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세계(접근2)

조셉2003.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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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驛舍)는 고전주의 미학을 그대로 되살려, 그 위용의 모습을 장중한

 

석재 속에 간직한 채 우리를 맞이했다. 나는 미약한 눈으로나마, 박공이

 

얹힌, 가운데 네 쌍의 기둥 사이에서 세 가지 서로 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맨 아래 입구 부분에 있는 도리스 식 열주와 엔타블레이춰

 

(*Entablature. 오더의 상부 부분. 고전 건축에서 오더는 기둥, 주신, 주

 

두, 엔타블레이춰로 구성된다.)는 인간의 세계를, 그 위에 있는 아치형의

 

창과 열 개의 석상은 인간들 위에 있는 둥근 하늘과 그들을 다스리는 작

 

은 신을, 지붕 위 아홉 개의 석상은 천상계의 신을 의미하고 있었는데, 이

 

는 하나 속에서 또 다른 하나가 존재하고 통일된 가운데 다양함을 이루는

 

세상을 보여 주기 위한 예술가의 심사숙고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중에서 하늘과 맞닿은 아홉 신은, 이제 막 기차에 오르려는 내게, 순례

 

자를 돌보는 수호신이자 여행의 종착지를 바라보는 예언자로 비쳤다. 그밖

 

에도 눈으로 미치는 모든 요소들이 서로 조화롭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내

 

눈은 어느새 투명한 창의 역할을 잃고 아름다움의 벽에 가로막혀 있었다.

 

  바깥 아치 창이 역사 내부를 밝히리라는 단순한 예상을 제외하면 겉에

 

서 본 그 내부는 기대감을 잔뜩 부추기는 미지의 공간일 따름이었다. 열주

 

와 두꺼운 벽체를 지나 내부로 진입하자,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헤아

 

릴 수 없는 많은 군중들과 그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빛이었다. 커다란 아

 

치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은 바깥에서는 감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거대한

 

공간을 효과적으로 드러냈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군중들은 허공에서 부유

 

하는 미세한 먼지를 반짝이는 빛으로 바꿔놓았다. 그곳은 신을 위한 신전

 

이나 성당 또는 왕권을 상징하는 궁전이 아닌, 과거의 어떤 유형에도 속하

 

지 않는 현대적인 대중 공간이었고 모든 이가 새로운 삶에의 참여와 귀속

 

을 느끼는 투명하고 무한한 단일 공간이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의 흐름은

 

실로 방대하고 다양했다. 바닥에 엎어놓은 모자 속으로 동전이 떨어지기

 

를 기다리는 현의 악사, 침묵으로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 누군가를 초조

 

하게 기다리는 청년,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청년 무리, 궐련 연기를 내뿜

 

으며 기차를 기다리는 노인, 신문팔이 소년, 우아한 걸음걸이로 걷는 부

 

인, 책 읽는 지성인, 자신을 천사라고 자처하는 사람 등등. 어느새 마스터

 

와 나도 그들 사이에서 군중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우리는 기차에 올라타기 위해 플랫폼에 들어섰다. 그물처럼 엮어진 강

 

철 부재 사이로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고, 그 투명한 박공지붕과 철도길이

 

투시도의 법칙 그대로 멀어져 갔다. 역사가 아니면 체험할 수 없는 그 정

 

적이면서도 동적인 분위기는, 기차 머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와 기적

 

소리와 함께 나로 하여금 신세계의 길목에 들어서는 기분에 빠지게 했다.

 

그런데, 꿈인 듯한 미지의 세상으로 나를 인도하는 그 느낌이 먼 훗날 역

 

사가 아닌 어느 화랑에서 되살아난 적이 있었다. 그 한 조각 기억의 풍경

 

은 모네의 화폭 속에 그대로 담겨져 있었다(*Monet. Interior of Gare

 

Sainte-Lazare. 1877.).

 

  정지 상태에서 덜컹거리는 가속도의 순간을 감지하면서부터 또 다른 여

 

행은 시작되었다. 지면의 고요함은 바퀴의 흔들림으로, 긴장감은 기대감으

 

로, 일상의 질서는 여유로운 무질서로, 과정은 결과로, 현실은 꿈으로 바

 

뀌어 갔다. 기차가 제 속력을 내면서 도시를 뚫고 지나갔다. 가까운 시야

 

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은 기차의 속력만큼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으며 원경

 

은 느림의 미학 속에 펼쳐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띈 것은 거대하고

 

괴상망측한 철탑이었다.

 

  기차가 시내 외곽을 지나 자연 속으로 들어가서야 나는 비로소 낯선 곳

 

에서 느끼는 여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기차는 미지의 공간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나아갔고 때로는 완만한 언덕을 따라, 때로는 흐르는 강물 줄기를

 

따라 달리는 동안 커다란 창틀 밖의 풍경을 보여 주었다. 나는 여행의 속

 

도와 더불어 새로운 공간을 느끼고 있었다. 기차 바퀴로부터 전달되는 반

 

복적인 진동 속에서 무의미한 시간은 단 한순간도 그냥 흘러가지 않았으

 

며, 감각의 연속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의식의 변화는 일상에서 겪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 경험이 각별하게 다가왔다. 그 여행길은 명목상 명백

 

한 임무를 동반했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영원히 멈출 것 같지 않은 일상

 

의 쳇바퀴에서 빠져나와 미지의 시공간이 베푸는 향응을 만끽하는 호기가

 

될 수 있었다. 물론 되돌아가야 할 일상이 멀리서 지옥의 사자처럼 떡 버

 

티고 있을 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중의 일이었다. 나는 그동안 길들

 

여진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는 쾌감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느낄 수 있었

 

다. 기차는 점점 더 멀고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