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루가 오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24시간이라는 시간이. 시간이 간다는 것이 잔인하게만 느껴질 두 사람에게도 역시나 또 하루가 오고 있었다. 그렇게 헤어진 두 사람은 그 시간 이후부터 모든 시간이 멈춰버렸다. 더 이상 시간이 흐를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모르면 몰랐지. 사랑하지 않으면 안았지. 이미 알아버렸고 사랑해버린 사람이라 그런 사람과의 이별은 수현과 승우 모두에게 죽음과도 같았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두 사람. 어두운 방에서 밝은 방안이 될 때까지 숨만 쉬고 있을 뿐, 심장만 인위 적을 뛰고 있을 뿐. 시간은 멈춰버린다.
오랜만에 기차에 오른 수현은 이미 환자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살구 빛과 핑크빛의 중간 톤에 입술 색을 자랑하던 입술이며 활기가 넘치는 생동감 있는 표정도 이제 더 이상 수현의 얼굴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픈 사람의 모습이었다. 목적지에 도달해 기차에서 내린 수현은 오랜만에 부모님을 찾았다. 부모님의 유골이 묻혀 있는 나무 주위를 돌며 나무를 어루만진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쯤 돌았을 때 이내 참았던 눈물이 뺨 줄기를 타소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끝내 주저앉는다.
“ 나. 어떻해요. 난 어쩌면 좋아요. 그 사람 나 때문에 아픈데.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요. 나는 상처밖에 줄 것이 없어요. 엄마....아빠... 나 어떻해요... ?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네? 흑흑..”
“ 윤비서. 본부장 내 방으로 오라고 해. ”
“ 네. 회장님. ”
5분정도 지났을 때 인터폰이 울린다.
“ 회장님. 본부장님 오늘 출근 안하셨다고 합니다. ”
“ 출근을 안 해? 하.. 이게 도대체 며칠 째야. 바로 전화 연결시켜.! ”
자신의 아들이지만 여자라는 동물에게 빠지더니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의지하던 아들이었는데 실망만 안겨주는 아들 승우가 야속하기만 하다. 이제는 회사까지 결근하면서 여자와 놀아나는 꼴이라니. 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 없다.
“ 회장님. 전원이 꺼져있습니다. 연결이 안 되는데요. ”
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기를 무참하게 던져버리는 한 회장. 회장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곧이어 문을 열고 선우가 들어온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상당히 화가난 한회장을 보고 놀라서 묻는다.
“ 회장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
“ 네가 찾아오너라. 지금 가서 네 잘난 형을 좀 내 앞에 데려오란 말이다! ”
“ 아..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형한테 무슨 일이라도. ? ”
“ 아무런 연락도 없이 무단결근 4일째다. 회사의 본부장이라는 놈이 연락도 없이 결근을 해?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 하는 게냐? 하.. 당장 찾아서 데려와. ”
회장실을 나오는 선우는 핸드폰을 꺼내 승우에게 전화하지만 전원이 꺼져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자신이 모르는 무슨 일인가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일주일 전부터 승우의 얼굴은 다 죽어가는 사람 같았으니.. 그 뒤로 주위에 있는 호텔에 전화를 걸어 숙박중인 명단에 한승우라는 이름이 있는지 확인도 하고 친구들에게도 연락을 해본다. 그러나 아무것도 알아 낼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현이 생각나 힘겹게 번호를 누른다. 아직도 뛰는 가슴은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이 정리되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긴장감도 잠시 수현의 전화 역시 전원이 꺼져있었다. 순간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아버지의 반대에 맞서자는 생각으로 두 사람이 도망이라도 간 것 일까. 아니다. 그렇게까지 할 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자신이 더 잘 알았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동안 승우는 나타나지 않았고 모습을 감춰버린 승우를 찾아 헤매는 건 선우뿐이었다. 승우와 연락이 되지 않았던 일주일은 선우에게도 지옥 같았다. 한회장의 역정이 날로 심해져갔으니 말이다. 운전 중인 선우는 거래처에 가던 중이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가 울린다.
승우를 찾았다는 전화를 받고 달려간 곳은 유명한 술집. 대형 룸에 혼자 앉아 페인의 모습을 하고는 술만 마시는 승우를 보는 순간 기가 찰 노릇이었다. 못 본 일주일 사이에 승우의 얼굴은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 형... ”
“ 어...어? 이게 누구야.. 내 동생 선우 아니야? 여긴 어떻게 왔냐? ”
승우가 이토록 술에 만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원래부터가 술을 좋아하지 않아 가깝게 지내지 않았었고 거래와 중요한 모임 자리에서만 간단히 분위기 정도 맞춰주는 정도였다. 그래서 늘 승우는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이 흐트러지고 망가지는 모습을 보이는 술자리에서 단정하고 말짱한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눈앞에 믿지 못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형. 무슨 술을 이렇게 마셔? 나가자. 너무 취했다. ”
“ 무슨 소리야? 나 지금 막 시작했는데. 너도 앉아서 내 술 한잔 받아라. 자아~. ”
“ 어서 일어나. ”
승우를 잡아끌어 일으키는데 힘없이 쓰러지는 승우. 주위에 있던 웨이터에 도움을 받아 자신의 차안으로 옮겨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도착한 선우는 승우를 침대에 눕힌다. 넥타이를 풀어주고 있는데 감긴 승우에 눈에서 뭔가가 떨어진다.
“ 하...하..수현아........수현... ”
‘ 수현..? ’
수현의 이름을 부르면서 운다? 지금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해야할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었다. 사실.. 어렸을 때 이후로는 승우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럴 일도 거의 없었을 뿐더러 설령 울어야 할 일이 있었더라도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도 될 만큼 친근한 형제사이는 아니었으니까.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건지.
“ 회장님 들어오십니다. ”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현관문이 열리고 한회장이 집으로 들어온다. 거실 쇼파에 앉아 있던 선우는 퇴근하는 한 회장을 맞이한다.
“ 들어오셨어요. ? ”
“ 승우를 찾았다는 게 사실이야? ”
“ 네. 찾았습니다. 지금 방에. ”
“ 네 이녀석을 그냥. ”
“ 아버지! 승우형 지금 아픕니다. 몸이 병이났더라구요. 아버지도 고단하셨텐데 우선 오늘은 들어가서 쉬십시오. ”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한 회장. 안도의 숨을 내쉬는 선우.
승우의 방으로 올라가 누워있는 승우를 한참동안 바라본다. 그 때 승우의 핸드폰에 문자 메시지가 들어온다. 주인은 아니지만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러나 광고성 문자 메세지다.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허락도 없이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던 건데 아무런 정보도 알아 내지 못하자 순간 광고성 문자를 보낸 사람이 괘씸하게 느껴진다. 혹시나 해서 다시 폰을 열어 확인하는 선우. 낯이 익은 이름의 전화 통화 내역이 가득하다. 순간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는다. 확인 버튼을 누르고 또 다시 확인 버튼을 누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수현에게 걸려온 전화는 단 한 통화도 없고 승우가 수현에게 전화한 통화내역만 남아 있었다. 게다가 통화시간이 모두 일정했다. 1분 30초... 사랑하는 사람과의 통화를 1분 30초 동안 주기적으로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분명 두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다시 일주일 만에 병원을 찾은 수현은 병원 바로 앞에서 발길을 돌린다.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저 곳에 들어가면 자신의 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만 같았기에.
승우와 헤어지던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인데도 찾아가 만날 수도,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것이 헤어진 연인들의 입장이다. 하루하루 눈물로 살아가는데도, 그 사람 없이는 한 순간도 살지 못할 것 같은데도, 살아 숨 쉬는 것이 이토록 괴로운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이별이었다. 이렇게 아플 것이라는 거, 자신이 더 아플 거라는 거 알면서 보낸 사람이었다. 만약에 자신의 병이 치료 되서 다시 누군가를 사랑해도 될 수 있는 건강한 신체가 주어진대도 그런 좋은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럴 것이라는 거 다 알면서 억지로 떼어낸 사랑이었다. 그 사람도 나만큼 아프고 힘들겠지. 나처럼 먹지도 못하고 잘 수도 없고 눈물로 지내겠지. 그 아픔과 슬픔을 잠시라도 잊어보려 어쩌면.. 술에라도 기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원망스러웠다. 이 병원만 오지 않았더라면, 검사만 받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그런 몹쓸 병에만 걸리지 않았더라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린. 그래서 속상하고 원망스러웠다.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서인지 머리가 복잡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머리에서 괴롭히는 병 때문 인건지 어지럽다. 그러나 병원으로는 돌아가지 않는다.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고 약을 받아온다면 당장의 통증과 아픔은 견딜 수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근본적 치료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수현은 알았으니까.
2
“ 자는 척 그만 하고 일어나서 이 죽 좀 먹어. ”
하루 종일 누워만 있는 승우를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죽을 탁자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나 승우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초점 없는 눈빛. 어디를 주시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텅 빈 것 같은 눈빛. 세상을 다 산 사람 같은 눈빛이었다.
“ 지금 시위해?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됐나? 갑자기 왜 그래? 말을 좀 해봐. 답답해서 내가 돌 지경이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
넓은 승우에 방안에서 소리치는 선우의 목소리만 울려 퍼질 뿐이었다.
“ 수현이하고 관련된 일이야? ”
수현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초점을 잃었던 승우의 눈빛이 돌아온다. 다른 말에는 전혀 반응이 없던 승우였지만 한 여자의 이름을 나오자 바로 반응한다.
“ 싸웠어? 둘이? 그래? 지금 겨우 사랑싸움한 거 가지고 이러는 거야? 세상 다 산 사람처럼? 형 이렇게 안 봤는데 보기보다 마음 약하네. ”
어깨가 들썩들썩하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분명 승우이다.
“ 혀..형..? ”
마음껏 소리도 못 내고 참으며 울고 있는 승우를 보자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 우는 것을 옆에서 지켜봐준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알 것도 같다. 어느 정도 마음의 진정이 찾아왔는지 미동이 잔잔해지고 있었다.
“ 죽이 다 식어서 맛없겠다. 아주머니한테 다시 해달라고 해서 가져올게. ”
한 시간 전에 들고 들어왔던 죽을 손도 대지 않은 채 다시 들고 나가려는 순간.
“ 우리 헤어졌다. ”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미안합니다.
절 용서하지 말아주세요.
마음껏 미워하고 미워하세요.
만약에.. 만약에 말이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다음 세상이 있다면
정말 그런 세상이 있다면
그런 세상에서 혹시나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당신을 떠난 냉정한 여자대신
당신을 너무도 사랑한 여자로 기억해주세요.
당신을 두고 떠나야 했던 건강하지 못한 여자대신
영원히 함께 하자는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여자로 기억해주세요.
“ 여보세요? ”
“ 야. 최수현! 너 그러기야? 연애 한다고 이제 친구는 필요 없다 이거지? ”
“ 경미야..하하. ”
“ 나 삐졌어. 어쩜 그렇게 연락이 안 되니~? 얼마 전에도 승우씨가 네 걱정하던데. 암튼 신비주의라니까. ”
“ 그래..? ”
“ 그래! 오늘 시간 되지? 너도 이제 그만 백수 생활하고 일 시작해야지~ 내가 좋은 자리 알아봤어. 오늘 만나자. 내가 자세하게 말해줄게. ”
“ 근데 어쩌지? 내가 오늘은 오빠 만나기로 했는데. ”
“ 어우~ 못 말려. 애인 때문에 친구를 버리다니..흑흑.. 너 미워, ”
“ 그런 거 아니야. 알잖아. ”
“ 알지. 농담이야. 그럼 시간 될 때 나한테 연락해. ”
“ 응. ”
전화 통화를 하는 내내 어지러움 증과 구토 증상 때문에 저절로 쏟아져 나오는 신음 소리를 참아내려고 하다 보니 괴로운 건 자신의 몸이었다. 수현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을 방치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하루 속히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자는 의사의 제안을 뿌리치고 통원치료를 하겠다고 하고 병원을 나왔고 그 뒤론 병원도 찾지 않았다. 심한 통증이 몰려 올 때마다 정 참을 수 없으면 동네 약국에서 진통제를 사서 복용하는 정도였다. 요즘 같아서는 살고 싶지 않았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두렵고 외로웠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지내느니 차라리 부모님 곁으로 가는 것이 속 편하다고 생각했었다. 살고 싶은 마음도 희망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자신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아파하는 것은 눈물 흘리는 것은 더 보고 싶지 않았고 싫었기 때문에 자신 스스로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벽을 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영원히 잠들기를 바라면서..
3
신촌에 있는 어느 분위기 있는 카페 안. 먼저 커피를 주문해 놓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경미. 10분 좀 지나서 카페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보인다. 승우다. 승우를 발견하자마자 웃으면서 손을 흔든다. 두 사람은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는다.
“ 이야~ 오랜만이에요. 이게 얼마만이죠? 한 달 정도 된 거 같은데. ”
“ 벌써 그렇게 됐나요? ”
“ 그래요. 두 사람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아무리 깨가 쏟아질 정도로 행복하다지만 승우씨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수현인 저랑 항상 떨어 지지 않았다구요. 사실. 저 질투 나려구해요.”
“ 경미씨.. 아직 모르고 계시는 건가요? ”
“ 뭘요? ”
“ 수현이가 아직 말 안했나요? ”
“ 네? ”
“ 하...그렇군요. 우리 헤어졌습니다. ”
커피를 마시다가 놀래서 사례 걸리는 경미. 기침을 여러 번 하다가 다시 놀래서 승우를 바라본다.
“ 그게.. 그게 무슨 말이에요? 헤어지다니요? 농담하지 마시구요 ”
점점 승우의 눈은 붉어지고 있었다. 눈물도 고인다. 그런 승우를 보며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갑자기 어두워지는 경미.
“ 그... 그러니까.. 누..하...누가 먼저 그런 말을. ”
“ 수현이요. ”
“ 말도 안돼. 수현이가요? 얼마나 됐어요? 수현이 안 만난지? ”
“ 3주 가까이... ”
“ 하..하.. 아니에요. 승우씨가 머 잘 못 알고 있는 거에요. 제가 며칠 전에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더니 승우씨랑 데이트가 있다고 했었어요. 그럼.. 그건 뭐에요? ”
“ 아마...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한 거겠죠. 경미씨가 날 잘 아니까. ”
어의가 없었다. 이해할 수도 없었다. 말이 안 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다른 연인도 아니고 어떻게 그 두 사람이? 승우와 헤어져 돌아오는 경미는 머리가 혼란스럽다. 어째서 수현이 자신에게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렇게 사랑한다던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 자신을 찾아와 말하지 않았다는 것도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거짓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 수현이가 너무 변했어요. 너무 달라요. 내가 알던 수현이가 아니었어요. 몇 번이고 찾아가서 되돌리려고 했지만 소용없었어요. 경미씨.. 난... 수현이 없이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3주 동안 전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변해버린 수현이의 행동에 당황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이유가 있는 거 같아요. 그 이유라도 안다면 차라리 내 맘이 편하겠어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면 수현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도 있겠지만.. 경미씨가 수현이를 좀 만나봐주십시오. 부탁합니다. ]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던 경미는 수현에게 전화를 한다. 그러나 받지 않는다. 또 다시 전화를 걸고 받지 않자 폴더를 닫아 버린다.
“ 아저씨. 상도동으로 가주세요. ”
수현에 집으로 가는 길에도 여러 번 전화를 하지만 여전히 받지 않는다. 수현의 집 앞에 도착해 뛰어 올라가는 경미. 초인종을 누른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빠르게 계속해서 누른다.
“ 수현아. 최수현. 문 열어. 안에 있음 문 열어. 수현아. 문 좀 열어봐. “
30분 째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시끄럽게 하자 주인이 올라온다.
“ 어머 아가씨. 지금 뭐하는 거에요? ”
“ 아. 안녕하세요? 여기 사는 아가씨 친군데요. 만나러 왔어요. ”
“ 안에 없는 거 아니에요? 요즘은 집에 없는 것 같던데.. 항상 불도 꺼져 있고 얼굴도 보기 힘들구요. 그래서 어디 갔나 했는데.. ”
“ 항상 불이 꺼져있어요? 이 집 사는 아가씨 얼굴 본 게 언제에요? ”
“ 음.. 2주는 됐을 걸 아마도. 아무튼 요즘 얼굴 보기가.. 어머. 아가씨. 가는 거에요? ”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뛰어 내려간다. 뛰어 내려가다가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 이기사 님. 저 경미이에요. 부탁할게 있어서요. 문 수리공 좀 지금 이쪽으로 보내주시겠어요? 네.. 최대한 빨리요. ”
한 시간쯤 지나서 문 수리공이 수현의 집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수현의 현관문에 자물쇠를 뜯어내기 시작한다. 소리가 커지자 다시 주인이 올라온다. 문을 뜯어내는 것을 보고 허겁지겁 달려온다.
“ 어머. 이 아가씨 지금 머하는 거야? 멀쩡한 문을 왜 뜯어내요? 응 ? ”
“ 제 친구가 이 안에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하는 거니까. 이해 좀 해주세요. ”
“ 아니. 안에 있으면 문을 열어줬겠지~ 이렇게 문을 뜯어 놓으면 우린 어쩌라구~ ”
볼멘소리를 하는 주인의 마음을 눈치 챈 경미는 모든 수리비는 배상한다고 말하고 수리공을 재촉한다. 문이 열리자 재빠르게 집 안으로 들어가 수현을 부른다.
“ 수현아. 수현아! ”
방안으로 들어간 경미는 침대위에 힘없이 쓰러져 있는 수현을 발견하고는 뛰어 간다.
“ 수현아? 수현아. 왜 그래.. 눈 좀 떠봐. 최수현? ”
수현의 몸은 이미 불덩이였다. 땀도 많이 흘리고 있었고 입술은 매우 말라있었다. 같이 온 수리공이 수현을 업어 택시에 태운다. 근처에 있는 종합병원에 응급실로 향하는 경미. 수현을 껴안고 말을 계속 걸어 보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다.
“ 수현아~!!! ”
JD그룹 세미나실. 많은 이사진들과 각부 부장 과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중요한 회의가 진행 중이다. 다른 사람들은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나 발전 방향을 제안하고 기획하고 있지만 승우는 그 자리에만 있을 뿐 멍한 얼굴이다. 중요한 위치에 앉아 있으면서도 마음을 잡을 수가 없는 자신이 가끔은 한심할 때가 있다. 그 만큼 그 여자는 자신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선택의 조건이 아닌 필수 조건이었다.
병원에 도착해 응급실로 실려 가는 수현. 택시에서부터 승우에게 전화를 계속해서 해보았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다. 답답하기만 하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두렵기만 하다. 자신이 소중한 친구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 겁이 난다. 좀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던 수현에 대한 서운함과 섭섭한 감정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눈물이 난다. 게다가 이 사실을 제일 먼저 알아야 하고 궁금해 하고 있을 승우에게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한 시간에 걸쳐서 여러 가지 검사가 진행된다.
지겹고 지루한 회의가 끝나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오는 승우. 의자에 앉아 관자놀이를 한다. 오늘 하루 종일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데 몸은 일을 하느라 참으로 고된 하루였다. 주위를 살피다 책상위에 놓여 있는 핸드폰을 보고 폴더를 연다. 부재중 전화 9통.. 누굴까? 이름을 확인해 보고는 승우의 눈이 커지기 시작한다. 경미였다. 바로 통화버튼을 부르는 승우.
응급실 안. 모든 검사가 끝나고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경미. 응급실에 배치되어 있는 작은 침대에 누워 링겔을 맞고 있는 수현의 손을 한손으로 잡고 한손으로는 승우에게 전화를 건다. 역시나 받지 않는다.
“ 도대체 .. 승우씨는 뭐하느라 전화를 이렇게 안 받는 거야? 수현이가 이러고 있는데.. 휴.. 좀 받아라..받아... ”
그렇게 투정을 부리고 있을 때 경미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온다. 발신번호를 확인하고는 반가운 듯 받는다.
“ 승우씨. 아유. 전화를 왜 이렇게 안 받아요. 내가 얼마나 했는데.. ”
‘ 탁!!!! ’
누군가가 자신의 전화를 가로챈다. 놀래서 보니 수현이었다.
“ 수..수현아? 깼니 ? 좀 어때? 괜찮아? ”
그 때 또 다시 울리는 경미의 핸드폰. 수현의 손에 있는 핸드폰을 받으려고 손을 내미는데 수현은 손을 멀리한다. 계속해서 수현의 손 안에서 울리는 핸드폰.
“ 수현아? 그 전화 아마 승우씨 일거야. 이리 줘. 내가 받을게. ”
“ 받지마. ”
받지마?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할 뻔 했다.
“ 뭐라구? ”
“ 받지말라구! ”
“ 수현아..? 무슨 소리야? ”
“ 이 전화 승우씨 전화라니까. ”
“ 그러니까 받지 말라고. 받지 말란 말야!!! ”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변해버리는 수현의 태도에 놀라는 경미. 승우가 말하던 수현이가 변했다라는 말은.. 이 걸 보고 하는 말인 것인가. 당황해서 순간 멍해진 경미. 그 때 간호사들과 담당의사가 온다. 수현의 바이 탈 사인을 체크하는 의사.
“ 최수현씨. 제 말이 들리나요? ”
아무런 대구도 하지 않는다. 이내 고개를 돌려버린다.
“ 최수현씨. 제 말이 들리나요.? ”
그래도 아무런 대답이 없자 무안했는지 경미가 대신 설명한다.
“ 의사 선생님. 수현이 들려요. 방금도 저랑 대화 했어요. ”
“ 최수현씨. 혹시..알고 ..계셨습니까? ”
의사의 말에 심하게 흔들리는 수현의 눈동자. 또 다시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는다. 그 모습에 뭔가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의사. 그러나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경미뿐이었다. 이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알고 계셨군요...치료가 시급합니다. ”
“ 그..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알고 있다니요? 뭘요? ”
“ 최수현씨 보호자 되십니까. ?”
“ 아. 네.. 보호자 맞습니다. ”
“ 최수현씨에 병명 말입니다. ”
“ 병...병명이요? ”
수현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의사를 본다.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 모르고 계셨습니까? 최수현씨는 뇌종양을 앓고 계십니다. ”
뇌종양..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단어이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그래. 드라마에서 들어봤었지. 드라마에 재미를 더하기 위해서 시청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작가들이 써 내려가는 소설에 불과한...그..뇌종양? 하..하...하...
밖으로 뛰쳐 나가버리는 경미.... 그런 경미를 잡을 수도 없었다. 너무도 미안해서. 또 다시 수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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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미와 통화 중에 갑자기 전화가 끊어져 다시 해보았지만 그 이후로는 연락이 두절 되 버렸다. 부재중 전화가 9통씩이나 왔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이고 그 중요한 일이라는 것은 아마도 수현의 일 일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로 연락이 안 되자 마음이 초초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렇지.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 할리가 없다. 한 순간에 변했다는 것은 달라졌다는 것은 무언가 그 사람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게 뒤따르기 마련이다. 승우의 말에 의하면 수현은 너무도 냉정하게 변했다고 했었다. 마치 다른 사람 같을 정도로. 그리고 그렇게 떠나버렸다고 했었다. 그 누구보다도 서로가 얼마나 사랑하는 지 잘 알고 있는데 분명 뭔가 사정이 있는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맞았던 것이다.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혼자서 얼마나 아프고 외로웠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한참을 밖에서 울고 진정이 됐는지 병원 안으로 다시 들어온다. 침대에 앉아 쭈그리고 앉아 있는 수현의 모습을 보자 울컥 하는 경미.
“ 너 지금 머 하는 거야? 너 링겔 맞고 있는 거 안 보여? 이렇게 앉아 있음 어떻해?! ”
다른 사람들이 보면 화를 내고 소리치는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수현에게는 아니었다. 경미는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다. 눈물 흘리는 수현.
“ 울기는 왜 울어! 뭘 잘 했다고 네가 울어? 울 사람이 누군데 네가 우냔 말야 ! ”
자신에게 소리치고 화내는 경미를 보면서 가슴이 아파 운다. 그러나 소리는 내지 못한다. 지금 것 그랬던 것처럼 참아야 하니까 참는다. 눈에서 눈물이 아무리 흘러 내려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마치 순간적으로 벙어리가 돼버린 사람처럼. 그런 수현의 모습이 안쓰러운 경미는 수현의 어깨를 붙잡고 흔든다.
“ 울어. 소리 내서 실컷 울란 말야. 바보야! 왜 소리 내서 울지도 못하니? 힘들다고 아프다고 소리치면서 울기라도 하란 말야.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흑 흑흑.. ”
수현을 껴안고 흐느껴 우는 경미. 그제 서야 수현도 그동안 참았던 눈물은 쏟아 내기 시작한다. 응급실 안에는 수현과 경미의 울음소리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이제는 경미와도 연락이 되지 않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진심이었을까. 정말로 자신과 헤어질 작정이라도 하고 자신이 찾을 수 없도록 어디론가 꽁꽁 숨어버린 걸까. 이제는 경미까지 합세하여 자신을 외면 할 생각인건가. 사무실 책상에 앉아 핸드폰 슬라이드를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가 다시 열기를 한 시간 째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선우. 자신이 들어온 지도 모르고 핸드폰에만 집중하는 승우의 모습은 안타깝다 못해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두운 병실 안. 병원 입원 소속을 밟고 1인실로 잡아 치료를 시작했다. 못 본 사이에 친구의 체중은 7키로 그램이나 줄어 있었고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다. 그런 친구를 위해서 맛있고 입맛이 도는 음식을 다 해주고 싶었으나 치료 중에는 치명적인 음식들을 섭취해서는 안된다는 의사에 말에 속상하다. 잘 먹지도 못하는데 또 다시 먹은 것을 입으로 걸러내고 괴로워하는 수현을 볼 때면 눈물이 나서 견디기가 힘들 정도이다. 오늘도 약기운으로 간신히 잠이 들었다. 잠이 든 수현을 바라보는 경미. 그러다 침대에 엎드려 잠이 드는 경미. 모두가 잠든 고요한 병원. 그리고 병실.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 오..오빠.. 승우오빠...오..빠.. ”
수현의 목소리에 놀라서 잠에서 깬 경미. 온 몸에 땀범벅이가 된 채 승우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모습을 본다.
“ 수현아....흑....어떻하면 좋니...하... ”
“ 회장님. 한 이사님이십니다. ”
“ 들여 보네. ”
회장실 문을 열고 선우가 들어온다.
“ 부르셨습니까. ”
“ 앉아라. 장 교수님이라고 기억하고 있을 거다. 그분이 오늘 새벽에 돌아가셨다는구나. 나도 나중에 가보겠지만 네가 우선 가서 얼굴이라도 비추고 유가족들을 만나보고 오너라. 장남인 승우도 찾아뵙는 게 예의겠지만 그 녀석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니라고 하니. 어쩔 수 없지. ”
“ 예. 알겠습니다. ”
검은 정장차림으로 기인의 명복을 빌어 드리기 위해 장례식장을 찾은 선우. 장례식장에 들어서자마자 쏟아져 나오는 울음소리며 많은 사람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로 가득하다. 선우는 왠지 이런 곳, 이런 소리가 싫다. 유가족에게 인사를 하고 기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절을 한다. 식사를 하고 가라는 유가족의 권유를 예의 있게 사양하고 장례식장을 나오는 선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던 중에 1층에서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는 순간 멈칫한다. 분명 수현이었다. 문이 닫히려고 하자 재빠르게 내린다. 수현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천천히 뒤따라간다. 환자복을 입고 한 쪽 손에는 링겔 꽂이를 들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걸음걸이 또한 느리고 힘이 없어보였다. 수현이 커브를 돌아 어디론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 곳이 병실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문 앞에 이름을 보니 ‘최수현’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무엇에라도 홀린 듯 어디론가 달려가는 선우. 안내 실에 있는 간호사를 찾는다.
“ 하..하..저기요. 1010호에 있는 환자요. 최수현 환자요. ”
“ 네 최수현 환자 말씀이세요? ”
“ 그 사람. 병명이 뭡니까? 어디가 아파서 입원했습니까? ”
“ 보호자이십니까? 보호자가 아니시면 저희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
“ 보호자? 보호자는 아니지만. 난 그 사람 애인이요. 꼭 그 사람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부탁 좀 할게요. 알려주세요. 어디가 아픈 겁니까? ”
병원에서 힘없이 걸어 나오는 선우. 무엇에라도 홀린 사람처럼. 멍한 얼굴을 하고는.
[ 최수현씨는 지금 뇌종양을 앓고 계시군요... 그것도 상태는 아주 심각합니다. 말기 판정을 받은 상태예요. ]
5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스며들어 옴 몸을 움 추리게 만드는 계절이 찾아오고 있었다. 길거리에 사람들은 하나 둘 씩 얇았던 가을 옷 위에 두꺼운 옷을 입기 시작했고 더 이상 경치 좋은 공원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을 보기는 힘들었다. 하루 종일 병실에서 누워있거나 치료를 받는 일이 하루의 전부가 돼버린 수현은 어느 샌가 웃음을 잃어버렸다. 자신의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간호해주고 옆에 있어주는 소중한 친구가 있기 때문에 울고 싶어도 참고 매일을 견뎌내고 있었지만 수현에게는 더 이상 이 세상이 아름답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하나를 잃어버리니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병실 안에서 창문을 통해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수현은 창문에 비치는 사람들을 만져본다.
“ 경미야. ”
“ 응? ”
“ 화내지 말고 들어줘. ”
수현의 말에 순간 미간을 찌푸리는 경미. 그러나 다시 핀다.
“ 그래. 말해봐. ”
“ 만약에.. 만약에... 내가 죽으면...”
“ 수현이 너....! ”
“ 화내지 말고... ”
“ 내가 죽으면.. 우리 부모님이 계신 나무 밑에 묻어줘. 그리고 혹시나.. 다시 승우오빠를 만나게 되는 날이 생긴다면... 그래서 오빠가 혹여나 내 안부를 묻는다면..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다고.. 그렇게 전해줄래.. ? ”
“ 수현아........하.. ”
수현을 껴안는다. 이런 말을 하는 수현의 마음은 지금 자신의 아픔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안아주는 일 밖에 없었다.
승우의 사무실을 찾은 선우. 사무실로 들어가려고 하자 비서가 막아선다.
“ 본부장님은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
“ 그럼 어디에 있습니까? ”
“ 오늘 여러 간부위원들과 점심 만찬이 있어서 그 곳에 가셨습니다. ”
“ 하... 뭐라구요? 거기가 정확히 어딥니까? ”
차를 운전하는 선우는 평소보다 속력을 더 낸다. 하루 동안 고민했다. 이 사실을 형인 승우에게 전해줘야 하는 게 옳은 일인지. 형을 너무도 사랑하는 한 여자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파할 형을 위해서 일부러 모질게 떠났을 텐데.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그러나 지난 3주 동안. 수현이 없는 3주 동안의 승우 모습은 죽은 사람과도 같았다. 갈등 속에서 결정을 내리고 사무실을 찾았지만 만날 수 없었다. 감부위원들과의 점심만찬이라는 말에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하루속히 형을 찾아내야 한다. 만나야 한다. 전통 한식집 앞에 차를 세우고 승우를 찾는다. 승우에 목소리가 들렸고 어떠한 노크와 말도 없이 문을 활짝 열어버린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선우를 본다. 선우는 간부위원들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 안녕하십니까. JD그룹에 한선우 이사입니다. 잠시 급한 일이 있어 본부장님을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승우가 밖으로 나와서 선우를 붙잡고 말한다.
“ 너 지금 무슨 짓이야? 오늘 점심 만찬은 중요한 자리인데. 이렇게 나타나서는.. ”
“ 중요한 점심만찬? 하.... 형이 지금 이러고 있으면 어떻해? 수현이는 이제 안 찾아? ”
수현이라는 말에 살짝 흔들리는 승우의 눈을 선우는 분명 보았다.
“ 이제..지쳤다. 일부러 찾을 수도 없게 숨어버린 사람.. 찾을 능력 이젠 없다..나도.. ”
승우의 말과 태도에 화가 난 선우는 선우의 목덜미를 잡는다.
“ 이젠 지친다구? 능력이 없어서 못 찾겠다구? 그게 말이 돼? 그게 말이 되냐구? ”
“ 이거 놔. 이런 말이였다면 나 먼저 들어간다. ”
등을 돌려 걸어간다.
“ 아프단 말야! 수현이 많이 아프단 말야.! ”
가던 길을 멈취는 승우. 천천히 뒤를 돌아 선우를 본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 오고 싶어도..형한테 오고 싶어도 못 온단 말야! ”
“ 그게...무슨 말이야? 수현이를 만났어? 그래? ”
“ 뇌종양이래. 수현이. 뇌종양 말기 판정받았대! 그래서 일부러 형 떠난거라구! ”
갑자기 미친 듯이 밖으로 달려 나가는 승우. 그 뒤를 따라가 승우의 팔목을 잡는다.
“ 형 지금 이 상태로 운전 못해. 내 차타고 가. ”
차에서 내려 병원으로 뛰어 들어가는 승우. 그 뒤를 따라가는 선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느리다고 생각됐는지 비상계단을 이용해 이동한다. 한 걸음에 달려와 수현이 입원에 있는 병실1010호 앞에 서 있는 승우. 문 앞에 이름을 확인하자 눈시울이 붉어진다. ‘최수현’ 얼마나 그리웠던 이름인가. 손잡이를 잡으려고 하다가 잡지 못하고 벽을 주먹으로 치는 승우. 그 때 병실 문이 열린다. 그리고 경미가 물 컵과 물병이 든 쟁반을 들고 나온다. 병실 문이 닫히고 가려는 순간. 승우를 발견하고는 놀라 잡고 있던 쟁반을 놓치는데 승우가 받는다.
“ 아.... 스...승우씨.. ”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6
수현의 병실 안. 공기 청정을 위해 가습기가 작동중이고 약기운으로 겨우 잠이 든 수현은 침대에 누워있다. 너무도 다른 모습으로 누워있는 수현을 보자 눈물이 난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의자에 앉아 수현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머리를 가다듬어 준다.
수현이 처음 이별을 통보했을 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분명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내 앞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던 여자가 하루아침에 냉정한 표정을 하고 나타나 헤어지자고 모질게 말할 때 분명 거짓일거라고 생각했었다. 아니 그 때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이후로 만날 수 없게 되자 어쩌면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진정으로 자신을 떠나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점점 포기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렇게 모질게 떠난 그 여자는 병실에 힘없이 누워있었다. 무서운 병명을 안고 고통 받고 있었다. 혼자서 그 아픔을 견뎌야 했던 그 시간들이 너무나 가슴 아프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한테도 말 못하고 오랜 시간 절친하게 지냈던 친구에게도 말 못하며 아프다고 힘들다고 하소연할 한 사람 없이 얼마나 아팠을까.
“ 수현아... 수현아.......하....하..흑..흑.. ”
“ 아..안돼...오..오빠.. ”
꿈을 꾸는 듯했다. 오빠라 하고 하는 걸 보니 아마도 자신이 수현의 꿈에 등장했을 것이다. 이렇게 꿈속에서만 애타게 불렀을 것이다. 보고 싶어도 그리워도 견뎌내며 또 견뎠을 것이다. 그리고 몇 분 후에 수현이 눈을 뜨기 시작한다. 흐릿했던 시야가 또렷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모됐다. 시야가 또렷해지자 자신의 눈앞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경미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더 또렷해지자 수현의 동공이 커지기 시작한다. 수현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꿈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사람이 지금 자신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럼 아직도 꿈을 꾸는 중이란 말인가?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엔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의 얼굴이 너무 선명했다. 너무도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꿈속에서도 사무치게 그리웠던 얼굴이라 벌써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감상에만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게 만약 현실이라면.. 안될 일이었다.
“ 수현아. ”
자신을 부르는 낮은 저음 소리에 부드럽고 달콤하기만 한 저 목소리는 분명 그 사람이 맞았다. 또 다시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린다. 그러다 다시 눈에 힘을 준다.
“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야? ”
“ 수현아.. ”
“ 네 이름 다신 그렇게 부르지 말랬잖아. 기억 안나? 다시는 얼굴 마주치는 일 없도록 하자고 했었잖아! ”
또 다시 자신 앞에서 모질게 냉정하게 연기를 하는 수현을 보면서 가슴 한쪽이 시려온다. 그런 말들을 하면서 자신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내뱉으면서 내게 준 상처가 가슴 아파 얼마나 많은 시간을 눈물 흘렸을까.
“ 보고 싶지 않아. 당장 여기서 나가줘! ”
“ 싫다.. ”
“ 왜 이래? 왜 이렇게 질척거려? 우린 이미 끝났어! 끝났다고! 그런데 지금 뭐하는 거야? 하..하.. 그래.. 오빠가 나가기 싫다면 내가 나가줄게. ”
침대에서 내려와 자신의 오른팔에 꽂혀 있던 링겔 주사를 뽑아 버리는 수현. 그 순간 동공이 커지는 승우. 수현의 오른팔에서는 피가 난다. 병실을 나가려는 수현을 붙잡아 자신의 손수건으로 수현의 팔목을 감싸주는 승우. 눈물이 나려는 걸 참으려 무던히 노력한다.
“ 이거 놔! 신경 쓰지 말라고! 이 손 놔! ”
“ 못 놔 ! 절대로! 이젠 너의 거짓말의 속지 않아. 그렇게 다신 널 보내지 않을 거야! ”
“ 뭐? 거짓말? 하...내가? 뭐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해? 착각 하지마~ 하.. ”
“ 똑바로 들어 ! 네가 어떤 병에 걸렸던, 얼마나 살던, 그건 내게 중요하지 않아! 너만 날 사랑한다면.. 그리고 내가 널 사랑하니까 끝까지 이 손 못 놔! 알아들어? ”
“ 하..하... 누가 아직도 오빠를 사랑한대? 내가? 착각 하지마. ”
“ 봐~! 지금도 네 눈이 말하고 있잖아. 날 보는 네 눈이 날 보는 순간부터 계속 흔들리고 있잖아! 이래도 아니라는 거야? ”
너무도 정곡을 찔러 버렸다. 그랬다. 자신의 눈은 이미 승우를 보자마자 눈물을 한 바가지라도 쏟아 부을 것 같은 그런 눈일 것이다. 아마도. 애써 참느라 눈을 더 충혈 되어 가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끝까지 잡아떼야만 했다. 그것에 마지막으로 잘 하는 일 일거라고 생각했던 수현이었다.
“ 여기까지 알고 왔다는 건 벌써 내 병명을 알았다는 건데. 내가 뇌종양 말기 판정 받은 여자라는 거 다 알면서... 지금..그런 말이 나와? 오빠 미쳤어? 미쳤냐구! 나 죽는다고! 죽는단 말야~! ”
이제는 발악에 가까웠다. 소리치며 또 소리친다. 그런 수현이 안쓰럽고 아프기만 한 승우.
수현을 잡아끌어 자신이 품안으로 밀어 넣는다. 놓으라며 소리치고 승우를 때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 꽉 껴안는다.
“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
“ 말했지.. 이젠 절대 놓는 일 따윈 없을 거라고.. 내가...내가 너.. 살릴 거야. 누가 뭐래도 내가 너..꼭 살릴 거야. 이렇게 널 보내진 않아. 다시는! ”
“ 바보....... 멍충이....... 가라니까...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니...? 흑..흑...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발악하며 밀어내던 수현. 승우를 때리며 밀어내려던 손은 승우를 껴안는다. 얼마나 그리웠던 품이었는지. 얼마나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었는지. 오랜 시간동안 두 사람은 뜨거운 포옹을 한다.
(연애소설)- 알약 21
*
바보 같은 사람.
1
또 하루가 오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24시간이라는 시간이. 시간이 간다는 것이 잔인하게만 느껴질 두 사람에게도 역시나 또 하루가 오고 있었다. 그렇게 헤어진 두 사람은 그 시간 이후부터 모든 시간이 멈춰버렸다. 더 이상 시간이 흐를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모르면 몰랐지. 사랑하지 않으면 안았지. 이미 알아버렸고 사랑해버린 사람이라 그런 사람과의 이별은 수현과 승우 모두에게 죽음과도 같았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두 사람. 어두운 방에서 밝은 방안이 될 때까지 숨만 쉬고 있을 뿐, 심장만 인위 적을 뛰고 있을 뿐. 시간은 멈춰버린다.
오랜만에 기차에 오른 수현은 이미 환자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살구 빛과 핑크빛의 중간 톤에 입술 색을 자랑하던 입술이며 활기가 넘치는 생동감 있는 표정도 이제 더 이상 수현의 얼굴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픈 사람의 모습이었다. 목적지에 도달해 기차에서 내린 수현은 오랜만에 부모님을 찾았다. 부모님의 유골이 묻혀 있는 나무 주위를 돌며 나무를 어루만진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쯤 돌았을 때 이내 참았던 눈물이 뺨 줄기를 타소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끝내 주저앉는다.
“ 나. 어떻해요. 난 어쩌면 좋아요. 그 사람 나 때문에 아픈데.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요. 나는 상처밖에 줄 것이 없어요. 엄마....아빠... 나 어떻해요... ?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네? 흑흑..”
“ 윤비서. 본부장 내 방으로 오라고 해. ”
“ 네. 회장님. ”
5분정도 지났을 때 인터폰이 울린다.
“ 회장님. 본부장님 오늘 출근 안하셨다고 합니다. ”
“ 출근을 안 해? 하.. 이게 도대체 며칠 째야. 바로 전화 연결시켜.! ”
자신의 아들이지만 여자라는 동물에게 빠지더니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의지하던 아들이었는데 실망만 안겨주는 아들 승우가 야속하기만 하다. 이제는 회사까지 결근하면서 여자와 놀아나는 꼴이라니. 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 없다.
“ 회장님. 전원이 꺼져있습니다. 연결이 안 되는데요. ”
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기를 무참하게 던져버리는 한 회장. 회장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곧이어 문을 열고 선우가 들어온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상당히 화가난 한회장을 보고 놀라서 묻는다.
“ 회장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
“ 네가 찾아오너라. 지금 가서 네 잘난 형을 좀 내 앞에 데려오란 말이다! ”
“ 아..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형한테 무슨 일이라도. ? ”
“ 아무런 연락도 없이 무단결근 4일째다. 회사의 본부장이라는 놈이 연락도 없이 결근을 해?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 하는 게냐? 하.. 당장 찾아서 데려와. ”
회장실을 나오는 선우는 핸드폰을 꺼내 승우에게 전화하지만 전원이 꺼져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자신이 모르는 무슨 일인가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일주일 전부터 승우의 얼굴은 다 죽어가는 사람 같았으니.. 그 뒤로 주위에 있는 호텔에 전화를 걸어 숙박중인 명단에 한승우라는 이름이 있는지 확인도 하고 친구들에게도 연락을 해본다. 그러나 아무것도 알아 낼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현이 생각나 힘겹게 번호를 누른다. 아직도 뛰는 가슴은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이 정리되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긴장감도 잠시 수현의 전화 역시 전원이 꺼져있었다. 순간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아버지의 반대에 맞서자는 생각으로 두 사람이 도망이라도 간 것 일까. 아니다. 그렇게까지 할 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자신이 더 잘 알았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동안 승우는 나타나지 않았고 모습을 감춰버린 승우를 찾아 헤매는 건 선우뿐이었다. 승우와 연락이 되지 않았던 일주일은 선우에게도 지옥 같았다. 한회장의 역정이 날로 심해져갔으니 말이다. 운전 중인 선우는 거래처에 가던 중이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가 울린다.
“ 여보세요? 어.. 뭐라구? 찾았어? 그래. 거기가 어디야? 그래. 알았어 지금 갈게. ”
승우를 찾았다는 전화를 받고 달려간 곳은 유명한 술집. 대형 룸에 혼자 앉아 페인의 모습을 하고는 술만 마시는 승우를 보는 순간 기가 찰 노릇이었다. 못 본 일주일 사이에 승우의 얼굴은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 형... ”
“ 어...어? 이게 누구야.. 내 동생 선우 아니야? 여긴 어떻게 왔냐? ”
승우가 이토록 술에 만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원래부터가 술을 좋아하지 않아 가깝게 지내지 않았었고 거래와 중요한 모임 자리에서만 간단히 분위기 정도 맞춰주는 정도였다. 그래서 늘 승우는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이 흐트러지고 망가지는 모습을 보이는 술자리에서 단정하고 말짱한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눈앞에 믿지 못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형. 무슨 술을 이렇게 마셔? 나가자. 너무 취했다. ”
“ 무슨 소리야? 나 지금 막 시작했는데. 너도 앉아서 내 술 한잔 받아라. 자아~. ”
“ 어서 일어나. ”
승우를 잡아끌어 일으키는데 힘없이 쓰러지는 승우. 주위에 있던 웨이터에 도움을 받아 자신의 차안으로 옮겨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도착한 선우는 승우를 침대에 눕힌다. 넥타이를 풀어주고 있는데 감긴 승우에 눈에서 뭔가가 떨어진다.
“ 하...하..수현아........수현... ”
‘ 수현..? ’
수현의 이름을 부르면서 운다? 지금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해야할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었다. 사실.. 어렸을 때 이후로는 승우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럴 일도 거의 없었을 뿐더러 설령 울어야 할 일이 있었더라도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도 될 만큼 친근한 형제사이는 아니었으니까.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건지.
“ 회장님 들어오십니다. ”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현관문이 열리고 한회장이 집으로 들어온다. 거실 쇼파에 앉아 있던 선우는 퇴근하는 한 회장을 맞이한다.
“ 들어오셨어요. ? ”
“ 승우를 찾았다는 게 사실이야? ”
“ 네. 찾았습니다. 지금 방에. ”
“ 네 이녀석을 그냥. ”
“ 아버지! 승우형 지금 아픕니다. 몸이 병이났더라구요. 아버지도 고단하셨텐데 우선 오늘은 들어가서 쉬십시오. ”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한 회장. 안도의 숨을 내쉬는 선우.
승우의 방으로 올라가 누워있는 승우를 한참동안 바라본다. 그 때 승우의 핸드폰에 문자 메시지가 들어온다. 주인은 아니지만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러나 광고성 문자 메세지다.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허락도 없이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던 건데 아무런 정보도 알아 내지 못하자 순간 광고성 문자를 보낸 사람이 괘씸하게 느껴진다. 혹시나 해서 다시 폰을 열어 확인하는 선우. 낯이 익은 이름의 전화 통화 내역이 가득하다. 순간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는다. 확인 버튼을 누르고 또 다시 확인 버튼을 누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수현에게 걸려온 전화는 단 한 통화도 없고 승우가 수현에게 전화한 통화내역만 남아 있었다. 게다가 통화시간이 모두 일정했다. 1분 30초... 사랑하는 사람과의 통화를 1분 30초 동안 주기적으로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분명 두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다시 일주일 만에 병원을 찾은 수현은 병원 바로 앞에서 발길을 돌린다.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저 곳에 들어가면 자신의 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만 같았기에.
승우와 헤어지던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인데도 찾아가 만날 수도,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것이 헤어진 연인들의 입장이다. 하루하루 눈물로 살아가는데도, 그 사람 없이는 한 순간도 살지 못할 것 같은데도, 살아 숨 쉬는 것이 이토록 괴로운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이별이었다. 이렇게 아플 것이라는 거, 자신이 더 아플 거라는 거 알면서 보낸 사람이었다. 만약에 자신의 병이 치료 되서 다시 누군가를 사랑해도 될 수 있는 건강한 신체가 주어진대도 그런 좋은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럴 것이라는 거 다 알면서 억지로 떼어낸 사랑이었다. 그 사람도 나만큼 아프고 힘들겠지. 나처럼 먹지도 못하고 잘 수도 없고 눈물로 지내겠지. 그 아픔과 슬픔을 잠시라도 잊어보려 어쩌면.. 술에라도 기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원망스러웠다. 이 병원만 오지 않았더라면, 검사만 받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그런 몹쓸 병에만 걸리지 않았더라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린. 그래서 속상하고 원망스러웠다.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서인지 머리가 복잡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머리에서 괴롭히는 병 때문 인건지 어지럽다. 그러나 병원으로는 돌아가지 않는다.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고 약을 받아온다면 당장의 통증과 아픔은 견딜 수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근본적 치료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수현은 알았으니까.
2
“ 자는 척 그만 하고 일어나서 이 죽 좀 먹어. ”
하루 종일 누워만 있는 승우를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죽을 탁자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나 승우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초점 없는 눈빛. 어디를 주시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텅 빈 것 같은 눈빛. 세상을 다 산 사람 같은 눈빛이었다.
“ 지금 시위해?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됐나? 갑자기 왜 그래? 말을 좀 해봐. 답답해서 내가 돌 지경이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
넓은 승우에 방안에서 소리치는 선우의 목소리만 울려 퍼질 뿐이었다.
“ 수현이하고 관련된 일이야? ”
수현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초점을 잃었던 승우의 눈빛이 돌아온다. 다른 말에는 전혀 반응이 없던 승우였지만 한 여자의 이름을 나오자 바로 반응한다.
“ 싸웠어? 둘이? 그래? 지금 겨우 사랑싸움한 거 가지고 이러는 거야? 세상 다 산 사람처럼? 형 이렇게 안 봤는데 보기보다 마음 약하네. ”
어깨가 들썩들썩하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분명 승우이다.
“ 혀..형..? ”
마음껏 소리도 못 내고 참으며 울고 있는 승우를 보자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 우는 것을 옆에서 지켜봐준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알 것도 같다. 어느 정도 마음의 진정이 찾아왔는지 미동이 잔잔해지고 있었다.
“ 죽이 다 식어서 맛없겠다. 아주머니한테 다시 해달라고 해서 가져올게. ”
한 시간 전에 들고 들어왔던 죽을 손도 대지 않은 채 다시 들고 나가려는 순간.
“ 우리 헤어졌다. ”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미안합니다.
절 용서하지 말아주세요.
마음껏 미워하고 미워하세요.
만약에.. 만약에 말이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다음 세상이 있다면
정말 그런 세상이 있다면
그런 세상에서 혹시나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당신을 떠난 냉정한 여자대신
당신을 너무도 사랑한 여자로 기억해주세요.
당신을 두고 떠나야 했던 건강하지 못한 여자대신
영원히 함께 하자는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여자로 기억해주세요.
“ 여보세요? ”
“ 야. 최수현! 너 그러기야? 연애 한다고 이제 친구는 필요 없다 이거지? ”
“ 경미야..하하. ”
“ 나 삐졌어. 어쩜 그렇게 연락이 안 되니~? 얼마 전에도 승우씨가 네 걱정하던데. 암튼 신비주의라니까. ”
“ 그래..? ”
“ 그래! 오늘 시간 되지? 너도 이제 그만 백수 생활하고 일 시작해야지~ 내가 좋은 자리 알아봤어. 오늘 만나자. 내가 자세하게 말해줄게. ”
“ 근데 어쩌지? 내가 오늘은 오빠 만나기로 했는데. ”
“ 어우~ 못 말려. 애인 때문에 친구를 버리다니..흑흑.. 너 미워, ”
“ 그런 거 아니야. 알잖아. ”
“ 알지. 농담이야. 그럼 시간 될 때 나한테 연락해. ”
“ 응. ”
전화 통화를 하는 내내 어지러움 증과 구토 증상 때문에 저절로 쏟아져 나오는 신음 소리를 참아내려고 하다 보니 괴로운 건 자신의 몸이었다. 수현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을 방치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하루 속히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자는 의사의 제안을 뿌리치고 통원치료를 하겠다고 하고 병원을 나왔고 그 뒤론 병원도 찾지 않았다. 심한 통증이 몰려 올 때마다 정 참을 수 없으면 동네 약국에서 진통제를 사서 복용하는 정도였다. 요즘 같아서는 살고 싶지 않았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두렵고 외로웠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지내느니 차라리 부모님 곁으로 가는 것이 속 편하다고 생각했었다. 살고 싶은 마음도 희망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자신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아파하는 것은 눈물 흘리는 것은 더 보고 싶지 않았고 싫었기 때문에 자신 스스로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벽을 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영원히 잠들기를 바라면서..
3
신촌에 있는 어느 분위기 있는 카페 안. 먼저 커피를 주문해 놓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경미. 10분 좀 지나서 카페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보인다. 승우다. 승우를 발견하자마자 웃으면서 손을 흔든다. 두 사람은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는다.
“ 이야~ 오랜만이에요. 이게 얼마만이죠? 한 달 정도 된 거 같은데. ”
“ 벌써 그렇게 됐나요? ”
“ 그래요. 두 사람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아무리 깨가 쏟아질 정도로 행복하다지만 승우씨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수현인 저랑 항상 떨어 지지 않았다구요. 사실. 저 질투 나려구해요.”
“ 경미씨.. 아직 모르고 계시는 건가요? ”
“ 뭘요? ”
“ 수현이가 아직 말 안했나요? ”
“ 네? ”
“ 하...그렇군요. 우리 헤어졌습니다. ”
커피를 마시다가 놀래서 사례 걸리는 경미. 기침을 여러 번 하다가 다시 놀래서 승우를 바라본다.
“ 그게.. 그게 무슨 말이에요? 헤어지다니요? 농담하지 마시구요 ”
점점 승우의 눈은 붉어지고 있었다. 눈물도 고인다. 그런 승우를 보며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갑자기 어두워지는 경미.
“ 그... 그러니까.. 누..하...누가 먼저 그런 말을. ”
“ 수현이요. ”
“ 말도 안돼. 수현이가요? 얼마나 됐어요? 수현이 안 만난지? ”
“ 3주 가까이... ”
“ 하..하.. 아니에요. 승우씨가 머 잘 못 알고 있는 거에요. 제가 며칠 전에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더니 승우씨랑 데이트가 있다고 했었어요. 그럼.. 그건 뭐에요? ”
“ 아마...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한 거겠죠. 경미씨가 날 잘 아니까. ”
어의가 없었다. 이해할 수도 없었다. 말이 안 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다른 연인도 아니고 어떻게 그 두 사람이? 승우와 헤어져 돌아오는 경미는 머리가 혼란스럽다. 어째서 수현이 자신에게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렇게 사랑한다던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 자신을 찾아와 말하지 않았다는 것도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거짓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 수현이가 너무 변했어요. 너무 달라요. 내가 알던 수현이가 아니었어요. 몇 번이고 찾아가서 되돌리려고 했지만 소용없었어요. 경미씨.. 난... 수현이 없이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3주 동안 전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변해버린 수현이의 행동에 당황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이유가 있는 거 같아요. 그 이유라도 안다면 차라리 내 맘이 편하겠어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면 수현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도 있겠지만.. 경미씨가 수현이를 좀 만나봐주십시오. 부탁합니다. ]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던 경미는 수현에게 전화를 한다. 그러나 받지 않는다. 또 다시 전화를 걸고 받지 않자 폴더를 닫아 버린다.
“ 아저씨. 상도동으로 가주세요. ”
수현에 집으로 가는 길에도 여러 번 전화를 하지만 여전히 받지 않는다. 수현의 집 앞에 도착해 뛰어 올라가는 경미. 초인종을 누른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빠르게 계속해서 누른다.
“ 수현아. 최수현. 문 열어. 안에 있음 문 열어. 수현아. 문 좀 열어봐. “
30분 째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시끄럽게 하자 주인이 올라온다.
“ 어머 아가씨. 지금 뭐하는 거에요? ”
“ 아. 안녕하세요? 여기 사는 아가씨 친군데요. 만나러 왔어요. ”
“ 안에 없는 거 아니에요? 요즘은 집에 없는 것 같던데.. 항상 불도 꺼져 있고 얼굴도 보기 힘들구요. 그래서 어디 갔나 했는데.. ”
“ 항상 불이 꺼져있어요? 이 집 사는 아가씨 얼굴 본 게 언제에요? ”
“ 음.. 2주는 됐을 걸 아마도. 아무튼 요즘 얼굴 보기가.. 어머. 아가씨. 가는 거에요? ”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뛰어 내려간다. 뛰어 내려가다가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 이기사 님. 저 경미이에요. 부탁할게 있어서요. 문 수리공 좀 지금 이쪽으로 보내주시겠어요? 네.. 최대한 빨리요. ”
한 시간쯤 지나서 문 수리공이 수현의 집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수현의 현관문에 자물쇠를 뜯어내기 시작한다. 소리가 커지자 다시 주인이 올라온다. 문을 뜯어내는 것을 보고 허겁지겁 달려온다.
“ 어머. 이 아가씨 지금 머하는 거야? 멀쩡한 문을 왜 뜯어내요? 응 ? ”
“ 제 친구가 이 안에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하는 거니까. 이해 좀 해주세요. ”
“ 아니. 안에 있으면 문을 열어줬겠지~ 이렇게 문을 뜯어 놓으면 우린 어쩌라구~ ”
볼멘소리를 하는 주인의 마음을 눈치 챈 경미는 모든 수리비는 배상한다고 말하고 수리공을 재촉한다. 문이 열리자 재빠르게 집 안으로 들어가 수현을 부른다.
“ 수현아. 수현아! ”
방안으로 들어간 경미는 침대위에 힘없이 쓰러져 있는 수현을 발견하고는 뛰어 간다.
“ 수현아? 수현아. 왜 그래.. 눈 좀 떠봐. 최수현? ”
수현의 몸은 이미 불덩이였다. 땀도 많이 흘리고 있었고 입술은 매우 말라있었다. 같이 온 수리공이 수현을 업어 택시에 태운다. 근처에 있는 종합병원에 응급실로 향하는 경미. 수현을 껴안고 말을 계속 걸어 보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다.
“ 수현아~!!! ”
JD그룹 세미나실. 많은 이사진들과 각부 부장 과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중요한 회의가 진행 중이다. 다른 사람들은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나 발전 방향을 제안하고 기획하고 있지만 승우는 그 자리에만 있을 뿐 멍한 얼굴이다. 중요한 위치에 앉아 있으면서도 마음을 잡을 수가 없는 자신이 가끔은 한심할 때가 있다. 그 만큼 그 여자는 자신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선택의 조건이 아닌 필수 조건이었다.
병원에 도착해 응급실로 실려 가는 수현. 택시에서부터 승우에게 전화를 계속해서 해보았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다. 답답하기만 하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두렵기만 하다. 자신이 소중한 친구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 겁이 난다. 좀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던 수현에 대한 서운함과 섭섭한 감정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눈물이 난다. 게다가 이 사실을 제일 먼저 알아야 하고 궁금해 하고 있을 승우에게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한 시간에 걸쳐서 여러 가지 검사가 진행된다.
지겹고 지루한 회의가 끝나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오는 승우. 의자에 앉아 관자놀이를 한다. 오늘 하루 종일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데 몸은 일을 하느라 참으로 고된 하루였다. 주위를 살피다 책상위에 놓여 있는 핸드폰을 보고 폴더를 연다. 부재중 전화 9통.. 누굴까? 이름을 확인해 보고는 승우의 눈이 커지기 시작한다. 경미였다. 바로 통화버튼을 부르는 승우.
응급실 안. 모든 검사가 끝나고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경미. 응급실에 배치되어 있는 작은 침대에 누워 링겔을 맞고 있는 수현의 손을 한손으로 잡고 한손으로는 승우에게 전화를 건다. 역시나 받지 않는다.
“ 도대체 .. 승우씨는 뭐하느라 전화를 이렇게 안 받는 거야? 수현이가 이러고 있는데.. 휴.. 좀 받아라..받아... ”
그렇게 투정을 부리고 있을 때 경미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온다. 발신번호를 확인하고는 반가운 듯 받는다.
“ 승우씨. 아유. 전화를 왜 이렇게 안 받아요. 내가 얼마나 했는데.. ”
‘ 탁!!!! ’
누군가가 자신의 전화를 가로챈다. 놀래서 보니 수현이었다.
“ 수..수현아? 깼니 ? 좀 어때? 괜찮아? ”
그 때 또 다시 울리는 경미의 핸드폰. 수현의 손에 있는 핸드폰을 받으려고 손을 내미는데 수현은 손을 멀리한다. 계속해서 수현의 손 안에서 울리는 핸드폰.
“ 수현아? 그 전화 아마 승우씨 일거야. 이리 줘. 내가 받을게. ”
“ 받지마. ”
받지마?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할 뻔 했다.
“ 뭐라구? ”
“ 받지말라구! ”
“ 수현아..? 무슨 소리야? ”
“ 이 전화 승우씨 전화라니까. ”
“ 그러니까 받지 말라고. 받지 말란 말야!!! ”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변해버리는 수현의 태도에 놀라는 경미. 승우가 말하던 수현이가 변했다라는 말은.. 이 걸 보고 하는 말인 것인가. 당황해서 순간 멍해진 경미. 그 때 간호사들과 담당의사가 온다. 수현의 바이 탈 사인을 체크하는 의사.
“ 최수현씨. 제 말이 들리나요? ”
아무런 대구도 하지 않는다. 이내 고개를 돌려버린다.
“ 최수현씨. 제 말이 들리나요.? ”
그래도 아무런 대답이 없자 무안했는지 경미가 대신 설명한다.
“ 의사 선생님. 수현이 들려요. 방금도 저랑 대화 했어요. ”
“ 최수현씨. 혹시..알고 ..계셨습니까? ”
의사의 말에 심하게 흔들리는 수현의 눈동자. 또 다시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는다. 그 모습에 뭔가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의사. 그러나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경미뿐이었다. 이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알고 계셨군요...치료가 시급합니다. ”
“ 그..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알고 있다니요? 뭘요? ”
“ 최수현씨 보호자 되십니까. ?”
“ 아. 네.. 보호자 맞습니다. ”
“ 최수현씨에 병명 말입니다. ”
“ 병...병명이요? ”
수현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의사를 본다.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 모르고 계셨습니까? 최수현씨는 뇌종양을 앓고 계십니다. ”
뇌종양..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단어이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그래. 드라마에서 들어봤었지. 드라마에 재미를 더하기 위해서 시청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작가들이 써 내려가는 소설에 불과한...그..뇌종양? 하..하...하...
밖으로 뛰쳐 나가버리는 경미.... 그런 경미를 잡을 수도 없었다. 너무도 미안해서. 또 다시 수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4
경미와 통화 중에 갑자기 전화가 끊어져 다시 해보았지만 그 이후로는 연락이 두절 되 버렸다. 부재중 전화가 9통씩이나 왔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이고 그 중요한 일이라는 것은 아마도 수현의 일 일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로 연락이 안 되자 마음이 초초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렇지.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 할리가 없다. 한 순간에 변했다는 것은 달라졌다는 것은 무언가 그 사람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게 뒤따르기 마련이다. 승우의 말에 의하면 수현은 너무도 냉정하게 변했다고 했었다. 마치 다른 사람 같을 정도로. 그리고 그렇게 떠나버렸다고 했었다. 그 누구보다도 서로가 얼마나 사랑하는 지 잘 알고 있는데 분명 뭔가 사정이 있는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맞았던 것이다.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혼자서 얼마나 아프고 외로웠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한참을 밖에서 울고 진정이 됐는지 병원 안으로 다시 들어온다. 침대에 앉아 쭈그리고 앉아 있는 수현의 모습을 보자 울컥 하는 경미.
“ 너 지금 머 하는 거야? 너 링겔 맞고 있는 거 안 보여? 이렇게 앉아 있음 어떻해?! ”
다른 사람들이 보면 화를 내고 소리치는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수현에게는 아니었다. 경미는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다. 눈물 흘리는 수현.
“ 울기는 왜 울어! 뭘 잘 했다고 네가 울어? 울 사람이 누군데 네가 우냔 말야 ! ”
자신에게 소리치고 화내는 경미를 보면서 가슴이 아파 운다. 그러나 소리는 내지 못한다. 지금 것 그랬던 것처럼 참아야 하니까 참는다. 눈에서 눈물이 아무리 흘러 내려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마치 순간적으로 벙어리가 돼버린 사람처럼. 그런 수현의 모습이 안쓰러운 경미는 수현의 어깨를 붙잡고 흔든다.
“ 울어. 소리 내서 실컷 울란 말야. 바보야! 왜 소리 내서 울지도 못하니? 힘들다고 아프다고 소리치면서 울기라도 하란 말야.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흑 흑흑.. ”
수현을 껴안고 흐느껴 우는 경미. 그제 서야 수현도 그동안 참았던 눈물은 쏟아 내기 시작한다. 응급실 안에는 수현과 경미의 울음소리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이제는 경미와도 연락이 되지 않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진심이었을까. 정말로 자신과 헤어질 작정이라도 하고 자신이 찾을 수 없도록 어디론가 꽁꽁 숨어버린 걸까. 이제는 경미까지 합세하여 자신을 외면 할 생각인건가. 사무실 책상에 앉아 핸드폰 슬라이드를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가 다시 열기를 한 시간 째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선우. 자신이 들어온 지도 모르고 핸드폰에만 집중하는 승우의 모습은 안타깝다 못해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두운 병실 안. 병원 입원 소속을 밟고 1인실로 잡아 치료를 시작했다. 못 본 사이에 친구의 체중은 7키로 그램이나 줄어 있었고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다. 그런 친구를 위해서 맛있고 입맛이 도는 음식을 다 해주고 싶었으나 치료 중에는 치명적인 음식들을 섭취해서는 안된다는 의사에 말에 속상하다. 잘 먹지도 못하는데 또 다시 먹은 것을 입으로 걸러내고 괴로워하는 수현을 볼 때면 눈물이 나서 견디기가 힘들 정도이다. 오늘도 약기운으로 간신히 잠이 들었다. 잠이 든 수현을 바라보는 경미. 그러다 침대에 엎드려 잠이 드는 경미. 모두가 잠든 고요한 병원. 그리고 병실.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 오..오빠.. 승우오빠...오..빠.. ”
수현의 목소리에 놀라서 잠에서 깬 경미. 온 몸에 땀범벅이가 된 채 승우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모습을 본다.
“ 수현아....흑....어떻하면 좋니...하... ”
“ 회장님. 한 이사님이십니다. ”
“ 들여 보네. ”
회장실 문을 열고 선우가 들어온다.
“ 부르셨습니까. ”
“ 앉아라. 장 교수님이라고 기억하고 있을 거다. 그분이 오늘 새벽에 돌아가셨다는구나. 나도 나중에 가보겠지만 네가 우선 가서 얼굴이라도 비추고 유가족들을 만나보고 오너라. 장남인 승우도 찾아뵙는 게 예의겠지만 그 녀석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니라고 하니. 어쩔 수 없지. ”
“ 예. 알겠습니다. ”
검은 정장차림으로 기인의 명복을 빌어 드리기 위해 장례식장을 찾은 선우. 장례식장에 들어서자마자 쏟아져 나오는 울음소리며 많은 사람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로 가득하다. 선우는 왠지 이런 곳, 이런 소리가 싫다. 유가족에게 인사를 하고 기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절을 한다. 식사를 하고 가라는 유가족의 권유를 예의 있게 사양하고 장례식장을 나오는 선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던 중에 1층에서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는 순간 멈칫한다. 분명 수현이었다. 문이 닫히려고 하자 재빠르게 내린다. 수현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천천히 뒤따라간다. 환자복을 입고 한 쪽 손에는 링겔 꽂이를 들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걸음걸이 또한 느리고 힘이 없어보였다. 수현이 커브를 돌아 어디론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 곳이 병실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문 앞에 이름을 보니 ‘최수현’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무엇에라도 홀린 듯 어디론가 달려가는 선우. 안내 실에 있는 간호사를 찾는다.
“ 하..하..저기요. 1010호에 있는 환자요. 최수현 환자요. ”
“ 네 최수현 환자 말씀이세요? ”
“ 그 사람. 병명이 뭡니까? 어디가 아파서 입원했습니까? ”
“ 보호자이십니까? 보호자가 아니시면 저희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
“ 보호자? 보호자는 아니지만. 난 그 사람 애인이요. 꼭 그 사람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부탁 좀 할게요. 알려주세요. 어디가 아픈 겁니까? ”
병원에서 힘없이 걸어 나오는 선우. 무엇에라도 홀린 사람처럼. 멍한 얼굴을 하고는.
[ 최수현씨는 지금 뇌종양을 앓고 계시군요... 그것도 상태는 아주 심각합니다. 말기 판정을 받은 상태예요. ]
5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스며들어 옴 몸을 움 추리게 만드는 계절이 찾아오고 있었다. 길거리에 사람들은 하나 둘 씩 얇았던 가을 옷 위에 두꺼운 옷을 입기 시작했고 더 이상 경치 좋은 공원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을 보기는 힘들었다. 하루 종일 병실에서 누워있거나 치료를 받는 일이 하루의 전부가 돼버린 수현은 어느 샌가 웃음을 잃어버렸다. 자신의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간호해주고 옆에 있어주는 소중한 친구가 있기 때문에 울고 싶어도 참고 매일을 견뎌내고 있었지만 수현에게는 더 이상 이 세상이 아름답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하나를 잃어버리니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병실 안에서 창문을 통해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수현은 창문에 비치는 사람들을 만져본다.
“ 경미야. ”
“ 응? ”
“ 화내지 말고 들어줘. ”
수현의 말에 순간 미간을 찌푸리는 경미. 그러나 다시 핀다.
“ 그래. 말해봐. ”
“ 만약에.. 만약에... 내가 죽으면...”
“ 수현이 너....! ”
“ 화내지 말고... ”
“ 내가 죽으면.. 우리 부모님이 계신 나무 밑에 묻어줘. 그리고 혹시나.. 다시 승우오빠를 만나게 되는 날이 생긴다면... 그래서 오빠가 혹여나 내 안부를 묻는다면..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다고.. 그렇게 전해줄래.. ? ”
“ 수현아........하.. ”
수현을 껴안는다. 이런 말을 하는 수현의 마음은 지금 자신의 아픔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안아주는 일 밖에 없었다.
승우의 사무실을 찾은 선우. 사무실로 들어가려고 하자 비서가 막아선다.
“ 본부장님은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
“ 그럼 어디에 있습니까? ”
“ 오늘 여러 간부위원들과 점심 만찬이 있어서 그 곳에 가셨습니다. ”
“ 하... 뭐라구요? 거기가 정확히 어딥니까? ”
차를 운전하는 선우는 평소보다 속력을 더 낸다. 하루 동안 고민했다. 이 사실을 형인 승우에게 전해줘야 하는 게 옳은 일인지. 형을 너무도 사랑하는 한 여자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파할 형을 위해서 일부러 모질게 떠났을 텐데.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그러나 지난 3주 동안. 수현이 없는 3주 동안의 승우 모습은 죽은 사람과도 같았다. 갈등 속에서 결정을 내리고 사무실을 찾았지만 만날 수 없었다. 감부위원들과의 점심만찬이라는 말에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하루속히 형을 찾아내야 한다. 만나야 한다. 전통 한식집 앞에 차를 세우고 승우를 찾는다. 승우에 목소리가 들렸고 어떠한 노크와 말도 없이 문을 활짝 열어버린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선우를 본다. 선우는 간부위원들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 안녕하십니까. JD그룹에 한선우 이사입니다. 잠시 급한 일이 있어 본부장님을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승우가 밖으로 나와서 선우를 붙잡고 말한다.
“ 너 지금 무슨 짓이야? 오늘 점심 만찬은 중요한 자리인데. 이렇게 나타나서는.. ”
“ 중요한 점심만찬? 하.... 형이 지금 이러고 있으면 어떻해? 수현이는 이제 안 찾아? ”
수현이라는 말에 살짝 흔들리는 승우의 눈을 선우는 분명 보았다.
“ 이제..지쳤다. 일부러 찾을 수도 없게 숨어버린 사람.. 찾을 능력 이젠 없다..나도.. ”
승우의 말과 태도에 화가 난 선우는 선우의 목덜미를 잡는다.
“ 이젠 지친다구? 능력이 없어서 못 찾겠다구? 그게 말이 돼? 그게 말이 되냐구? ”
“ 이거 놔. 이런 말이였다면 나 먼저 들어간다. ”
등을 돌려 걸어간다.
“ 아프단 말야! 수현이 많이 아프단 말야.! ”
가던 길을 멈취는 승우. 천천히 뒤를 돌아 선우를 본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 오고 싶어도..형한테 오고 싶어도 못 온단 말야! ”
“ 그게...무슨 말이야? 수현이를 만났어? 그래? ”
“ 뇌종양이래. 수현이. 뇌종양 말기 판정받았대! 그래서 일부러 형 떠난거라구! ”
갑자기 미친 듯이 밖으로 달려 나가는 승우. 그 뒤를 따라가 승우의 팔목을 잡는다.
“ 형 지금 이 상태로 운전 못해. 내 차타고 가. ”
차에서 내려 병원으로 뛰어 들어가는 승우. 그 뒤를 따라가는 선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느리다고 생각됐는지 비상계단을 이용해 이동한다. 한 걸음에 달려와 수현이 입원에 있는 병실1010호 앞에 서 있는 승우. 문 앞에 이름을 확인하자 눈시울이 붉어진다. ‘최수현’ 얼마나 그리웠던 이름인가. 손잡이를 잡으려고 하다가 잡지 못하고 벽을 주먹으로 치는 승우. 그 때 병실 문이 열린다. 그리고 경미가 물 컵과 물병이 든 쟁반을 들고 나온다. 병실 문이 닫히고 가려는 순간. 승우를 발견하고는 놀라 잡고 있던 쟁반을 놓치는데 승우가 받는다.
“ 아.... 스...승우씨.. ”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6
수현의 병실 안. 공기 청정을 위해 가습기가 작동중이고 약기운으로 겨우 잠이 든 수현은 침대에 누워있다. 너무도 다른 모습으로 누워있는 수현을 보자 눈물이 난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의자에 앉아 수현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머리를 가다듬어 준다.
수현이 처음 이별을 통보했을 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분명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내 앞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던 여자가 하루아침에 냉정한 표정을 하고 나타나 헤어지자고 모질게 말할 때 분명 거짓일거라고 생각했었다. 아니 그 때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이후로 만날 수 없게 되자 어쩌면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진정으로 자신을 떠나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점점 포기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렇게 모질게 떠난 그 여자는 병실에 힘없이 누워있었다. 무서운 병명을 안고 고통 받고 있었다. 혼자서 그 아픔을 견뎌야 했던 그 시간들이 너무나 가슴 아프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한테도 말 못하고 오랜 시간 절친하게 지냈던 친구에게도 말 못하며 아프다고 힘들다고 하소연할 한 사람 없이 얼마나 아팠을까.
“ 수현아... 수현아.......하....하..흑..흑.. ”
“ 아..안돼...오..오빠.. ”
꿈을 꾸는 듯했다. 오빠라 하고 하는 걸 보니 아마도 자신이 수현의 꿈에 등장했을 것이다. 이렇게 꿈속에서만 애타게 불렀을 것이다. 보고 싶어도 그리워도 견뎌내며 또 견뎠을 것이다. 그리고 몇 분 후에 수현이 눈을 뜨기 시작한다. 흐릿했던 시야가 또렷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모됐다. 시야가 또렷해지자 자신의 눈앞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경미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더 또렷해지자 수현의 동공이 커지기 시작한다. 수현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꿈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사람이 지금 자신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럼 아직도 꿈을 꾸는 중이란 말인가?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엔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의 얼굴이 너무 선명했다. 너무도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꿈속에서도 사무치게 그리웠던 얼굴이라 벌써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감상에만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게 만약 현실이라면.. 안될 일이었다.
“ 수현아. ”
자신을 부르는 낮은 저음 소리에 부드럽고 달콤하기만 한 저 목소리는 분명 그 사람이 맞았다. 또 다시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린다. 그러다 다시 눈에 힘을 준다.
“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야? ”
“ 수현아.. ”
“ 네 이름 다신 그렇게 부르지 말랬잖아. 기억 안나? 다시는 얼굴 마주치는 일 없도록 하자고 했었잖아! ”
또 다시 자신 앞에서 모질게 냉정하게 연기를 하는 수현을 보면서 가슴 한쪽이 시려온다. 그런 말들을 하면서 자신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내뱉으면서 내게 준 상처가 가슴 아파 얼마나 많은 시간을 눈물 흘렸을까.
“ 보고 싶지 않아. 당장 여기서 나가줘! ”
“ 싫다.. ”
“ 왜 이래? 왜 이렇게 질척거려? 우린 이미 끝났어! 끝났다고! 그런데 지금 뭐하는 거야? 하..하.. 그래.. 오빠가 나가기 싫다면 내가 나가줄게. ”
침대에서 내려와 자신의 오른팔에 꽂혀 있던 링겔 주사를 뽑아 버리는 수현. 그 순간 동공이 커지는 승우. 수현의 오른팔에서는 피가 난다. 병실을 나가려는 수현을 붙잡아 자신의 손수건으로 수현의 팔목을 감싸주는 승우. 눈물이 나려는 걸 참으려 무던히 노력한다.
“ 이거 놔! 신경 쓰지 말라고! 이 손 놔! ”
“ 못 놔 ! 절대로! 이젠 너의 거짓말의 속지 않아. 그렇게 다신 널 보내지 않을 거야! ”
“ 뭐? 거짓말? 하...내가? 뭐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해? 착각 하지마~ 하.. ”
“ 똑바로 들어 ! 네가 어떤 병에 걸렸던, 얼마나 살던, 그건 내게 중요하지 않아! 너만 날 사랑한다면.. 그리고 내가 널 사랑하니까 끝까지 이 손 못 놔! 알아들어? ”
“ 하..하... 누가 아직도 오빠를 사랑한대? 내가? 착각 하지마. ”
“ 봐~! 지금도 네 눈이 말하고 있잖아. 날 보는 네 눈이 날 보는 순간부터 계속 흔들리고 있잖아! 이래도 아니라는 거야? ”
너무도 정곡을 찔러 버렸다. 그랬다. 자신의 눈은 이미 승우를 보자마자 눈물을 한 바가지라도 쏟아 부을 것 같은 그런 눈일 것이다. 아마도. 애써 참느라 눈을 더 충혈 되어 가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끝까지 잡아떼야만 했다. 그것에 마지막으로 잘 하는 일 일거라고 생각했던 수현이었다.
“ 여기까지 알고 왔다는 건 벌써 내 병명을 알았다는 건데. 내가 뇌종양 말기 판정 받은 여자라는 거 다 알면서... 지금..그런 말이 나와? 오빠 미쳤어? 미쳤냐구! 나 죽는다고! 죽는단 말야~! ”
이제는 발악에 가까웠다. 소리치며 또 소리친다. 그런 수현이 안쓰럽고 아프기만 한 승우.
수현을 잡아끌어 자신이 품안으로 밀어 넣는다. 놓으라며 소리치고 승우를 때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 꽉 껴안는다.
“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
“ 말했지.. 이젠 절대 놓는 일 따윈 없을 거라고.. 내가...내가 너.. 살릴 거야. 누가 뭐래도 내가 너..꼭 살릴 거야. 이렇게 널 보내진 않아. 다시는! ”
“ 바보....... 멍충이....... 가라니까...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니...? 흑..흑...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발악하며 밀어내던 수현. 승우를 때리며 밀어내려던 손은 승우를 껴안는다. 얼마나 그리웠던 품이었는지. 얼마나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었는지. 오랜 시간동안 두 사람은 뜨거운 포옹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