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는 제안이었다. 유치하고 우습지만 나는 그놈이 시키는 데로 했다. 그놈의 여자친구라는 애는 내가 그 한마디를 건내자 당황한 표정으로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나는 아무말도 덧붙이지 않은 채 돌아섰다. 내 임무는 거기까지 였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여자애가 붙잡았다.
"근데.. 헤어질 수 있어."
그 날 쌍코피가 터지도록 얻어맞는 여자애가 불쌍하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5만원을 벌 수 있었다. 그 때 난 깨달았다. 내 얼굴이 돈이 되다는 걸..
1. 클럽 파트너
나는 요즘 몸을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 멋진 몸은 멋진 옷발을 완성시킨다. 내 사업의 특성상 나는 어떤 옷도 잘 소화시켜야만 고객을 만족시킬 수가 있다. 그러니 힘들어도 몸만들기는 하루도 빼먹을 수가 없다. 나는.. 사업가니까..
[따르르릉]
전화가 온다.
"네, 당신의 빈자리를 책임지겠습니다."
"당신이 빈자리맨인가요?"
"그렇습니다."
이 여자.. 당차다. 보통 이곳을 찾는 고객은 열등감에 가득찬 사람들이라 목소리에 주눅이 들어야 정상
일 것이다. 하지만 이 여자의 목소리엔 지나칠 정도의 자신감이 느껴진다.
"오늘 밤 클럽메이트 해줄래요?"
"클럽 메이트라면.."
"딴 남자들 달라붙는거 싫어."
"네 알겠습니다."
"대신 당신 얼굴보고 결정할거야. 그래도 돼죠?"
"네 고객만족이 제 목적이니까요."
건방지다. 감히 내 얼굴을 의심하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의 목적은 돈이다. 고객만족은 곧 돈이
다. 실망하지 않게만 해 주면 된다. 두고봐라..
어쨌든 오늘의 계약이 성사되었다. 오늘의 장소는 클럽. 사업의 목적상 나는 모든 경험을 중요시한다. 다행히 나는 한달에 한번꼴로 클럽을 출입중이었다. 오해하지 마시라! 즐기기위한 것이 아니라 사업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사업가니까..
장소가 장소니만큼 스타일에 신중해야 한다. 너무 꾸며도 촌스럽고 그렇다고 안꾸미면 없어 보인다.
꾸민듯 안꾸민듯한 멋진 스탈을 찾아보자. 나는 우선 바지를 고른다. 몸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바지는 전체스탈을 결정하는데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한다. 오늘의 바지는 니뽄필이 물씬나는 구제진으로 하겠다. 다음으로 티도 결정했다. 클럽은 수많은 사람들의 체온으로 인해 찜질방을 연상시킬 만큼 덥다. 그래서 아주 얇은 겨자색 민소매티로 입을 것이다. 칙칙한 구제진에 칙칙한 겨자티는 너무한거 아니냐구? 흥! 나의 센스를 무시하지마라. 그래서 벨트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징이 가득박힌 벨트를 둘렀단 말이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악세사리.. 악세사리는 패션을 완성시키는 양념과 같은 존재다. 나는 귀에 심플한 피어싱을 하고 얼마전 태국에서 산 특이한 문양의 긴 목걸이를 둘렀다. 이제 나갈 준비가 거의 다 되어간다. 나는 산뜻한 향의 데오드란트를 바른 후 덧 입을 자켓을 결정할 것이다. 자켓을 벗는 순간 그녀는 나의 데오드란트 향에 다시 한번 빠져들겠지. 자켓을 고르기 위해 옷장을 열었다. 옷장에는 어제산 청자켓이 나의 눈길을 끌고 있다. 하지만 안 될 말이다. 나는 이미 청바지를 입지 않았느냐! 청바지와 청자켓이란 앙상블은 80년대 이미 외면당한, 참으로 민망한 한쌍이란 말이다. 그래서 나는 검정색 점퍼형 자켓을 걸쳤다. 다음은 가방이다. 오늘의 패션을 가방하나로 망가뜨릴 수도 있을 만큼 가방또한 중요한 소품이다. 나는 거친 가죽소재의 힙색을 꺼내 느슨하게 허리에 둘렀다. 그리고 카키색 아르마니 선글라스로 나의 뽀얀 얼굴을 더욱 부각시켜본다. 마지막까지 대단한 집중력으로 완성된 나의 패션은 그야말로 환상이다. 그러나 잠깐! 남자의 스타일은 머리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나는 왁스로 자연스런 스탈을 연출해 낸다. 부시시해 보이면서 멋스러워 보이는 나의 머리스탈.. 흠..간지가 철철넘쳐 흐르는걸? 나는 전신 거울을 통해 오늘 나의 모습을 관찰해 본다. 이럴수가.. 나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모습이다. 오늘도 너무나 멋있는 나의 모습을 디카에 담는다. 오늘 내 미니홈피에 올릴 것이다. 오늘 고객은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거래를 했는지 다시한번 감사하게 될 것이다. 이제 나는 그녀를 만나러 나간다.
여기는 홍대앞.. 홍대앞의 밤공기는 왠지 모를 묘한 마력을 풍긴다. 나는 이제 나의 고객을 찾을 것이다. 흠.. 난 오늘도 사람들의 시선속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사람들의 시선따윈 더 이상 부담이 아니다.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일이니까.. 나는 약속장소에 멈춰 주위를 둘러본다. 이제 나는 고객이 주문한 제츠쳐를 취해야한다. 그러면 고객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다가오겠지. 내 사업의 철칙은 절대로 고객에게 연락하지 않는 것이다. 연락은 오직 고객에게서 올 뿐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 나는 철저하다. 나는.. 사업가니까. 나는 오늘의 건방진 고객이 요구한대로 두 무릎을 꼭 껴안은 순수한 소녀의 자세로 쪼그리고 앉아 애꿎은 운동화끈을 풀었다 맸다를 반복하는 중이다. 힘들다. 아니, 힘든 건 둘째치고 민망하다. 이렇게 멋진 사내가 이런 포즈를 취하고 있다는 건 도대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한쪽무릎도 아닌 두쪽무릎을 이렇게 구부리고 앉아 있다니 말이다! 하지만 이건 고객의 요구다. 그러니 나에게 있어 이 자세는 어찌할 수 없는 사명이란 말이다! 나는.. 사업가니까.
아.. 벌써 세번째 이 동작을 반복하고 있건만 고객은 나타나지 않는다. 설마..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 지금 내가 퇴짜를 맞은 것이란 말이냐! 아직 수십명의 고객을 상대했지만 그런 경우는 없었다. 난 언제나 완벽했단 말이다! 이젠 얼굴에 핏줄이 솟고 땀방울까지 송송맺히기 시작했다. 아뿔사! 순간 불길한 예감이 나의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혹시.. 쭈구리고 앉아있는 이 요상한 자세가 고객으로 하여금 나의 완벽한 자태를 의심하게 만들고 있는건 아닐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이상 나는 더 이상 이 요상한 자세를 유지할 수 가 없다. 나는 쥐가 내리는 다리를 내색하지 않은 채 드디어 나의 완벽한 몸매를 서서히 펼쳐보인다. 그리고 여유있게 주위를 쓱 둘러본다. 몇몇의 사람들이 나를 보며 수군거리고 있다. 내가 멋있어서 그러는 건지.. 요상한 자세로 놀림을 받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기분이 좋지 않다. 나는 일순간 나도 모르게 자신감을 상실한 채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이건 정말 나답지 않은 짓인데 말이다. 하지만 떨구어진 나의 시선에 들어온 것이 있다. 내 바로옆에서 나와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꼬마.. 무릎을 덮는 보라색 후드티 모자를 눈까지 푹뒤집어 쓴 이 꼬마가 나를 올려다 보며 암호를 외친다.
"휘리휘리"
이럴수가 저 아인 언제부터 저기 앉아있었단 말인가.. 꼬마가 일어난다. 꼬마는 민소매 후드티안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후드티 밖으로 드러낸 팔뚝이 한손에 잡히고도 한참이나 남을 정도로 가늘다. 후드티 아래 입은 밤색 레깅스는 그녀의 부러질 듯한 다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안그래도 작은 이 꼬마는 앙상한 몸 때문에 더욱 작아보인다. 꼬마가 나를 찬찬히 살피더니 다시 입을 연다.
"통과! 가요!"
"저기.."
혼란스럽다. 상대는 꼬마가 아닌가!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이냐!
"혹시..조카? 이모는?"
나는 조심스레 꼬마에게 묻는다.
"잘봐!"
갑자기 꼬마가 기분이 상했다는 듯 거칠게 모자를 벗어제낀다. 모자속에서 '펑'하고 보랏빛 머리카락이 꼬마의 허리까지 쏟아져나온다. 나는 꼬마를 더욱 자세히 살펴본다. 언뜻 볼 땐 분명 꼬마였는데 이제보니 아니다. 얼굴은 창백하게 희고 눈썹은 반을 잘라먹었다. 눈은 보랏빛의 화려한 스모키메이컵으로 말할 수 없이 깊고 야성적이며 입술은 눈부시게 붉다. 그런데 이 꼬마.. 아니 이 여자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마냥 머리속이 멍멍해진다. 이 여자.. 묘하다.
"이제 가지."
150cm도 채 안되는 이 여자가 나를 리드하듯 클럽으로 앞서 들어간다. 자존심이 상한다. 보통의 고객
들은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는 쑥맥들로서 부드럽게 리드하는 나의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에 반하게 되어있단 말이다. 그러나 지금 난 이 작은 여자를 졸졸 따라 가고 있는 꼴이 아니냐! 어쨌든 나는 그렇게 그녀를 따라 클럽안으로 들어선다. 곧이어 뜨거운 열기가 훅하고 밀려온다.
"내 뒤에 붙어요!"
여자가 명령한다. 난 엉거주춤 그녀의 명령을 따라 여자의 뒤에 붙어선다. 여자가 느린 힙합리듬에 맞
춰 허리를 돌리기 시작한다. 이 작은 몸에서 이런 걸죽한 웨이브가 쏟아져 나올 수 있다니.. 나는 너무 놀라 주춤하고 만다. 순간 다른 남자가 그녀를 낚아채듯 안아버렸다. 순식간의 일이라 나도 당황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렇게 당황한 내 앞엔 어느 새 다른 여자가 다가와 히프로 나의 몸을 자극하고 있다. 하지만 안 될 말이다. 나는 나의 고객을 지켜야 한단 말이다! 나는 나의 고객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 거린다. 근데 이 낯선 여자가 이젠 내 목을 감싸안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난감하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낯선 녀와 내 사이에 무언가가 파고 들어왔다. 꼬마.. 아니 그녀다..
"내꺼야!"
아이처럼 작은 그녀가 낯선녀를 거칠게 밀어버린다. 갑작스런 꼬마의 등장으로 뒷걸음질 치던 낯선녀는 어느새 다른 남자의 팔에 안겨 사라져 버린다. 보라색 그녀가 나를 쏘아보며 화를 낸다.
"내 뒤에 딱 붙으랬잖아요!"
"죄송해요."
나는 엉거주춤 사과를 한다. 끄억~ 난 왜 이 여자 앞에선 늘 이렇게 엉거주춤이란 말인가!
"껴안아요!"
여자가 다시 명령한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부러질 듯한 허리를 꽉 껴안는다. 여자가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녀의 부드러운 웨이브가 자꾸 나의 몸을 자극한다. 강렬하고 열정적인 비트와 그녀의 춤은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그녀의 웨이브에 이끌린 듯 나도 점점 음악에 동화되기 시작한다. 정신이 몽롱해 진다. 약을 먹지 않고도 이런 환각상태가 가능하단 말인가.. 나는 정신을 잃은 듯 그녀에게 철저히 리드당하고 있다. 그렇게 몇분이 흘렀을까.. 갑자기 그녀가 나를 향해 돌아선다.
"키스해요."
여자가 발꿈치를 들어 내 목을 감싼다. 나는 마치 최면에 걸린 듯 그녀를 안아올려 입을 맞춘다. 음악소리가 저만치 멀어져 간다. 그녀와의 키스는 그녀의 웨이브만큼이나 부드럽고 강렬했다.
2. 미팅 메이트
"Great! You are so gorgeous! How beautiful you are!"
나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English converstion을 열심히 repeat after중이다. 시대는 바야흐로 국제화 시대가 도래하는 만큼 나의 프로의식은 끝없는 자기발전과 도약을 위해 채찍질당하고 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늘 자신을 가꾸어 가는 건 프로의 기본아닐까? 난 이렇듯 끊임없이 노력한다. 난 사업가니까...
[따르르릉]
전화가 온다.
"Hello, 당신의 빈자리를 책임지겠습니다."
"당신이 빈자리맨인가요?"
뜻밖의 남자고객이다. 그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그렇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오늘 미팅이 있는데 자리 좀 채워주실래요?"
감히 나에게.. 미팅의 빈자리를 메우라니.. 이건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미팅에선 본인들이 튀기위해 폭탄을 설치해야 정석일 것이다. 그렇다면 번지수를 잘 못 찾아도 perfect하게 잘못 찾은 것이다. 나는.. completely 다른 과니까.
"저.. 그렇다면 저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의구심을 느끼며 좀 처럼 하지 않던 질문까지 한다. 나의 역할에 대한 질문이라니.. 프로인 나로서는 부끄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여자들을 사로잡아요. 알겠어요? 단 한명도 빠짐없이 말이야."
반말을 섞는 이 인간.. 그의 목소리는 마치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듯 더욱 격해지고 있다. 이 남자는 대체 나에게 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인가?
"만약 그 놈에게 한명이라도 뺏기면 국물도 없을 줄 아쇼. 대신 성공하면 사례는 톡톡히 할테니."
아하! 그럼 그렇지.. 이유인 즉슨 이렇다. 고객의 친구놈중에 한놈이 자신의 인기를 엄청 거들먹거린단다. 게다가 최근 들어서는 고객의 여자친구가 사실 자기를 좋아했었다며 고객을 도발시켰다나? 그 이후 그 놈 기를 팍 죽여놓을 사람을 찾던 중 나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라고.. 역시 그럼 그렇지.. 이거.. 다시 한번 나의 능력을 검증받는 순간이 아닌가?
자 그럼 나의 자존심에 오해를 풀어주었으니 이제부터 오늘의 스타일을 완성시켜 보아야겠군. 4대4 미팅.. 오늘의 미팅 상대는 꽃다운 24살의 간호사들이다. 백의의 천사들이라.. 아직 꿈을 꾸는 순수한 아가씨들일게다. 난 오늘 4명의 천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이런 자리에서 너무 formal한 의상은 오히려 그녀들로부터 거부감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대로 후줄근해서는 안된다. 패셔너블한 감각을 부각시키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네츄럴함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쉽지않다. 그러나 나는 노련한 분석력과 동물적인 감각으로 한세트의 옷을 뽑아낸다. 약간 물이 빠진듯 하나 시원한 느낌을 자아내는 라이트 블루의 여유있는 청바지를 입고 상의로는 얼마전 사 두었던 고급스런 느낌의 인디언 핑크빛 폴로 셔츠를 걸쳤다. 뽀얀 내 피부와 핑크빛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어내며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다. 머리는 방금 일어난 듯 부시시하지만 묘한 섹시함을 주도록 왁스로 손질했다. 그리고 귀엔 작고 깜찍한 은빛 피어싱으로 마무리 한다. 풋풋하고 상큼한 이미지와 함께 섹시하면서도 력셔리한 느낌을 동시에 발산하기란 과연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것을 완벽히 소화하고 있지 않느냐! 마지막으로 전신거울의 내 모습을 확인한다. 아깝다.. 아까워.. 정말 아깝다. 사진기라는 문명의 도구가 없었다면 그냥 흘려보내고 말았을 이 완벽함이 생각만 해도 아까울따름이다. 나는 나의 소중한 아름다움을 디카에 담고 철저한 프로의식으로 무장한 채 심플한 로퍼를 신고 사무실을 나선다.
여기는 강남의 모자이크 커피숖앞.. 나는 고객이 요구한 대로 바닥에 오른쪽 발로 원을 그리고 있다. 꽤 멋있는 자태가 나올 것이라 기대했지만 계속 이 자세를 유지하자니 무슨 무용동작을 하는 양 좀 우스운 꼴이 되는 느낌이다. 빨리 고객이 나타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휘리휘리"
저음의 남자목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힌다. 나는 그제서야 민망한 동작을 멈추고 옆을 바라본다. 머리
를 삐죽삐죽 세우고 새빨간 스웨터를 걸친 이 남자는 심심하게 생긴 멀건 얼굴을 하고 완벽한 내 모습을 노골적으로 훑어본다.
"음.. 이만하면 머.. 괜찮군요."
남자는 심히 만족스러우나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는 양 얼굴근육을 열심히 잠재우고 있다.
"미팅은 지금부터 30분 후인 7시부터 시작입니다.입을 맞춰야 겠죠?"
고객은 프로인 나보다 더 노련해 보이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고객은 왕이다. 고객의 눈높이에 맞추어 주자. 나는 나이 27세의 나이에 이 남자와 직장동료다. 나는 증권회사에 다니며 여자친구가 없다. 나는 고급 오피스텔에서 혼자서 살고 있으며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덕에 부유하게 자랐다. 나는 이남 중 차남이며 형은 미국에서 변호사일을 하고 있다. 사실 이 남자에겐 이와 똑같은 조건의 실제 직장동료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반토막키에 머리가 급격히 벗겨지는 중이라고.. 나는 나의 조건을 숙지하며 그 남자와 나를 일치화 시키는 작업에 즉각 돌입한다. 나는 워낙 프로라 30분이면 이미 완벽한 그 남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의뢰인과 함께 커피숖 쇼파에 자리를 잡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남자 2명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둘 다 아주 Normal한 의상에 그야말로 보편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전혀 신경쓸 이유가 없는 인물들이다. 헌데.. 그 요주의 인물은 좀 늦는다고 했다나? 그는 분명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만화속 주인공처럼 머리를 휘날리며 들어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속셈인 것이다. '주인공은 언제나 늦는 법'이란 명제를 곱씹으며 말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는 것도 모른 체..
"어, 여긴 처음보지? 인사해 여긴 내가 말했던 그 직장동료.."
고객은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적극적으로 나를 소개한다. 일순간 친구들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버린다. 고객과 친구들의 우정이 염려되기까지 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내 임무는 고객만족이 아니던가? 그들의 우정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이렇게 고객의 친구들로부터 소외된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백의의 천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휘날리며 사뿐사뿐 걸어오는 천사들을 보라.. 곧 새초롬히 자리에 앉은 그들의 시선은 역시나 일제히 나에게 집중되고 있다. 나는 한 떨기 싱그러운 장미보다 화사하게 웃는 그녀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한다. 꽃분홍빛의 레이스가 화려하게 장식된 까만 원피스를 입은 그녀,, 하지만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꽃분홍빛 여드름들이 그녀의 양볼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지 않느냐.. 까만 물방울 무늬가 잔뜩 박힌 눈부신 흰 투피스의 그녀, 그러나 그 보다 더욱 눈부신 교정기가 그녀의 입술속에서 번쩍이고 있다. 그리고 실크소재의 다크블루 원피스를 입은 그녀.. 그 매끈한 원피스를 뚫고 나올 듯 글래머러스한 가슴으로 우리를 잔뜩 흥분케 한 그녀이지만 잔뜩 찢어놓은 눈과 코 끝을 뚫고 나올 듯한 실리콘이 우리의 시선을 가슴에만 머물 수 밖에 없게 만들고 있다. 어.. 한데.. 3명?
"한 분은.."
"걘 좀 늦는데요.."
천사들이 입을 삐죽거리며 답한다. 혹시 마지막 그녀도 주인공병이 있는 건 아닐까?
"자, 그럼 우선 소개나 하지?"
주선자인 나의 고객이 제안한다.
"안녕하십니까? 박주성이라고 합니다. 이 자식(주선자)이랑은 고등학교때부터 친구구요. 지금은 은행
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금융쪽으로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죠. 궁금한 거 있음 언제든 물어보세요."
잔뜩 주눅들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폐기넘치는 목소리의 소유자다. 하지만 여자들의 반응은 스산할 정도로 고요하다. 그는 그야말로 주눅든 표정으로 조용해 지고 만다.
"전 얼마전 7급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예비 공무원 고영호입니다. 제 미래는 그야말로 믿을 수 있는 보험같다고나 할까요? 하하하"
그러나 웃고 있는 건 그 혼자라는 걸 곧 깨닫고 만다. 자! 드디어 나의 차례가 왔다.
"안녕하십니까? 주선자와는 직장동료구요.. 이관희라고 합니다."
"어머 이름 너무 이쁘시다."
순간 무관심 한 척 손톱만 뜯고 있던 여드름녀가 호들갑이다.
"그럼 27이겠네요? 3살차이는 궁합도 안본다던데.. 호호호.."
교정녀가 한껏 환하게 웃어 보인다.
"얘는? 그건 4살차이지! 내가 7살에 학교를 들어가서 23인데.. 저랑 4살차이네요?"
왕가슴녀가 지지 않으려는 듯 더욱 적극적으로 나선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마지막 카운트 다운을
맞추려는 듯 다급히 들어선다.
"어이.. 미안 내가 좀 늦었지?"
주의를 끌려는 상투적 인삿말.. 일 순간 여자들의 시선이 그에게 꽂힌다. 그가 바로.. 오늘의 내 라이벌이다.
그는 조금 신경이 쓰인다. 훤칠한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가 우선 거슬렸으며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목소리가 또한 거슬렸다. 그리고 카키색 셔츠에 옅은 감색의 면바지를 입은 감각또한 거슬렸다. 그러나... 여자들의 시선은 마치 부메랑처럼 일제히 나에게 돌아온다. 마치 누가 왔었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조용히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가 인사할 틈도 주지 않는 그녀들... 곧 그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마치 나를 원망하는 듯한.. 그렇다! 그가 아무리 날린다 해도 그건 일반인의 수준에 비추었을 때 통용되었던 것! 이미 고등학교 시절 우리학교 킹카에게 인정받았던 내 외모는 그 수준을 초월하는 것이리라. 내 외모의 진가를 너무 늦게 깨달은 탓일까? 난 가끔 조금 전 그 순간처럼 나의 외모에 대한 객관적 혼란을 느끼곤 한다. 나의 의뢰인을 보라 귀까지 찢어질 듯 늘어나는 입술을 힘겹게 오므리고 있는 저 모습.. 오늘 그는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거래를 했는지 절실히 깨닫고 있겠지? 뿌듯함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부터 밀려온다. 이럴 때 난 살아가는 의미를 찾곤 한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지.. 매력은 외모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지 않더냐? 유머와 매너.. 그리고 카리스마.. 그것이 어우러질때 진정한 인기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관희씬 왜 여자친구 없으세요?"
교정녀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묻는다.
"많이 바빴어요.. 우선 자리를 잡아야 했거든요. 한번 여자친구한테 빠지면 헤어나질 못할 것 같아서.."
그리고 난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여자들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그럼 이제 준비가 되셨나요?"
하고 노골적인 질문을 해온다.
"그러니까 나온 거 아니겠습니까?"
부드러운 목소리와 감미로운 미소로 답한다. 여자들은 거의 넋을 잃고 만다. 그 요주의 인물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자리를 메우고 있을 뿐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는 걸 완벽히 깨달은 모양이다.
그 순간, 카페문이 열리고 한 소녀가 문을 들어선다. 그 소녀는 단번에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니 카페에 있는 모두의 시선을.. 아주 짧은 초컬릿빛 컷트머리가 세련되게 어울리는 소녀.. 그녀의 이미지는 미소년을 연상케 한다. 브라운 체크의 클래식한 쇼트남방에 캐러멜빛의 스커트를 입은 소녀.. 마치 우리가 유럽에 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아주 작고 마른 소녀.. 그 소녀가 어느 순간 내 앞에 통 튀어오르듯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렇다면 이 소녀가 마지막 천사인가?
"안녕하세요?"
망설임 없는 목소리.. 익숙한 당당함. 환상적인 눈동자.. 앗! 이 소녀는.. 그녀.. 클럽 의뢰인이 아닌가!
"뭐에요? 혹시.. 아는 사이?"
난감한 순간이다! 눈치빠른 왕가슴녀가 나의 당황한 눈빛을 캐치한 것이다. 식은 땀이 바짝난다. 빨려들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 그 소녀앞에서 나는 뭐라고 해야 할 것이냐. 내 정체가 이대로 밝혀지는 것이냐! 소녀는 재밌다는 듯,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쇼파 등받이로 털썩 등을 기대며 '몰라'하며 관심없다는 듯 물컵을 집어든다. 소녀는 물을 들이키며 한쪽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나한테 반했나 본데?"
하며 큭큭거린다. 나머지 천사들의 얼굴이 굳어진다. 소녀는 다리를 꼬고 앉아 남자들을 쭉 둘러본다. 다들 넋이 나간 듯 그녀를 바라본다. 사람같지 않은.. 만화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그녀를..
다른 천사들이 갑자기 거인이 되어버렸다. 그녀들 사이에 있는 소녀는 마치 작은 요정같다. 우리와는 동떨어진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요정.. 오직 그녀만이 보인다. 신비로운 엄지공주..
"뭐야? 재미없게 커피나 마시구.. 우리 술 마시러 가는게 어때요?"
그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우리를 리드한다. 언제나 먼저 나를 이끄는 그녀.. 난 아주 익숙한 듯, 1등으로 그녀를 따른다.
독일식 맥주집.. 우리는 잔 가득 맥주를 따르고 Cheers를 외치며 맥주를 들이킨다. 소녀가 벌컥벌컥 단번에 한잔을 비운다.
"오~ 잘 마시는데요?"
남자들이 감탄스럽다는 듯 말한다.
"아.. 너무 갈증났거든요."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 앞에 빈 맥주잔을 들어보인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에게 맥주를 따른다. 그런데 자꾸 손이 떨린다. 이런 약한 모습은 곤란하다. 이럴 땐 무척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단 말이다.
"어. 그만!"
여드름녀와 교정녀 그리고 왕가슴녀가 동시에 소리를 꽥 지른다. 맥주가 넘쳐 어느새 소녀의 손을 타고 흐르고 있다. 한데 소녀는 아무런 동요없이 웃고있다. 나는 당황하여 맥주통을 내려놓고 더듬더듬 냅킨을 찾는다.
"아.. 이거 죄송합니다."
식은 땀이 흐르는 순간이다. 이런 바보같은 모습을.. 맥주 한 잔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말이다!
"저한테 사랑이 넘치시는 가봐요?"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롭게 맥주한모금을 마신다.
"이것봐.. 이 친구 얼굴 빨개졌는걸? 하하하.."
요주의 인물이 나를 놀리며 넘어갈 듯 과장된 박장대소를 터뜨린다. 그러자 normal하게 생긴 나머지 인간들도 고소하다는 듯 낄낄 거린다. 이런 사소한 농담하나 받아치지 못하고 얼굴이 빨개져 버리다니.. 이대로 광대가 되고 말 것인가? 아니.. 그럴 순 없다. 나도 만만치 않은 놈 아니더냐?
"이런.. 들켜버린 건가요?"
나는 이열치열의 방법으로 그들에게 반격한다. 소녀가 나의 반응에 흠짓 나를 쳐다보는가 싶더니 쿡하고 웃어버린다. 그러나 나머지 천사들의 얼굴은 더욱 굳어간다. 하지만 주선자는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이미 이 자리를 뜬 상태.. 더 이상 나머지 천사들을 배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곧이어 술자리 게임계의 전통.. 왕놀이가 시작되었다. 8개의 쪽지에 1부터 7까지의 숫자와 '왕'자를 채워넣고 뽑기를 한다. 게임계의 지존인 내가 새삼스레 두근두근 긴장이 된다. 모두들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이 뽑은 쪽지를 펼쳐본다. 첫 번째 왕은 요주의 인물이 당첨이다. 요주의 인물은 씨익하고 변태적인 웃음을 흘리더니 느끼한 목소리로 명령을 시작한다.
"1번 4번 서로 목덜미에 키스하기.. 으흐흐.."
"우.. 누구야 누구?"
모두가 잔뜩 긴장하여 두리번 거리기 시작한다.
"나.. 제가 1번입니다."
normal남 1번이 수줍게 고백한다. 하지만 뒤이어..
"헉!"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두번째 normal 남이 4번쪽지를 떨어뜨린다. 우리는 결국 차마 못 볼 광경에 비위가 상해버린다.
"자.. 자.. 다시! 다시!"
우리는 쪽지를 모아 다시 뽑기를 시작한다. 이번 왕은... 왕가슴녀다. 왕가슴녀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명령을 시작한다.
"3번이 6번 귓볼깨물기.."
우.. 하는 신음소리들이 새어나온다.
"내가 3번이야.. 6번 누구세요?"
엄지공주가 자신의 쪽지를 펼쳐보이며 묻는다. 식은땀이 난다. 혹시나 내 쪽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나는.. 5번이다.
"에구.. 제가 6번입니다."
아뿔싸! 요주의 인물이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엄지공주를 바라보고 있다. 심장이 타오르는 것만 같다. 하지만 난.. 엄지공주의 조막만한 얼굴이 번들번들 느끼한 요주의 인물의 불타는 볼을 스치고, 그녀의 앵두같이 귀여운 입술이 그의 기름기 가득한 귓볼을 깨무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다. 나는 애써 시선을 외면한다. 하지만 그 순간 엄지공주의 뜨거운 시선을 느꼈던 건 나의 착각일까? 어쨌거나 요주의 인물은 뽕이라도 맞은 것 마냥 헤롱헤롱 제 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인단 말인가! 비즈니스시엔 감정따위 키우지 않는 냉혈한! 그게 바로 나 아니었더냔 말이다!
"오우 분위기 무르익고~ 한판 더!"
요주의 인물은 흥분이 극에 치달은 표정으로 쪽지를 모아 허겁지겁 섞기 시작한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의 표정.. 더 이상 봐 줄 수가 없다.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고 만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꽃혀버리는 순간이다.
"저기.. 화장실좀.."
나는 맥없이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에 들어가 애꿎은 담배만 피다 다시 화장실을 나온다.
"헉!"
나는 얕은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일 순간..아주 작은 무언가가 내 허리를 꼭 잡고 화장실로 돌격
해 들어온 것이다. 나는 얼떨결에 화장실로 다시 밀려들어온다. 그 작은 물체는 좁은 변기칸으로 나를 밀어넣고 문을 잠궈버린다. 나는 그제서야 아래를 내려다본다. 내 앞엔 엄지공주가.. 그 화려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당신.."
"오늘은 누구꺼에요?"
엄지공주의 목소리에 냉기가 서려있다.
"네?"
"현정이? 자영이? 연희?"
"그게 무슨.."
"누구랑 파트너 해 주려구 나왔냐구요.."
"저.. 그게 아니라.."
엄지공주는 그 서늘한 눈빛으로 한 동안 나를 쏘아보다 휙 하고 나가 버린다. 알 수 없는 엄지공주.. 나는 왜 그녀 앞에만 서면 머저리가 되는 것인가.
나는 한 동안 나의 감정을 추스린 후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어이.. 이거 왜 이렇게 늦어셨나! 한창 재미있는 순간에!"
요주의 인물은 정말 원망스럽단 말투로 내게 궁시렁거린다. 재수없는 인간.. 한편 엄지공주는 방금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앉아있다. 마치 나 혼자 꿈이라도 꾸었던 것 마냥..
"자~ 자~ 다시 시작합니다."
요주의 인물이 쪽지를 내려놓자 마자 각자 쪽지를 집어든다. 이번 왕은.. 그녀.. 엄지공주다. 엄지공주
는 좌중을 둘러보며 씨익 웃고는 앵두같은 입술로 명령을 시작한다.
"2번 5번 키스해요.. 뽀뽀말구 키스에요.. 아주 진하게.."
오우.. 우.. 가벼운 함성과 함께 모두가 2번과 5번을 찾아 혈안이 된다.
"저.. 제가 2번이네요..후.."
교정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수줍은 듯 말한다.
"5번.. 5번 누구야?"
하지만 5번은 좀 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아.. 누구야 이거.."
사람들은 급기야 짜증을 내며 서로의 쪽지를 공개하기 시작한다. 나는 무심코 나의 쪽지를 펼쳐본다. 어차피 엄지공주가 왕이 된 이상 난 쪽지를 확인하지도 않았더랬다. 헌데.. 헌데!
내가 5번이었단 말인가!
"저.. 죄송합니다. 제가 5번이네요.."
힘겹게 마른침을 삼킨다.
"어머.."
교정녀는 벌어지는 입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느 때 보다 더욱 번쩍이는 교정기를 과시하고 있다. 나는
침 조차 삼키지 못한 채 얼어버린다.
"키스 해! 키스해!"
잔뜩 숨을 죽이고 있는 girl들과는 대조적으로 man들은 오늘 만난 이래 가장 즐거운 함성을 토해내며 구호를 맞추고 있다. 난감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나도 모르게 엄지공주쪽을 바라본다. 얼어붙은 그녀의 강렬한 눈빛이 나의 눈과 마주쳐버렸다. 어디 해 볼테면 해보라는 그녀의 도전적인 눈빛에 자극되어 나는 반항하듯 교정녀 에게로 얼굴을 돌린다. 교정녀는 내가 어찌할 새도 없이 어느 새 내 코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그리고 어찌 할 틈도 없이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 대담하리만치 깊은 키스를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교정기가 혀에 닿는 순간 순간 쩌릿쩌릿 감전이 되는 느낌이다. 1초가 1년만 같은 순간.. '우..우..'하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아득히 들려온다. 빨리 이 순간이 끝나기만을 기도한다. 드디어 교정녀가 나를 놓아 주고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 나는 깊은 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엄지공주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하지만 그 곳엔.. 그녀가 없다. 엄지공주가 사라졌다.
3. 고독한 메이트
예~ 예~ 예~
나는 지금 어셔의 ‘yeah’에 맞춰 현란한 몸동작을 구사하고 있다. 동영상을 통해 익힌 나의 춤 솜씨는 더 이상 아마추어로 보이지 않는다. 몸치를 벌레보듯 하는 이 세상에서, 나와 같은 프로는 춤솜씨 또한 프로여야 하지 않을까? 나는 춤을 추며 거울을 바라본다. 댄스 동작과 함께 느낌을 담은 표정까지 지어 보인다. 멋있다.. 급기야 입고 있던 검은 티를 벗어 던지고 한층 나의 춤에 심취하는 순간..
[따를르르릉]
전화가 울린다.
“학학..네 당신의 빈자리를 책임지겠습니다. 학학..”
숨이 찬다. 나도 모르게 계속되는 거친 숨소리.. 고객이 오해하지 않기를..
“당신이 빈자리맨인가요?”
맥없는 여자의 목소리다.
“네 그렇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오늘 비가 오는군요.”
창 밖을 바라본다. 역시나 비가 내리고 있다.
“네 그렇군요..
“특별히 바라는 건 없어요. 하지만 이런 날 혼자 터벅터벅 집에 들어가는 건 너무 우울할 것 같네요.”
마치 나에게 신세한탄을 하는 듯한 이 여자.. 도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 우산을 안 가지고 왔는데.. 저 퇴근시간에 맞춰서 우산 좀 가져다 주시겠어요?”
순간 아연실색하고 만다. 고작 나에게 원하는 것이 우산이었단 말인가?
“후후 이건 핑계구요.. 이런 날은 누군가가 우산을 들고 날 마중나와줬으면 해요. 말동무도 되 주 시구.. 외로움도 좀 덜어주시구요.. 가능한가요?”
하긴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외로움은 배가 되곤 한다. 이런 날은 누군가와 이 쓸쓸함을 함께 나누고 싶은 법.
“예 알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추고 있던 춤을 화려하게 마무리 짓고는 샤워실로 향한다. 샤워 후 젖은 머리를
툴툴 털며 커피한잔을 진하게 탄다. 커피를 가득 부은 머그잔에서 김이 물씬 퍼져 나온다. 나 는 머그잔을 두 손 가득 감싼 채 비가 내리는 쓸쓸한 창 밖을 바라보며 한껏 감상에 빠진다. 고독이 잘 어울리는 남자.. 지금 나는 얼마나 고독한 모습인가.. 나는 문득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본다. 무척이나 분위기 있는 내 모습.. 기분이 한층 센치해진다. 나는 커피를 반쯤 마신 후 옷장으로 향한다. 그렇다! 오늘의 컨셉은.. 고독이다.
오늘은 의뢰인의 기분에 맞춰 비가 오는 분위기와 완벽히 조화를 이룰 생각이다. 여자는 분위기에 약한 법이니까.. 옷장 속을 들여다보며 잠시 고민하던 난, 본능적으로 몇 벌의 옷을 집어낸다. 오늘의 메인 컬러는 고독의 컬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컬러! 브라운이다. 나는 브라운 빛이 감도는 구제진과 깊이 파인 섹시한 까만 티셔츠를 받쳐입고 초콜릿 빛의 자켓을 걸친다. 마지막으로 블랙컬러의 비니를 눌러쓴 나는 거울을 들여다 본다. 고독 그 자체.. 나는 브라운 컬러의 심플한 컨버스를 신고 사무실을 나선다.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은 우산을 쓰고 걸어다니기 보다 아늑한 곳에 들어가고 싶기 마련.. 나는 나의 의뢰인을 위해 나의 애마를 끌고 나갈 작정이다. 비오는 날 자신을 기다리는 남자의 차안..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약간의 냉기가 느껴지는 공기속에서 그녀에게 따스한 담요를 걸쳐준다. 보송한 공기와 아늑한 분위기.. 그리고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여자는 넋을 잃고 말것이다.
나의 애마는 어느 새 테헤란로를 들어선다. 웅장한 빌딩들이 가득한 도로.. 나는 그 중 가장 크고 멋진 빌딩앞에 멈춰서 그 웅장한 빌딩을 올려다 본다. 그녀는 회계사라고 했다. 이 빌딩 어디쯤 있을까? 시계를 본다. 이제 곧 그녀의 퇴근시간.. 나는 그녀의 요청대로 라임빛 우산을 쓰고 그녀가 요구한 제스쳐를 시작한다. 한 손으로 계속 턱을 쓰다듬는 이 제스쳐는 꽤 남성다운 느낌이 가미되어 있다. 오늘은 시작부터 느낌이 좋다.
"휘리휘리.. 자기왔어?"
순간 허리에 둘러지는 거북스런 온기에 화들짝 놀라 옆을 바라본다.
"오우~ 오늘 괜찮은데?"
마흔? 그래 최소 마흔이라 확신되는 여자가 나를 올려다보며 싱글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흠짓 경계태세를 취한다.
"어머 남친?"
옆에 있던 여자들이 황홀한 표정으로 나를 이러저리 살피더니 감탄스런 눈길로 마흔여자를 우러러 본다.
"어~ 우리 자기야가 나 우산안들고 온줄 알구~홍홍.."
마흔여자는 홍홍 콧소리를 내며 더욱 나의 겨드랑이 밑을 파고든다. 나는 뻣뻣히 몸이 굳어간다.
"얘들아~ 난 우리 자기야랑 데이트좀 해야겠다. 먼저 가~"
마흔여자는 동료들을 워이워이 몰아내다시피하며 나를 올려다본다. 그렇잖아도 하늘을 바라보는 콧구멍이 캄캄한 우물처럼 내 눈앞에 뻥뚫려 있다. 순간 뇌라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상상과 함께 몸이 떨려온다.
"오늘 거래.. 꽤 괜찮은걸요?"
여자는 심히 흡족한 표정으로 깊숙히 팔짱을 낀다. 라임및 우산속의 언밸런스한 한쌍.. 나는 나의 애마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반짝이는 나의 애마.. 나는 앞문을 열어 그녀에게 타라는 제스쳐를 취한다. 하지만 여자는 차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 차문을 닫아버린다. 그리고 황당해 마지않는 내 손을 잡아끈다. 여자는 말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간다. 나는 그저 그녀에게 이끌려 갈 뿐.. 여자는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우리가 걸음을 멈춘 곳엔 나의 꿈속에서만 존재하리라 생각했던 늘씬하게 잘 빠진 외제차 하나가 서 있다. 여자는 차키를 내 손에 톡 떨어뜨리고는 조수석문을 열고 털썩 들어앉는것이 아닌가!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떨리는 손으로 차 문을 열고 꿈 속의 차를 탄다. 키를 꽂고.. 핸들을 잡는다. 차는 부드러운 엔진소리와 함께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여자는 비오는 오후와 잘 어울리는 재즈음악을 틀고 만족스럽다는 듯 목을 쭉 뻗으며 슬그머니 나를 바라본다. 부담백배라는 말이 이보다 어울릴 수는 없으리라.. 나는 잔뜩 굳은 몸을 더욱 움츠리며 드리이빙에 열중한다.
"이름이.."
"저.. 그냥 이빈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사업상 내 이름은 기밀이다.
"빈? 호호 빈자리맨의 빈인가? 호호호"
여자의 모든 말과 행동은 뭔가 정도를 넘어섰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over..
"저.. 그럼.. 이기사~"
여자는 목소리를 비틀어가며 나를 부른다. 농담조차도 거북스런 느낌.
"네?"
"여기서 우회전해요."
여자는 그때부터 나의 진로를 지시하기 시작한다. 나는 인간 네비게이터가 이끄는 길을 따라 열심 히 운전에 몰두중이다. 하지만 마흔여자의 손이 내 허벅지를 자꾸 쓰다듬는다. 묘하면서도 거북한 느낌.. 빨리 어디라도 도착함으로써 지금 이 상황이 종료되기를..
거북한 상황이 계속된지 1시간 째.. 우리는 어느 새 복잡한 도로를 벗어나 한적한 교외를 달리고 있다.
"이기사~ 저기 저 앞에서 좀 세우지? 좀 피곤하네.."
마흔여자는 꽤나 피곤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제야 내 허벅지에서 질퍽한 손을 떼어낸다. 나는 마 음속으로 큰 한숨을 돌리며 여자가 가리키는 쪽을 무심히 바라본다. 그러나..
"사모님..저긴.."
"어머? 사모님이라니? 오늘은 내 남자친구역할로 온거 아닌가?"
마흔여자가 기겁을 하며 나무라듯 대꾸한다.
"아..네 하지만 저긴.."
저긴.. 저긴.. 러브호텔이 아닌가? 나의 사업철학에서 벗어나는 곳이 아니더냔 말이다. 다른 건 몰
라도 그건 안된다. 안된단 말이다.
"저.. 계약조건을 잘 못보셨는가 본데.. 저것만큼은 제가 철저히 지키는 스타일이라.."
최대한 매너를 갖춰 마흔여자가 무안하지 않게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마흔여자의 얼굴은 어느새 내가
무안하리만치 일그러져 있다..
"지금 저를 뭘로 보시는 거에요?"
여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다. 나는 더욱 당황한다.
"아니 제 뜻은.."
"지금 저 무시하시는 거에요? 제가 욕구불만에 몸이 달아서 당신을 산줄 알아? 그런 이유라면 남자들
이 줄을 섰어. 이거 왜이래!"
"아.."
나는 감정없는 감탄사를 토해낸다.
"난 그저.. 남자들로도 해소할 수 없는 외로움을 달래보고 싶었다구.. 타인과 함께 결국은 혼자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찰을 해 보고 싶었단 말이야."
유능한 회계사라더니.. 역시 꽤 고차원적인 여자인가보다. 어쨌든 난 어줍잖은 반항을 접고 러브호 텔앞에 당도한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찰이라.. 한데 그걸 왜 러브호텔에서 해야 한단 말인가. 차에서 내린 여자는 약간은 수줍은 자태로 나의 옆에 다가와 내 팔짱을 끼고 호텔로 향한다. 왠지 내가 끌려 가는 이 느낌은 단지 이 여자의 걸음이 나보다 빨라서 일까?
열쇠를 받은 우리는 3층으로 향한다. 나는 발걸음이 무겁다. 그리고.. 303호다. 문을 열자 꽤 아늑 한 장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방 가득 장식된 보라빛이 우울한 날씨와 어우러져 한층 더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어머.. 보라빛 천지네? 그대 모습은.. 보랏빛 처럼..."
여자는 보랏빛 향기란 노래를 흥얼거리며 섹시를 표방한 눈길로 자꾸 나를 바라본다. 웃길려는 건지 유혹하려는 건지.. 여자의 의도를 알 수가 없다. 난감하다. 나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눈을 돌리 고 만다. 보랏빛.. 나는 왜 한순간 엄지공주, 그녀를 떠올린 걸까?
"어머 왜 이렇게 어정쩡하게 서 있을까? 여기 와서 좀 앉아 봐요.."
여자는 내 손을 끌고 작은 쇼파에 나를 앉힌다.
"저기 고찰을 한다고.."
나는 불안한다. 어떻게든 고찰이라는 거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요.. 커피라도 한 잔씩 마시면서 고찰을 해 볼까요?"
"아, 예. 커피는 제가 타겠습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탁자위에 놓인 머그컵에 커피믹스를 넣고 커피를 타기 시작한다.
"그대 모습은.. 보랏빛 처럼.."
여자는 또 노래를 부르고 있다. 보랏빛 향기가 이토록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멜로디였던가? 나는 커피타기에 더욱 열중한다.
"그대 모습은.. 보랏빛 처럼.."
어느 순간 그 노래가 내 등 뒤에서 멈춘다. 온몸이 쭈뼛하고 얼어붙는다. 곧이어 여자의 손이 내 허리를 두르고 여자의 의외로 풍만한 가슴이 내 등에 짓눌려 옴이 느껴진다. 나는 어색함을 감추고자 끝까지 두잔의 커피를 완성해 낸다.
"저.. 커피 드세요.."
여자가 떨어지기를 간곡히 바라며 커피를 권한다.
"그대 모습은.. 보랏빛 처럼.."
여자는 대답대신 내 등에 붙어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여자의 목소리가 내 등허리에서 부 터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온 몸이 닭살로 진동하는 느낌.. 이 여자 미친 건 아닐까? 나의 공포감은 극에 달한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떼어낸다. 여자는 의외로 순순히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나는 커피잔을 들
고 뒤돌아 여자에게 다시한번 커피를 권한다. 하지만 여자는 그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 보고 있다. 우물처럼 캄캄한 콧구멍 두개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커피잔만 들고 서 있는 꼴이 되었다. 여자는 피식 웃더니 내 비니를 슥 벗긴다.
"실내에선 모자를 벗어야지!"
여자는 훈계조로 말하며 내 비니를 쇼파로 던져버린다. 양손에 머그잔을 들고 있는 나로서는 반항 할 도리가 없다.
"어머.. 모자 벗으니깐 자기 더 섹시하다."
여자는 더욱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그렁그렁 눈물까지 맺힐 정도로 감동한 모양이다.
"저기 커피.."
난 어떻게든 화제를 전환하고자 한다. 우리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찰을 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피부도 어쩜.."
여자는 손을 뻗어 내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저기.."
나는 어색한 시선처리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여자의 대담한 시선은 어느새 내 가슴에 멈추어 있 다.
"어머.. 자기 이 갑바좀 봐.."
여자는 내 볼에서 손을 떼어 내더니 다급히 나의 자켓을 걷어내며 내 단단한 가슴을 쓰다듬는다. 얇은 티셔츠 아래 잘 다듬어진 가슴의 윤곽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자는 급기야 티셔츠 아래로 손을 집어넣는다. 여자의 뜨거운 손길이 그대로 나의 가슴에 전해진다.
"저.. 저기.."
나는 잔뜩 당황한다.
"가만 있어요. 그냥 살을 맞대고 싶을 뿐이에요. 인간대 인간으로 교감하는 방법이죠."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래 살을 맞대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여자는 여기서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듯 나의 티셔츠를 쭉 걷어올리더니 내 가슴에 얼굴을 묻는 것이 아닌가.
"저.. 사모님.."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부를려면 자기라고 하던가."
여자의 목소리는 교태로우면서도 시퍼런 날이 서 있다.
"커피 한잔 하시면서.."
이 커피라도 내려놓고 싶을 뿐이다.
"자긴 커피 마시고 있어. 난 이걸 먹을테야."
여자는 소름끼치는 이 한마디와 함께 곧 내 가슴에 입을 맞추기시작한다.
"고찰을 하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당황한 나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여자는 흠짓 동작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 본다. 내가 그녀를 무안하게 만든 것일까? 조금은 미안해 지는 찰나.. 하지만 여자의 눈에 당황한 빛은 온데간데 없다. 여자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상실했다.
"고찰?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고찰을 시작해 볼까?"
여자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벨트를 풀어헤치기시작한다.
[쨍그랑]
머그잔을 떨어뜨렸다.
"앗, 뜨거!"
여자가 비명을 지른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번개처럼 빠르게, 표범처럼 날렵하게 방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방을 나오자 마자 이제 막 들어서는 한 커플과 마주친다. 티셔츠는 목까지 말려올라가 있고 벨트는 반쯤 풀린 나의 모습에 그들이 더욱 민망해 한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가까스로 그 호텔을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밖은 아직 비가 온다. 공기가 차다. 하지만 타고 갈 차가 없다. 나는 무작정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처럼 나의 사업에 회의를 느낀 적은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다. 머리 위로 빗방울이 쏟아진다. 춥다.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다.
4. 노예 계약
[따르르릉]
아까부터 전화가 울린다. 의뢰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화를 받을 수가 없다. 난 아프다. 전 날 몇시간을 빗속에서 헤맸던 탓이다. 수 도 없이 반복되는 오한과 발열로 인해 나의 몸은 이미 녹초가 되어 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는 말을 온몸으로 절감하는 중이다. 나는 지금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누구에게? 사실 내 머릿속엔 이미 한명이 자리잡고 있다. 내 폰에 저장된 오직 한명의 의뢰인.. 어제부터 전화하고픈 욕구를 꾹꾹 달래왔던 그 사람. 나는 힘겹게 폰 버튼을 꾹 누른다. 얼마간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리고..
"여보세요?"
바로 그녀의 목소리다. 온 몸이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기운에 휩싸인다.
"저.. 아파요."
다섯살 먹은 꼬마마냥 눈물이 날 것 같다. 의뢰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다니.. 오늘은 내가 미쳤다.
눈을 떴다. 잠이 들었었나 보다. 아니면 혼수상태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한결 좋아진 느낌이다. 독처럼 온 몸에 퍼져있던 아픈 기운이 많이 가신 것 같다. 그런데 손이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내 손등에 닝겔바늘이 꽃혀있다. 나는 지금 닝겔을 맞고 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두리번 두리번 주위를 둘러본다.
"깼어요?"
상큼한 목소리와 함께 내 눈앞에 조그만 얼굴이 나타난다. 커다란 눈이 깜빡깜빡 내 눈을 들여다 보고 있다. 초컬릿빛 커트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 엄지공주다.
"어디보자.."
엄지공주는 내 겨드랑이에 체온계를 넣고 어린아이처럼 내 방안을 이리저리 맴돈다. 짧은 청자켓과 무릎까지 내려오는 분홍빛 스커트가 그녀만큼 앙증맞다. 엄지공주는 어느새 다시 다가와 체온계를 확인한다.
"음.. 많이 내렸군."
간호사가 백의의 천사라고 했던가. 그녀는 천사임에 틀림없다.
"왜 이렇게 상한거에요? 뭐하고 돌아다녔길래."
엄지공주가 그 화려한 눈으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다.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갑자기 목이 턱 막히면서 심장에서부터 어떤 전율이 느껴진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순간인가. 내가 막연히 바래오던 영화같이 완벽한 상황.. 나는 한 순간 이 여자에게서 운명을 느낀다. 그래 내 운명의 여자.. 바로 엄지공주였던 것이다.
"고맙긴요. 그나저나 저 출장료가 좀 센편인데 지금 현금으로 주실 수 있나요?"
나는 어안이 벙벙해 지고 만다. 목구멍을 막고 있던 멍울이 온데간데 사라졌다. 어쨌든 지금은 현 금이 없다. 얼마전 자켓과 향수를 사느라 돈이 바닥난 상태다. 게다가 어제 건수도 꽝이지 않았더냐.
"죄송해요. 지금은 돈이 없는데.."
나는 중얼중얼 얼버무린다.
"뭐라구요? 돈도 없으면서 사람을 불러요?"
엄지공주는 황당하다는 듯 따지고 든다. 엄지공주는 너무나도 쌀쌀맞다. 나는 끝도없이 울적해진 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돈이 없으면 몸으로 떼우셔야지."
"네?"
당황스럽다.
"출장비 다 채울만큼 내 빈자리맨이나 해야지, 어쩔 수 있나?"
나는 눈만 껌뻑거린다.
"내가 부르면 언제라도 나와야 해요. 알겠죠?"
이 여자.. 무슨 의도일까?
"알겠냐구요!"
엄지공주는 내 앞에 앉더니 다시 한번 힘주어 묻는다.
"네"
나는 홀린 듯 대답하고 만다. 엄지공주는 픽 웃더니 내 볼에 입을 맞추고 다시 내 입술에 입을 맞춘다. 그녀의 조그만 입술이 내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는다. 나는 그녀를 껴안는다. 운명의 여자가 눈앞에 있는데 뭐가 문제더냐! 나는...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이 여자의 노예가 되어도 좋다.
"어.어.. 잠깐.."
갑자기 엄지공주가 나를 저지한다.
"오늘 말구요.. 지금은 바빠서 좀 곤란하니까.. 담에 내가 부를 때 나와요."
"아니.."
엄지공주는 나를 밀어내며 날아오르듯 달려나간다.
"전화할게요. 안녕.."
그리고 그녀가 떠났다. 꿈같은 향기만 남기고.. 나만 남겨두고..
5. 추종자
[따르르릉]
전화가 온다. 혹시 그녀일까?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수화기를 집어든다.
"네, 당신의 빈자리를 책임지겠습니다."
"당신이 빈자리맨인가요?"
그녀가 아니다. 나는 조금 침울해진다. 하지만 나는 프로다.
"네, 그렇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오늘 친구끼리 모임이 있는데.. 하루만 제 애인행세 해 주실 수 있으세요?"
나의 전문분야다.
"아, 예 물론이죠."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진 않았지만 나는 프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엇보다도 나의 일이 우선이다. 나는.. 돈이 필요하다.
옷장문을 연다. 오늘의 모임은 그냥 편안한 모임이라고 했다. 자.. 그럼 오늘의 스타일을 만들어 볼까? 우선 바지는 편안함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베이지색 면바지를 고른다. 그리고 상의로는 면바지의 심심함을 커버해 줄 수 있는 감각적인 바이올렛 체크남방을 선택했다. 면바지에 체크남방.. 이처럼 편안함이란 단어가 잘 들어맞는 앙상블이 또 있었던가! 됐다. 이제부턴 악세사리에만 신경쓰자. 하지만 악세사리도 최소한으로 하여야 한다. 최소한으로 하되 고급스러움을 최대한 부각시키자. 난 웬만해선 잘 착용하지 않는 고가의 손목시계를 착용하기로 결심한다. 몇 달간 고생해서 장만했던 값비싼 시계가 드디어 빛을 발할 날을 만난 것 같다. 그리고 하나 더! 나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한층 북돋워 줄 불가리 뿌르 옴므를 칙칙 뿌린다. 지적인 향기가 내 몸을 감싸듯 스며든다. 나는 향기에 취한 채, 거울 속 네츄럴함과 고급스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나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렇게 한동안 나에게 흠뻑 취해있던 난 고급 손목시계를 통해 시간을 확인한다. 이런, 약속시간이 다가온다. 나는 지적인 동작으로 서둘러 감색 로퍼를 신고 약속장소를 향해 달려나간다.
명동의 한 백화점 로비.. 나는 지금 검지와 중지로 이마를 두드리고 있는 중이다. 고객은 나에게 이마를 두드리는 제스쳐를 원했더랬다. 같은 동작을 하더라도 이렇게 지적으로 소화해 내는 이가 또 있을까?
"휘리휘리.."
뼛속까지 스며오는 나릇한 목소리가 나의 왼쪽 귀를 간지럽힌다. 나는 고개를 돌려 의뢰인을 바라본다. 순간 내 머리속에선 유행지난 노래의 가사가 스쳐 지나간다. 아니 그건 랩이었지..
그녀는 너무지적이야..
그녀는 너무매력있고..
"정확히 맞춰오셨군요. 시간약속이 철저하신데요?"
여자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한다. 분명 한 걸음 넘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데.. 단지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나는 온몸으로 그녀를 느끼고 그녀의 향기에 취해버릴 것만 같다.
“아 예.. 시간약속은 저의 철칙이죠.”
떨림을 애써 감추며 답한다. 하지만 나의 심장박동은 이미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부끄러운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토록 여자에게 잘 반하는 타입이 아니다! 헌데..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것일까! 나는 이미 운명의 여자를 발견하지 않았더냐!
하지만.. 하지만.. 루즈한 카키색 니트와 잿빛 진을 너무나도 스타일리쉬하게 소화하고 있는 그녀에게 어느 누가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렇게나 쓸어올리는 흑단 같은 머리칼 한 올 한 올..청아한 우윳빛 볼에 패인 보조개 하나까지도 이토록 아트인 그녀란 말이다! 헌데.. 이런 여자가 왜 빈자리맨을..
“자 가죠?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여자는 자연스레 나의 왼쪽 팔에 팔짱을 낀다. 내 심장과 가까운 곳에 그녀의 온기가 있다. 늘씬하게 뻗은 그녀는 눈높이마저도 나와 환상적으로 맞아떨어진다. 지적임, 단정함, 청초함이 한데 어우러진 향기가 나의 온몸을 자극한다.
[드르르르]
몇 걸음 걷지 않아 폰이 진동한다. 나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레 번호를 확인한다. 이럴 수가.. 이 번호는 온종일 기다렸던 바로 그 번호.. 엄지공주의 번호가 아니냐!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프로란 말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연락을 무시해버린다. 이건 사업상 문제다. 다른 어떤 의뢰인과 있었다 해도 나는 분명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녀가 나를 이끈 곳은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 레스토랑은 온통 주황색 불빛으로 물들어 있다.
“어, 여기!”
한 무리의 남녀가 손을 흔든다. 그녀의 친구들이다.
“어머나? 정말 남자친구가 생긴 거야?”
조금 심술궂게 생긴 여자가 입술을 씰룩거리며 묻는다. 한데 이 여자 표정이 묘하다.
“그래! 내가 생겼다 그랬잖아.”
의뢰인은 시원스레 답하며 나의 팔에 더욱 몸을 밀착시킨다. 하마터면 그녀의 가슴을 느낄 뻔 했다.
“앉자.”
그녀와 나는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녀는 나에게 더욱 가까이 몸을 밀착시킨다. 이럴 땐 자연스레 그녀의 허리를 감싸줘야 한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아야 한다. 나는 프로다. 이런 건 나
의 전문이다. 헌데 나는 왜 이렇게 송장처럼 뻣뻣이 굳어있단 말이냐!
“뭐하시는 분이죠?”
미소년풍의 남자가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묻는다.
“아 저는 유통업계에서 작은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대답에 남자는 잘 정돈되어 있는 손톱을 매만지며 한마디를 툭 던진다.
“임대업이 아니구요?”
까르르르르.. 좌중이 뒤집어진다. 이 분위기는 무엇인가!
“수입은 괜찮은가요?”
기생 오라비처럼 생긴 남자가 묻는다.
“하하하 먹고 살만큼 벌고 있죠. 머..”
“하루 벌어 하루 먹기?”
이번엔 터프 하게 생긴 여자가 비아냥댄다. 다시 한번 까르르르르.. 분위기가 이상하다. 모두들 나를 적으로 보고 있다. 남자도 여자도 모두가 다 나를 공격하고 있다. 남자는 그렇다 쳐도 여자들마저도 저렇게 사납게 나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내가..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안나야, 역시나 저 사람은 니 상대가 못돼!”
“자기 분수를 알아야지 주제에 눈은 높아가지구..”
설마 지금 나를 보고 하는 소리인가? 어떤 자리에서도 빛나던 내가 지금 못난이 중에서도 최하급의 취급을 받고 있단 말인가? 지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래! 친구들은 그렇다치자! 하지만 이 여자는 뭔가! 팔짱을 끼고 앉아 미소까지 지어보이며 친구들의 독설을 즐기고 있는 이 여자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냔 말이다!
밥이 코로 들어갔는지 눈으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나는 정신이 혼미해 질 즈음 일어나 화장실로 향한다. 난생 처음 내 자신에 대한 열등감으로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나는 화장실 벽을 붙잡고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나의 감정을 추스려본다.
[드르르르]
폰이 다시한번 진동한다. 나의 엄지공주다. 가슴이 싸하게 아려온다. 엄지공주를 외면했던 벌을 받는 것일까?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다. 나는 지금 엄지공주에게 위로받아야 한다. 나의 상처입은 가슴을 어루만져 줄 사람은 오직 엄지공주밖에 없을 것만 같다.
"여보세요."
"왜 이제야 받는거야."
엄지공주의 목소리가 어느 때 보다도 굳어있다. 나는 위로를 받고 싶단 말이다.
"아.. 미안해요. 사정이 있어서."
"내가 부르면 무조건 달려오랬잖아요."
"어디에요. 지금 갈게요."
"일단 화장실에서 나와요."
머릿속이 멍해진다.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연다. 믿을 수 없는 광경.. 엄지공주가 차가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왜 그녀가 여기 있는 것인가.
"나가요."
엄지공주는 이 한마디만 내뱉고는 내 손을 꼭 잡고 나를 출구로 이끈다. 그리고 그렇게 엄지공주가 출구를 열어젖히고 나를 지옥에서부터 끌어내는 순간..
"가지마."
누군가 문을 붙든다. 뒤를 돌아본다. 그곳엔 오늘의 의뢰인이 문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하지만 난 두번 다시 저 소굴로 들어가고 싶진 않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래도 고객에 대한 미안한 마음정도는 표현해야 할 것이다. 헌데.. 그녀의 팔이 붙잡는건.. 내가 아니다. 그녀는 엄지공주를 붙들고 있다.
"놔."
엄지공주가 표정없이 말한다.
"정말 가는거니?"
의뢰인이 다시 한번 묻는다. 엄지공주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의 깊은 눈이 안
타까움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엄지공주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미련없이 내 손을 잡아끈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그녀의 뒤를 따른다.
한동안을 엄지공주와 그렇게 걸었다. 내 머릿속은 엉망으로 뒤엉켜있다. 뭐라도 묻고 싶지만 뭐라고 물을 말도 없다.
"미안해요."
엄지공주가 한참만에야 입을연다.
"그냥 내 전화를 씹어버린 벌이라고 생각해요."
안그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최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저.. 도대체 무슨.."
"신경쓰지 마요. 내 추종자중 한명이니까."
엄지공주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꾸한다.
"네?"
"우리병원 의사.. 으.. 역겨워."
끔찍하다는 듯 작은 몸을 부르르 떠는 엄지공주..
"아까 그 여자한테 혹 했죠?"
엄지공주는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매섭게 째려보며 묻는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장승처럼 서버린다.
"하긴 뭐.. 그 정도 여자면 넘어갈 만도하지.. 용서해 줄게요."
엄지공주.. 이거 정말 알 수 없는 여자다. 그런데 그 여자가 추종자중에 한명이라 했던가? 그럼 추종자가 더 있다는 말.. 혹시 나도 그 추종자들중 한명인 건 아닐까?
"난 구속하는 사람들 딱 질색이야. 그런 면에서 당신은 참 좋아."
엄지공주가 나를 바라보며 생긋 웃는다. 귀엽다. 감격이 밀려온다. 결국 나는 추종자가 아니다. 나는 엄지공주가 좋아하는 사람이다. 엄지공주는.. 나의 운명이다.
"에이 꿀꿀하네.. 우리 놀러가요."
엄지공주가 다시 한번 내 손을 강하게 잡아끈다. 그리고 나는 여지없이 그녀의 뒤를 열심히 뒤따른다.
6. 가지마세요
나는 오늘도 모든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거리를 활보하는 중이다. 새로산 살구빛 자켓과 옅은 빛깔의 진으로 코디한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환상적으로 빛나고 있다. 날씨는 화창하고 햇살은 솜털처럼 따사롭다. 오늘 이토록 나의 발걸음이 가벼운 이유는.. 지금 가는 이 길이 엄지공주를 만나러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저기 멀리 빛이 보인다. 보석처럼 빛나는 우리 엄지공주다. 가슴이 터질 듯 뿌듯해온다. 나의 아름다운 운명의 여인.. 코발트빛의 트렌치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놓고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귀여운 나의 여인.. 나는 곧 그녀를 향해 쏜살같이 달릴 자세를 취한다.
"잠깐.."
순간 누군가 나의 팔을 붙든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바라본다.
"헉!"
이 사람은.. 엄지공주의 추종자! 그 여의사가 아닌가!
"포기해! 엄지공주는 내꺼야."
그 순간 다른 누군가가 나의 멱살을 붙든다.
"아니.. 내꺼야. 다 포기해!"
그리고 순식간에 수십명의 사람들이 달려와 나를 둘러싼다.
"포기해! 포기해!"
여의사를 선두로 모두가 나를 에워쌌다. 모두들 '포기해'를 합창하며 점점 나에게 다가온다. 칼을 든
이도 있고, 채찍을 든 사람도 있다. 나를 죽일 속셈이 분명하다.
"사..살려줘. 살려줘!"
"포기해! 포기해!"
"으악!"
눈을 떴다. 꿈이었다. 식은땀이 난다. 꿈이라기엔 너무나도 리얼했기에 아직도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린다. 엄지공주.. 그녀는 나에게 있어 그렇게도 높은 나무인 것일까?
[따르르릉]
전화가 온다. 그녀일까?
"네, 당신의 빈자리를 책임지겠습니다."
"빈자리맨이시죠?"
역시 그녀가 아니다. 몇일째 그녀에게서는 연락이 없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진다.
"네, 그렇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저 오늘 옷을 사러 갈건데 같이 동행 좀 해주시겠어요?"
매우 감각적인 요구다. 스타일에 관한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내가 아니더냐..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도무지 흥이라는 것이 나지 않는다. 간만에 신나는 건수가 들어온 상황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나는 프로다. 일을 해야 한다. 무얼 입어야 하나? 나는 터벅터벅 옷장으로 걸어가던 중에 발이 걸린 청바지를 주섬주섬 주워 입는다. 곧이어 옷장문을 열고는 대충 손에 걸리는 티하나를 꺼내입고 역시나 손에 집히는 자켓 하나를 걸쳤다. 머리는 왁스로 대충 구깃거리고 귀에는 피어싱 하나를 박았다. 악세사리함에 손을 집어넣고 손가락에 걸려든 목걸이 하나를 꺼내 목에 두르고 수십병의 향수중에 아무거나 골라잡아 칙칙 뿌린다. 습관적 절차들.. 이성적 판단은 결여되어 있었다. 왜이렇게 힘이 나지 않는걸까?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채 마지막으로 거울앞에 섰다. 하지만 거울속 나의 모습은 놀랍게도 여느 때의 스타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완벽모드가 아닌가! 역시나 프로는 다른 모양이다. 나는 발을 휘휘젓다 걸려든 운동화를 대충 구겨신고 저벅저벅 문을 나선다.
강남의 모백화점 앞.. 나는 기둥에 머리를 기댄 채 의뢰인을 기다리고 있다. 오늘의 의뢰인은 무척이나 감각적인 것이 분명하다. 어쩜 지금 나의 기분과 이렇게나 맞아떨어지는 포즈를 요구했으니 말이다. 나는 잠시 눈을 감는다. 눈앞이 캄캄해진다. 그러나 곧 광명의 빛이 보이니.. 바로 나의 엄지공주다. 하지만 그녀는 나에게 있어 수만광년이나 먼 곳에서 존재하는 별.. 감히 손조차 댈 수 나의 엄지공주..
"휘리휘리.."
의뢰인이다. 난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본다. 통통한 볼이 꽤 귀여운 아가씨다. 나를 보며 환하게 짓는 미소도 해맑아 보인다. 혹시나 엄지공주의 추종자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그녀의 미소에 단번에 날아가 버릴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녀의 스타일은 너무나도 수수하다. 회색 가디건에 검은색 면바지, 그리고 검은색 단화..오늘의 의뢰가 그녀에게 참으로 절실했음을 느낀다. 나는 가벼운 인사를 끝내고 그녀를 에스코트한다. 나의 세련된 매너에 매료된 그녀는 철저히 나의 리드를 따르고 있다. 그렇다.. 나는 이렇게 여자를 리드하는 사람이었다. 여성복코너를 둘러보던 난 그녀에게 적절할 듯한 샵들을 체크한 후 하나하나 방문을 시작한다. 통통한 이 아가씨에게 무엇이 어울릴까.. 그래 이 귀여운 매력을 100퍼센트 발산시켜 줄 귀여운 코디로 나가보자. 나는 통통튀는 비비드 칼라의 깜찍한 가디건과 상큼한 체크무늬 스커트를 추천한다. 의뢰인은 나의 초이스에 약간 당황한 빛을 띄면서도 뭔가 신나는 듯한 표정으로 옷을 들고 탈의실로 향한다. 순진하면서도 귀여운 아가씨다. 나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기다린다.
"어머.. 남자친구 분이 너무 감각있으시다."
점원이 나를 추켜세우기 시작한다. 나는 가벼운 미소로 칭찬에 보답한다. 점원의 칭찬이 입에 발린소리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는 걸.. 나는 알고있다.
[드르르르르]
갑자기 나의 폰이 진동한다.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뭐해?"
나의... 엄지공주다.
"네.. 저는 지금.."
온몸이 바짝 긴장상태에 돌입한다. 그녀의 목소리가 내 몸에 전율을 일으켰다.
"일하는구나? 바쁜거에요?"
"아니요. 어디죠?"
통통녀에겐 미안하지만.. 손톱만큼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나는 오직 엄지공주를 향해 달릴 뿐이다.
헉헉대며 도착한 약속장소에 아직 엄지공주가 보이지 않는다. 괜한 설렘.. 기다림마저도 행복한 것이 사랑이라고 했던가? 나는 그녀의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완벽한 행복감에 휩싸였다. 두근두근 심장 박동마저도 짜릿한 쾌감을 만끽하는 중이다.
"휘리휘리"
아름다운 재잘거림.. 엄지공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는 불후의 선율이다.
"아, 왔어요?"
바보같은 목소리와 바보같은 표정.. 난 왜 그녀앞에서만은 이렇게 헤벌쭉한 바보가 되는것일까?
"네, 의뢰할 일이 있어서요. 아직 저한테 빚이 남았다는 건 알고 있죠?"
사무적인 말투, 쌀쌀한 표정.. 행복감으로 충만했던 내 감정은180도 반감되고 만다.
"지금 만나는 남자가 있는데 이 남자 마음이 궁금해서요. 날 좋아하는 것 같기두 하고.. 아닌 것 같기두
하고.. 헷갈려.."
나의 심장은 벌써부터 갈기갈기 찢어져 나가고 있다.
"자 이제부터 미션을 줄게요. 그 남자랑 저랑 같이 걷고 있을거에요. 그 때 당신이 뜬금없이 다가와선
나에게 좋아한다는 고백하는 거죠. 그 때 그 남자의 반응이 어떨지 정말 궁금해.."
엄지공주는 상기된 표정으로 열심히 설명을 하고.. 나또한 그녀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은 분명 아름다운 선율이었는데 이젠 아니다. 그녀가 내뱉는 음절 음절이 날이 번쩍 선 면도날처럼 내 가슴을 찍어대고 파고들어 상처를 내고 있다는 걸.. 그녀는 모르고 있는 걸까?
곧 그녀의 말대로 훤칠한 남자하나가 걸어온다. 나는 약속대로 비참하게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엿본다. 지적인 이미지의 남자는 감각이나 외모에 있어 어디하나 빠질 것이 없어보인다. 옷이나 시계를 보아하니 하나같이 명품인걸 봐서 돈도 있어뵌다. 세심한 배려와 매너도 흐트러짐이 없다. 오늘 더 신경쓰고 나왔어야 했는데.. 왠지 초라해 지는 내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정말로 참을 수 없는 건.. 엄지공주가 웃고 있다는 것.. 나의 숨이 막힐 정도로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순간 엄지공주가 수줍게 그 남자에게 팔짱을 낀다. 신호다. 내가 나가야 할 타이밍이다. 하지만 신호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자동적으로 발이 먼저 뛰어나간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엄지공주를 붙잡는다.
원피스에 셔링이 들어간 깜찍한 밤색 자켓을 걸친 그녀.. 이것이 다 오늘 이 남자를 위함이란 말인가?
나를 이용해야 할 정도로 이 남자가 소중하단 말인가! 나는 결국 한낮 그녀의 추종자중 하나였던 것인가?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응어리에 말문이 막혀 버린다. 조금전 엄지공주가 외우라고 준 대사도 까먹어버렸다. 그냥 엄지공주를 원망스럽게 바라볼 뿐이다.
"뭐야 당신?"
훤칠한 남자가 결국 나를 공격해 온다.
"저는.."
나는 또 말문이 막힌 채 솟아 오르는 눈물을 꾹 참는다. 엄지공주는 답답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녀앞에서 또 바보가 되고 만다. 그 쉬운대사하나 말 못하는 멍청이일 뿐이다.
"가지마세요."
잠긴 목에서 겨우 새어나온 한마디가 이 말이다. 혹시나 그녀가 도망갈까봐 먼저 연락한번 못했다. 구속한다고 느낄까봐 좋아하는 티도 못냈다. 베게에 머리를 박고 그녀의 얼굴을 잠시라도 잊어보려고 악을 썼을 뿐이었다. 그런데 나에게 남은게 겨우 이거란 말인가? 다른남자의 마음을 떠볼 수단에 불과했단 말인가? 저런 남자를 만나면서 왜 나를 불렀던가! 나는 솟아오르는 눈물이 들킬까봐 돌아서버린다. 그리고 달린다. 다행히도 이제서야 눈물이 흘러나온다. 세상이 뭉글뭉글 왜곡되어 보인다. 오늘은 엉망이다. 오늘 건수도 날아가버리고 엄지공주도 날아가버렸다. 나는.. 세상에서 버려졌다. 나도 세상을 버리겠다.
7. 청구서
나는 지금 밤거리를 헤매고 있다. 걷고 걷다가 눈에 띄는 클럽을 찾았다. 가슴속으로 울려드는 음악소리.. 느린 리듬에 몸을 맡겨본다. 어느 순간 늘씬한 여인이 다가와 나를 잡는다. 하지만 엄지공주가 생각난다. 클럽을 뛰쳐나왔다. 다시 걷는다. 수많은 연인들이 스쳐지나간다. 행복해 보인다. 다시 엄지공주가 생각난다. 서둘러 술집을 찾는다. 술을 주문하고 몇잔을 들이켰다.
"사랑해."
"나두.."
옆자리에서 남녀한쌍이 부둥켜 안고서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술집을 뛰쳐나왔다. 집에나 가야겠다. 집으로 가는 길목.. 한 꼬마 여자아이가 아빠손을 잡고 깡총깡총 뛰고 있다. 분홍 치마를 입은 예쁜 꼬마아이.. 나는 달리기 시작한다. 지워야 한다. 이젠 지울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언제쯤 잊을 수 있는 것일까..
문을 열고 침대로 쓰러진다. 불도 켜기 싫다. 씻는 것도 귀찮다. 눈을 감고 대자로 누워버린다.
[드르르르]
폰이 울린다. 난 폰을 꺼내들어 번호를 확인한다. 엄지공주다. 가슴이 떨려온다.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네, 여보세요."
이젠 끝이라는 굳은 결심은 온데간데 없이 전화를 받아버렸다. 머저리.. 바보..
"실망이에요."
엄지공주가 단호히 말한다. 정말 단단히 실망한 모양이다. 나는 더욱더 소심해지고 만다.
"죄송합니다."
"정말 그것밖에 못해요?"
"다음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서글프다. 엄지공주는 얼음공주다. 어쩜 이리도 모진 것인가!
"고작 한다는 소리가 가지마라니 어딜가지마라는 거죠?"
"그건.."
얼굴이 바짝 달아오른다. 그건 나의 수줍은 고백이었다. 지금껏 말 못했던 나의 마음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고백이었단 말이다! 그걸 몰라주고 이렇게 면박이나 주다니.. 엄지공주! 해도해도 너무한것 아닌가!
"도대체 뭐에요. 몇 일동안 연락한번 없구.. 다른남자 만나는 거 보고두 그냥 가버리구.. 당신 맘 정말
모르겠다구요!"
뭐지? 잠시 머릿속이 텅 빈것만 같다. 머릿속에서 잠시 정전이 일어났는가 보다.
"어쨋든 이래저래 당신때문에 손해본게 한둘이 아니야! 청구서 날릴테니 알아서 해요!"
전화가 끊겼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불과 몇분전의 절망적 기분이 온데간데 사라졌다. 아직도 상황파악은 안되지만 왜 이렇게 입꼬리가 올라가는지 나도 모르겠다.
눈을 떴다. 오전 10시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었나보다. 커텐사이로 아침햇살이 퍼져들어온다.
"으자자자.."
기지개를 편다. 근래들어 오늘처럼 개운했던 날이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쥬스를 마신다. 그리고 문틈에 끼여있는 신문을 집어들었다.
[툭]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깜찍한 분홍빛 봉투다. 한눈에 봐도 누가 보낸 것인지 알 수 있다.
"청구서?"
나는 온몸으로 젖어드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봉투의 내용물을 펼쳐들었다.
<손해배상 청구서>
나(이하 '갑'이라고 함)는 빈자리맨(이하 '을'이라고 함)이 나에게 입힌 손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배상을 청구한다.
1. 을이 다른 여자와 키스를 함으로 인해 갑이 입은 정신적 피해
2. 갑이 병원 일을 다 팽겨치고 을을 치료함에 따른 병원의 사퇴요구
3. 을이 다른여자에게 혹함으로 인해 갑이 느낀 배신감
4. 을의 무관심으로 인해 갑이 느낀 불안감과 외로움
5. 을보다 다섯배는 비싼 제2의 빈자리맨 고용비
6.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의 기대를 저버린 을에 대한 실망감
상기의 사항에 따른 배상액을 계산해 본 결과, 어마어마한 배상금이 산정되었다. 그러나 을의 경제적 사정을 고려하여 한 가지 중재안을 제안한다.
-- 을은 평생을 갑의 빈자리맨으로 봉사한다.
나는 청구서를 가슴에 안고서는 허둥지둥 폰을 찾아 엄지공주의 번호를 누른다. 시끄러운 음악소리.. 절로 웃음이 난다.
"네. 여보세요!"
천하의 엄지공주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진다.
"청구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합의하시겠습니까?"
이건 그녀의 프로포즈인가? 나는 처음으로 그녀앞에서 한껏 여유를 찾는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면 안되겠습니까?"
잠시 침묵이 흐른다. 나는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왜 대답이 없는 것인가! 입이 바짝바짝 말라간다.
"문.. 열어주시겠어요?"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문? 나는 곧장 문을 향해 달려간다. 허겁지겁 걸쇠를 풀고 벌컥 문을 열어젖힌다.
앗! 잠시 눈이 부셨다. 환한 빛이 내 앞에 서 있다. 그 아름다운 빛이 나의 목을 끌어안는다. 나도 그 빛을 끌어안았다. 내 품에 꼭 안겨드는 그 작은 공주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는다.
빈자리맨(완결)
프롤로그
내 사업의 시작은 고2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야! 너 돈 좀 벌어볼래?"
잘 나가는 놈이었다. 집도 잘살고 얼굴도 꽤 잘생기고 한마디로 울학교 킹카로 통했다.
"뭔데?"
나는 돈이 없었다. 공부도 못했다. 그냥 학교는 의무적으로 왔다갔다 할 뿐이었다.
"머리 좀 까봐!"
녀석은 내 머리가 못마땅한 듯 한동안 내 머리를 매만지더니 나에게 한 여학생을 가리켰다.
"저기.. 쟤 보이지?"
"어"
"내 여자친구야."
"그래?"
"이쁘지?"
"어."
"내 여자친구가 날 배신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어서.."
"그래서?"
"내가 시키는데로만 해. 쉬워.."
"어떻게?"
"그냥 가서 '나랑 사귈래?' 이말 한마디만 하구와.."
"그거면 돼?"
"그래 5만원줄게."
"알겠어."
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는 제안이었다. 유치하고 우습지만 나는 그놈이 시키는 데로 했다. 그놈의 여자친구라는 애는 내가 그 한마디를 건내자 당황한 표정으로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나는 아무말도 덧붙이지 않은 채 돌아섰다. 내 임무는 거기까지 였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여자애가 붙잡았다.
"근데.. 헤어질 수 있어."
그 날 쌍코피가 터지도록 얻어맞는 여자애가 불쌍하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5만원을 벌 수 있었다. 그 때 난 깨달았다. 내 얼굴이 돈이 되다는 걸..
1. 클럽 파트너
나는 요즘 몸을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 멋진 몸은 멋진 옷발을 완성시킨다. 내 사업의 특성상 나는 어떤 옷도 잘 소화시켜야만 고객을 만족시킬 수가 있다. 그러니 힘들어도 몸만들기는 하루도 빼먹을 수가 없다. 나는.. 사업가니까..
[따르르릉]
전화가 온다.
"네, 당신의 빈자리를 책임지겠습니다."
"당신이 빈자리맨인가요?"
"그렇습니다."
이 여자.. 당차다. 보통 이곳을 찾는 고객은 열등감에 가득찬 사람들이라 목소리에 주눅이 들어야 정상
일 것이다. 하지만 이 여자의 목소리엔 지나칠 정도의 자신감이 느껴진다.
"오늘 밤 클럽메이트 해줄래요?"
"클럽 메이트라면.."
"딴 남자들 달라붙는거 싫어."
"네 알겠습니다."
"대신 당신 얼굴보고 결정할거야. 그래도 돼죠?"
"네 고객만족이 제 목적이니까요."
건방지다. 감히 내 얼굴을 의심하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의 목적은 돈이다. 고객만족은 곧 돈이
다. 실망하지 않게만 해 주면 된다. 두고봐라..
어쨌든 오늘의 계약이 성사되었다. 오늘의 장소는 클럽. 사업의 목적상 나는 모든 경험을 중요시한다. 다행히 나는 한달에 한번꼴로 클럽을 출입중이었다. 오해하지 마시라! 즐기기위한 것이 아니라 사업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사업가니까..
장소가 장소니만큼 스타일에 신중해야 한다. 너무 꾸며도 촌스럽고 그렇다고 안꾸미면 없어 보인다.
꾸민듯 안꾸민듯한 멋진 스탈을 찾아보자.
나는 우선 바지를 고른다. 몸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바지는 전체스탈을 결정하는데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한다. 오늘의 바지는 니뽄필이 물씬나는 구제진으로 하겠다. 다음으로 티도 결정했다. 클럽은 수많은 사람들의 체온으로 인해 찜질방을 연상시킬 만큼 덥다. 그래서 아주 얇은 겨자색 민소매티로 입을 것이다. 칙칙한 구제진에 칙칙한 겨자티는 너무한거 아니냐구? 흥! 나의 센스를 무시하지마라. 그래서 벨트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징이 가득박힌 벨트를 둘렀단 말이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악세사리.. 악세사리는 패션을 완성시키는 양념과 같은 존재다. 나는 귀에 심플한 피어싱을 하고 얼마전 태국에서 산 특이한 문양의 긴 목걸이를 둘렀다. 이제 나갈 준비가 거의 다 되어간다. 나는 산뜻한 향의 데오드란트를 바른 후 덧 입을 자켓을 결정할 것이다. 자켓을 벗는 순간 그녀는 나의 데오드란트 향에 다시 한번 빠져들겠지. 자켓을 고르기 위해 옷장을 열었다. 옷장에는 어제산 청자켓이 나의 눈길을 끌고 있다. 하지만 안 될 말이다. 나는 이미 청바지를 입지 않았느냐! 청바지와 청자켓이란 앙상블은 80년대 이미 외면당한, 참으로 민망한 한쌍이란 말이다. 그래서 나는 검정색 점퍼형 자켓을 걸쳤다. 다음은 가방이다. 오늘의 패션을 가방하나로 망가뜨릴 수도 있을 만큼 가방또한 중요한 소품이다. 나는 거친 가죽소재의 힙색을 꺼내 느슨하게 허리에 둘렀다. 그리고 카키색 아르마니 선글라스로 나의 뽀얀 얼굴을 더욱 부각시켜본다. 마지막까지 대단한 집중력으로 완성된 나의 패션은 그야말로 환상이다. 그러나 잠깐! 남자의 스타일은 머리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나는 왁스로 자연스런 스탈을 연출해 낸다. 부시시해 보이면서 멋스러워 보이는 나의 머리스탈.. 흠..간지가 철철넘쳐 흐르는걸? 나는 전신 거울을 통해 오늘 나의 모습을 관찰해 본다. 이럴수가.. 나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모습이다. 오늘도 너무나 멋있는 나의 모습을 디카에 담는다. 오늘 내 미니홈피에 올릴 것이다. 오늘 고객은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거래를 했는지 다시한번 감사하게 될 것이다. 이제 나는 그녀를 만나러 나간다.
여기는 홍대앞.. 홍대앞의 밤공기는 왠지 모를 묘한 마력을 풍긴다. 나는 이제 나의 고객을 찾을 것이다. 흠.. 난 오늘도 사람들의 시선속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사람들의 시선따윈 더 이상 부담이 아니다.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일이니까.. 나는 약속장소에 멈춰 주위를 둘러본다. 이제 나는 고객이 주문한 제츠쳐를 취해야한다. 그러면 고객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다가오겠지. 내 사업의 철칙은 절대로 고객에게 연락하지 않는 것이다. 연락은 오직 고객에게서 올 뿐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 나는 철저하다. 나는.. 사업가니까.
나는 오늘의 건방진 고객이 요구한대로 두 무릎을 꼭 껴안은 순수한 소녀의 자세로 쪼그리고 앉아 애꿎은 운동화끈을 풀었다 맸다를 반복하는 중이다. 힘들다. 아니, 힘든 건 둘째치고 민망하다. 이렇게 멋진 사내가 이런 포즈를 취하고 있다는 건 도대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한쪽무릎도 아닌 두쪽무릎을 이렇게 구부리고 앉아 있다니 말이다! 하지만 이건 고객의 요구다. 그러니 나에게 있어 이 자세는 어찌할 수 없는 사명이란 말이다! 나는.. 사업가니까.
아.. 벌써 세번째 이 동작을 반복하고 있건만 고객은 나타나지 않는다. 설마..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 지금 내가 퇴짜를 맞은 것이란 말이냐! 아직 수십명의 고객을 상대했지만 그런 경우는 없었다. 난 언제나 완벽했단 말이다! 이젠 얼굴에 핏줄이 솟고 땀방울까지 송송맺히기 시작했다.
아뿔사! 순간 불길한 예감이 나의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혹시.. 쭈구리고 앉아있는 이 요상한 자세가 고객으로 하여금 나의 완벽한 자태를 의심하게 만들고 있는건 아닐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이상 나는 더 이상 이 요상한 자세를 유지할 수 가 없다. 나는 쥐가 내리는 다리를 내색하지 않은 채 드디어 나의 완벽한 몸매를 서서히 펼쳐보인다. 그리고 여유있게 주위를 쓱 둘러본다. 몇몇의 사람들이 나를 보며 수군거리고 있다. 내가 멋있어서 그러는 건지.. 요상한 자세로 놀림을 받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기분이 좋지 않다. 나는 일순간 나도 모르게 자신감을 상실한 채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이건 정말 나답지 않은 짓인데 말이다. 하지만 떨구어진 나의 시선에 들어온 것이 있다. 내 바로옆에서 나와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꼬마.. 무릎을 덮는 보라색 후드티 모자를 눈까지 푹뒤집어 쓴 이 꼬마가 나를 올려다 보며 암호를 외친다.
"휘리휘리"
이럴수가 저 아인 언제부터 저기 앉아있었단 말인가.. 꼬마가 일어난다. 꼬마는 민소매 후드티안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후드티 밖으로 드러낸 팔뚝이 한손에 잡히고도 한참이나 남을 정도로 가늘다. 후드티 아래 입은 밤색 레깅스는 그녀의 부러질 듯한 다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안그래도 작은 이 꼬마는 앙상한 몸 때문에 더욱 작아보인다. 꼬마가 나를 찬찬히 살피더니 다시 입을 연다.
"통과! 가요!"
"저기.."
혼란스럽다. 상대는 꼬마가 아닌가!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이냐!
"혹시..조카? 이모는?"
나는 조심스레 꼬마에게 묻는다.
"잘봐!"
갑자기 꼬마가 기분이 상했다는 듯 거칠게 모자를 벗어제낀다. 모자속에서 '펑'하고 보랏빛 머리카락이 꼬마의 허리까지 쏟아져나온다. 나는 꼬마를 더욱 자세히 살펴본다. 언뜻 볼 땐 분명 꼬마였는데 이제보니 아니다. 얼굴은 창백하게 희고 눈썹은 반을 잘라먹었다. 눈은 보랏빛의 화려한 스모키메이컵으로 말할 수 없이 깊고 야성적이며 입술은 눈부시게 붉다. 그런데 이 꼬마.. 아니 이 여자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마냥 머리속이 멍멍해진다. 이 여자.. 묘하다.
"이제 가지."
150cm도 채 안되는 이 여자가 나를 리드하듯 클럽으로 앞서 들어간다. 자존심이 상한다. 보통의 고객
들은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는 쑥맥들로서 부드럽게 리드하는 나의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에 반하게 되어있단 말이다. 그러나 지금 난 이 작은 여자를 졸졸 따라 가고 있는 꼴이 아니냐! 어쨌든 나는 그렇게 그녀를 따라 클럽안으로 들어선다. 곧이어 뜨거운 열기가 훅하고 밀려온다.
"내 뒤에 붙어요!"
여자가 명령한다. 난 엉거주춤 그녀의 명령을 따라 여자의 뒤에 붙어선다. 여자가 느린 힙합리듬에 맞
춰 허리를 돌리기 시작한다. 이 작은 몸에서 이런 걸죽한 웨이브가 쏟아져 나올 수 있다니.. 나는 너무 놀라 주춤하고 만다. 순간 다른 남자가 그녀를 낚아채듯 안아버렸다. 순식간의 일이라 나도 당황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렇게 당황한 내 앞엔 어느 새 다른 여자가 다가와 히프로 나의 몸을 자극하고 있다. 하지만 안 될 말이다. 나는 나의 고객을 지켜야 한단 말이다! 나는 나의 고객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 거린다. 근데 이 낯선 여자가 이젠 내 목을 감싸안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난감하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낯선 녀와 내 사이에 무언가가 파고 들어왔다. 꼬마.. 아니 그녀다..
"내꺼야!"
아이처럼 작은 그녀가 낯선녀를 거칠게 밀어버린다. 갑작스런 꼬마의 등장으로 뒷걸음질 치던 낯선녀는 어느새 다른 남자의 팔에 안겨 사라져 버린다. 보라색 그녀가 나를 쏘아보며 화를 낸다.
"내 뒤에 딱 붙으랬잖아요!"
"죄송해요."
나는 엉거주춤 사과를 한다. 끄억~ 난 왜 이 여자 앞에선 늘 이렇게 엉거주춤이란 말인가!
"껴안아요!"
여자가 다시 명령한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부러질 듯한 허리를 꽉 껴안는다.
여자가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녀의 부드러운 웨이브가 자꾸 나의 몸을 자극한다. 강렬하고 열정적인 비트와 그녀의 춤은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그녀의 웨이브에 이끌린 듯 나도 점점 음악에 동화되기 시작한다. 정신이 몽롱해 진다. 약을 먹지 않고도 이런 환각상태가 가능하단 말인가.. 나는 정신을 잃은 듯 그녀에게 철저히 리드당하고 있다. 그렇게 몇분이 흘렀을까.. 갑자기 그녀가 나를 향해 돌아선다.
"키스해요."
여자가 발꿈치를 들어 내 목을 감싼다. 나는 마치 최면에 걸린 듯 그녀를 안아올려 입을 맞춘다. 음악소리가 저만치 멀어져 간다. 그녀와의 키스는 그녀의 웨이브만큼이나 부드럽고 강렬했다.
2. 미팅 메이트
"Great! You are so gorgeous! How beautiful you are!"
나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English converstion을 열심히 repeat after중이다.
시대는 바야흐로 국제화 시대가 도래하는 만큼 나의 프로의식은 끝없는 자기발전과 도약을 위해 채찍질당하고 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늘 자신을 가꾸어 가는 건 프로의 기본아닐까? 난 이렇듯 끊임없이 노력한다. 난 사업가니까...
[따르르릉]
전화가 온다.
"Hello, 당신의 빈자리를 책임지겠습니다."
"당신이 빈자리맨인가요?"
뜻밖의 남자고객이다. 그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그렇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오늘 미팅이 있는데 자리 좀 채워주실래요?"
감히 나에게.. 미팅의 빈자리를 메우라니.. 이건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미팅에선 본인들이 튀기위해 폭탄을 설치해야 정석일 것이다. 그렇다면 번지수를 잘 못 찾아도 perfect하게 잘못 찾은 것이다. 나는.. completely 다른 과니까.
"저.. 그렇다면 저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의구심을 느끼며 좀 처럼 하지 않던 질문까지 한다. 나의 역할에 대한 질문이라니.. 프로인 나로서는 부끄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여자들을 사로잡아요. 알겠어요? 단 한명도 빠짐없이 말이야."
반말을 섞는 이 인간.. 그의 목소리는 마치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듯 더욱 격해지고 있다. 이 남자는 대체 나에게 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인가?
"만약 그 놈에게 한명이라도 뺏기면 국물도 없을 줄 아쇼. 대신 성공하면 사례는 톡톡히 할테니."
아하! 그럼 그렇지.. 이유인 즉슨 이렇다. 고객의 친구놈중에 한놈이 자신의 인기를 엄청 거들먹거린단다. 게다가 최근 들어서는 고객의 여자친구가 사실 자기를 좋아했었다며 고객을 도발시켰다나? 그 이후 그 놈 기를 팍 죽여놓을 사람을 찾던 중 나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라고.. 역시 그럼 그렇지.. 이거.. 다시 한번 나의 능력을 검증받는 순간이 아닌가?
자 그럼 나의 자존심에 오해를 풀어주었으니 이제부터 오늘의 스타일을 완성시켜 보아야겠군. 4대4 미팅.. 오늘의 미팅 상대는 꽃다운 24살의 간호사들이다. 백의의 천사들이라.. 아직 꿈을 꾸는 순수한 아가씨들일게다. 난 오늘 4명의 천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이런 자리에서 너무 formal한 의상은 오히려 그녀들로부터 거부감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대로 후줄근해서는 안된다. 패셔너블한 감각을 부각시키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네츄럴함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쉽지않다. 그러나 나는 노련한 분석력과 동물적인 감각으로 한세트의 옷을 뽑아낸다. 약간 물이 빠진듯 하나 시원한 느낌을 자아내는 라이트 블루의 여유있는 청바지를 입고 상의로는 얼마전 사 두었던 고급스런 느낌의 인디언 핑크빛 폴로 셔츠를 걸쳤다. 뽀얀 내 피부와 핑크빛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어내며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다. 머리는 방금 일어난 듯 부시시하지만 묘한 섹시함을 주도록 왁스로 손질했다. 그리고 귀엔 작고 깜찍한 은빛 피어싱으로 마무리 한다. 풋풋하고 상큼한 이미지와 함께 섹시하면서도 력셔리한 느낌을 동시에 발산하기란 과연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것을 완벽히 소화하고 있지 않느냐! 마지막으로 전신거울의 내 모습을 확인한다. 아깝다.. 아까워.. 정말 아깝다. 사진기라는 문명의 도구가 없었다면 그냥 흘려보내고 말았을 이 완벽함이 생각만 해도 아까울따름이다. 나는 나의 소중한 아름다움을 디카에 담고 철저한 프로의식으로 무장한 채 심플한 로퍼를 신고 사무실을 나선다.
여기는 강남의 모자이크 커피숖앞.. 나는 고객이 요구한 대로 바닥에 오른쪽 발로 원을 그리고 있다. 꽤 멋있는 자태가 나올 것이라 기대했지만 계속 이 자세를 유지하자니 무슨 무용동작을 하는 양 좀 우스운 꼴이 되는 느낌이다. 빨리 고객이 나타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휘리휘리"
저음의 남자목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힌다. 나는 그제서야 민망한 동작을 멈추고 옆을 바라본다. 머리
를 삐죽삐죽 세우고 새빨간 스웨터를 걸친 이 남자는 심심하게 생긴 멀건 얼굴을 하고 완벽한 내 모습을 노골적으로 훑어본다.
"음.. 이만하면 머.. 괜찮군요."
남자는 심히 만족스러우나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는 양 얼굴근육을 열심히 잠재우고 있다.
"미팅은 지금부터 30분 후인 7시부터 시작입니다.입을 맞춰야 겠죠?"
고객은 프로인 나보다 더 노련해 보이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고객은 왕이다. 고객의 눈높이에 맞추어 주자. 나는 나이 27세의 나이에 이 남자와 직장동료다. 나는 증권회사에 다니며 여자친구가 없다. 나는 고급 오피스텔에서 혼자서 살고 있으며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덕에 부유하게 자랐다. 나는 이남 중 차남이며 형은 미국에서 변호사일을 하고 있다. 사실 이 남자에겐 이와 똑같은 조건의 실제 직장동료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반토막키에 머리가 급격히 벗겨지는 중이라고.. 나는 나의 조건을 숙지하며 그 남자와 나를 일치화 시키는 작업에 즉각 돌입한다. 나는 워낙 프로라 30분이면 이미 완벽한 그 남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의뢰인과 함께 커피숖 쇼파에 자리를 잡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남자 2명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둘 다 아주 Normal한 의상에 그야말로 보편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전혀 신경쓸 이유가 없는 인물들이다. 헌데.. 그 요주의 인물은 좀 늦는다고 했다나? 그는 분명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만화속 주인공처럼 머리를 휘날리며 들어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속셈인 것이다. '주인공은 언제나 늦는 법'이란 명제를 곱씹으며 말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는 것도 모른 체..
"어, 여긴 처음보지? 인사해 여긴 내가 말했던 그 직장동료.."
고객은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적극적으로 나를 소개한다. 일순간 친구들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버린다. 고객과 친구들의 우정이 염려되기까지 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내 임무는 고객만족이 아니던가? 그들의 우정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이렇게 고객의 친구들로부터 소외된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백의의 천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휘날리며 사뿐사뿐 걸어오는 천사들을 보라.. 곧 새초롬히 자리에 앉은 그들의 시선은 역시나 일제히 나에게 집중되고 있다. 나는 한 떨기 싱그러운 장미보다 화사하게 웃는 그녀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한다.
꽃분홍빛의 레이스가 화려하게 장식된 까만 원피스를 입은 그녀,, 하지만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꽃분홍빛 여드름들이 그녀의 양볼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지 않느냐..
까만 물방울 무늬가 잔뜩 박힌 눈부신 흰 투피스의 그녀, 그러나 그 보다 더욱 눈부신 교정기가 그녀의 입술속에서 번쩍이고 있다.
그리고 실크소재의 다크블루 원피스를 입은 그녀.. 그 매끈한 원피스를 뚫고 나올 듯 글래머러스한 가슴으로 우리를 잔뜩 흥분케 한 그녀이지만 잔뜩 찢어놓은 눈과 코 끝을 뚫고 나올 듯한 실리콘이 우리의 시선을 가슴에만 머물 수 밖에 없게 만들고 있다. 어.. 한데.. 3명?
"한 분은.."
"걘 좀 늦는데요.."
천사들이 입을 삐죽거리며 답한다. 혹시 마지막 그녀도 주인공병이 있는 건 아닐까?
"자, 그럼 우선 소개나 하지?"
주선자인 나의 고객이 제안한다.
"안녕하십니까? 박주성이라고 합니다. 이 자식(주선자)이랑은 고등학교때부터 친구구요. 지금은 은행
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금융쪽으로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죠. 궁금한 거 있음 언제든 물어보세요."
잔뜩 주눅들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폐기넘치는 목소리의 소유자다. 하지만 여자들의 반응은 스산할 정도로 고요하다. 그는 그야말로 주눅든 표정으로 조용해 지고 만다.
"전 얼마전 7급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예비 공무원 고영호입니다. 제 미래는 그야말로 믿을 수 있는 보험같다고나 할까요? 하하하"
그러나 웃고 있는 건 그 혼자라는 걸 곧 깨닫고 만다. 자! 드디어 나의 차례가 왔다.
"안녕하십니까? 주선자와는 직장동료구요.. 이관희라고 합니다."
"어머 이름 너무 이쁘시다."
순간 무관심 한 척 손톱만 뜯고 있던 여드름녀가 호들갑이다.
"그럼 27이겠네요? 3살차이는 궁합도 안본다던데.. 호호호.."
교정녀가 한껏 환하게 웃어 보인다.
"얘는? 그건 4살차이지! 내가 7살에 학교를 들어가서 23인데.. 저랑 4살차이네요?"
왕가슴녀가 지지 않으려는 듯 더욱 적극적으로 나선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마지막 카운트 다운을
맞추려는 듯 다급히 들어선다.
"어이.. 미안 내가 좀 늦었지?"
주의를 끌려는 상투적 인삿말.. 일 순간 여자들의 시선이 그에게 꽂힌다. 그가 바로.. 오늘의 내 라이벌이다.
그는 조금 신경이 쓰인다. 훤칠한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가 우선 거슬렸으며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목소리가 또한 거슬렸다. 그리고 카키색 셔츠에 옅은 감색의 면바지를 입은 감각또한 거슬렸다. 그러나...
여자들의 시선은 마치 부메랑처럼 일제히 나에게 돌아온다. 마치 누가 왔었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조용히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가 인사할 틈도 주지 않는 그녀들... 곧 그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마치 나를 원망하는 듯한.. 그렇다! 그가 아무리 날린다 해도 그건 일반인의 수준에 비추었을 때 통용되었던 것! 이미 고등학교 시절 우리학교 킹카에게 인정받았던 내 외모는 그 수준을 초월하는 것이리라. 내 외모의 진가를 너무 늦게 깨달은 탓일까? 난 가끔 조금 전 그 순간처럼 나의 외모에 대한 객관적 혼란을 느끼곤 한다.
나의 의뢰인을 보라 귀까지 찢어질 듯 늘어나는 입술을 힘겹게 오므리고 있는 저 모습.. 오늘 그는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거래를 했는지 절실히 깨닫고 있겠지? 뿌듯함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부터 밀려온다. 이럴 때 난 살아가는 의미를 찾곤 한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지.. 매력은 외모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지 않더냐? 유머와 매너.. 그리고 카리스마.. 그것이 어우러질때 진정한 인기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관희씬 왜 여자친구 없으세요?"
교정녀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묻는다.
"많이 바빴어요.. 우선 자리를 잡아야 했거든요. 한번 여자친구한테 빠지면 헤어나질 못할 것 같아서.."
그리고 난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여자들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그럼 이제 준비가 되셨나요?"
하고 노골적인 질문을 해온다.
"그러니까 나온 거 아니겠습니까?"
부드러운 목소리와 감미로운 미소로 답한다. 여자들은 거의 넋을 잃고 만다. 그 요주의 인물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자리를 메우고 있을 뿐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는 걸 완벽히 깨달은 모양이다.
그 순간, 카페문이 열리고 한 소녀가 문을 들어선다. 그 소녀는 단번에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니 카페에 있는 모두의 시선을.. 아주 짧은 초컬릿빛 컷트머리가 세련되게 어울리는 소녀.. 그녀의 이미지는 미소년을 연상케 한다. 브라운 체크의 클래식한 쇼트남방에 캐러멜빛의 스커트를 입은 소녀.. 마치 우리가 유럽에 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아주 작고 마른 소녀.. 그 소녀가 어느 순간 내 앞에 통 튀어오르듯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렇다면 이 소녀가 마지막 천사인가?
"안녕하세요?"
망설임 없는 목소리.. 익숙한 당당함. 환상적인 눈동자.. 앗! 이 소녀는.. 그녀.. 클럽 의뢰인이 아닌가!
"뭐에요? 혹시.. 아는 사이?"
난감한 순간이다! 눈치빠른 왕가슴녀가 나의 당황한 눈빛을 캐치한 것이다. 식은 땀이 바짝난다. 빨려들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 그 소녀앞에서 나는 뭐라고 해야 할 것이냐. 내 정체가 이대로 밝혀지는 것이냐! 소녀는 재밌다는 듯,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쇼파 등받이로 털썩 등을 기대며 '몰라'하며 관심없다는 듯 물컵을 집어든다. 소녀는 물을 들이키며 한쪽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나한테 반했나 본데?"
하며 큭큭거린다. 나머지 천사들의 얼굴이 굳어진다. 소녀는 다리를 꼬고 앉아 남자들을 쭉 둘러본다. 다들 넋이 나간 듯 그녀를 바라본다. 사람같지 않은.. 만화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그녀를..
다른 천사들이 갑자기 거인이 되어버렸다. 그녀들 사이에 있는 소녀는 마치 작은 요정같다.
우리와는 동떨어진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요정.. 오직 그녀만이 보인다. 신비로운 엄지공주..
"뭐야? 재미없게 커피나 마시구.. 우리 술 마시러 가는게 어때요?"
그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우리를 리드한다. 언제나 먼저 나를 이끄는 그녀.. 난 아주 익숙한 듯, 1등으로 그녀를 따른다.
독일식 맥주집..
우리는 잔 가득 맥주를 따르고 Cheers를 외치며 맥주를 들이킨다. 소녀가 벌컥벌컥 단번에 한잔을 비운다.
"오~ 잘 마시는데요?"
남자들이 감탄스럽다는 듯 말한다.
"아.. 너무 갈증났거든요."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 앞에 빈 맥주잔을 들어보인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에게 맥주를 따른다. 그런데 자꾸 손이 떨린다. 이런 약한 모습은 곤란하다. 이럴 땐 무척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단 말이다.
"어. 그만!"
여드름녀와 교정녀 그리고 왕가슴녀가 동시에 소리를 꽥 지른다. 맥주가 넘쳐 어느새 소녀의 손을 타고 흐르고 있다. 한데 소녀는 아무런 동요없이 웃고있다. 나는 당황하여 맥주통을 내려놓고 더듬더듬 냅킨을 찾는다.
"아.. 이거 죄송합니다."
식은 땀이 흐르는 순간이다. 이런 바보같은 모습을.. 맥주 한 잔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말이다!
"저한테 사랑이 넘치시는 가봐요?"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롭게 맥주한모금을 마신다.
"이것봐.. 이 친구 얼굴 빨개졌는걸? 하하하.."
요주의 인물이 나를 놀리며 넘어갈 듯 과장된 박장대소를 터뜨린다. 그러자 normal하게 생긴 나머지 인간들도 고소하다는 듯 낄낄 거린다. 이런 사소한 농담하나 받아치지 못하고 얼굴이 빨개져 버리다니.. 이대로 광대가 되고 말 것인가? 아니.. 그럴 순 없다. 나도 만만치 않은 놈 아니더냐?
"이런.. 들켜버린 건가요?"
나는 이열치열의 방법으로 그들에게 반격한다. 소녀가 나의 반응에 흠짓 나를 쳐다보는가 싶더니 쿡하고 웃어버린다. 그러나 나머지 천사들의 얼굴은 더욱 굳어간다. 하지만 주선자는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이미 이 자리를 뜬 상태.. 더 이상 나머지 천사들을 배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곧이어 술자리 게임계의 전통.. 왕놀이가 시작되었다. 8개의 쪽지에 1부터 7까지의 숫자와 '왕'자를 채워넣고 뽑기를 한다. 게임계의 지존인 내가 새삼스레 두근두근 긴장이 된다. 모두들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이 뽑은 쪽지를 펼쳐본다. 첫 번째 왕은 요주의 인물이 당첨이다. 요주의 인물은 씨익하고 변태적인 웃음을 흘리더니 느끼한 목소리로 명령을 시작한다.
"1번 4번 서로 목덜미에 키스하기.. 으흐흐.."
"우.. 누구야 누구?"
모두가 잔뜩 긴장하여 두리번 거리기 시작한다.
"나.. 제가 1번입니다."
normal남 1번이 수줍게 고백한다. 하지만 뒤이어..
"헉!"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두번째 normal 남이 4번쪽지를 떨어뜨린다. 우리는 결국 차마 못 볼 광경에 비위가 상해버린다.
"자.. 자.. 다시! 다시!"
우리는 쪽지를 모아 다시 뽑기를 시작한다. 이번 왕은... 왕가슴녀다. 왕가슴녀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명령을 시작한다.
"3번이 6번 귓볼깨물기.."
우.. 하는 신음소리들이 새어나온다.
"내가 3번이야.. 6번 누구세요?"
엄지공주가 자신의 쪽지를 펼쳐보이며 묻는다. 식은땀이 난다. 혹시나 내 쪽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나는.. 5번이다.
"에구.. 제가 6번입니다."
아뿔싸! 요주의 인물이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엄지공주를 바라보고 있다. 심장이 타오르는 것만 같다. 하지만 난.. 엄지공주의 조막만한 얼굴이 번들번들 느끼한 요주의 인물의 불타는 볼을 스치고, 그녀의 앵두같이 귀여운 입술이 그의 기름기 가득한 귓볼을 깨무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다. 나는 애써 시선을 외면한다. 하지만 그 순간 엄지공주의 뜨거운 시선을 느꼈던 건 나의 착각일까?
어쨌거나 요주의 인물은 뽕이라도 맞은 것 마냥 헤롱헤롱 제 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인단 말인가! 비즈니스시엔 감정따위 키우지 않는 냉혈한! 그게 바로 나 아니었더냔 말이다!
"오우 분위기 무르익고~ 한판 더!"
요주의 인물은 흥분이 극에 치달은 표정으로 쪽지를 모아 허겁지겁 섞기 시작한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의 표정.. 더 이상 봐 줄 수가 없다.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고 만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꽃혀버리는 순간이다.
"저기.. 화장실좀.."
나는 맥없이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에 들어가 애꿎은 담배만 피다 다시 화장실을 나온다.
"헉!"
나는 얕은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일 순간..아주 작은 무언가가 내 허리를 꼭 잡고 화장실로 돌격
해 들어온 것이다. 나는 얼떨결에 화장실로 다시 밀려들어온다. 그 작은 물체는 좁은 변기칸으로 나를 밀어넣고 문을 잠궈버린다. 나는 그제서야 아래를 내려다본다. 내 앞엔 엄지공주가.. 그 화려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당신.."
"오늘은 누구꺼에요?"
엄지공주의 목소리에 냉기가 서려있다.
"네?"
"현정이? 자영이? 연희?"
"그게 무슨.."
"누구랑 파트너 해 주려구 나왔냐구요.."
"저.. 그게 아니라.."
엄지공주는 그 서늘한 눈빛으로 한 동안 나를 쏘아보다 휙 하고 나가 버린다. 알 수 없는 엄지공주.. 나는 왜 그녀 앞에만 서면 머저리가 되는 것인가.
나는 한 동안 나의 감정을 추스린 후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어이.. 이거 왜 이렇게 늦어셨나! 한창 재미있는 순간에!"
요주의 인물은 정말 원망스럽단 말투로 내게 궁시렁거린다. 재수없는 인간.. 한편 엄지공주는 방금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앉아있다. 마치 나 혼자 꿈이라도 꾸었던 것 마냥..
"자~ 자~ 다시 시작합니다."
요주의 인물이 쪽지를 내려놓자 마자 각자 쪽지를 집어든다. 이번 왕은.. 그녀.. 엄지공주다. 엄지공주
는 좌중을 둘러보며 씨익 웃고는 앵두같은 입술로 명령을 시작한다.
"2번 5번 키스해요.. 뽀뽀말구 키스에요.. 아주 진하게.."
오우.. 우.. 가벼운 함성과 함께 모두가 2번과 5번을 찾아 혈안이 된다.
"저.. 제가 2번이네요..후.."
교정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수줍은 듯 말한다.
"5번.. 5번 누구야?"
하지만 5번은 좀 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아.. 누구야 이거.."
사람들은 급기야 짜증을 내며 서로의 쪽지를 공개하기 시작한다. 나는 무심코 나의 쪽지를 펼쳐본다. 어차피 엄지공주가 왕이 된 이상 난 쪽지를 확인하지도 않았더랬다. 헌데.. 헌데!
내가 5번이었단 말인가!
"저.. 죄송합니다. 제가 5번이네요.."
힘겹게 마른침을 삼킨다.
"어머.."
교정녀는 벌어지는 입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느 때 보다 더욱 번쩍이는 교정기를 과시하고 있다. 나는
침 조차 삼키지 못한 채 얼어버린다.
"키스 해! 키스해!"
잔뜩 숨을 죽이고 있는 girl들과는 대조적으로 man들은 오늘 만난 이래 가장 즐거운 함성을 토해내며 구호를 맞추고 있다. 난감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나도 모르게 엄지공주쪽을 바라본다. 얼어붙은 그녀의 강렬한 눈빛이 나의 눈과 마주쳐버렸다. 어디 해 볼테면 해보라는 그녀의 도전적인 눈빛에 자극되어 나는 반항하듯 교정녀 에게로 얼굴을 돌린다. 교정녀는 내가 어찌할 새도 없이 어느 새 내 코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그리고 어찌 할 틈도 없이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 대담하리만치 깊은 키스를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교정기가 혀에 닿는 순간 순간 쩌릿쩌릿 감전이 되는 느낌이다. 1초가 1년만 같은 순간.. '우..우..'하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아득히 들려온다. 빨리 이 순간이 끝나기만을 기도한다. 드디어 교정녀가 나를 놓아 주고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 나는 깊은 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엄지공주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하지만 그 곳엔.. 그녀가 없다. 엄지공주가 사라졌다.
3. 고독한 메이트
예~ 예~ 예~
나는 지금 어셔의 ‘yeah’에 맞춰 현란한 몸동작을 구사하고 있다. 동영상을 통해 익힌 나의 춤 솜씨는 더 이상 아마추어로 보이지 않는다. 몸치를 벌레보듯 하는 이 세상에서, 나와 같은 프로는 춤솜씨 또한 프로여야 하지 않을까? 나는 춤을 추며 거울을 바라본다. 댄스 동작과 함께 느낌을 담은 표정까지 지어 보인다. 멋있다.. 급기야 입고 있던 검은 티를 벗어 던지고 한층 나의 춤에 심취하는 순간..
[따를르르릉]
전화가 울린다.
“학학..네 당신의 빈자리를 책임지겠습니다. 학학..”
숨이 찬다. 나도 모르게 계속되는 거친 숨소리.. 고객이 오해하지 않기를..
“당신이 빈자리맨인가요?”
맥없는 여자의 목소리다.
“네 그렇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오늘 비가 오는군요.”
창 밖을 바라본다. 역시나 비가 내리고 있다.
“네 그렇군요..
“특별히 바라는 건 없어요. 하지만 이런 날 혼자 터벅터벅 집에 들어가는 건 너무 우울할 것 같네요.”
마치 나에게 신세한탄을 하는 듯한 이 여자.. 도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 우산을 안 가지고 왔는데.. 저 퇴근시간에 맞춰서 우산 좀 가져다 주시겠어요?”
순간 아연실색하고 만다. 고작 나에게 원하는 것이 우산이었단 말인가?
“후후 이건 핑계구요.. 이런 날은 누군가가 우산을 들고 날 마중나와줬으면 해요. 말동무도 되 주
시구.. 외로움도 좀 덜어주시구요.. 가능한가요?”
하긴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외로움은 배가 되곤 한다. 이런 날은 누군가와 이 쓸쓸함을 함께 나누고 싶은 법.
“예 알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추고 있던 춤을 화려하게 마무리 짓고는 샤워실로 향한다. 샤워 후 젖은 머리를
툴툴 털며 커피한잔을 진하게 탄다. 커피를 가득 부은 머그잔에서 김이 물씬 퍼져 나온다. 나
는 머그잔을 두 손 가득 감싼 채 비가 내리는 쓸쓸한 창 밖을 바라보며 한껏 감상에 빠진다. 고독이 잘 어울리는 남자.. 지금 나는 얼마나 고독한 모습인가.. 나는 문득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본다. 무척이나 분위기 있는 내 모습.. 기분이 한층 센치해진다. 나는 커피를 반쯤 마신 후 옷장으로 향한다. 그렇다! 오늘의 컨셉은.. 고독이다.
오늘은 의뢰인의 기분에 맞춰 비가 오는 분위기와 완벽히 조화를 이룰 생각이다. 여자는 분위기에 약한 법이니까.. 옷장 속을 들여다보며 잠시 고민하던 난, 본능적으로 몇 벌의 옷을 집어낸다. 오늘의 메인 컬러는 고독의 컬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컬러! 브라운이다. 나는 브라운 빛이 감도는 구제진과 깊이 파인 섹시한 까만 티셔츠를 받쳐입고 초콜릿 빛의 자켓을 걸친다. 마지막으로 블랙컬러의 비니를 눌러쓴 나는 거울을 들여다 본다. 고독 그 자체.. 나는 브라운 컬러의 심플한 컨버스를 신고 사무실을 나선다.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은 우산을 쓰고 걸어다니기 보다 아늑한 곳에 들어가고 싶기 마련.. 나는 나의 의뢰인을 위해 나의 애마를 끌고 나갈 작정이다. 비오는 날 자신을 기다리는 남자의 차안..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약간의 냉기가 느껴지는 공기속에서 그녀에게 따스한 담요를 걸쳐준다. 보송한 공기와 아늑한 분위기.. 그리고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여자는 넋을 잃고 말것이다.
나의 애마는 어느 새 테헤란로를 들어선다. 웅장한 빌딩들이 가득한 도로.. 나는 그 중 가장 크고 멋진 빌딩앞에 멈춰서 그 웅장한 빌딩을 올려다 본다. 그녀는 회계사라고 했다. 이 빌딩 어디쯤 있을까? 시계를 본다. 이제 곧 그녀의 퇴근시간.. 나는 그녀의 요청대로 라임빛 우산을 쓰고 그녀가 요구한 제스쳐를 시작한다. 한 손으로 계속 턱을 쓰다듬는 이 제스쳐는 꽤 남성다운 느낌이 가미되어 있다. 오늘은 시작부터 느낌이 좋다.
"휘리휘리.. 자기왔어?"
순간 허리에 둘러지는 거북스런 온기에 화들짝 놀라 옆을 바라본다.
"오우~ 오늘 괜찮은데?"
마흔? 그래 최소 마흔이라 확신되는 여자가 나를 올려다보며 싱글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흠짓 경계태세를 취한다.
"어머 남친?"
옆에 있던 여자들이 황홀한 표정으로 나를 이러저리 살피더니 감탄스런 눈길로 마흔여자를 우러러 본다.
"어~ 우리 자기야가 나 우산안들고 온줄 알구~홍홍.."
마흔여자는 홍홍 콧소리를 내며 더욱 나의 겨드랑이 밑을 파고든다. 나는 뻣뻣히 몸이 굳어간다.
"얘들아~ 난 우리 자기야랑 데이트좀 해야겠다. 먼저 가~"
마흔여자는 동료들을 워이워이 몰아내다시피하며 나를 올려다본다. 그렇잖아도 하늘을 바라보는 콧구멍이 캄캄한 우물처럼 내 눈앞에 뻥뚫려 있다. 순간 뇌라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상상과 함께 몸이 떨려온다.
"오늘 거래.. 꽤 괜찮은걸요?"
여자는 심히 흡족한 표정으로 깊숙히 팔짱을 낀다. 라임및 우산속의 언밸런스한 한쌍.. 나는 나의 애마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반짝이는 나의 애마.. 나는 앞문을 열어 그녀에게 타라는 제스쳐를 취한다. 하지만 여자는 차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 차문을 닫아버린다. 그리고 황당해 마지않는 내 손을 잡아끈다. 여자는 말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간다. 나는 그저 그녀에게 이끌려 갈 뿐.. 여자는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우리가 걸음을 멈춘 곳엔 나의 꿈속에서만 존재하리라 생각했던 늘씬하게 잘 빠진 외제차 하나가 서 있다. 여자는 차키를 내 손에 톡 떨어뜨리고는 조수석문을 열고 털썩 들어앉는것이 아닌가!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떨리는 손으로 차 문을 열고 꿈 속의 차를 탄다. 키를 꽂고.. 핸들을 잡는다. 차는 부드러운 엔진소리와 함께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여자는 비오는 오후와 잘 어울리는 재즈음악을 틀고 만족스럽다는 듯 목을 쭉 뻗으며 슬그머니 나를 바라본다. 부담백배라는 말이 이보다 어울릴 수는 없으리라.. 나는 잔뜩 굳은 몸을 더욱 움츠리며 드리이빙에 열중한다.
"이름이.."
"저.. 그냥 이빈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사업상 내 이름은 기밀이다.
"빈? 호호 빈자리맨의 빈인가? 호호호"
여자의 모든 말과 행동은 뭔가 정도를 넘어섰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over..
"저.. 그럼.. 이기사~"
여자는 목소리를 비틀어가며 나를 부른다. 농담조차도 거북스런 느낌.
"네?"
"여기서 우회전해요."
여자는 그때부터 나의 진로를 지시하기 시작한다. 나는 인간 네비게이터가 이끄는 길을 따라 열심
히 운전에 몰두중이다. 하지만 마흔여자의 손이 내 허벅지를 자꾸 쓰다듬는다. 묘하면서도 거북한 느낌.. 빨리 어디라도 도착함으로써 지금 이 상황이 종료되기를..
거북한 상황이 계속된지 1시간 째.. 우리는 어느 새 복잡한 도로를 벗어나 한적한 교외를 달리고 있다.
"이기사~ 저기 저 앞에서 좀 세우지? 좀 피곤하네.."
마흔여자는 꽤나 피곤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제야 내 허벅지에서 질퍽한 손을 떼어낸다. 나는 마
음속으로 큰 한숨을 돌리며 여자가 가리키는 쪽을 무심히 바라본다. 그러나..
"사모님..저긴.."
"어머? 사모님이라니? 오늘은 내 남자친구역할로 온거 아닌가?"
마흔여자가 기겁을 하며 나무라듯 대꾸한다.
"아..네 하지만 저긴.."
저긴.. 저긴.. 러브호텔이 아닌가? 나의 사업철학에서 벗어나는 곳이 아니더냔 말이다. 다른 건 몰
라도 그건 안된다. 안된단 말이다.
"저.. 계약조건을 잘 못보셨는가 본데.. 저것만큼은 제가 철저히 지키는 스타일이라.."
최대한 매너를 갖춰 마흔여자가 무안하지 않게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마흔여자의 얼굴은 어느새 내가
무안하리만치 일그러져 있다..
"지금 저를 뭘로 보시는 거에요?"
여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다. 나는 더욱 당황한다.
"아니 제 뜻은.."
"지금 저 무시하시는 거에요? 제가 욕구불만에 몸이 달아서 당신을 산줄 알아? 그런 이유라면 남자들
이 줄을 섰어. 이거 왜이래!"
"아.."
나는 감정없는 감탄사를 토해낸다.
"난 그저.. 남자들로도 해소할 수 없는 외로움을 달래보고 싶었다구.. 타인과 함께 결국은 혼자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찰을 해 보고 싶었단 말이야."
유능한 회계사라더니.. 역시 꽤 고차원적인 여자인가보다. 어쨌든 난 어줍잖은 반항을 접고 러브호
텔앞에 당도한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찰이라.. 한데 그걸 왜 러브호텔에서 해야 한단 말인가. 차에서 내린 여자는 약간은 수줍은 자태로 나의 옆에 다가와 내 팔짱을 끼고 호텔로 향한다. 왠지 내가 끌려 가는 이 느낌은 단지 이 여자의 걸음이 나보다 빨라서 일까?
열쇠를 받은 우리는 3층으로 향한다. 나는 발걸음이 무겁다. 그리고.. 303호다. 문을 열자 꽤 아늑
한 장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방 가득 장식된 보라빛이 우울한 날씨와 어우러져 한층 더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어머.. 보라빛 천지네? 그대 모습은.. 보랏빛 처럼..."
여자는 보랏빛 향기란 노래를 흥얼거리며 섹시를 표방한 눈길로 자꾸 나를 바라본다. 웃길려는 건지 유혹하려는 건지.. 여자의 의도를 알 수가 없다. 난감하다. 나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눈을 돌리
고 만다. 보랏빛.. 나는 왜 한순간 엄지공주, 그녀를 떠올린 걸까?
"어머 왜 이렇게 어정쩡하게 서 있을까? 여기 와서 좀 앉아 봐요.."
여자는 내 손을 끌고 작은 쇼파에 나를 앉힌다.
"저기 고찰을 한다고.."
나는 불안한다. 어떻게든 고찰이라는 거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요.. 커피라도 한 잔씩 마시면서 고찰을 해 볼까요?"
"아, 예. 커피는 제가 타겠습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탁자위에 놓인 머그컵에 커피믹스를 넣고 커피를 타기 시작한다.
"그대 모습은.. 보랏빛 처럼.."
여자는 또 노래를 부르고 있다. 보랏빛 향기가 이토록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멜로디였던가? 나는
커피타기에 더욱 열중한다.
"그대 모습은.. 보랏빛 처럼.."
어느 순간 그 노래가 내 등 뒤에서 멈춘다. 온몸이 쭈뼛하고 얼어붙는다. 곧이어 여자의 손이 내 허리를 두르고 여자의 의외로 풍만한 가슴이 내 등에 짓눌려 옴이 느껴진다. 나는 어색함을 감추고자 끝까지 두잔의 커피를 완성해 낸다.
"저.. 커피 드세요.."
여자가 떨어지기를 간곡히 바라며 커피를 권한다.
"그대 모습은.. 보랏빛 처럼.."
여자는 대답대신 내 등에 붙어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여자의 목소리가 내 등허리에서 부
터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온 몸이 닭살로 진동하는 느낌.. 이 여자 미친 건 아닐까? 나의 공포감은 극에 달한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떼어낸다. 여자는 의외로 순순히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나는 커피잔을 들
고 뒤돌아 여자에게 다시한번 커피를 권한다. 하지만 여자는 그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 보고 있다. 우물처럼 캄캄한 콧구멍 두개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커피잔만 들고 서 있는 꼴이 되었다. 여자는 피식 웃더니 내 비니를 슥 벗긴다.
"실내에선 모자를 벗어야지!"
여자는 훈계조로 말하며 내 비니를 쇼파로 던져버린다. 양손에 머그잔을 들고 있는 나로서는 반항
할 도리가 없다.
"어머.. 모자 벗으니깐 자기 더 섹시하다."
여자는 더욱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그렁그렁 눈물까지 맺힐 정도로 감동한 모양이다.
"저기 커피.."
난 어떻게든 화제를 전환하고자 한다. 우리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찰을 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피부도 어쩜.."
여자는 손을 뻗어 내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저기.."
나는 어색한 시선처리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여자의 대담한 시선은 어느새 내 가슴에 멈추어 있
다.
"어머.. 자기 이 갑바좀 봐.."
여자는 내 볼에서 손을 떼어 내더니 다급히 나의 자켓을 걷어내며 내 단단한 가슴을 쓰다듬는다. 얇은 티셔츠 아래 잘 다듬어진 가슴의 윤곽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자는 급기야 티셔츠 아래로 손을 집어넣는다. 여자의 뜨거운 손길이 그대로 나의 가슴에 전해진다.
"저.. 저기.."
나는 잔뜩 당황한다.
"가만 있어요. 그냥 살을 맞대고 싶을 뿐이에요. 인간대 인간으로 교감하는 방법이죠."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래 살을 맞대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여자는 여기서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듯 나의 티셔츠를 쭉 걷어올리더니 내 가슴에 얼굴을 묻는 것이 아닌가.
"저.. 사모님.."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부를려면 자기라고 하던가."
여자의 목소리는 교태로우면서도 시퍼런 날이 서 있다.
"커피 한잔 하시면서.."
이 커피라도 내려놓고 싶을 뿐이다.
"자긴 커피 마시고 있어. 난 이걸 먹을테야."
여자는 소름끼치는 이 한마디와 함께 곧 내 가슴에 입을 맞추기시작한다.
"고찰을 하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당황한 나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여자는 흠짓 동작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 본다. 내가 그녀를 무안하게 만든 것일까? 조금은 미안해 지는 찰나.. 하지만 여자의 눈에 당황한 빛은 온데간데 없다. 여자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상실했다.
"고찰?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고찰을 시작해 볼까?"
여자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벨트를 풀어헤치기시작한다.
[쨍그랑]
머그잔을 떨어뜨렸다.
"앗, 뜨거!"
여자가 비명을 지른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번개처럼 빠르게, 표범처럼 날렵하게 방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방을 나오자 마자 이제 막 들어서는 한 커플과 마주친다. 티셔츠는 목까지 말려올라가 있고 벨트는 반쯤 풀린 나의 모습에 그들이 더욱 민망해 한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가까스로 그 호텔을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밖은 아직 비가 온다. 공기가 차다. 하지만 타고 갈 차가 없다. 나는 무작정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처럼 나의 사업에 회의를 느낀 적은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다. 머리 위로 빗방울이 쏟아진다. 춥다.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다.
4. 노예 계약
[따르르릉]
아까부터 전화가 울린다. 의뢰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화를 받을 수가 없다. 난 아프다. 전 날 몇시간을 빗속에서 헤맸던 탓이다. 수 도 없이 반복되는 오한과 발열로 인해 나의 몸은 이미 녹초가 되어 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는 말을 온몸으로 절감하는 중이다. 나는 지금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누구에게? 사실 내 머릿속엔 이미 한명이 자리잡고 있다. 내 폰에 저장된 오직 한명의 의뢰인.. 어제부터 전화하고픈 욕구를 꾹꾹 달래왔던 그 사람. 나는 힘겹게 폰 버튼을 꾹 누른다. 얼마간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리고..
"여보세요?"
바로 그녀의 목소리다. 온 몸이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기운에 휩싸인다.
"저.. 아파요."
다섯살 먹은 꼬마마냥 눈물이 날 것 같다. 의뢰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다니.. 오늘은 내가 미쳤다.
눈을 떴다. 잠이 들었었나 보다. 아니면 혼수상태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한결 좋아진 느낌이다. 독처럼 온 몸에 퍼져있던 아픈 기운이 많이 가신 것 같다. 그런데 손이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내 손등에 닝겔바늘이 꽃혀있다. 나는 지금 닝겔을 맞고 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두리번 두리번 주위를 둘러본다.
"깼어요?"
상큼한 목소리와 함께 내 눈앞에 조그만 얼굴이 나타난다. 커다란 눈이 깜빡깜빡 내 눈을 들여다
보고 있다. 초컬릿빛 커트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 엄지공주다.
"어디보자.."
엄지공주는 내 겨드랑이에 체온계를 넣고 어린아이처럼 내 방안을 이리저리 맴돈다. 짧은 청자켓과 무릎까지 내려오는 분홍빛 스커트가 그녀만큼 앙증맞다. 엄지공주는 어느새 다시 다가와 체온계를 확인한다.
"음.. 많이 내렸군."
간호사가 백의의 천사라고 했던가. 그녀는 천사임에 틀림없다.
"왜 이렇게 상한거에요? 뭐하고 돌아다녔길래."
엄지공주가 그 화려한 눈으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다.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갑자기 목이 턱 막히면서 심장에서부터 어떤 전율이 느껴진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순간인가. 내가 막연히 바래오던 영화같이 완벽한 상황.. 나는 한 순간 이 여자에게서 운명을 느낀다. 그래 내 운명의 여자.. 바로 엄지공주였던 것이다.
"고맙긴요. 그나저나 저 출장료가 좀 센편인데 지금 현금으로 주실 수 있나요?"
나는 어안이 벙벙해 지고 만다. 목구멍을 막고 있던 멍울이 온데간데 사라졌다. 어쨌든 지금은 현
금이 없다. 얼마전 자켓과 향수를 사느라 돈이 바닥난 상태다. 게다가 어제 건수도 꽝이지 않았더냐.
"죄송해요. 지금은 돈이 없는데.."
나는 중얼중얼 얼버무린다.
"뭐라구요? 돈도 없으면서 사람을 불러요?"
엄지공주는 황당하다는 듯 따지고 든다. 엄지공주는 너무나도 쌀쌀맞다. 나는 끝도없이 울적해진
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돈이 없으면 몸으로 떼우셔야지."
"네?"
당황스럽다.
"출장비 다 채울만큼 내 빈자리맨이나 해야지, 어쩔 수 있나?"
나는 눈만 껌뻑거린다.
"내가 부르면 언제라도 나와야 해요. 알겠죠?"
이 여자.. 무슨 의도일까?
"알겠냐구요!"
엄지공주는 내 앞에 앉더니 다시 한번 힘주어 묻는다.
"네"
나는 홀린 듯 대답하고 만다. 엄지공주는 픽 웃더니 내 볼에 입을 맞추고 다시 내 입술에 입을 맞춘다. 그녀의 조그만 입술이 내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는다. 나는 그녀를 껴안는다. 운명의 여자가 눈앞에 있는데 뭐가 문제더냐! 나는...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이 여자의 노예가 되어도 좋다.
"어.어.. 잠깐.."
갑자기 엄지공주가 나를 저지한다.
"오늘 말구요.. 지금은 바빠서 좀 곤란하니까.. 담에 내가 부를 때 나와요."
"아니.."
엄지공주는 나를 밀어내며 날아오르듯 달려나간다.
"전화할게요. 안녕.."
그리고 그녀가 떠났다. 꿈같은 향기만 남기고.. 나만 남겨두고..
5. 추종자
[따르르릉]
전화가 온다. 혹시 그녀일까?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수화기를 집어든다.
"네, 당신의 빈자리를 책임지겠습니다."
"당신이 빈자리맨인가요?"
그녀가 아니다. 나는 조금 침울해진다. 하지만 나는 프로다.
"네, 그렇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오늘 친구끼리 모임이 있는데.. 하루만 제 애인행세 해 주실 수 있으세요?"
나의 전문분야다.
"아, 예 물론이죠."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진 않았지만 나는 프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엇보다도 나의 일이 우선이다. 나는.. 돈이 필요하다.
옷장문을 연다. 오늘의 모임은 그냥 편안한 모임이라고 했다. 자.. 그럼 오늘의 스타일을 만들어 볼까? 우선 바지는 편안함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베이지색 면바지를 고른다. 그리고 상의로는 면바지의 심심함을 커버해 줄 수 있는 감각적인 바이올렛 체크남방을 선택했다. 면바지에 체크남방.. 이처럼 편안함이란 단어가 잘 들어맞는 앙상블이 또 있었던가!
됐다. 이제부턴 악세사리에만 신경쓰자. 하지만 악세사리도 최소한으로 하여야 한다. 최소한으로 하되 고급스러움을 최대한 부각시키자. 난 웬만해선 잘 착용하지 않는 고가의 손목시계를 착용하기로 결심한다. 몇 달간 고생해서 장만했던 값비싼 시계가 드디어 빛을 발할 날을 만난 것 같다. 그리고 하나 더! 나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한층 북돋워 줄 불가리 뿌르 옴므를 칙칙 뿌린다. 지적인 향기가 내 몸을 감싸듯 스며든다. 나는 향기에 취한 채, 거울 속 네츄럴함과 고급스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나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렇게 한동안 나에게 흠뻑 취해있던 난 고급 손목시계를 통해 시간을 확인한다. 이런, 약속시간이 다가온다. 나는 지적인 동작으로 서둘러 감색 로퍼를 신고 약속장소를 향해 달려나간다.
명동의 한 백화점 로비.. 나는 지금 검지와 중지로 이마를 두드리고 있는 중이다. 고객은 나에게 이마를 두드리는 제스쳐를 원했더랬다. 같은 동작을 하더라도 이렇게 지적으로 소화해 내는 이가 또 있을까?
"휘리휘리.."
뼛속까지 스며오는 나릇한 목소리가 나의 왼쪽 귀를 간지럽힌다. 나는 고개를 돌려 의뢰인을 바라본다. 순간 내 머리속에선 유행지난 노래의 가사가 스쳐 지나간다. 아니 그건 랩이었지..
그녀는 너무지적이야..
그녀는 너무매력있고..
"정확히 맞춰오셨군요. 시간약속이 철저하신데요?"
여자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한다. 분명 한 걸음 넘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데.. 단지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나는 온몸으로 그녀를 느끼고 그녀의 향기에 취해버릴 것만 같다.
“아 예.. 시간약속은 저의 철칙이죠.”
떨림을 애써 감추며 답한다. 하지만 나의 심장박동은 이미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부끄러운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토록 여자에게 잘 반하는 타입이 아니다! 헌데..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것일까! 나는 이미 운명의 여자를 발견하지 않았더냐!
하지만.. 하지만..
루즈한 카키색 니트와 잿빛 진을 너무나도 스타일리쉬하게 소화하고 있는 그녀에게 어느 누가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렇게나 쓸어올리는 흑단 같은 머리칼 한 올 한 올..청아한 우윳빛 볼에 패인 보조개 하나까지도 이토록 아트인 그녀란 말이다! 헌데.. 이런 여자가 왜 빈자리맨을..
“자 가죠?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여자는 자연스레 나의 왼쪽 팔에 팔짱을 낀다. 내 심장과 가까운 곳에 그녀의 온기가 있다. 늘씬하게 뻗은 그녀는 눈높이마저도 나와 환상적으로 맞아떨어진다. 지적임, 단정함, 청초함이 한데 어우러진 향기가 나의 온몸을 자극한다.
[드르르르]
몇 걸음 걷지 않아 폰이 진동한다. 나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레 번호를 확인한다. 이럴 수가.. 이 번호는 온종일 기다렸던 바로 그 번호.. 엄지공주의 번호가 아니냐!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프로란 말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연락을 무시해버린다. 이건 사업상 문제다. 다른 어떤 의뢰인과 있었다 해도 나는 분명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녀가 나를 이끈 곳은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 레스토랑은 온통 주황색 불빛으로 물들어 있다.
“어, 여기!”
한 무리의 남녀가 손을 흔든다. 그녀의 친구들이다.
“어머나? 정말 남자친구가 생긴 거야?”
조금 심술궂게 생긴 여자가 입술을 씰룩거리며 묻는다. 한데 이 여자 표정이 묘하다.
“그래! 내가 생겼다 그랬잖아.”
의뢰인은 시원스레 답하며 나의 팔에 더욱 몸을 밀착시킨다. 하마터면 그녀의 가슴을 느낄 뻔 했다.
“앉자.”
그녀와 나는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녀는 나에게 더욱 가까이 몸을 밀착시킨다. 이럴 땐 자연스레 그녀의 허리를 감싸줘야 한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아야 한다. 나는 프로다. 이런 건 나
의 전문이다. 헌데 나는 왜 이렇게 송장처럼 뻣뻣이 굳어있단 말이냐!
“뭐하시는 분이죠?”
미소년풍의 남자가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묻는다.
“아 저는 유통업계에서 작은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대답에 남자는 잘 정돈되어 있는 손톱을 매만지며 한마디를 툭 던진다.
“임대업이 아니구요?”
까르르르르.. 좌중이 뒤집어진다. 이 분위기는 무엇인가!
“수입은 괜찮은가요?”
기생 오라비처럼 생긴 남자가 묻는다.
“하하하 먹고 살만큼 벌고 있죠. 머..”
“하루 벌어 하루 먹기?”
이번엔 터프 하게 생긴 여자가 비아냥댄다. 다시 한번 까르르르르.. 분위기가 이상하다. 모두들 나를 적으로 보고 있다. 남자도 여자도 모두가 다 나를 공격하고 있다. 남자는 그렇다 쳐도 여자들마저도 저렇게 사납게 나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내가..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안나야, 역시나 저 사람은 니 상대가 못돼!”
“자기 분수를 알아야지 주제에 눈은 높아가지구..”
설마 지금 나를 보고 하는 소리인가? 어떤 자리에서도 빛나던 내가 지금 못난이 중에서도 최하급의 취급을 받고 있단 말인가? 지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래! 친구들은 그렇다치자! 하지만 이 여자는 뭔가! 팔짱을 끼고 앉아 미소까지 지어보이며 친구들의 독설을 즐기고 있는 이 여자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냔 말이다!
밥이 코로 들어갔는지 눈으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나는 정신이 혼미해 질 즈음 일어나 화장실로 향한다. 난생 처음 내 자신에 대한 열등감으로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나는 화장실 벽을 붙잡고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나의 감정을 추스려본다.
[드르르르]
폰이 다시한번 진동한다. 나의 엄지공주다. 가슴이 싸하게 아려온다. 엄지공주를 외면했던 벌을 받는 것일까?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다. 나는 지금 엄지공주에게 위로받아야 한다. 나의 상처입은 가슴을 어루만져 줄 사람은 오직 엄지공주밖에 없을 것만 같다.
"여보세요."
"왜 이제야 받는거야."
엄지공주의 목소리가 어느 때 보다도 굳어있다. 나는 위로를 받고 싶단 말이다.
"아.. 미안해요. 사정이 있어서."
"내가 부르면 무조건 달려오랬잖아요."
"어디에요. 지금 갈게요."
"일단 화장실에서 나와요."
머릿속이 멍해진다.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연다. 믿을 수 없는 광경.. 엄지공주가 차가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왜 그녀가 여기 있는 것인가.
"나가요."
엄지공주는 이 한마디만 내뱉고는 내 손을 꼭 잡고 나를 출구로 이끈다. 그리고 그렇게 엄지공주가 출구를 열어젖히고 나를 지옥에서부터 끌어내는 순간..
"가지마."
누군가 문을 붙든다. 뒤를 돌아본다. 그곳엔 오늘의 의뢰인이 문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하지만 난 두번 다시 저 소굴로 들어가고 싶진 않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래도 고객에 대한 미안한 마음정도는 표현해야 할 것이다. 헌데.. 그녀의 팔이 붙잡는건.. 내가 아니다. 그녀는 엄지공주를 붙들고 있다.
"놔."
엄지공주가 표정없이 말한다.
"정말 가는거니?"
의뢰인이 다시 한번 묻는다. 엄지공주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의 깊은 눈이 안
타까움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엄지공주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미련없이 내 손을 잡아끈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그녀의 뒤를 따른다.
한동안을 엄지공주와 그렇게 걸었다. 내 머릿속은 엉망으로 뒤엉켜있다. 뭐라도 묻고 싶지만 뭐라고 물을 말도 없다.
"미안해요."
엄지공주가 한참만에야 입을연다.
"그냥 내 전화를 씹어버린 벌이라고 생각해요."
안그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최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저.. 도대체 무슨.."
"신경쓰지 마요. 내 추종자중 한명이니까."
엄지공주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꾸한다.
"네?"
"우리병원 의사.. 으.. 역겨워."
끔찍하다는 듯 작은 몸을 부르르 떠는 엄지공주..
"아까 그 여자한테 혹 했죠?"
엄지공주는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매섭게 째려보며 묻는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장승처럼 서버린다.
"하긴 뭐.. 그 정도 여자면 넘어갈 만도하지.. 용서해 줄게요."
엄지공주.. 이거 정말 알 수 없는 여자다. 그런데 그 여자가 추종자중에 한명이라 했던가? 그럼 추종자가 더 있다는 말.. 혹시 나도 그 추종자들중 한명인 건 아닐까?
"난 구속하는 사람들 딱 질색이야. 그런 면에서 당신은 참 좋아."
엄지공주가 나를 바라보며 생긋 웃는다. 귀엽다. 감격이 밀려온다. 결국 나는 추종자가 아니다. 나는 엄지공주가 좋아하는 사람이다. 엄지공주는.. 나의 운명이다.
"에이 꿀꿀하네.. 우리 놀러가요."
엄지공주가 다시 한번 내 손을 강하게 잡아끈다. 그리고 나는 여지없이 그녀의 뒤를 열심히 뒤따른다.
6. 가지마세요
나는 오늘도 모든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거리를 활보하는 중이다. 새로산 살구빛 자켓과 옅은 빛깔의 진으로 코디한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환상적으로 빛나고 있다. 날씨는 화창하고 햇살은 솜털처럼 따사롭다. 오늘 이토록 나의 발걸음이 가벼운 이유는.. 지금 가는 이 길이 엄지공주를 만나러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저기 멀리 빛이 보인다. 보석처럼 빛나는 우리 엄지공주다. 가슴이 터질 듯 뿌듯해온다. 나의 아름다운 운명의 여인.. 코발트빛의 트렌치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놓고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귀여운 나의 여인.. 나는 곧 그녀를 향해 쏜살같이 달릴 자세를 취한다.
"잠깐.."
순간 누군가 나의 팔을 붙든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바라본다.
"헉!"
이 사람은.. 엄지공주의 추종자! 그 여의사가 아닌가!
"포기해! 엄지공주는 내꺼야."
그 순간 다른 누군가가 나의 멱살을 붙든다.
"아니.. 내꺼야. 다 포기해!"
그리고 순식간에 수십명의 사람들이 달려와 나를 둘러싼다.
"포기해! 포기해!"
여의사를 선두로 모두가 나를 에워쌌다. 모두들 '포기해'를 합창하며 점점 나에게 다가온다. 칼을 든
이도 있고, 채찍을 든 사람도 있다. 나를 죽일 속셈이 분명하다.
"사..살려줘. 살려줘!"
"포기해! 포기해!"
"으악!"
눈을 떴다. 꿈이었다. 식은땀이 난다. 꿈이라기엔 너무나도 리얼했기에 아직도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린다. 엄지공주.. 그녀는 나에게 있어 그렇게도 높은 나무인 것일까?
[따르르릉]
전화가 온다. 그녀일까?
"네, 당신의 빈자리를 책임지겠습니다."
"빈자리맨이시죠?"
역시 그녀가 아니다. 몇일째 그녀에게서는 연락이 없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진다.
"네, 그렇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저 오늘 옷을 사러 갈건데 같이 동행 좀 해주시겠어요?"
매우 감각적인 요구다. 스타일에 관한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내가 아니더냐..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도무지 흥이라는 것이 나지 않는다. 간만에 신나는 건수가 들어온 상황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나는 프로다. 일을 해야 한다.
무얼 입어야 하나? 나는 터벅터벅 옷장으로 걸어가던 중에 발이 걸린 청바지를 주섬주섬 주워 입는다. 곧이어 옷장문을 열고는 대충 손에 걸리는 티하나를 꺼내입고 역시나 손에 집히는 자켓 하나를 걸쳤다. 머리는 왁스로 대충 구깃거리고 귀에는 피어싱 하나를 박았다. 악세사리함에 손을 집어넣고 손가락에 걸려든 목걸이 하나를 꺼내 목에 두르고 수십병의 향수중에 아무거나 골라잡아 칙칙 뿌린다.
습관적 절차들.. 이성적 판단은 결여되어 있었다. 왜이렇게 힘이 나지 않는걸까?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채 마지막으로 거울앞에 섰다. 하지만 거울속 나의 모습은 놀랍게도 여느 때의 스타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완벽모드가 아닌가! 역시나 프로는 다른 모양이다. 나는 발을 휘휘젓다 걸려든 운동화를 대충 구겨신고 저벅저벅 문을 나선다.
강남의 모백화점 앞.. 나는 기둥에 머리를 기댄 채 의뢰인을 기다리고 있다. 오늘의 의뢰인은 무척이나 감각적인 것이 분명하다. 어쩜 지금 나의 기분과 이렇게나 맞아떨어지는 포즈를 요구했으니 말이다. 나는 잠시 눈을 감는다. 눈앞이 캄캄해진다. 그러나 곧 광명의 빛이 보이니.. 바로 나의 엄지공주다. 하지만 그녀는 나에게 있어 수만광년이나 먼 곳에서 존재하는 별.. 감히 손조차 댈 수 나의 엄지공주..
"휘리휘리.."
의뢰인이다. 난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본다. 통통한 볼이 꽤 귀여운 아가씨다. 나를 보며 환하게 짓는 미소도 해맑아 보인다. 혹시나 엄지공주의 추종자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그녀의 미소에 단번에 날아가 버릴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녀의 스타일은 너무나도 수수하다. 회색 가디건에 검은색 면바지, 그리고 검은색 단화..오늘의 의뢰가 그녀에게 참으로 절실했음을 느낀다. 나는 가벼운 인사를 끝내고 그녀를 에스코트한다. 나의 세련된 매너에 매료된 그녀는 철저히 나의 리드를 따르고 있다. 그렇다.. 나는 이렇게 여자를 리드하는 사람이었다.
여성복코너를 둘러보던 난 그녀에게 적절할 듯한 샵들을 체크한 후 하나하나 방문을 시작한다. 통통한 이 아가씨에게 무엇이 어울릴까.. 그래 이 귀여운 매력을 100퍼센트 발산시켜 줄 귀여운 코디로 나가보자. 나는 통통튀는 비비드 칼라의 깜찍한 가디건과 상큼한 체크무늬 스커트를 추천한다. 의뢰인은 나의 초이스에 약간 당황한 빛을 띄면서도 뭔가 신나는 듯한 표정으로 옷을 들고 탈의실로 향한다. 순진하면서도 귀여운 아가씨다. 나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기다린다.
"어머.. 남자친구 분이 너무 감각있으시다."
점원이 나를 추켜세우기 시작한다. 나는 가벼운 미소로 칭찬에 보답한다. 점원의 칭찬이 입에 발린소리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는 걸.. 나는 알고있다.
[드르르르르]
갑자기 나의 폰이 진동한다.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뭐해?"
나의... 엄지공주다.
"네.. 저는 지금.."
온몸이 바짝 긴장상태에 돌입한다. 그녀의 목소리가 내 몸에 전율을 일으켰다.
"일하는구나? 바쁜거에요?"
"아니요. 어디죠?"
통통녀에겐 미안하지만.. 손톱만큼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나는 오직 엄지공주를 향해 달릴 뿐이다.
헉헉대며 도착한 약속장소에 아직 엄지공주가 보이지 않는다. 괜한 설렘.. 기다림마저도 행복한 것이 사랑이라고 했던가? 나는 그녀의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완벽한 행복감에 휩싸였다. 두근두근 심장 박동마저도 짜릿한 쾌감을 만끽하는 중이다.
"휘리휘리"
아름다운 재잘거림.. 엄지공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는 불후의 선율이다.
"아, 왔어요?"
바보같은 목소리와 바보같은 표정.. 난 왜 그녀앞에서만은 이렇게 헤벌쭉한 바보가 되는것일까?
"네, 의뢰할 일이 있어서요. 아직 저한테 빚이 남았다는 건 알고 있죠?"
사무적인 말투, 쌀쌀한 표정.. 행복감으로 충만했던 내 감정은180도 반감되고 만다.
"지금 만나는 남자가 있는데 이 남자 마음이 궁금해서요. 날 좋아하는 것 같기두 하고.. 아닌 것 같기두
하고.. 헷갈려.."
나의 심장은 벌써부터 갈기갈기 찢어져 나가고 있다.
"자 이제부터 미션을 줄게요. 그 남자랑 저랑 같이 걷고 있을거에요. 그 때 당신이 뜬금없이 다가와선
나에게 좋아한다는 고백하는 거죠. 그 때 그 남자의 반응이 어떨지 정말 궁금해.."
엄지공주는 상기된 표정으로 열심히 설명을 하고.. 나또한 그녀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은 분명 아름다운 선율이었는데 이젠 아니다. 그녀가 내뱉는 음절 음절이 날이 번쩍 선 면도날처럼 내 가슴을 찍어대고 파고들어 상처를 내고 있다는 걸.. 그녀는 모르고 있는 걸까?
곧 그녀의 말대로 훤칠한 남자하나가 걸어온다. 나는 약속대로 비참하게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엿본다. 지적인 이미지의 남자는 감각이나 외모에 있어 어디하나 빠질 것이 없어보인다. 옷이나 시계를 보아하니 하나같이 명품인걸 봐서 돈도 있어뵌다. 세심한 배려와 매너도 흐트러짐이 없다. 오늘 더 신경쓰고 나왔어야 했는데.. 왠지 초라해 지는 내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정말로 참을 수 없는 건.. 엄지공주가 웃고 있다는 것.. 나의 숨이 막힐 정도로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순간 엄지공주가 수줍게 그 남자에게 팔짱을 낀다. 신호다. 내가 나가야 할 타이밍이다. 하지만 신호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자동적으로 발이 먼저 뛰어나간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엄지공주를 붙잡는다.
"어맛! 뭐에요!"
엄지공주가 각본대로 놀란 척 뒤를 돌아본다. 오늘 그녀는.. 너무나도 아름답다. 사랑스러운 레몬 빛
원피스에 셔링이 들어간 깜찍한 밤색 자켓을 걸친 그녀.. 이것이 다 오늘 이 남자를 위함이란 말인가?
나를 이용해야 할 정도로 이 남자가 소중하단 말인가! 나는 결국 한낮 그녀의 추종자중 하나였던 것인가?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응어리에 말문이 막혀 버린다. 조금전 엄지공주가 외우라고 준 대사도 까먹어버렸다. 그냥 엄지공주를 원망스럽게 바라볼 뿐이다.
"뭐야 당신?"
훤칠한 남자가 결국 나를 공격해 온다.
"저는.."
나는 또 말문이 막힌 채 솟아 오르는 눈물을 꾹 참는다. 엄지공주는 답답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녀앞에서 또 바보가 되고 만다. 그 쉬운대사하나 말 못하는 멍청이일 뿐이다.
"가지마세요."
잠긴 목에서 겨우 새어나온 한마디가 이 말이다. 혹시나 그녀가 도망갈까봐 먼저 연락한번 못했다. 구속한다고 느낄까봐 좋아하는 티도 못냈다. 베게에 머리를 박고 그녀의 얼굴을 잠시라도 잊어보려고 악을 썼을 뿐이었다. 그런데 나에게 남은게 겨우 이거란 말인가? 다른남자의 마음을 떠볼 수단에 불과했단 말인가? 저런 남자를 만나면서 왜 나를 불렀던가! 나는 솟아오르는 눈물이 들킬까봐 돌아서버린다. 그리고 달린다. 다행히도 이제서야 눈물이 흘러나온다. 세상이 뭉글뭉글 왜곡되어 보인다. 오늘은 엉망이다. 오늘 건수도 날아가버리고 엄지공주도 날아가버렸다. 나는.. 세상에서 버려졌다. 나도 세상을 버리겠다.
7. 청구서
나는 지금 밤거리를 헤매고 있다. 걷고 걷다가 눈에 띄는 클럽을 찾았다. 가슴속으로 울려드는 음악소리.. 느린 리듬에 몸을 맡겨본다. 어느 순간 늘씬한 여인이 다가와 나를 잡는다. 하지만 엄지공주가 생각난다. 클럽을 뛰쳐나왔다.
다시 걷는다. 수많은 연인들이 스쳐지나간다. 행복해 보인다. 다시 엄지공주가 생각난다. 서둘러 술집을 찾는다. 술을 주문하고 몇잔을 들이켰다.
"사랑해."
"나두.."
옆자리에서 남녀한쌍이 부둥켜 안고서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술집을 뛰쳐나왔다. 집에나 가야겠다.
집으로 가는 길목.. 한 꼬마 여자아이가 아빠손을 잡고 깡총깡총 뛰고 있다. 분홍 치마를 입은 예쁜 꼬마아이.. 나는 달리기 시작한다. 지워야 한다. 이젠 지울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언제쯤 잊을 수 있는 것일까..
문을 열고 침대로 쓰러진다. 불도 켜기 싫다. 씻는 것도 귀찮다. 눈을 감고 대자로 누워버린다.
[드르르르]
폰이 울린다. 난 폰을 꺼내들어 번호를 확인한다. 엄지공주다. 가슴이 떨려온다.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네, 여보세요."
이젠 끝이라는 굳은 결심은 온데간데 없이 전화를 받아버렸다. 머저리.. 바보..
"실망이에요."
엄지공주가 단호히 말한다. 정말 단단히 실망한 모양이다. 나는 더욱더 소심해지고 만다.
"죄송합니다."
"정말 그것밖에 못해요?"
"다음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서글프다. 엄지공주는 얼음공주다. 어쩜 이리도 모진 것인가!
"고작 한다는 소리가 가지마라니 어딜가지마라는 거죠?"
"그건.."
얼굴이 바짝 달아오른다. 그건 나의 수줍은 고백이었다. 지금껏 말 못했던 나의 마음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고백이었단 말이다! 그걸 몰라주고 이렇게 면박이나 주다니.. 엄지공주! 해도해도 너무한것 아닌가!
"도대체 뭐에요. 몇 일동안 연락한번 없구.. 다른남자 만나는 거 보고두 그냥 가버리구.. 당신 맘 정말
모르겠다구요!"
뭐지? 잠시 머릿속이 텅 빈것만 같다. 머릿속에서 잠시 정전이 일어났는가 보다.
"어쨋든 이래저래 당신때문에 손해본게 한둘이 아니야! 청구서 날릴테니 알아서 해요!"
전화가 끊겼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불과 몇분전의 절망적 기분이 온데간데 사라졌다. 아직도 상황파악은 안되지만 왜 이렇게 입꼬리가 올라가는지 나도 모르겠다.
눈을 떴다. 오전 10시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었나보다. 커텐사이로 아침햇살이 퍼져들어온다.
"으자자자.."
기지개를 편다. 근래들어 오늘처럼 개운했던 날이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쥬스를 마신다. 그리고 문틈에 끼여있는 신문을 집어들었다.
[툭]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깜찍한 분홍빛 봉투다. 한눈에 봐도 누가 보낸 것인지 알 수 있다.
"청구서?"
나는 온몸으로 젖어드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봉투의 내용물을 펼쳐들었다.
<손해배상 청구서>
나(이하 '갑'이라고 함)는 빈자리맨(이하 '을'이라고 함)이 나에게 입힌 손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배상을 청구한다.
1. 을이 다른 여자와 키스를 함으로 인해 갑이 입은 정신적 피해
2. 갑이 병원 일을 다 팽겨치고 을을 치료함에 따른 병원의 사퇴요구
3. 을이 다른여자에게 혹함으로 인해 갑이 느낀 배신감
4. 을의 무관심으로 인해 갑이 느낀 불안감과 외로움
5. 을보다 다섯배는 비싼 제2의 빈자리맨 고용비
6.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의 기대를 저버린 을에 대한 실망감
상기의 사항에 따른 배상액을 계산해 본 결과, 어마어마한 배상금이 산정되었다. 그러나 을의 경제적 사정을 고려하여 한 가지 중재안을 제안한다.
-- 을은 평생을 갑의 빈자리맨으로 봉사한다.
나는 청구서를 가슴에 안고서는 허둥지둥 폰을 찾아 엄지공주의 번호를 누른다. 시끄러운 음악소리.. 절로 웃음이 난다.
"네. 여보세요!"
천하의 엄지공주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진다.
"청구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합의하시겠습니까?"
이건 그녀의 프로포즈인가? 나는 처음으로 그녀앞에서 한껏 여유를 찾는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면 안되겠습니까?"
잠시 침묵이 흐른다. 나는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왜 대답이 없는 것인가! 입이 바짝바짝 말라간다.
"문.. 열어주시겠어요?"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문? 나는 곧장 문을 향해 달려간다. 허겁지겁 걸쇠를 풀고 벌컥 문을 열어젖힌다.
앗! 잠시 눈이 부셨다. 환한 빛이 내 앞에 서 있다. 그 아름다운 빛이 나의 목을 끌어안는다. 나도 그 빛을 끌어안았다. 내 품에 꼭 안겨드는 그 작은 공주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는다.
"사랑해.. 이 바보."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온몸이 녹아내릴 듯 노곤해진다.
언젠가 내가 그랬던가? 나는 할수만 있다면 평생 그녀의 노예가 되어도 좋다고..
꿈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