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부 누가 추리소설을 뒤에서부터 읽는가. “어디로 샌 거야?” 카트를 밀며 식품코너쪽으로 몸을 돌렸다. 일요일 아침부터 내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지란은 사라지고 없었다. 냉장고 속은 물론 텅 비어 있었다. 라면을 끓여 먹더라도 어차피 마트에 왔어야 했다. 휴대폰을 든 손을 바꾸며 식품코너쪽을 둘러본다. “어제만 해도 약속 있단 말 없더니.” “약속이란 게 갑자기 생기기도 하니까.” “그러게, 누굴 만나냐구.” “나중에 얘기할게. 나 지금 매우 바쁘거든.” “어라?” 일방적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뭔가 냄새가 난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다. 설마, 헤어진 옛남자를 만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인스턴트 덮밥을 종류별로 하나씩 카트 안에 담는다. 다른 건 몰라도 요리만큼은 정말 끔찍하게 싫어한다. 맛은 둘째 치고 귀찮은 일이 너무 많은 탓이다. 껍질을 벗겨내고, 씻어내고, 손질해야 하고, 칼질도 해야 한다. 그리고 맛을 내기 위해서도 여러 가지 잡다한 일을 모조리 해야 한다. 인스턴트는 그 귀찮은 일을 모두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게 나를 도와주는 셈이다. 기특한 녀석. “안녕하세요.” 누군가 카트를 밀고 옆으로 다가와 인사를 한다. 낯이 익은 듯 한 사내가 빙그레 웃고 있다. “저번에, 택시 사건.” “아.” 선뜻 기억해내지 못하는 나를 위한 배려일까. 그 덕분에 택시 사건은 죽어도 잊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의 옆에 낯선 젊은 여자가 함께 동행하고 있었다. 대략 이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이다. 꼴에 젊은 여자랑 사시나 보네. “죄다 인스턴트식품이군.” 카트 안을 기웃거리며 그가 놀리듯 내뱉었다. “남의 일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영양가는 둘째치더라도, 비만의 원인이 되기도 하죠.” “하, 무슨 상관?” “나잇살은 쉽게 안 빠진다던데. 그 나이에 이런 음식을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위아래로 기분 나쁘게 훑어보며 비아냥거리는 그 자식의 머리통을 날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신경 좀 써야 할 것 같은데.” 옆에 있던 젊은 여자가 쿡쿡대며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그는 태연하게 등을 보이며 카트를 밀고 나갔다. “아…….아니, 뭐…….뭐 저런 미친 새끼가 다 있어?” 느닷없는 공격에 단순한 방어조차도 하지 못한 것이 너무 억울한 기분이었다.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런 개 같은 녀석한테 아침부터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지? 정말 발악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마트 안은 너무 넓었다. 그리고 보는 눈도 너무 많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타인의 시선에 민감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십대의 오만과 패기가 사라진 지금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시뻘건 얼굴로 그저 그의 뒤통수를 쏘아보는 것이 최선의 발악이리라. 이 분하고 분한 마음을 어찌 삼키라. 장보던 일을 멈추고 카트를 홱 돌렸다. 신경질 나게 카트를 밀고 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카트안의 식품들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주위를 슬쩍 둘러보고 뒷걸음질 치며 카트를 끌었다. 카트 안에 있던 인스턴트식품을 집어 다시 제자리에 올려놓고 힘차게 앞으로 밀며 걸어 나갔다. 나를 너무 믿는 게 아니었다. 먹으려고 만들었던 스파게티는 개도 먹지 않을 맛을 내고 있었다. 결국 나는 한 시간 가량 씨름을 하며 만들어낸 스파게티를 음식물통에 던져 놓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었다. 눈물 나게 맛있는 라면. 설거지를 막 끝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오후 두 시가 막 넘어가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커다란 트렁크 가방이 먼저 눈에 띄었다. 혜나는 아무 말 없이 가방을 끌고 들어와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된 거야?” 내 물음에 혜나는 아무 말 없이 벌떡 드러누웠다. 나는 조르륵 주방으로 가서 냉수를 한 잔꺼내와 혜나에게 내밀었다. “마셔.” 시원하게 냉수를 들이켠 혜나는 그제서야 실내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지란인?” “행방불명이야.” 잔을 옆에 내려놓고 양반다리를 하고 마주 앉았다. 혜나의 몸에 비해 크고, 투박한 가방이 어쩐지 그녀의 무거운 삶처럼 느껴졌다. “당분간만이야. 오래 있진 않을 거야.” “아주 눌러 앉아도 상관없어. 어떻게 된 일인지만 말해. 뭔가 결정을 본 건지, 아님 도망인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혜나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말라버린 것 같다던 그녀의 말은 거짓말일까. 처음엔 눈물만 쏟아내더니 목에서 쇠를 깎는 듯 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가만히 혜나를 안아 주었다. 그녀가 편하게 울 수 있도록. 눈물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 상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일까. 아니라면 사랑에 실패한 자신의 동정심일까. 어쨌든 눈물은 슬프다. 보기만 해도 너무 슬퍼진다. 혜나는 그렇게 한참동안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휴지 좀 줘.” 삼십분쯤을 그렇게 울었을까. 혜나에게 휴지를 건네자 콧물까지 팽 풀어 버린다. 그렇게 시원하게 풀릴 수 있는 일이라면 좋으련만. 사랑은 콧물이 아니니까 좀 힘들겠지. “난 냉정해지려고 했어. 사실은 내게 큰 충격이었어. 하지만, 태연해지려 했어. 이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나 자신을 타일렀어. 그이가 휘두른 배신의 칼이 내게 큰 치명타를 남겼는데도, 난 아프지 않은 척 했을 뿐이야. 안에선 살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 곧 썩게 될 걸 알면서도, 난 참아내 보려고 했어. 자존심의 문제였으니까. 진실로 사랑하면 자존심도 버리라고 하지만, 아냐. 사랑하면 할수록 자존심도 함께 커져. 믿을 수가 없어. 지금도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아. 그이가 내게 이럴 줄은 몰랐어. 내게 이런 일이 생기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야. 허무해. 내가 미처 다 읽기도 전에, 그이가 마지막 페이지를 읽어버리고 내게 결론을 말해버린 느낌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땐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하나. 아니, 무슨 말이든 혜나에게 위로 가 될 수 있을까. 자신의 사랑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그럼에도 그 책임이라는 것이 혼자서 감당해 내기에는 너무 커버렸다는 것이다. “아이를 핑계 삼아, 나는 그이를 잡고 싶었던 거야. 다시 되돌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어. 하지만 내가 그러기 전에 그이가 돌아와 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내 마지막 자존심 은 지켜주길 기대하고 있었어. 하지만 말야, 사랑은 기다리고, 용서한다고 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 오는 게 아니었어. 어차피 돌아온다고 해도 이미 그 예전의 모습이 아닌 거야. 우리는 다시 시작 해야 해. 처음 만난 그때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던 거야. 난 그게 자신 없었어. 무엇을 어떻게 다시 시작할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똘똘이는 어쩌구?” “아이를 핑계 삼아 보려는 내가 싫었어.” “아이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못한 건 사실이잖아.” “내 아이가 우리의 진실을 말해주진 않아. 묶여 있으면 더 혼란스러울 것 같았어. 아이 곁에서 떨어 져 있어 보려구. 그렇게 하루가 가고, 열흘이 가도 아이가 그립지 않으면 더 이상 우리도 없겠지. 이번엔 정말 냉정해보려는 거야. 흉내만 내는 게 아니라, 정말 또렷하게 정신을 차려 보려구.” “그 기집앨 찾아 가 보지 그랬어.” “만나 주지 않을 거 뻔해. 그리고 만난다고 해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바람난 내 남편 되돌려 보내라고 협박해? 아님, 사랑과 엔조이를 착각하지 말라고 충고라도 해달라고 해? 걔는 지금 이 시간을 즐기고 있는 거야. 걔가 손해 볼 건 아무 것도 없어. 이미 그이의 마음까지 다 잡은 판국이잖아.” “머리라도 쥐어 뜯어줘 그럼. 왜 그렇게 안 해?” “그럼, 그이는 날 더 경멸할 거야. 그것도 사실 자존심 문제거든.” 사랑은 언제나 전부(全部)냐, 전무(全無)냐다. 조금도 나눠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주려면 몽땅 주어야 하고, 주지 않으려면 단 하나라도 주지 말아야 한다. 밤 열시가 넘어서야 지란은 귀가했다. 초대받지 않은 혜나를 보자 지란은 호들갑을 떨었다. “무슨 일이야?” “그러는 댁부터 무슨 일인지 말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네만.” 나는 비꼬듯 지란 앞에 나서며 팔짱을 끼고 말했다. “나야, 뭐 항상 바쁜 사람이니까.” “그 바쁜 비즈니스 좀 들어보면 안 될까?” “요즘 내 일에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냐? 신경 좀 꺼줘.” 지란이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자 혜나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비밀이 생긴 것 같다.” “그 비밀이 영 맘에 안 들어.” “남의 사랑에 대해서 너무 충고 하려 들지 마. 사랑에 관해서만큼은 상대가 원할 때 충고를 하는 거야. 사랑은 원래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더 짙어지기 마련이거든.” “그 자식을 만났을까?” “아마 그런 것 같은데. 그리 쉽게 포기되긴 어렵지.” “난 사랑에서는 시작도 끝도 확실했으면 좋겠어.” 그건 사실이었다. 미적대면서 시작하는 사랑이 못미덥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끝을 보는 사랑도 미덥지 못했다. 사랑도 예스와 노, 두 가지로 나타낼 수는 없을까. “누구나 확실하길 원하지. 하지만 자신의 사랑에 대해선 그렇게 확고하지 못하는 게 사람이야.” 그렇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란 말처럼 나는 지란의 사랑이 못미더웠다. 그렇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지란이 더 멍청해 보였다. 사랑은 단칼에 자를 수는 없는 모양이다. 돌아보면 나 역시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지란을 이해하지 못할까. "다시 시작하고 싶어. “ 지란이 방문을 열고나오며 말했다. “내 사랑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쉽게 끝나는 게 싫어. 그래서 다시 이어가고 싶은 거야. 내가 어리 석다고 하겠지만, 사랑을 놓쳐 놓고 가슴을 쥐어뜯는 사람이 더 어리석은 거야. 자존심? 난 사랑하는 순간에 그딴 거 버렸어. 아주 오래전에 팔아 먹어버렸다구.” 지란은 당당했다. 사랑이 떠났네, 어쩌네 하며 울고불고 하던 며칠 전의 지란이 아니었다. 초보는 이럴 때 프로보다 더 자신만만하다. 또 다시 이별의 아픔을 겪지 않을 거라고 장담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마.” 내가 말을 꺼내려 하자 지란은 손을 들어 보이며 딱 잘라 버렸다. “다시 시작하자고 현우가 먼저 그랬어. 헤어진 지 딱 이 주 만에 말야. 그 이주동안에 생각이 많았대. 밥보다는 사랑을 더 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거야.” “소설 쓰니?” 보다 못해 비아냥거리며 내가 끼어들자 지란은 다시 손을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알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거 이해해. 나도 첨엔 못마땅했어. 그런데 문제는 현우가 아니야. 바로 유지란, 나 자신이란 거야. 내가 걜 놓아주지 못하겠단 말야. 두말할 것도 없이 그냥 바로 그러자 했어. 아직 난, 현우를 사랑하니까. 사랑하고 있다는데 뭐가 문제야? 그거면 충분하지 않아?” “이름값하고 있으시네, 정말. 유지란 씨, 그만 지랄하지?” 이상하게도 나는 지란을 비아냥거리고 싶어졌다. 사랑하고 있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꼬지 마.” 지란은 단호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나를 덤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좀 앉아서 얘기할 순 없니?” 혜나가 끼어들었다. “사랑하고 있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문제는 그 사랑이 갈대처럼 자주 흔들린다는 거지. 너 이번이 처음이니? 현우, 그 자식이 이러는 거 처음 아니잖아. 매번 넌, 그 자식의 장단에 이리저리 춤만 춰댄다는 거야. 그리고선 종국엔 사랑이래. 평소에 자길 학대만 하던 주인인데도 모습만 드러내면 어김없이 꼬리 흔들고 몸을 낮추는 개새끼하고 뭐가 다르니?” “개새끼? 너 말 다했어? 자존심 때문에 결국 마음에도 없이 남자 보내놓고 뒤에서 매일 술이나 퍼 마시면서 훌쩍이는 건 보기 좋은 일인 줄 아니? 넌 단 한번이라도 니 사랑에 후회없을만큼 최선을 다한 적 있어? 니 사랑이 매번 그런 식으로 끝난 건, 상대가 아니라 사랑을 매번 우습게 보는 너한테 있어.” 말문이 막혔다. 악을 쓰고 덤비는 지란은 내가 알고 있던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이 제 사랑을 지키기 위해 발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주게 된 것이다. “나이가 몇인데 니들은 아직도 이런 식으로 싸우니?”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하니 서 있는데, 혜나가 일어나며 한 마디 거들었다. “어느 누구의 사랑도 옳고 그름을 삼자가 가르진 못해. 그건 본인의 몫이야. 하지만, 솔직히 난, 현우 걔 마음에 안 든다 지란아. 니 사랑은 확실하고, 분명해. 의심할 여지가 없어. 그런데 현우는 그런 너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어. 사랑의 가장 큰 근원은 믿음이야. 그게 깨지면 사랑도 어김없이 깨져. 걔가 좀 우유부단하게 군 건 사실이잖아. 벌써 삼 년이야. 그 시간동안에 니 사랑엔 현우가 없었던 것 같아. 우리가 보기엔 충분히 그렇게 생각이 들 수 있어. 하지만, 서영이 너도 말이 좀 심했어. 그렇게까지 몰아세울 건 없잖아.” “충고 고맙다.” 지란은 홱 하니 방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란이 내뱉은 말들이 비수 처럼 가슴에 꽂혔던 모양이다. 내 어깨를 툭 치며 혜나가 말했다. “상처 받지 마. 진심인지 아닌지 알만한 나이잖아. 맥주 한 잔 할래?” 주방으로 들어가며 혜나가 물었지만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랑은 잔인하다. 그러나 그 사랑을 얘기하는 사람의 혀가 더 잔인하다. 돌아보면 사랑은 다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랑이 진행형일 땐 자신의 사랑만큼 위대한 사랑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 사랑이 과거형일 땐 흔하디흔한 사랑 중의 하나일 뿐이다. 내 인생의 다섯 번. 그 다섯 번의 사랑은 똑같은 모양의 별사탕이다. 형태는 같지만 색깔만 틀리다. 모든 사랑의 형태는 똑같은 모습이다. 기본 틀만 주면, 그것을 다듬고 색을 입히는 건 자신의 몫이다. 우리는 왜 헤어졌을까. 왜 이별을 좀 더 늦추지 못했을까. 지란의 말이 꽤나 충격이었나 보다. 밤새 잠을 뒤척이면서 나는 이미 과거형이 된 사랑을 하나하나 들추어 보았다. 내가 정말 최선을 다 하지 못한 것들일까. 뿌웅. 아, 이런 중요한 타이밍에 가스가 노출하다니. 가스로 끝날 것이 아닌 것 같아 벌떡 일어나 욕실로 뛰어 갔다. 간밤에 마신 맥주 때문일까. 아주 따발총을 쏘아대는 격이다.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나서야 기분까지 맑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정말 배설 이다. 하하하하. “출근할 때 보니까 기분이 좀 풀어진 것 같더라.” 젖은 머리를 드라이로 말리며 혜나가 말했다. “지란인 그렇다 치고, 넌 어쩔 셈이야?” “뭘?” “십 년을 넘게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을 땐, 무슨 생각이 있었을 거 아냐.” “그런 거 없어. 몸과 마음이 너무 고단해져서 그만 쉬어줘야겠단 생각뿐이었으니까.” “내가 모를 줄 아니? 너 거기서 스캔들 있었지?” 순간 나는 뜨끔 한다. 지란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혜나는 눈치로 때려잡는다. 이럴 땐 정말 혜나가 무섭다. “내 직감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니? 그이의 외도 역시 순전히 이 직감으로 잡은 거잖니. 니가 회사를 그만 둬야 할 만큼 절박했던 상황이었니?” “노코멘트.” “그래봐야 언젠간 니 입으로 다 불게 되어 있어.” “그럼 그때나 들어. 어디 가시게?” “오랜만에 너랑 둘이서 바람이나 쐬러 가려구. 미술관에 안 갈래?” 내가 미적대자 혜나가 일어나 욕실 쪽으로 등을 떠밀었다. “얼른 씻어. 그리고 이참에, 취미 삼아 그만뒀던 그림이나 다시 그려 보든지.” “그게 언제 적 얘긴데.” “어쨌든. 집에서 무작정 뒹구는 것보단 낫잖아.” 국립현대미술관. 미술관옆 동물원이란 영화가 생각났다. 진전도 없이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사랑을 시작한 춘희가 떠올랐다. 너 그거 병이지? 너 안 좋아할 것 같은 놈들만 좋아하는 거. 철수의 대사가 함께 떠올랐다. 세 번째 남자와 헤어지고 난 후, 혼자서 보러 갔던 영화다. 그래서 더 잊혀지지 않은 영화. 철수는 영화 속 춘희가 아니라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사랑에 실패할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이 주인공인 영화를 만든다. 평소에는 관심에도 없던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영화 속의 소품이 되어 자신을 더욱 비련의 주인공으로 굳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실연의 상태인가. 프랑스 누이이 출생인 니키 드 생팔의 전시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드문드문 오후의 나른함을 깨우러 온 사람들이 전시된 작품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예술을 이해하기란 어렵다. 다만 그냥 감상만 할뿐이다. 감상해서 내가 좋으면 좋은 작품이고,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으면 그냥저냥한 작품이 된다. 뚱뚱한 여체의 연작인 물구나무 선 나나의 모습을 감상하다 가 발길을 돌려 감브리누스의 기이한 죽음이란 제목 앞의 작품에 섰다. 목판에 석고를 이용한 작품인데, 그 모습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흉측했다. 혜나와 나는 말없이 그 작품을 오래오래 들여다보았다. 비디오 아트인 백남준의 다다익선이 전시 되어 있는 일층으로 내려와 우리는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혜나가 물었다. “사랑에 실패한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니?” “글쎄. 실패라는 게 어차피 과정이 아닐까 싶어. 사람들은 운명이란 말로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싶겠지만, 그건 아직 우리가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에 있지 않을까.” 나의 말에 혜나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커피 잔에 입술을 가져다 댄다. 그런 혜나의 모습이 쓸쓸해 보이기보단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서영이 넌, 아직 멀었다.” “뭐가?” “넌 너무 현실적이야. 그렇게 멀쩡하고 똑바른 정신으로는 니가 원하는 사랑, 할 수 없어.” “미쳐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니? 어느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더라?” 나는 잔을 들며 한껏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랑은 손익 계산서도 아니고, 채무와 채권도 아냐. 넌 너무 반듯하게 똑같이 나누려고 해. 예스냐 노냐라는 대답 두 가지로 사랑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니? 오 년을 사랑이라고, 단 한 번도 의심치 않고 살았던 나도,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단어로도 표현이 안 되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순히 말장난을 벌일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너는 너무 시작과 결론만 중요하게 생각해. 과정이 어떻든, 너에게는 결론이 중요한 거야. 그래서 사랑이 자꾸만 어긋나는 거지. 그렇다고 생각 안 해?” “시작과 결론이라. 맞아, 그건 인정해.” “내가 지금 후회 되는 게 뭔지 아니? 그이의 변심을 보고도 내치지 못하는 나 자신? 그동안 충분히 변질 될 수도 있는 사랑을, 한 번도 의심하지 못했던 어리석음? 아니, 그게 아냐. 내가 그이를 처음 사랑할 때의 마음이었어. 난 그이를 사랑했고, 내 사랑이 잘못되었을 거란 생각을 추호도 하지 못했어. 그런데 요 며칠 동안 깨달은 게 하나 있어. 그건 착각이라는 거. 너, 지란이, 나. 우린 지금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거야.” 무슨 말이 하고 싶기에 저리 뜸을 들일까. “사랑의 전부가 결혼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거지.” 결혼? 그렇다. 완전한 독신주의가 아니니까. 언제라도 결혼은 해야 하니까. “결혼을 전제로 사랑을 시작하는 데에 문제가 생기는 거야. 그 사랑을 결혼에 자꾸 맞추다 보니 사랑이 어긋난 거지. 결혼을 생각하고 시작한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한다. 난 그 말의 의미를 잘 몰랐어. 근데 그게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겠더라구.” “결혼을 전제로 한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한다?” “누가 추리소설을 뒤에서부터 읽는가. 그럼 이해가 쉽겠니?” 순간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이제야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추리소설을 뒤에서부터 자꾸 읽으려 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또 다른 새로운 추리소설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나를 떠났던 세 명의 남자들은 그것을 눈치 챈 것이다. 이미 나 혼자서 마지막 결론을 보고 말았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지란보다도 훨씬 사랑에 있어서 위험한 초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죄송하지만, 이 작품은 일일 연재를 할 수는 없습니다. 일주일에 두 세번 정도 올라갑니다. 기다려 주시는 분이 계실런지는 잘 모르겟지만 ^^;;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욜입니다. 모두 홧팅하십시오^^ 참, 점심도 맛있게 드시구용.
노처녀까발리기(2화)누가 추리소설을 뒤에서부터 읽는가
제 2부 누가 추리소설을 뒤에서부터 읽는가.
“어디로 샌 거야?”
카트를 밀며 식품코너쪽으로 몸을 돌렸다. 일요일 아침부터 내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지란은
사라지고 없었다. 냉장고 속은 물론 텅 비어 있었다. 라면을 끓여 먹더라도 어차피 마트에 왔어야
했다. 휴대폰을 든 손을 바꾸며 식품코너쪽을 둘러본다.
“어제만 해도 약속 있단 말 없더니.”
“약속이란 게 갑자기 생기기도 하니까.”
“그러게, 누굴 만나냐구.”
“나중에 얘기할게. 나 지금 매우 바쁘거든.”
“어라?”
일방적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뭔가 냄새가 난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다. 설마, 헤어진
옛남자를 만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인스턴트 덮밥을 종류별로 하나씩 카트 안에 담는다. 다른 건
몰라도 요리만큼은 정말 끔찍하게 싫어한다. 맛은 둘째 치고 귀찮은 일이 너무 많은 탓이다.
껍질을 벗겨내고, 씻어내고, 손질해야 하고, 칼질도 해야 한다. 그리고 맛을 내기 위해서도 여러
가지 잡다한 일을 모조리 해야 한다. 인스턴트는 그 귀찮은 일을 모두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게
나를 도와주는 셈이다. 기특한 녀석.
“안녕하세요.”
누군가 카트를 밀고 옆으로 다가와 인사를 한다. 낯이 익은 듯 한 사내가 빙그레 웃고 있다.
“저번에, 택시 사건.”
“아.”
선뜻 기억해내지 못하는 나를 위한 배려일까. 그 덕분에 택시 사건은 죽어도 잊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의 옆에 낯선 젊은 여자가 함께 동행하고 있었다. 대략 이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이다. 꼴에 젊은 여자랑 사시나 보네.
“죄다 인스턴트식품이군.”
카트 안을 기웃거리며 그가 놀리듯 내뱉었다.
“남의 일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영양가는 둘째치더라도, 비만의 원인이 되기도 하죠.”
“하, 무슨 상관?”
“나잇살은 쉽게 안 빠진다던데. 그 나이에 이런 음식을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위아래로 기분 나쁘게 훑어보며 비아냥거리는 그 자식의 머리통을 날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신경 좀 써야 할 것 같은데.”
옆에 있던 젊은 여자가 쿡쿡대며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그는 태연하게 등을 보이며 카트를 밀고 나갔다.
“아…….아니, 뭐…….뭐 저런 미친 새끼가 다 있어?”
느닷없는 공격에 단순한 방어조차도 하지 못한 것이 너무 억울한 기분이었다.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런 개 같은 녀석한테 아침부터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지? 정말 발악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마트 안은 너무 넓었다. 그리고 보는 눈도 너무 많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타인의 시선에 민감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십대의 오만과 패기가 사라진 지금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시뻘건 얼굴로 그저 그의 뒤통수를 쏘아보는 것이 최선의 발악이리라.
이 분하고 분한 마음을 어찌 삼키라. 장보던 일을 멈추고 카트를 홱 돌렸다. 신경질 나게 카트를
밀고 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카트안의 식품들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주위를 슬쩍 둘러보고 뒷걸음질 치며 카트를 끌었다. 카트 안에 있던 인스턴트식품을 집어
다시 제자리에 올려놓고 힘차게 앞으로 밀며 걸어 나갔다.
나를 너무 믿는 게 아니었다. 먹으려고 만들었던 스파게티는 개도 먹지 않을 맛을 내고 있었다.
결국 나는 한 시간 가량 씨름을 하며 만들어낸 스파게티를 음식물통에 던져 놓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었다. 눈물 나게 맛있는 라면. 설거지를 막 끝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오후 두 시가
막 넘어가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커다란 트렁크 가방이 먼저 눈에 띄었다. 혜나는 아무 말 없이
가방을 끌고 들어와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된 거야?”
내 물음에 혜나는 아무 말 없이 벌떡 드러누웠다. 나는 조르륵 주방으로 가서 냉수를 한 잔꺼내와
혜나에게 내밀었다.
“마셔.”
시원하게 냉수를 들이켠 혜나는 그제서야 실내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지란인?”
“행방불명이야.”
잔을 옆에 내려놓고 양반다리를 하고 마주 앉았다. 혜나의 몸에 비해 크고, 투박한 가방이 어쩐지
그녀의 무거운 삶처럼 느껴졌다.
“당분간만이야. 오래 있진 않을 거야.”
“아주 눌러 앉아도 상관없어. 어떻게 된 일인지만 말해. 뭔가 결정을 본 건지, 아님 도망인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혜나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말라버린 것 같다던 그녀의 말은
거짓말일까. 처음엔 눈물만 쏟아내더니 목에서 쇠를 깎는 듯 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가만히 혜나를 안아 주었다. 그녀가 편하게 울 수 있도록. 눈물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 상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일까. 아니라면 사랑에 실패한 자신의 동정심일까. 어쨌든 눈물은 슬프다.
보기만 해도 너무 슬퍼진다. 혜나는 그렇게 한참동안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휴지 좀 줘.”
삼십분쯤을 그렇게 울었을까. 혜나에게 휴지를 건네자 콧물까지 팽 풀어 버린다. 그렇게 시원하게
풀릴 수 있는 일이라면 좋으련만. 사랑은 콧물이 아니니까 좀 힘들겠지.
“난 냉정해지려고 했어. 사실은 내게 큰 충격이었어. 하지만, 태연해지려 했어. 이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나 자신을 타일렀어. 그이가 휘두른 배신의 칼이 내게 큰 치명타를 남겼는데도, 난 아프지
않은 척 했을 뿐이야. 안에선 살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 곧 썩게 될 걸 알면서도, 난 참아내 보려고
했어. 자존심의 문제였으니까. 진실로 사랑하면 자존심도 버리라고 하지만, 아냐. 사랑하면 할수록
자존심도 함께 커져. 믿을 수가 없어. 지금도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아. 그이가 내게 이럴 줄은
몰랐어. 내게 이런 일이 생기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야. 허무해. 내가 미처 다 읽기도 전에,
그이가 마지막 페이지를 읽어버리고 내게 결론을 말해버린 느낌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땐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하나. 아니, 무슨 말이든 혜나에게 위로
가 될 수 있을까. 자신의 사랑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그럼에도 그 책임이라는 것이 혼자서 감당해
내기에는 너무 커버렸다는 것이다.
“아이를 핑계 삼아, 나는 그이를 잡고 싶었던 거야. 다시 되돌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어. 하지만 내가 그러기 전에 그이가 돌아와 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내 마지막 자존심
은 지켜주길 기대하고 있었어. 하지만 말야, 사랑은 기다리고, 용서한다고 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
오는 게 아니었어. 어차피 돌아온다고 해도 이미 그 예전의 모습이 아닌 거야. 우리는 다시 시작
해야 해. 처음 만난 그때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던 거야. 난 그게 자신 없었어.
무엇을 어떻게 다시 시작할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똘똘이는 어쩌구?”
“아이를 핑계 삼아 보려는 내가 싫었어.”
“아이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못한 건 사실이잖아.”
“내 아이가 우리의 진실을 말해주진 않아. 묶여 있으면 더 혼란스러울 것 같았어. 아이 곁에서 떨어
져 있어 보려구. 그렇게 하루가 가고, 열흘이 가도 아이가 그립지 않으면 더 이상 우리도 없겠지.
이번엔 정말 냉정해보려는 거야. 흉내만 내는 게 아니라, 정말 또렷하게 정신을 차려 보려구.”
“그 기집앨 찾아 가 보지 그랬어.”
“만나 주지 않을 거 뻔해. 그리고 만난다고 해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바람난 내
남편 되돌려 보내라고 협박해? 아님, 사랑과 엔조이를 착각하지 말라고 충고라도 해달라고 해?
걔는 지금 이 시간을 즐기고 있는 거야. 걔가 손해 볼 건 아무 것도 없어. 이미 그이의 마음까지 다
잡은 판국이잖아.”
“머리라도 쥐어 뜯어줘 그럼. 왜 그렇게 안 해?”
“그럼, 그이는 날 더 경멸할 거야. 그것도 사실 자존심 문제거든.”
사랑은 언제나 전부(全部)냐, 전무(全無)냐다. 조금도 나눠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주려면 몽땅
주어야 하고, 주지 않으려면 단 하나라도 주지 말아야 한다.
밤 열시가 넘어서야 지란은 귀가했다. 초대받지 않은 혜나를 보자 지란은 호들갑을 떨었다.
“무슨 일이야?”
“그러는 댁부터 무슨 일인지 말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네만.”
나는 비꼬듯 지란 앞에 나서며 팔짱을 끼고 말했다.
“나야, 뭐 항상 바쁜 사람이니까.”
“그 바쁜 비즈니스 좀 들어보면 안 될까?”
“요즘 내 일에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냐? 신경 좀 꺼줘.”
지란이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자 혜나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비밀이 생긴 것 같다.”
“그 비밀이 영 맘에 안 들어.”
“남의 사랑에 대해서 너무 충고 하려 들지 마. 사랑에 관해서만큼은 상대가 원할 때 충고를 하는
거야. 사랑은 원래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더 짙어지기 마련이거든.”
“그 자식을 만났을까?”
“아마 그런 것 같은데. 그리 쉽게 포기되긴 어렵지.”
“난 사랑에서는 시작도 끝도 확실했으면 좋겠어.”
그건 사실이었다. 미적대면서 시작하는 사랑이 못미덥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끝을
보는 사랑도 미덥지 못했다. 사랑도 예스와 노, 두 가지로 나타낼 수는 없을까.
“누구나 확실하길 원하지. 하지만 자신의 사랑에 대해선 그렇게 확고하지 못하는 게 사람이야.”
그렇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란 말처럼 나는 지란의 사랑이 못미더웠다. 그렇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지란이 더 멍청해 보였다. 사랑은 단칼에 자를 수는 없는
모양이다. 돌아보면 나 역시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지란을 이해하지 못할까.
"다시 시작하고 싶어. “
지란이 방문을 열고나오며 말했다.
“내 사랑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쉽게 끝나는 게 싫어. 그래서 다시 이어가고 싶은 거야. 내가 어리
석다고 하겠지만, 사랑을 놓쳐 놓고 가슴을 쥐어뜯는 사람이 더 어리석은 거야. 자존심?
난 사랑하는 순간에 그딴 거 버렸어. 아주 오래전에 팔아 먹어버렸다구.”
지란은 당당했다. 사랑이 떠났네, 어쩌네 하며 울고불고 하던 며칠 전의 지란이 아니었다.
초보는 이럴 때 프로보다 더 자신만만하다. 또 다시 이별의 아픔을 겪지 않을 거라고 장담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마.”
내가 말을 꺼내려 하자 지란은 손을 들어 보이며 딱 잘라 버렸다.
“다시 시작하자고 현우가 먼저 그랬어. 헤어진 지 딱 이 주 만에 말야. 그 이주동안에 생각이
많았대. 밥보다는 사랑을 더 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거야.”
“소설 쓰니?”
보다 못해 비아냥거리며 내가 끼어들자 지란은 다시 손을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알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거 이해해. 나도 첨엔 못마땅했어. 그런데 문제는 현우가 아니야. 바로
유지란, 나 자신이란 거야. 내가 걜 놓아주지 못하겠단 말야. 두말할 것도 없이 그냥 바로 그러자
했어. 아직 난, 현우를 사랑하니까. 사랑하고 있다는데 뭐가 문제야? 그거면 충분하지 않아?”
“이름값하고 있으시네, 정말. 유지란 씨, 그만 지랄하지?”
이상하게도 나는 지란을 비아냥거리고 싶어졌다. 사랑하고 있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꼬지 마.”
지란은 단호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나를 덤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좀 앉아서 얘기할 순 없니?”
혜나가 끼어들었다.
“사랑하고 있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문제는 그 사랑이 갈대처럼 자주 흔들린다는 거지. 너 이번이
처음이니? 현우, 그 자식이 이러는 거 처음 아니잖아. 매번 넌, 그 자식의 장단에 이리저리 춤만
춰댄다는 거야. 그리고선 종국엔 사랑이래. 평소에 자길 학대만 하던 주인인데도 모습만 드러내면
어김없이 꼬리 흔들고 몸을 낮추는 개새끼하고 뭐가 다르니?”
“개새끼? 너 말 다했어? 자존심 때문에 결국 마음에도 없이 남자 보내놓고 뒤에서 매일 술이나 퍼
마시면서 훌쩍이는 건 보기 좋은 일인 줄 아니? 넌 단 한번이라도 니 사랑에 후회없을만큼 최선을
다한 적 있어? 니 사랑이 매번 그런 식으로 끝난 건, 상대가 아니라 사랑을 매번 우습게 보는 너한테
있어.”
말문이 막혔다. 악을 쓰고 덤비는 지란은 내가 알고 있던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이 제
사랑을 지키기 위해 발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주게 된 것이다.
“나이가 몇인데 니들은 아직도 이런 식으로 싸우니?”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하니 서 있는데, 혜나가 일어나며 한 마디 거들었다.
“어느 누구의 사랑도 옳고 그름을 삼자가 가르진 못해. 그건 본인의 몫이야. 하지만, 솔직히 난,
현우 걔 마음에 안 든다 지란아. 니 사랑은 확실하고, 분명해. 의심할 여지가 없어. 그런데 현우는
그런 너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어. 사랑의 가장 큰 근원은 믿음이야. 그게 깨지면 사랑도 어김없이
깨져. 걔가 좀 우유부단하게 군 건 사실이잖아. 벌써 삼 년이야. 그 시간동안에 니 사랑엔 현우가
없었던 것 같아. 우리가 보기엔 충분히 그렇게 생각이 들 수 있어. 하지만, 서영이 너도 말이 좀
심했어. 그렇게까지 몰아세울 건 없잖아.”
“충고 고맙다.”
지란은 홱 하니 방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란이 내뱉은 말들이 비수
처럼 가슴에 꽂혔던 모양이다. 내 어깨를 툭 치며 혜나가 말했다.
“상처 받지 마. 진심인지 아닌지 알만한 나이잖아. 맥주 한 잔 할래?”
주방으로 들어가며 혜나가 물었지만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랑은 잔인하다. 그러나 그
사랑을 얘기하는 사람의 혀가 더 잔인하다.
돌아보면 사랑은 다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랑이 진행형일 땐 자신의 사랑만큼 위대한 사랑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 사랑이 과거형일 땐 흔하디흔한 사랑 중의 하나일 뿐이다.
내 인생의 다섯 번. 그 다섯 번의 사랑은 똑같은 모양의 별사탕이다. 형태는 같지만 색깔만 틀리다.
모든 사랑의 형태는 똑같은 모습이다. 기본 틀만 주면, 그것을 다듬고 색을 입히는 건 자신의
몫이다. 우리는 왜 헤어졌을까. 왜 이별을 좀 더 늦추지 못했을까.
지란의 말이 꽤나 충격이었나 보다. 밤새 잠을 뒤척이면서 나는 이미 과거형이 된 사랑을 하나하나
들추어 보았다. 내가 정말 최선을 다 하지 못한 것들일까.
뿌웅. 아, 이런 중요한 타이밍에 가스가 노출하다니. 가스로 끝날 것이 아닌 것 같아 벌떡 일어나
욕실로 뛰어 갔다. 간밤에 마신 맥주 때문일까. 아주 따발총을 쏘아대는 격이다.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나서야 기분까지 맑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정말 배설
이다. 하하하하.
“출근할 때 보니까 기분이 좀 풀어진 것 같더라.”
젖은 머리를 드라이로 말리며 혜나가 말했다.
“지란인 그렇다 치고, 넌 어쩔 셈이야?”
“뭘?”
“십 년을 넘게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을 땐, 무슨 생각이 있었을 거 아냐.”
“그런 거 없어. 몸과 마음이 너무 고단해져서 그만 쉬어줘야겠단 생각뿐이었으니까.”
“내가 모를 줄 아니? 너 거기서 스캔들 있었지?”
순간 나는 뜨끔 한다. 지란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혜나는 눈치로 때려잡는다. 이럴 땐 정말
혜나가 무섭다.
“내 직감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니? 그이의 외도 역시 순전히 이 직감으로 잡은 거잖니. 니가 회사를
그만 둬야 할 만큼 절박했던 상황이었니?”
“노코멘트.”
“그래봐야 언젠간 니 입으로 다 불게 되어 있어.”
“그럼 그때나 들어. 어디 가시게?”
“오랜만에 너랑 둘이서 바람이나 쐬러 가려구. 미술관에 안 갈래?”
내가 미적대자 혜나가 일어나 욕실 쪽으로 등을 떠밀었다.
“얼른 씻어. 그리고 이참에, 취미 삼아 그만뒀던 그림이나 다시 그려 보든지.”
“그게 언제 적 얘긴데.”
“어쨌든. 집에서 무작정 뒹구는 것보단 낫잖아.”
국립현대미술관.
미술관옆 동물원이란 영화가 생각났다. 진전도 없이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사랑을 시작한 춘희가
떠올랐다. 너 그거 병이지? 너 안 좋아할 것 같은 놈들만 좋아하는 거. 철수의 대사가 함께
떠올랐다. 세 번째 남자와 헤어지고 난 후, 혼자서 보러 갔던 영화다. 그래서 더 잊혀지지 않은 영화.
철수는 영화 속 춘희가 아니라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사랑에 실패할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이 주인공인 영화를 만든다. 평소에는 관심에도 없던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영화 속의
소품이 되어 자신을 더욱 비련의 주인공으로 굳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실연의 상태인가.
프랑스 누이이 출생인 니키 드 생팔의 전시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드문드문 오후의 나른함을
깨우러 온 사람들이 전시된 작품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예술을
이해하기란 어렵다. 다만 그냥 감상만 할뿐이다. 감상해서 내가 좋으면 좋은 작품이고,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으면 그냥저냥한 작품이 된다. 뚱뚱한 여체의 연작인 물구나무 선 나나의 모습을 감상하다
가 발길을 돌려 감브리누스의 기이한 죽음이란 제목 앞의 작품에 섰다. 목판에 석고를 이용한
작품인데, 그 모습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흉측했다. 혜나와 나는 말없이 그 작품을 오래오래
들여다보았다.
비디오 아트인 백남준의 다다익선이 전시 되어 있는 일층으로 내려와 우리는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혜나가 물었다.
“사랑에 실패한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니?”
“글쎄. 실패라는 게 어차피 과정이 아닐까 싶어. 사람들은 운명이란 말로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싶겠지만, 그건 아직 우리가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에 있지 않을까.”
나의 말에 혜나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커피 잔에 입술을 가져다 댄다. 그런 혜나의
모습이 쓸쓸해 보이기보단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서영이 넌, 아직 멀었다.”
“뭐가?”
“넌 너무 현실적이야. 그렇게 멀쩡하고 똑바른 정신으로는 니가 원하는 사랑, 할 수 없어.”
“미쳐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니? 어느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더라?”
나는 잔을 들며 한껏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랑은 손익 계산서도 아니고, 채무와 채권도 아냐. 넌 너무 반듯하게 똑같이 나누려고 해.
예스냐 노냐라는 대답 두 가지로 사랑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니? 오 년을 사랑이라고, 단 한 번도
의심치 않고 살았던 나도,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단어로도 표현이 안 되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순히 말장난을 벌일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너는 너무 시작과 결론만 중요하게 생각해. 과정이 어떻든, 너에게는 결론이 중요한 거야. 그래서
사랑이 자꾸만 어긋나는 거지. 그렇다고 생각 안 해?”
“시작과 결론이라. 맞아, 그건 인정해.”
“내가 지금 후회 되는 게 뭔지 아니? 그이의 변심을 보고도 내치지 못하는 나 자신? 그동안 충분히
변질 될 수도 있는 사랑을, 한 번도 의심하지 못했던 어리석음? 아니, 그게 아냐. 내가 그이를 처음
사랑할 때의 마음이었어. 난 그이를 사랑했고, 내 사랑이 잘못되었을 거란 생각을 추호도 하지
못했어. 그런데 요 며칠 동안 깨달은 게 하나 있어. 그건 착각이라는 거. 너, 지란이, 나. 우린 지금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거야.”
무슨 말이 하고 싶기에 저리 뜸을 들일까.
“사랑의 전부가 결혼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거지.”
결혼? 그렇다. 완전한 독신주의가 아니니까. 언제라도 결혼은 해야 하니까.
“결혼을 전제로 사랑을 시작하는 데에 문제가 생기는 거야. 그 사랑을 결혼에 자꾸 맞추다 보니
사랑이 어긋난 거지. 결혼을 생각하고 시작한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한다. 난 그 말의 의미를 잘
몰랐어. 근데 그게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겠더라구.”
“결혼을 전제로 한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한다?”
“누가 추리소설을 뒤에서부터 읽는가. 그럼 이해가 쉽겠니?”
순간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이제야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추리소설을 뒤에서부터 자꾸 읽으려 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또 다른 새로운
추리소설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나를 떠났던 세 명의 남자들은 그것을 눈치 챈 것이다. 이미 나
혼자서 마지막 결론을 보고 말았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지란보다도 훨씬 사랑에 있어서 위험한
초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죄송하지만, 이 작품은 일일 연재를 할 수는 없습니다.
일주일에 두 세번 정도 올라갑니다. 기다려 주시는 분이 계실런지는 잘 모르겟지만 ^^;;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욜입니다.
모두 홧팅하십시오^^ 참, 점심도 맛있게 드시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