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 되었습니다. 다들 즐거운 기분으로 주말을 즐기시길... ============================ 새벽 1시. 일단 좀 자고 =========================== 시간이 지나 머리가 크면서 당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게 되자 다른 사람을 탓할 방법도 그만큼 많아졌다. 아빠를 일에 미치게 만든 아저씨(지금의 새 아빠), 바로 곁에 있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아빠를 말리지 못한 엄마, 아빠를 다급하게 만든 수없이 많은 경쟁자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엔 묘한 의문이 싹텄다. 과연 아빠도 그들을 원망했을까? 내가 아는 아빠의 삶은 불행 그 자체였다. 아빠는 늘 그 조그만 책상에 묶여 떠나질 못했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하고, 개발하는 일에 빠져 인생의 즐거움이란 건 느껴본 적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지하실에 스스로를 가두고 채찍질하다가 세상을 떠나 버린 아빠였다. 하지만 왤까, 그런 아빠의 눈이 불행해 보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아빠는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자신감과 희망으로 가득 찬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눈 밑엔 검은 그늘이 지고 붉은 핏줄이 흰자 가득 뻗쳐있는 눈이었지만... 아빠의 눈은 그 누구보다 먼, 그리고 곧 가까워질 미래를 보고 있었다. 아빠는 행복했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아빠와 함께 살던 집을 떠나 외국에서 지낸 5년 사이에 난 그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하지만 왜?= 그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있었다. = 엄마, 나... 한국으로 돌아갈래요. =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니? = 아빠가... 보고 싶어졌어요. 갑작스러운 나의 결심에 아저씨가 소개해준 DB관리회사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던 엄마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 걱정하지 마세요. 잘 지낼 자신 있어요. 내 결심을 꺾을 수 없다는 확신이 서자 엄마는 이내 미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함께 떠날 채비를 했지만, 난 그런 엄마를 만류했다. 내내 아빠를 보필하다 이제야 자신의 삶을 걷기 시작한 엄마에게 괜한 걸림돌이 되고 싶진 않았다. 내가 볼 땐 엄마도... 어쩔 수 없는 공돌이(공순이?)였으니까. 그렇게 난 아빠와 살던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자취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의식주 해결부터 세금 내는 일까지 신경써야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늘 쓰는 생활필수 언어 정도를 제외하곤 단어도 많이 잊어버린 데다, 주변 분위기도 예전과는 엄청나게 달라져 있었기에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데도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학수업이 너무 어려웠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대학도 가고, 하고 싶던 연극도 계속 할 수 있게 된 나. 아직 원하던 답을 얻은 건 아니었지만 생활은 충분히 즐거웠다. 한국에서의 생활도 2년이 다 되어 갈 때쯤, 대학교 1학년 2학기 개강일이 되었다. 여름방학동안 엄마와 함께 살다 온 탓에 시차적응이 안 되었던 난 결국 늦잠을 자버렸고, 첫 수업이 거의 끝났을 때에야 간신히 강의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조심조심 빈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을 때, 별안간 나를 부르는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 거기 뒤에 오신 분! = 예?! 깜짝 놀라 올려다본 강단엔 교수님과 더불어 굉장히 무섭게 생긴 남자 셋이 나란히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혹시 나처럼 지각한 사람들인가? = 혹시 이 강좌에 아는 사람 있나요? = 어...없는데요. = 그럼 이분들이랑 한 조 하세요. 지각했다고 벌 받는 건 아니었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강단에 올라선 순간, 내 귀에 들려온 청천벽력 같은 한 마디. = 이로써 공대찌꺼기 조가 완성되었습니다. = 네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비명소리에 사람들은 왁자한 웃음을 터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난 내 바로 옆에 서있던 남자 뒤로 몸을 숨겼고, 그는 슬핏 나를 돌아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얼굴을 본 순간, 난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빠? 무심코 튀어나오려는 그 말을 난 간신히 입술만 움직이는 정도에서 멈출 수 있었다. 그게...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날 이후, 내 관심은 온통 그에게 쏠리게 되었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아빠와 너무 비슷한 그 남자. 평소 하는 행동도 아빠와 비슷했던 데다 공대생(공돌이)이기까지 했다! 이런 우연이 어디 있을까. 난 호시탐탐 그에게 말을 붙일만한 건수를 찾아 주변을 서성거렸지만 찬스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첫날 봤던 것과 달리 늘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좀체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나이가 많아서 그런 걸까?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 첫 번째 조별 발표로 배경음악을 포함한 연극을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연극 보기가 취미고, 연극연기가 유일한 특기였던 난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두 자리 건너 앉아있던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 저기요, 저기요... 저 발표 우리 조가 해요. = 네, 그러세요. 우린 별로 할 생각 없어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정말 매몰차리만치 의외의 것이었다. = 우린 별로 할 생각 없으니 할 거면 혼자 해라 = 라니...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단 말인가? = 우리.... 같은 조잖아요? 서러움에 울음이 나는 걸 간신히 참으며 그렇게 되물었을 때, 그는 잠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 백설공주? ....... 그랬다. 그는 나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내가 그렇게 마음 졸이고 애태우는 동안 그가 나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건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이후, 그와 나 사이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같이 연극도 했고, 수학공부도 했고, 티켓도 같이 팔고.... 서툴게, 하지만 너무나 조심스럽게 내게 여린 손을 내밀어줬던 그 사람. 그동안 아빠에게 부리지 못했던 어리광들을 그는 모두 받아주었다. 그동안 아빠에게 듣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들을 그는 모두 해주었다. 아빠의 눈은 늘 책상을 향해 있었지만, 그의 눈은 늘 나를 향해 있었다. 그 따스함에 취해 나른한 꿈을 꾸고 일어났을 때 이미 그는 내 마음 속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 사랑하고 있다. = 그건 몹시도 낯설고 무서운 기분이었다. 두근거리고, 부끄럽고, 숨기고 싶지만, 어떻게든 말하고 싶은 그 맘을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아빠 같기만 했던 그 사람이 어느덧 한 남자가 되어 내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아빠를 매료시켰던 것이 무엇인지 찾아 한국에 와서 엉뚱한 것에 매료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래도 참 행복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를 만큼 행복에 취해 살았다. 뒤돌아볼 새도 없이 다가올 내일의 내일만 손꼽아 기다리며 지냈다. 물론 가슴 아팠던 적도, 야속했던 날도 있지만.... 그조차.... 지금 생각하면 행복이었다. 안군 오빠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온 난 지난 일기장들을 쭉 읽어보면서 진한 추억에 잠겨있었다. 그와 만난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일기장으로 한권 반. 이정도 되면 책으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분량이었다. 비록 현재까지의 결말은.... 새드 엔딩이지만. 싸하게 메어오는 목을 어루만지며 일기장을 덮었을 때, =똑똑= 하고 작은 노크소리와 함께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나 - 언니, 아직 안 자? 민아 - 응, 무슨 일이야? 내 동생 한나.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현재 애인이다. 편히 쉬어야 할 집에서도 끊임없이 그녀를 보며 쓴 웃음을 지어야하는 지금 상황은, 그 여린 사람을 배신했던 내 죄에 대한 최고로 혹독한 벌이 아닐까 싶다. 한나 - .... 언니, 저기.... 혹시 내일 어디 가? 민아 - 아니, 별 일 없는데... 왜? 한나 - 내일 기억이 오빠가 오기로 했거든. 언니한텐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민아 - 그... 그래? 그럼... 집... 비워줄까? 한나 - 아, 아니, 그런 이야기 아니야. 언니 보러 온다는 거야. 민아 - 응? 왜? 한나 - 이야기 하자면 긴데...... 아무튼.... 예쁘게 하고 있어. 뒷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서있던 그녀는 그렇게 영문 모를 말 한마디만을 남긴 채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밖으로 나갔다. 이건 또 갑자기 무슨 소릴까?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내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가 나를 보러 온다니.... 설마? 한나 - 아, 그리고.... 나 3일 전에 오빠한테 고백했다가 차였어. 그러니까... 나 신경 쓸 건 하나도 없어. 알았지? 문을 닫고 나서기 직전 고개만 빠끔히 내밀고 한 마디를 보태는 그녀. 그제야 난 그녀의 의도를 직감할 수 있었다. 그가 돌아온다. 그가....... 다음날 아침부터 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나는 운동하고 온다는 말만 남겨둔 채 집을 비운 상황. 민아 - 아우.... 잠을 설쳤더니 화장이 안 먹네... 다급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르는 족족 허옇게 떠버리는 화장품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관리를 좀 해놓는 건데......! 미인은 왜 잠꾸러기일 수밖에 없는 지 절실하게 느끼면서 화장을 마치고 머리를 손질한 난 또다시 절망적인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민아 - 꺄악~! 셔츠를 아직 안 갈아입었어! 결국 셔츠를 입고 벗는 사이 머리 모양은 엉망이 되어버렸고, 머리를 새로 하는 사이 화장도 덩달아 지워져 버렸다. 어디서부터 수습해야할지도 모르고 허둥대는 동안 시계는 벌써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일을 어쩌지 이 일을....!!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간신히 그를 맞이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던 나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태세를 정비했다. 침착해라 민아야, 너무 들뜨면 안돼. 혹시 다른 일로 오는 건지도 모르잖아. 그때를 대비해서 마음의 여유를 좀 가지고.... =딩동~ 딩동~= ....... 왔다!!!! 재빨리 인터폰으로 뛰어가 확인한 화면엔 그리운 그의 모습이 떠있었다. 언제나처럼 조금 긴장한 듯 코끝을 매만지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는 기억이. 그 모습을 본 순간 찡한 감동에 사로잡힌 난 문 열어주는 것도 잊은 채 한참동안 인터폰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딩동~ 딩동~= 응답을 기다리던 그가 두 번째 초인종을 누르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난 수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민아 - 응, 그, 금방 나갈게. 대문까지 가는 계단을 한 번에 몇 칸씩 뛰어 내려갔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한 번에 날아서 내려섰는지도 모를 만큼 빠르게 대문으로 뛰어간 난 깊게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문을 열었다. 기억 - ........ 하....하이. 그곳엔.... 정말로 그가 있었다.
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3-48화> 민아의기억2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다들 즐거운 기분으로 주말을 즐기시길...
============================ 새벽 1시. 일단 좀 자고 ===========================
시간이 지나 머리가 크면서
당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게 되자
다른 사람을 탓할 방법도 그만큼 많아졌다.
아빠를 일에 미치게 만든 아저씨(지금의 새 아빠),
바로 곁에 있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아빠를 말리지 못한 엄마,
아빠를 다급하게 만든 수없이 많은 경쟁자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엔 묘한 의문이 싹텄다.
과연 아빠도 그들을 원망했을까?
내가 아는 아빠의 삶은 불행 그 자체였다.
아빠는 늘 그 조그만 책상에 묶여 떠나질 못했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하고, 개발하는 일에 빠져
인생의 즐거움이란 건 느껴본 적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지하실에 스스로를 가두고 채찍질하다가
세상을 떠나 버린 아빠였다.
하지만 왤까,
그런 아빠의 눈이 불행해 보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아빠는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자신감과 희망으로 가득 찬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눈 밑엔 검은 그늘이 지고
붉은 핏줄이 흰자 가득 뻗쳐있는 눈이었지만...
아빠의 눈은 그 누구보다 먼,
그리고 곧 가까워질 미래를 보고 있었다.
아빠는 행복했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아빠와 함께 살던 집을 떠나 외국에서 지낸 5년 사이에
난 그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하지만 왜?=
그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있었다.
= 엄마, 나... 한국으로 돌아갈래요.
=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니?
= 아빠가... 보고 싶어졌어요.
갑작스러운 나의 결심에
아저씨가 소개해준 DB관리회사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던 엄마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 걱정하지 마세요. 잘 지낼 자신 있어요.
내 결심을 꺾을 수 없다는 확신이 서자
엄마는 이내 미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함께 떠날 채비를 했지만,
난 그런 엄마를 만류했다.
내내 아빠를 보필하다
이제야 자신의 삶을 걷기 시작한 엄마에게
괜한 걸림돌이 되고 싶진 않았다.
내가 볼 땐 엄마도...
어쩔 수 없는 공돌이(공순이?)였으니까.
그렇게 난 아빠와 살던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자취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의식주 해결부터 세금 내는 일까지
신경써야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늘 쓰는 생활필수 언어 정도를 제외하곤
단어도 많이 잊어버린 데다,
주변 분위기도 예전과는 엄청나게 달라져 있었기에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데도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학수업이 너무 어려웠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대학도 가고,
하고 싶던 연극도 계속 할 수 있게 된 나.
아직 원하던 답을 얻은 건 아니었지만
생활은 충분히 즐거웠다.
한국에서의 생활도 2년이 다 되어 갈 때쯤,
대학교 1학년 2학기 개강일이 되었다.
여름방학동안 엄마와 함께 살다 온 탓에
시차적응이 안 되었던 난 결국 늦잠을 자버렸고,
첫 수업이 거의 끝났을 때에야
간신히 강의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조심조심 빈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을 때,
별안간 나를 부르는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 거기 뒤에 오신 분!
= 예?!
깜짝 놀라 올려다본 강단엔
교수님과 더불어 굉장히 무섭게 생긴 남자 셋이
나란히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혹시 나처럼 지각한 사람들인가?
= 혹시 이 강좌에 아는 사람 있나요?
= 어...없는데요.
= 그럼 이분들이랑 한 조 하세요.
지각했다고 벌 받는 건 아니었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강단에 올라선 순간,
내 귀에 들려온 청천벽력 같은 한 마디.
= 이로써 공대찌꺼기 조가 완성되었습니다.
= 네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비명소리에
사람들은 왁자한 웃음을 터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난
내 바로 옆에 서있던 남자 뒤로 몸을 숨겼고,
그는 슬핏 나를 돌아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얼굴을 본 순간, 난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빠?
무심코 튀어나오려는 그 말을
난 간신히 입술만 움직이는 정도에서 멈출 수 있었다.
그게...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날 이후,
내 관심은 온통 그에게 쏠리게 되었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아빠와 너무 비슷한 그 남자.
평소 하는 행동도 아빠와 비슷했던 데다
공대생(공돌이)이기까지 했다!
이런 우연이 어디 있을까.
난 호시탐탐 그에게 말을 붙일만한 건수를 찾아
주변을 서성거렸지만
찬스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첫날 봤던 것과 달리 늘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좀체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나이가 많아서 그런 걸까?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 첫 번째 조별 발표로 배경음악을 포함한
연극을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연극 보기가 취미고,
연극연기가 유일한 특기였던 난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두 자리 건너 앉아있던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 저기요, 저기요... 저 발표 우리 조가 해요.
= 네, 그러세요. 우린 별로 할 생각 없어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정말 매몰차리만치 의외의 것이었다.
= 우린 별로 할 생각 없으니 할 거면 혼자 해라 =
라니...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단 말인가?
= 우리.... 같은 조잖아요?
서러움에 울음이 나는 걸 간신히 참으며 그렇게 되물었을 때,
그는 잠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 백설공주?
....... 그랬다.
그는 나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내가 그렇게 마음 졸이고 애태우는 동안
그가 나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건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이후,
그와 나 사이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같이 연극도 했고, 수학공부도 했고, 티켓도 같이 팔고....
서툴게, 하지만 너무나 조심스럽게
내게 여린 손을 내밀어줬던 그 사람.
그동안 아빠에게 부리지 못했던 어리광들을
그는 모두 받아주었다.
그동안 아빠에게 듣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들을
그는 모두 해주었다.
아빠의 눈은 늘 책상을 향해 있었지만,
그의 눈은 늘 나를 향해 있었다.
그 따스함에 취해 나른한 꿈을 꾸고 일어났을 때
이미 그는 내 마음 속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 사랑하고 있다. =
그건 몹시도 낯설고 무서운 기분이었다.
두근거리고, 부끄럽고, 숨기고 싶지만,
어떻게든 말하고 싶은 그 맘을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아빠 같기만 했던 그 사람이
어느덧 한 남자가 되어 내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아빠를 매료시켰던 것이 무엇인지 찾아 한국에 와서
엉뚱한 것에 매료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래도 참 행복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를 만큼 행복에 취해 살았다.
뒤돌아볼 새도 없이
다가올 내일의 내일만 손꼽아 기다리며 지냈다.
물론 가슴 아팠던 적도, 야속했던 날도 있지만....
그조차.... 지금 생각하면 행복이었다.
안군 오빠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온 난
지난 일기장들을 쭉 읽어보면서 진한 추억에 잠겨있었다.
그와 만난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일기장으로 한권 반.
이정도 되면 책으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분량이었다.
비록 현재까지의 결말은.... 새드 엔딩이지만.
싸하게 메어오는 목을 어루만지며 일기장을 덮었을 때,
=똑똑= 하고 작은 노크소리와 함께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나 - 언니, 아직 안 자?
민아 - 응, 무슨 일이야?
내 동생 한나.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현재 애인이다.
편히 쉬어야 할 집에서도
끊임없이 그녀를 보며 쓴 웃음을 지어야하는 지금 상황은,
그 여린 사람을 배신했던 내 죄에 대한
최고로 혹독한 벌이 아닐까 싶다.
한나 - .... 언니, 저기.... 혹시 내일 어디 가?
민아 - 아니, 별 일 없는데... 왜?
한나
- 내일 기억이 오빠가 오기로 했거든.
언니한텐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민아 - 그... 그래? 그럼... 집... 비워줄까?
한나
- 아, 아니, 그런 이야기 아니야.
언니 보러 온다는 거야.
민아 - 응? 왜?
한나 - 이야기 하자면 긴데...... 아무튼.... 예쁘게 하고 있어.
뒷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서있던 그녀는
그렇게 영문 모를 말 한마디만을 남긴 채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밖으로 나갔다.
이건 또 갑자기 무슨 소릴까?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내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가 나를 보러 온다니.... 설마?
한나
- 아, 그리고.... 나 3일 전에 오빠한테 고백했다가 차였어.
그러니까... 나 신경 쓸 건 하나도 없어. 알았지?
문을 닫고 나서기 직전 고개만 빠끔히 내밀고
한 마디를 보태는 그녀.
그제야 난 그녀의 의도를 직감할 수 있었다.
그가 돌아온다. 그가.......
다음날 아침부터 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나는 운동하고 온다는 말만 남겨둔 채 집을 비운 상황.
민아 - 아우.... 잠을 설쳤더니 화장이 안 먹네...
다급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르는 족족 허옇게 떠버리는 화장품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관리를 좀 해놓는 건데......!
미인은 왜 잠꾸러기일 수밖에 없는 지 절실하게 느끼면서
화장을 마치고 머리를 손질한 난
또다시 절망적인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민아 - 꺄악~! 셔츠를 아직 안 갈아입었어!
결국 셔츠를 입고 벗는 사이 머리 모양은 엉망이 되어버렸고,
머리를 새로 하는 사이 화장도 덩달아 지워져 버렸다.
어디서부터 수습해야할지도 모르고 허둥대는 동안
시계는 벌써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일을 어쩌지 이 일을....!!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간신히 그를 맞이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던 나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태세를 정비했다.
침착해라 민아야, 너무 들뜨면 안돼.
혹시 다른 일로 오는 건지도 모르잖아.
그때를 대비해서 마음의 여유를 좀 가지고....
=딩동~ 딩동~=
....... 왔다!!!!
재빨리 인터폰으로 뛰어가 확인한 화면엔
그리운 그의 모습이 떠있었다.
언제나처럼 조금 긴장한 듯 코끝을 매만지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는 기억이.
그 모습을 본 순간 찡한 감동에 사로잡힌 난
문 열어주는 것도 잊은 채
한참동안 인터폰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딩동~ 딩동~=
응답을 기다리던 그가 두 번째 초인종을 누르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난 수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민아 - 응, 그, 금방 나갈게.
대문까지 가는 계단을
한 번에 몇 칸씩 뛰어 내려갔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한 번에 날아서 내려섰는지도 모를 만큼
빠르게 대문으로 뛰어간 난
깊게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문을 열었다.
기억 - ........ 하....하이.
그곳엔.... 정말로 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