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빛 우정 1

이구아나2006.12.01
조회255

프롤로그

 

 

 

한가로운 오후..

영주는 대학생활 3년만에 처음으로 사귄 남자친구와 함께 젊음이 가득한 신촌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충만감에 사로잡힌 그들.. 마치 이 세상에 그들 둘 이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 서로에게 푹빠져있는 신참커플이다. 헌데 이렇듯 꿈길을 걷고 있는 영주를 '툭' 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으니.. 

 

"뭐야?"

 

짜증이 극에 달한 영주가 뒤돌아 소리친다. 그리고 한 순간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머리칼로 살짝 가려지긴 했지만 그의 눈을 바라본 영주는 잠시 멈칫한다.

 

"죄송합니다."

 

영주는 자신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사과를 하며 돌아선다.

 

"아는  사람이냐?"

 

영주의 남자친구가 영주의 멍해진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묻는다. 영주는 대답도 않은 채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다. 남자친구가 뒤돌아 그 사람을 쳐다본다. 누구든 한번 쯤은 돌아보게 만들 법한 매력적인 남자. 왠지 모를 우수어린 분위기가  바라보는 이의 가슴까지 저미게 만드는 묘한 사람이다.

 

"쳇! 뭐야.. 반했냐?"

 

남자친구는 기분이 상한 듯 삐죽거리며 영주의 손을 잡아끈다. 하지만 그 사람.. 그 묘한 사람은 걸음을 옮기는 영주의 뒷모습까지 묵묵히 바라보더니 다시 돌아서서 걷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사람의 입술이 묘하게 웃고 있다. 그 웃음은 쓸쓸하고.. 또 슬프다.  


 

1. Past years


올해 고등학생이 된 영주는 막 등교준비를 마쳤다. 새 교복, 새 가방.. 모든 것이 새롭다. 오늘부터 새로운 세계로 입성하는 것이다. 영주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머리와 옷매무새등을 가다듬는다.귀를 살짝 덮는 커트머리와 늘씬하게 뻗은 다리.. 영주에게서는 왠지모를 중성적 매력이 물씬 풍긴다. 영주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어린시절을 떠올린다.

 

"그땐.."

 

3명의 언니들 틈에서 자란 영주는 인형놀이를 좋아했다. 예쁜치마가 갖고 싶어 떼를 쓰고, 언니들에게 머리를 땋아달라고 조르던 아주 평범한 여자아이였다. 그리고 중학생시절까지도.. 그 날이 오기전까지 영주는 여느 여중생과 다를바 없는 그런 평범한 아이였다.

그 날 낮잠을 자지 않았다면.. 그리고 입속에 있던 껌이 머리에 덕지덕지 붙어버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 단발머리를 잘라내지 않았다면.. 어쩜 오늘의 영주는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머리를 자른 다음날..

영주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영주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감정에 그들도 당황하였으리라. 그냥 넋을 잃고 말았더랬다. 그도 그럴것이 머리를 자르는 순간 영주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녀의 숨겨져 있던 중성적 매력이 드러나버린 것이다.

그러고보면 영주에겐 분명 뭔가 다른 구석이 있었다. 날이 갈수록 쭉쭉 뻗는 팔다리도 그러하거니와 영주를 보면 어떤 아련한 느낌이 있었다. 부드러운 갈색머릿결.. 아기같은 피부결.. 하지만 무엇보다 영주의 눈을 보면 가슴이 저려온다. 깊고 촉촉한 그 눈빛이 이상하게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영주의 눈동자는 푸른빛이 감돈다. 영원처럼 고독한 깊은 바다 빛..
 
어느 누구보다도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며 사춘기라는 열병에 고통을 겪게 되는 족속이 여중생들이다. 하지만 여학교라는 울타리속에 갇힌 수감자들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울타리 속에서 이성을 찾을 수 없을 시 그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은 조금 왜곡되고 만다. 그들의 열정은 이성과 닮은 누군가에게로 향한다. 그렇게 미림여중생들의 열정은 자연스레 영주에게로 집중되어 버렸다

 

단짝 현정이도, 민지도 영주앞에서 얼굴이 새빨개져버렸다. 등굣길 곳곳에서 여중생들이 튀어나와 편지를 주고 도망가기도했다. 화장실만 다녀와도 영주의 책상위엔 늘 간식거리가 쌓여있었다. 발렌타인데이에 받은 초컬릿박스는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처음엔 예상치 못한 낯선상황에 당혹해 하던 영주였다. 하지만 꿈많은 소녀들이 제공하는 관심과 사랑에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이 있었다. 소녀들은 영주의 왕국을 만들어주었고 영주가 그 왕국을 떠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영주에게 모든 권력을 부여했다. 권력의 달콤함이란..
결국 영주는 그 특권을 포기할 수 없었던가보다. 영주는 소녀들위에 군림했고.. 소녀들은 그의 통치에 열광했다. 소녀들은.. 영주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권력이란 절대 쉽사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주는 노력했다. 중학교 시절 내내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소녀들의 저항할 수 없는 압력아래.. 그 무서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점차 그들의 기호에 완벽히 부합하는 이성상으로 다듬어진 영주.. 그러니 누구라도 영주의 눈빛에 가슴이 설레지 않은 이가 있었겠는가..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영주는 이미 미림여중의 전설이었다. 수많은 후배들의 눈물과 숨막힐 듯한 꽃다발속에서.. 전례없는 그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그녀의 왕국에서 물러났다.


이제 고등학생이 된 영주...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주는 또 여고에 배정을 받았다.

 

"고딩들한테도 먹히려나?"

 

영주는 거울속 자신의 모습에 실없는 웃음을 흘려보내며 서둘러 집을 나선다.

 

 

1학년 2반..

앞으로 영주가 몸담을 반이다. 영주는 교실문을 열고 들어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기저기서 영주를 흘긋 거리는 소녀들의 눈빛이 느껴진다. 결국 고딩들한테도 먹히는 모양이다. 다시 한번 영주왕국이 탄생할 것인가?

 

"쿡!"

 

영주는 괜히 웃음이 난다. 그 순간..

 

"저기.."

 

누군가 영주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예?"

 

영주는 흠짓 놀라며 그 누군가를 돌아본다. 아담한 체구에 무척 착해뵈는 여자애가 영주에게 잠깐 나와보라는 손짓을 하고있다. 어리둥절한 영주는 일단 그 아이를 따라 교실문을 나선다. 여자애는 말도없이 앞장서서 얼마를 걷더니 결국 인적 없는 작은 공터에 멈춰선다. 영주도 걸음을 멈추었다.

 

"희선언니가 불러달래서요."

 

그제서야 입을 연 여자애는 새빨개진 얼굴로 황급히 자리를 뜨고만다.

 

"뭐지?"

 

영주는 아직도 어리둥절한채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순간 낮은 발자국 소리가 공터를 고요히 울리기 시

작하고.. 저기서 영주를 향해 다가오는 한 여학생이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영주의 앞에 멈춰선 그녀.. 유리처럼 투명한 피부와 커다란 눈이 매력적인, 굉장한 미인이다! 그런데 이 여학생은 아무말도 않은 채 영주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뿌듯한 미소만 짓고 있다. 영주는 괜히 민망한 마음에 고개를 살짝 떨구어 버린다.

 

"너.. 혹시.. 나 모르겠니?"

 

드디어 여학생이 입을 열었다. 그제서야 영주는 고개를 들어 그 미녀를 찬찬히 살펴본다.

 

'그래! 어쩐지 낯이 익다했지..'

 

희선.. 민희선. 영주의 중학교 시절 미림여고 얼짱으로 유명했던 바로 그 희선이다.

 

"희선.. 선배님?"

 

영주의 한 마디에 희선의 얼굴가득 웃음꽃이 피어난다.

 

"아는구나.."

 

영주를 바라보던 희선의 얼굴이 곧 붉게 물들어버린다.

 

"근데 무슨일로.."

 

영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희선에게 묻는다.

 

"어.. 다른게 아니고.."

 

희선은 잠시 머묻거리는가 싶더니,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영주의 눈빛에 다시 한번 볼이 발그레해진다.

 

"그게.. 나랑 자매하자구."

 

"자매요?"

 

"어.. 모르니? 우리학교는 자매맺는 전통이 있거든. 나는 너랑 맺고 싶어서.. 미리 말해두는거야."

 

"아.."

 

영주는 뜬금없는 요구에 어색한 미소만 머금고 있다.

 

"왜? 싫니?"

 

갑자기 희선의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새어나온다. 영주는 깜짝 놀라서는..

 

"아니 그게 아니라.."

 

하며 희선을 진정시킨다. 아무래도 보통성격의 소유자는 아닌 듯 싶다.

 

"답해줘. 할건지 말건지.."

 

하지만  난감한 영주는 할 말을 잃고 만다.

 

"어서!"

 

이제 거의 악에 가까운 희선의 목소리에선 살기마저 느껴진다.

 

"아, 예..할게요. 그렇게 해요."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버린 영주... 결국 천하의 영주가 엽기녀에게 두손을 들고 말았다.

 

그렇게 공포의 시간은 지나가고 어느 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래.. 별 일이야 있겠어? 밥이나 먹자!'

 

희선사건으로 인해 영주는 기분이 좋지 않다. 뭔가 잘못걸려들었다는 생각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져 버렸다. 

 

'에잇! 첫날부터 이게 뭐람...'

 

숟가락이 코에 들어가는지 입에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밥을 먹고 있는 영주..

 

"저.."

 

누군가 영주의 등을 톡톡 두드린다. 영주는 화들짝 뒤를 돌아본다.

 

"저.. 희선언니가.."

 

아침에 찾아왔던 그 아이다. 안그래도 침울해있던 영주는 급기야 짜증이 솓구치고 만다.

 

"뭐야! 또 뭔데!"

 

영주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아이는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이 새빨개져선 떨리는 손가락으로 뒷문을 가리킨다. 거기선.. 희선이 팔짱을 끼고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영주는 고개를 한번 떨구고는 천천히 일어나 희선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간다. 희선은 자신의 앞에 우뚝 멈춰선 영주를 올려다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묻는다.

 

"너.. 오늘 한번도 나 안찾아왔지?"

 

"전.."

 

"그래! 첨부터 모든 걸 기대할 순 없으니까.."

 

희선은 큰 인심이라도 쓴다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더니,

 

"자.. 이거."

 

하며 영주에게 폰하나를 건낸다.

 

"저.. 폰 있는데요?"

 

"이건 내 전용폰이야! 내가 부르면 당장이라도 달려오라구! 화장실 갈때두.. 청소할때두.. 항상 소지하

구 있으라구! 알겠지?"

 

서둘러 자기 할 말만 마친 희선은 용건이 끝나다는 듯 팽그르르 시녀하나를 끼고는 횅하니 가버린다. 그런 희선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영주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쳇!"

 

영주가 피식 하고 실없는 웃음을 흘린다. 느낄 수 있었다. 아닌척 하지만 떨리는 희선의 손.. 영주의 눈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던 희선의 초조한 표정.. 영주가 모를리 없다. 희선의 모습은 몇 년간 경험해왔던 수많은 여자애들과 조금도 다를바 없었다.

 

희선이 건내준 폰을 한동안 바라보던 영주의 입가에 알수없는 회심의 미소가 번지기 시작한다.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