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복 편 지 23

수호천사2006.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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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복 편 지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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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껴안을 때』 - 나해철(1956~ ) - 고등어를 굽고 있는 당신의 등을 견딜 수 없어 달려가 껴안을 때 훗날 당신이 없을 때라도 사무치게 그리워하게 될 정신의 합일을 경험하고 있는 거야(중략) 내 정신을 바람으로 내 육체를 불로 만드는 거야 살과 뼈를 구기고 태워서 바람과 불이 되어 당신과 섞이어 하나가 되고자 하는 거야 하나가 되고자 내 생을 당신 속에 집어넣고 또 집어넣고 봉인을 하는 거야. '등을 껴안을 때' 부분

 

 

 

얼굴을 마주한 포옹과, 등 뒤에서 하는 포옹…. 둘은 껴안는 방법 이외의 차이가 있다. 마주한 포옹은 두 사람 모두 포옹의 순간을 인식한다. 따뜻하게 웃으며 자신의 두팔 안에 상대방을 꼭 안아주는 것이다. 등 뒤에서 이루어지는 포옹은 적어도 한 사람은 그 포옹의 순간을 사전에 인식하지 못한 채 맞이한다. 기대하지 못한 경이로움의 시간…. 두고 두고 마음 안에 꽃이 핀다는 점에서 등뒤의 포옹이 더 우아할 것 같다. - 곽재구<시인> -

 

 

 

 

 

 

 

『꽃그늘』 - 이재무(1958~) - 꽃그늘 속으로 세상의 소음에 다친 영혼 한 마리 자벌레로 기어갑니다. 아, 그 고요한 나라에서 곤한 잠을 잡니다. 꽃그늘에 밤이 오고 달뜨고 그리하여 한 나라가 사라져갈 때 밤눈 밝은 밤새에 들켜 그의 한 끼가 되어도 좋습니다. 꽃그늘 속으로 바람이 불고 시간의 물방울 천천히 해찰하며 흘러갑니다. '꽃그늘' 전문

 

 

 

사월의 시간들은 꽃그늘 아래를 흘러간다. 꽃그늘 아래에서 천천히 해찰하며 한 세계가 태어나고 또 한 세계가 사라진다. 가슴 환해지는 그 시간…. 시인은 기꺼이 한 마리의 자벌레가 되어 꽃그늘 아래를 소요하다가 밤눈 밝은 밤새의 한끼 식사가 되기도 한다. 내가 누군가의 식사가 되어 사라진다 해도 한없이 평화롭고 행복해지는 시간들…. 사월의 꽃그늘 속에 신비한 그 시간들이 있다. - 곽재구<시인> -

 

 

 

 

 

 

 

『시계 소리를 듣다 보면』 - 강희안(1965~ ) - 시계 소리를 유심히 듣다 보면 우리의 발목에 혹은 손목에 수갑 채우는 소리 같기도 하다. (중략) 24시간 편의점처럼 열려 있는 수입개방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물가 대학 나온 고급 인력들이 세계 최고의 실업률을 자랑하는 진정 일하는 손이 필요한 여기는 도마동 언덕배기 권태가 기미처럼 끼어 있는 난다방 시계 소리를 유심히 듣다 보면 허기 때우듯 적당히 꾸려지는 세상의 안팎마다 우리의 육신에 혹은 정신에 태엽을 감는 소리 같기도 하다. 경종 울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 '시계 소리를 듣다 보면' 전문

 

 

 

지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시간이 있다. 지내기 힘든 시간과 편안한 시간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따뜻하고 안락한 시간들이 자신의 곁에 머무르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생을 진보시키고 그 의미를 키워나가게 하는 시간들은 지내기 힘든 시간들이다. 고통의 시간들은 온몸으로 자신을 느끼게 한다. 안락한 시간들은 솜사탕처럼 비누거품처럼 '화' 하고 사라져 버릴 뿐이다. 내 곁에 있는 시간들. 힘들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그 시간들만이 지금의 당신을 지켜주는 벗인 것이다. - 곽재구<시인> -

 

 

 

 

 

 

 

『벨기에의 흰 달』 - 황학주(1954~ ) - 정거장마다 지붕 위에서 사라지는 달이 기다리고 어딜 가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은 달에 가있다 달이 물방울처럼 아름다운 브뤼셀은 가까워 오는가 정말 生에 가까운 것이 오려나. 당신은 참 좋은 사람예요 갑자기 열차 창 쪽에서 선이 바스러진 달이 말한다 죄를 사용했던 사랑만을 가지고 있으니. (후략) '벨기에의 흰 달' 부분

 

 

 

봄 내내 냉이꽃밭을 들여다보고 있다. 냉이꽃밭이라고 썼지만 봄의 풀밭은 다 냉이꽃밭이다. 길 걷다가, 강의실 언덕을 오르다가, 서점 가는 길에, 이 작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본다. 아니, 바람의 느낌은 없는데 냉이꽃들이 흔들리는 것을 보아 바람의 존재를 안다. 자신의 존재를 가장 섬세하고 따뜻하게 느끼는 누군가가 눈앞에 걸어온다면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냉이꽃밭에서는 하루 종일 바람들이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 곽재구<시인> -

 

 

 

 

 

 

 

『갈피 접힌 책』 - 오정국(1955~ ) - 갈피 접힌 책은 고요하다. 긴 긴 문장들도 뜻을 접고 앉아서 쉰다 왜 이쯤에서 갈피를 접었을까? 갈피 접은 뜻을 알 수 없다. 언제쯤 읽다만 페이지일까? 갈피 접힌 책은 고요하고 아름답다. 여긴 내가 밑줄 친 세간(世間)의 얼룩도 없다 누가 이 책에 갈피를 접고 간 것일까? 갈피 접힌 뜻을 알 수 없어 또 누군가가 황혼녘의 서가를 뒤진다. (후략) '갈피 접힌 책' 부분

 

 

 

갈피가 접힌 책을 볼 때가 있다. 아무 표식도 없고 그냥 비스듬히 한쪽이 접혀 있을 뿐인데 접힌 쪽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누군가 그곳 어딘가에서 잠시 머물다 간 흔적, 그곳 어딘가에서 인식의 꽃구경이라도 한 흔적이 있나 두리번거리게 된다. 그렇게 생의 황혼녘까지 고요한 서가를 뒤지고 있노라면 언젠가 당신이 모르는 어떤 신이 문득 접어 두고 간 책갈피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 곽재구<시인> -

 

 

 

 

 

 

 

『노스님의 방석』 - 박규리(1960~ ) - 노스님의 방석을 갈았다 솜이 딱딱하다 저 두꺼운 방석이 이토록 딱딱해질 때까지 야윈 엉덩이는 까맣게 죽었을 것이다. 오래 전에 몸뚱어리는 놓았을 것이다. 눌린 만큼 속으로 다문 사십년 방석의 침묵 꿈쩍도 않는다, 먼지도 안 난다. 퇴설당 앞뜰에 앉아 몽둥이로 방석을 탁, 탁, 두드린다. 제대로 독 오른 중생아! 이 독한 늙은 부처야! '노스님의 방석' 전문

 

 

 

내게도 방석이 있다. 4년쯤 깔고 앉았을 것이다. 방석을 보며 나는 그가 그저 방석이려니 하는 생각만 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는지, 그가 놓인 자리가 얼마나 고약하고 낮은 자리인지 생각해 보지 못했다. 시를 읽으며 나는 내 방석에게 많이 미안했다 . 그 또한 얼마나 독이 올라 있었을까. 몽둥이로 방석을 털어내며 화자는 그 미안감을 숨기지 못한다. 이 독한 늙은 부처야! 라는 시구는 화두에 가깝다. 미안하고 겸연쩍은 마음이 역설로 스며 있는 것이다. - 곽재구<시인> -

 

 

 

 

 

 

 

『해뜰 무렵』 - 박상률(1958~) - 저기 한 남자가 쟁기질을 합니다. 저기 한 여자가 호미질을 합니다. 그리고 밭에는 곡식들이 자랐습니다. '해뜰 무렵' 전문

 

 

 

곡식들이 지평 위에 푸른 어깨를 넘실거리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곡식과 더불어 인간은 사랑과 지혜, 예술과 혁명의 꿈을 이 지상 위에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들판에서 한 남자가 쟁기질하는 모습, 한 여자가 호미질하는 모습은 우리 삶의 근원적인 꿈의 모습을 담고 있다. 좋은 세상, 아름다운 시간들,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가고 싶은 길들, 힘든 이웃들과 상처받은 이들을 위해 우리가 우리의 힘을 나눌 수 있는 세상의 꿈…. 오늘은 특별한 날, 보기좋은 호미질과 쟁기질로 해뜨는 아침을 맞자. 누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가 아닌, 우리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마음으로 한 표를 행사하자. - 곽재구<시인> -

 

 

 

 

 

 

 

『변죽』 - 배한봉(19662~) - 변죽을 아시는지요. 그릇 따위의 가장자리, 사람으로 치면 저 변방의 농군이나 서생들 변죽 울리지 마라고 걸핏하면 무시하던 그 변죽을 이제 울려야겠군요. 변죽 있으므로 복판도 있다는 걸 당신에게 알려줘야겠군요 그 중심도 실은 그릇의 일부 변죽없는 그릇은 이미 그릇이 아니지요. 당신, 아시는지요. 당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변죽, 당신을 가장 당신답게 하는 변죽, 당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변죽. (후략) '이 시대의 변죽' 부분

 

 

 

변죽들. 모든 풍경과 시간들의 배경이 되는 변죽들. 주역은 되지 못하고 늘 언저리에서 쓸쓸하게 맴도는 변죽들. 언제나 우리 제일 가까운 곳에 웃고 우는 변죽들. 우리 제일 먼 변두리까지 스스럼없이 펼쳐져 있는 변죽들. 이름보다도 슬픔보다도 그 어떤 아픔보다도 먼저 당신의 마음 안에 환한 꽃으로 피어나는 변죽들. 우리들 마음 안에 중심보다 화사한 별밭 있음을 일깨워주는 희망의 불씨들. - 곽재구<시인> -

 

 

 

 

 

 

 

『네가 그 위에 앉아 있을 때』 - 이선영(1964~ ) - 딸 아이가 변기 위에 앉아 있을 때 변기 위에 맨살을 드러낸 채 등을 구부리고 앉아 있을 때 바지가 무릎께 걸려 있는 짧은 두 다리가 아직 바닥에도 닿지 못하고 대롱거리고 있을 때 잠자다가 눈도 못 뜬 채 속옷 바람으로 어정어정 걸어나와 고개를 수그리고 변기 위에 억지로 들려 있을 때. 내가 너에게 한 짓이 무엇이냐! 한평생 거기에서 놓여날 길 없는 변기 위에 너를 잡아 앉힌 것? '네가 그 위에 앉아 있을 때' 전문

 

 

 

한평생 변기 위에 앉아 있는 생은 없다. 한평생 단 한번 변기에 앉지 않은 생 또한 없다. 중요한 것은 생이 변기 위에 앉은 기억을 지니고 있느냐, 없느냐에 있지 않다. 변기 위에서 꿈을 꿀 수도, 변기 밖에서 곤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린 딸이여, 지혜롭고 사랑스럽게 쑥쑥 자라라. 그리하여 모든 어미들의 불안이 깊은 사랑과 연민에서 비롯된 기우임을, 생이 여전히 살 만한 가치가 있음을 빛나는 무지개로 보여다오. - 곽재구<시인> -

 

 

 

 

 

 

 

『하늘 그리고 시』 - 진헌성(1932~ ) - 갈대잎 돋은 늪녘 언덕바지에 옛 늙은 도공이 홀로 청자를 빚고 있었습니다. 홀연 머나먼 섬에서 하루는 한점 학의 흰 날개가 아스라이 날아오다 그만 푸드득 빚던 항아리에 부딪쳐 천년 한으로 박혔습니다. 아뿔싸 이를 어쩐담! 닳은 도공의 담배연기도 그만 박혀서는 먼먼 뜬구름의 한 채로 남았습니다. '하늘 그리고 시' 전문

 

 

 

청자 매병에 단정학들이 무수히 날아오른다. 하늘 높은 곳으로 학들은 끝없이 날아오르는데 문득 학들이 날아오르고자 하는 그곳이 어디인가 궁금해진다. 비췻빛 하늘의 속살을 넘어 이르는 땅. 어쩌면 그곳은 청자를 빚던 도공이 오래 그리워한 마음의 땅일는지도 모른다. 라일락 꽃향기가 진동하는 아침, 우리도 마음 안의 하늘 위에 단정학 한 무리를 날려 보내자. 옛 도공처럼 눈을 감고, 학들이 날아오르는 하늘 속으로 함께 날아오르자. 그곳에 두 칸 띠 집을 짓고, 몇 그루 복사꽃을 심고, 작은 시냇물을 흐르게 하고, 저물녘엔 먼 곳에서 찾아온 벗이랑 소주를 마시자. - 곽재구<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