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 정 동춘은 한남대학교를 졸업하고 정치대학원 한 학기를 마치고 전공(동남아지역연구)을 공부하던 중 현지 체험과 제가 소망하던 민간외교의 꿈을 실현하는데 도전을하고 싶어 무작정 베트남을 향했던 것이 95년 그후 지금 2006년 11월 20일 현재 아침 10시30분…
난 4일전 영문도 모른체 사무실에서 캄보디아 경찰에 임의동해 되어 캄보디아 내무부로 갔고(17일 19:00), 그때부터 밤 11시 30분까지 조사를 받았으며, 하루밤을 내무부 복도에서 잠을 자고 18일 아침 10시 새로운 장소 내무부 산하 이민 경찰국 소속 사무실로 왔으며(프놈펜 공항 맞은편) 또 조사를 받은 후 수 천마리의 개미와 수 백마리의 모기와 잠을 청하고 지금은 너무나 차분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4일째, 제 자신의 모든 자유를 누구에겐가 저당 잡힌심정… 참으로 참담하여 이글을 쓰면서 조차 어찌해야할지를 모르겠고, 이글이 공개가 된다면 공개 후 저의 모든 것이 어떻게 변해갈지? 그것도 아니면 모든 인생을 포기해야하는 건지? 아니면 모든걸 지우고 새로이 운명을 시작해야할지? 저조차도 가늠할 수 없는 일이 “노무현 대통령의 캄보디아 방문” 때문에 대통령의 일정과 안전이 염려되어 이곳에서 11월 21일이후까지 감금되어 있어야 한다고 하는군요.
위의 내용을 알고 난후 12년의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되새겨지고 있어 이 글조차도 남기지 않으면, 내 스스로가 나를 용서할 수 없을 듯하여 글을 올립니다.
본인은 95~96년 베트남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97년 청운의 꿈을 안고 97년부터 2006년 11월까지 캄보디아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신 인터네셔날, 한신 아리랑 투어, H.S System , H-S 건설, 앙코르~경주 세계문화엑스포 캄보디아 코디네이터, 캄보디아 수상실 산하 국가관광위원회(컨설턴트), 주한국 캄보디아 관광청 소장, 등의 회사와 직책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본인이 이 글을 올리게 됨을 지극히 개인적인 일임에도 불고하고 많은 지인과 캄보디아 교민이 관련된 일이라 추후 피해의 우려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인간적인 개인 모멸감을 감수하면서 글을 씁니다. 또한 현재 본인은 보호감호소에 감금 상태에서 이글을 쓰기에 제가 언급하는 연도와 일자가 정확한 사실 근거하에 적혀질수 없으며 제 기억속에 있는 사실을 되살려 쓰는 글임을 인지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선 그간의 사연을 적으면서 제 개인적인 주관에서 바라본것이며, 관련자가 있다면 그 분들게 어떠한 피해를 드리고자함이 아님을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또한,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또한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이 제 판단에 의견을 주시면 인생의 결정을 하는데 참고하고자하고, 만약 억울한 부분이 있어 법적대응을 해야 한다면 저를 도와줄 법률지식이 있는 분들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바람입니다.
저와 아내는 98년 서울에서 지인의 소개로 만났고, 그 당시 아내(강 경희)는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 있는 친구를 통해 알아본 사실은 한국에서 좋은 대학을 나와 일본에서 석사과정, 박사를 취득해도미래의 보장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고등학교 조차 마치지 못한 강 경희씨에게는 제가 바라보는 캄보디아 미래 10년후를 이야기하면서 한국인 최초로 캄보디아 전문 통역사가 된다면 그것은 인생의 큰 결실이라 설득을 했고, 10년후 한국과 캄보디아 수교가 커지고하면, 그런 사람이 꼭 필요할 것이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설득하였습니다. 그래서 본인 또한 지인이 캄보디아에 있으니 캄보디아를 방문한다하여 98년부터 캄보디아에서의 생화을 시작하면서 둘은 가까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캄보디아에서 사업이 어려웠던 저는 아주어려운 시기를 보냈으며, 강 경희씨의 지인 한 승0씨집에서 같이 생활을 하면서 가까워지게 되었고, 강 00씨는 캄보디아 왕립 프놈펜 대학 동남아 센터에서 캄보디아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중 지인조차 캄보디아에서 사업의 난항으로 서울로 철수를 하게 되었고, 당시 한인회장(김 00씨)님의 도움으로 거쳐를 옮겼던 저는 강 경희씨의 의지데로 계속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여 우선 서울에서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이수증을 받아와서 캄보디아 왕립대학에 입학하게 하였습니다. 막상 그런일이 진행이 되면서 사업이 더욱 어려워진 저는 결국 저렴한 월세(US60$)집으로 이사를 했고, 서울에서 고등학교 이수증을 받아온 강 경희씨를 위해 전 제가 해줄수 있는게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기에 유 세0씨의 집에 하숙을 마련하여 주었습니다.(US500$) 어렵고 힘든 시기였지만, 참으로 행복했던 시기였습니다. 결국 그렇게 고대하던 대학을 2000년 경에 입학을 하였고, 참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너무도 고마웠습니다. 하지만 제 사업은 계속 힘든 과정이었고, 그것을 안 아내는 결국 2001년 하숙비의 부담도 있으니, 본인이 사는 집으로 옮긴다하여 결국 둘은 부부가 아닌 상태에서 가정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습니다. 너무 행복한 시간이 가져다 준 선물인지는 몰라도 2002년 비록 다른 대학이지만 평소 대학원 당시 논문 지도 도움을 받았던 조 원 박사님이 캄보디아를 방문하였던 그날이 2002년 1월말 경 설 명절 기간이었는데,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한국에서 너무 힘들어 인생을 포기해야 할지? 새로이 인생을 시작해야 할지? 생각을 하던 중 본인 정 동춘의 생각이 나 캄보디아를 방문하셨다 하였습니다. 당시 제가 힘든 걸 알게 되었고, 같이 인생을 포기하자고까지 이야기하다가 어차피 마지막이니 그러지 말고 그동안제가 한국경제협력자금을 가지고 해외에 지원하는 사업을 공부하고 연결하는 중이니 서울에서 조 원 박사님이 일의 진행을 맡고 캄보디아에서 제가 역할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기존에 라오스 대상사업과 캄보디아 대상사업을 이야기 하던 중 , 우선 캄보디아를 알아보기로 하고, 그때 저는 캄보디아 정부 역할자를 소개하게 되었고, 지금의 수상실 국가관광위원회 부처장이며, 앙코르~경주세계문화엑스포 공동사무국 부단장인 미스터 야 00씨와 엑스포 조직위의 캄보디아 부단장, 겸 캄보디아 관광부 차관인 통 씨를 소개하였는데, 관광부 차관겸 현재 엑스포조직위 통 씨는 연락이 없었고 야 씨는 마침 캄보디아 수상께서 2002년4월,5월에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니 그때 논의주제로 하면 진행이 될수 있다고 하여, 조 00 박사님(경기고, 서울대 졸업)이 친분이 있으신 분이 한국의 청와대, 재경부, 수출입은행에 있다고하여, 확인한 결과 캄보디아의 해외경제협력 경협자금 EDCF Loan 수혜는 의료,교육, 직업훈련 부분에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한 후, 진행을 시작했으며 4월 수상의 한국 방문시 양국이 우선 행정전산망 사업을 우선하고, 직업기술학교사업을 지원할수 있다고 협의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결과 2003년 6월말 최종적으로 프로젝트 계약식을 하게되었습니다. 그 결과 현재의 NPIC(한국경협자금지원으로 세워진 국가기술직업센타)가 탄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프로젝트 수행의 공로를 인정받아 캄보디아 관광부에서도 한국시장의 마케팅 대표 사무소 소장이란 역할을 승인하여 2002년 4월부터 공식 주한국 캄보디아 관광부 사무소 소장이 되었습니다. (http://www.cambodiatourism.or.kr) 또한, 본학교 건설의 계약이 포스코 건설로 예정되면서 제가 포스코 건설의 에이전트로 승인이 되어 건설 중 일부(전기실, 발전기실)를 본인 개인 회사인 한신(HAN-SIN)에서 수행을 하게 되었고, 장비공급이 확정된 포스데이타의 에이전트가 되어, 발전기, 가구 등 기타 기계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프로젝트가 진행이 되는 동안 조 원 박사님의 소개로 당시 정통부산하기관인 정보문화센타 현재의 정보문화진흥원 손 00 원장님과 신 00 단장님을 소개받았고, 당 센터에서 국책사업으로 정보화격차해소의 일환으로 캄보디아 IT 플라자 사업을 하는데, 잦은 일에 도움을 주었던 저는 이를 계기로 인연이 되어 제가 추천하는 포스데이타와 씨아이커뮤니케이션(당시 대표 천 무0)이 수행할 수 있도록 부탁을 드려, 입찰을 통하여 두 업체의 낙찰로 베트남, 이집트, 루마니아 IT 플라자사업이 수행되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한편 2000년? 2001년? 인지 속초세계관광엑스포에 캄보디아의 대표단이 참가할수 있도록 노력하여 캄보디아 공연단이 공연을 하고 세계의 문화를 보면서 캄보디아에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을 갖고있는데 왜 이런 행사를 할수 없을까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 1회 경주엑스포에 캄보디아 대표단을 파견하는데 노력을 했고, 당시 대표단장인 웽 000씨 당시 캄보디아 관광부 장관께 부탁드려 캄보디아에서도 이런 행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당시의 엑스포위원장이신 이 의0 지사님께 말씀을 드렸고, 고려해보시겠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앙코르~경주세게문화엑스포의 씨앗이었습니다. 그후 제 2회 경주엑스포에 다시 캄보디아 대표단과 공연단이 참가를 하였으며, 당시 대표는 지금의 앙코르~경주엑스포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인 통 관광부 차관이었습니다. 다시 이 의0 지사님을 뵈온 자리에서 한국의 도움으로 앙코르 왓트에서 문화엑스포를 열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쳥하였고 심사숙고하신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캄보디아로 돌아와 당시 주캄보디아 한국대사관에 위와 같은 사항을 구두로 설명하고, 한국의 문화수출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할 수 없냐고 요청을 한 바, 지방자치 단체의 일을 대사관이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대답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포기할 수 없어 씨아이커뮤니케이션의 천 무0대표와 이야기중 한국문화관광부에서 해외관광홍보관을 지을 계획을 들었고, 이를 한국인이 많이 방문하는 앙코르왓트에 지은 후 관광교류를 확대하고 한국문화관광부의 문화수출촉진자금으로 경상북도에 지원하고 경상북도 산하기관인 엑스포재단이 추진하면 될 것으로 아이디어가 모아져, 지금의 엑스포공동사무국 이 영0 사무관을 통하여 엑스포재단 현재 앙코르~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조직위원회 부처장인 이 필0 기획처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그분이 한국의 전 문화관광부 장관인 이 창0 형님이었기에 참으로 행운이었습니다. 그 무렵 한국문화관광부대표단(단장 신 현0 기획관)이 동남아 방문이 있어 잠시 캄보디아에 할애 할수 있도록하여 양국의 관광발전을 증진할 수 있도록 논의하게 되었고, 경주세계문화엑스포의 노하우를 수출할 수 있도록 논의가 되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문화교류 분위기를 조성하자고 의견을 보았고, 씨아이커뮤니케이션 이벤트 사업부에서 캄보디아 보물을 한국에서 전시를 한다면, 한국의 문화관광부 후원으로 양국의 교류가 확대될 수 있다고 하여, 캄보디아 수상실에서도 관련부서 장,차관급 약 30명 정도로 위원회가 구성이 되었고 결국 2004년 6월29일~ 9월 3일까지 서울의 역사 박물관에서 “캄보디아 보물전”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관 기획사의 자금 유용으로 유물전이 끝난 후 유물을 다시 캄보디아로 되돌려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해결책을 찾기위해 “캄보디아 수상실 내 행사, 전시관리위원회” 의 위임장을 받아 서울을 방문한 저는 참으로 암담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주엑스포 조직위와 경상북도 공무원과의 상의 끝에 대구 엑스포에서 캄보디아 유물전시를 한다면 앙코르~경주세계문화엑스포의 실현가능성을 높일수 있다고 설득하고, 경상북도 후원, 주한 캄보디아관광청 주최, 경주 엑스포조직위 주관으로 행사를 진행하고 개막식 당시 캄보디아 대표단(단장, 정무장관급인 동시에 한.캄 친선협회공동대표 생림0)이 방문하여, 개막식이전 경상북도 도청에서 앙코르~경주세계문화엑스포 개최준비를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추후 이 의0 지사님이 공식 방캄 후 공식 양해각서를 체결하였고, 그 이후의 업무는 주캄 한국대사관과 엑스포 공동사무국에서 진행이 되었고, 2006년 12월 12일부터 60일간 앙코르 왓트가 있는 씨엠립 인근에서 치루어 지는것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을 무렵 2006년 3월 캄보디아 수상의 한국 방문 계획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앙코르~ 경주세계문화엑스포에 한국 최초로 대통령이 오신다면 행사가 빛날 것을 캄보디아측에 전달했고, 양정상이 한국에서 회담시 긍정적으로 검토를 하신다는 말씀을 전해들었습니다. 참으로 기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인간의 작은 생각이 너무도 큰 결실을 보는듯한 자화자찬을 하게되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캄보디아 측 엑스포 조직위원회의 공동사무국에서 코디네이터로 임명을 받았고, 제 역할은 개막식의 캄보디아측 VIP의전행사와 엑스포 행사 중 앙코르왓 사원안에서 열리는 중요행사인 앙드레 김 패션 쇼, 한캄 의상쇼, 청소년 오케스트라, 송년의 밤 행사 등을 맡은 팀장이었고, 제 아내(강 경희)는 의전통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무엇인지 모를만큼 흐트려져 있습니다.
지금 2006년 11월 21일 오전 11시 저는 노무현 대통령이 도착했다는 프놈펜 공항앞 보호 감호소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고, 아마 제 아내는 대통령 영부인 통역관의 자격으로 예행연습을 하고 있겠죠. 제 아내 강 경희라는 사람이 지금의 일을 해야한다고, 남편인 제가 일을 못하게 방해한다고 신변보호요청을 하여 저는 구금이 되어 있답니다.
2000년~2004년 너무도 열심히 대학을 다니며 공부를 하던 아내 그리고 사업의 순항도 이루고 있을 무렵 결혼식을 못해준게 미안해 2004년 7월 12일 성대하지는 않아도 남부럽지 않을만큼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지난 2000년부터 단 한번 말 다툼조차 없었던 너무나 행복했던 부부였답니다. 제 스스로 밖에서 “ 내 인생의 최고는 내 아내인 강 경희를 만난 것이라고” 했으니깐요.
2004년 결혼식을 마치고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온 그녀는 캄보디아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하고 싶어했기에 가정이 우선이니, 우리의 아이를 가지면 어떻겠냐고 제의를 했더니 그러자고 했고, 저 또한 아내에게 압박이 될까봐 생기면 갖고 아니면 입양을 하자고 했습니다. 헌데 얼마전 부부싸움이 있고 난 후 그녀의 일기장에서 지난 부부싸움 2006년 1월에 제게 보내지 않았지만, 제게 보내려고 했던 편지를 발견하였습니다. “ 이런 부부싸움은 또 다시 이루어 질 것이고, 그때에 우리의 아기가 있다면 우린 너무나 큰 불행을 심는 것이기에 아이는 추후 대학원을 마치고 생각해 보자. “라고 씌어 있더군요.
2004년 대학원을 들어갈때도 이미 학기가 6개월이 지난 상태라 불가능하였지만, 캄보디아 부수상인 관방장관의 승인서가 있으면 가능하다하여 본 서신을 제가 부탁하여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캄보디아를 찾는 한국인이 많아지고 기업이 늘면서 통역일을 하기 시작하였고, 자연스레 통역을 하다보니 학교를 가는 시간, 일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본인이 출장을 다니는 시간을 빼고나니, 참으로 부부의 시간이 적어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2005년부터는 학교 공부에, 일에, 지친다고 작은 시간이 주어질 때 마다 남 상0씨라는 친구를 만나기 시작하였고, 스트레스를 푼다고 밤 12시가 넘어서 들어오기가 잦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2005년 8월에 처음 부부싸움이란 걸 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고집스러운 그녀의 성격과 참으로 이기적인 제가 부딪히게 된것이죠. 화해를 하고 그녀도 조심한다고 하고 나또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난 달까지 그래왔듯이 그녀는 아침 새벽6시면 학교던 어디던 나갔고, 저녁 7시에서 9시 통역이 있다며, 더 늦은 밤 친구와 약속이 있다며,
밤 11시또는 새벽 2시, 2005년 크리스마스 날 밤 12시. 2005년 12월 31일 밤 10.
이것이 그녀의 평상 토요일까지의 생활이었고, 일요일 아침 7시면 교회에 가서 오후 4시~5시에 오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참다못해 올해 2006년 1월 설 명절 다음날에 싸움이 시작되었고, 일부러 일때문이라고 제가 씨엠립에 가있었지만, 그녀의 생활은 여전히 새벽 2시 귀가 아니면 친구인 남 상0씨 집에서 아니면 다른 친구집에서 외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되묻기만하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하고 “ 사람미행하게 하지. xx놈아! 넌 미친놈이야! 정신병원부터 가봐 개새끼야.” 너무도 많이 이런 말을 들어 일부러 스피커폰으로 옆에 있었던 강 경희를 아는 분인 권 국0사장에게 들려도 주었습니다. 너무 기가막혀 저도 막말을하고 씨엠립에서 내려와 프놈펜 집으로 왔을 땐 이미 다른 곳으로 짐을 싸서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이런 싸움끝에 화해를 하고 다시 시작한 생활은 참으로 행복하다 느낄정도였습니다. 그녀또한 반성을 한다 약속을 했고, 그녀 또한 술 취해서 늦게 들어온다 하지 않았고, 그럴때는 제게 허락을 받는다고도 하였고, 남편이 좋아하지 않는 남 상0 친구와 김 동0 친구도 조심한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고마웠고 그간의 모든 아픈 이야기를 준 것이 너무도 미안해 저 또한 더더욱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더중 그녀는 또다시 3월 말 수상의 공식한국방문에 일부 통역일을 KTC 공장으로부터 의뢰 받아 청와대를 갔었다는 자랑을 했고, 그것이 가장 소중한 추억이라 제게 이야기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후 또 다시 지난 5월부터 그녀는 예전의 생활로 되돌아가고 아니 더욱더 심해진 것인지? 바빠진것인지? 수없이 부부관계를 요쳥하였지만,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외면당하기만 하였습니다. 심지어 7월 12일 결혼기념일에 제가 서울에서 중요한 손님이 있지만, 결혼기념일을 자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더니 일부터 잘하라고 하기에 저를 위해 이해해주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오히려 그녀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가라오케에서 즐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없으니 그랬겠지하고 이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후 가정의 시간을 가져달라고 요쳥을 자주하였고, 그런 친구보다 결혼을 한 친구를 사귀는 것을 권장도 수 없이 하였지만, 언제나 그녀의 말은 “ 왜 자꾸 나를 가둘려고 해! “ 사실데로 이야기했습니다. 네 친구 남 상0라는 친구는 싱글이라 자기맘데로 이 친구 저 남자를 만나고 새벽까지 다니던 상관없지만 당신은 가정을 꾸린 사람이라고 그런데도 대답은 “ 자기 자신도 안다고 과거의 물란한 남자관계, 안좋은 생활습관 등등 하지만 나는 좋은 것만 가지고 친구를 하겠다고하면서, 만약 자기친구들과의 관계를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남편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겠다는 것이 그녀의 대답이었습니다. 이것이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저는 더더욱 일찍 집에 들어가려 노력했고, 출장이 있을 때 같이 가자고도 제의했지만 매번 일 때문이라고 거절 당했습니다.
2006년 6월 그녀가 대학원을 마치면 학교수업 시간이 없으니, 가정에 할애할 시간이 있겠지 나아지겠지 기대를 했던 것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오히려 제게 몇 개월 서로 따로 떨어져 살면서 서로 생각하자고 하기에 문제가 있냐고 했더니 예전에 싸울 때 생각이 되새겨져 힘들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러면 영영헤어지니깐 내가 시엠립에 새로 시작하는 프로젝트도 있고, 엑스포도 있으니 많은 시간을 가지라고 하구 씨엠립엘 자주 갔다왔다 하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해변 휴양도시를 간다고 하고, 베트남도 간다고 한다해서 모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모든게 자기가 조심하겠다고 했던 친구들과의 여행이었습니다. 그녀는 통역을 전문으로 하기에 같은 가정주부의 지인도 많이 알았고, 학원을 운영하기에 우리가 일반적인 관념의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학생도 너무 많이 알고 있었지만, 오로지 다른 환경의 친구를 사귈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2006년 10월7일 씨엠립에서 엑스포 관계일을 하던 나는 추석날 아무리 일이 중요해도 가정이 우선이기에 프놈펜 집으로 간다고하고 전날 전화를 하면서 시간은 어찌될지 모른다고 비행기가 없으니 차로 내려간다고 전화를 했더니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프놈펜 근처쯤 도착을하니 저녁 7시쯤 전화를 하니 선약이 있다고 잠시 참석한 후 9시쯤 들어온다고 하길래 그럼 나도 9시까지 저녁을 다른 사람과 먹고 같이 들어가던지 추석날이니 같이 보내자 했습니다. 좋다고 하더군요. 9시가 되어 전화를 했더니 친구의 친구생일인데 케익만 자르고 집에 갈 테니 먼저 들어가라더군요.그래서 내가 그리가겠다고 하니 그럴 필요없다고 하고 그때서야 남 상0씨 친구의 친구생일이라 더군요. 야속한 마음을 금하지 못했지만 집으로 왔습니다. 지난 6년간 언제나 처럼 문을 열고 불을 켜고… 밤 11시가 가까워지는데도 들어오질 않기에 전화를 해서 오늘이 추석인지는 아느냐 했더니, “왜 나를 자꾸 가두려고만 해” 하고 알았다고 하더군요. 결국 전화 한통없이 술이 얼큰이 취해서 새벽 2시 반이 넘어서야 들어와서는 입맞춤을 하고 씻으러가더군요.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 또한 변명도 하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10월 8일 아무말도 없었고, 그날 저녁도 밤 9시가 넘어서야 들어와 아무말이 없길래 제가 그녀의 서재방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10월 9일 그날도 제가 먼저 집에 들어와있는데 그녀는 남 상0씨와 저녁 약속이 있다고 하더군요. 결국 밤 11시 40분이 넘어서야 들어왔고, 난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너무한거 아니냐는 말에 그녀는 아무대답도 없었습니다. 난 머리도 아프고 어미님도 오늘 내일 돌아가실지 모르니 그래서 최근 몇 개월 잠을 제대로 못 이루니, 먼저 자라고 하면서 제가 가진 전화번호를 전화기에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전화기 만지지 말고 자라. 나 먼저 잔다.” 그러던 중 어느새 새벽 2시가 되었고, 내 전화기의 기능이 안되어 아내의 전화기로 기능을 확인하던 중 아내의 전화기 안에 메시지를 보았습니다. 아니 이게 웬일! 오늘과 어제 그저께의 일정 중 내게 이야기했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습니다. 너무너무 화가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중 아내가 눈을 떠서 내게 “ 안자고 뭐하니?” 하는 말에 “ 내가 내 전화기 문제를 확인 하려다 당신 전화기를 봤는데 이 시간에 물어볼건 아닌데 도대체 당신 오늘부터 엊그저께 까지 무슨일이 있었던 거니?” 그녀는 버럭 화를 내며 “네가 남의 전화를 가지고 왜 지랄이야! “ 내가 정중히 물었고, 당신은 지금 내가 집에 있는 동안 일반 정상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했던 것에 전혀 언급이 없었고, 지금에 와서 남이라고 하는데 지난 6년간 당신한테 하지 말라고 말한적 있었어? 지난 6년간 당신 전화를 확인한적 있었어? “ 아무말이 없었습니다. 나 또한 더 할말이 없어 내 짐 모두를 챙기는데 여행가방 4개가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회사로 가서 차를 가지고와 가방을 옮겨싣는 동안 그녀도 나도 한 마디 말이 없었고, 저는 차를 몰아 꼼퐁참까지 가는 동안 수없이 생각을 하다 다시 돌아왔고, (중간에 잠을 잦기에) 저녁 5시부터 집에서 기다리면 무슨 말이 있을 법하여 11시 넘어서까지 기다리다 잠시 들었기에 그녀가 집을 들어왔는지 조차 알수 없었고, 나중에 알았는데 들어왔다고는 하더군요. 집에 들어와서 제가 있는 걸 보았는데도 아무말 없이 잠을 자고 아침에 사라졌다 생각을 하니 더욱더 화가 나더군요. 그래서 그때부터 그녀의 지난 몇 달간의 행적을 파악하기 시작했고, 내가 출장가 있는 동안에는 집에 거의 밤 11시 이후 그리고 제가 프놈펜에 있을때에도 통역이 있을때를 제외하고는 오전 수업이 끝나고 10시~11시 이후부터 오후 2~3시까지는 친구인 남 상0 Plam place 아파트에서 시간을 보냈고, 수업이 끝난 밤 7시 30분 이후 다시 그녀의 아파트에서 그녀의 운전수를 퇴근 시켰기에 그 후는 무엇을 했는지? 알수 없다고 그녀의 운전수가 그러더군요. 뿐만 아니라 지난 6일 추석날 밤 새벽 2시 30분에 들어오던 날도 남 상0라는 친구 그리고 그녀의 친구인 남자 몇 명이서 같이 가라오케에 있었다고 나중에 아내가 이야기 하더군요. 참으로 기가막히고 참담할 뿐이었습니다.
10월 11일. 일전에 이미 주캄보디아 한국 대사관의 국정원 장 00 참사님이 12일 오전, 오후 대통령경호실에서 선발대가 오는데 씨엠립에서 통역을 제게 부탁한다는 약속이 있었기에 씨엠립으로 출발을 했고, 출발을 하면서 “ 당신이 시간을 달라고히니 우리서로 생각을 해보자.” 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씨엠립에 도착하여 제가 아내를 처음봤을 때부터 같이 있었던 김 동0 친구에게 부탁하여 도대체 내가 무엇이 문제인지? 그녀가 내게 뭐가 불만인지? 중재요청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 그 친구와 그녀가 만났고, 저는 그 친구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를 모두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던 중 그 친구옆에서 그녀의 울부짖음 소리와 함께 “ 야 씹쎄끼야 내가 창녀야! 너 정신병원부터 먼저 가봐.” 라고 들리는 소리뿐이었습니다.
그 이후 시간을 주기위해 전화를 하지않았습니다. 다음날 대사관의 장 00 참사님과 대통령 경호실의 천 흥0 팀장님, 말레이시아에서 오셨다는 김 00 서기관님과 같이 씨엠립 경찰청에서 논의가 있었고, 저녁시간 막 도착하신 청와대 김 00본부장님과 우리 일행분들은 캄보디아 사회안전담당 3성장군인 돈 00 장군과 만찬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중 대사관의 장 00 참사님께서 제게 웃으시면서, “ 정사장! 오 00 참사가 그러는데 정사장은 껍데기고 마누라는 캄보디아어를 잘하니 잘 알아두라고 하던데… 정사장도 캄보디아어를 잘하는 것 같아! “ 참으로 참담한 기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다른 한 사람에게 껍떼기로 보여지다니… 한국을 대표하는 대사관 직원에게 이런 말을 듣기위해 내 꿈인 민간외교역할을 하자는게 인생의 목표이었는지? 어째던 엑스포 준비로 씨엠립에서 시간을 보내고 내마음도 가라앉았고 2주가 지났고, 아내에게 전화하여 24일에 프놈펜에 내려간다하였고, 집으로 가지않고 호텔로 간다고하니 집으로 오라고하여 뭔가 변화가 있는듯 하엿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아내의 모든 물건들, 심지어 가구까지 반으로 나뉘어 아내의 서재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참으로 황당하더군요. 그녀는 그날도 몇 시에 집에 들어왔는지 지금도 알수가 없습니다.
다음 날 10월 25일.사무실에서 이야기를 하자고 모처럼 그녀에게 전화가 와서 너무도 기뻤습니다. 그런데 와서는 하는말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것이기에 난 이런저런 것에 의문이 있으니 설명을 해주면 나도 생각을 해서 결정하겠다하니, 하나는 이야기 하더군요 집에서 담배도 피우냐는 말에 내가 피웠던지! 누가와서 피웠던지 맘데로 생각하라고. 그런게 이 마당에 뭐가 중요한데? 당신 의처증있어? 아니면 미친거 아니야? 그러지 말고 헤어지자 하는 것입니다. 그말을 듣자마자 벌컥 화가가 나서 “ 너 이렇게 해서 남 상0와 같은 생활을 살고 싶은게 목표라 지금까지 나한테 그런 행동했던 거지?“ 그말이 끝나자 마자 그녀는 벌떡일어서 나가며 “ 넌 미친놈이야 “ 하면서 모든 직원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무실 정문 유리문을 발로차 부수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날 저녁 집에 들어와 용변을 보고 화장지를 찾는데 한장의 화장지도, 샤워후 수건도 없는 것이 집이더군요.
그날 저녁 전화가 와서 꼼퐁썸 해변도시에 가서 혼자쉬면서 생각 좀 하겠다고 하길래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고민중에 밤 11시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제 운전수를 불렀고, 운전수에게 아내가 반성하는 것 같은데, 꼼퐁섬에 대리러 가야한다고, 그래서 어디에 있는 지 확인을 하려고 전화를 했더니 휴대폰이 꺼져 있었고, 속카 호텔에 확인을 하니 아내의 이름으로 두 아가씨가 입실 했다고 하더군요. 연결을 해서 수화기를 들기에 아무말 않고 있으니 둘이서 너무나 크게 웃으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수화기를 통해 들렸고, 또 남 상0씨 였습니다. “ 나야 또 남 상0하고 같이 있니? 아니면 남자니? 했더니, “그래 상미야!’’ 그러고 한참동안 말이 없길래 “ 당신 정말해도 너무한다. 개도 그만큼이면 알만한데 넌 개만도 못한년 이야.”라고 전화를 제가 끊었습니다. 잠시 후 그녀의 전화가 왔고, “ 난 분명 당신한테 꼼퐁쏨에 쉬러 간다고 이야기까지 했는데 왜 또 전화해서 확인하고 지랄이야!” 난 당신이 꼼퐁성가서 생각 좀 하고 뒤돌아본다고 하길래 내가 내려가서 이야기하고 화해할려고 했다고 했더니, 그녀는 오직 “내가 쉬러간다 했지 언제 생각하고 뒤돌아본다고 했어!’’ 그래서 그년하고있는게 그렇게 즐거워서 매일 그년 집에가고 거기까지 같냐고 했더니, “ 넌 미쳤어 정신병원에나 가봐라.” 하고 전화를 끊었고, 더 이상 통화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10월 26일. 잠을 이룬척, 못 이룬척 하다가 오전부터 마음을 달래고 싶어 비디오 테이프를 잔뜩빌려다 놓고 비디오를 보던 중, 오후에 전화가 왔는지 했는지 모르지만 통화가 되어 어쟀으면 좋겠냐고 하길래 제 주위 많은 사람들의 권고데로 비록 아이가 없어 걱정은 되지만 그녀와 멀리 떨어져 있어봄이 좋다고해서 서로 그렇게 하는게 좋으니 현실상 현재 내가 떠날수는 없고 서울로 당신이 떠나 있으라 했습니다. 알았다고 했고 그녀가 가정부에 짐을 챙기라고 전화를 한듯하여, 가정부에 의해 짐이 챙겨지고 있었고 옷가방만 6개가 거실에 있었고, 책을 싸기위해 박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던중 다시 전화가 와서 누군가 짐을 가지러 갈거라고 하였습니다. 그말에 울컥 화가 났습니다. 난 적어도 그녀가 짐을 가지러 갈 테니 버리지는 말아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러면 그녀가 집에 들어올 테니 만나서 싸우다 보면 해결책이 있겠지! 기대를 했건만 전혀 예상밖의 소리를 그녀로부터 들었고, 화가나서 짐을 꾸리던 가정부를 퇴근하라고 하고 다시 비디오를 보며 맘을 진정시키고 있었습니다. 헌데 그동안 항상 우리들의 문제 중간에 전달자로 있었던 김 동0씨로부터 서울에서 전화가 와서 어떻게 되어가냐고 하길래 그간의 상황들을 이야기했더니 자기가 지난달 싸움 직후 만나본 결과 그녀가 “ 왜 결혼할 때 말리지 않았냐고” 하더라면서 이미 마음이 떠난 것 같으니 정리하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를 해서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김 동0한테 전화를 받았는데 당신 그런말을 한적이 있냐고 했더니 금새 그런말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럼 그게 진심인지 다시 몇 번을 재차 그녀에게 지금도 진실이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안하더군요.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는 서울에 있는 장인어른께 전화를 하여 강 경희가 도대체 이런 행동과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요 한번 통화를 해보세요 그리고 전화를 제게 주세요 했습니다. 그러나서 생각을 하니 지금까지의 만남, 결혼, 생활 모두가 거짓이었다고 생각이 들고, 너무 너무 화가 치밀었고, 참을 수가 없어 다시 전화를 걸어, “너 프놈펜에 올라오면 내가 무슨 짖할지 모르니 차라리 도망가던 거기서 없어지던지 죽어버려.’’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운전수를 불러 이런 이야기를 하고 저 여자의 짐이 너무 많아 버릴 수도 없으니 휘발유를 사다가 모든 물건을 못쓰게 할 테니 사오라고 하였더니 그것만은 참으라 운전수가 그러더군요. 그리고는 운전수는 돌아갔고 그러는 동안 그녀에게서 전화가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 화가났고, 전화조차를 기다린 내가 너무도 한심해서 전화를 끄고, 그녀의 물건을 못쓰게 하려고 서재에 있는 그녀의 책을 몇 개 찢어버려도 화가 풀리지 않았고, 옷을 몇 개를 찢어도 화가 잠재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앞에 있는 거리 주유소에서 2리터 피티병에 있는 휘발유를 사다가 그녀의 옷에다 뿌리고 책에다 뿌렸습니다. 그래도 미련이 있었던지 옷도 입지 않는 가방에만 , 책도 그녀의 서류가 아닌 일반소설, 회화집에만 뿌렸습니다. 그러고서도 휘발유가 날아가게 유리창은 모두 열었습니다. 그런 후 마음을 달래며 비디오를 보고 있는데 멀리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야 씨와 그녀의 친구 김 화0이 있었고, 주위사람들 등 경찰도 있었고, 그 일로 방화예상이 되어 경찰서에서 진술을 하고 옷을 챙겨 임페리얼 호텔로 옮겼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의 친구인 김 화0씨의 말에 의하면 그녀도 그 시간대에 꼼퐁섬의 속하 호텔에서 약과 술을 섞어 먹고 정신이 없는데, 만약 무슨일이 생기면 보호자인 남편이 어떻게 해야한다고 하길래. “맘데로 하라고 하였더니’’ 김 화0씨 왈, “당신은 인간도 아니라는 말과 손짓을 하더군요. “ 지금도 그 모멸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아무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데 또한 그때도 다른 남자 친구도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미칠만큼 화가 나더군요.
10월 27일.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늦게서야 잠이 들어 늦게 일어나니 아마 오후쯤 직원에게 전화를 했더니 신문에 어제의 나에대한 사건이 사진과 함께 실렸다고 하더군요. 제가 카지노에 다녀서 아내가 집을 나간데 비관해서 방화를 했다는 신문과 아내가 바람을 피워 남편의 질투로 방화를 했다는 신문 기사 내용이었습니다. 지난 6년간 제가 카지노에 있었던 걸 보신분이 있으면 말씀하여 주십시오. 아마 그녀가 이런 거짓 정보를 신문사에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실렸을지 지금도 모르는 일입니다. 참으로 모든 인생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어떻게 제 얼굴을 들고 다른 사람을 보아야할지! 지난 10년의 모든 열정이 한번에 망가지는 듯한 모멸감이었습니다.
10월 28일. 그녀는 이미 28일에 친구를 통해 자기짐을 집에서 빼내어 다시 남 상0 친구와 김 화0 친구집에 옮겨놓고, 30일부터 있는 방송코디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전화를 해서 서울로 떠난다고 하지 않았냐고 했더니, “니가 뭔데 나를 오라가라떠나라해.” 프놈펜에 올라와서 이야기를 하는게 어떻겠냐고 말 할줄 알았던 예상과는 전혀 빗나간 그녀의 말과 행동에 너무도 다시 화가났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6년간을 묵묵히 바라보며, 언제나 가정의 아내로서 역할을 조금이래도 할애하는 쪽으로 돌아올지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오로지 그녀에게는 그녀의 일과 그녀의 친구밖에 없다는 생각에 버려진 우리 가정과 남편으로서의 모멸감과 치욕에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10월 29일. 그녀의 일을 도우던 우리회사 직원에 전체에 강 경희가 진행하는 일에 도움을 중단을 명했고, 그녀에게 전화하여 네가 최소한의 양심과 생각이 있다면 신문기사에 난 내용에 대해 물어나 보던지? 아니면 프놈펜에 올라와서 한번 만나자고나 해야 할 거 아니냐 했더니, “난 내일이 중요해서 일 할 테니까 넌 니가 알아서 해.” 라고 하면서 지금 여권이 없으니 11월 8일까지 일을 하고 11일쯤에 서울로 떠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왜 여권이 없어서 못떠나냐고 했더니 대답은 없고 화를 내면서 “떠나면 될 것 아냐 신발놈아! 왜 사람을 못잡아먹어서 지랄이야!” 하는 말을 듣고 그럼 네가 준비하는 행사가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면 알것이니, 알아서 대처해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더욱더 화가난 것은 29일 오후에 자기 일 때문에 제가 묶는 임페리얼 호텔에 와서까지 조차 제게 전화 한통도 아니면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는 것도 없이 몰래 다시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황당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날 밤 그녀의 친구인 김 화0씨가 찾아와 강 경희가 남편이 겁나서 일을 못하니 제발 자기를 알았던 인연으로 일을 할수 있게 해달라고 제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동안의 모든 이야기를 강 경희의 남편으로서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도 자기 친구이지만 그정도 인지는 몰랐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도 자기가 하기엔 벅찬 일이니 부탁한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헤어진 후 김 화0씨에게 전화를 했고, 그간의 우리 부부와 남편으로서의 이야기를 새벽 3시 늦도록 전화로 김 화0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고, 내일(30일) 강 경희가 이번 11월 8일 일을 마치고 떠난다고 약속을 한다면, 난 31일 씨엠립으로 올라가 아내가 편히 일할수 있게 하겠다고 동의를 할 테니 이번 만큼은 진실이라면 나도 그일을 마칠수 있도록 직원들에게 다시 알리겠다고 하였습니다. 다음날 전화를 했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고, 그래서 난 그녀가 일을 하는데 부담이 될지 싶어 왜냐하면 그녀의 손님들이 묶는데가 임페리얼 호텔이어서 그곳을 체킹아웃하고 프놈펜 호텔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30일 밤부터 그녀는 다시 일을 하였고, 30일 그날 밤도 내가 그렇게 했으면 제가 이야기를 좀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더니 일부터 하고, 나중에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31일 밤 오늘이 10월의 마지막 밤이란 노래의 이야기도 하면서, 나도 마음에서 많이 정리가 되었으니 쿨하게 헤어지던 아니면 난 지금 너무 힘들어 차라리 집에서 싸운다해도 다시 시작하는게 어떻겠냐고 물어도 보았죠. 그래서 마지막으로 만나서 이야기하는게 어떻겠냐고 했더니, 예전에 부부관계를 요청했다가 거절할때와 같이 아침 일찍 일을 나가야 한다고 하면서 단호히 싫다고 하더군요. 참으로 속상했지만 시원이 보내주기로 하였으니 어찌하겠습니까? 10월의 마지막 밤을 그렇게 뜬 눈으로 보내고, 아침 8시쯤 씨엠립을 올라가기위해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 좋은 아침 오늘 씨엠립으로 올라가면 당신이 서울로 떠나고 난 후 프놈펜으로 올텐데 잘가고.. 잘 생각해 보고…” 메시지를 보내지마자 바로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왔습니다. “왜 내가 여기를 떠나야 하는데? 너무도 황당하여 이 메시지를 친구인 김 화0씨에게 다시 보내주었고 제가 전화를 해서 강 경희에게 이 메시지 당신이 보낸게 맞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엊그제 나와 당신과 당신 친구와 했던 약속(11월 8일까지 이번 일만 마치고 서울로 떠나기로 했던 )은 뭐냐고 물었더니, “나는 떠날 생각이 없는데 당신의 강압에 의해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다음 일을 염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미 11월 8일 정준호 밥차 방송코디를 마치고 11월 9일부터 또 다른 인터뷰 일이 13일까지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고, 13일 이후 엑스포 관련 통역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남편과 가족은 어떻던 이야기를 하자는데 피하고 일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했더니, 그녀가 말하기를, “당신한테 가정이 그렇게 중요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정말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쌍욕을 그녀에게 퍼붇고 현장에 나가있는 직원들을 철수하라 명했고, 모든 연락을 단절하라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프놈펜 호텔에서 그녀의 손님들이 묶는 임페리얼 호텔로 옮겨서 기다렸고, 11월 1일 그 이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고, 전화를 끄고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 이후 11월 4일. 그녀의 친구인 김 화0씨로부터 제게 메시지가 왔습니다. 당신의 아내 강 경희씨가 서울에 있다고, 그 사실을 알고 프놈펜공항에서 떠나면서 조차 내개 떠난다고 원망아닌,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은 이미 그녀와 난 모든게 그녀의 마음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전 미련스럽게도 그녀에게 지금도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갖고 싶었습니다. 11월 1일 그녀가 사라진 이 후 여권이 없다고 했으니 대사관에 임시 증명서를 받아서 나간다고 예전에 그랬던 적이 있으니, 대사관에도 확인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11월2일 공항 출입국 관리소 아는 친구들을 통해 여권번호와 이름을 알려주고 출국심사가 있을 때 연락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공항에 달려가서래도 다시 시작하자고 애원을 해보고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건 소설의 한 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서울로 전화를 한 나는 그녀의 원망을 들었습니다. 니가 떠나라고 해서 캄보디아를 떠나면서 당신과 가족과 10년의 자기의 열정과 미래의 행복모두를 버렸으니 다시는 뭐라뭐라 인생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0.01%라도 캄보디아에 돌아올 가능성이 없냐고? 몇 번이나 재차 물을때마다 이미 캄보디아를 떠나기전 제게 만약 캄보디아를 떠나면 다시는돌아오지 않는다 하였는데도 당신이 떠나라 했으니 이젠 더 이상 아무 미련도 없다고, 그래서 그때서야 왜 내가 당신을 서울로 떠나라 했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너무 다른 모든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어 난 가족과 남편으로서써 수없이 모멸감과 치욕을 느꼈기에 당신이 서울에 있다보면 당신이 다시 예전처럼 변할 수도, 아니면 내가 너무 그리워 애타게 애원할 수도, 그것도 아니면 이렇게 헤어져 각자의 삶을 살수도 있지 않냐고 그동안 당신이 여러 번 내게 이야기 한 것이 6개월 이래도 떨어졌 있자고 하지 않았냐고… 했더니, 그녀가 내게 한 말을 이미 우린 너무 많은 것을 지나왔고, 난 이미 캄보디아를 떠나며 당신도, 일도, 나의 미래도 모두 버렸다 하더군요. 그 소리를 들은 후 저조차도 서서히 마음에서 그녀를 지우는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 아마도 11월 5일 부터인지?
제가 그녀의 한국 휴대폰에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자세히 기억은 나는건 아니지만 처음은 아주 또렷합니다. “ 당신이 단 0.01%의 가능성도 캄보디아에 돌아올 확률이 없다고, 여러 번 확인을 내게 시켜주니 이젠 아마도 당신을 내게서 떠나 보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지금 이순간까지도 너무나 사랑하는 마음을 배신당했다는 배신감과 나의 지난 10년의 행복과 앞으로의 행복 모두를 망쳐버렸다는 강 경희에 대한 증오는 지울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무자비한 욕설도 할 것이고, 때로는 원망도, 증오도, 때로는 당신이 그리워 애타게 애원도 , 때로는 지난 행복에 그리워 후회도 할 것이다. 내가 메시지를 남기고 싶을 때마다 남길 테니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이 들면 아에 지워버리고, 듣고 싶다면 듣고 내게 증오를 품는 전화를 하던 그건 당신의 의사이다. 하지만, 어쨌던 001로 찍히는 전화는 받지 않으면 자동 음성메세지로 바뀌니깐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첫 메시지를 남긴 후 생각이 날때마다 아무말이나 아무욕이나 아무 생활이나 메시지를 남겼다. 아마도 11월 5일부터 12일까지 일 것이다. 그동안 그녀는 메시지를 아예 무시해서인지? 지웠는지?, 내게 메시지를 남기지 말라는 전화도 없었다.
12일 아침. 나도 이미 마음이 많이 가라앉아 있었고, 많은 일들이 산재해 있었기에 우선 짐을 정리해야 했다. 아파트를 찾던 중 생각이 난 것이 남 상0씨가 사는 Plam Place 아프트였다. 아마 아내가 다시 캄보디아에 온다면 가장먼저 그곳으로 올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집보다 더 애착을 가졌던 곳이니 그곳에서 그녀를 지워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파트에 도착을 하니 갑자기 아내의 발자국과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여 메시지를 남기려고 전화를 했다. 그런데 그녀가 전화를 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아파트에 살려고 계약을 하러 왔다고 했다.그랬더니 그 이후로 수없이 전화가 걸려와서, “미쳤구나” 등 아마도 수십통을 받았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자기 친구인 남 상0씨에게 무슨 일을 저지른다 걱정이 되었나 보다. 기억나는 건 한 시간 후 우리 어머님, 아버님을 만나러 간다는 것이다. 시골에서 아파서 거동을 못하는데 만나러 간다면, 시댁까지 간다는게 의심서러워 큰 형수님께 전화를 했더니 그런 전화도 없었고, 부모님은 시골에 계신다하였다. 그래서 그간의 일을 모두 큰 형수에게 이야기 하였고, 아마 거짓말을 했으니 조금 있으면 아내가 전화할거라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일주일동안 전화 한통 없던 사람이 조금 후 강 경희는 잽싸게 내게 전화를 해서, 우리 형수를 만날 것이라 했다. 조금 전 우리 부모님을 만나러 간다는 거짓말은 뭐고 왜 일주일간 연락도 없다가 우리 형수를 만나냐고 했더니, 대답업이 끊어버렸다.
13일 아침. 큰 형수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내가 반 미쳤다고 했단다. 하지만 형수의 말대로 라면 들어가서 이야기를 잘 할 것이라라고 전해주었다. 그리고 오후 5시쯤 평소의 싸움의 중간에 있었던 김 동0친구에게서 전화가 와 나를 만나자는 것이다. 더 이상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 안 만난다고 하였다. 더 이상 상기하여 마음을 다치기 싫었다.
그러고 잠시 눈을 붙인동안 아마 오후 6시쯤 아내인 강 경희가 내게 전화를 했다. 받아서 자던 중이니 나중에 내가 전화를 한다고 하고 끊었다. 그러고 잠을 깬 시간이 아마 13일 밤 8시쯤 내가 서울의 아내에게 전화를 하여 왜 했냐고 물으니 할말이 있었는데 없다고 했다. 그래서 끊었다. 근데 바로 다시 전화가와서 자기가 캄보디아에 들어갈 테니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이 몇 일전 내게 했던 모든 이야기들 때문에 난 이미 당신을 잊어가는 중이고 당신의 메시지에 할말 못할말을 남겼기에 너무 큰 선을 넘었으니, 당신이 이야기하던데로 시간을 갖고 그리고 어차피 엑스포 준비땜에 와도 만날수도 없고, 이번 달에 서울을 갈 것 같으니 그 때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내가 보낸 메시지는 어른들게 들려주지도 않았고, 만나서 이야기 하자고만 한다. 단 2시간이면 된다고 2시간이면 전화로도 충분하니 이야기를 하라했더니 만나서 하자고만 하였다. 그래서 내가 당신이 떠나가면서 수십번 만나서 이야기 하자고 할때는 무슨 생각이었고, 지금은 왜 서로 반대가 되었는데, 2시간 이야기 할 것을 굳이 비행기 돈들여 온다는 것인지를 모르겠다하고 끊었다. 그런 후 밤 10쯤 김 동0시가 호텔로 무작정 찾아왔다. 그래서 내게 묻는게 왜 서울로 무작정 떠나라 했냐 하기에 앞에 이야기한 내용을 이야기했고 하나더 난 아내 강 경희가 무섭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피식 웃는다. “ 아내인 강 경희는 자기의 목표를 위해 나를 정신병자로 만들고도 자기의 목표를 취할 사람이라고 했다.
만약 캄보디아어를 못하면 상관이 없지만, 가족과 자기의 미래 모두를 버리고 쫒아가는 것은 어떤 무엇에 대한 사랑때문밖에 없는게 인간이 아니냐! 다른 남자를 사랑하던, 하느님을 사랑하던, 약을 사랑하던, 아니면 남 상0 친구를 사랑하던, 일 때문에 가족과 자기의 미래를 버리는 사람이있는가? 오직 사랑 때문인데 어떤 사랑인지 모르겠고, 그 사랑을 따라 이미 행동으로 보여준 사람인데 어떤 이유를 붙여서든 어떤 방법으로던 그녀의 첫 장애물이 남편인 내가 아닌가 했더니 수긍을 하면서, 김 동0씨가 실은 오후 3시쯤 강 경0씨가 전화와서 내게 전해달라 하면서 “어제 형수를 만나 이야기를 했는데 어쩌면 내가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올 기대를 할지 모르는데 정 동춘씨에게 기대하지 말라고 전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 내가 이미 김 동0 씨를 만나기 2시간전 강 경의와 통화를 했는데 그런 이야기는 아에 없었기에 몇 번을 재차 물었다. 근데 김 동0씨 이야기를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아내인 강 경희가 우리 형수를 만난 것을 아는 사람은 나, 아내인 강 경희, 큰 형수, 큰 형 뿐인데… 바로 강 경희에게 서울로 전화를 해서 김 동0씨가 이런 이야기를 당신이 내게 전해달라고 했다는데 어찌된 것이냐 했더니, 강 경희는 모르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럼 김 동0이 어떻게 당신이 형수를 만난 사실을 아냐고 하니 그건 자기가 알빠 아니라고 한다. 그럼 김 동0한테 전화해서 확인한 후 김 동0씨한테 나한테 확인 전화를 해달라고 했더니 알았다고 했다. 그 이후 30분을 기다려도 전화가 없길래 김 동0씨에게 전화해서 강 경희 전화를 받았냐고 했더니, 그런적 없다고 했다. 그런후 다시 강 경희에게 전화를 하니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 이후로 14일,15일 아침까지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기에 이상하다 하여 강 경희의 대전친정으로 전화를 했더니 15일 아침. 아침먹고 전화를 가지고 나갔다고 한다. 너무도 이상하여 우선 캄보디아 현지 그녀의 전화를 했지만 꺼져있었다. 여행사에 승객명단을 확인하니 이미 14일 밤 아시아나로 프놈펜에 도착해 있었고, 14일 밤 들어온 비행기표는 이미 11월 3일 출발하면서 왕복 항공권을 사서 간 것 이었다. 그래도 믿기지 않아 친구인 공항책임자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 친구가 먼저 아무것도 모르고 이야기를 하는데 방금전 경호 경찰대에서 대한항공과 니 아내의 통역으로 여러명이 회의를 마쳤다는 것이다. 그 시간이 아마 오후 3시가 조금 지나서일 것이다. 갑자기 11월 3일 캄보디아를 떠나기전 일과 지난 1년간의 거짓말과 서울에 있는동안 했던 이야기들 모두가 거짓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흐리기 시작했고 눈물에 따라 분노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다시 여행사에 전화하여 강 경희 이름이나 김 화0 이름이 15일 오후이후 프놈펜에서 씨엠립으로 가는 항공편에 확인하니 두명 모두 15일 저녁 6시20분 비행기로 발권이 되어 있었다. 분명 출발전 집에서 가방을 싣고 갈것으로 예상하고 오후 4시쯤 김 화0집앞 멀리서 기다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30분후 여자 두명이 차에 타는 것이다.하지만 누구인지를 몰라 실수하면 안되니 공항으로 가서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차가 막히니 내차는 따라오라하고,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공항을 도착하니, 오후 5시가 조금 넘었다. 혹시나 하고 아내의 휴대폰을 걸었지만 그때까지 꺼져있었다. 그녀는 그시간까지 내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만약 진짜 공항에서 만나면 내가 무슨 짖을 할지 알수가 없어, 친구인 공항보안관계 책임자를 불러옆에두고, 그래도 안되겠고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지 확인을 하고 싶어 먼저 동승한 아내의 친구인 김 화0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10번정도를 했는데 받지 않기에 메시지를 보냈다. “만약 나한테 그녀가 잡히면 죽일지도 모른다고” 그러고 난 후 30분 이상이 지나서야 김 화0 친구만 차를 타고 공항에 도착하여 씨엠립으로 출발을 했고, 그 차를 확인하니 강 경희라고 씌여잔 빨간색 이름표와 14일 밤 아시아나 수화물표가 붙어있었다. 운전수에게 확인하니 그 가방을 오늘 12시쯤 남 상0 아파트에서 싣고 왔다는 것이다. 이건 뭔가… 어제 도착해서 또 하루밤을 그 여자 집에서 잦다는 것이 아닌가! 화가 치밀데로 치밀었고, 그 가방을 내 차에 옮겨 실었다. 그리고 그녀의 렌트가는 5시 40분쯤 시내로 가버렸고, 난 그녀가 씨엠립으로 다른 비행기편으로 갈 수있다고 생각하여 저녁 7시 20분 다른 비행기편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6시쯤 강 경희 그녀에게서 그제서야 전화를 이용하여 지금 어디있냐고 전화가 왔고, 난 그냥 끊었다. 또 전화가 왔다.그래서 “ 넌 인간도 아니라고 했다.’’ “인간의 행동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 도 끊었다. 그리고 공항을 나서는데이제는 자기전화로 전화가 와서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그래서 공항에서 7시쯤 출발하여 내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사무실에서 저녁 7시20분쯤 도착하여 그녀의 가방을 내 방에 놓고 기다리는데, 20여분이 지나도록 그녀가 오지 않았고, 전화를 했더니 신호는 가는데 받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대사관에의 박 영0 영사의전화가 걸려왔다.
“ 처음뵙겠습니다. 대사관의 박 영0 영사입니다. 초면에 죄송하지만 지금 강 경희씨 가방을 갖고 계시죠?”
“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 제 아내입니다.’’
“ 아무리 부부간의 일이래도 일단 가방을 본인 소유로 돌려주시죠?”
“이젠 대사관에서 부부관계까지 관장합니까? “
“아 그게 아니고 이번에 대통령이 방문하는데 강 경희씨가 중요한 일을 맡았는데 그 가방에 중요한 스케쥴 등 가방이 없으면,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를 할 수 없다고 합니다. “
“허허허…, 조금전 통화를 했고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했으니,와서 가방을 가져가겠죠.”
“만약 제가 말씀드린데로 하시지 않으면, 국가적행사의 범죄예방차원에서 국가중요행사를 앞두고, 조치를 취할수 있습니다. “
“여보세요. 박 영사님. 언제부터 부부관계 일을 대사관에서 관여했습니까? 지금 제게 협박하시는 겁니까? “
“아니 정 사장님 당신은 국민 아닙니까?”
“박 00 영사님 당신도 가족이 있으시죠? 가족이 우선입니까? 일이 우선입니까?”
“아 그런뜻은 아니고…”
전화문제로 끊겼고, 순간 예전에 예상하고 친구에게 이야기했던데로 그 여자는 이렇게 나를 정신병자로 만들어 구금이 되게하고, 본인 뜻데로 하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무서웠습니다. 그 상태에서 잡히면 아무도 모르게 조서데로 그녀가 늘상 정신병자라고 했던 것처럼 정신병원으로 증인도 없이 잡혀가는 것이었습니다. 무서워서 불도 못끄고, 사무실을 빠져 나와 사무실 근처 떨어진 곳에서 강 경희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고.. 다시 박 00 영사에게 전화를 해서 “아까는 미안했는데 전화가 끊겼습니다. 부부관계일은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내 아내는 한국에서 캄보디아를 다시 들어오지 않는다고 남편인 제게 엊그저께 이야기 햇는데 어젯밤에 들어와 있었고,어떤일을 하는지? 방금전도 사무실로 온다고하고 대신 박 00 영사님 전화만 오는군요.. 옆에 있으면 바꿔주세요? “
“ 아니 없는데요. “
“알겠습니다. “
그리고 다시 아내 강 경희에게 전화를 했더니 받더군요. 결국 3시간 후에 안 일이지만 이런 통화를 할 때 대사관에 있었다고 그녀가 내게 말을 했습니다.
“결국 니 각본데로 난 정신병자가 되어 끌려갈뻔했네 신발년아!.”
그러거도 살아남길 바라냐? 니가 박 00 영사한테 부탁했어?”
그러곤 무진장 아무욕이나 했던거 같다. 전화를 끊었고, 다시 그녀가 전화를 내게 걸었다. 만나자는 것이다.
“ 난 이젠 무서워서 싫다.”
“증인도 없이 잡혀가면 난 또라이 정신병자 밖에 안되니 못 만나겠다.
그녀 왈, “ 그럼 경찰서에서 만날까? 대사관에서 만날까? 이젠 당신의 말 아무것도 믿을 수 없도록 지난 1년간 보았고, 당신이 내게행동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 그러면서 난 지금의 이 모멸과 치욕을 너한테 돌려줄 것이다. 너는 너데로 살고, 나는 나데로 살자.”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중 또다시 전화가 또와서 호텔에서 증인들이 있는 상태에서 만나자고 한다. 그 대신 조금 전 처럼의 행동이면 너 정말 지옥에서도 용서 못할 년이다.
그리고 그녀가 내게 묻느다. “ 가방 어디 있는데?”
“다 태워버렸다. 조금 전 너의 행동이 괴씸해서… 부르고 싶은 사람 다 불러서 9시30분에 임페리얼 호텔에서 만나자. 나도 또다시 박 영0 영사가 잡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직원을 불렀고, 호텔 관계자에 부탁해 회의실에서 부부싸움에 원탁을 두고 4명이 앉았다. 세상에 이런 부부싸움이 있을까? 내가 죽고 싶은 심정뿐이다.
기억나는 건 별로 없다. 그녀의 말은 제발 “ 이년 ”자좀 빼달라는 것이고, 자기가 잘못을 했지만 추석날 남자들과 어울려 늦게 들어온 것 사실이다. 몇 일전 김 동0을 통해 전해 달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번 싸움에 정신병자야 정신병원에 가라는 이야기는 이번이 아니고 저번 싸움이란다. 캄보디아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수십번을 이야기 했었던 것은 안돌아 온다는게 아니고 돌아오면 당신과는 끝이지만 일은 여기서 할 것이다.
“그럼 가족, 남편은 버리고도 일을 하는게 맞느냐? ” 는 “ 그건 개인의사 ’’이다.
“조금전 왜 사무실에서 만나자고 해놓고 오지는 않고 박 영0 영사가 전화온건 뭐냐?”
“ 그건 난 모른다.’’
‘’ 그럼 한 시간전 내가 가방을 가져왔다는데 박 영사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
‘’ 그때 대사관에 있었는데 옆에서하는 이야기를 듣고 박 00 영사가 전화했나보다..’’
“ 그때 이야기 당시 가방이야기는 없었고, 그럼 당신은 사무실에서 만나자는게 아예 거짓말이 맞네? 그럼 넌 나와의 부부싸움 전하를 대사관에서 전화를 스피커 폰으로 했냐?”
“ 왜 그런걸 따지는데… 서울 있을 때 당신이 보낸 메시지를 아버님이 듣고 왜 아버님 가슴에 못을 박냐?”
“ 엊그저께 당신이 서울에서 내게 전화해서 이야기하자고 할 때 그 메시지를 어떻게 어른들게 들려주냐고 했다. 그것도 거짓말인가? 그리고 하하하 .. 넌 그럼 남편에 못박는건 뭐냐?”
“지난 6년간 단 한번이라도 내가 너한테 평상시 쌍소리한적 있냐? , 지난 6년간 단 한번 일하지 말라고 막은 적 있냐? , 지난 6년간 내가 니 메일 체킹하고, 당신 전화확인한적있냐?
참 오늘 메일 봤는데 돌아버리겠두만! 김 차장도 같이 봤는데 도대체 “신 호식”이란 놈이 누구이길래 그렇게 바로 당신이 서울에 간걸알고 “경희 친구”라고메일을 보내 부부싸움까지도 알고...’’
그녀는 여전히 “모르는 사람이다.”
“ 그리고 너 11월3일 이전 이후 수십 번도 강 경희 네년입으로 캄보디아에 돌아올 확률이 0.01%도 없다고 했고, 내가 “너없이는 살수 없으니 돌아와 달라고 할때도 이젠 소용없는 일이며, 난 이미 한국에 왔다고 했는데, 왜 돌아왔냐고..’’ 했더니 한국대사관에서 한국까지 전화와서 대통령 방문 당시 일을 해야한다고 사정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럼 내게 출발 전. 도착해서라도 전화를 해 줄수 있는게 아니냐 했더니…
“…..할려고 했는데….’’ “됐다 됐어’’
“우리 더 이상 이야기할 가치가 없는 것 같다. 넌 남편과 가족을 버리더라도 일을 하겠다했으며 지난 몇 달간 보여준 수 백번의 거짓말과 행동으로 난 다 보았다.”
그녀 왈 “이번 대사관 엑스포일은 안할거야!”
“ 그 거짓말을 믿으라구! 됐다. 됐어. 그만하자 “ 그리고 난 나와버렸고, 그녀는 여전히 자기 가방을 찾으러 내 호텔방까지 와서는 가방이 없다는 것을 알고 돌아가버렸다. 그리고 한참 후 가방에 뭐가 들었는지 진짜인지? 궁금해 전화를 했더니 끊고 꺼버린다. 너무 화가나서 다시 사무실로가서 가방을 열어보았다. 그녀의 옷 정장 몇 벌, 속옷, 화장품, 청바지, 사전 2개, 예전부터 하던 천주고 교본 번역, 드리이기, 수첩뿐이었다. 너무너무화가 났다. 박 영0 영사에게 대통령 통역 때문에 중요한 문서가 있다고 그런 거짓말만 안했어도… 모든게 거짓말…. 나머지는 다 찢어버렸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했었던 연설문 뭉치는 그 속에 또 중요한 문서가 있을지 모르니 그대로 다시 꾸겨 넣었다. 모든 게 거짓에 거짓말 , 거짓 행동 뿐이었다.(다른 사람에게 까지도…)
그시간 밤 1시. 그녀가 잠자고 있을 김 화0씨 아파트 계단에 앉아 수천만번도 되새기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증오하고, 미워하고, 마지막 한번만이라도 더 물어보고싶었다.몇 년을 기다려야 돌아올수 있는지? 16일 아침 9시까지 꺼져있는 전화를 수천번은 누리지 않았을까? 결국 거기서 자는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오토바이 택시에 막 타는데 그녀의 전화가 걸렸고,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주루룩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호텔로 돌아오는 내내 엉엉 울어버렸고, 몇 번이고 그녀에게서 전화는 왔지만 받지 않았다. 호텔방에서도 울음이 그치지않아 실컷 울고 나니 좀 풀리는 듯 했다. 이젠 돌이킬 수도 없는 나의 모든 사랑과 미래의 행복 모두가 사라진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녀는 내가 전화를 받으며 울음을 터트리면서 호텔에 왔던 시간 조금 후 가방을 찾으러 사무실 내방에 가서 가방을 가져갔단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여자를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는게 내 자신이 이해가 안된다. 지난 것은 지난 것이고, 어차피 그녀는 캄보디아에 와 있고, 대통령 일행 통역은 할 것이고, 차라리 내가 피해주는게 나을 듯 싶어, 16일 오후 그녀에게 씨엠립으로 가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이번 행사가 끝나면 당신이든 나든 여기를 떠나자고 할려고 전화를 했는데 “ 나 약에 취해서 아무것도 몰라 나중에 애기해” 그런 후 그녀에게 전화를 했지만, 그녀의 전화를 받는사람은 서울에서 온 친구라는 따른 여자였고, 16일 밤 늦게까지 일어날수 없고, 내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17일 이사짐을 대충정리하고 엑스포에 쓸 자료를 챙기고, 다시 전화를 그녀에게 걸었다. 어제 받았던 그 친구가 받는다. 여전이 못 일어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멀리서 수화기를 타고 그녀가 다른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음성이 들린다. 그래서전 남편이니 강 경희씨에게 물어나 보라고 했지만,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면서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그래도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
“ 너의 전화가 켜있음 또 내가 전화를 할거고, 화가 날때마다 메시지를 보낼거고, 그것조차도 너무나 내 자신에 처참한 짓일 듯 싶어 당신 전화를 단절 할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내 명의로 내가 마련해준 전화라 통신단절을 요청하고, 씨엠립으로 떠날 준비를 거의 마쳐갈쯤 아마 17일 저녁 7시쯤 캄보디아 사복 경찰 3명에게 임의동행되어 밤 11시 30분까지 조사 및 조서를 꾸몄다. 왜 이런 조사를 하냐고 했더니
“당신 아내가 강 경희씨 맞냐는 것이다.? “
“맞다”
“당신 아내가 당신이 자기를 죽이겠다고 메시지를 보냈기에 무서워서 신변보호요청을 하였다고 한다.”
“정말 그렇다면 요청서를 보여다오. 그래야 진실인지, 아닌지를 알 것 아니냐? 난 그녀에게 보낸적이 없다. 그녀의 친구 김 화0씨에게 만약 내가 그녀를 잡으면 어쩌면 죽일지도 모른다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메시지 속의 그녀가 그럼 누구라 생각하는가? 당신같으면 당신 아내에게 그럴 수 있는가? “
아무도 대답을 하지않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대충 11월달부터 정황을 일러주었고, 한국 대사관에서 시켰냐? 아님 수상 경호실인가? 아무도 대답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난 우선 한국대사관에 연락을 해야 하고, 당신들이 접수한 문서를 보여달라 했지만,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 대신 이 개인적인 질문인데 당신들의 아내가 앞에서 언급한데로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했더니, 결혼을 한 캄보디아 경찰 세명 모두가 벌써 그런 여자를 죽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럼 되었다.’’
모든걸 협조할 테니 맘데로 해라고 하였더니 그들도 안심하는 표정이다.
난 외국인이며 변호사를 선임하거나 대사관 직원하에서만 응답을 하겠다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했더니 조용하다. 뿐만 아니라 신변보호요청자가 내 아내인데 왜 요청자는 왜 사실을 확인한 기록이 없느냐? 또한 요청자 조차 외국인인데 내가 왜 내무부 형사국에 있어야 하는냐? 하고 인권유린으로 고발장을 쓴다면 어떻게 할거냐? 했더니 너무도 조용하다. 내가 웃고는 걱정마라 어떻게 하면 되는냐 했더니 너무도 친절히도 일러주고 자기들도 이러고 싶지 않지만 어쩔수가 없다고 한다. 그렇게 17일 밤을 내무부 현관 계단간이 침대에서 자고 18일 아침 10시쯤 다시 그들과 함께 프놈펜 공항 앞 내무부 산하 이민국 소속 사무실로 왔으며, 17일 밤과 똑 같은 질문과 대답을 하고 지문을 찍고 사무실에서 기다리는데 국장이란 사람이 모두 이야기 해 주었다. 아내의 신변보호요청문건으로 한국대사관에서 내무부로 전달되었으며, 대통령의 영부인 통역관으로서 양국의 행사일원인 아내가 부부싸움으로 이번 행사에 차질이 생기면, 양국의 안좋은 이미지가 되오니 대통령이 떠나는 날까지만 참아달라고 한다. 그래서 베트남이나, 태국이나, 서울에 가겠다고 하니 그것조차도 안된다고 한다 그럼 난 뭔가?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대통령 자리가 아닌가? 그럼 개인의 인권 6일정도는 아무 상관없다는 것인가?
11월 19일 12시 30분. 나를 대신하여 직원이 대사관에 공식 교민 신변보호 요청서를 보냈고, 유선상으로 박 영0 영사와 통화를 했다고 한다. 박 영0 영사의 말에 의하면 현재 대사관에 직원이 6명밖에 없고, 대통령이 오늘 도착하는데 바쁘니 인권에 문제만 없으면 대통령이 떠날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한다. 17일 임의동행후 통신의 자유와 감금되어 있는 상태가 인권에 문제가 없다는 것인가? 몇 일전 박 00 영사와 통화시 “ 당신은 국민이 아니냐고?”했던 영사가 어떻게 국민의 신변보호 요청에 이렇게 답할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의문이다. 그럼 나의 아내가 그 통역일을 하기위해 직접문서를 써 남편이란 사람을 구금하게 하고, 지금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인가? 몇 일전 마지막 만날을 때 직원과 친구들이 있는 앞에서 이일을 하지 않겠다고 했었던 아내입니다. 아니면 나의 아내 또한 나와 같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요을 당해서 남편을 구금해 달라는 요청서를 쓰게 되었을까요?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남편을 구금하면서까지 일을 하겠다는 아내를 어떻게 이해해야하고,어떤 다음 행동을 취해야하는 거죠?
또한 후자의 경우라면 아내의 행동을 강요한 것이 국가이익의 이름을 내세운 주캄 한국대사관일지? 대통령 안전을 염려한 대통령 경호실일지? 만약 그들이 상대라면 전 어떤 다음 행동을 해야하는 거죠?
앞에서 말했듯이 앙코르~경주세계문화엑스포를 만들기 위해 지난 4년간 동분서주했던 수많은 노력의 결과가 엑스포 방문을 위해 방캄한 대통령 일행단 통역을 담당하는 아내 강 경희를 보호하기 위해 전 지금 개막식이 열리고 있는 동안, 캄보디아 보호 감호소에 독방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엑스포를 탄생하게 하기위해 노력했던 지난 모든 시간의 제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이글을 쓰고 난 후의 나의 지난 10년 열정인 행복한 가정을 위한 것과, 20년 미래의 단란한 가족의 꿈을 어떻게 준비를 해야하는 건지? 참으로 암담할 뿐입니다.
대통령의 캄보디아 방문에 받혀진 나의 아내
대통령의 캄보디아 방문에 받혀진 나의 아내
- 이 이야기는 한 인간의 진솔한 해외의 10년 삶입니다. ?
본인 정 동춘은 한남대학교를 졸업하고 정치대학원 한 학기를 마치고 전공(동남아지역연구)을 공부하던 중 현지 체험과 제가 소망하던 민간외교의 꿈을 실현하는데 도전을하고 싶어 무작정 베트남을 향했던 것이 95년 그후 지금 2006년 11월 20일 현재 아침 10시30분…
난 4일전 영문도 모른체 사무실에서 캄보디아 경찰에 임의동해 되어 캄보디아 내무부로 갔고(17일 19:00), 그때부터 밤 11시 30분까지 조사를 받았으며, 하루밤을 내무부 복도에서 잠을 자고 18일 아침 10시 새로운 장소 내무부 산하 이민 경찰국 소속 사무실로 왔으며(프놈펜 공항 맞은편) 또 조사를 받은 후 수 천마리의 개미와 수 백마리의 모기와 잠을 청하고 지금은 너무나 차분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4일째, 제 자신의 모든 자유를 누구에겐가 저당 잡힌심정… 참으로 참담하여 이글을 쓰면서 조차 어찌해야할지를 모르겠고, 이글이 공개가 된다면 공개 후 저의 모든 것이 어떻게 변해갈지? 그것도 아니면 모든 인생을 포기해야하는 건지? 아니면 모든걸 지우고 새로이 운명을 시작해야할지? 저조차도 가늠할 수 없는 일이 “노무현 대통령의 캄보디아 방문” 때문에 대통령의 일정과 안전이 염려되어 이곳에서 11월 21일이후까지 감금되어 있어야 한다고 하는군요.
위의 내용을 알고 난후 12년의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되새겨지고 있어 이 글조차도 남기지 않으면, 내 스스로가 나를 용서할 수 없을 듯하여 글을 올립니다.
본인은 95~96년 베트남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97년 청운의 꿈을 안고 97년부터 2006년 11월까지 캄보디아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신 인터네셔날, 한신 아리랑 투어, H.S System , H-S 건설, 앙코르~경주 세계문화엑스포 캄보디아 코디네이터, 캄보디아 수상실 산하 국가관광위원회(컨설턴트), 주한국 캄보디아 관광청 소장, 등의 회사와 직책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본인이 이 글을 올리게 됨을 지극히 개인적인 일임에도 불고하고 많은 지인과 캄보디아 교민이 관련된 일이라 추후 피해의 우려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인간적인 개인 모멸감을 감수하면서 글을 씁니다. 또한 현재 본인은 보호감호소에 감금 상태에서 이글을 쓰기에 제가 언급하는 연도와 일자가 정확한 사실 근거하에 적혀질수 없으며 제 기억속에 있는 사실을 되살려 쓰는 글임을 인지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선 그간의 사연을 적으면서 제 개인적인 주관에서 바라본것이며, 관련자가 있다면 그 분들게 어떠한 피해를 드리고자함이 아님을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또한,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또한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이 제 판단에 의견을 주시면 인생의 결정을 하는데 참고하고자하고, 만약 억울한 부분이 있어 법적대응을 해야 한다면 저를 도와줄 법률지식이 있는 분들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바람입니다.
정 동춘 이 메일: cambodiahansin@yahoo.co.kr
아내 강 경희: khkangkr@yahoo.co.kr
부디 많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저와 아내는 98년 서울에서 지인의 소개로 만났고, 그 당시 아내(강 경희)는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 있는 친구를 통해 알아본 사실은 한국에서 좋은 대학을 나와 일본에서 석사과정, 박사를 취득해도미래의 보장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고등학교 조차 마치지 못한 강 경희씨에게는 제가 바라보는 캄보디아 미래 10년후를 이야기하면서 한국인 최초로 캄보디아 전문 통역사가 된다면 그것은 인생의 큰 결실이라 설득을 했고, 10년후 한국과 캄보디아 수교가 커지고하면, 그런 사람이 꼭 필요할 것이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설득하였습니다. 그래서 본인 또한 지인이 캄보디아에 있으니 캄보디아를 방문한다하여 98년부터 캄보디아에서의 생화을 시작하면서 둘은 가까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캄보디아에서 사업이 어려웠던 저는 아주어려운 시기를 보냈으며, 강 경희씨의 지인 한 승0씨집에서 같이 생활을 하면서 가까워지게 되었고, 강 00씨는 캄보디아 왕립 프놈펜 대학 동남아 센터에서 캄보디아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중 지인조차 캄보디아에서 사업의 난항으로 서울로 철수를 하게 되었고, 당시 한인회장(김 00씨)님의 도움으로 거쳐를 옮겼던 저는 강 경희씨의 의지데로 계속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여 우선 서울에서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이수증을 받아와서 캄보디아 왕립대학에 입학하게 하였습니다. 막상 그런일이 진행이 되면서 사업이 더욱 어려워진 저는 결국 저렴한 월세(US60$)집으로 이사를 했고, 서울에서 고등학교 이수증을 받아온 강 경희씨를 위해 전 제가 해줄수 있는게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기에 유 세0씨의 집에 하숙을 마련하여 주었습니다.(US500$) 어렵고 힘든 시기였지만, 참으로 행복했던 시기였습니다. 결국 그렇게 고대하던 대학을 2000년 경에 입학을 하였고, 참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너무도 고마웠습니다. 하지만 제 사업은 계속 힘든 과정이었고, 그것을 안 아내는 결국 2001년 하숙비의 부담도 있으니, 본인이 사는 집으로 옮긴다하여 결국 둘은 부부가 아닌 상태에서 가정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습니다. 너무 행복한 시간이 가져다 준 선물인지는 몰라도 2002년 비록 다른 대학이지만 평소 대학원 당시 논문 지도 도움을 받았던 조 원 박사님이 캄보디아를 방문하였던 그날이 2002년 1월말 경 설 명절 기간이었는데,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한국에서 너무 힘들어 인생을 포기해야 할지? 새로이 인생을 시작해야 할지? 생각을 하던 중 본인 정 동춘의 생각이 나 캄보디아를 방문하셨다 하였습니다. 당시 제가 힘든 걸 알게 되었고, 같이 인생을 포기하자고까지 이야기하다가 어차피 마지막이니 그러지 말고 그동안제가 한국경제협력자금을 가지고 해외에 지원하는 사업을 공부하고 연결하는 중이니 서울에서 조 원 박사님이 일의 진행을 맡고 캄보디아에서 제가 역할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기존에 라오스 대상사업과 캄보디아 대상사업을 이야기 하던 중 , 우선 캄보디아를 알아보기로 하고, 그때 저는 캄보디아 정부 역할자를 소개하게 되었고, 지금의 수상실 국가관광위원회 부처장이며, 앙코르~경주세계문화엑스포 공동사무국 부단장인 미스터 야 00씨와 엑스포 조직위의 캄보디아 부단장, 겸 캄보디아 관광부 차관인 통 씨를 소개하였는데, 관광부 차관겸 현재 엑스포조직위 통 씨는 연락이 없었고 야 씨는 마침 캄보디아 수상께서 2002년4월,5월에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니 그때 논의주제로 하면 진행이 될수 있다고 하여, 조 00 박사님(경기고, 서울대 졸업)이 친분이 있으신 분이 한국의 청와대, 재경부, 수출입은행에 있다고하여, 확인한 결과 캄보디아의 해외경제협력 경협자금 EDCF Loan 수혜는 의료,교육, 직업훈련 부분에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한 후, 진행을 시작했으며 4월 수상의 한국 방문시 양국이 우선 행정전산망 사업을 우선하고, 직업기술학교사업을 지원할수 있다고 협의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결과 2003년 6월말 최종적으로 프로젝트 계약식을 하게되었습니다. 그 결과 현재의 NPIC(한국경협자금지원으로 세워진 국가기술직업센타)가 탄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프로젝트 수행의 공로를 인정받아 캄보디아 관광부에서도 한국시장의 마케팅 대표 사무소 소장이란 역할을 승인하여 2002년 4월부터 공식 주한국 캄보디아 관광부 사무소 소장이 되었습니다. (http://www.cambodiatourism.or.kr) 또한, 본학교 건설의 계약이 포스코 건설로 예정되면서 제가 포스코 건설의 에이전트로 승인이 되어 건설 중 일부(전기실, 발전기실)를 본인 개인 회사인 한신(HAN-SIN)에서 수행을 하게 되었고, 장비공급이 확정된 포스데이타의 에이전트가 되어, 발전기, 가구 등 기타 기계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프로젝트가 진행이 되는 동안 조 원 박사님의 소개로 당시 정통부산하기관인 정보문화센타 현재의 정보문화진흥원 손 00 원장님과 신 00 단장님을 소개받았고, 당 센터에서 국책사업으로 정보화격차해소의 일환으로 캄보디아 IT 플라자 사업을 하는데, 잦은 일에 도움을 주었던 저는 이를 계기로 인연이 되어 제가 추천하는 포스데이타와 씨아이커뮤니케이션(당시 대표 천 무0)이 수행할 수 있도록 부탁을 드려, 입찰을 통하여 두 업체의 낙찰로 베트남, 이집트, 루마니아 IT 플라자사업이 수행되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한편 2000년? 2001년? 인지 속초세계관광엑스포에 캄보디아의 대표단이 참가할수 있도록 노력하여 캄보디아 공연단이 공연을 하고 세계의 문화를 보면서 캄보디아에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을 갖고있는데 왜 이런 행사를 할수 없을까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 1회 경주엑스포에 캄보디아 대표단을 파견하는데 노력을 했고, 당시 대표단장인 웽 000씨 당시 캄보디아 관광부 장관께 부탁드려 캄보디아에서도 이런 행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당시의 엑스포위원장이신 이 의0 지사님께 말씀을 드렸고, 고려해보시겠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앙코르~경주세게문화엑스포의 씨앗이었습니다. 그후 제 2회 경주엑스포에 다시 캄보디아 대표단과 공연단이 참가를 하였으며, 당시 대표는 지금의 앙코르~경주엑스포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인 통 관광부 차관이었습니다. 다시 이 의0 지사님을 뵈온 자리에서 한국의 도움으로 앙코르 왓트에서 문화엑스포를 열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쳥하였고 심사숙고하신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캄보디아로 돌아와 당시 주캄보디아 한국대사관에 위와 같은 사항을 구두로 설명하고, 한국의 문화수출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할 수 없냐고 요청을 한 바, 지방자치 단체의 일을 대사관이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대답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포기할 수 없어 씨아이커뮤니케이션의 천 무0대표와 이야기중 한국문화관광부에서 해외관광홍보관을 지을 계획을 들었고, 이를 한국인이 많이 방문하는 앙코르왓트에 지은 후 관광교류를 확대하고 한국문화관광부의 문화수출촉진자금으로 경상북도에 지원하고 경상북도 산하기관인 엑스포재단이 추진하면 될 것으로 아이디어가 모아져, 지금의 엑스포공동사무국 이 영0 사무관을 통하여 엑스포재단 현재 앙코르~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조직위원회 부처장인 이 필0 기획처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그분이 한국의 전 문화관광부 장관인 이 창0 형님이었기에 참으로 행운이었습니다. 그 무렵 한국문화관광부대표단(단장 신 현0 기획관)이 동남아 방문이 있어 잠시 캄보디아에 할애 할수 있도록하여 양국의 관광발전을 증진할 수 있도록 논의하게 되었고, 경주세계문화엑스포의 노하우를 수출할 수 있도록 논의가 되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문화교류 분위기를 조성하자고 의견을 보았고, 씨아이커뮤니케이션 이벤트 사업부에서 캄보디아 보물을 한국에서 전시를 한다면, 한국의 문화관광부 후원으로 양국의 교류가 확대될 수 있다고 하여, 캄보디아 수상실에서도 관련부서 장,차관급 약 30명 정도로 위원회가 구성이 되었고 결국 2004년 6월29일~ 9월 3일까지 서울의 역사 박물관에서 “캄보디아 보물전”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관 기획사의 자금 유용으로 유물전이 끝난 후 유물을 다시 캄보디아로 되돌려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해결책을 찾기위해 “캄보디아 수상실 내 행사, 전시관리위원회” 의 위임장을 받아 서울을 방문한 저는 참으로 암담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주엑스포 조직위와 경상북도 공무원과의 상의 끝에 대구 엑스포에서 캄보디아 유물전시를 한다면 앙코르~경주세계문화엑스포의 실현가능성을 높일수 있다고 설득하고, 경상북도 후원, 주한 캄보디아관광청 주최, 경주 엑스포조직위 주관으로 행사를 진행하고 개막식 당시 캄보디아 대표단(단장, 정무장관급인 동시에 한.캄 친선협회공동대표 생림0)이 방문하여, 개막식이전 경상북도 도청에서 앙코르~경주세계문화엑스포 개최준비를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추후 이 의0 지사님이 공식 방캄 후 공식 양해각서를 체결하였고, 그 이후의 업무는 주캄 한국대사관과 엑스포 공동사무국에서 진행이 되었고, 2006년 12월 12일부터 60일간 앙코르 왓트가 있는 씨엠립 인근에서 치루어 지는것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을 무렵 2006년 3월 캄보디아 수상의 한국 방문 계획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앙코르~ 경주세계문화엑스포에 한국 최초로 대통령이 오신다면 행사가 빛날 것을 캄보디아측에 전달했고, 양정상이 한국에서 회담시 긍정적으로 검토를 하신다는 말씀을 전해들었습니다. 참으로 기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인간의 작은 생각이 너무도 큰 결실을 보는듯한 자화자찬을 하게되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캄보디아 측 엑스포 조직위원회의 공동사무국에서 코디네이터로 임명을 받았고, 제 역할은 개막식의 캄보디아측 VIP의전행사와 엑스포 행사 중 앙코르왓 사원안에서 열리는 중요행사인 앙드레 김 패션 쇼, 한캄 의상쇼, 청소년 오케스트라, 송년의 밤 행사 등을 맡은 팀장이었고, 제 아내(강 경희)는 의전통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무엇인지 모를만큼 흐트려져 있습니다.
지금 2006년 11월 21일 오전 11시 저는 노무현 대통령이 도착했다는 프놈펜 공항앞 보호 감호소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고, 아마 제 아내는 대통령 영부인 통역관의 자격으로 예행연습을 하고 있겠죠. 제 아내 강 경희라는 사람이 지금의 일을 해야한다고, 남편인 제가 일을 못하게 방해한다고 신변보호요청을 하여 저는 구금이 되어 있답니다.
2000년~2004년 너무도 열심히 대학을 다니며 공부를 하던 아내 그리고 사업의 순항도 이루고 있을 무렵 결혼식을 못해준게 미안해 2004년 7월 12일 성대하지는 않아도 남부럽지 않을만큼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지난 2000년부터 단 한번 말 다툼조차 없었던 너무나 행복했던 부부였답니다. 제 스스로 밖에서 “ 내 인생의 최고는 내 아내인 강 경희를 만난 것이라고” 했으니깐요.
2004년 결혼식을 마치고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온 그녀는 캄보디아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하고 싶어했기에 가정이 우선이니, 우리의 아이를 가지면 어떻겠냐고 제의를 했더니 그러자고 했고, 저 또한 아내에게 압박이 될까봐 생기면 갖고 아니면 입양을 하자고 했습니다. 헌데 얼마전 부부싸움이 있고 난 후 그녀의 일기장에서 지난 부부싸움 2006년 1월에 제게 보내지 않았지만, 제게 보내려고 했던 편지를 발견하였습니다. “ 이런 부부싸움은 또 다시 이루어 질 것이고, 그때에 우리의 아기가 있다면 우린 너무나 큰 불행을 심는 것이기에 아이는 추후 대학원을 마치고 생각해 보자. “라고 씌어 있더군요.
2004년 대학원을 들어갈때도 이미 학기가 6개월이 지난 상태라 불가능하였지만, 캄보디아 부수상인 관방장관의 승인서가 있으면 가능하다하여 본 서신을 제가 부탁하여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캄보디아를 찾는 한국인이 많아지고 기업이 늘면서 통역일을 하기 시작하였고, 자연스레 통역을 하다보니 학교를 가는 시간, 일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본인이 출장을 다니는 시간을 빼고나니, 참으로 부부의 시간이 적어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2005년부터는 학교 공부에, 일에, 지친다고 작은 시간이 주어질 때 마다 남 상0씨라는 친구를 만나기 시작하였고, 스트레스를 푼다고 밤 12시가 넘어서 들어오기가 잦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2005년 8월에 처음 부부싸움이란 걸 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고집스러운 그녀의 성격과 참으로 이기적인 제가 부딪히게 된것이죠. 화해를 하고 그녀도 조심한다고 하고 나또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난 달까지 그래왔듯이 그녀는 아침 새벽6시면 학교던 어디던 나갔고, 저녁 7시에서 9시 통역이 있다며, 더 늦은 밤 친구와 약속이 있다며,
밤 11시또는 새벽 2시, 2005년 크리스마스 날 밤 12시. 2005년 12월 31일 밤 10.
이것이 그녀의 평상 토요일까지의 생활이었고, 일요일 아침 7시면 교회에 가서 오후 4시~5시에 오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참다못해 올해 2006년 1월 설 명절 다음날에 싸움이 시작되었고, 일부러 일때문이라고 제가 씨엠립에 가있었지만, 그녀의 생활은 여전히 새벽 2시 귀가 아니면 친구인 남 상0씨 집에서 아니면 다른 친구집에서 외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되묻기만하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하고 “ 사람미행하게 하지. xx놈아! 넌 미친놈이야! 정신병원부터 가봐 개새끼야.” 너무도 많이 이런 말을 들어 일부러 스피커폰으로 옆에 있었던 강 경희를 아는 분인 권 국0사장에게 들려도 주었습니다. 너무 기가막혀 저도 막말을하고 씨엠립에서 내려와 프놈펜 집으로 왔을 땐 이미 다른 곳으로 짐을 싸서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이런 싸움끝에 화해를 하고 다시 시작한 생활은 참으로 행복하다 느낄정도였습니다. 그녀또한 반성을 한다 약속을 했고, 그녀 또한 술 취해서 늦게 들어온다 하지 않았고, 그럴때는 제게 허락을 받는다고도 하였고, 남편이 좋아하지 않는 남 상0 친구와 김 동0 친구도 조심한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고마웠고 그간의 모든 아픈 이야기를 준 것이 너무도 미안해 저 또한 더더욱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더중 그녀는 또다시 3월 말 수상의 공식한국방문에 일부 통역일을 KTC 공장으로부터 의뢰 받아 청와대를 갔었다는 자랑을 했고, 그것이 가장 소중한 추억이라 제게 이야기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후 또 다시 지난 5월부터 그녀는 예전의 생활로 되돌아가고 아니 더욱더 심해진 것인지? 바빠진것인지? 수없이 부부관계를 요쳥하였지만,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외면당하기만 하였습니다. 심지어 7월 12일 결혼기념일에 제가 서울에서 중요한 손님이 있지만, 결혼기념일을 자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더니 일부터 잘하라고 하기에 저를 위해 이해해주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오히려 그녀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가라오케에서 즐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없으니 그랬겠지하고 이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후 가정의 시간을 가져달라고 요쳥을 자주하였고, 그런 친구보다 결혼을 한 친구를 사귀는 것을 권장도 수 없이 하였지만, 언제나 그녀의 말은 “ 왜 자꾸 나를 가둘려고 해! “ 사실데로 이야기했습니다. 네 친구 남 상0라는 친구는 싱글이라 자기맘데로 이 친구 저 남자를 만나고 새벽까지 다니던 상관없지만 당신은 가정을 꾸린 사람이라고 그런데도 대답은 “ 자기 자신도 안다고 과거의 물란한 남자관계, 안좋은 생활습관 등등 하지만 나는 좋은 것만 가지고 친구를 하겠다고하면서, 만약 자기친구들과의 관계를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남편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겠다는 것이 그녀의 대답이었습니다. 이것이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저는 더더욱 일찍 집에 들어가려 노력했고, 출장이 있을 때 같이 가자고도 제의했지만 매번 일 때문이라고 거절 당했습니다.
2006년 6월 그녀가 대학원을 마치면 학교수업 시간이 없으니, 가정에 할애할 시간이 있겠지 나아지겠지 기대를 했던 것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오히려 제게 몇 개월 서로 따로 떨어져 살면서 서로 생각하자고 하기에 문제가 있냐고 했더니 예전에 싸울 때 생각이 되새겨져 힘들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러면 영영헤어지니깐 내가 시엠립에 새로 시작하는 프로젝트도 있고, 엑스포도 있으니 많은 시간을 가지라고 하구 씨엠립엘 자주 갔다왔다 하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해변 휴양도시를 간다고 하고, 베트남도 간다고 한다해서 모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모든게 자기가 조심하겠다고 했던 친구들과의 여행이었습니다. 그녀는 통역을 전문으로 하기에 같은 가정주부의 지인도 많이 알았고, 학원을 운영하기에 우리가 일반적인 관념의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학생도 너무 많이 알고 있었지만, 오로지 다른 환경의 친구를 사귈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2006년 10월7일 씨엠립에서 엑스포 관계일을 하던 나는 추석날 아무리 일이 중요해도 가정이 우선이기에 프놈펜 집으로 간다고하고 전날 전화를 하면서 시간은 어찌될지 모른다고 비행기가 없으니 차로 내려간다고 전화를 했더니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프놈펜 근처쯤 도착을하니 저녁 7시쯤 전화를 하니 선약이 있다고 잠시 참석한 후 9시쯤 들어온다고 하길래 그럼 나도 9시까지 저녁을 다른 사람과 먹고 같이 들어가던지 추석날이니 같이 보내자 했습니다. 좋다고 하더군요. 9시가 되어 전화를 했더니 친구의 친구생일인데 케익만 자르고 집에 갈 테니 먼저 들어가라더군요.그래서 내가 그리가겠다고 하니 그럴 필요없다고 하고 그때서야 남 상0씨 친구의 친구생일이라 더군요. 야속한 마음을 금하지 못했지만 집으로 왔습니다. 지난 6년간 언제나 처럼 문을 열고 불을 켜고… 밤 11시가 가까워지는데도 들어오질 않기에 전화를 해서 오늘이 추석인지는 아느냐 했더니, “왜 나를 자꾸 가두려고만 해” 하고 알았다고 하더군요. 결국 전화 한통없이 술이 얼큰이 취해서 새벽 2시 반이 넘어서야 들어와서는 입맞춤을 하고 씻으러가더군요.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 또한 변명도 하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10월 8일 아무말도 없었고, 그날 저녁도 밤 9시가 넘어서야 들어와 아무말이 없길래 제가 그녀의 서재방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10월 9일 그날도 제가 먼저 집에 들어와있는데 그녀는 남 상0씨와 저녁 약속이 있다고 하더군요. 결국 밤 11시 40분이 넘어서야 들어왔고, 난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너무한거 아니냐는 말에 그녀는 아무대답도 없었습니다. 난 머리도 아프고 어미님도 오늘 내일 돌아가실지 모르니 그래서 최근 몇 개월 잠을 제대로 못 이루니, 먼저 자라고 하면서 제가 가진 전화번호를 전화기에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전화기 만지지 말고 자라. 나 먼저 잔다.” 그러던 중 어느새 새벽 2시가 되었고, 내 전화기의 기능이 안되어 아내의 전화기로 기능을 확인하던 중 아내의 전화기 안에 메시지를 보았습니다. 아니 이게 웬일! 오늘과 어제 그저께의 일정 중 내게 이야기했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습니다. 너무너무 화가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중 아내가 눈을 떠서 내게 “ 안자고 뭐하니?” 하는 말에 “ 내가 내 전화기 문제를 확인 하려다 당신 전화기를 봤는데 이 시간에 물어볼건 아닌데 도대체 당신 오늘부터 엊그저께 까지 무슨일이 있었던 거니?” 그녀는 버럭 화를 내며 “네가 남의 전화를 가지고 왜 지랄이야! “ 내가 정중히 물었고, 당신은 지금 내가 집에 있는 동안 일반 정상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했던 것에 전혀 언급이 없었고, 지금에 와서 남이라고 하는데 지난 6년간 당신한테 하지 말라고 말한적 있었어? 지난 6년간 당신 전화를 확인한적 있었어? “ 아무말이 없었습니다. 나 또한 더 할말이 없어 내 짐 모두를 챙기는데 여행가방 4개가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회사로 가서 차를 가지고와 가방을 옮겨싣는 동안 그녀도 나도 한 마디 말이 없었고, 저는 차를 몰아 꼼퐁참까지 가는 동안 수없이 생각을 하다 다시 돌아왔고, (중간에 잠을 잦기에) 저녁 5시부터 집에서 기다리면 무슨 말이 있을 법하여 11시 넘어서까지 기다리다 잠시 들었기에 그녀가 집을 들어왔는지 조차 알수 없었고, 나중에 알았는데 들어왔다고는 하더군요. 집에 들어와서 제가 있는 걸 보았는데도 아무말 없이 잠을 자고 아침에 사라졌다 생각을 하니 더욱더 화가 나더군요. 그래서 그때부터 그녀의 지난 몇 달간의 행적을 파악하기 시작했고, 내가 출장가 있는 동안에는 집에 거의 밤 11시 이후 그리고 제가 프놈펜에 있을때에도 통역이 있을때를 제외하고는 오전 수업이 끝나고 10시~11시 이후부터 오후 2~3시까지는 친구인 남 상0 Plam place 아파트에서 시간을 보냈고, 수업이 끝난 밤 7시 30분 이후 다시 그녀의 아파트에서 그녀의 운전수를 퇴근 시켰기에 그 후는 무엇을 했는지? 알수 없다고 그녀의 운전수가 그러더군요. 뿐만 아니라 지난 6일 추석날 밤 새벽 2시 30분에 들어오던 날도 남 상0라는 친구 그리고 그녀의 친구인 남자 몇 명이서 같이 가라오케에 있었다고 나중에 아내가 이야기 하더군요. 참으로 기가막히고 참담할 뿐이었습니다.
10월 11일. 일전에 이미 주캄보디아 한국 대사관의 국정원 장 00 참사님이 12일 오전, 오후 대통령경호실에서 선발대가 오는데 씨엠립에서 통역을 제게 부탁한다는 약속이 있었기에 씨엠립으로 출발을 했고, 출발을 하면서 “ 당신이 시간을 달라고히니 우리서로 생각을 해보자.” 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씨엠립에 도착하여 제가 아내를 처음봤을 때부터 같이 있었던 김 동0 친구에게 부탁하여 도대체 내가 무엇이 문제인지? 그녀가 내게 뭐가 불만인지? 중재요청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 그 친구와 그녀가 만났고, 저는 그 친구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를 모두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던 중 그 친구옆에서 그녀의 울부짖음 소리와 함께 “ 야 씹쎄끼야 내가 창녀야! 너 정신병원부터 먼저 가봐.” 라고 들리는 소리뿐이었습니다.
그 이후 시간을 주기위해 전화를 하지않았습니다. 다음날 대사관의 장 00 참사님과 대통령 경호실의 천 흥0 팀장님, 말레이시아에서 오셨다는 김 00 서기관님과 같이 씨엠립 경찰청에서 논의가 있었고, 저녁시간 막 도착하신 청와대 김 00본부장님과 우리 일행분들은 캄보디아 사회안전담당 3성장군인 돈 00 장군과 만찬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중 대사관의 장 00 참사님께서 제게 웃으시면서, “ 정사장! 오 00 참사가 그러는데 정사장은 껍데기고 마누라는 캄보디아어를 잘하니 잘 알아두라고 하던데… 정사장도 캄보디아어를 잘하는 것 같아! “ 참으로 참담한 기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다른 한 사람에게 껍떼기로 보여지다니… 한국을 대표하는 대사관 직원에게 이런 말을 듣기위해 내 꿈인 민간외교역할을 하자는게 인생의 목표이었는지? 어째던 엑스포 준비로 씨엠립에서 시간을 보내고 내마음도 가라앉았고 2주가 지났고, 아내에게 전화하여 24일에 프놈펜에 내려간다하였고, 집으로 가지않고 호텔로 간다고하니 집으로 오라고하여 뭔가 변화가 있는듯 하엿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아내의 모든 물건들, 심지어 가구까지 반으로 나뉘어 아내의 서재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참으로 황당하더군요. 그녀는 그날도 몇 시에 집에 들어왔는지 지금도 알수가 없습니다.
다음 날 10월 25일.사무실에서 이야기를 하자고 모처럼 그녀에게 전화가 와서 너무도 기뻤습니다. 그런데 와서는 하는말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것이기에 난 이런저런 것에 의문이 있으니 설명을 해주면 나도 생각을 해서 결정하겠다하니, 하나는 이야기 하더군요 집에서 담배도 피우냐는 말에 내가 피웠던지! 누가와서 피웠던지 맘데로 생각하라고. 그런게 이 마당에 뭐가 중요한데? 당신 의처증있어? 아니면 미친거 아니야? 그러지 말고 헤어지자 하는 것입니다. 그말을 듣자마자 벌컥 화가가 나서 “ 너 이렇게 해서 남 상0와 같은 생활을 살고 싶은게 목표라 지금까지 나한테 그런 행동했던 거지?“ 그말이 끝나자 마자 그녀는 벌떡일어서 나가며 “ 넌 미친놈이야 “ 하면서 모든 직원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무실 정문 유리문을 발로차 부수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날 저녁 집에 들어와 용변을 보고 화장지를 찾는데 한장의 화장지도, 샤워후 수건도 없는 것이 집이더군요.
그날 저녁 전화가 와서 꼼퐁썸 해변도시에 가서 혼자쉬면서 생각 좀 하겠다고 하길래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고민중에 밤 11시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제 운전수를 불렀고, 운전수에게 아내가 반성하는 것 같은데, 꼼퐁섬에 대리러 가야한다고, 그래서 어디에 있는 지 확인을 하려고 전화를 했더니 휴대폰이 꺼져 있었고, 속카 호텔에 확인을 하니 아내의 이름으로 두 아가씨가 입실 했다고 하더군요. 연결을 해서 수화기를 들기에 아무말 않고 있으니 둘이서 너무나 크게 웃으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수화기를 통해 들렸고, 또 남 상0씨 였습니다. “ 나야 또 남 상0하고 같이 있니? 아니면 남자니? 했더니, “그래 상미야!’’ 그러고 한참동안 말이 없길래 “ 당신 정말해도 너무한다. 개도 그만큼이면 알만한데 넌 개만도 못한년 이야.”라고 전화를 제가 끊었습니다. 잠시 후 그녀의 전화가 왔고, “ 난 분명 당신한테 꼼퐁쏨에 쉬러 간다고 이야기까지 했는데 왜 또 전화해서 확인하고 지랄이야!” 난 당신이 꼼퐁성가서 생각 좀 하고 뒤돌아본다고 하길래 내가 내려가서 이야기하고 화해할려고 했다고 했더니, 그녀는 오직 “내가 쉬러간다 했지 언제 생각하고 뒤돌아본다고 했어!’’ 그래서 그년하고있는게 그렇게 즐거워서 매일 그년 집에가고 거기까지 같냐고 했더니, “ 넌 미쳤어 정신병원에나 가봐라.” 하고 전화를 끊었고, 더 이상 통화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10월 26일. 잠을 이룬척, 못 이룬척 하다가 오전부터 마음을 달래고 싶어 비디오 테이프를 잔뜩빌려다 놓고 비디오를 보던 중, 오후에 전화가 왔는지 했는지 모르지만 통화가 되어 어쟀으면 좋겠냐고 하길래 제 주위 많은 사람들의 권고데로 비록 아이가 없어 걱정은 되지만 그녀와 멀리 떨어져 있어봄이 좋다고해서 서로 그렇게 하는게 좋으니 현실상 현재 내가 떠날수는 없고 서울로 당신이 떠나 있으라 했습니다. 알았다고 했고 그녀가 가정부에 짐을 챙기라고 전화를 한듯하여, 가정부에 의해 짐이 챙겨지고 있었고 옷가방만 6개가 거실에 있었고, 책을 싸기위해 박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던중 다시 전화가 와서 누군가 짐을 가지러 갈거라고 하였습니다. 그말에 울컥 화가 났습니다. 난 적어도 그녀가 짐을 가지러 갈 테니 버리지는 말아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러면 그녀가 집에 들어올 테니 만나서 싸우다 보면 해결책이 있겠지! 기대를 했건만 전혀 예상밖의 소리를 그녀로부터 들었고, 화가나서 짐을 꾸리던 가정부를 퇴근하라고 하고 다시 비디오를 보며 맘을 진정시키고 있었습니다. 헌데 그동안 항상 우리들의 문제 중간에 전달자로 있었던 김 동0씨로부터 서울에서 전화가 와서 어떻게 되어가냐고 하길래 그간의 상황들을 이야기했더니 자기가 지난달 싸움 직후 만나본 결과 그녀가 “ 왜 결혼할 때 말리지 않았냐고” 하더라면서 이미 마음이 떠난 것 같으니 정리하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를 해서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김 동0한테 전화를 받았는데 당신 그런말을 한적이 있냐고 했더니 금새 그런말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럼 그게 진심인지 다시 몇 번을 재차 그녀에게 지금도 진실이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안하더군요.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는 서울에 있는 장인어른께 전화를 하여 강 경희가 도대체 이런 행동과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요 한번 통화를 해보세요 그리고 전화를 제게 주세요 했습니다. 그러나서 생각을 하니 지금까지의 만남, 결혼, 생활 모두가 거짓이었다고 생각이 들고, 너무 너무 화가 치밀었고, 참을 수가 없어 다시 전화를 걸어, “너 프놈펜에 올라오면 내가 무슨 짖할지 모르니 차라리 도망가던 거기서 없어지던지 죽어버려.’’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운전수를 불러 이런 이야기를 하고 저 여자의 짐이 너무 많아 버릴 수도 없으니 휘발유를 사다가 모든 물건을 못쓰게 할 테니 사오라고 하였더니 그것만은 참으라 운전수가 그러더군요. 그리고는 운전수는 돌아갔고 그러는 동안 그녀에게서 전화가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 화가났고, 전화조차를 기다린 내가 너무도 한심해서 전화를 끄고, 그녀의 물건을 못쓰게 하려고 서재에 있는 그녀의 책을 몇 개 찢어버려도 화가 풀리지 않았고, 옷을 몇 개를 찢어도 화가 잠재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앞에 있는 거리 주유소에서 2리터 피티병에 있는 휘발유를 사다가 그녀의 옷에다 뿌리고 책에다 뿌렸습니다. 그래도 미련이 있었던지 옷도 입지 않는 가방에만 , 책도 그녀의 서류가 아닌 일반소설, 회화집에만 뿌렸습니다. 그러고서도 휘발유가 날아가게 유리창은 모두 열었습니다. 그런 후 마음을 달래며 비디오를 보고 있는데 멀리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야 씨와 그녀의 친구 김 화0이 있었고, 주위사람들 등 경찰도 있었고, 그 일로 방화예상이 되어 경찰서에서 진술을 하고 옷을 챙겨 임페리얼 호텔로 옮겼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의 친구인 김 화0씨의 말에 의하면 그녀도 그 시간대에 꼼퐁섬의 속하 호텔에서 약과 술을 섞어 먹고 정신이 없는데, 만약 무슨일이 생기면 보호자인 남편이 어떻게 해야한다고 하길래. “맘데로 하라고 하였더니’’ 김 화0씨 왈, “당신은 인간도 아니라는 말과 손짓을 하더군요. “ 지금도 그 모멸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아무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데 또한 그때도 다른 남자 친구도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미칠만큼 화가 나더군요.
10월 27일.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늦게서야 잠이 들어 늦게 일어나니 아마 오후쯤 직원에게 전화를 했더니 신문에 어제의 나에대한 사건이 사진과 함께 실렸다고 하더군요. 제가 카지노에 다녀서 아내가 집을 나간데 비관해서 방화를 했다는 신문과 아내가 바람을 피워 남편의 질투로 방화를 했다는 신문 기사 내용이었습니다. 지난 6년간 제가 카지노에 있었던 걸 보신분이 있으면 말씀하여 주십시오. 아마 그녀가 이런 거짓 정보를 신문사에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실렸을지 지금도 모르는 일입니다. 참으로 모든 인생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어떻게 제 얼굴을 들고 다른 사람을 보아야할지! 지난 10년의 모든 열정이 한번에 망가지는 듯한 모멸감이었습니다.
10월 28일. 그녀는 이미 28일에 친구를 통해 자기짐을 집에서 빼내어 다시 남 상0 친구와 김 화0 친구집에 옮겨놓고, 30일부터 있는 방송코디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전화를 해서 서울로 떠난다고 하지 않았냐고 했더니, “니가 뭔데 나를 오라가라떠나라해.” 프놈펜에 올라와서 이야기를 하는게 어떻겠냐고 말 할줄 알았던 예상과는 전혀 빗나간 그녀의 말과 행동에 너무도 다시 화가났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6년간을 묵묵히 바라보며, 언제나 가정의 아내로서 역할을 조금이래도 할애하는 쪽으로 돌아올지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오로지 그녀에게는 그녀의 일과 그녀의 친구밖에 없다는 생각에 버려진 우리 가정과 남편으로서의 모멸감과 치욕에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10월 29일. 그녀의 일을 도우던 우리회사 직원에 전체에 강 경희가 진행하는 일에 도움을 중단을 명했고, 그녀에게 전화하여 네가 최소한의 양심과 생각이 있다면 신문기사에 난 내용에 대해 물어나 보던지? 아니면 프놈펜에 올라와서 한번 만나자고나 해야 할 거 아니냐 했더니, “난 내일이 중요해서 일 할 테니까 넌 니가 알아서 해.” 라고 하면서 지금 여권이 없으니 11월 8일까지 일을 하고 11일쯤에 서울로 떠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왜 여권이 없어서 못떠나냐고 했더니 대답은 없고 화를 내면서 “떠나면 될 것 아냐 신발놈아! 왜 사람을 못잡아먹어서 지랄이야!” 하는 말을 듣고 그럼 네가 준비하는 행사가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면 알것이니, 알아서 대처해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더욱더 화가난 것은 29일 오후에 자기 일 때문에 제가 묶는 임페리얼 호텔에 와서까지 조차 제게 전화 한통도 아니면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는 것도 없이 몰래 다시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황당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날 밤 그녀의 친구인 김 화0씨가 찾아와 강 경희가 남편이 겁나서 일을 못하니 제발 자기를 알았던 인연으로 일을 할수 있게 해달라고 제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동안의 모든 이야기를 강 경희의 남편으로서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도 자기 친구이지만 그정도 인지는 몰랐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도 자기가 하기엔 벅찬 일이니 부탁한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헤어진 후 김 화0씨에게 전화를 했고, 그간의 우리 부부와 남편으로서의 이야기를 새벽 3시 늦도록 전화로 김 화0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고, 내일(30일) 강 경희가 이번 11월 8일 일을 마치고 떠난다고 약속을 한다면, 난 31일 씨엠립으로 올라가 아내가 편히 일할수 있게 하겠다고 동의를 할 테니 이번 만큼은 진실이라면 나도 그일을 마칠수 있도록 직원들에게 다시 알리겠다고 하였습니다. 다음날 전화를 했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고, 그래서 난 그녀가 일을 하는데 부담이 될지 싶어 왜냐하면 그녀의 손님들이 묶는데가 임페리얼 호텔이어서 그곳을 체킹아웃하고 프놈펜 호텔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30일 밤부터 그녀는 다시 일을 하였고, 30일 그날 밤도 내가 그렇게 했으면 제가 이야기를 좀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더니 일부터 하고, 나중에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31일 밤 오늘이 10월의 마지막 밤이란 노래의 이야기도 하면서, 나도 마음에서 많이 정리가 되었으니 쿨하게 헤어지던 아니면 난 지금 너무 힘들어 차라리 집에서 싸운다해도 다시 시작하는게 어떻겠냐고 물어도 보았죠. 그래서 마지막으로 만나서 이야기하는게 어떻겠냐고 했더니, 예전에 부부관계를 요청했다가 거절할때와 같이 아침 일찍 일을 나가야 한다고 하면서 단호히 싫다고 하더군요. 참으로 속상했지만 시원이 보내주기로 하였으니 어찌하겠습니까? 10월의 마지막 밤을 그렇게 뜬 눈으로 보내고, 아침 8시쯤 씨엠립을 올라가기위해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 좋은 아침 오늘 씨엠립으로 올라가면 당신이 서울로 떠나고 난 후 프놈펜으로 올텐데 잘가고.. 잘 생각해 보고…” 메시지를 보내지마자 바로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왔습니다. “왜 내가 여기를 떠나야 하는데? 너무도 황당하여 이 메시지를 친구인 김 화0씨에게 다시 보내주었고 제가 전화를 해서 강 경희에게 이 메시지 당신이 보낸게 맞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엊그제 나와 당신과 당신 친구와 했던 약속(11월 8일까지 이번 일만 마치고 서울로 떠나기로 했던 )은 뭐냐고 물었더니, “나는 떠날 생각이 없는데 당신의 강압에 의해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다음 일을 염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미 11월 8일 정준호 밥차 방송코디를 마치고 11월 9일부터 또 다른 인터뷰 일이 13일까지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고, 13일 이후 엑스포 관련 통역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남편과 가족은 어떻던 이야기를 하자는데 피하고 일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했더니, 그녀가 말하기를, “당신한테 가정이 그렇게 중요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정말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쌍욕을 그녀에게 퍼붇고 현장에 나가있는 직원들을 철수하라 명했고, 모든 연락을 단절하라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프놈펜 호텔에서 그녀의 손님들이 묶는 임페리얼 호텔로 옮겨서 기다렸고, 11월 1일 그 이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고, 전화를 끄고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 이후 11월 4일. 그녀의 친구인 김 화0씨로부터 제게 메시지가 왔습니다. 당신의 아내 강 경희씨가 서울에 있다고, 그 사실을 알고 프놈펜공항에서 떠나면서 조차 내개 떠난다고 원망아닌,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은 이미 그녀와 난 모든게 그녀의 마음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전 미련스럽게도 그녀에게 지금도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갖고 싶었습니다. 11월 1일 그녀가 사라진 이 후 여권이 없다고 했으니 대사관에 임시 증명서를 받아서 나간다고 예전에 그랬던 적이 있으니, 대사관에도 확인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11월2일 공항 출입국 관리소 아는 친구들을 통해 여권번호와 이름을 알려주고 출국심사가 있을 때 연락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공항에 달려가서래도 다시 시작하자고 애원을 해보고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건 소설의 한 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서울로 전화를 한 나는 그녀의 원망을 들었습니다. 니가 떠나라고 해서 캄보디아를 떠나면서 당신과 가족과 10년의 자기의 열정과 미래의 행복모두를 버렸으니 다시는 뭐라뭐라 인생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0.01%라도 캄보디아에 돌아올 가능성이 없냐고? 몇 번이나 재차 물을때마다 이미 캄보디아를 떠나기전 제게 만약 캄보디아를 떠나면 다시는돌아오지 않는다 하였는데도 당신이 떠나라 했으니 이젠 더 이상 아무 미련도 없다고, 그래서 그때서야 왜 내가 당신을 서울로 떠나라 했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너무 다른 모든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어 난 가족과 남편으로서써 수없이 모멸감과 치욕을 느꼈기에 당신이 서울에 있다보면 당신이 다시 예전처럼 변할 수도, 아니면 내가 너무 그리워 애타게 애원할 수도, 그것도 아니면 이렇게 헤어져 각자의 삶을 살수도 있지 않냐고 그동안 당신이 여러 번 내게 이야기 한 것이 6개월 이래도 떨어졌 있자고 하지 않았냐고… 했더니, 그녀가 내게 한 말을 이미 우린 너무 많은 것을 지나왔고, 난 이미 캄보디아를 떠나며 당신도, 일도, 나의 미래도 모두 버렸다 하더군요. 그 소리를 들은 후 저조차도 서서히 마음에서 그녀를 지우는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 아마도 11월 5일 부터인지?
제가 그녀의 한국 휴대폰에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자세히 기억은 나는건 아니지만 처음은 아주 또렷합니다. “ 당신이 단 0.01%의 가능성도 캄보디아에 돌아올 확률이 없다고, 여러 번 확인을 내게 시켜주니 이젠 아마도 당신을 내게서 떠나 보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지금 이순간까지도 너무나 사랑하는 마음을 배신당했다는 배신감과 나의 지난 10년의 행복과 앞으로의 행복 모두를 망쳐버렸다는 강 경희에 대한 증오는 지울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무자비한 욕설도 할 것이고, 때로는 원망도, 증오도, 때로는 당신이 그리워 애타게 애원도 , 때로는 지난 행복에 그리워 후회도 할 것이다. 내가 메시지를 남기고 싶을 때마다 남길 테니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이 들면 아에 지워버리고, 듣고 싶다면 듣고 내게 증오를 품는 전화를 하던 그건 당신의 의사이다. 하지만, 어쨌던 001로 찍히는 전화는 받지 않으면 자동 음성메세지로 바뀌니깐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첫 메시지를 남긴 후 생각이 날때마다 아무말이나 아무욕이나 아무 생활이나 메시지를 남겼다. 아마도 11월 5일부터 12일까지 일 것이다. 그동안 그녀는 메시지를 아예 무시해서인지? 지웠는지?, 내게 메시지를 남기지 말라는 전화도 없었다.
12일 아침. 나도 이미 마음이 많이 가라앉아 있었고, 많은 일들이 산재해 있었기에 우선 짐을 정리해야 했다. 아파트를 찾던 중 생각이 난 것이 남 상0씨가 사는 Plam Place 아프트였다. 아마 아내가 다시 캄보디아에 온다면 가장먼저 그곳으로 올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집보다 더 애착을 가졌던 곳이니 그곳에서 그녀를 지워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파트에 도착을 하니 갑자기 아내의 발자국과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여 메시지를 남기려고 전화를 했다. 그런데 그녀가 전화를 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아파트에 살려고 계약을 하러 왔다고 했다.그랬더니 그 이후로 수없이 전화가 걸려와서, “미쳤구나” 등 아마도 수십통을 받았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자기 친구인 남 상0씨에게 무슨 일을 저지른다 걱정이 되었나 보다. 기억나는 건 한 시간 후 우리 어머님, 아버님을 만나러 간다는 것이다. 시골에서 아파서 거동을 못하는데 만나러 간다면, 시댁까지 간다는게 의심서러워 큰 형수님께 전화를 했더니 그런 전화도 없었고, 부모님은 시골에 계신다하였다. 그래서 그간의 일을 모두 큰 형수에게 이야기 하였고, 아마 거짓말을 했으니 조금 있으면 아내가 전화할거라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일주일동안 전화 한통 없던 사람이 조금 후 강 경희는 잽싸게 내게 전화를 해서, 우리 형수를 만날 것이라 했다. 조금 전 우리 부모님을 만나러 간다는 거짓말은 뭐고 왜 일주일간 연락도 없다가 우리 형수를 만나냐고 했더니, 대답업이 끊어버렸다.
13일 아침. 큰 형수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내가 반 미쳤다고 했단다. 하지만 형수의 말대로 라면 들어가서 이야기를 잘 할 것이라라고 전해주었다. 그리고 오후 5시쯤 평소의 싸움의 중간에 있었던 김 동0친구에게서 전화가 와 나를 만나자는 것이다. 더 이상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 안 만난다고 하였다. 더 이상 상기하여 마음을 다치기 싫었다.
그러고 잠시 눈을 붙인동안 아마 오후 6시쯤 아내인 강 경희가 내게 전화를 했다. 받아서 자던 중이니 나중에 내가 전화를 한다고 하고 끊었다. 그러고 잠을 깬 시간이 아마 13일 밤 8시쯤 내가 서울의 아내에게 전화를 하여 왜 했냐고 물으니 할말이 있었는데 없다고 했다. 그래서 끊었다. 근데 바로 다시 전화가와서 자기가 캄보디아에 들어갈 테니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이 몇 일전 내게 했던 모든 이야기들 때문에 난 이미 당신을 잊어가는 중이고 당신의 메시지에 할말 못할말을 남겼기에 너무 큰 선을 넘었으니, 당신이 이야기하던데로 시간을 갖고 그리고 어차피 엑스포 준비땜에 와도 만날수도 없고, 이번 달에 서울을 갈 것 같으니 그 때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내가 보낸 메시지는 어른들게 들려주지도 않았고, 만나서 이야기 하자고만 한다. 단 2시간이면 된다고 2시간이면 전화로도 충분하니 이야기를 하라했더니 만나서 하자고만 하였다. 그래서 내가 당신이 떠나가면서 수십번 만나서 이야기 하자고 할때는 무슨 생각이었고, 지금은 왜 서로 반대가 되었는데, 2시간 이야기 할 것을 굳이 비행기 돈들여 온다는 것인지를 모르겠다하고 끊었다. 그런 후 밤 10쯤 김 동0시가 호텔로 무작정 찾아왔다. 그래서 내게 묻는게 왜 서울로 무작정 떠나라 했냐 하기에 앞에 이야기한 내용을 이야기했고 하나더 난 아내 강 경희가 무섭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피식 웃는다. “ 아내인 강 경희는 자기의 목표를 위해 나를 정신병자로 만들고도 자기의 목표를 취할 사람이라고 했다.
만약 캄보디아어를 못하면 상관이 없지만, 가족과 자기의 미래 모두를 버리고 쫒아가는 것은 어떤 무엇에 대한 사랑때문밖에 없는게 인간이 아니냐! 다른 남자를 사랑하던, 하느님을 사랑하던, 약을 사랑하던, 아니면 남 상0 친구를 사랑하던, 일 때문에 가족과 자기의 미래를 버리는 사람이있는가? 오직 사랑 때문인데 어떤 사랑인지 모르겠고, 그 사랑을 따라 이미 행동으로 보여준 사람인데 어떤 이유를 붙여서든 어떤 방법으로던 그녀의 첫 장애물이 남편인 내가 아닌가 했더니 수긍을 하면서, 김 동0씨가 실은 오후 3시쯤 강 경0씨가 전화와서 내게 전해달라 하면서 “어제 형수를 만나 이야기를 했는데 어쩌면 내가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올 기대를 할지 모르는데 정 동춘씨에게 기대하지 말라고 전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 내가 이미 김 동0 씨를 만나기 2시간전 강 경의와 통화를 했는데 그런 이야기는 아에 없었기에 몇 번을 재차 물었다. 근데 김 동0씨 이야기를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아내인 강 경희가 우리 형수를 만난 것을 아는 사람은 나, 아내인 강 경희, 큰 형수, 큰 형 뿐인데… 바로 강 경희에게 서울로 전화를 해서 김 동0씨가 이런 이야기를 당신이 내게 전해달라고 했다는데 어찌된 것이냐 했더니, 강 경희는 모르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럼 김 동0이 어떻게 당신이 형수를 만난 사실을 아냐고 하니 그건 자기가 알빠 아니라고 한다. 그럼 김 동0한테 전화해서 확인한 후 김 동0씨한테 나한테 확인 전화를 해달라고 했더니 알았다고 했다. 그 이후 30분을 기다려도 전화가 없길래 김 동0씨에게 전화해서 강 경희 전화를 받았냐고 했더니, 그런적 없다고 했다. 그런후 다시 강 경희에게 전화를 하니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 이후로 14일,15일 아침까지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기에 이상하다 하여 강 경희의 대전친정으로 전화를 했더니 15일 아침. 아침먹고 전화를 가지고 나갔다고 한다. 너무도 이상하여 우선 캄보디아 현지 그녀의 전화를 했지만 꺼져있었다. 여행사에 승객명단을 확인하니 이미 14일 밤 아시아나로 프놈펜에 도착해 있었고, 14일 밤 들어온 비행기표는 이미 11월 3일 출발하면서 왕복 항공권을 사서 간 것 이었다. 그래도 믿기지 않아 친구인 공항책임자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 친구가 먼저 아무것도 모르고 이야기를 하는데 방금전 경호 경찰대에서 대한항공과 니 아내의 통역으로 여러명이 회의를 마쳤다는 것이다. 그 시간이 아마 오후 3시가 조금 지나서일 것이다. 갑자기 11월 3일 캄보디아를 떠나기전 일과 지난 1년간의 거짓말과 서울에 있는동안 했던 이야기들 모두가 거짓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흐리기 시작했고 눈물에 따라 분노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다시 여행사에 전화하여 강 경희 이름이나 김 화0 이름이 15일 오후이후 프놈펜에서 씨엠립으로 가는 항공편에 확인하니 두명 모두 15일 저녁 6시20분 비행기로 발권이 되어 있었다. 분명 출발전 집에서 가방을 싣고 갈것으로 예상하고 오후 4시쯤 김 화0집앞 멀리서 기다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30분후 여자 두명이 차에 타는 것이다.하지만 누구인지를 몰라 실수하면 안되니 공항으로 가서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차가 막히니 내차는 따라오라하고,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공항을 도착하니, 오후 5시가 조금 넘었다. 혹시나 하고 아내의 휴대폰을 걸었지만 그때까지 꺼져있었다. 그녀는 그시간까지 내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만약 진짜 공항에서 만나면 내가 무슨 짖을 할지 알수가 없어, 친구인 공항보안관계 책임자를 불러옆에두고, 그래도 안되겠고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지 확인을 하고 싶어 먼저 동승한 아내의 친구인 김 화0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10번정도를 했는데 받지 않기에 메시지를 보냈다. “만약 나한테 그녀가 잡히면 죽일지도 모른다고” 그러고 난 후 30분 이상이 지나서야 김 화0 친구만 차를 타고 공항에 도착하여 씨엠립으로 출발을 했고, 그 차를 확인하니 강 경희라고 씌여잔 빨간색 이름표와 14일 밤 아시아나 수화물표가 붙어있었다. 운전수에게 확인하니 그 가방을 오늘 12시쯤 남 상0 아파트에서 싣고 왔다는 것이다. 이건 뭔가… 어제 도착해서 또 하루밤을 그 여자 집에서 잦다는 것이 아닌가! 화가 치밀데로 치밀었고, 그 가방을 내 차에 옮겨 실었다. 그리고 그녀의 렌트가는 5시 40분쯤 시내로 가버렸고, 난 그녀가 씨엠립으로 다른 비행기편으로 갈 수있다고 생각하여 저녁 7시 20분 다른 비행기편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6시쯤 강 경희 그녀에게서 그제서야 전화를 이용하여 지금 어디있냐고 전화가 왔고, 난 그냥 끊었다. 또 전화가 왔다.그래서 “ 넌 인간도 아니라고 했다.’’ “인간의 행동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 도 끊었다. 그리고 공항을 나서는데이제는 자기전화로 전화가 와서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그래서 공항에서 7시쯤 출발하여 내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사무실에서 저녁 7시20분쯤 도착하여 그녀의 가방을 내 방에 놓고 기다리는데, 20여분이 지나도록 그녀가 오지 않았고, 전화를 했더니 신호는 가는데 받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대사관에의 박 영0 영사의전화가 걸려왔다.
“ 처음뵙겠습니다. 대사관의 박 영0 영사입니다. 초면에 죄송하지만 지금 강 경희씨 가방을 갖고 계시죠?”
“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 제 아내입니다.’’
“ 아무리 부부간의 일이래도 일단 가방을 본인 소유로 돌려주시죠?”
“이젠 대사관에서 부부관계까지 관장합니까? “
“아 그게 아니고 이번에 대통령이 방문하는데 강 경희씨가 중요한 일을 맡았는데 그 가방에 중요한 스케쥴 등 가방이 없으면,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를 할 수 없다고 합니다. “
“허허허…, 조금전 통화를 했고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했으니,와서 가방을 가져가겠죠.”
“만약 제가 말씀드린데로 하시지 않으면, 국가적행사의 범죄예방차원에서 국가중요행사를 앞두고, 조치를 취할수 있습니다. “
“여보세요. 박 영사님. 언제부터 부부관계 일을 대사관에서 관여했습니까? 지금 제게 협박하시는 겁니까? “
“아니 정 사장님 당신은 국민 아닙니까?”
“박 00 영사님 당신도 가족이 있으시죠? 가족이 우선입니까? 일이 우선입니까?”
“아 그런뜻은 아니고…”
전화문제로 끊겼고, 순간 예전에 예상하고 친구에게 이야기했던데로 그 여자는 이렇게 나를 정신병자로 만들어 구금이 되게하고, 본인 뜻데로 하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무서웠습니다. 그 상태에서 잡히면 아무도 모르게 조서데로 그녀가 늘상 정신병자라고 했던 것처럼 정신병원으로 증인도 없이 잡혀가는 것이었습니다. 무서워서 불도 못끄고, 사무실을 빠져 나와 사무실 근처 떨어진 곳에서 강 경희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고.. 다시 박 00 영사에게 전화를 해서 “아까는 미안했는데 전화가 끊겼습니다. 부부관계일은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내 아내는 한국에서 캄보디아를 다시 들어오지 않는다고 남편인 제게 엊그저께 이야기 햇는데 어젯밤에 들어와 있었고,어떤일을 하는지? 방금전도 사무실로 온다고하고 대신 박 00 영사님 전화만 오는군요.. 옆에 있으면 바꿔주세요? “
“ 아니 없는데요. “
“알겠습니다. “
그리고 다시 아내 강 경희에게 전화를 했더니 받더군요. 결국 3시간 후에 안 일이지만 이런 통화를 할 때 대사관에 있었다고 그녀가 내게 말을 했습니다.
“결국 니 각본데로 난 정신병자가 되어 끌려갈뻔했네 신발년아!.”
그러거도 살아남길 바라냐? 니가 박 00 영사한테 부탁했어?”
그러곤 무진장 아무욕이나 했던거 같다. 전화를 끊었고, 다시 그녀가 전화를 내게 걸었다. 만나자는 것이다.
“ 난 이젠 무서워서 싫다.”
“증인도 없이 잡혀가면 난 또라이 정신병자 밖에 안되니 못 만나겠다.
그녀 왈, “ 그럼 경찰서에서 만날까? 대사관에서 만날까? 이젠 당신의 말 아무것도 믿을 수 없도록 지난 1년간 보았고, 당신이 내게행동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 그러면서 난 지금의 이 모멸과 치욕을 너한테 돌려줄 것이다. 너는 너데로 살고, 나는 나데로 살자.”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중 또다시 전화가 또와서 호텔에서 증인들이 있는 상태에서 만나자고 한다. 그 대신 조금 전 처럼의 행동이면 너 정말 지옥에서도 용서 못할 년이다.
그리고 그녀가 내게 묻느다. “ 가방 어디 있는데?”
“다 태워버렸다. 조금 전 너의 행동이 괴씸해서… 부르고 싶은 사람 다 불러서 9시30분에 임페리얼 호텔에서 만나자. 나도 또다시 박 영0 영사가 잡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직원을 불렀고, 호텔 관계자에 부탁해 회의실에서 부부싸움에 원탁을 두고 4명이 앉았다. 세상에 이런 부부싸움이 있을까? 내가 죽고 싶은 심정뿐이다.
기억나는 건 별로 없다. 그녀의 말은 제발 “ 이년 ”자좀 빼달라는 것이고, 자기가 잘못을 했지만 추석날 남자들과 어울려 늦게 들어온 것 사실이다. 몇 일전 김 동0을 통해 전해 달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번 싸움에 정신병자야 정신병원에 가라는 이야기는 이번이 아니고 저번 싸움이란다. 캄보디아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수십번을 이야기 했었던 것은 안돌아 온다는게 아니고 돌아오면 당신과는 끝이지만 일은 여기서 할 것이다.
“그럼 가족, 남편은 버리고도 일을 하는게 맞느냐? ” 는 “ 그건 개인의사 ’’이다.
“조금전 왜 사무실에서 만나자고 해놓고 오지는 않고 박 영0 영사가 전화온건 뭐냐?”
“ 그건 난 모른다.’’
‘’ 그럼 한 시간전 내가 가방을 가져왔다는데 박 영사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
‘’ 그때 대사관에 있었는데 옆에서하는 이야기를 듣고 박 00 영사가 전화했나보다..’’
“ 그때 이야기 당시 가방이야기는 없었고, 그럼 당신은 사무실에서 만나자는게 아예 거짓말이 맞네? 그럼 넌 나와의 부부싸움 전하를 대사관에서 전화를 스피커 폰으로 했냐?”
“ 왜 그런걸 따지는데… 서울 있을 때 당신이 보낸 메시지를 아버님이 듣고 왜 아버님 가슴에 못을 박냐?”
“ 엊그저께 당신이 서울에서 내게 전화해서 이야기하자고 할 때 그 메시지를 어떻게 어른들게 들려주냐고 했다. 그것도 거짓말인가? 그리고 하하하 .. 넌 그럼 남편에 못박는건 뭐냐?”
“지난 6년간 단 한번이라도 내가 너한테 평상시 쌍소리한적 있냐? , 지난 6년간 단 한번 일하지 말라고 막은 적 있냐? , 지난 6년간 내가 니 메일 체킹하고, 당신 전화확인한적있냐?
참 오늘 메일 봤는데 돌아버리겠두만! 김 차장도 같이 봤는데 도대체 “신 호식”이란 놈이 누구이길래 그렇게 바로 당신이 서울에 간걸알고 “경희 친구”라고메일을 보내 부부싸움까지도 알고...’’
그녀는 여전히 “모르는 사람이다.”
“ 그리고 너 11월3일 이전 이후 수십 번도 강 경희 네년입으로 캄보디아에 돌아올 확률이 0.01%도 없다고 했고, 내가 “너없이는 살수 없으니 돌아와 달라고 할때도 이젠 소용없는 일이며, 난 이미 한국에 왔다고 했는데, 왜 돌아왔냐고..’’ 했더니 한국대사관에서 한국까지 전화와서 대통령 방문 당시 일을 해야한다고 사정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럼 내게 출발 전. 도착해서라도 전화를 해 줄수 있는게 아니냐 했더니…
“…..할려고 했는데….’’ “됐다 됐어’’
“우리 더 이상 이야기할 가치가 없는 것 같다. 넌 남편과 가족을 버리더라도 일을 하겠다했으며 지난 몇 달간 보여준 수 백번의 거짓말과 행동으로 난 다 보았다.”
그녀 왈 “이번 대사관 엑스포일은 안할거야!”
“ 그 거짓말을 믿으라구! 됐다. 됐어. 그만하자 “ 그리고 난 나와버렸고, 그녀는 여전히 자기 가방을 찾으러 내 호텔방까지 와서는 가방이 없다는 것을 알고 돌아가버렸다. 그리고 한참 후 가방에 뭐가 들었는지 진짜인지? 궁금해 전화를 했더니 끊고 꺼버린다. 너무 화가나서 다시 사무실로가서 가방을 열어보았다. 그녀의 옷 정장 몇 벌, 속옷, 화장품, 청바지, 사전 2개, 예전부터 하던 천주고 교본 번역, 드리이기, 수첩뿐이었다. 너무너무화가 났다. 박 영0 영사에게 대통령 통역 때문에 중요한 문서가 있다고 그런 거짓말만 안했어도… 모든게 거짓말…. 나머지는 다 찢어버렸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했었던 연설문 뭉치는 그 속에 또 중요한 문서가 있을지 모르니 그대로 다시 꾸겨 넣었다. 모든 게 거짓에 거짓말 , 거짓 행동 뿐이었다.(다른 사람에게 까지도…)
그시간 밤 1시. 그녀가 잠자고 있을 김 화0씨 아파트 계단에 앉아 수천만번도 되새기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증오하고, 미워하고, 마지막 한번만이라도 더 물어보고싶었다.몇 년을 기다려야 돌아올수 있는지? 16일 아침 9시까지 꺼져있는 전화를 수천번은 누리지 않았을까? 결국 거기서 자는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오토바이 택시에 막 타는데 그녀의 전화가 걸렸고,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주루룩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호텔로 돌아오는 내내 엉엉 울어버렸고, 몇 번이고 그녀에게서 전화는 왔지만 받지 않았다. 호텔방에서도 울음이 그치지않아 실컷 울고 나니 좀 풀리는 듯 했다. 이젠 돌이킬 수도 없는 나의 모든 사랑과 미래의 행복 모두가 사라진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녀는 내가 전화를 받으며 울음을 터트리면서 호텔에 왔던 시간 조금 후 가방을 찾으러 사무실 내방에 가서 가방을 가져갔단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여자를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는게 내 자신이 이해가 안된다. 지난 것은 지난 것이고, 어차피 그녀는 캄보디아에 와 있고, 대통령 일행 통역은 할 것이고, 차라리 내가 피해주는게 나을 듯 싶어, 16일 오후 그녀에게 씨엠립으로 가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이번 행사가 끝나면 당신이든 나든 여기를 떠나자고 할려고 전화를 했는데 “ 나 약에 취해서 아무것도 몰라 나중에 애기해” 그런 후 그녀에게 전화를 했지만, 그녀의 전화를 받는사람은 서울에서 온 친구라는 따른 여자였고, 16일 밤 늦게까지 일어날수 없고, 내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17일 이사짐을 대충정리하고 엑스포에 쓸 자료를 챙기고, 다시 전화를 그녀에게 걸었다. 어제 받았던 그 친구가 받는다. 여전이 못 일어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멀리서 수화기를 타고 그녀가 다른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음성이 들린다. 그래서전 남편이니 강 경희씨에게 물어나 보라고 했지만,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면서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그래도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
“ 너의 전화가 켜있음 또 내가 전화를 할거고, 화가 날때마다 메시지를 보낼거고, 그것조차도 너무나 내 자신에 처참한 짓일 듯 싶어 당신 전화를 단절 할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내 명의로 내가 마련해준 전화라 통신단절을 요청하고, 씨엠립으로 떠날 준비를 거의 마쳐갈쯤 아마 17일 저녁 7시쯤 캄보디아 사복 경찰 3명에게 임의동행되어 밤 11시 30분까지 조사 및 조서를 꾸몄다. 왜 이런 조사를 하냐고 했더니
“당신 아내가 강 경희씨 맞냐는 것이다.? “
“맞다”
“당신 아내가 당신이 자기를 죽이겠다고 메시지를 보냈기에 무서워서 신변보호요청을 하였다고 한다.”
“정말 그렇다면 요청서를 보여다오. 그래야 진실인지, 아닌지를 알 것 아니냐? 난 그녀에게 보낸적이 없다. 그녀의 친구 김 화0씨에게 만약 내가 그녀를 잡으면 어쩌면 죽일지도 모른다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메시지 속의 그녀가 그럼 누구라 생각하는가? 당신같으면 당신 아내에게 그럴 수 있는가? “
아무도 대답을 하지않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대충 11월달부터 정황을 일러주었고, 한국 대사관에서 시켰냐? 아님 수상 경호실인가? 아무도 대답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난 우선 한국대사관에 연락을 해야 하고, 당신들이 접수한 문서를 보여달라 했지만,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 대신 이 개인적인 질문인데 당신들의 아내가 앞에서 언급한데로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했더니, 결혼을 한 캄보디아 경찰 세명 모두가 벌써 그런 여자를 죽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럼 되었다.’’
모든걸 협조할 테니 맘데로 해라고 하였더니 그들도 안심하는 표정이다.
난 외국인이며 변호사를 선임하거나 대사관 직원하에서만 응답을 하겠다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했더니 조용하다. 뿐만 아니라 신변보호요청자가 내 아내인데 왜 요청자는 왜 사실을 확인한 기록이 없느냐? 또한 요청자 조차 외국인인데 내가 왜 내무부 형사국에 있어야 하는냐? 하고 인권유린으로 고발장을 쓴다면 어떻게 할거냐? 했더니 너무도 조용하다. 내가 웃고는 걱정마라 어떻게 하면 되는냐 했더니 너무도 친절히도 일러주고 자기들도 이러고 싶지 않지만 어쩔수가 없다고 한다. 그렇게 17일 밤을 내무부 현관 계단간이 침대에서 자고 18일 아침 10시쯤 다시 그들과 함께 프놈펜 공항 앞 내무부 산하 이민국 소속 사무실로 왔으며, 17일 밤과 똑 같은 질문과 대답을 하고 지문을 찍고 사무실에서 기다리는데 국장이란 사람이 모두 이야기 해 주었다. 아내의 신변보호요청문건으로 한국대사관에서 내무부로 전달되었으며, 대통령의 영부인 통역관으로서 양국의 행사일원인 아내가 부부싸움으로 이번 행사에 차질이 생기면, 양국의 안좋은 이미지가 되오니 대통령이 떠나는 날까지만 참아달라고 한다. 그래서 베트남이나, 태국이나, 서울에 가겠다고 하니 그것조차도 안된다고 한다 그럼 난 뭔가?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대통령 자리가 아닌가? 그럼 개인의 인권 6일정도는 아무 상관없다는 것인가?
11월 19일 12시 30분. 나를 대신하여 직원이 대사관에 공식 교민 신변보호 요청서를 보냈고, 유선상으로 박 영0 영사와 통화를 했다고 한다. 박 영0 영사의 말에 의하면 현재 대사관에 직원이 6명밖에 없고, 대통령이 오늘 도착하는데 바쁘니 인권에 문제만 없으면 대통령이 떠날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한다. 17일 임의동행후 통신의 자유와 감금되어 있는 상태가 인권에 문제가 없다는 것인가? 몇 일전 박 00 영사와 통화시 “ 당신은 국민이 아니냐고?”했던 영사가 어떻게 국민의 신변보호 요청에 이렇게 답할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의문이다. 그럼 나의 아내가 그 통역일을 하기위해 직접문서를 써 남편이란 사람을 구금하게 하고, 지금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인가? 몇 일전 마지막 만날을 때 직원과 친구들이 있는 앞에서 이일을 하지 않겠다고 했었던 아내입니다. 아니면 나의 아내 또한 나와 같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요을 당해서 남편을 구금해 달라는 요청서를 쓰게 되었을까요?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남편을 구금하면서까지 일을 하겠다는 아내를 어떻게 이해해야하고,어떤 다음 행동을 취해야하는 거죠?
또한 후자의 경우라면 아내의 행동을 강요한 것이 국가이익의 이름을 내세운 주캄 한국대사관일지? 대통령 안전을 염려한 대통령 경호실일지? 만약 그들이 상대라면 전 어떤 다음 행동을 해야하는 거죠?
앞에서 말했듯이 앙코르~경주세계문화엑스포를 만들기 위해 지난 4년간 동분서주했던 수많은 노력의 결과가 엑스포 방문을 위해 방캄한 대통령 일행단 통역을 담당하는 아내 강 경희를 보호하기 위해 전 지금 개막식이 열리고 있는 동안, 캄보디아 보호 감호소에 독방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엑스포를 탄생하게 하기위해 노력했던 지난 모든 시간의 제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이글을 쓰고 난 후의 나의 지난 10년 열정인 행복한 가정을 위한 것과, 20년 미래의 단란한 가족의 꿈을 어떻게 준비를 해야하는 건지? 참으로 암담할 뿐입니다.
네티즌 여러분의 많은 의견 도움을 앞의 메일 주소로 연락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지루한 개인의 심사를 끝까지 읽어 주신분들게 감사를 드립니다.
캄보디아에서 정 동춘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