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율(礎律) 제 89화

피바다2006.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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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아아아아!!"

  박수 소리와 함께 함성이 몰아치는 제황성의 연회장으로 막 설무랑이 들어서고 있었다. 문무백관들과 귀부인들은 진심으로 존경하는 낯빛을 띠고 희대의 영웅을 맞이하며 박수를 쳤다. 설무랑은 군중이 좌우로 줄지어 환호하는 금빛 융단을 밟으며 상석의 천제에게로 걸어들어갔다.

  걸음을 내딛으며 그는 300년만에 다시 찾아왔던 제황성의 그 날을 떠 올렸다. 웃음이 났다. 저들은 그 날도 이와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다만 적개심과 경계와 혐오의 얼굴들이 이제는 환호와 감탄과 호감의 얼굴로 바껴있을 뿐이었다. 간사한 것이 사람이었다. 머지않아 저들의 표정은 또한번 바뀌게 되리라. 설무랑은 마음껏 즐겁게 웃었다. 그러자 귀족들은 더욱 함성을 높였고 박수소리도 커졌다. 천제도 흐뭇한 얼굴이었다. 설무랑은 천제의 앞에서 절을 올렸다.

  " 동방성 지국천왕의 장자 설무랑이 존귀하신 천제전하의 명을 받잡아 수라군을 물리치고 돌아왔나이다. 부족함이 많았사오나 전하의 용안에 근심이 덜하신 것을 보니 또한 제 기쁨이 크옵니다."

  무리 속에서 낮은 탄성이 새어나왔다. 영웅이 된 설무랑의 인삿치레조차 그를 빛나게 만들었다. 젊은 아가씨들은 그의 목소리에 가슴이 설레었고 그 마음을 숨기지 못해 귓볼까지 붉어졌다.

  " 설무랑! 가히 나라의 영웅이며 나의 보배로다. 왕자의 용맹과 지혜가 괘씸한 수라족을 물리쳤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대의 충정이 나와 천계의 근심을 해결했다."

  " 모든 것이 천제전하의 은덕인 줄 아옵니다."

  천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가까이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신을 향해 명했다.

  " 교지와 충검을 가져오라."

  세 명의 신하가 황금색 비단 두루마리와 좌대에 걸린 장검 한 자루를 받쳐들고 앞으로 나오더니 공손히 몸을 숙였다. 앞서나온 가신이 두루마리를 양손에 받쳐들고 천제에게 올렸다.

  비류천은 건네받은 두루마리를 직접 펴 들고 선언했다.

  " 동방성 지국천왕의 장자, 설무랑은 천계를 교란하던 수라족을 토벌하고 천계의 영광을 지켜냈노라. 이에 문무백관들이 한 뜻으로 결정한 바를 선언한다!"

  장내가 조용해졌다. 귀족들은 숙연하게 고개를 조아리고 천제의 선언을 귀담아 들을 자세를 갖추었다. 천제의 목소리가 연회장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 지국천의 장자, 설무랑이 가진 군통솔자로서의 실력과 혁혁한 공을 인정하여 그를 동방군 제 2군의 최고 통솔권을 가진 동방군 부사령관으로 임명하노라!"

  설무랑은 앞으로 나아가 천제에게서 교지와 상징적인 '충검'을 하사받았다. 귀족들의 축하박수와 함성이 연회장을 가득 메웠고 음악이 울려퍼졌다.

  " 이 기쁜 날, 맘껏 천제의 영광을 즐기라!"

  천제는 약간 들뜬 목소리가 흥을 한층 돋우었다.

  교지와 충검을 신하에게 넘긴 설무랑이 알듯 모를 듯 살짝 웃음을 짓고 있을 때 제일 먼저 인사를 전하러 다가온 것은 제공이었다. 

  " 동방군의 부사령관이라니 천계 역사상 이런 파격적인 인사조치는 처음입니다. 천계의 깊은 산골부락까지 왕자의 공적에 대한 소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합니다. 감축드리오."

  " 과찬이십니다, 증장천왕 전하. 전하께서 나시어 축하해주시니 제 전공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제공과 설무랑은 누가봐도 신분에 걸맞게 우아한 화답과 표정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야릇한 신경전이 흐르고 있었다.

  그 때 왕족들을 거느리고 북방성의 다문천왕이 둘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설무랑은 다문천의 거동을 확인하고는 제공을 향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 애쓰셨겠습니다."

  ".......?"

  " 저를 부사령관에 묶어 두기 위해 왕들께서 얼마나 애를 쓰셨는지 보지 않아도 능히 떠오릅니다. 천제 전하의 강단을 꺾는 일이 녹록한 일은 아닐진데 수고가 많으셨겠군요."

  설무랑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과 말투 속에 배어나는 가시는 대조적이었다. 제공에게 반문할 틈도 주지 않고 설무랑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 이제 서 있는 자리를 내어주실 때가 아닌가 합니다, 증장천왕 전하. 저기 제게 필요한 손님들이 오고 계십니다. "

  제공은 그 순간만큼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전혀 틀린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천제는 설무랑의 승전이 사실임을 확인하자마자, 최고 군두(軍頭) 회의를 소집했다. 모인 이들은 현재 각 중심군의 사령관을 맡고 있는 사방의 왕들과 중앙군의 백군(白軍) 사령관인 지우황녀였다. 제공은 군두회의가 소집되자마자 천제가 설무랑을 위한 파격적인 인사조치를 단행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천제의 결정이 틀린 것이 아니었음을, 설무랑이 몸소 실전으로 보여주었으니 이제 설무랑에 대한 천제의 절대적인 신뢰를 막아설 방도가 없을 터였다.

  제공이 이르렀을 때, 회의실 앞에는 지국천이 근심어린 얼굴로 초조하게 서 있었다. 그는 제공이 나타나자 한 줄기 빛이라도 잡은 듯이 확연하게 그 얼굴의 주름이 사라졌다.

  " 증장천 !"

  " 드시지 아니하시고 여기 계시옵니까?"

  제공은 지국천의 마음을 모르는 듯 태연하게 인사치레를 했다.

  " 전하께서 설무랑에게 동방군의 사령관을 맡기시려 하오!"

  지국천은 숨돌릴 틈도 없이 다급하게 몰아부쳤다. 그는 참으로 순진한 왕이었다.

  " 이미 전하께서 알리신 뜻이 아니옵니까? 설무랑이 이번 전투에서 세운 공적은 그 자리에 부족할 바가 없지요."

  지국천은 제공의 냉정함에 기가 질렸다. 끝까지 자기 편에 서 줄 것만 같던 제공이 남의 일인 듯 사건을 평하자 지국천은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허탈을 느꼈다.

  " 들어가시지요. 전하, 저희가 조금 늦은 듯 합니다."

  제공은 넋 빠진 듯 서 있는 지국천을 지나 문을 열고 회의실로 들어서며 활달하게 왕들과 지우 황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지국천은 패장처럼 처진 어깨로 그 뒤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천제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혈색이 도는 그의 얼굴에선 빛이 나는 것 같았다.

  "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소."

  천제의 의례적인 인사에 모두들 고개 숙여 답했다.

  " 귀왕들께서도 아시다시피 변방을 넘어 온 수라족의 전례없는 침략에 천계가 크게 근심하였소. 헌제 지국천왕의 장자 설무랑 왕자가 군사 이 천으로 이를 물리쳤지."

  천제는 자리에 앉기 바쁘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 이 만 수라족의 머리를.....하나도 남김없이 나에게 바쳤소!"

  천제는 강조하여 말하면서 얼굴의 희색을 띄었다.

  " 이에 나는 설무랑 왕자이게 동방군 최고 사령관의 보위를 내리려고 하오. 이를 논하고자 군율에 따라 각 군의 최고 사령관인 귀왕들과 황녀를 부른 것이오. 뜻을 알고 싶소."

  천제가 원하는 것은 논의가 아니라 형식적인 찬성이라는 것을 모인 이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천제는 설무랑의 사내다운 대범함과 신기에 가까운 군지휘력에 푹 빠져있었다. 그가 자신의 든든한 심복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않는 듯 했다.

  왕들은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들도 이것이 동방가의 미묘한 집안 문제에 얽힌 일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눈치는 결코 반가운 기색을 보이지 않는 지국천의 근심 가득한 얼굴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생각 깊은 지국천이, 나라 일을 우선으로 치는 저 충신이 아들의 명예를 환영하지 않고 있음은 필시 조심스러운 문제를 의미했다.천제 역시 숨길 수 없는 지국천의 근심어린 얼굴을 알아차렸다.

  " 지국천, 동방군의 최고 사령관 자리에 마땅한 인재가 없어 고민하던 그대가 가장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어찌된 일이오?"

  지국천은 난처한 시선을 맞은 편에 앉은 제공에게 던지고는 마지못해 둘러대었다.

  " 황송하옵니다, 전하. 다만 비명사한 아우 범천이 문득 떠올라 그 괴로움을 잠시 감당치 못하였으니 용서하소서."

  순간 회의실이 숙연해졌다. 기어이 범천이 사망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실력있는 이계의 첩자가 스며들어와 저지른 짓이라 일단락되었으나 여전히 석연치 못한 점을 남긴 채 범인도 잡지 못한 채 그 일은 묻히고 말았던 것이다.

  " 고귀하신 천제 전하."

  " 말하시오, 지국천."

  " 본 왕은 전하께서 부족함이 많은 제 장자를 높이 평하시어 주심에 기쁘기 그지 없사옵니다. 허나..."

  모두 긴장감을 가지고 지국천을 응시했다.

  " 아직은 제 아들이 군권에 개입할 시기가 아닌 듯 사려되옵니다. 배워야할 것이 아직 태산과도 같사오니 직위를 내리심을 잠시 물러주시길 청하옵니다."

  지국천은 겸손하게 말하였으나 천제는 또다시 자신의 결정이 꺾이려하자 언짢은 모양이었다.

  " 지국천, 자네는 나까지 속이면서 설무랑을 삼백년 동안 외따로 스승에게 위탁하여 사사받게 하지 않았소?  그 대의 그 마음이 나와 천계를 위한 충정이라 여겨 기뻤지. 그런데 그토록 설무랑을 두둔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를 위해 일하는 것을 그토록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말이오!"

  " 저....전하!"

  " 스스로 실력을 보여준다 한 것이 바로 설무랑이었소. 이 천의 군사로 이 만을 쳤다고! 그것도 단 사흘 만에! 그런 무시무시한 실력을 가진 설무랑이 더 배워야할 것이 있다니, 혹여 그대는 다른 뜻이 있어 아들을 내게 주는 것을 망설이는 것은 아닌가!"

  천제의 말투에 노기가 실렸다. 천제의 분노는 극에 달해 무서운 말을 스스럼 없이 뱉어냈고 지국천은 기가 질려 벗어날 수 없는 암담함을 느낄 뿐이었다.

  '일은 시작했으되, 스스로 맺질 못하니....그리 사람만 좋아서 어찌하시겠습니까, 지국천 전하?'

  제공은 그 상황을 지켜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는 자신이 나서야할 때라고 결정했다.

  " 제가 말씀 올려도 될런지요?"

 누구도 나서지 못하는 그 살벌한 분위기에서 제공이 훈훈하게 바람을 몰아오듯 끼여들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제공에게 모였고 그들 표정엔 '역시나!'하는 탄성과 안도감이 실려있었다. 천제의 얼굴도 제공의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노기를 흩어버렸다.

  " 제 벗이라는 사사로운 정을 떠나 설무랑 왕자의 전공은 유례없는 대공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왕자가 그 어떠한 묘책을 썼든 그 누가 따를 수 있겠나이까?"

  천제를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하오나 전하, 영웅은 만들어지기 쉬우나 명장(名將)은 어렵다하였사옵니다. 실은 본 왕이 설무랑 왕자의 전투를 세세히 지켜 보았나이다."

  " 증장천왕이.....?"

  회의실이 술렁였다.

  " 왕자의 안위가 염려스러워 뒤따른 것이었으나, 제 염려가 괜스런 것이었지요. 허나...전하, 본 왕이 충정만으로 말씀드리옵니다. 설무랑 왕자의 군 통솔력은 이 천 군사에게는 걸맞은 것이었으나 백만 대군에게는 위험한 것이옵니다. 그는 영웅이나 아직 명장의 그릇은 아닌 듯 하옵니다."

  천제의 얼굴에 실망이 스쳤다. 제공의 발언은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이 있었다.

  " 허나 증장천, 설무랑 왕자에게 백 만의 대군을 다스리는 지혜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지 않소?"

  다문천이 입을 열었다.

  " 그렇지요, 다문천 전하. 헌데 설무랑 왕자가 지난 1년간 이 천의 동방 군사를 어찌 방치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납득이 되시던가요?"

  제공은 사람좋은 웃음을 띄고 답했고 다문천은 입을 굳게 닫았다. 제공의 의중을 파악한 지우황녀까지 나서자 천제의 뜻은 꺾이는 듯 보였다.

  " 전하, 증장천왕의 말씀대로 백만의 대군을 이끄는 것은 단지 몇 번의 전공을 세웠다는 것으로 될 일은 아니옵니다. 전하께선 제가 수 십번의 전투에 임한 후에나 백색군을 맡기셨습니다. 젊은 왕자가 대단하다고는 하나 그는 먼저 군율과 군의 문화를 제대로 알아야할 것입니다. 한 군의 사령관은 그가 감당키에 너무 무거운 자리입니다."

  의견은 천제를 지지하는 다문천, 광목천과 숙고할 것을 바라는 지우, 제공으로 나뉘었고 한참의 논의가 이어졌다. 마침내 천제는

  " 그대들의 의견은 잘 들었소. 이제 내 뜻을 말하리다. 설무랑이 비록 젊고 실전의 경험이 적으며 다소 거칠게 군을 이끈다고는 하나 그가 보여준 용맹의 증거는 의심할 여지가 없소. 나는 왕자가 이번에 보여준 전공으로 그의 충정과 소실을 믿어 의심치 않소. 다만 귀왕들의 의견도 일리가 있는 바, 설무랑은 동방군 제 2군의 사령관으로 직위를 두고 논하겠소. 이상이오."

  어쨌든 제공과 지국천은 설무랑을 동방군 서열 3위에 놓아 지국천의 감시 아래 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멋대로 독주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다문천이 자신의 가신들을 이끌고 다가와 설무랑에게 악수를 청했다. 날카로운 그의 눈매도 설무랑의 앞에서만큼은 호의적이었다. 제공은 그가 설무랑을 탐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 설무랑 왕자라고 하였나? 이번 수라족과의 전투에서 자네가 세운 공을 천제께서 크게 치하하시더군. 전하께서 저리 기꺼워하신 모습이 참으로 오래 전이었는데 말이야. 실로 대단한 일을 해 내었네. 축하하네."

  " 과찬이십니다. 다문천왕 전하. 아직 배워야할 것이 많은 생도일 따름입니다. 전하께서 많이 가르쳐주십시요."

 " 겸손하군. 지국천에게 이런 아들이 있었다니...나는 처음으로 지국천을 부러워하고 있어."

  다문천의 밋밋한 말투 속에 든 가시에 찔린 것은 바로 그를 뒤따르고 있던 소예였다. 설무랑은 그녀의 얼굴이 핼쓱해지는 것을 보았다.

  " 제 아버님은 다문천왕 전하를 부러워하십니다. 어릴 적부터 저는 항상 소예 장군에게 비교당하곤 하였지요. 저는 벗으로써, 장수로써 소예 대장군을 존경하고 있사옵니다."

  " 그...래?"

  다문천은 알듯 모를 듯 대답하였지만 그 표정이 싫은 것 같지만은 않았다. 소예는 흠칫 놀라면서 설무랑의 시선을 외면했다. 설무랑은 공주가 아닌 대장군의 칭호를 사용하면서 그녀의 정체성을 높여주었다. 공주로서의 소예는 낮아질 수 밖에 없지만 대장군으로서 그녀는 당당하고 빛이 났다.

  설무랑은 소예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다문천에게 청하였다.

  " 제가 소예 대장군께 춤을 청해도 결례가 아니되올런지요?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전하?"

  다문천의 얼굴에 웃음이 실렸다.

  " 소예가 거절하지 않는다면 누가 자네를 막아설 수 있겠는가?"

  왕이 자신을 슬쩍 쳐다보자 소예는 난처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살짝 얼굴을 붉혔다.

  "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게. 자네를 아들처럼 대하고 싶군."

  예의를 지킨 말로 다문천은 보이지 않는 손을 내 밀고 있었다. 설무랑은 야심 많은 북방성의 왕이 내미는 손을 성급하게 잡는 대신 그의 딸의 손을 잡고 연회장으로 걸어나갔다.

  " 내가 그렇게나 못생겼어?"

  설무랑은 장난스런 표정으로 소예의 귓가에 투절거렸다. 그의 부드러운 입김이 스치자 그녀는 귓볼까지 붉어져 고개를 들지 못했다.

 " 뭐...뭐?"

  소예가 말을 더듬어 되묻자 설무랑은

  " 네 표정이 꼭 뭘 밟은 표정이라고. 난 내가 호남인 줄 알았는데 충격이군. 관리를 좀 해야겠는데."

  " 쿡....."

  소예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 그래, 그거야. 웃으라구. 내 앞에선 그렇게 웃어. 네가 웃는 걸 보는 게 좋아."

  그렇게 말하면서 설무랑은 소예의 두 손을 부드럽게 움켜 쥐며 그녀를 가슴 앞으로 당겼다. 소예는 뛰도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더 고개를 숙여버렸다. 설무랑의 단단하고 넓은 가슴이 눈에 들어서자 심장은 오히려 격렬하게 뛰었다. 설무랑은 소예를 조금더 가까이 당겨 안고 흐르는 음악 소리에 몸을 맡겼다. 전장에서의 거친 무장이라고만 생각되던 설무랑은 솜씨좋게 소예를 이끌며 무도회장을 미끌어져나갔다. 소예는 그의 그런 부드러움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사람들은 아름답기만 한 두 장수의 춤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설무랑은 소예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 아직도...나를 못 믿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