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꽃 필 무렵』
- 김소영(1957~ ) -
그 남자한테서
가을햇빛에 펄럭이는
삶은 기저귀 냄새가 났습니다
그 냄새에 코를 박고
오랜 시간 나는 행복했습니다
'민들레꽃 필 무렵' 전문
볼프강 라이프라는 독일 화가를 기억한다.
제1회 광주 비엔날레.
속도라는 테마가 붙은 전시장에 놓인 그의 작품은
전시의 테마와는 좀처럼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두 개의 생선상자를 붙여놓은 크기의 나무 상자에
노란 민들레 꽃가루를
수북이 쌓아놓은 것이 그의 작품이었다.
네 벽에는 그가 고향 마을의 초원에서
민들레 꽃가루를 채집하는 모습이
동영상으로 보여지고 있었다.
그 채집은 3년, 4년, 5년 변함없이 지속되고….
꽃가루들은 그가 이승에서 만난 지극히 고요한 속도,
꿈의 이름들이었다.
가을 햇빛에 펄럭이는 삶은 기저귀 냄새가 나는 사람….
맑음과 연민이 결집된 아련한 생의 냄새 속에
한 송이 민들레꽃이 피어난다.
- 곽재구<시인> -
『강』
- 황인숙(1958~ ) -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강' 전문
에드워드 에비라는 미국 친구가 쓴 강에 대한 책을 읽었다.
62년의 생애 중 23년을 강물 위에서 지낸 그는
시를 '절망에 따른 악습'이라고
정의했다. 상류에서 하류로….
강은 지극히 단순한 한 가지의 열망으로 흘러간다.
더 높은 곳으로, 더 더 높은 곳으로 향하는 외침들 속에서
강은 묵묵히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갈 뿐이다….
모든 절망의 악습에 젖은 꿈들이여 강으로 가자.
낮은 목소리로 흐르는 그곳에서
인생의 어깃장을, 애간장을 다 녹여 보내자.
제임스 조이스는 말했다.
"나는 흘러가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 곽재구<시인> -
『이야기를 나눌 시간』
-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 -
친구가 길에서
말의 발걸음 서서히 늦추며
다정히 내 이름을 부를 때
아직 갈지 못한 둔덕을 바라보며
웬 일인가? 소리쳐 묻지 않는다네.
우리에겐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으니까?
부드러운 땅의 가슴에
괭이자루를 세워두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돌담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온다네.
'이야기를 나눌 시간' 전문
우리에겐 좀처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다.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전적으로 부족한지도 모른다.
친구가 없으니 이야기는 점점 메말라가고
온정이나 의리 같은 말들도 사라져 간다.
피곤한 하루해가 저물고
불 켜진 포장마차 앞을 구부정 지나갈 때 문득
누군가 큰 목소리로 어이, 하며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 저녁은 얼마나 따뜻한 저녁이 되겠는가.
그 저녁 포장마차의 '꼼장어' 맛은 얼마나 일품이겠는가.
딩동, 초인종을 누르고 아파트 문 앞에 섰을 때
식구들이 우르르 달려나와
나의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때 우리의 의기소침은
얼마나 따뜻하게 녹아내리겠는가.
길 위에서 사무실에서 지하철에서 꽃 핀 나무 앞에서
다정하게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자.
- 곽재구<시인> -
『코스모스』
- 김진경(1953~ ) -
친구가 길에서
말의 발걸음 서서히 늦추며
다정히 내 이름을 부를 때
아직 갈지 못한 둔덕을 바라보며
웬 일인가? 소리쳐 묻지 않는다네
우리에겐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으니까?
부드러운 땅의 가슴에
괭이자루를 세워두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코스모스 속엔
유랑곡마단의 천막과
나팔 소리가 있다.
코스모스 속엔
까맣게 높은 천장에서
아슬아슬 줄을 타는
곡마단의 소녀가 있다.
코스모스 속엔
하얀 꽃송이
팽그르르 맴을 돌며 떨어지는
물맑은 우물이 있다
검은 물빛을 보며
나도 나팔소리와 깃발 따라가는
떠돌이이고 싶었다.
코스모스 속엔
하얗게 소름 마르는 길이 있다.
'코스모스' 전문
지난해 늦가을과 초겨울에 내가 제일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코스모스 씨앗을 세 봉지나 받아둔 일이다.
봉지 속의 씨앗을 다 풀어내면 한 됫박은 좋이 될 것이다.
863번 지방도로(이 길을 곧장 가면 여수 바다에 이른다)와
순천만 갈대밭 주위에 핀 코스모스 씨앗들을
틈나는 대로 받았다.
코스모스 씨앗을 열심히 받고 있노라면
마음 안에 유랑극단의 나팔소리가 들린다.
물맑은 샘물이 찰랑거리기도 하고
하얗게 소름 마르는 길이 떠오르기도 한다.
봄이 된 지금 나는 그 씨앗들을
어디에 뿌릴까 하는 마음으로 기쁘다.
- 곽재구<시인> -
『산문(山門)』
- 박두규(1956~ ) -
세상 보따리 싸들고
산문을 나오는데
이적지 말 한 마디 걸어오지 않던
물소리 하나 따라나온다.
문득 그대가 그립고
세월이 이처럼 흐를 것이다.
뒤늦게 번져오는 산벚꽃이여.
온 산을 밝히려 애쓰지 마오.
끝내 못한 말 한 마디
계절의 접경(接境)을 넘어
이미 녹음처럼 짙어진 것을.
'산문(山門)' 전문
나라 안에서 산벚꽃이 가장 아름다운 동네를 혹 아시는지….
18번 국도의 시발점, 진도 남동리 석성마을 앞산이 그곳이다.
집앞까지 봄바다가 밀려오는 그곳
안성단 할머님댁 툇마루에 앉아
조공례 할머니와 김생임 할아버지가 불러주는
육자배기 가락을 들으며 아득하게 꽃핀
산벚꽃 나무들을 본 적이 있다.
솔바람소리, 작은 파도소리, 육자배기 가락이
조용히 섞이는 시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하찮기만 한 생의 순간들이 문득
신선의 꿈처럼 환해지는 것이다.
- 곽재구<시인> -
『다시 사월에』
- 조태일(1941~2002) -
참 희한한 일이다.
이 강산에 태어난 지 삼십년이나 되었는데
그대 보이지 않고
그대 말하지 않고
그대 정처도 없이
지금껏 어디서 떠돌고 있는가?
(중략)
그 세월 동안
퇴보와 변절과 절망만 커져왔는가.
아니 새로운 시대는 없고
묵은 시대만 첩첩산중처럼 쌓이는가.
그대 사월,
눈보라만큼 물보라만큼 비보라만큼
드세고 넉넉함이 한량없던 사랑,
꽃보라 피보라 함성보라 총칼보라 속에서
그대 태어나 이 강산에 스며들었나니
그대 이제 나타나서
그대 모습 하늘만큼 큰 모습으로 말하라.
(후략)
'다시 사월에'부분
사월의 바람, 사월의 햇살, 사월의 언덕,
사월의 편지, 사월의 극장, 사월의 시,
사월의 뮤지컬, 사월의 해협, 사월의 느릅나무,
사월의 저녁구름, 사월의 이별, 사월의 종소리,
사월의 브람스, 사월의 황톳길, 사월의 자전거여행,
사월의 성좌, 사월의 불꽃놀이, 사월의 카푸치노….
모든 단어는 사월을 만나면 깊게 설렌다.
그 햇살과 바람, 흙냄새와 꽃향기가
우리의 생을 충만케 하기 때문이다.
사월은 혁명의 꿈으로 늘 행복하다.
- 곽재구<시인> -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 박철(1960~ ) -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 타고 삼거리 지나는데 굵은 비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 문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후략)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부분
아내는 돈 4만원을 주며 영진설비에
외상값을 갚고오라 한다.
자전거를 타고가는 꽃핀 고샅길 화사한데….
수퍼 지나는 길에 꽃비 만나고….
맥주 한잔 생각이 절로 나지 않겠는가.
봄날은 가고, 남은 돈으로 나무시장 앞길에서
홀로 서있는 재스민 꽃나무를 사고….
아내여, 어찌하겠는가.
부릅뜬 당신의 눈망울에도 이미
수수꽃다리 자욱이 피어난 것을….
- 곽재구<시인> -
『우리 두 사람』
- 문도채(1928~2003) -
무던히 오래 같이 살아왔으면서도
당신의 어디가 좋은지 몰랐는데
첫째에게 하나 둘을 가르치고
둘째 셋째…
여섯 아이 말고 손주까지 길러 오면서도
할 말이 없었는데
회갑잔치를 맞을
덩실한 집 큰방에 남은 우리 두 사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여보, 가까이 가까이 좀 와요
흰머리를 뽑는다.
'우리 두 사람' 전문
김밥 한 주먹 들고 상사 초등학교에 가다.
작은 실개천이 흐르는 산골 분지에 새워진
이 초등학교를 분지 위의 언덕에서 내려다 보다.
서툴게 그린 분홍색의 동그라미 하나가
연둣빛의 대지 한가운데 툭 던져져 있다.
만개한 벚꽃나무들이 학교를 한바퀴 빙 둘러 서 있는 탓이다.
늙은 벚꽃나무 아래 돌벤치에 앉아 깁밥을 먹다.
꽃 이파리들이 하늘로 땅으로 바람 속으로 날아오르다.
그중 하나 손에 든 김밥 위로 툭 떨어지다.
잠시 망설이다 꽃잎과 함께 한 덩이 김밥을 삼키다.
나이 든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봄을 맞이했다는 것.
늙은 벚꽃나무를 가만히 껴안아 보다.
- 곽재구<시인> -
『살구꽃』
- 문신 (1973~ ) -
해마다 사월이면 쌀 떨어진 집부터 살구꽃이 피었다.
살구꽃은 간지럽게
한 송이씩 피는 것이 아니라 튀밥처럼,
겨우내 살구나무 몸통을 오르내리며
뜨겁게 제 몸을 달군 것들이
동시에 펑, 하고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검은 눈망울을 단 아이들이
맨발로 흙밭을 뒹구는
한낮에 피는 것이 아니었다.
살구꽃은 낮은 지붕의 처마 밑으로 어둠이 고이고,
그 어둠이 꾸벅꾸벅 조는 한밤중에 손님처럼
가만히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새벽이 오면 오갈 데 없는 별들의
따뜻한 거처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이 피는 아침이면 마을 여기저기서
쌀독 긁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살구꽃' 부분
야간산행을 하다. 자정의 시각 선암사를 출발해
아침 햇살이 펼쳐지는 시각 송광사에 도착하다.
걷다가 마른 풀덤불에 등을 대고 눕다.
하늘의 별밭이여, 무슨 꿈들이 모여
그리 아늑한 꽃밭을 이루는가.
산 아래 암자는 오래 등을 켜고 있다.
저곳에도 누군가 생의 애간장 밤새 끓이고 있는지….
날이 새다. 사하촌 마을은 갓 핀 살구꽃 살구꽃….
연분홍 저 꽃밭이 지난밤 별들의 따뜻한 거처라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 곽재구<시인> -
『쇠똥구리』
- 이산하(1960~ ) -
소똥을
탁구공만하게
똘똘 뭉쳐
뒷발로 굴리며 간다.
처음 보니 귀엽고
다시 보니
장엄하다.
꼴을 뜯던 소가
무심히 보고 있다.
저녁 노을이 지고 있다.
'쇠똥구리' 전문
최선을 다해 자신의 생에 부딪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생이란 만만치 않아서 최고의 열정과 지혜를
다 쏟아붓고도 무릎을 꿇는 경우를 우리는 본다.
그럴 때 그 패배를 장엄하다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소똥은 너무나 하찮은, 가치라고는 찾을 수 없는 존재다.
그 소똥을 쇠똥구리는 최선을 다해 굴린다.
소똥의 원주인이었던 소조차 풀을 뜯다 말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본다.
정말로 작고 보잘것없는 시간마저
생의 진실한 의미로 바꿔놓는 이 쇠똥구리의 노동이야말로
장엄한 것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곽재구<시인> -
행 복 편 지 22
『민들레꽃 필 무렵』 - 김소영(1957~ ) - 그 남자한테서 가을햇빛에 펄럭이는 삶은 기저귀 냄새가 났습니다 그 냄새에 코를 박고 오랜 시간 나는 행복했습니다 '민들레꽃 필 무렵' 전문
볼프강 라이프라는 독일 화가를 기억한다. 제1회 광주 비엔날레. 속도라는 테마가 붙은 전시장에 놓인 그의 작품은 전시의 테마와는 좀처럼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두 개의 생선상자를 붙여놓은 크기의 나무 상자에 노란 민들레 꽃가루를 수북이 쌓아놓은 것이 그의 작품이었다. 네 벽에는 그가 고향 마을의 초원에서 민들레 꽃가루를 채집하는 모습이 동영상으로 보여지고 있었다. 그 채집은 3년, 4년, 5년 변함없이 지속되고…. 꽃가루들은 그가 이승에서 만난 지극히 고요한 속도, 꿈의 이름들이었다. 가을 햇빛에 펄럭이는 삶은 기저귀 냄새가 나는 사람…. 맑음과 연민이 결집된 아련한 생의 냄새 속에 한 송이 민들레꽃이 피어난다. - 곽재구<시인> -
『강』 - 황인숙(1958~ ) -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강' 전문
에드워드 에비라는 미국 친구가 쓴 강에 대한 책을 읽었다. 62년의 생애 중 23년을 강물 위에서 지낸 그는 시를 '절망에 따른 악습'이라고 정의했다. 상류에서 하류로…. 강은 지극히 단순한 한 가지의 열망으로 흘러간다. 더 높은 곳으로, 더 더 높은 곳으로 향하는 외침들 속에서 강은 묵묵히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갈 뿐이다…. 모든 절망의 악습에 젖은 꿈들이여 강으로 가자. 낮은 목소리로 흐르는 그곳에서 인생의 어깃장을, 애간장을 다 녹여 보내자. 제임스 조이스는 말했다. "나는 흘러가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 곽재구<시인> -
『이야기를 나눌 시간』 -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 - 친구가 길에서 말의 발걸음 서서히 늦추며 다정히 내 이름을 부를 때 아직 갈지 못한 둔덕을 바라보며 웬 일인가? 소리쳐 묻지 않는다네. 우리에겐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으니까? 부드러운 땅의 가슴에 괭이자루를 세워두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돌담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온다네. '이야기를 나눌 시간' 전문
우리에겐 좀처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다.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전적으로 부족한지도 모른다. 친구가 없으니 이야기는 점점 메말라가고 온정이나 의리 같은 말들도 사라져 간다. 피곤한 하루해가 저물고 불 켜진 포장마차 앞을 구부정 지나갈 때 문득 누군가 큰 목소리로 어이, 하며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 저녁은 얼마나 따뜻한 저녁이 되겠는가. 그 저녁 포장마차의 '꼼장어' 맛은 얼마나 일품이겠는가. 딩동, 초인종을 누르고 아파트 문 앞에 섰을 때 식구들이 우르르 달려나와 나의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때 우리의 의기소침은 얼마나 따뜻하게 녹아내리겠는가. 길 위에서 사무실에서 지하철에서 꽃 핀 나무 앞에서 다정하게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자. - 곽재구<시인> -
『코스모스』 - 김진경(1953~ ) - 친구가 길에서 말의 발걸음 서서히 늦추며 다정히 내 이름을 부를 때 아직 갈지 못한 둔덕을 바라보며 웬 일인가? 소리쳐 묻지 않는다네 우리에겐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으니까? 부드러운 땅의 가슴에 괭이자루를 세워두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코스모스 속엔 유랑곡마단의 천막과 나팔 소리가 있다. 코스모스 속엔 까맣게 높은 천장에서 아슬아슬 줄을 타는 곡마단의 소녀가 있다. 코스모스 속엔 하얀 꽃송이 팽그르르 맴을 돌며 떨어지는 물맑은 우물이 있다 검은 물빛을 보며 나도 나팔소리와 깃발 따라가는 떠돌이이고 싶었다. 코스모스 속엔 하얗게 소름 마르는 길이 있다. '코스모스' 전문
지난해 늦가을과 초겨울에 내가 제일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코스모스 씨앗을 세 봉지나 받아둔 일이다. 봉지 속의 씨앗을 다 풀어내면 한 됫박은 좋이 될 것이다. 863번 지방도로(이 길을 곧장 가면 여수 바다에 이른다)와 순천만 갈대밭 주위에 핀 코스모스 씨앗들을 틈나는 대로 받았다. 코스모스 씨앗을 열심히 받고 있노라면 마음 안에 유랑극단의 나팔소리가 들린다. 물맑은 샘물이 찰랑거리기도 하고 하얗게 소름 마르는 길이 떠오르기도 한다. 봄이 된 지금 나는 그 씨앗들을 어디에 뿌릴까 하는 마음으로 기쁘다. - 곽재구<시인> -
『산문(山門)』 - 박두규(1956~ ) - 세상 보따리 싸들고 산문을 나오는데 이적지 말 한 마디 걸어오지 않던 물소리 하나 따라나온다. 문득 그대가 그립고 세월이 이처럼 흐를 것이다. 뒤늦게 번져오는 산벚꽃이여. 온 산을 밝히려 애쓰지 마오. 끝내 못한 말 한 마디 계절의 접경(接境)을 넘어 이미 녹음처럼 짙어진 것을. '산문(山門)' 전문
나라 안에서 산벚꽃이 가장 아름다운 동네를 혹 아시는지…. 18번 국도의 시발점, 진도 남동리 석성마을 앞산이 그곳이다. 집앞까지 봄바다가 밀려오는 그곳 안성단 할머님댁 툇마루에 앉아 조공례 할머니와 김생임 할아버지가 불러주는 육자배기 가락을 들으며 아득하게 꽃핀 산벚꽃 나무들을 본 적이 있다. 솔바람소리, 작은 파도소리, 육자배기 가락이 조용히 섞이는 시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하찮기만 한 생의 순간들이 문득 신선의 꿈처럼 환해지는 것이다. - 곽재구<시인> -
『다시 사월에』 - 조태일(1941~2002) - 참 희한한 일이다. 이 강산에 태어난 지 삼십년이나 되었는데 그대 보이지 않고 그대 말하지 않고 그대 정처도 없이 지금껏 어디서 떠돌고 있는가? (중략) 그 세월 동안 퇴보와 변절과 절망만 커져왔는가. 아니 새로운 시대는 없고 묵은 시대만 첩첩산중처럼 쌓이는가. 그대 사월, 눈보라만큼 물보라만큼 비보라만큼 드세고 넉넉함이 한량없던 사랑, 꽃보라 피보라 함성보라 총칼보라 속에서 그대 태어나 이 강산에 스며들었나니 그대 이제 나타나서 그대 모습 하늘만큼 큰 모습으로 말하라. (후략) '다시 사월에'부분
사월의 바람, 사월의 햇살, 사월의 언덕, 사월의 편지, 사월의 극장, 사월의 시, 사월의 뮤지컬, 사월의 해협, 사월의 느릅나무, 사월의 저녁구름, 사월의 이별, 사월의 종소리, 사월의 브람스, 사월의 황톳길, 사월의 자전거여행, 사월의 성좌, 사월의 불꽃놀이, 사월의 카푸치노…. 모든 단어는 사월을 만나면 깊게 설렌다. 그 햇살과 바람, 흙냄새와 꽃향기가 우리의 생을 충만케 하기 때문이다. 사월은 혁명의 꿈으로 늘 행복하다. - 곽재구<시인> -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 박철(1960~ ) -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 타고 삼거리 지나는데 굵은 비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 문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후략)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부분
아내는 돈 4만원을 주며 영진설비에 외상값을 갚고오라 한다. 자전거를 타고가는 꽃핀 고샅길 화사한데…. 수퍼 지나는 길에 꽃비 만나고…. 맥주 한잔 생각이 절로 나지 않겠는가. 봄날은 가고, 남은 돈으로 나무시장 앞길에서 홀로 서있는 재스민 꽃나무를 사고…. 아내여, 어찌하겠는가. 부릅뜬 당신의 눈망울에도 이미 수수꽃다리 자욱이 피어난 것을…. - 곽재구<시인> -
『우리 두 사람』 - 문도채(1928~2003) - 무던히 오래 같이 살아왔으면서도 당신의 어디가 좋은지 몰랐는데 첫째에게 하나 둘을 가르치고 둘째 셋째… 여섯 아이 말고 손주까지 길러 오면서도 할 말이 없었는데 회갑잔치를 맞을 덩실한 집 큰방에 남은 우리 두 사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여보, 가까이 가까이 좀 와요 흰머리를 뽑는다. '우리 두 사람' 전문
김밥 한 주먹 들고 상사 초등학교에 가다. 작은 실개천이 흐르는 산골 분지에 새워진 이 초등학교를 분지 위의 언덕에서 내려다 보다. 서툴게 그린 분홍색의 동그라미 하나가 연둣빛의 대지 한가운데 툭 던져져 있다. 만개한 벚꽃나무들이 학교를 한바퀴 빙 둘러 서 있는 탓이다. 늙은 벚꽃나무 아래 돌벤치에 앉아 깁밥을 먹다. 꽃 이파리들이 하늘로 땅으로 바람 속으로 날아오르다. 그중 하나 손에 든 김밥 위로 툭 떨어지다. 잠시 망설이다 꽃잎과 함께 한 덩이 김밥을 삼키다. 나이 든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봄을 맞이했다는 것. 늙은 벚꽃나무를 가만히 껴안아 보다. - 곽재구<시인> -
『살구꽃』 - 문신 (1973~ ) - 해마다 사월이면 쌀 떨어진 집부터 살구꽃이 피었다. 살구꽃은 간지럽게 한 송이씩 피는 것이 아니라 튀밥처럼, 겨우내 살구나무 몸통을 오르내리며 뜨겁게 제 몸을 달군 것들이 동시에 펑, 하고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검은 눈망울을 단 아이들이 맨발로 흙밭을 뒹구는 한낮에 피는 것이 아니었다. 살구꽃은 낮은 지붕의 처마 밑으로 어둠이 고이고, 그 어둠이 꾸벅꾸벅 조는 한밤중에 손님처럼 가만히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새벽이 오면 오갈 데 없는 별들의 따뜻한 거처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이 피는 아침이면 마을 여기저기서 쌀독 긁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살구꽃' 부분
야간산행을 하다. 자정의 시각 선암사를 출발해 아침 햇살이 펼쳐지는 시각 송광사에 도착하다. 걷다가 마른 풀덤불에 등을 대고 눕다. 하늘의 별밭이여, 무슨 꿈들이 모여 그리 아늑한 꽃밭을 이루는가. 산 아래 암자는 오래 등을 켜고 있다. 저곳에도 누군가 생의 애간장 밤새 끓이고 있는지…. 날이 새다. 사하촌 마을은 갓 핀 살구꽃 살구꽃…. 연분홍 저 꽃밭이 지난밤 별들의 따뜻한 거처라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 곽재구<시인> -
『쇠똥구리』 - 이산하(1960~ ) - 소똥을 탁구공만하게 똘똘 뭉쳐 뒷발로 굴리며 간다. 처음 보니 귀엽고 다시 보니 장엄하다. 꼴을 뜯던 소가 무심히 보고 있다. 저녁 노을이 지고 있다. '쇠똥구리' 전문
최선을 다해 자신의 생에 부딪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생이란 만만치 않아서 최고의 열정과 지혜를 다 쏟아붓고도 무릎을 꿇는 경우를 우리는 본다. 그럴 때 그 패배를 장엄하다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소똥은 너무나 하찮은, 가치라고는 찾을 수 없는 존재다. 그 소똥을 쇠똥구리는 최선을 다해 굴린다. 소똥의 원주인이었던 소조차 풀을 뜯다 말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본다. 정말로 작고 보잘것없는 시간마저 생의 진실한 의미로 바꿔놓는 이 쇠똥구리의 노동이야말로 장엄한 것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곽재구<시인> -
Paul Cardall - The Dr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