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3-46화> 안군의기억4

바다의기억2006.10.24
조회6,663

대부분 중간고사가 끝났을 기간이네요.

 

모쪼록 날도 추워지는데

 

감기 조심하시길....

 

========================== 더 추워지기 전에 바다 가야 하는데 ==========================

 

 

내 생애 이렇게 뭔가 성취감을 느껴본 적이 있던가?


매일 눈을 떠서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뿌듯하고 보람찬 하루였다.


덕분에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제법 시간이 흐른 뒤였다.



= 민아야, 이거 어때? 얼마 전에 너 주려고 산 건데....


= ........ 오빠, 지난번에도 말했잖아요.

자꾸 이러는 거 부담스러워요.


= 에이, 부담가질 거 하나도 없어.

내가 좋아서 사주는 건데.



그녀는 분명히 내 곁에 머무르고 있었다.


언제라도 무릎베개를 하고 누울 수 있는 곳에,


언제라도 머리를 쓰다듬어달라고 할 수 있는 곳에


그녀는 있었다.


그건 행복했다.


하지만, 분명 중요한 뭔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명품 선물을 진상해 바쳐도,


레스토랑 전체를 빌려서 기념일을 축하해도,


어딜 가나 VIP고객 대접을 받을 수 있게 팁을 뿌려줘도,


그녀의 반응은 언제나 냉담했다.



=부담스러워요.=

=자꾸 이러지 말아요.=

=오빠 정말 왜 이래요.=


같은 말들은 이미 생활화 된지 오래였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말들이 형식상 하는 게 아니라고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는 내 선물들을 환불해버리기 일쑤였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이쯤 했으면 두 눈에 하트를 뿅뿅 거리며


나만을 바라보는 Pet이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저 먼 곳에서


도도하게 날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더 이상 뭘 해줘야 할지도 막막한데 말이다.



= ...... 민아야. 무릎베개 해 줘.


= ...... 낮잠 자려고요?


= 아니, 그냥.



내 맨션에서, 내 침대 위에서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울 수 있다.


예전 같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녀는 분명 변했고, 내 곁에 있다.



= 머리 쓰다듬어 줘.


= ...... 자장가도 불러 줘요?


= 안 잔다니까.



이럴 때면 그녀는 웃는다.


전혀 가식적이지 않은 웃음이다.


나를 보고 그녀가 웃어준다.


그리고 내 부탁대로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이런 점을 보면 분명 그녀를 얻었다고 할만 하다.


그럼 대체 뭐가 없는 거지?



= .... 나 사랑 안 하지?


= ..... 갑자기 그건 왜요?


= 솔직히 말해봐. 그렇지?


= ........



그렇다. 사랑이 없다.


그녀가 나를 보는 눈빛엔 늘 동정뿐이다.


그런 건 전혀 필요한 게 아닌데,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닌데 말이다.



그녀는 침묵했다.


그 침묵의 의미는 분명한 긍정이었다.


난 그녀를 위해 모든 걸 바쳤는데,


그녀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 왜? 왜 사랑 안 하는데?


= .......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 대체 뭐가 필요한 거야?

할 만큼 해 줬잖아? 필요한 게 있으면 말을 해!!


= .... 필요한 건 없어요. 아무 것도.



..... 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뭔가 바래주기를.


갖은 아양과 애교로 자신의 욕망을 포장하며


내게 매달리길 기대하고 있었다.



내게 모든 사랑과 정열을 쏟으며


내가 주는 선물들에 감격해하길 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부질없는 것이라고,


내가 가진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들이라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리고 지금도.



= 너.... 그냥 가.


= .......


= 질렸어. 이제 해줄 것도 없고,

해주고 싶은 것도 없어.


= 이미 말했잖아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 그럼 왜 그래! 왜 그렇게 늘.....



-불쌍하다는 눈으로....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얼마나 감정이 격했는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 했다.


애써 감정을 감추기 위해


눈가를 가리는 내 손을 그녀가 치웠다.



= 오빠, 오빤 날 사랑해요?


= 그래, 사랑해. 그래서 최선을 다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 그럼.... 왜 늘 그런 눈으로 날 봐요?


= ...... 무슨 소리야. 그건.


= 어때? 내가 이겼지? 빨리 항복해...

오빤 사랑이 아니라 게임을 하는 것 같아요.


= ....... 아니, 난 진심이었어.


= 정말 진심이었다면.....

오빠한테 부족한 걸 줬어야죠.

정말 소중한 것...


= 부족한 거? 뭘 말하는 거야?


= ...... 믿음.



그녀의 그 한 마디가,


굵은 송곳이 되어 가슴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왔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시리게,


눈물이 왈칵 나올 만큼 아프게,


나도 모르고 있던 상처를 일깨웠다.


나는.... 정말로 누군가를 믿어본 적이 있었나?



= ...... 오빠한테 정말 필요한 게 뭔지 알아요?


= 시끄러, 아무 말도 하지 마.


= 오빠 잘 때 어떤 모습으로 자는지 알아요?


= 그만하라니까! 내 말 안 들려?


= 오빠..... 정말 불쌍한 사람이에요.


= 닥쳐!!!



난 그녀의 무릎을 떨치고 일어나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른 사람에게 그런 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었다.


내가 못 가진 게, 내가 부족한 게 뭐가 있어서....!!



= 어쩌라고!! 그래서 지금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고!!


= 어떻게 하라는 소리가 아니에요.

어떻게 한다고 될 것도 아니죠. 그저....


= 웃기지 마! 지금 나하고 장난하는 거야?

필요한 게 있으면 말을 하란 말이야!

말을! 말만 해봐... 말만....!!



문득, 내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뭘 말하는 건지 다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 밖에 할 줄 모르는 내 자신이 우스웠다.



= 오빠.... 제발.....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내 머리를 lusingando(다정하게)하게 감싸 안았다.



왤까, 왜 이 따듯함이 난생 처음 느껴보는 것만 같을까...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여자를 안고,


얼마나 많은 여자를 가졌는데...


지금 이 따듯함이... 이렇게 낯설까...



= 야.... 저리 가.... 빨리.....


= ..... 괜찮아요. 오빠가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오빠 참 좋은 사람이에요.


= ....... 윽.....윽흑....흑..... 흑흑.... 으아아아아앙.....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울어본 건....


아버지가 엄마를 내쫓았을 때도 난 방에서 혼자 울었다.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천박한 아줌마가


내 머리에 손을 대고 뺨이 입을 맞추었을 때도,


난 목욕탕에서 얼굴을 씻으며 혼자 울었다.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우승했던 날도


난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혼자 울었다.


크리스마스 때도,


새해 첫 일출을 보러 갔을 때도,


난 혼자 차안에서 울었다.


piangendo(슬프게), tranquillo(억제하듯)......



다른 사람에게 눈물 따위 보일 수 없었다.


그들이 날 비웃을 까봐, 날 얕잡아 볼까봐....



= 마음껏 울어도 돼요....

지금까지 힘들었잖아요. 외로웠으니까...



그날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는 그녀밖에 모를 것이다.


난 한참 울다 지쳐


언제 그랬는지도 모르게 잠들어버렸으니까...




= .......



자고 일어났을 때의 기분은 생각보다 가뿐했다.


그동안 묵은 체증이 가셨다고나 할까....


굉장히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 일어났어요?



다행히 그녀는 내게 무릎베개를 해준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굉장히 머쓱한 기분이 든 난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러기엔 아쉬움이 너무 컸다.


결국 난 그 자세 그대로 그녀에게 물었다.



= 뭐 하나 물어봐도 돼?


= ..... 어떤 건데요?


= 기억이는 너한테 뭘 줬어?

뭐... 그 녀석이야 다 부족하니 줄 거야 많았겠지만.


= 기억이는.... 약함을 보여줬어요.

고슴도치처럼 몸을 가시 속에 숨기고 있으면서...

저한테만은 굳은살 하나도 없는 약한 손을 내밀었어요.

내가 늘 가시에 찔릴까봐 노심초사하면서...


= 고슴도치라... 딱 맞는 말이네.

결국은 호되게 찔렸잖아?


= 어쩔 수 없죠... 먼저 상처를 준 건 저였으니까요.

몸을 지키고 있던 가시가 다 꺾여서

어쩔 줄 모르는 기억이를.... 혼자 버려뒀으니까요....

그래도 믿음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 그 다른 사람이 네 동생이라도?


= 네.



여기서 더 비꼬기엔 그녀의 표정이 너무 확고해 보였기에


난 목 밑까지 올라온 투덜거림을 콧김으로 내보내 버렸다.



= ....... 난 역시 안 되겠니?


= ....미안해요.


= 그럼 왜 지금까지 내 옆에 있었어?


= 기억이랑 헤어지고 거울에서 본 내 얼굴이랑...

오빠 얼굴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동안 참 외로웠겠구나 싶어서요.


= ..... 지금은 어때 보이는데?


= 많이 좋아졌어요.


= .... 다행이네.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세상에 가지지 못한 것 하나 정도 있는 것도


아쉬운 데로 추억이 될 것 같았으니까.



= ....... 이만 가볼게요.


= 마지막으로....


= ......


= 내게 키스해 주겠어?



계속 생각했다.


지금 내 모습이 누군가와 닮았다는 걸....


그리고 어렵게 기억해 냈다.


M&L 공연 때 사채업자의 모습을...


그녀에게 마지막 키스를 구걸하던 무너진 사채업자의 모습을...



= ........



그녀는 내 이마에 입맞춤을 해주었다.


amorevole(사랑을 담아서).....



= 인생에도... da capo가 있었으면 좋겠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게.


= ...... 대신 spiritoso랑 ancora 가 있잖아요.

정신 차려서, 다시 한 번.


= 어? 민아 네가 그런 걸 어떻게....


=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잖아요?


= 하하.... 그래.... 그럼.... loso. (원위치로 돌아가)


= ...... generalpause. (쉬세요)



그렇게 그녀가 떠나가고 며칠 후,


내겐 소포 하나가 도착했다.


보낸 사람은 민아.


내용물은 어른 키 반 정도 되는 아이보리색 곰인형이었다.


그리고 동봉되어있는 조그만 카드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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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잘 때 너무 웅크리고 자는 것 같아요.


제가 안고 자던 건데 오빠 드릴게요.


옆에 두고 주무시면 좀 나을 거예요.


PS. 이름은 비너스에요. 예뻐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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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너스라고? 이 육중한 곰탱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