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살나무의 보시』
- 안준철(1954~ ) -
가을 산사에
자작나무라면 몰라도
작살나무라니
작살 모양으로
누구 도륙낼 일 있나
비아냥거리다가
나무 이름 아래
뭐라 적힌 글씨를 읽고는
눈이 번쩍 떠졌다.
열매는 둥글며
새에게 좋은 먹이가 됩니다.
새가 먹기 좋은
둥근 열매가 되려고
바람결에 제 살을 다듬었을까?
산을 내려오다 말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작살나무의 보시'전문
가을산은 못사는 친정집보다 낫다는 속담이 있다.
온갖 실과가 넉넉하게 열리는
가을산의 풍성한 내력을 일컫는 말이다.
오늘은 우수. 대동강 물이 녹는다는 날이다.
언 강물이 녹으면 얼어붙은 우리의 마음도
함께 녹아 흐른다.
가을산처럼, 넉넉하고 풍성하게…
오늘 하루는 좋은 생각만 하자.
열매는 둥글며 새에게 좋은 먹이가 되는…
오늘은 우수. 단 하루라도 좋은 생각만 하자.
- 곽재구<시인> -
『오래된 여행가방』
- 김수영 金秀映(1967~ ) -
스무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 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 방에 혼자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년 동안 편지를 주고 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끔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후략).
'오래된 여행가방' 중에서
밤새 내린 눈에 백양나무 가지 하나가 부러졌다.
그 작고, 하얗고, 순결한 눈송이들이 쌓이고 쌓여
성성한 가지를 부러뜨리다니….
잠시 아집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것들이 쌓이고 쌓인 세상의 숲과
그것들이 부러뜨릴 많은 생의 나뭇가지들에 대해서도….
- 곽재구<시인> -
『열(熱)받고 살다.』
- 황동규(1938~ ) -
내 시대의 건축가 김수근은
성당 건물도 감옥처럼 지었고
친구 시인 마종기는 미국서 살며
이 나라 땅바닥에 발을 붙이려
뻔질나게 달려오곤 했다
무료 강연!
(미국서 자본 의사집 가운데 가장 작은 집에 살며)
내 시대 사람들은 어디 살건
열받고 살았다
김수근이 지은 감옥 문예회관 문에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는
이 기쁨!
'열(熱)받고 살다'전문
고금을 막론하고 화가들이
가장 자신있게 그린 그림은 자화상이었다.
자신의 내면이나 영혼에 대해
자기보다 더 아는 이는 없기 때문에 삼류 화가라도
자화상만큼은 일류 화가 못지않게
그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화가 크림트는 평생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밥 먹을 때까지 그림을 그릴 뿐인데
또다른 그림을 남길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
무자화상의 변이었다.
지난 한 주일 동안 열받는 일들은 없으셨는지….
자신의 일에 열정을 지닌 채 순정하게 몰입하는 이여,
열받지 않고 범상하게 세상을 끌어가는 아름다운 이여.
- 곽재구<시인> -
『강을 따라서』
- 손곡 이달(조선 명종~선조 연간) -
강변 십리길
굽이굽이 돌아
수북수북 쌓인 꽃잎
말발굽도 향기로워라.
산천을 부질없이 헤맨다 마오
비단주머니에 새 시가 가득 찬 것을.
'강을 따라서' 전문
천관산 자락 위씨 집성촌 마을의 묵은 동백나무들이
꽃을 피울 때 마을의 고샅길을 걸은 적이 있다.
떨어진 동백꽃 이파리들이 수북수북 쌓여
발등을 출렁출렁 덮었다.
어떤 화사한 유랑의 시간 속에서도 내 두발이
그렇게 행복해 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바지춤을 올리고 시냇물 속을 걷듯 천천히 걷는 동안
꽃의 기운들이 발바닥에서 머리 끝으로
수액처럼 스며 올랐다.
손곡 이달은 방랑시인이다.
서출인 탓에 변변한 벼슬살이도 못 했으며
평생을 산천을 벗삼아 떠돌이로 지냈다.
용모도 잘 생기지 못했으며 세속의 예법도 지키지 않아
사람들의 미움이 컸다고 한다.
그 궁핍한 몸 가득 시혼이 빛났으니….
그의 비단주머니가 맑고 따스한 소치다.
- 곽재구<시인> -
『신의주-단동(丹東)에서』
- 신경림(1935~ ) -
낮은 지붕들이 처마를 맞댄
골목으로 들어가면 대포집이 보일 거야.
판자문을 밀고 들어서면 자욱한 담배연기
돼지고기가 타고 두부찌개가 끓고
어디서 본 듯한 깊은 주름들
귀에 익은 웃음소리
손을 흔드는 사람도 있겠지.
오래간만이라고 왜 이제서 왔느냐고
다가와 잡는 손들도 있을 거야
나는 울지 않을 거야
마다마다 기름때가 낀
못 박힌 거친 손들을 잡더라도.
'신의주-단동(丹東)에서' 전문
박해와 어둠 속에서 자유와 민주와 통일을 위해
헌신한 시간들이 우리 곁에 있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그 시절의 노래는 두려움을 뚫는
예리한 생의 칼날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은 이제 지나간 시절의
노래에는 관심이 없다.
하루 하루 잘 먹고 잘 살자는 생각들 뿐이다.
여기저기서 웰빙, 웰빙, 하는 소리가 들린다.
동강난 국토, 동강난 역사,
동강난 혈육의 꿈은 여전한데….
웰빙 소리가 들릴 때마다 초라해진다.
- 곽재구<시인> -
『까치밥』
- 김형오(1943~ ) -
열매
다 털리고
푸르던 살과 뼈
차근차근 내어주고.
벼랑을 만날 적마다
출렁출렁 일어서던 강.
뱃속 껄렁껄렁한
문자 속 다 지우고
서리 내린 이른 아침
눈 비비며 보네.
가지마다 저 까만 젖꼭지
어머니 아 어머니!
'까치밥' 전문
감나무만큼 우리 민족 정서와 밀착된 나무가 있을까.
어린 시절 감꽃이 피면 꽃그늘 아래서의 술래잡기는
꽃향기만큼이나 마음이 설레곤 했다.
감꽃이 피었다 어디어디 숨을래….
술래잡기가 끝나면 떨어진 감꽃들을 엮어
팔찌를 만들고 목걸이를 만들고….
감이 익을 무렵은 일년 중 마을 풍경이
가장 화사하게 보기 좋았다.
단감은 그냥 먹고 떫은 감은 곶감 만들고….
가지 끝의 열매 몇 개는 까치밥으로 남겨 두었다.
불그레 익은 까치밥 덕으로
눈 오는 날에도 마을은 덜 쓸쓸해지고,
까치밥이 다 스러지고 나면 가지에
까만 젖꼭지만 남았다.
마을에 홀로 남은 우리들의 어머니처럼.
두 개의 까만 젖꼭지만 남은 어머니처럼….
- 곽재구<시인> -
『하마단』
- 현담(1955~ ) -
하마단
먼 사막을 향하여 떠나는 산 위엔
흰눈이 빛나고
페르시아 긴 칼이 서늘하다.
하마단.
여기서 이스파한까지는
여기서 페샤와르까지는
여기서 이슬라마바드까지는
여기서 바라나시까지는
하마단.
하마단.
메마른 내 몸속에서는 아직 무수히 많은 길들이
흔들린다
지친 낙타의 큰 눈 속에 잠긴 신기루
푸르른 호수 가운데
먼 길 들꽃처럼 무수히 날린다.
'하마단' 전문
하마단에 가보지 못했다.
그 도시가 페르시아에 있는지,
아프가니스탄에 있는지,
터키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도시에 오아시스가 있는지,
눈 덮인 흰 산이 있는지,
푸른 빛의 모자이크 벽돌로 만든 미네라트가
사막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
그 도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며,
얼마나 많은 슬픈 이야기들이 있으며,
얼마나 많은 포도나무와
얼마나 많은 낙타들이 병들었는지….
그 도시의 길들은 무슨 빛으로 산 언덕을 넘어서는지….
하마단 하마단, 마음 안에 구름처럼 피어나는 하마단.
페르시아 긴 칼처럼 서늘한 하마단.
- 곽재구<시인> -
『환하면 끝입니다.』
- 정양주(1960~ ) -
하늘이 두 뼘쯤 되는 산골짜기 집 마당에
백촉짜리 백열등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저 집에서 다시 불빛 새어나올 일 없습니다.
장독대 항아리들 다시 빛날 날 없습니다.
툇마루에 걸터앉을 엉덩이 없습니다.
시골집 환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마지막 불빛입니다.
'환하면 끝입니다' 전문
내가 잠시 머물렀던 섬진강변 제월리 마을은
세 집에 두 집이 빈집이다.
사람이 들어 있는 집의 경우도 대부분
할머니나 할아버지 한 분씩만 산다.
산골짜기 집 마당에 백열등이 주렁주렁
환하게 밝혀지면 축제다.
고단했던 한 생애가 끝나고,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살았던 살붙이들이 찾아와
액자 속의 얼굴 앞에 소주 한 잔을 붓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다가,
새벽녘엔 언젠가 자신들도 들어설 그 길로
서둘러 떠나간다. 살아서 먹었던 밥들,
장독 안의 묵은 된장과, 토방 시렁 위의 사진틀과
수저통 속 몇벌 수저들과 이별할 뿐인데….
백열전구 불빛 환하게 빛나는 이 축제는 슬프다.
- 곽재구<시인> -
『저녁의 수련』
- 채호기(1957~ ) -
무엇을 느끼니? 숨차 하는 만년필아
노을은 울고 공기들은 놀라는데
무엇이 들리니? 말라빠진 하얀 종이야.
수련은 눈을 감고 있는데
연인의 하얀 얼굴 위로
눈꺼풀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듯이
수련의 꽃잎이 닫히고 있는데.
(중략)
만년필아 하얀 종이야
너희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저 수련이 저녁의 한숨 속으로 꺼져들면
텅 빈 스크린처럼 하얗게
나의 느린 삶이 남을 것이니
피가 다 말라버린 하얀 종이처럼.
'저녁의 수련' 부분
눈이 많이 내리던 아침,
원고를 쓰다 만년필 잉크가 떨어졌다.
급히 시내로 나갔으나 가게문이 닫혔다.
문을 연 다른 문구점에는 내가 찾는 잉크가 없다.
눈을 뒤집어쓴 채 망연히 걷고 있는데
명함을 찍어 파는 오래된 인쇄 가게 진열장에
내가 쓰는 잉크 두 병이 먼지를 쓰고 앉아 있다.
품에 껴안고 돌아오는 눈길.
몇 번씩 미끄러지며 넘어져도 헤, 웃는다.
내가 하얀 종이 위에 만년필로 쓰는 글들이
저녁의 수련처럼 고요했으면 좋겠다.
텅 빈 스크린에 펑펑 쏟아지는 흰눈처럼,
피가 다 말라버린 하얀 종이 위에
느리게 불어오는 저녁의 한숨소리처럼….
- 곽재구<시인> -
『그리움』
- 고은(1933~ ) -
산에 올라 난바다 바라보는 날이여
어이 너에게
그리운 것 없겠느냐!
이 눈부신 백년 가득히!
'그리움' 전문
매화마을에 가다. 갓 피어난 매화꽃 향기로
섬진강변 산골 마을들은 종일 출렁인다.
강 건너엔 하동포구. 물길 칠십리 산골마을들은
아늑한 꽃구름에 싸여 있다.
흰색, 여린 연두색, 연분홍색….
알지 못했던 꿈길들로 마음의 물살 종일 헤적이다.
강 언덕에 올라 바라보는 사람 사는 마을들이여,
어이 그곳에 깊은 그리움 없겠는가.
슬픔·고통·광기·번민·굶주림….
그 어떤 잔인한 시간의 이름으로
이 눈부신 계절의 휘장을 가릴 수 있음인가.
강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 바다에 이른다.
숨쉬는 동안 천천히 걸으면 희망의 바다에 이른다.
그러니, 그대여 매화꽃 향기 만발한 강을 따라 걸으면
끝내 이르는 곳은 어디일 것인가.
극락일 것인가, 천국일 것인가, 또 다른 지옥일 것인가.
그대의 마음 안에 그리운 그곳이 있음을….
- 곽재구<시인> -
행 복 편 지 19
『작살나무의 보시』 - 안준철(1954~ ) - 가을 산사에 자작나무라면 몰라도 작살나무라니 작살 모양으로 누구 도륙낼 일 있나 비아냥거리다가 나무 이름 아래 뭐라 적힌 글씨를 읽고는 눈이 번쩍 떠졌다. 열매는 둥글며 새에게 좋은 먹이가 됩니다. 새가 먹기 좋은 둥근 열매가 되려고 바람결에 제 살을 다듬었을까? 산을 내려오다 말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작살나무의 보시'전문
가을산은 못사는 친정집보다 낫다는 속담이 있다. 온갖 실과가 넉넉하게 열리는 가을산의 풍성한 내력을 일컫는 말이다. 오늘은 우수. 대동강 물이 녹는다는 날이다. 언 강물이 녹으면 얼어붙은 우리의 마음도 함께 녹아 흐른다. 가을산처럼, 넉넉하고 풍성하게… 오늘 하루는 좋은 생각만 하자. 열매는 둥글며 새에게 좋은 먹이가 되는… 오늘은 우수. 단 하루라도 좋은 생각만 하자. - 곽재구<시인> -
『오래된 여행가방』 - 김수영 金秀映(1967~ ) - 스무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 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 방에 혼자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년 동안 편지를 주고 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끔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후략). '오래된 여행가방' 중에서
밤새 내린 눈에 백양나무 가지 하나가 부러졌다. 그 작고, 하얗고, 순결한 눈송이들이 쌓이고 쌓여 성성한 가지를 부러뜨리다니…. 잠시 아집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것들이 쌓이고 쌓인 세상의 숲과 그것들이 부러뜨릴 많은 생의 나뭇가지들에 대해서도…. - 곽재구<시인> -
『열(熱)받고 살다.』 - 황동규(1938~ ) - 내 시대의 건축가 김수근은 성당 건물도 감옥처럼 지었고 친구 시인 마종기는 미국서 살며 이 나라 땅바닥에 발을 붙이려 뻔질나게 달려오곤 했다 무료 강연! (미국서 자본 의사집 가운데 가장 작은 집에 살며) 내 시대 사람들은 어디 살건 열받고 살았다 김수근이 지은 감옥 문예회관 문에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는 이 기쁨! '열(熱)받고 살다'전문
고금을 막론하고 화가들이 가장 자신있게 그린 그림은 자화상이었다. 자신의 내면이나 영혼에 대해 자기보다 더 아는 이는 없기 때문에 삼류 화가라도 자화상만큼은 일류 화가 못지않게 그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화가 크림트는 평생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밥 먹을 때까지 그림을 그릴 뿐인데 또다른 그림을 남길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 무자화상의 변이었다. 지난 한 주일 동안 열받는 일들은 없으셨는지…. 자신의 일에 열정을 지닌 채 순정하게 몰입하는 이여, 열받지 않고 범상하게 세상을 끌어가는 아름다운 이여. - 곽재구<시인> -
『강을 따라서』 - 손곡 이달(조선 명종~선조 연간) - 강변 십리길 굽이굽이 돌아 수북수북 쌓인 꽃잎 말발굽도 향기로워라. 산천을 부질없이 헤맨다 마오 비단주머니에 새 시가 가득 찬 것을. '강을 따라서' 전문
천관산 자락 위씨 집성촌 마을의 묵은 동백나무들이 꽃을 피울 때 마을의 고샅길을 걸은 적이 있다. 떨어진 동백꽃 이파리들이 수북수북 쌓여 발등을 출렁출렁 덮었다. 어떤 화사한 유랑의 시간 속에서도 내 두발이 그렇게 행복해 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바지춤을 올리고 시냇물 속을 걷듯 천천히 걷는 동안 꽃의 기운들이 발바닥에서 머리 끝으로 수액처럼 스며 올랐다. 손곡 이달은 방랑시인이다. 서출인 탓에 변변한 벼슬살이도 못 했으며 평생을 산천을 벗삼아 떠돌이로 지냈다. 용모도 잘 생기지 못했으며 세속의 예법도 지키지 않아 사람들의 미움이 컸다고 한다. 그 궁핍한 몸 가득 시혼이 빛났으니…. 그의 비단주머니가 맑고 따스한 소치다. - 곽재구<시인> -
『신의주-단동(丹東)에서』 - 신경림(1935~ ) - 낮은 지붕들이 처마를 맞댄 골목으로 들어가면 대포집이 보일 거야. 판자문을 밀고 들어서면 자욱한 담배연기 돼지고기가 타고 두부찌개가 끓고 어디서 본 듯한 깊은 주름들 귀에 익은 웃음소리 손을 흔드는 사람도 있겠지. 오래간만이라고 왜 이제서 왔느냐고 다가와 잡는 손들도 있을 거야 나는 울지 않을 거야 마다마다 기름때가 낀 못 박힌 거친 손들을 잡더라도. '신의주-단동(丹東)에서' 전문
박해와 어둠 속에서 자유와 민주와 통일을 위해 헌신한 시간들이 우리 곁에 있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그 시절의 노래는 두려움을 뚫는 예리한 생의 칼날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은 이제 지나간 시절의 노래에는 관심이 없다. 하루 하루 잘 먹고 잘 살자는 생각들 뿐이다. 여기저기서 웰빙, 웰빙, 하는 소리가 들린다. 동강난 국토, 동강난 역사, 동강난 혈육의 꿈은 여전한데…. 웰빙 소리가 들릴 때마다 초라해진다. - 곽재구<시인> -
『까치밥』 - 김형오(1943~ ) - 열매 다 털리고 푸르던 살과 뼈 차근차근 내어주고. 벼랑을 만날 적마다 출렁출렁 일어서던 강. 뱃속 껄렁껄렁한 문자 속 다 지우고 서리 내린 이른 아침 눈 비비며 보네. 가지마다 저 까만 젖꼭지 어머니 아 어머니! '까치밥' 전문
감나무만큼 우리 민족 정서와 밀착된 나무가 있을까. 어린 시절 감꽃이 피면 꽃그늘 아래서의 술래잡기는 꽃향기만큼이나 마음이 설레곤 했다. 감꽃이 피었다 어디어디 숨을래…. 술래잡기가 끝나면 떨어진 감꽃들을 엮어 팔찌를 만들고 목걸이를 만들고…. 감이 익을 무렵은 일년 중 마을 풍경이 가장 화사하게 보기 좋았다. 단감은 그냥 먹고 떫은 감은 곶감 만들고…. 가지 끝의 열매 몇 개는 까치밥으로 남겨 두었다. 불그레 익은 까치밥 덕으로 눈 오는 날에도 마을은 덜 쓸쓸해지고, 까치밥이 다 스러지고 나면 가지에 까만 젖꼭지만 남았다. 마을에 홀로 남은 우리들의 어머니처럼. 두 개의 까만 젖꼭지만 남은 어머니처럼…. - 곽재구<시인> -
『하마단』 - 현담(1955~ ) - 하마단 먼 사막을 향하여 떠나는 산 위엔 흰눈이 빛나고 페르시아 긴 칼이 서늘하다. 하마단. 여기서 이스파한까지는 여기서 페샤와르까지는 여기서 이슬라마바드까지는 여기서 바라나시까지는 하마단. 하마단. 메마른 내 몸속에서는 아직 무수히 많은 길들이 흔들린다 지친 낙타의 큰 눈 속에 잠긴 신기루 푸르른 호수 가운데 먼 길 들꽃처럼 무수히 날린다. '하마단' 전문
하마단에 가보지 못했다. 그 도시가 페르시아에 있는지, 아프가니스탄에 있는지, 터키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도시에 오아시스가 있는지, 눈 덮인 흰 산이 있는지, 푸른 빛의 모자이크 벽돌로 만든 미네라트가 사막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 그 도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며, 얼마나 많은 슬픈 이야기들이 있으며, 얼마나 많은 포도나무와 얼마나 많은 낙타들이 병들었는지…. 그 도시의 길들은 무슨 빛으로 산 언덕을 넘어서는지…. 하마단 하마단, 마음 안에 구름처럼 피어나는 하마단. 페르시아 긴 칼처럼 서늘한 하마단. - 곽재구<시인> -
『환하면 끝입니다.』 - 정양주(1960~ ) - 하늘이 두 뼘쯤 되는 산골짜기 집 마당에 백촉짜리 백열등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저 집에서 다시 불빛 새어나올 일 없습니다. 장독대 항아리들 다시 빛날 날 없습니다. 툇마루에 걸터앉을 엉덩이 없습니다. 시골집 환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마지막 불빛입니다. '환하면 끝입니다' 전문
내가 잠시 머물렀던 섬진강변 제월리 마을은 세 집에 두 집이 빈집이다. 사람이 들어 있는 집의 경우도 대부분 할머니나 할아버지 한 분씩만 산다. 산골짜기 집 마당에 백열등이 주렁주렁 환하게 밝혀지면 축제다. 고단했던 한 생애가 끝나고,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살았던 살붙이들이 찾아와 액자 속의 얼굴 앞에 소주 한 잔을 붓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다가, 새벽녘엔 언젠가 자신들도 들어설 그 길로 서둘러 떠나간다. 살아서 먹었던 밥들, 장독 안의 묵은 된장과, 토방 시렁 위의 사진틀과 수저통 속 몇벌 수저들과 이별할 뿐인데…. 백열전구 불빛 환하게 빛나는 이 축제는 슬프다. - 곽재구<시인> -
『저녁의 수련』 - 채호기(1957~ ) - 무엇을 느끼니? 숨차 하는 만년필아 노을은 울고 공기들은 놀라는데 무엇이 들리니? 말라빠진 하얀 종이야. 수련은 눈을 감고 있는데 연인의 하얀 얼굴 위로 눈꺼풀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듯이 수련의 꽃잎이 닫히고 있는데. (중략) 만년필아 하얀 종이야 너희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저 수련이 저녁의 한숨 속으로 꺼져들면 텅 빈 스크린처럼 하얗게 나의 느린 삶이 남을 것이니 피가 다 말라버린 하얀 종이처럼. '저녁의 수련' 부분
눈이 많이 내리던 아침, 원고를 쓰다 만년필 잉크가 떨어졌다. 급히 시내로 나갔으나 가게문이 닫혔다. 문을 연 다른 문구점에는 내가 찾는 잉크가 없다. 눈을 뒤집어쓴 채 망연히 걷고 있는데 명함을 찍어 파는 오래된 인쇄 가게 진열장에 내가 쓰는 잉크 두 병이 먼지를 쓰고 앉아 있다. 품에 껴안고 돌아오는 눈길. 몇 번씩 미끄러지며 넘어져도 헤, 웃는다. 내가 하얀 종이 위에 만년필로 쓰는 글들이 저녁의 수련처럼 고요했으면 좋겠다. 텅 빈 스크린에 펑펑 쏟아지는 흰눈처럼, 피가 다 말라버린 하얀 종이 위에 느리게 불어오는 저녁의 한숨소리처럼…. - 곽재구<시인> -
『그리움』 - 고은(1933~ ) - 산에 올라 난바다 바라보는 날이여 어이 너에게 그리운 것 없겠느냐! 이 눈부신 백년 가득히! '그리움' 전문
매화마을에 가다. 갓 피어난 매화꽃 향기로 섬진강변 산골 마을들은 종일 출렁인다. 강 건너엔 하동포구. 물길 칠십리 산골마을들은 아늑한 꽃구름에 싸여 있다. 흰색, 여린 연두색, 연분홍색…. 알지 못했던 꿈길들로 마음의 물살 종일 헤적이다. 강 언덕에 올라 바라보는 사람 사는 마을들이여, 어이 그곳에 깊은 그리움 없겠는가. 슬픔·고통·광기·번민·굶주림…. 그 어떤 잔인한 시간의 이름으로 이 눈부신 계절의 휘장을 가릴 수 있음인가. 강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 바다에 이른다. 숨쉬는 동안 천천히 걸으면 희망의 바다에 이른다. 그러니, 그대여 매화꽃 향기 만발한 강을 따라 걸으면 끝내 이르는 곳은 어디일 것인가. 극락일 것인가, 천국일 것인가, 또 다른 지옥일 것인가. 그대의 마음 안에 그리운 그곳이 있음을…. - 곽재구<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