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복 편 지 16

수호천사200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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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복 편 지 16

 

 

 

 

 

 

 

 

『그림엽서』 - 김승희(1952~ ) - 일부일처제 같이 조그만 세상 속에 벙어리 장갑만큼 작은 사랑. 해인이와 왕인이가 있고 그 옆 방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는 나. 그림 엽서같이 목가적이다 부부싸움 끝에 쫓겨나 골목 밖 가로등 밑에서 우리집 등불을 훔쳐볼 때. '그림엽서' 전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혁명은 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라고 내게 말한 이는 소설가 김훈이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풍경이 있다면 엄마가 무릎 위에 아이를 앉히고 책을 읽어주는 풍경일 것이다. 어느 순간 아이는 새근새근 잠이 들고, 아이가 금세 깰까봐 엄마의 책읽기는 계속되고…. 아이는 꿈속에서 자신이 자라 엄마가 되어 해인이와 왕인이에게 옛이야기책을 읽어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혁명은 그렇게 전승된다. - 곽재구<시인> -

 

 

 

 

 

 

 

『달밤에』 - 이시영(1949~ ) - 기러기 식구들 줄지어 난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내외 손자 땅 위엔 사위는 모닥불빛 재처럼 뜨거웠던 얼굴들이여. 기러기 식구들 하나둘씩 줄지어 난다. 어제 떠난 동료의 흰옷 그림자를 좇아 밤새도록 펄럭이는 포장을 차며. '달밤에' 전문

 

 

 

만월이다. 속리산 산골길은 구불텅 구불텅하다. 산 끝나는 곳에 다시 산 이어지고…. 잠시 차를 세우고 하늘을 보는데 기러기 식구들 줄지어 난다. 춥지 않을까, 저녁들은 먹었을까…. 헤드라이트 불빛을 끄고 치반령 고개를 넘다. 다시 산을 넘고 또 넘어 기러기 식구들 외에는 정말로 갈 수 없는 산골짜기 끝에서 불켜고 있는 외딴집을 만나다. 먼저 온 벗들이 뛰어나오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위해 집주인은 아궁이 깊게 군불을 지피다. 직접 손두부를 만들고 동태찌개도 끓이고 달빛처럼 하얀 밥을 먹다. 재처럼 뜨겁던 얼굴들이여…. 달빛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상에서 흰 머리칼 흔들며 오래 오래 술을 마시다 기러기 새끼들처럼 줄지어 잠들다. - 곽재구<시인> -

 

 

 

 

 

 

 

『봉숭아 꽃』 - 민영(1934~ ) - 내 나이 오십이 되기까지 어머니는 내 새끼 손가락에 봉숭아를 들여주셨다. 꽃보다 붉은 그 노을이 아들 몸에 지필지도 모르는 사악한 것을 물리쳐준다고 봉숭아물을 들여 주셨다. 봉숭아야 봉숭아야 장마 그치고 울타리 밑에 초롱불 밝힌 봉숭아야 무덤에 누워서도 자식 걱정에 마른 풀이 자라는 어머니는 지금 용인에 계시단다. '봉숭아꽃' 전문

 

 

 

밤에 배를 저어 바다로 나갔다가 노랗게 빛나는 큰 별 곁에 분홍색의 작은 별이 깜박깜박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두 별 사이에 무슨 좋은 일이 있었나, 두 별 사이에 무슨 향기 깊은 꽃이라도 피었나 생각했는데 노시인의 시를 읽다가 무릎을 친다. 아, 엄마별이 아가별에게 봉숭아물을 들여 주고 있었구나. 아침밥 먹고 들일 나가기 전에 햇살 좋은 토방머리에 앉아…. 아들 차례가 끝나면 나이 쉰 아들이 칠순 엄마의 손톱 위에 다시 봉숭아 물을 들이느라 햇살은 더 따스해지고…. - 곽재구<시인> -

 

 

 

 

 

 

 

『길』 - 현담(1955~ ) - 저녁 어스름 길에 나가서 길을 묻는다. 저기 마을 안쪽은 환한 스크린이다. 사람들 크게 번지다 사라진다. 길 위에서 누가 길을 묻는다. 그림자 길게 끄을며 아직 누가 길을 묻는다. '길' 전문

 

 

 

길 위에서 길을 물었던 나날들…. 길의 초입에서부터 길은 낯설기만하고, 그곳 어디에서 늘 허둥대며 초조하게 서성이다가 해는 지고 바람은 불고, 가까운 마을의 불빛들은 스크린보다 환히 빛나고, 어디선가 저녁을 먹으라고 아이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는 또 얼마나 다정하게 들리던지…. 주저앉아버리지도 못하고 다시 어딘가에 길이, 빛나는 언덕이 꼭 있을거라고 생각하며 터벅터벅 걷던 그리운 생의 시간들. 슬프고 못생겨서 가슴 안이 따뜻하게 저려오던 나날들…. 현담은 승려다. 세속에서의 그의 삶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1978년 문학사상에 처음 시를 발표했다니 그로써 그의 이력을 짐작할 뿐이다. - 곽재구<시인> -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 허만하(1932~ ) -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높은 곳은 어둡다. 맑은 별빛이 뜨는 군청색 밤하늘을 보면 알 수 있다. 골목에서 연탄 냄새가 빠지지 않는 변두리가 있다. 이따금 어두운 얼굴들이 왕래하는 언제나 그늘이 먼저 고이는 마을이다. 평지에 자리하면서도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흙을 담은 스티로폼 폐품 상자에 꼬챙이를 꽂고 나팔꽃 꽃씨를 심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힘처럼 빛나는 곳이다 아침노을을 가장 먼저 느끼는 눈부신 정신의 높이를 어둡다고만 할 수 없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전문

 

 

 

모스크바의 차이코프스키 국립음악원에 들렀을 때 우연히 한 교수의 피아노 레슨을 참관할 수 있었다. 두 명의 학생에게 같은 곡을 지도하는 중이었는데 문외한의 눈에도 다르게 지도하는 것이었다. 쉬는 시간에 내가 물었다. 왜 같은 곡을 다르게 연주하는가. 그가 답했다. 학생들은 성장배경이 다르고, 교육 정도, 좋아하는 그림. 음악, 성격도 다 다르다. 각기 다른 그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곡의 해석을 하고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빛깔로 연주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 나의 임무다. 열 명의 학생이 같은 악보를 보며 각기 다른 열 곡의 쇼팽에 몰입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침햇살을 가장 먼저 느끼는 눈부신 정신의 높이. 시의 감상 또한 당연히 그럴 것이다. - 곽재구<시인> -

 

 

 

 

 

 

 

『파안』 - 고재종(1957~ ) - 마을 주막에 나가서 단돈 오천원 내놓으니 소주 세 병에 두부찌개 한 냄비. 쭈그렁 노인들 다섯이 그걸 나눠 자시고 모두들 볼그족족한 얼굴로 허허허 허허허 큰 대접 받았네 그려! '파안' 전문

 

 

 

섬진강변 군지촌정사의 사랑채에서 잠시 머물 때 마을 노인들이 젊은이가 마을에 들어왔다고 퍽 좋아하셨다. 불혹을 넘겨 지천명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젊은이 소리 듣는 것이 싫지 않았다. 밤이 되면 노인네들은 내 방에 전깃불이 켜지는 것을 지켜보았다가 다음날 나를 보면 "사랑채에 불빛이 참 곱데"라며 손을 잡았다. 사람이, 젊은 사람이 그리운 때문이다. 마을을 떠날 때 그분들에게 소주 한 병, 두부찌개 한 냄비 사 드리지 못했다. - 곽재구<시인> -

 

 

 

 

 

 

 

『빵』 - 류시화(1957~ ) - '빵'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잘 구워진 빵앞뒤로 골고루 익혀진 빵 그것이 어린 밀이었을 때부터 태양의 열기에 머리가 단단해지고 덜 여문 감정은 바람이 불어와 뒤채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제분기가 그것의 아집을 낱낱이 깨뜨려 놓았다. 나는 너무 한쪽에만 치우쳐 살았다. 저 자신만 생각하느라고 제대로 익을 겨를이 없었다.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속까지 잘 구워진 빵. '빵' 전문

 

 

 

밤새 내린 눈에 백양나무 가지 하나가 부러졌다. 그 작고, 하얗고, 순결한 눈송이들이 쌓이고 쌓여 성성한 가지를 부러뜨리다니…. 잠시 아집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것들이 쌓이고 쌓인 세상의 숲과 그것들이 부러뜨릴 많은 생의 나뭇가지들에 대해서도…. - 곽재구<시인> -

 

 

 

 

 

 

 

『사람들』 - 천양희(1942~ ) - 논둑길 걷다. 누군가 무르팍을 툭, 친다. 풀잎이다. 풀잎 속 풀무치다. 풀무치 눈이 퍼렇다. 풀 탓이다. 풀물 든 눈으로 세상을 본다. 세상에는 풀보다 더 시퍼런 칼날이 있다. 풀 베듯 베이는 사람이 있다. 세종로 지나다 누가 머리통을 텅, 친다. 종각이다 종각 속 종이다. 종이 울지 않는다 세상 탓이다. 종 치듯 세상을 치고 싶다. 세상에는 종소리보다 더 소리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절박한 종소리 재창하고 싶은 날들이 있다. 종소리 울리듯 절창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 전문

 

 

 

살아가는 동안 세상에서 가장 그리운 이름은 사람일 것이다. 사람 속에서, 사람과 더불어,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 속에 눈물과 된장과 꽃이 핀 들판이 있다. 그 속에 풀보다 더 시퍼런 칼날이 있고 풀 베듯 베이는 사람이 있고, 종소리보다 더 절창으로 소리치고 싶은 날들이 있다. 사람과 더불어 사람과 함께 우리는 풀빛보다 더 짙은 푸름으로, 종소리보다 더 은은한 공명으로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 - 곽재구<시인> -

 

 

 

 

 

 

 

『손톱으로 북 긁으면』 - 이성복(1952~ ) - 아침에 깨꽃 붉은 꽃잎이 떨어질 힘도 없이 알루미늄 새시 틈에 말라붙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헤집고 떼어내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침부터 진눈깨비 올 거라는 예보를 무시하고 푸슬푸슬 비 내리고 한길엔 중풍 들린 사내 더디게 게걸음 연습을 하고 있었다. 정육점에서 소 뼈다귀 사서 허리 다쳐 몸져 누운 어머니 찾아가는 길, 손톱으로 북 긁으면 슬레이트 낮은 지붕 위로 깨꽃 붉은 꽃잎이 묻어났다. '손톱으로 북 긁으면' 전문

 

 

 

공사장 빈터에서 인부들이 삼겹살을 구워 먹고 있다. 몇 장의 번개탄 위에 슬레이트 조각을 얹어 놓은 뒤 삼겹살을 펼치면 건조한 슬레이트의 표피들이 삼겹살의 기름을 흡수한다. 노릿노릿하고 맛있는 삼겹살. 먹는 동안 세상 근심 없어지는 삼겹살. 시인은 그 건조한 슬레이트의 낮은 지붕조차 손톱으로 북 긁고 싶어한다. 거기 피어나는 한줌의 혈흔. 깨꽃 붉은 잎새마다 피어오르는 그리운 혈육의 정! - 곽재구<시인> -

 

 

 

 

 

 

 

『밥 먹는 법』 - 정호승(1950~ ) - 밥상 앞에 무릎을 꿇지 말 것 눈물로 만든 밥보다 모래로 만든 밥을 먼저 먹을 것. 무엇보다도 전시된 밥은 먹지 말 것. 먹더라도 혼자 먹을 것. 아니면 차라리 굶을 것. 굶어서 가벼워질 것. 때때로 바람 부는 날이면 풀잎을 햇살에 비벼 먹을 것. 그래도 배가 고프면 입을 없앨 것. '밥 먹는 법' 전문

 

 

 

음력 갑신년 원단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또 한번 새해 첫날의 비나리를 할 수 있음은 행복한 일이다. 새해에는 가난하지만 따뜻하고 맛있는 밥을 먹자. 풀잎을 햇살에 비벼 먹을지언정 남의 쌀독을 기웃거리거나 남의 밥을 빼앗을 생각일랑 말자. 조금씩 지닌 것도 서로 나누며 많이 고생한 이웃들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바다 건너온 어려운 살붙이 형제들의 밥상 위에도 희고 눈부신 밥 한 그릇을 놓자. - 곽재구<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