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댄스스포츠(볼룸댄스)를 한다는 것은 일부 전문인들만의 전유물이거나 혹은 소위 춤바람난 아주머니가 장바구니를 들고 몰래 캬바레를 다니는 퇴폐문화의 전형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사실 춤을 춘다고 하는 것은 장단에 맞추어 손이나 발 혹은 몸을 움직이는 인간의 본능적인 몸짓이다. 아주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올 때면 저절로 어깨가 들썩거리고 몸이 움직이는 것처럼 춤은 인간 감정의 가장 원형적인 형태인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행위를 인위적인 것이 아닌 인간 본연에 숨어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다만 그것이 시대가 지나고 문화의 코드가 바뀌어감에 따라서 지역적 유형에 맞도록 형태가 조금씩 변화되어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뿐이다.
그 중 댄스스포츠와도 같은 커플댄스는 유럽 귀족의 사교문화에서 출발하였고 유럽 대중에 의하여 꽃을 피운 매우 고급스러운 문화이며,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파된 것도 바로 구한말 고종 황제때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나 일본 유학생 등 지식층에 의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고급문화가 사회적 불륜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아마도 조선시대 유교적 관념이 현대 사회에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남녀칠세부동석으로 대표되는 유교의 남녀간 행동에 대한 규정이 사회 전반에 걸쳐 팽배했던 시절 남녀가 서로 끌어않고 춤을 추는 행동은 기성세대에게 있어 그야말로 전통적 사고에 정면으로 도전을 하는 행동으로 밖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회의 지배층 대부분이 유교적 가정에서 자란 사람 들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댄스를 ‘사회악’으로 규정하여 각종 탄압을 하였던 이들의 행위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1)”과 박인수 사건2), 차관부인 인순애 춤바람 간통사건, 70년대 7공자 사건 등 춤과 관련하여 일어난 사건들은 댄스 자체를 불륜의 씨앗으로 보기에 충분했고 춤바람은 곧 외도라는 의미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아울러 한국전쟁, 4.19, 5.16 등 사회적 혼란이 심하고 먹고 살기 어려울 정도로 경제적인 상황이 열악했던 시절 춤을 춘다는 자체만으로도 사회적 문제를 야기 시킨다 하여 역대 정권들 모두 탄압을 한 것이 볼룸댄스를 더욱 더 밀실로 끌어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필자가 댄스스포츠를 처음 접하고 배웠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왜 그런 쓸모없는 것을 그것도 교수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배우느냐는 질책을 많이 받았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건강상의 이유로 댄스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부터 별명이 제비로 바뀌었고 한동안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댄스를 처음 배웠던 당시 필자의 기억 속에 가장 견디기 힘든 어려움은 각 종목마다 있는 복잡한 휘겨들을 배우고 루틴을 기억하며 자세를 올바르게 고치는 것보다 주변 사람들의 비아냥거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해마다 가을이 되면 일주일이 멀다하고 각종 단체와 대학에서 주최하는 댄스스포츠 시합이 열리고, 초, 중, 고등학교에서는 방과 후 특별활동 과목으로 각광을 받고 있고, 대학의 교양 강좌 중 가장 많은 수강생이 몰리는 과목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과거 댄스스포츠를 불륜의 씨앗이라며 비아냥거렸던 많은 사람들까지도 이제 댄스스포츠는 한번쯤은 꼭 배워둘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 좋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댄스가 오늘날 최고의 스포츠로 각광을 받고 있는 풍경을 보면 시대의 가치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변화가 심한 것인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새삼스럽게 댄스스포츠를 배우고 또 즐기고 있는 것일까? 댄스스포츠에 대한 견해가 180° 달라진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댄스스포츠가 가지고 있는 숨어있는 기능에 대하여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과거 볼룸댄스라는 명칭에서 댄스스포츠로 바뀌었기 때문에 인기가 있게 되었다. 라는 몇몇 사람들의 말은 이러한 열기를 설명하기에는 그 이치가 너무도 단순하다. 내용물은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포장이 바뀌었다고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 수는 있으나 지속적으로 그것을 유지시키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댄스스포츠가 재미있어서 혹은 사회적 분위기가 댄스스포츠를 할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어서 댄스스포츠를 즐긴다고 설명하기에는 지금의 열기가 너무도 대단하다.
결국 댄스스포츠는 예전부터 중요하게 생각해오던 어떤 것들이 있는데 그러한 것들을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며, 명칭의 변화에 따라 그러한 숨겨져 있던 내용들이 새롭게 부각되면서 댄스스포츠의 철학들이 우리의 삶에 많은 것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댄스스포츠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철학을 제시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댄스스포츠의 명칭에 대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혹자들은 댄스스포츠라는 명칭이 이전의 명칭인 볼룸댄스보다는 무엇인가 어색하다고 말을 한다. 다시 말해서 댄스면 댄스이고, 스포츠면 스포츠이지 명칭은 자체가 색깔 면에서 선명함이 떨어진다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DSF(International Dance Sport Federation)나 IOC에서는 그간 사용하던 볼룸댄스라는 명칭을 없애고 댄스스포츠라 명명한 것에는 무엇인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일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댄스스포츠가 예술미가 충만한 극적인 아름다움과 과학적인 스포츠 요소를 모두 내포하고 있는 아주 특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댄스스포츠의 본래 명칭이 볼룸댄스라는 것을 감안하였을 때 분명 댄스스포츠는 춤이라는 예술적인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댄스의 기원을 살펴보면 최초에는 원시종합예술의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원시인들은 사냥을 떠나 많은 수확을 올렸을 때 그 기쁨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춤을 추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너무도 기쁜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의 기쁨을 몸으로 표현하며 이리저리 움직였고, 그러한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리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단한 수확의 치적은 동굴의 벽화를 통하여 표현하였고, 이윽고 언어가 탄생하면서 언어를 사용하여 미학의 극대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결국 댄스는 문학과 미술, 그리고 음악이라는 다양한 예술의 장르 중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것이며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몸이라고 하는 원초적인 매개체를 통하여 표현하는 순수함인 것이다.
그리이스 로마신화에도 댄스의 기원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불과 관계가 있다. 신들의 세상만이 존재했던 시절, 이 땅에 생명을 만들었던 것은 바로 프로메테우스였다. 프로메테우스는 이 세상에 많은 동물을 만든 뒤 맨 마지막에 인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프로메테우스 최고의 작품인 인간! 그것은 올림푸스를 지배하는 신의 모습과 닮았으며 신처럼 생각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재료를 일반 동물에게 쓰느라고 정작 인간을 완성하였을 때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호랑이나 사자의 날카로운 이빨도 줄 수 없었고, 곰처럼 강한 힘이나 독수리나 매처럼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도 없었다. 그렇다고 힘이 없는 동물들이 재빨리 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튼튼한 다리도 없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처음 그가 소망했던 것처럼 인간이 땅의 세상을 지배하며 살아갈 수 있는 무엇인가를 주고 싶었다. 강한 이빨과 힘에서 그들 자신을 보호하고 외부의 적을 물리칠 수 있는 힘! 그것은 다름 아닌 불(火)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신만이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며, 지상의 인간과 동물들이 신을 두려워하는 아주 강력한 무기중의 하나였다. 이런 까닭에 신의 왕인 제우스는 그것을 인간들에게 전해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프로메테우스는 어느 날 짚을 묶어 몰래 숨어 있다가 불의 전차를 타고 하늘을 오르던 아폴론의 마차에서 불을 붙여 올림푸스 산을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불을 나누어주었다. 불을 받은 인간은 그들이 모여 앉은 한가운데 불을 피우고 기쁨의 환호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행복에 겨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그리이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춤의 기원인데, 춤의 시작이 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역사에서 불은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다. 이제껏 날 음식만을 먹던 인간이 익힌 음식을 먹게 됨을 뜻하며, 불을 이용한 다양한 도구의 생산으로 인간은 그 어느 동물보다 강력한 힘을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는 잣대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불로 인해 인간은 야성적인 습성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인간다운 삶의 길로 들어서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며 신화 속에서는 인간과 신의 영역이 점점 좁혀져 감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춤은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기 시작하면서 표현하기 시작하는 최초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그중 댄스스포츠는 혼자가 아닌 남녀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완벽한 조화의 춤이기에 그 미적 가치는 최고의 절정을 이루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울러 댄스스포츠는 이러한 예술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는 동시에 또한 스포츠 과학적인 요소를 상당부분 가지고 있다. 댄스를 통해서 우리는 그간 잘못된 자세로 의하여 정형화된 기형의 체형에서 벗어나 올바른 자세를 갖게 되며, 아울러 비만을 치료할 수 있는 유산소 운동을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건강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사실 유산소 운동의 대표적인 운동이라 할 수 있는 조깅의 경우 혼자서 달리기 때문에 외롭고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댄스스포츠의 경우 아름다운 음악에 맞추어 파트너와 호흡을 맞추다 보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운동이 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으며 또한 댄스를 한다는 자체가 너무도 즐겁기 때문에 힘이 들고 외롭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다. 이처럼 즐기면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운동이 댄스스포츠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댄스스포츠가 가지고 있는 유익한 요소들은 위에서 설명한 외적인 것 이외에도 내면적인 부분도 상당부분 있다. 사실 어쩌면 우리가 댄스스포츠에서 더 중요시하는 부분이 바로 이 내면의 철학적인 요소가 아닌가 싶다.
댄스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초자세, 리듬감, 미적 표현 등을 꼽을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요소들도 댄스를 함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들이다. 그러나 필자는 댄스스포츠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요소로 하모니를 꼽고 싶다. 하모니는 자신과 파트너가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완벽한 조화를 의미한다. 상대방의 실력에 관계없이 하모니를 이루지 못하면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잘 추는 댄서라고 할지라도 완벽한 춤을 추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모니는 과연 무엇에서 출발을 할까? 그것은 바로 양보와 배려이다. 아무리 자신의 기량이 뛰어나다 해도 상대방이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실력을 낮추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실력이 80%의 기량을 갖추었고, 파트너가 30%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면 80%의 실력을 갖춘 사람이 30%로 낮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실력을 따라오지도 못할 사람에게 80%의 기량을 발휘한다면, 아마도 춤을 추기도 전에 판은 깨지고 말 것이며 설혹 춤을 춘다고 하더라도 계속 리듬이 깨지고 호흡이 맞지 않아 즐겁지 않은 댄스가 되고 만다. 서로 간에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 그리고 눈높이를 맞추기 위하여 상대방에게 배려한다는 것! 어쩌면 이것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공동체의 교감을 느끼게 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일 것이며, 타락과 더러움으로 가득 찬 이 사회를 정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철학일 것이다.
얼마 전 댄스스포츠를 전공으로 하는 제자 중 한 명이 찾아와서 파트너와 헤어졌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평소 댄스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 남달랐던 제자였기에 파트너와 헤어졌다는 말에 적지 않게 놀랐다. 나는 그들이 왜 헤어졌는가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았다. 그 원인은 바로 그들의 욕망을 100% 달성하려 했다는데 있었다. 댄스스포츠에서 자신의 파트너를 만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특히 선수에게 있어서는 더욱 더 그렇다. 성격, 신체 사이즈, 그리고 기량 등이 서로 비슷해야만 제대로 춤을 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배우자 구하는 것보다 댄스 파트너 구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헤어졌다고 하는 것은 함께 호흡을 맞추어 왔던 자신들에게 있어서는 상당 시간을 퇴보해야 하는 불리함이 있으며, 새롭게 만난 파트너와는 다시 호흡을 맞추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기존의 파트너와 계속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파트너와 계속 지속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욕망을 50%씩 감소시켜야 한다.
파트너 또한 부부와 마찬가지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다가 만난 서로 다른 사고를 가진 객체이다.(물론 남매가 파트너일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100% 표출할 경우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욕망을 반으로 줄여 서로 하모니를 맞출 경우 그 효과는 50%에 50%를 더한 100%가 아닌 200%, 300%가 될 것이다.
이러한 하모니는 비단 댄스스포츠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 우리의 삶에 꼭 적용시켜야 하는 지표이다. 이 사회가 타락하고 더러워질 수밖에 없었던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만연이다. 남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을 생각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심지어는 상대방을 해하는 것이 바로 극단적인 이기주의이다. 나를 50%만 생각하고 상대방을 위하여 남은 50%의 욕망을 배려로 바꾼다면 아마도 이 사회는 살맛나는 사회로 바뀔 것이다.
우리가 댄스스포츠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의 커플이 이루어내는 아름다움의 요소와 함께 건강, 그리고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통하여 정말로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댄스스포츠를 추는가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댄스스포츠(볼룸댄스)를 한다는 것은 일부 전문인들만의 전유물이거나 혹은 소위 춤바람난 아주머니가 장바구니를 들고 몰래 캬바레를 다니는 퇴폐문화의 전형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사실 춤을 춘다고 하는 것은 장단에 맞추어 손이나 발 혹은 몸을 움직이는 인간의 본능적인 몸짓이다. 아주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올 때면 저절로 어깨가 들썩거리고 몸이 움직이는 것처럼 춤은 인간 감정의 가장 원형적인 형태인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행위를 인위적인 것이 아닌 인간 본연에 숨어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다만 그것이 시대가 지나고 문화의 코드가 바뀌어감에 따라서 지역적 유형에 맞도록 형태가 조금씩 변화되어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뿐이다.
그 중 댄스스포츠와도 같은 커플댄스는 유럽 귀족의 사교문화에서 출발하였고 유럽 대중에 의하여 꽃을 피운 매우 고급스러운 문화이며,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파된 것도 바로 구한말 고종 황제때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나 일본 유학생 등 지식층에 의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고급문화가 사회적 불륜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아마도 조선시대 유교적 관념이 현대 사회에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남녀칠세부동석으로 대표되는 유교의 남녀간 행동에 대한 규정이 사회 전반에 걸쳐 팽배했던 시절 남녀가 서로 끌어않고 춤을 추는 행동은 기성세대에게 있어 그야말로 전통적 사고에 정면으로 도전을 하는 행동으로 밖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회의 지배층 대부분이 유교적 가정에서 자란 사람 들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댄스를 ‘사회악’으로 규정하여 각종 탄압을 하였던 이들의 행위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1)”과 박인수 사건2), 차관부인 인순애 춤바람 간통사건, 70년대 7공자 사건 등 춤과 관련하여 일어난 사건들은 댄스 자체를 불륜의 씨앗으로 보기에 충분했고 춤바람은 곧 외도라는 의미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아울러 한국전쟁, 4.19, 5.16 등 사회적 혼란이 심하고 먹고 살기 어려울 정도로 경제적인 상황이 열악했던 시절 춤을 춘다는 자체만으로도 사회적 문제를 야기 시킨다 하여 역대 정권들 모두 탄압을 한 것이 볼룸댄스를 더욱 더 밀실로 끌어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필자가 댄스스포츠를 처음 접하고 배웠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왜 그런 쓸모없는 것을 그것도 교수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배우느냐는 질책을 많이 받았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건강상의 이유로 댄스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부터 별명이 제비로 바뀌었고 한동안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댄스를 처음 배웠던 당시 필자의 기억 속에 가장 견디기 힘든 어려움은 각 종목마다 있는 복잡한 휘겨들을 배우고 루틴을 기억하며 자세를 올바르게 고치는 것보다 주변 사람들의 비아냥거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해마다 가을이 되면 일주일이 멀다하고 각종 단체와 대학에서 주최하는 댄스스포츠 시합이 열리고, 초, 중, 고등학교에서는 방과 후 특별활동 과목으로 각광을 받고 있고, 대학의 교양 강좌 중 가장 많은 수강생이 몰리는 과목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과거 댄스스포츠를 불륜의 씨앗이라며 비아냥거렸던 많은 사람들까지도 이제 댄스스포츠는 한번쯤은 꼭 배워둘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 좋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댄스가 오늘날 최고의 스포츠로 각광을 받고 있는 풍경을 보면 시대의 가치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변화가 심한 것인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새삼스럽게 댄스스포츠를 배우고 또 즐기고 있는 것일까? 댄스스포츠에 대한 견해가 180° 달라진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댄스스포츠가 가지고 있는 숨어있는 기능에 대하여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과거 볼룸댄스라는 명칭에서 댄스스포츠로 바뀌었기 때문에 인기가 있게 되었다. 라는 몇몇 사람들의 말은 이러한 열기를 설명하기에는 그 이치가 너무도 단순하다. 내용물은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포장이 바뀌었다고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 수는 있으나 지속적으로 그것을 유지시키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댄스스포츠가 재미있어서 혹은 사회적 분위기가 댄스스포츠를 할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어서 댄스스포츠를 즐긴다고 설명하기에는 지금의 열기가 너무도 대단하다.
결국 댄스스포츠는 예전부터 중요하게 생각해오던 어떤 것들이 있는데 그러한 것들을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며, 명칭의 변화에 따라 그러한 숨겨져 있던 내용들이 새롭게 부각되면서 댄스스포츠의 철학들이 우리의 삶에 많은 것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댄스스포츠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철학을 제시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댄스스포츠의 명칭에 대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혹자들은 댄스스포츠라는 명칭이 이전의 명칭인 볼룸댄스보다는 무엇인가 어색하다고 말을 한다. 다시 말해서 댄스면 댄스이고, 스포츠면 스포츠이지 명칭은 자체가 색깔 면에서 선명함이 떨어진다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DSF(International Dance Sport Federation)나 IOC에서는 그간 사용하던 볼룸댄스라는 명칭을 없애고 댄스스포츠라 명명한 것에는 무엇인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일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댄스스포츠가 예술미가 충만한 극적인 아름다움과 과학적인 스포츠 요소를 모두 내포하고 있는 아주 특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댄스스포츠의 본래 명칭이 볼룸댄스라는 것을 감안하였을 때 분명 댄스스포츠는 춤이라는 예술적인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댄스의 기원을 살펴보면 최초에는 원시종합예술의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원시인들은 사냥을 떠나 많은 수확을 올렸을 때 그 기쁨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춤을 추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너무도 기쁜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의 기쁨을 몸으로 표현하며 이리저리 움직였고, 그러한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리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단한 수확의 치적은 동굴의 벽화를 통하여 표현하였고, 이윽고 언어가 탄생하면서 언어를 사용하여 미학의 극대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결국 댄스는 문학과 미술, 그리고 음악이라는 다양한 예술의 장르 중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것이며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몸이라고 하는 원초적인 매개체를 통하여 표현하는 순수함인 것이다.
그리이스 로마신화에도 댄스의 기원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불과 관계가 있다. 신들의 세상만이 존재했던 시절, 이 땅에 생명을 만들었던 것은 바로 프로메테우스였다. 프로메테우스는 이 세상에 많은 동물을 만든 뒤 맨 마지막에 인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프로메테우스 최고의 작품인 인간! 그것은 올림푸스를 지배하는 신의 모습과 닮았으며 신처럼 생각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재료를 일반 동물에게 쓰느라고 정작 인간을 완성하였을 때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호랑이나 사자의 날카로운 이빨도 줄 수 없었고, 곰처럼 강한 힘이나 독수리나 매처럼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도 없었다. 그렇다고 힘이 없는 동물들이 재빨리 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튼튼한 다리도 없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처음 그가 소망했던 것처럼 인간이 땅의 세상을 지배하며 살아갈 수 있는 무엇인가를 주고 싶었다. 강한 이빨과 힘에서 그들 자신을 보호하고 외부의 적을 물리칠 수 있는 힘! 그것은 다름 아닌 불(火)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신만이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며, 지상의 인간과 동물들이 신을 두려워하는 아주 강력한 무기중의 하나였다. 이런 까닭에 신의 왕인 제우스는 그것을 인간들에게 전해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프로메테우스는 어느 날 짚을 묶어 몰래 숨어 있다가 불의 전차를 타고 하늘을 오르던 아폴론의 마차에서 불을 붙여 올림푸스 산을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불을 나누어주었다. 불을 받은 인간은 그들이 모여 앉은 한가운데 불을 피우고 기쁨의 환호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행복에 겨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그리이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춤의 기원인데, 춤의 시작이 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역사에서 불은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다. 이제껏 날 음식만을 먹던 인간이 익힌 음식을 먹게 됨을 뜻하며, 불을 이용한 다양한 도구의 생산으로 인간은 그 어느 동물보다 강력한 힘을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는 잣대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불로 인해 인간은 야성적인 습성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인간다운 삶의 길로 들어서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며 신화 속에서는 인간과 신의 영역이 점점 좁혀져 감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춤은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기 시작하면서 표현하기 시작하는 최초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그중 댄스스포츠는 혼자가 아닌 남녀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완벽한 조화의 춤이기에 그 미적 가치는 최고의 절정을 이루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울러 댄스스포츠는 이러한 예술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는 동시에 또한 스포츠 과학적인 요소를 상당부분 가지고 있다. 댄스를 통해서 우리는 그간 잘못된 자세로 의하여 정형화된 기형의 체형에서 벗어나 올바른 자세를 갖게 되며, 아울러 비만을 치료할 수 있는 유산소 운동을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건강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사실 유산소 운동의 대표적인 운동이라 할 수 있는 조깅의 경우 혼자서 달리기 때문에 외롭고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댄스스포츠의 경우 아름다운 음악에 맞추어 파트너와 호흡을 맞추다 보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운동이 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으며 또한 댄스를 한다는 자체가 너무도 즐겁기 때문에 힘이 들고 외롭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다. 이처럼 즐기면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운동이 댄스스포츠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댄스스포츠가 가지고 있는 유익한 요소들은 위에서 설명한 외적인 것 이외에도 내면적인 부분도 상당부분 있다. 사실 어쩌면 우리가 댄스스포츠에서 더 중요시하는 부분이 바로 이 내면의 철학적인 요소가 아닌가 싶다.
댄스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초자세, 리듬감, 미적 표현 등을 꼽을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요소들도 댄스를 함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들이다. 그러나 필자는 댄스스포츠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요소로 하모니를 꼽고 싶다. 하모니는 자신과 파트너가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완벽한 조화를 의미한다. 상대방의 실력에 관계없이 하모니를 이루지 못하면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잘 추는 댄서라고 할지라도 완벽한 춤을 추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모니는 과연 무엇에서 출발을 할까? 그것은 바로 양보와 배려이다. 아무리 자신의 기량이 뛰어나다 해도 상대방이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실력을 낮추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실력이 80%의 기량을 갖추었고, 파트너가 30%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면 80%의 실력을 갖춘 사람이 30%로 낮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실력을 따라오지도 못할 사람에게 80%의 기량을 발휘한다면, 아마도 춤을 추기도 전에 판은 깨지고 말 것이며 설혹 춤을 춘다고 하더라도 계속 리듬이 깨지고 호흡이 맞지 않아 즐겁지 않은 댄스가 되고 만다. 서로 간에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 그리고 눈높이를 맞추기 위하여 상대방에게 배려한다는 것! 어쩌면 이것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공동체의 교감을 느끼게 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일 것이며, 타락과 더러움으로 가득 찬 이 사회를 정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철학일 것이다.
얼마 전 댄스스포츠를 전공으로 하는 제자 중 한 명이 찾아와서 파트너와 헤어졌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평소 댄스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 남달랐던 제자였기에 파트너와 헤어졌다는 말에 적지 않게 놀랐다. 나는 그들이 왜 헤어졌는가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았다. 그 원인은 바로 그들의 욕망을 100% 달성하려 했다는데 있었다. 댄스스포츠에서 자신의 파트너를 만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특히 선수에게 있어서는 더욱 더 그렇다. 성격, 신체 사이즈, 그리고 기량 등이 서로 비슷해야만 제대로 춤을 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배우자 구하는 것보다 댄스 파트너 구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헤어졌다고 하는 것은 함께 호흡을 맞추어 왔던 자신들에게 있어서는 상당 시간을 퇴보해야 하는 불리함이 있으며, 새롭게 만난 파트너와는 다시 호흡을 맞추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기존의 파트너와 계속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파트너와 계속 지속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욕망을 50%씩 감소시켜야 한다.
파트너 또한 부부와 마찬가지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다가 만난 서로 다른 사고를 가진 객체이다.(물론 남매가 파트너일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100% 표출할 경우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욕망을 반으로 줄여 서로 하모니를 맞출 경우 그 효과는 50%에 50%를 더한 100%가 아닌 200%, 300%가 될 것이다.
이러한 하모니는 비단 댄스스포츠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 우리의 삶에 꼭 적용시켜야 하는 지표이다. 이 사회가 타락하고 더러워질 수밖에 없었던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만연이다. 남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을 생각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심지어는 상대방을 해하는 것이 바로 극단적인 이기주의이다. 나를 50%만 생각하고 상대방을 위하여 남은 50%의 욕망을 배려로 바꾼다면 아마도 이 사회는 살맛나는 사회로 바뀔 것이다.
우리가 댄스스포츠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의 커플이 이루어내는 아름다움의 요소와 함께 건강, 그리고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통하여 정말로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http://paper.cyworld.nate.com/dancesport/17163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