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복 편 지 20

수호천사200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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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복 편 지 20

 

행 복 편 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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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복 편 지 20

 

 

 

 

 

『미로에서』 - 정은숙(1962~ ) - 전철 파업이 시작된 날 출근길 버스에 오른다. (중략) 광화문 정거장이다. 한 사내가 호떡을 들고 급히 올라탄다. 사람들이 그를 밀친다. 호떡이 제 옷에 닿을까봐 표정을 구긴다. 운전사가 백미러로 그를 바라본다. 차비. 그는 차비를 내지 않았다. 운전사와 사내 사이의 긴장감이 승객들을 일순 숨멎게 한다. 차비. 사내는 개의치 않는다. 승객들은 필경 사내의 아침식사일 호떡 먹기를 지켜본다. 운전사의 외침이 있고 나자, 없습니다. 분명히 발화된 그 말은 없습니다라고. 운전사는 당황해한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돌 하나 튕겨 나가는 것을 느낀다. 나도 그 말 하고 싶었다. 없습니다, 아무것도. (후략) '미로에서' 부분

 

 

 

오래 전 나도 무임승차를 많이 했다. 두 발로 걷는 것이 자유롭고 편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 버스에 탔다. 토큰함 대신 버스 안내양이 서 있던 시절. 안내양들은 가난한 문학청년의 무임승차를 늘 관대히 봐주곤 했다…. 붐비는 버스 안에서 호떡으로 아침식사를 하는 사내. 그는 왜 호떡을 들고 버스에 올랐을까. 어차피 차비가 없다면 식사를 끝낸 다음 버스에 오르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그가 세상의 다른 일에도 저렇듯 당당히 답변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없습니다…. 그의 말을 묵묵히 듣는 우리에겐 또 무엇이 있는 것일까. - 곽재구<시인> -

 

 

 

 

 

 

 

『처자』 - 고형렬(1954~ ) - 주방 옆 화장실에서 아내가 아들을 목욕시킨다. 엄마는 젖이 작아 하는 소리가 가만히 들린다. 엄마는 젖이 작아 백열등 켜진 욕실에서 아내는 발가벗었을 것이다 물소리가 쏴아 하다 그치고 아내가 이런다 얘, 너 엄마 젖 만져봐 만져도 돼? 그러엄. 그러고 조용하다. 아들이 아내의 젖을 만지는 모양이다. 곧장 웃음소리가 터진다. 아파 이놈아! 그렇게 아프게 만지면 어떡해! 욕실에 들어가고 싶다. 셋이 놀고 싶다. 우리가 떠난 먼 훗날에도 아이는 사랑을 기억하겠지. '처자' 전문

 

 

 

그윽하고…아련하고…평화롭다. 대저, 시가 별 것일 것인가. 어미와 아들이 함께 목욕을 하며 찰박찰박 물 끼얹는 소리를 지척에서 지아비가 듣는다. 시쓰는 지아비, 책읽기에는 관심이 없고 욕실에 들어 셋이 함께 놀고 싶은 마음뿐임에야…. 극락인 듯 그들 언저리에 부용꽃 한송이 피어라. - 곽재구<시인> -

 

 

 

 

 

 

 

『그렇다.』 - 김경미(1959~ ) - 아 참, 나는 참새가 아니지. 날아가다가 뚝! 허리가 부러진다. (가끔씩 내겐 사람다운 구석이라곤 전혀 없다) 그래 참, 나는, 참 사람도 아니지. 마저 부러진다! (상처를 실컷 주고 나니 뜻밖에 후련하다니! 차마 이 비결로 사람들이 여태 행복했었을까, 차마!) '그렇다' 전문

 

 

 

새는 날아간다. 날면서 생각을 하고 날면서 사냥을 하고 날면서 사랑을 한다. 날지 못하는 것은 새가 아니다. 오랫동안 인간은 새를 꿈꾸었다. 끝없이 날아오르기를 꿈꾸었고 끝없이 넓은 대륙으로 날아가 그 대륙의 주인이 되기를 꿈꾸었다. 새가 아니면서 새의 흉내를 낸 시간들. 인간 역사의 다른 이름이다. 슬프게도 새가 되기를 열망하는 모든 인간들은 언젠가 날아가다 뚝, 떨어진다. 흉내는 낼 수 있을지언정 새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시는 날다가 추락한 인간들의 번뜩이는 욕망의 비늘 자국이다. 해가 뜨고, 우리들은 또 힘겹게 날아오른다. - 곽재구<시인> -

 

 

 

 

 

 

 

『식사초대』 - 양애경(1956~ ) - 별아 내려와라. 별아 내려와서 국수 먹고 가라. 별아 내 저녁은 젖은 국수 너는 쫓겨나 배고픈 아이 나눠 먹는 일은 기쁠 거야. 별아 내려와서 국수 먹고 가라. '식사초대' 전문

 

 

 

이스탄불에 머무를 때의 일이다. 보스포러스 해협의 한 선창에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외롭고 무료했던 나는 내용도 모르고 그 줄에 섰다. 늘어선 줄이 '초대'의 은유일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초대에 응하면 행복해진다. 조금씩 줄이 줄어들고 내가 줄의 앞에 섰을 때 나는 씩 웃었다. 작은 배를 이용한 포장마차에서 웃통을 벗은 사내 둘이 고등어 샌드위치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세상에 고등어 샌드위치를 만들다니…. 쓸쓸한 나는 고등어 샌드위치를 하나 사서 바닷가에서 먹었다. 그때 갈매기들이 내 곁에 날아왔다. 나는 갈매기들에게 말했다. 갈매기야 내려와라. 고등어 샌드위치 좀 먹고 가라. - 곽재구<시인> -

 

 

 

 

 

 

 

『주꾸미』 - 한승원(1939~ ) -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것은 주꾸미들이다. 소라껍질에 끈 달아 제놈 잡으려고 바다 밑에 놓아두면 자기들 알 낳으면서 살라고 그런 줄 알고 태평스럽게 들어가 있다 어부가 껍질을 들어올려도 도망치지 않는다. 파도가 말했다 주꾸미보다 더 민망스런 족속들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소라고둥 껍질 속에 들어앉은 채 누군가에게 자기들을 하늘나라로 극락으로 데려다 달라고 빈다. '주꾸미' 전문

 

 

 

한 가난한 이가 길에 쓰러져 있었다. 오랫동안 씻지도 먹지도 못한 흔적이 그의 몸 깊숙이 배어 있었다. 누군가 그를 집에 데려갔다. 밥 한 그릇이 그의 눈앞에 놓였다. 가난한 이가 말했다. 이게 밥입니까…. 감사합니다…. 그는 밥을 먹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그 얼굴에 한없이 평화로운 빛이 감돌았다…. 마더 테레사의 전기에 쓰여진 이야기다. 가난하고 한없이 누추했지만 감사할 줄 아는 영혼. 자신들이 만든 윤택한 소라고둥 속에 들어앉아 하늘나라로 극락으로 데려가 달라고 빌고 또 비는 영혼. 당신이 신이라면 선택은? - 곽재구<시인> -

 

 

 

 

 

 

 

『시를 쓰다가』 - 김용택(1948~ ) - 시를 쓰다가 연필을 놓으면 물소리가 찾아오고 불을 끄면 새벽 달빛이 찾아온다. 내가 떠나면 꽃잎을 입에 문 새가 저 산을 넘어와 울 것이다. '시를 쓰다가' 전문

 

 

 

새벽이다. 창 밖의 숲에 무슨 축제가 있나 보다.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숲을 흔든다. 새들은 소리마다 빛깔을 지닌다. 가만히 귀 기울인다. 숲속에 사는 모든 종류의 새들이 색색의 꽃가지 하나씩을 물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어떤 새는 현호색 꽃잎을 물고 하늘로 오르고, 어떤 새는 수수꽃다리 꽃잎을 물고 날아오른다. 꼬리와 날개가 노란 작은 새는 산수유 꽃가지를 물고 솟구친다. 새들이 날아오른 하늘 근처의 구름들도 색색으로 물든다. 낮고 조용하게 우는 새도 있다. 맥문동 꽃밭에 고인 새벽 공기처럼…. 만리나 멀리 스며 나간다는 은목서 꽃향기처럼…. 다 여문 수수밭을 떠나지 못하는 바람처럼…. 첫 햇살이 쏟아지고, 나는 연필을 깎기 시작한다. - 곽재구<시인> -

 

 

 

 

 

 

 

『히말라야』 - 이시영(1949~ ) - 라다크에서 어느 할아버지는 다람쥐처럼 조르르 지붕에 올라가 비 새는 곳을 수리하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집앞 흔들의자에 앉아 소년처럼 잠시 붉은 얼굴로 타는 노을을 바라보다 그만 저 세상으로 가시었다. 사람의 삶이 아직 광활한 자연의 일부였을 때. '히말라야' 전문

 

 

 

몬순기의 히말라야 트레킹을 사람들은 싫어한다. 주코라고 불리는 산거머리들 때문이다. 주코는 길섶의 습지나 바위·나뭇잎에 붙어 있다가 등산객의 몸에 잽싸게 달라붙어 흡혈을 한다. 독한 녀석은 살 속까지 파고든다고 한다. 그 여름,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며 두 무릎 모두 주코의 습격을 받았다. 바짓가랑이에 붉은 빛이 번져나갈 때 그것이 점심 시간에 흘린 토마토 케첩의 흔적이려니 생각했었다. 지혈이 되지 않던 이틀 동안 나는 주코들을 증오했고, 지닌 두 벌의 바지 중 하나를 버려야만 했다…. 이상한 일이 있었다. 산에서 돌아온 뒤 그 주코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주코들을 생각하면 설산의 파노라마들이 펼쳐지고 환하게 웃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 곽재구<시인> -

 

 

 

 

 

 

 

『멍게』 - 최승호(1954~ ) - 멍청하게 만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을 지워버린다. 멍게는 참 조용하다. 천둥벼락 같았다는 유마의 침묵도 저렇게 고요했을 것이다. 허물덩어리인 나를 흉보지 않고 내 인생에 대해 충고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멍게는 얼마나 배려깊은 존재인가? (중략) 멍! 소리를 내면 벌써 입안이 울림의 공간 메아리치는 텅빈 골짜기 범종 소리가 난다. 멍. '멍게' 부분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한 성가족 대성당 사진을 본다. 1883년 지어지기 시작한 이 성당은 현재도 완공을 향해 진행 중이다. 뾰족한 첨탑들만 제외하면 성당의 모습은 얼핏 멍게의 모습을 닮아 있다. 신성한 성당과 멍게….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멍게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한없이 못 생기고 어수룩한 그 공간 어딘가에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신이 머무르고 있을 것만 같다. 멍! 범종 소리처럼 울리는 멍게. 허물덩어리인 우리의 인생을 침묵으로 감싸 안아주는 멍게! - 곽재구<시인> -

 

 

 

 

 

 

 

『상유』 - 장대송(1962~ ) - 멀리 내려다보니 산들이 겹겹이 서 있다. 계곡 사이에 계단식 논이, 논가에는 집이 두 채 있다. 먼저 지나쳐온 골짜기들보다 푸근하다. 오늘따라 골짜기 한 가운데로 해가 지고 있다. 눈을 감아야 할 것 같다. '상유(尙遊)' 전문

 

 

 

나그네에게 행복한 일은 아직 걸을 길이 남아 있음이다. 산을 넘고 강을 따라 걷다가 다시 언덕을 넘고 구름을 따라 걷다가…. 영마루에서 문득 해는 지고…. 얼마나 많은 해넘이를 맞이해야 생은 저 산능선처럼 깊고 고요해질까…. 감았던 눈 비벼 뜨고 산마루 돌면 문득 마주치는 마을.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때 아닌 닭울음 소리가 들리고…. 마을 안길은 밥 뜸들이는 냄새로 더없이 평화로운데…. 이르는 곳마다 마주치는 이 상유(尙遊)의 시간들. 어떤 죄의 흔적 속에도 별밭을 띄우는 깜깜한 밤의 서향(瑞香)이여. 길이 남아 있음은 나그네에게 운명보다 따스한 일이다. - 곽재구<시인> -

 

 

 

 

 

 

 

『조용한 이웃』 - 황인숙(1958~ ) - 부엌에 서서 창밖을 본다. 높다랗게 난 작은 창 너머에 나무들이 살고 있다. 이따금 그들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본다. 까치집 세 개와 굴뚝 하나는 그들의 살림일까? 꽁지를 까닥거리는 까치 두 마리는? 그 나무들은 수수하게 사는 것 같다. 잔가지들이 무수하게 많고 본 줄기도 가늘다. 하늘은 그들의 부엌 오늘의 식사는 얇게 저며서 차갑게 식힌 햇살 그리고 봄기운을 두 방울 떨군 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떨구는 것이다. '조용한 이웃' 전문

 

 

 

시집을 몇 권 구하기 위해 서점에 들렀다. 전에 시집들이 놓여 있던 자리에 시집이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며 찾다가 한쪽 구석 무더기로 쌓아놓은 시집 더미를 본다. 신학기용 참고서 쌓을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시집 코너를 빌렸다고 종업원이 말한다. 수험용 참고서에 밀려나간 불쌍한 모국어의 파수꾼들. 얼마 전 시인의 연봉이 30만원이라는 기사가 나온 적 있다. 열심히 일년 동안 시 발표를 하면 그 정도의 원고료를 받는 것이다. 황인숙·김선우·진은영·장대송들의 시집을 무더기 속에서 찾았다. 얇게 저민 차가운 햇살 한두 줌과 잔잔한 바람으로 식사를 하는 내 조용한 이웃들. - 곽재구<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