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예~ 예~ 나는 지금 어셔의 ‘yeah’에 맞춰 현란한 몸동작을 구사하고 있다. 동영상을 통해 익힌 나의 춤 솜씨는 더 이상 아마추어로 보이지 않는다. 몸치를 벌레보듯 하는 이 세상에서, 나와 같은 프로는 춤솜씨 또한 프로여야 하지 않을까? 나는 춤을 추며 거울을 바라본다. 댄스 동작과 함께 느낌을 담은 표정까지 지어 보인다. 멋있다.. 급기야 입고 있던 검은 티를 벗어 던지고 한층 나의 춤에 심취하는 순간..
[따르르르릉]
전화가 울린다.
“학학..네 당신의 빈자리를 책임지겠습니다. 학학..”
숨이 찬다. 나도 모르게 계속되는 거친 숨소리.. 고객이 오해하지 않기를..
“당신이 빈자리맨인가요?”
맥없는 여자의 목소리다.
“네 그렇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오늘 비가 오는군요.”
창 밖을 바라본다. 역시나 비가 내리고 있다.
“네 그렇군요..
“특별히 바라는 건 없어요. 하지만 이런 날 혼자 터벅터벅 집에 들어가는 건 너무 우울할 것 같네요.”
마치 나에게 신세한탄을 하는 듯한 이 여자.. 도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 우산을 안 가지고 왔는데.. 저 퇴근시간에 맞춰서 우산 좀 가져다 주시겠어요?”
순간 아연실색하고 만다. 고작 나에게 원하는 것이 우산이었단 말인가?
“후후 이건 핑계구요.. 이런 날은 누군가가 우산을 들고 날 마중나와줬으면 해요. 말동무도 되 주시구.. 외로움도 좀 덜어주시구요.. 가능한가요?”
하긴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외로움은 배가 되곤 한다. 이런 날은 누군가와 이 쓸쓸함을 함께 나누고 싶은 법.
“예 알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추고 있던 춤을 화려하게 마무리 짓고는 샤워실로 향한다. 샤워 후 젖은 머리를 툴툴 털며 커피한잔을 진하게 탄다. 커피를 가득 부은 머그잔에서 김이 물씬 퍼져 나온다. 나는 머그잔을 두 손 가득 감싼 채 비가 내리는 쓸쓸한 창 밖을 바라보며 한껏 감상에 빠진다. 고독이 잘 어울리는 남자.. 지금 나는 얼마나 고독한 모습인가.. 나는 문득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본다. 무척이나 분위기 있는 내 모습.. 기분이 한층 센치해진다. 나는 커피를 반쯤 마신 후 옷장으로 향한다. 그렇다! 오늘의 컨셉은.. 고독이다.
오늘은 의뢰인의 기분에 맞춰 비가 오는 분위기와 완벽히 조화를 이룰 생각이다. 여자는 분위기에 약한 법이니까.. 옷장 속을 들여다보며 잠시 고민하던 난, 본능적으로 몇 벌의 옷을 집어낸다. 오늘의 메인 컬러는 고독의 컬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컬러! 브라운이다. 나는 브라운 빛이 감도는 구제진과 깊이 파인 섹시한 까만 티셔츠를 받쳐입고 초콜릿 빛의 자켓을 걸친다. 마지막으로 블랙컬러의 비니를 눌러쓴 나는 거울을 들여다 본다. 고독 그 자체.. 나는 브라운 컬러의 심플한 컨버스를 신고 사무실을 나선다.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은 우산을 쓰고 걸어다니기 보다 아늑한 곳에 들어가고 싶기 마련.. 나는 나의 의뢰인을 위해 나의 애마를 끌고 나갈 작정이다. 비오는 날 자신을 기다리는 남자의 차안..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약간의 냉기가 느껴지는 공기속에서 그녀에게 따스한 담요를 걸쳐준다. 보송한 공기와 아늑한 분위기.. 그리고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여자는 넋을 잃고 말것이다.
나의 애마는 어느 새 테헤란로를 들어선다. 웅장한 빌딩들이 가득한 도로.. 나는 그 중 가장 크고 멋진 빌딩앞에 멈춰서 그 웅장한 빌딩을 올려다 본다. 그녀는 회계사라고 했다. 이 빌딩 어디쯤 있을까? 시계를 본다. 이제 곧 그녀의 퇴근시간.. 나는 그녀의 요청대로 라임빛 우산을 쓰고 그녀가 요구한 제스쳐를 시작한다. 한 손으로 계속 턱을 쓰다듬는 이 제스쳐는 꽤 남성다운 느낌이 가미되어 있다. 오늘은 시작부터 느낌이 좋다.
"휘리휘리.. 자기왔어?"
순간 허리에 둘러지는 거북스런 온기에 화들짝 놀라 옆을 바라본다.
"오우~ 오늘 괜찮은데?"
마흔? 그래 최소 마흔이라 확신되는 여자가 나를 올려다보며 싱글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흠짓 경계태세를 취한다.
"어머 남친?"
옆에 있던 여자들이 황홀한 표정으로 나를 이러저리 살피더니 감탄스런 눈길로 마흔여자를 우러러 본다.
"어~ 우리 자기야가 나 우산안들고 온줄 알구~홍홍.."
마흔여자는 홍홍 콧소리를 내며 더욱 나의 겨드랑이 밑을 파고든다. 나는 뻣뻣히 몸이 굳어간다.
"얘들아~ 난 우리 자기야랑 데이트좀 해야겠다. 먼저 가~"
마흔여자는 동료들을 워이워이 몰아내다시피하며 나를 올려다본다. 그렇잖아도 하늘을 바라보는 콧구멍이 캄캄한 우물처럼 내 눈앞에 뻥뚫려 있다. 순간 뇌라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상상과 함께 몸이 떨려온다.
"오늘 거래.. 꽤 괜찮은걸요?"
여자는 심히 흡족한 표정으로 깊숙히 팔짱을 낀다. 라임및 우산속의 언밸런스한 한쌍.. 나는 나의 애마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반짝이는 나의 애마.. 나는 앞문을 열어 그녀에게 타라는 제스쳐를 취한다. 하지만 여자는 차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 차문을 닫아버린다. 그리고 황당해 마지않는 내 손을 잡아끈다. 여자는 말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간다. 나는 그저 그녀에게 이끌려 갈 뿐.. 여자는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우리가 걸음을 멈춘 곳엔 나의 꿈속에서만 존재하리라 생각했던 늘씬하게 잘 빠진 외제차 하나가 서 있다. 여자는 차키를 내 손에 톡 떨어뜨리고는 조수석문을 열고 털썩 들어앉는것이 아닌가!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떨리는 손으로 차 문을 열고 꿈 속의 차를 탄다. 키를 꽂고.. 핸들을 잡는다. 차는 부드러운 엔진소리와 함께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여자는 비오는 오후와 잘 어울리는 재즈음악을 틀고 만족스럽다는 듯 목을 쭉 뻗으며 슬그머니 나를 바라본다. 부담백배라는 말이 이보다 어울릴 수는 없으리라.. 나는 잔뜩 굳은 몸을 더욱 움츠리며 드리이빙에 열중한다.
"이름이.."
"저.. 그냥 이빈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사업상 내 이름은 기밀이다.
"빈? 호호 빈자리맨의 빈인가? 호호호"
여자의 모든 말과 행동은 뭔가 정도를 넘어섰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over..
"저.. 그럼.. 이기사~"
여자는 목소리를 비틀어가며 나를 부른다. 농담조차도 거북스런 느낌.
"네?"
"여기서 우회전해요."
여자는 그때부터 나의 진로를 지시하기 시작한다. 나는 인간 네비게이터가 이끄는 길을 따라 열심히 운전해 몰두중이다. 하지만 마흔여자의 손이 내 허벅지를 자꾸 쓰다듬는다. 묘하면서도 거북한 느낌.. 빨리 어디라도 도착함으로써 지금 이 상황이 종료되기를..
거북한 상황이 계속된지 1시간 째.. 우리는 어느 새 복잡한 도로를 벗어나 한적한 교외를 달리고 있다.
"이기사~ 저기 저 앞에서 좀 세우지? 좀 피곤하네.."
마흔여자는 꽤나 피곤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제야 내 허벅지에서 질퍽한 손을 떼어낸다. 나는 마음속으로 큰 한숨을 돌리며 여자가 가리키는 쪽을 무심히 바라본다. 그러나..
"사모님..저긴.."
"어머? 사모님이라니? 오늘은 내 남자친구역할로 온거 아닌가?"
마흔여자가 기겁을 하며 나무라듯 대꾸한다.
"아..네 하지만 저긴.."
저긴.. 저긴.. 러브호텔이 아닌가? 나의 사업철학에서 벗어나는 곳이 아니더냔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안된다. 안된단 말이다.
"저.. 계약조건을 잘 못보셨는가 본데.. 저것만큼은 제가 철저히 지키는 스타일이라.."
최대한 매너를 갖춰 마흔여자가 무안하지 않게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마흔여자의 얼굴은 어느새 내가
무안하리만치 일그러져 있다..
"지금 저를 뭘로 보시는 거에요?"
여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다. 나는 더욱 당황한다.
"아니 제 뜻은.."
"지금 저 무시하시는 거에요? 제가 욕구불만에 몸이 달아서 당신을 산줄 알아? 그런 이유라면 남자들
이 줄을 섰어. 이거 왜이래!"
"아.."
나는 감정없는 감탄사를 토해낸다.
"난 그저.. 남자들로도 해소할 수 없는 외로움을 달래보고 싶었다구.. 타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결국
은 혼자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찰을 해 보고 싶었단 말이야."
유능한 회계사라더니.. 역시 꽤 고차원적인 여자인가보다. 어쨌든 난 어줍잖은 반항을 접고 러브호텔앞에 당도한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찰이라.. 한데 그걸 왜 러브호텔에서 해야 한단 말인가. 차에서 내린 여자는 약간은 수줍은 자태로 나의 옆에 다가와 내 팔짱을 끼고 호텔로 향한다. 왠지 내가 끌려 가는 이 느낌은 단지 이 여자의 걸음이 나보다 빨라서 일까?
열쇠를 받은 우리는 3층으로 향한다. 303호.. 나는 발걸음이 무겁다. 그리고.. 303호다. 문을 열자 꽤 아늑한 장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방 가득 장식된 보라빛이 우울한 날씨와 어우러져 한층 더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어머.. 보라빛 천지네? 그대 모습은.. 보랏빛 처럼..."
여자는 보랏빛 향기란 노래를 흥얼거리며 섹시를 표방한 눈길로 자꾸 나를 바라본다. 웃길려는 건지
유혹하려는 건지.. 여자의 의도를 알 수가 없다. 난감하다. 나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눈을 돌리고 만다.
보랏빛.. 나는 왜 한순간 엄지공주, 그녀를 떠올린 걸까?
"어머 왜 이렇게 어정쩡하게 서 있을까? 여기 와서 좀 앉아 봐요.."
여자는 내 손을 끌고 작은 쇼파에 나를 앉힌다.
"저기 고찰을 한다고.."
나는 불안한다. 어떻게든 고찰이라는 거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요.. 커피라도 한 잔씩 마시면서 고찰을 해 볼까요?"
"아, 예. 커피는 제가 타겠습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탁자위에 놓인 머그컵에 커피믹스를 넣고 커피를 타기 시작한다.
"그대 모습은.. 보랏빛 처럼.."
여자는 또 노래를 부르고 있다. 보랏빛 향기가 이토록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멜로디였던가? 나는 커피
타기에 더욱 열중한다.
"그대 모습은.. 보랏빛 처럼.."
어느 순간 그 노래가 내 등 뒤에서 멈춘다. 온몸이 쭈뼛하고 얼어붙는다. 곧이어 여자의 손이 내 허리를 두르고 여자의 의외로 풍만한 가슴이 내 등에 짓눌려 옴이 느껴진다. 나는 어색함을 감추고자 끝까지 두잔의 커피를 완성해 낸다.
"저.. 커피 드세요.."
여자가 떨어지기를 간곡히 바라며 커피를 권한다.
"그대 모습은.. 보랏빛 처럼.."
여자는 대답대신 내 등에 붙어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여자의 목소리가 내 등허리에서 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온 몸이 닭살로 진동하는 느낌.. 이 여자 미친 건 아닐까? 나의 공포감은 극에 달한
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떼어낸다. 여자는 의외로 순순히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나는 커피잔을 들고 뒤돌아 여자에게 다시한번 커피를 권한다. 하지만 여자는 그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 보고 있다. 우물처럼 캄캄한 콧구멍 두개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커피잔만 들고 서 있는 꼴이 되었다. 여자는 피식 웃더니 내 비니를 슥 벗긴다.
"실내에선 모자를 벗어야지!"
여자는 훈계조로 말하며 내 비니를 쇼파로 던져버린다. 양손에 머그잔을 들고 있는 나로서는 반항할
도리가 없다.
"어머.. 모자 벗으니깐 자기 더 섹시하다."
여자는 더욱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그렁그렁 눈물까지 맺힐 정도로 감동한 모양이다.
"저기 커피.."
난 어떻게든 화제를 전환하고자 한다. 우리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찰을 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피부도 어쩜.."
여자는 손을 뻗어 내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저기.."
나는 어색한 시선처리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여자의 대담한 시선은 어느새 내 가슴에 멈추어 있다.
"어머.. 자기 이 갑바좀 봐.."
여자는 내 볼에서 손을 떼어 내더니 다급히 나의 자켓을 걷어내며 내 단단한 가슴을 쓰다듬는다. 얇은 티셔츠 아래 잘 다듬어진 가슴의 윤곽이 그대로 들어난다. 여자는 급기야 티셔츠 아래로 손을 집어넣
는다. 여자의 뜨거운 손길이 그대로 나의 가슴에 전해진다.
"저.. 저기.."
나는 잔뜩 당황한다.
"가만 있어요. 그냥 살을 맞대고 싶을 뿐이에요. 인간대 인간으로 교감하는 방법이죠."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래 살을 맞대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여자는 여기서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듯 나의 티셔츠를 쭉 걷어올리더니 내 가슴에 얼굴을 묻는 것이 아닌가.
"저.. 사모님.."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부를려면 자기라고 하던가."
여자의 목소리는 교태로우면서도 시퍼런 날이 서 있다.
"커피 한잔 하시면서.."
이 커피라도 내려놓고 싶을 뿐이다.
"자긴 커피 마시고 있어. 난 이거 먹을래."
여자는 소름끼치는 이 한마디와 함께 곧 내 가슴에 입을 맞추기시작한다.
"고찰을 하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당황한 나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여자는 흠짓 동작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 본다. 내가 너무 무안하게 만든 거일까? 조금 미안해 지는 찰나다. 하지만 여자의 눈에 당황한 빛은 온데간데 없다. 여자의 눈
동자는 이미 이성을 상실했다.
"고찰?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고찰을 시작해 볼까?"
여자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벨트를 풀어헤치기시작한다.
[쨍그랑]
머그잔을 떨어뜨렸다.
"앗, 뜨거!"
여자가 비명을 지른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번개처럼 빠르게, 표범처럼 날렵하게 방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방을 나오자 마자 이제 막 들어서는 한 커플과 마주친다. 티셔츠는 목까지 말려올라가 있고 벨트는 반쯤 풀린 나의 모습에 그들이 더욱 민망해 한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가까스로 그 호텔을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밖은 아직 비가 온다. 공기가 차다. 하지만 타고 갈 차가 없다. 나는 무작정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처럼 나의 사업에 회의를 느낀 적은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다. 빗방울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춥다.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다.
빈자리맨-고독한 메이트
3. 고독한 메이트
예~ 예~ 예~
나는 지금 어셔의 ‘yeah’에 맞춰 현란한 몸동작을 구사하고 있다. 동영상을 통해 익힌 나의 춤 솜씨는 더 이상 아마추어로 보이지 않는다. 몸치를 벌레보듯 하는 이 세상에서, 나와 같은 프로는 춤솜씨 또한 프로여야 하지 않을까? 나는 춤을 추며 거울을 바라본다. 댄스 동작과 함께 느낌을 담은 표정까지 지어 보인다. 멋있다.. 급기야 입고 있던 검은 티를 벗어 던지고 한층 나의 춤에 심취하는 순간..
[따르르르릉]
전화가 울린다.
“학학..네 당신의 빈자리를 책임지겠습니다. 학학..”
숨이 찬다. 나도 모르게 계속되는 거친 숨소리.. 고객이 오해하지 않기를..
“당신이 빈자리맨인가요?”
맥없는 여자의 목소리다.
“네 그렇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오늘 비가 오는군요.”
창 밖을 바라본다. 역시나 비가 내리고 있다.
“네 그렇군요..
“특별히 바라는 건 없어요. 하지만 이런 날 혼자 터벅터벅 집에 들어가는 건 너무 우울할 것 같네요.”
마치 나에게 신세한탄을 하는 듯한 이 여자.. 도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 우산을 안 가지고 왔는데.. 저 퇴근시간에 맞춰서 우산 좀 가져다 주시겠어요?”
순간 아연실색하고 만다. 고작 나에게 원하는 것이 우산이었단 말인가?
“후후 이건 핑계구요.. 이런 날은 누군가가 우산을 들고 날 마중나와줬으면 해요. 말동무도 되 주시구.. 외로움도 좀 덜어주시구요.. 가능한가요?”
하긴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외로움은 배가 되곤 한다. 이런 날은 누군가와 이 쓸쓸함을 함께 나누고 싶은 법.
“예 알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추고 있던 춤을 화려하게 마무리 짓고는 샤워실로 향한다. 샤워 후 젖은 머리를 툴툴 털며 커피한잔을 진하게 탄다. 커피를 가득 부은 머그잔에서 김이 물씬 퍼져 나온다. 나는 머그잔을 두 손 가득 감싼 채 비가 내리는 쓸쓸한 창 밖을 바라보며 한껏 감상에 빠진다. 고독이 잘 어울리는 남자.. 지금 나는 얼마나 고독한 모습인가.. 나는 문득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본다. 무척이나 분위기 있는 내 모습.. 기분이 한층 센치해진다. 나는 커피를 반쯤 마신 후 옷장으로 향한다. 그렇다! 오늘의 컨셉은.. 고독이다.
오늘은 의뢰인의 기분에 맞춰 비가 오는 분위기와 완벽히 조화를 이룰 생각이다. 여자는 분위기에 약한 법이니까.. 옷장 속을 들여다보며 잠시 고민하던 난, 본능적으로 몇 벌의 옷을 집어낸다. 오늘의 메인 컬러는 고독의 컬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컬러! 브라운이다. 나는 브라운 빛이 감도는 구제진과 깊이 파인 섹시한 까만 티셔츠를 받쳐입고 초콜릿 빛의 자켓을 걸친다. 마지막으로 블랙컬러의 비니를 눌러쓴 나는 거울을 들여다 본다. 고독 그 자체.. 나는 브라운 컬러의 심플한 컨버스를 신고 사무실을 나선다.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은 우산을 쓰고 걸어다니기 보다 아늑한 곳에 들어가고 싶기 마련.. 나는 나의 의뢰인을 위해 나의 애마를 끌고 나갈 작정이다. 비오는 날 자신을 기다리는 남자의 차안..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약간의 냉기가 느껴지는 공기속에서 그녀에게 따스한 담요를 걸쳐준다. 보송한 공기와 아늑한 분위기.. 그리고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여자는 넋을 잃고 말것이다.
나의 애마는 어느 새 테헤란로를 들어선다. 웅장한 빌딩들이 가득한 도로.. 나는 그 중 가장 크고 멋진 빌딩앞에 멈춰서 그 웅장한 빌딩을 올려다 본다. 그녀는 회계사라고 했다. 이 빌딩 어디쯤 있을까? 시계를 본다. 이제 곧 그녀의 퇴근시간.. 나는 그녀의 요청대로 라임빛 우산을 쓰고 그녀가 요구한 제스쳐를 시작한다. 한 손으로 계속 턱을 쓰다듬는 이 제스쳐는 꽤 남성다운 느낌이 가미되어 있다. 오늘은 시작부터 느낌이 좋다.
"휘리휘리.. 자기왔어?"
순간 허리에 둘러지는 거북스런 온기에 화들짝 놀라 옆을 바라본다.
"오우~ 오늘 괜찮은데?"
마흔? 그래 최소 마흔이라 확신되는 여자가 나를 올려다보며 싱글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흠짓 경계태세를 취한다.
"어머 남친?"
옆에 있던 여자들이 황홀한 표정으로 나를 이러저리 살피더니 감탄스런 눈길로 마흔여자를 우러러 본다.
"어~ 우리 자기야가 나 우산안들고 온줄 알구~홍홍.."
마흔여자는 홍홍 콧소리를 내며 더욱 나의 겨드랑이 밑을 파고든다. 나는 뻣뻣히 몸이 굳어간다.
"얘들아~ 난 우리 자기야랑 데이트좀 해야겠다. 먼저 가~"
마흔여자는 동료들을 워이워이 몰아내다시피하며 나를 올려다본다. 그렇잖아도 하늘을 바라보는 콧구멍이 캄캄한 우물처럼 내 눈앞에 뻥뚫려 있다. 순간 뇌라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상상과 함께 몸이 떨려온다.
"오늘 거래.. 꽤 괜찮은걸요?"
여자는 심히 흡족한 표정으로 깊숙히 팔짱을 낀다. 라임및 우산속의 언밸런스한 한쌍.. 나는 나의 애마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반짝이는 나의 애마.. 나는 앞문을 열어 그녀에게 타라는 제스쳐를 취한다. 하지만 여자는 차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 차문을 닫아버린다. 그리고 황당해 마지않는 내 손을 잡아끈다. 여자는 말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간다. 나는 그저 그녀에게 이끌려 갈 뿐.. 여자는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우리가 걸음을 멈춘 곳엔 나의 꿈속에서만 존재하리라 생각했던 늘씬하게 잘 빠진 외제차 하나가 서 있다. 여자는 차키를 내 손에 톡 떨어뜨리고는 조수석문을 열고 털썩 들어앉는것이 아닌가!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떨리는 손으로 차 문을 열고 꿈 속의 차를 탄다. 키를 꽂고.. 핸들을 잡는다. 차는 부드러운 엔진소리와 함께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여자는 비오는 오후와 잘 어울리는 재즈음악을 틀고 만족스럽다는 듯 목을 쭉 뻗으며 슬그머니 나를 바라본다. 부담백배라는 말이 이보다 어울릴 수는 없으리라.. 나는 잔뜩 굳은 몸을 더욱 움츠리며 드리이빙에 열중한다.
"이름이.."
"저.. 그냥 이빈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사업상 내 이름은 기밀이다.
"빈? 호호 빈자리맨의 빈인가? 호호호"
여자의 모든 말과 행동은 뭔가 정도를 넘어섰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over..
"저.. 그럼.. 이기사~"
여자는 목소리를 비틀어가며 나를 부른다. 농담조차도 거북스런 느낌.
"네?"
"여기서 우회전해요."
여자는 그때부터 나의 진로를 지시하기 시작한다. 나는 인간 네비게이터가 이끄는 길을 따라 열심히 운전해 몰두중이다. 하지만 마흔여자의 손이 내 허벅지를 자꾸 쓰다듬는다. 묘하면서도 거북한 느낌.. 빨리 어디라도 도착함으로써 지금 이 상황이 종료되기를..
거북한 상황이 계속된지 1시간 째.. 우리는 어느 새 복잡한 도로를 벗어나 한적한 교외를 달리고 있다.
"이기사~ 저기 저 앞에서 좀 세우지? 좀 피곤하네.."
마흔여자는 꽤나 피곤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제야 내 허벅지에서 질퍽한 손을 떼어낸다. 나는 마음속으로 큰 한숨을 돌리며 여자가 가리키는 쪽을 무심히 바라본다. 그러나..
"사모님..저긴.."
"어머? 사모님이라니? 오늘은 내 남자친구역할로 온거 아닌가?"
마흔여자가 기겁을 하며 나무라듯 대꾸한다.
"아..네 하지만 저긴.."
저긴.. 저긴.. 러브호텔이 아닌가? 나의 사업철학에서 벗어나는 곳이 아니더냔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안된다. 안된단 말이다.
"저.. 계약조건을 잘 못보셨는가 본데.. 저것만큼은 제가 철저히 지키는 스타일이라.."
최대한 매너를 갖춰 마흔여자가 무안하지 않게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마흔여자의 얼굴은 어느새 내가
무안하리만치 일그러져 있다..
"지금 저를 뭘로 보시는 거에요?"
여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다. 나는 더욱 당황한다.
"아니 제 뜻은.."
"지금 저 무시하시는 거에요? 제가 욕구불만에 몸이 달아서 당신을 산줄 알아? 그런 이유라면 남자들
이 줄을 섰어. 이거 왜이래!"
"아.."
나는 감정없는 감탄사를 토해낸다.
"난 그저.. 남자들로도 해소할 수 없는 외로움을 달래보고 싶었다구.. 타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결국
은 혼자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찰을 해 보고 싶었단 말이야."
유능한 회계사라더니.. 역시 꽤 고차원적인 여자인가보다. 어쨌든 난 어줍잖은 반항을 접고 러브호텔앞에 당도한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찰이라.. 한데 그걸 왜 러브호텔에서 해야 한단 말인가. 차에서 내린 여자는 약간은 수줍은 자태로 나의 옆에 다가와 내 팔짱을 끼고 호텔로 향한다. 왠지 내가 끌려 가는 이 느낌은 단지 이 여자의 걸음이 나보다 빨라서 일까?
열쇠를 받은 우리는 3층으로 향한다. 303호.. 나는 발걸음이 무겁다. 그리고.. 303호다. 문을 열자 꽤 아늑한 장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방 가득 장식된 보라빛이 우울한 날씨와 어우러져 한층 더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어머.. 보라빛 천지네? 그대 모습은.. 보랏빛 처럼..."
여자는 보랏빛 향기란 노래를 흥얼거리며 섹시를 표방한 눈길로 자꾸 나를 바라본다. 웃길려는 건지
유혹하려는 건지.. 여자의 의도를 알 수가 없다. 난감하다. 나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눈을 돌리고 만다.
보랏빛.. 나는 왜 한순간 엄지공주, 그녀를 떠올린 걸까?
"어머 왜 이렇게 어정쩡하게 서 있을까? 여기 와서 좀 앉아 봐요.."
여자는 내 손을 끌고 작은 쇼파에 나를 앉힌다.
"저기 고찰을 한다고.."
나는 불안한다. 어떻게든 고찰이라는 거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요.. 커피라도 한 잔씩 마시면서 고찰을 해 볼까요?"
"아, 예. 커피는 제가 타겠습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탁자위에 놓인 머그컵에 커피믹스를 넣고 커피를 타기 시작한다.
"그대 모습은.. 보랏빛 처럼.."
여자는 또 노래를 부르고 있다. 보랏빛 향기가 이토록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멜로디였던가? 나는 커피
타기에 더욱 열중한다.
"그대 모습은.. 보랏빛 처럼.."
어느 순간 그 노래가 내 등 뒤에서 멈춘다. 온몸이 쭈뼛하고 얼어붙는다. 곧이어 여자의 손이 내 허리를 두르고 여자의 의외로 풍만한 가슴이 내 등에 짓눌려 옴이 느껴진다. 나는 어색함을 감추고자 끝까지 두잔의 커피를 완성해 낸다.
"저.. 커피 드세요.."
여자가 떨어지기를 간곡히 바라며 커피를 권한다.
"그대 모습은.. 보랏빛 처럼.."
여자는 대답대신 내 등에 붙어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여자의 목소리가 내 등허리에서 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온 몸이 닭살로 진동하는 느낌.. 이 여자 미친 건 아닐까? 나의 공포감은 극에 달한
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떼어낸다. 여자는 의외로 순순히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나는 커피잔을 들고 뒤돌아 여자에게 다시한번 커피를 권한다. 하지만 여자는 그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 보고 있다. 우물처럼 캄캄한 콧구멍 두개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커피잔만 들고 서 있는 꼴이 되었다. 여자는 피식 웃더니 내 비니를 슥 벗긴다.
"실내에선 모자를 벗어야지!"
여자는 훈계조로 말하며 내 비니를 쇼파로 던져버린다. 양손에 머그잔을 들고 있는 나로서는 반항할
도리가 없다.
"어머.. 모자 벗으니깐 자기 더 섹시하다."
여자는 더욱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그렁그렁 눈물까지 맺힐 정도로 감동한 모양이다.
"저기 커피.."
난 어떻게든 화제를 전환하고자 한다. 우리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찰을 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피부도 어쩜.."
여자는 손을 뻗어 내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저기.."
나는 어색한 시선처리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여자의 대담한 시선은 어느새 내 가슴에 멈추어 있다.
"어머.. 자기 이 갑바좀 봐.."
여자는 내 볼에서 손을 떼어 내더니 다급히 나의 자켓을 걷어내며 내 단단한 가슴을 쓰다듬는다. 얇은 티셔츠 아래 잘 다듬어진 가슴의 윤곽이 그대로 들어난다. 여자는 급기야 티셔츠 아래로 손을 집어넣
는다. 여자의 뜨거운 손길이 그대로 나의 가슴에 전해진다.
"저.. 저기.."
나는 잔뜩 당황한다.
"가만 있어요. 그냥 살을 맞대고 싶을 뿐이에요. 인간대 인간으로 교감하는 방법이죠."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래 살을 맞대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여자는 여기서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듯 나의 티셔츠를 쭉 걷어올리더니 내 가슴에 얼굴을 묻는 것이 아닌가.
"저.. 사모님.."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부를려면 자기라고 하던가."
여자의 목소리는 교태로우면서도 시퍼런 날이 서 있다.
"커피 한잔 하시면서.."
이 커피라도 내려놓고 싶을 뿐이다.
"자긴 커피 마시고 있어. 난 이거 먹을래."
여자는 소름끼치는 이 한마디와 함께 곧 내 가슴에 입을 맞추기시작한다.
"고찰을 하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당황한 나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여자는 흠짓 동작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 본다. 내가 너무 무안하게 만든 거일까? 조금 미안해 지는 찰나다. 하지만 여자의 눈에 당황한 빛은 온데간데 없다. 여자의 눈
동자는 이미 이성을 상실했다.
"고찰?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고찰을 시작해 볼까?"
여자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벨트를 풀어헤치기시작한다.
[쨍그랑]
머그잔을 떨어뜨렸다.
"앗, 뜨거!"
여자가 비명을 지른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번개처럼 빠르게, 표범처럼 날렵하게 방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방을 나오자 마자 이제 막 들어서는 한 커플과 마주친다. 티셔츠는 목까지 말려올라가 있고 벨트는 반쯤 풀린 나의 모습에 그들이 더욱 민망해 한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가까스로 그 호텔을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밖은 아직 비가 온다. 공기가 차다. 하지만 타고 갈 차가 없다. 나는 무작정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처럼 나의 사업에 회의를 느낀 적은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다. 빗방울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춥다.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