃고 붉은 신사를 찾아 헤매 이기도 했다고 하더구나..”
“ 할배... 붉은 신사는 아름답고 신비한 사람이에요?... ”
“ 아마도?....신비한 매력을 가진 사람이겠지. 아니 매력을 넘어서 마력을 가진 남자랄까? ”
할배는 누군가의 목격담을 이야기에 섞어가며.. 붉은 신사의 움직임을 열심히 묘사하는 듯 했다. 그리고 한때 빵집을 하고 있는 제라드 아저씨의 할배의, 할배가 우연히 달빛에 비친 붉은 신사의 모습을 보게 된 후 생업을 포기하고 몇 년간을 이곳저곳을 방황하며 그를 찾아 다녔다고 말했다.
“ 마을 사람들은 그때 제라드 집안의 빵집이 영영 사라지는 줄 알았다고 하더구나.. ”
“ 으앙~ 할배~ 어떻게 된 거야~ 그 소녀는 붉은 신사에게 잡히고 만 거야? ”
그랬다.. 정작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붉은 신사의 목격담이나 그의 신비한 모습이 아닌 그에게 잡혀간 마을의 소녀가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 애니야.. 어떻게 되었을까?.....”
할배는 뜸을 들이고 있었다.. 쉽사리 이야기 해줘서는 안 될 이야기인지 아니면 더 이상 이야기를 지어낼 자신이 없었던 건지.. 그것도 아니면 나의 애타는 모습을 속으로 즐기고 있었는지.. 어느 쪽이든 나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 빨리 말해죠 할배~ 결국 그 소녀는 붉은 신사에게 끌려가고 만 거야?”
할배는 더 이상 나의 애타는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었는지.. 주춤거렸던 이야기의 전개를
다시 추슬러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이야기를 중간 생략이라도 하듯 내 궁금증의 해답을 주기에 이르렀다.
“ 애니야.. 붉은 신사는 소녀를 데려가지 않았단다..”
“ 엥?!... 하지만... 분명히 잡아간다고 했잖아요?. ”
의외에 결말이었다.. 당연히 잡혀갔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을까? 아니면 결말 외에 또 다른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것이었을까? 슬며시 의문에 찬 눈빛으로 할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할배의 표정은 간단명료했다. 막연히 나도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반전일까?.. 아니면 그 뒤의 이야기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을까?.. 할배는 그 뒤로도 나의 질문에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할배의 모습을 바라보며 몇 가지 의문점 품게 되었다.. 붉은 신사는 왜 밤늦게 까지 잠들지 않는 소녀들을 동쪽대륙으로 데려가는지 또 데려가서는 소녀들을 어떻게 하는지.. 밀려오는 궁금증에 나는 더욱더 잠이 오질 않았다. 한 번 더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참지 못한 채 할배에게 다시 묻기 시작했다.
“할배.. 붉은 신사는 왜 소녀들을 동쪽 대륙으로 잡아가려고 했어?..”
사소한 것 하나에도 민감한 나였기에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오늘밤을 편안하게 잠들지 못할 것이라 생각됐다. 확실한 대답을 듣지 않고는 절대 잠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이며 할배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 애니야.. 정말 알아야 하겠니?...”
이건 무슨 소리일까?.. “정말 알아야 하겠니?” 정말 알고 싶니 라는 말이 아니라.. 애써 알지 않아도 되는 것을 무리해서 들어야 하겠냐는 말투였다. 반발심이었을까? 아니면.. 궁금증에 목말라서였을까.. 나는 당당히 “응” 이라고 대답했다..
“ 붉은 신사는 소녀를 잡아다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왕자님께 신부로 바친단다..”
“ 뭐? 정말?! 그럼 왕자님의 신부가 되는 거야? ”
“ 그렇단다. 저주에 걸린 왕자를 구하게 되는 것이지. ”
할배는 붉은 신사가 저주에 걸린 왕자를 구하기 위해 이곳 서쪽대륙으로 건너와 밤 12시가 되면 왕자님의 신부가 될 소녀를 찾아 동쪽대륙으로 데려 간다고 말했다.
“ 왕자님의 신부?.. ”
일반적인 상식으로 봤을 때 아무리 저주에 걸려있다고 하기로서니 왕자님의 신부가 된다는 건 여느 소녀들에겐 달콤한 꿈과 같은 이야기였다. 그러하였기에 마을이 붉은 신사로부터 소녀를 지키려고 했다는 할배의 말은 도통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왜 소녀를 지키려했을까? 왕자님의 신부가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영광스러운 일일 텐데.. 알면 알아갈수록 내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혹시 왕자가 추남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아주 고약한 성격을 가지고 있거나.... 나는 속으로 여러 가지 이유들을 만들어 궁금증에 끼워 넣으며 답을 찾으려고 애썼다. 허나 도무지 내 모자란 머리로는 그 답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 할배... 왕자님의 신부가 된다는 건 행복한 것 아냐? ”
“ 사랑하는 손녀딸 애니야.... 그건 절대 그렇지가 않단다.. 진정 행복할 수가 없었어...”
역시 추남에 고약한 성격을 가진 무늬만 왕자인 것인가? ...나 스스로 내 추측들이 맞는 것이 라고 단정 지을 때쯤... 할배는 내게 뜻밖의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 모든 것은 그렇게 누군가가 정해놓은 순리대로만 돌아가지는 않는단다.. 붉은 신사는...
왕자에게 소녀를 바치지만.. 저주에 걸려있는 왕자는 그 소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소녀를 그 자리에서 잡아먹는단다....”
순간 치명적인 무엇인가가 내 뇌리를 번쩍이며 스쳐지나갔다..
“꺄악~~!!!!!.....꺄악!!!! ”
나는 왕자님이 소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잡아먹는 말에 가차 없이 경악하고 또 경악했다. 여러 갈래로 찢어질듯 한 내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으며 내 공포는 마침내 극에 달했고 내 눈망울은 세상에 처음 태어나 눈을 뜬 망아지의 눈처럼 두려움으로 사로잡혀..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 왕자님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이랄까? 그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으앙~ 할배.. 그런 거 싫어.. 으앙”
"이런~ 이런~ 내 사랑하는 손녀딸 애니윈스터~ 울지 말거라..“
“ 으앙~ 그게 뭐야~ 신붓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잡아먹는다니 나쁜 사람이잖아~
왕자님이 아니라 괴물이잖아!!! “
그 순간 할배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원망스러워 보였다. 차라리 듣지 않았으며.. 언젠가는 잠이 들었을 텐데 오늘밤은 편안히 잠을 자기는 틀린 것 같았다..
“ 우리 애니가 많이 놀란 모양이지? ”
할배는 나를 기만하고 있었다. 분명 내가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계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몰라~ 할배.. 무섭단 말이야 그런 이야기는 ..”
내 얼굴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한가득 이었다.. 아무리 닦아내도 다시금 눈물은 잔혹하게 내 뺨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 자~ 이제 옛날이야기도 해줬으니 .. 방에 들어가서 자야지? ”
할배는 나를 극도의 흥분상태로 몰아넣고는 이제 벼랑 끝에서 밀치려 하고 있었다.. 문득 차라리 절벽에서 잠을 자라고 하는 편이 더 배려있는 말처럼 생각되었다.
“싫어~! 할배! 이제 어떻게 자라고 .. 무서워서 못자~ 책임져!”
“ 저런~ 이거 큰일이구나. 우리 애니가 이 할아버지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더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지?.“
할배는 정말 내가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얘기 한 것처럼 보였다. 사람은 후회할 짓을 하지 말아야하고 또 지나간 일에 후회를 느껴서도 안 된다던 할배의 말이 무참히 깨지는 듯 했다. 오늘 들었던 이 이야기는 한 동안 나를 내방에서 혼자 자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섬뜩한 예감이 들어왔다.. 7살이나 되었는데 무서워서 할배 옆에서 잔다고 하면 할배는 나를 놀리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밤늦게 조용한 내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 할배의 이야기를 회상하며 내방 창문과 낡은 나무 바닥에 귀를 기울일 나를 생각하니 ..참으로 아찔하다.. 놀림을 받더라도.. 오늘 밤은 편안하게 잠을 자고 싶었다..
“ 나 오늘 할배 옆에서 잘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뭐라고 하지마.~!”
“ 음~ 7살이나 되었으면서~ ..귀여운 숙녀님이 다 늙은 할배 옆에서 잔다고 하면 ..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 텐데?....“
역시나.... 그 말이 나올 줄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문득 할배는 겉으로 보이는 푸근하고 자상한 인상과는 달리 얄미운 여우같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싫어~! 몰라~ 몰라~!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할배 옆에서 꼭 잠들고 말테야!”
내가 생각해봐도 이젠 막무가내였다.. 그래도 밤 세 가슴 두근거리는 것보다야 낫겠다는 생각에 눈앞에 뻔히 보이는 결과를 알면서도 무모하게 용기를 내고 있었다.
“ 애니~! .. 지금 시간이 몇 신지 아니? 벌써 12시가 넘었단다.~”
나는 할배의 말에 무심코 책상에 놓여진 탁상시계로 눈을 돌렸다.
“ 어?! 정말이잖아!. ”
순간 머릿속에 붉은 신사의 모습이 그려졌다. 붉은 신사모자에.. 붉은 정장을 입고.. 광채 나는 진한 회색빛 피부를 가졌으며.. 코는 아주 길고 동공이 없는 눈은 계란 노른자위처럼 아주 노랗고 키는 올려다보기 힘들 정도로 아주 컸으며.. 목소리는 새벽 수탉의 울음처럼 쩌렁쩌렁하다.. 아까 한번 들었을 뿐인데 단번에 각인이 되어 버렸다. 당연히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눈은 자꾸 시계를 향하고 있었다.
“ 지금 잠들지 않으면.. 붉은 신사가 우리 귀여운 손녀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텐데
어쩌지?. 그렇게 되면 이 할아버지도 애니를 지켜줄 수가 없단다.. ”
다시금 내 맥박이 엄청난 속도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오감은 겁에 질려 하나 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 그리곤 우리 애니를 동쪽대륙으로 데려가서는 왕자님께 바칠 것이고.. 헌데..!!
왕자님이 우리 애니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어쩌나?..”
“ 할배!!!! ... 끝까지 이렇게 비협조 적으로 나올 거야?!! ”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지금 당장 서둘러 잠자리에 들어야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할배의 눈을 쳐다보았지만 냉정하게도 얄짤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축 늘어진 어깨로 할배의 인도를 받아 내 방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어떡하겠는가..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되뇌고 되뇌어 봐도 이미 머릿속에 각인된 붉은 신사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 것을.. 나는 내 침대에 들어서자마자 쏜살같이 이불 안으로 파고들고는 마음속으로 건넛집 해랄드 아줌마가 기르는 양들을 떠올리며 한 마리씩 세기 시작했다. 이윽고 할배는 내 이마에 작은 입맞춤을 하고는 내 방을 나가버렸다. 그날 밤 나는 가슴을 졸인 채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꿈나라로 떠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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