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웩. 우웩." 구석진 자리에 위치해있던 포장마차를 겨우 찾은 재하는 포장마차 주인에게 술값을 지불 한후 테이블에 엎드려 있던 정민을 들쳐업고 밖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눈도 못뜰 정도로 취해있던 정민이었으나 바깥바람을 쐬자 정신이 드는듯 보였다. 그때부터 시작된 구역질 이 벌써 4차례나 이어졌다. 재하는 정민의 등을 두드려주며 재하와 정민의 옷에 튄 이물질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괜찮아?" "우웩.." 몇번의 구역질로 정민은 쓰러질듯 기운이 없었다. 마땅한 안주도 없이 소주를 2병이나 마신 정민이었다. 저녁도 먹지않은 빈속이었기에 더욱 힘이 들었다. 게다가 술에 취해 재하까지 부른 경솔한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정민이 토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닦 아주고 토닥거려 주는 재하. 그런 재하에게 의지할수밖에 없는 정민은 가슴이 저려왔다. 정민의 속이 어느정도 진정이 되었을때 재하는 정민을 차에 태웠다. 추운 날씨였지만 창문을 열어 정민이 충분히 바람을 쐴수있게 해주었다. 정민은 의자에 기대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정민을 보며 재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정신이 들어? 속은 좀 어때?"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전화할 사람이 없더라. 사는게 너무 힘들고 답답해서 누구한테든 속시원히 털어놓고 싶었는데, 힘들고 답답한 내 인생이 싫어서 아무나 붙잡고 원망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전화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미안해.." "잘했어. 잘했어, 서정민. 나한테 다 털어놔. 나 붙잡고 원망해. 나한테 다 해." "훗... 바보... 넌 정말 바보야." "바보면 어때. 니가 옆에 있는데." 정민에게 있어서 태형이 남기고간 상처는 컸다. 그렇기에 반복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 다. 태형이와의 사랑은 정민에게 상처와 함께 깨달음도 주었다. 사랑은 가난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민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태형이도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 민과 태형의 환경 차이에서 비롯된 태형의 부모님의 반대를 이길수 없었다. 재하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재하의 눈은 재하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 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정민은 재하의 마음에 모든 것을 걸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재하의 마음만을 믿고 끝이 뻔히 보이는 사랑을 시작할 용기도 없었다. "내가 왜 좋아?" "나도 그게 궁금하다. 나처럼 멋진 남자가 또 어디있다고 싫다하는 니가 왜 좋은지 모 르겠지만 그냥 좋아. 내 심장이 너만 기억하고 너만 떠올려서 좋아하고 싶지 않아도 그럴수가 없다." "나 아직 사랑할 준비가 안됬어. 너든.. 다른 사람이든 또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여유도 그럴 마음도 없어." "알아." "알아?" "그래, 알아." "미안해.." "또 뭐가 미안해? 나만 보면 미안해?" "훗.. 그러네.. 너만 보면 미안해지네. 나같은거 좋아해준다는데, 넙죽 절이라도 하면서 고마워해도 부족할텐데... 그런데 니 마음 받아줄수 없어서 미안해. 받아줄수도 없으 면서 불러내서 미안해. 그냥.. 다 미안해." "나는 아무래도 너 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할수가 없을 것같아. 그럼 넌 또 이러겠지? 지금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 마음도 변할거다. 이렇게 말하겠지? 근데 내 마음이 변해질것 같지가 않아. 변해질수가 없을것 같아. 그러니까 나한테 조금이라도 미안해 하지마. 이렇게라도 니가 날 찾아줘서, 이렇게라도 널 볼수 있어서, 이렇게라도 너에 게 도움이 될수 있어서.. 그래서 난 좋아. 지금 니 옆에 내가 있다는게 참 좋아. 니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라 내가 너한테 고마워해야 할 일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미안해하지마." "재하야.." "그렇게 심각하게 내 이름 부르지마. 널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어버릴것같아. 안그래도 내 심장 걱정되는데, 니가 심각하게 내 이름 부르면 진짜 멎어버릴지도 몰 라. 얼마나 무서운데. 얼마나 겁나는데." "...."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약해 빠진 것인지 모르는 남자. 그저 사랑이라는 감 정에 충실하는 이 남자를 정민은 어찌해야 할지 알수없었다. 재하가 좋았다.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좋은 친구이고, 좋은 남자였다. 정민은 재하가 내미는 손을 두려움없이 덥석 잡아버리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정민에게는 사랑보다는 두려움이라는 존재가 컸다. "엄마. 상차려놨으니까 아침 챙겨 드세요. 다녀올께요." 정민이 한숨을 내쉬며 출근한 후에야 정민의 엄마는 몸을 일으켰다. 어제 그렇게 나간 정민은 술냄새를 풍기며 새벽에나 돌아왔다. 안절부절 못하며 정민을 기다리던 정민의 엄마는 그제야 안심하고 속이 안좋은듯 낑낑 거리며 자고있는 정민의 옆에 앉아 밤을 지샜다. 거실에는 밥과 콩나물국, 그리고 몇가지 반찬이 올려진 상이 차려져 있었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않아 허기가 졌지만 무엇을 먹은들 목에 걸릴 것 같아 정민의 엄마는 밥상을 뒤로하고 여기 저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준식이 엄마? 나 정민이 엄마야.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됬어? 그래? 고마워. 고마워, 준 식이 엄마. 그럼. 할수있지. 할수있고 말고. 거기 위치가 어떻게 된다고? 응.. 어.. 거기 알아. 그래. 고마워. 나중에 내 한턱 낼께." 오후쯤 되어 정민의 엄마는 외출 준비를 했다. 외출 준비라 해봤자 별다른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늘 입던 옷에 외투 하나를 걸치고 약도가 적힌 종이를 가방에 넣고 일 어서는 정민의 엄마. 시계는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민의 엄마는 나가려다 말고 거 실에 있는 밥상앞에 앉았다. 이미 밥알은 굳어 있었고, 콩나물국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위에 굳어있는 밥알을 떠내어 버리고 식은 밥은 밥통에 넣었다. 그리고 새로 밥을 한그 릇 퍼담았다. 콩나물국은 다시 뜨겁게 데워 상에 올려놓았다. 두어시간 후에 돌아올 정 민을 위해 새로 차린 밥상이었다. 결혼식때 입을 옷을 입어보러온 태형과 윤미. 태형은 옷을 받아들고 탈의실로 향했다. 시끄러운 여직원이 태형을 따라왔지만 태형은 대답없이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 었다. 특별히 손볼 곳은 없는 듯 보였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태형은 인형 같은 자신이 우스울 뿐이었다. 결혼이 진행되는 대로 끌려다니는 천하에 병신같은 자 신의 모습. 아무런 감정없이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인형같은 비겁한 자신의 모습. 태형은 한숨섞인 웃음을 지으며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태형은 밖으로 나와 시끄러운 여직원에게 옷을 돌려주었다. "잘 맞습니다." "그러세요? 입고 나오시지 그러셨어요? 신부님은 아직 준비중이시니까 다시 갈아입고 나오세요. 사진 촬영도 해드리거든요. 미리 한번 찍어보세요." "됐습니다." "네? 아... 네. 그럼 저쪽에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신부님 금방 나오실 거예요. 차 드릴까요?" "아닙니다. 먼저 갔다고 전해주십시오." 당황해 하는 여직원에게 인사를 하며 태형은 웨딩샾을 나섰다. 미리 운전기사를 퇴근 시킨 태형은 주자창으로 내려가 차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박 윤미의 모습. 궁금하지도, 궁금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윤미 역시 태형이 먼저 가버 렸다해서 섭섭해 할 일도 없었다. 문득 정신을 차린 태형은 곧있으면 도착할 목적지가 J.S라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J.S에는 왜 가고 있는 것인가. 무엇을 바라고 J.S로 향하는 것인가. 간다고 해도 정민이 태형을 반겨줄리 없을텐데 가서 무엇하겠다고 달리고 있는 것인가. 정민을 멀 리서라도 볼수있다 해도 정민을 본들 또 무엇하겠는가. 정민을 붙잡고 모든 것을 버린 채 도망칠 용기라도 있는 놈인가? 아니면 우리가 이별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민재하 이사 옆자리를 차고있는 정민에게 따지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태형은 신경질 적으로 차를 돌렸다. 그리고는 요즘들어 부쩍 자주 출입하는 술집으로 향했다. 조금만 더 가면 정민이가 있는 곳임에도 갈수없는 현실이 태형의 가슴을 다시 한번 무너지게 만들었다. 지하 주자창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상수는 정태형 사장이 차를 출발 시키는 것을 보고 웨당샾으로 올라갔다. 신랑이 없는 신부. 봐주는 이 없이 혼자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 을 박윤미 때문이었다. 박윤미는 그렇게 함부로 대해서는 안되는 여자였다. 적어도.. 적어도 오상수에게 있어서 박윤미는 그런 여자였다. "박윤미씨 나오셨습니까?" "지금 메이크업 중이세요. 누구.. 시죠?" "박윤미 차장님 비서입니다. 정사장님께서 올라가 보라고 하셔서요." "네. 여기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커피 한잔 드릴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쪽에 있는 새하얀 커튼 뒤에 박윤미가 있을 것이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웨딩드 레스를 입고 있을 것이다. 오상수는 커튼 뒤에 있을 박윤미를 기다리며 오랫만에 박 윤미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오상수는 꽤 인기있는 심부름꾼이었다. 주로 사고로 위장해 뼈 몇개정도 부러뜨려 주 는 일을했으나 가끔은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 살인까지 가주는 쪽이 돈이 더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릴적 고아원에서 만난 형들과 함께 소년원을 드나들며 배운 기술을 총동원해서 맡은 일에 충실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오상수 역시 여자를 믿지 않았다. 꽤 봐줄만한 외모의 오상수는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었으나 오상수는 그런 여자들 을 전부 외면했었다. 본격적으로 이 일을 시작하면서 돈 좀 있는 집안의 딸들의 의뢰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리고 돈의 힘을 빌려 오상수를 유혹하는 여자도 많아졌다. 그 여 자들이 원하는 것은 오상수의 마음이 아닌 오상수의 몸, 오상수와의 하룻밤이었다. 오상수는 그 여자들에게 몸을 주며 그 인기를 더해갔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당골 고객중 하나인 예종백화점의 막내딸이 박윤미를 데리고 그 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오상수에게 박윤미는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그런 고객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름이 나가고 오상수와 둘이 남은 박윤미는 처음 사무실로 들어 올때의 도도했던 모습과는 달리 겁에 질려있는듯 보였다.. 당당하게 보이려는 듯 허리 를 꼿꼿히 세우고 앉아있었지만 흔들리는 눈동자와 떨리는 손이 박윤미가 겁에 질려있 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있었다. 박윤미의 이런 모습에 오상수는 신선함을 느꼈다. 천천히 오상수가 처리해야할 사람들의 명단을 나열하며 그에 따른 이유까지 설명하던 윤미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오상수가 처음으로 여자를 안아주고 싶다고 느끼는 순간 이었다. 작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흘리던 윤미는 금방이라도 부서질것같아 보였으나 꼿꼿히 세운 허리만은 여전히 유지한채였다. 가슴속에 무엇인가가 꿈틀거림을 느꼈지만 오상수는 그 감정을 애써 모른척 해버리고 윤미가 의뢰한 대로 완벽하게 일처리를 해주었다. 나머지 돈을 지불하러 다시 오상수의 사무실로 찾아온 박윤미. 오상수는 당연히 요구할 잠자리를 위해 콘돔까지 준비해둔 상 태였다. 하지만 박윤미는 오상수의 예상을 깨버렸다. "고마워요. 사람을 죽이는 일에 고맙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요." 박윤미는 조심스럽게 오상수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고맙다... 한번도 고맙다는 말을 들어본적이 없었다. 오상수가 하는 일이 고맙다는 말을 들을만한 일도 아니었을 뿐더 러 그저 의뢰자들이 제시한 돈의 액수만큼만 일을 해줄 뿐이었다. 그런 오상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있는 박윤미. 의뢰를 하러 왔을때보다 수척해진 그녀는 무척이나 슬퍼보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박윤미와의 일은 끝이났다. 왠지 모를 아쉬움을 남긴 박윤미는 그렇게 오상수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듯 싶었다. 2달쯤 지났을까. 박윤미가 다시 오상수의 사무실을 찾았다. 겨우 두번밖에 본적이 없 었지만 그날 윤미의 모습은 오상수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낯설었다. 오들오들 떨며 겁을 내던 윤미의 모습은 더이상 찾아볼수 없었다. 온갖 보석들로 치장 을 하고, 보고 있기 민망할 정도의 야한 차림을 한채 오상수 앞에 앉은 박윤미 거액의 돈다발을 오상수 앞에 올려놓았다. "이 정도면 될까?" "명단은 따로 준비하셨습니까?" "명단? 무슨 명단?" "의뢰하실.." "당신. 당신이면돼." "네?" "당신이라고. 당신이 내 노예가 되어주는게 내 이번 의뢰야." "무슨 뜻이지요?" "확실한 일처리만큼 똑똑한줄 알았더니 아닌가봐? 앞으로 내가 시키는 일만하라고. 당신이 지낼 집은 내가 마련해 줄테니까 이 사무실은 버려. 나 외에 다른 의뢰는 절대 받지마. 대신 난 매달 이만큼의 금액을 지불하지. 어때?" "이유는요?" "난 당신처럼 말잘듣는 노예가 필요하거든. 당신은 노예로 삼기에 충분한 조건을 가졌 어. 당신 입장에서도 꽤 괜찮은 제안 아닌가?" 오상수는 어이가 없었다. 툭 치기만 해도 저만치로 떨어져 나갈것 같은 여자가 오상수 앞에 앉아서 시건방을 떨고 있는 것이다. 오상수는 기가차서 웃음을 터트렸다. 건방을 떠는 박윤미의 꼴이 우습기도 했고, 귀엽기도 했다. 하지만 봐주는 것은 여기까 지였다. 오상수는 박윤미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한참동안 오상수를 노려보던 윤미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오상수를 찾아왔 다. 날이 갈수록 박윤미가 들고오는 돈의 액수도 커져갔다. 오상수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다른 여자 같았으면 이미 예전에 쫒아버렸을 것 이었다. 하지만 첫 의뢰때 박윤미의 겁에 질린 표정이 자꾸만 오상수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기에 지금까지 참아온 터였다. "야, 이년아. 어디와서 돈지랄이야. 몸 성히 나가고 싶으면 좋게 말할때 꺼져." "머리 빈 년들이 돈지랄 해준 덕에 니가 먹고 사는거 아냐? 그렇게 살고싶어? 손 더럽 혀 가면서까지 살고싶어? 쓰레기같은 인생 구제해 주겠다잖니. 봉잡은거 아니니?" "근데 이년이 어디와서 지랄이야. 죽고싶어?" "어. 죽고 싶어, 나. 나 좀 죽여줄래?" 박윤미는 마치 듣고싶었던 말을 들었다는듯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이거 진짜 미친년아니야?" "죽여주라. 니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자, 여기 돈도 있어. 죽여주라.. 제발 나좀 죽여 주라. 응?" 이상하게도 오상수는 죽여달라하는 박윤미의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부자집 딸래미로 태어나 부족한거 하나없이 살아온 주제에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척하는 박윤미가 오상 수를 자극했다. 오상수가 윤미를 밖으로 내쫒을 생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을때 갑 자기 박윤미가 픽하고 쓰러졌다. 잠시 사태파악이 되지않아 멀뚱히 서있던 오상수. 바 닥에 쓰러진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박윤미. 오상수는 쓰러진 박윤미를 안아 들어 쇼 파에 눕혔다. 그러는 동안 오상수는 터지는 웃음을 겨우 참고있었다. 맹랑하고 당돌하 기까지 해서 어떤 얼굴이 박윤미의 진짜 얼굴일까 헀던 궁금증이 풀려버린 것이었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손에는 땀이 가득 고여있었고 박윤미의 작은 몸은 내부에서 지진 이라도 난듯 요동치고 있었다. 누워있는 박윤미를 바라보며 오상수는 결정을 내렸다. 쓰러져 버릴만큼 겁이 났던 주제에 그토록 끈질기게 자신을 노예로 삼고싶어 했던 박 윤미, 부잣집 딸래미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화려하기만한 삶일 텐데도 죽지 못해 안달 이 난 박윤미. 그녀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재미없어지면 그때 그만두면 되 는 일이었다. 당장은 박윤미가 알고싶었다. 어떤 사람인지, 무엇이 이 여자를 죽고싶게 만드는 것인지 그것이 알고 싶어졌다. 그것이 오상수와 박윤미의 시작이었다. "신부님 나오십니다." "네? 네." 웨딩샾의 여직원이 다가와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생각에 잠겨있던 오상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늘 그렇듯이 무표정을 유지한채 박윤미를 기다렸다. "어이. 서정민." 퇴근 시간, 많은 직원들이 우루루 회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정민 역시 그 틈에 끼어 있었다. 그때 정민을 부르는 재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위에 있던 직원들은 재하를 알아보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안그래도 신문에 약혼자라는 얼토당토한 기사까지 난 터였기에 정민은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는척 퇴근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끼어 가버려야 할지 종잡을수가 없었다. 진짜 약혼자야? 우리 회사 다녔던거야? 언제부터 사귄거래? 여기 저기서 들려오는 수근거림. 정민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서정민!" 재하는 얄밉게도 계속해서 정민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정민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일까. 재하의 이런 행동이 정민을 얼마나 당혹스럽게 만드는지 모를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재하는 아까보다 더 큰소리로 정민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정민은 재하에게 달려가 손을 덥석 잡고 걷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무조건 걸었다. 어린 아이처럼 정민에게 손을 잡힌채 졸래 졸래 따르던 재하는 갑자기 뒤를 돌아 재하를 째려보는 정민때문에 걸음을 멈췄다. "너 정말 왜 그래? 나 회사 그만두길 바래?" "속은 좀 어때? 괜찮아? 얼큰한 해장국 어때?" "재하야. 나 이 회사 오래 다니고 싶어. 이 정도 월급 나 다른데선 못받아." "해장국은 니가 쏴라. 어제 니 술주정 다 받아줬으니까 그정도는 니가 쏴야지?" "아... 어제는... 미안했어." 재하를 다그치던 정민은 어제의 얘기가 나오자 재하의 눈을 피하며 쭈삣거렸다. "야~ 너 술주정 한번 끝내주더라? 여태 왜 시집 못갔는지 알겠네." "뭐? 내.. 내가 무슨 술주정을 부렸다그래?" "야. 너 기억안나? 니가 어제 어떤 술주정을 어떤 식으로 얼마나 부렸는지 쫙 설명 해줘?" "됐어. 됐다고." "해장국 먹으러 가자. 응?" 어깨를 흔들어대며 애교까지 부리는 재하에게 정민이 이길 방법이 없었다. 어쩔수 없이 근처의 해장국집으로 향하는 정민은 바보같을 정도로 헤헤거리고 있는 재하 를 외면할수 밖에 없었다. 재하의 웃는 얼굴이 너무나 순수해서 정민에게까지 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민은 다시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시작할 필요도 없는 사랑이야. 끝이 너무나도 뻔한 사랑이야. 흔들리면 안돼, 서정 민. 흔들지마... 흔들지마, 재하야.' 어느덧 주문한 해장국이 재하와 정민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놓여졌다. 깨작거리며 한술 한술 천천히 밥을 뜨던 정민은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재하의 모습에 덩달아 바삐 먹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하루종일 속이 쓰리고 부글댔던 터라 해장국 은 더 없이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아, 배부르다. 잘먹었다, 서정민." "앞으로는 이러지마." "2차는 내가 쏜다! 뭐해? 빨리 계산해. 2차가자~" "재하야. 괜한 소문 만들지마. 나 그런데 휩쓸리고 싶지 않아." "어이, 술주정뱅이 아가씨." "뭐?" "흔들려?" "무... 무슨 소리야." "나 민재하 때문에 흔들리냐구요. 술주정뱅이 아가씨." "아니야. 단지 난 소문에 휩쓸.." "소문이 무서운거야? 니 마음이 흔들리는게 무서운거야?" "...." "기회는 줄수 있잖아. 기회는 줘야하는 거잖아. 흔들리는게 아니라면 기회정도는 줄수있는 거잖아. 기회도 줄수 없을만큼 나한테 넘어온거야?" "아니라니까!" "그럼 2차 가자~ 응?" "알았어. 알았다고." 툴툴거리며 계산을 하러가는 정민의 뒷모습을 보고있는 재하.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만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재하에게 정민은 그런 사람이었다. 어젯밤 많은 생각을 했었다. 너무 이기적인 것은 아닌가. 재하 혼자만의 마음때문에 정민이를 힘들게 한다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인 것일까. 더이상 정민이가 힘들어 하 지않게, 그리고 재하를 외면하는 정민이 때문에 더이상 아프지 않게... 이쯤에서 마 음 정리를 하는 것이 좋은 것일까. 서정민을 잊는다, 서정민을 마음에서 버린다. 할수없는 일이었다. 해지지 않는 일이 었다. 이기적이다 욕해도 어쩔수 없었다. 아직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재하의 마음이 미덥지 않다면 그만한 믿음을 주면 되는 것이다. 같은 상처를 겁내고 있다면 그 상처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심어주면 되는 것이다. 오랜 생각과 고민의 결론이었다. 재하는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글귀를 떠올렸다. -사랑은 일방통행이다.- 재하의 사랑은 이미 시작 되었다. 샛길로 빠져나갈 수도 없었고 유턴은 더더욱 할수 없었다. '언제쯤이면 니가 내 사랑을 믿어줄지, 내 마음에 의지할지 나는 모르겠어. 그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겠지만 더디게 오더라도 지치지 않을거야. 보채지 않을거 야. 그러니까 서정민. 니 마음 닫으려고만 하지말고, 이것 저것 복잡하게 연결해서 생각하지말고 나 민재하. 민재하의 마음만 봐주라. 봐주기만 하면돼. 그럼 너도 자연 히 알게 될테니까. 내 사랑의 깊이를 너도 자연히 알게 될테니까.' 안녕하세요. 오랫만의 휴식을 즐기느라.. 어제 글을 올리지 못했네요. 오전에 올리려고 했었는데 로맨스가... 희안하게 바껴서; 어찌된 일인가 해서 주춤거리다 이제 올려요 안그래도 잠수를 몇번 탄터라... 조금씩 늦어지는 글이 죄송스럽네요. 그래도 너무 미워하지 마시구..ㅠㅠ 다른 분들처럼 글실력이 뛰어나서 술술~ 잘 써내려갔으면 좋겠지만 그만한 실력이 안되는 터라 글이 한번 막히면 대책없이 막히네요...에휴... 요즘 날씨가 진짜 무지하게 춥죠?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2006년의 마지막 12월 모든 분들에게 행복한 일들만 가득했으면 합니다^-^
『민들레연가 - 열두번째 이야기』
"우웩. 우웩."
구석진 자리에 위치해있던 포장마차를 겨우 찾은 재하는 포장마차 주인에게 술값을 지불
한후 테이블에 엎드려 있던 정민을 들쳐업고 밖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눈도 못뜰 정도로
취해있던 정민이었으나 바깥바람을 쐬자 정신이 드는듯 보였다. 그때부터 시작된 구역질
이 벌써 4차례나 이어졌다.
재하는 정민의 등을 두드려주며 재하와 정민의 옷에 튄 이물질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괜찮아?"
"우웩.."
몇번의 구역질로 정민은 쓰러질듯 기운이 없었다. 마땅한 안주도 없이 소주를 2병이나
마신 정민이었다. 저녁도 먹지않은 빈속이었기에 더욱 힘이 들었다. 게다가 술에 취해
재하까지 부른 경솔한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정민이 토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닦
아주고 토닥거려 주는 재하. 그런 재하에게 의지할수밖에 없는 정민은 가슴이 저려왔다.
정민의 속이 어느정도 진정이 되었을때 재하는 정민을 차에 태웠다. 추운 날씨였지만
창문을 열어 정민이 충분히 바람을 쐴수있게 해주었다. 정민은 의자에 기대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정민을 보며 재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정신이 들어? 속은 좀 어때?"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전화할 사람이 없더라. 사는게 너무 힘들고 답답해서 누구한테든 속시원히 털어놓고
싶었는데, 힘들고 답답한 내 인생이 싫어서 아무나 붙잡고 원망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전화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미안해.."
"잘했어. 잘했어, 서정민. 나한테 다 털어놔. 나 붙잡고 원망해. 나한테 다 해."
"훗... 바보... 넌 정말 바보야."
"바보면 어때. 니가 옆에 있는데."
정민에게 있어서 태형이 남기고간 상처는 컸다. 그렇기에 반복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
다. 태형이와의 사랑은 정민에게 상처와 함께 깨달음도 주었다. 사랑은 가난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민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태형이도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
민과 태형의 환경 차이에서 비롯된 태형의 부모님의 반대를 이길수 없었다.
재하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재하의 눈은 재하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
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정민은 재하의 마음에 모든 것을 걸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재하의 마음만을 믿고 끝이 뻔히 보이는 사랑을 시작할 용기도 없었다.
"내가 왜 좋아?"
"나도 그게 궁금하다. 나처럼 멋진 남자가 또 어디있다고 싫다하는 니가 왜 좋은지 모
르겠지만 그냥 좋아. 내 심장이 너만 기억하고 너만 떠올려서 좋아하고 싶지 않아도
그럴수가 없다."
"나 아직 사랑할 준비가 안됬어. 너든.. 다른 사람이든 또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여유도
그럴 마음도 없어."
"알아."
"알아?"
"그래, 알아."
"미안해.."
"또 뭐가 미안해? 나만 보면 미안해?"
"훗.. 그러네.. 너만 보면 미안해지네. 나같은거 좋아해준다는데, 넙죽 절이라도 하면서
고마워해도 부족할텐데... 그런데 니 마음 받아줄수 없어서 미안해. 받아줄수도 없으
면서 불러내서 미안해. 그냥.. 다 미안해."
"나는 아무래도 너 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할수가 없을 것같아. 그럼 넌 또 이러겠지?
지금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 마음도 변할거다. 이렇게 말하겠지? 근데 내 마음이
변해질것 같지가 않아. 변해질수가 없을것 같아. 그러니까 나한테 조금이라도 미안해
하지마. 이렇게라도 니가 날 찾아줘서, 이렇게라도 널 볼수 있어서, 이렇게라도 너에
게 도움이 될수 있어서.. 그래서 난 좋아. 지금 니 옆에 내가 있다는게 참 좋아.
니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라 내가 너한테 고마워해야 할 일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미안해하지마."
"재하야.."
"그렇게 심각하게 내 이름 부르지마. 널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어버릴것같아.
안그래도 내 심장 걱정되는데, 니가 심각하게 내 이름 부르면 진짜 멎어버릴지도 몰
라. 얼마나 무서운데. 얼마나 겁나는데."
"...."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약해 빠진 것인지 모르는 남자. 그저 사랑이라는 감
정에 충실하는 이 남자를 정민은 어찌해야 할지 알수없었다.
재하가 좋았다.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좋은 친구이고, 좋은 남자였다. 정민은 재하가
내미는 손을 두려움없이 덥석 잡아버리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정민에게는 사랑보다는
두려움이라는 존재가 컸다.
"엄마. 상차려놨으니까 아침 챙겨 드세요. 다녀올께요."
정민이 한숨을 내쉬며 출근한 후에야 정민의 엄마는 몸을 일으켰다. 어제 그렇게 나간
정민은 술냄새를 풍기며 새벽에나 돌아왔다. 안절부절 못하며 정민을 기다리던 정민의
엄마는 그제야 안심하고 속이 안좋은듯 낑낑 거리며 자고있는 정민의 옆에 앉아 밤을
지샜다. 거실에는 밥과 콩나물국, 그리고 몇가지 반찬이 올려진 상이 차려져 있었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않아 허기가 졌지만 무엇을 먹은들 목에 걸릴 것 같아 정민의
엄마는 밥상을 뒤로하고 여기 저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준식이 엄마? 나 정민이 엄마야.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됬어? 그래? 고마워. 고마워, 준
식이 엄마. 그럼. 할수있지. 할수있고 말고. 거기 위치가 어떻게 된다고? 응.. 어.. 거기
알아. 그래. 고마워. 나중에 내 한턱 낼께."
오후쯤 되어 정민의 엄마는 외출 준비를 했다. 외출 준비라 해봤자 별다른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늘 입던 옷에 외투 하나를 걸치고 약도가 적힌 종이를 가방에 넣고 일
어서는 정민의 엄마. 시계는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민의 엄마는 나가려다 말고 거
실에 있는 밥상앞에 앉았다. 이미 밥알은 굳어 있었고, 콩나물국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위에 굳어있는 밥알을 떠내어 버리고 식은 밥은 밥통에 넣었다. 그리고 새로 밥을 한그
릇 퍼담았다. 콩나물국은 다시 뜨겁게 데워 상에 올려놓았다. 두어시간 후에 돌아올 정
민을 위해 새로 차린 밥상이었다.
결혼식때 입을 옷을 입어보러온 태형과 윤미. 태형은 옷을 받아들고 탈의실로 향했다.
시끄러운 여직원이 태형을 따라왔지만 태형은 대답없이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
었다. 특별히 손볼 곳은 없는 듯 보였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태형은 인형
같은 자신이 우스울 뿐이었다. 결혼이 진행되는 대로 끌려다니는 천하에 병신같은 자
신의 모습. 아무런 감정없이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인형같은 비겁한 자신의 모습. 태형은
한숨섞인 웃음을 지으며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태형은 밖으로 나와 시끄러운 여직원에게 옷을 돌려주었다.
"잘 맞습니다."
"그러세요? 입고 나오시지 그러셨어요? 신부님은 아직 준비중이시니까 다시 갈아입고
나오세요. 사진 촬영도 해드리거든요. 미리 한번 찍어보세요."
"됐습니다."
"네? 아... 네. 그럼 저쪽에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신부님 금방 나오실 거예요.
차 드릴까요?"
"아닙니다. 먼저 갔다고 전해주십시오."
당황해 하는 여직원에게 인사를 하며 태형은 웨딩샾을 나섰다. 미리 운전기사를 퇴근
시킨 태형은 주자창으로 내려가 차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박
윤미의 모습. 궁금하지도, 궁금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윤미 역시 태형이 먼저 가버
렸다해서 섭섭해 할 일도 없었다.
문득 정신을 차린 태형은 곧있으면 도착할 목적지가 J.S라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J.S에는 왜 가고 있는 것인가. 무엇을 바라고 J.S로 향하는 것인가. 간다고 해도
정민이 태형을 반겨줄리 없을텐데 가서 무엇하겠다고 달리고 있는 것인가. 정민을 멀
리서라도 볼수있다 해도 정민을 본들 또 무엇하겠는가. 정민을 붙잡고 모든 것을 버린
채 도망칠 용기라도 있는 놈인가? 아니면 우리가 이별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민재하 이사 옆자리를 차고있는 정민에게 따지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태형은 신경질 적으로 차를 돌렸다. 그리고는 요즘들어 부쩍 자주 출입하는 술집으로
향했다. 조금만 더 가면 정민이가 있는 곳임에도 갈수없는 현실이 태형의 가슴을 다시
한번 무너지게 만들었다.
지하 주자창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상수는 정태형 사장이 차를 출발 시키는 것을 보고
웨당샾으로 올라갔다. 신랑이 없는 신부. 봐주는 이 없이 혼자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
을 박윤미 때문이었다. 박윤미는 그렇게 함부로 대해서는 안되는 여자였다. 적어도..
적어도 오상수에게 있어서 박윤미는 그런 여자였다.
"박윤미씨 나오셨습니까?"
"지금 메이크업 중이세요. 누구.. 시죠?"
"박윤미 차장님 비서입니다. 정사장님께서 올라가 보라고 하셔서요."
"네. 여기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커피 한잔 드릴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쪽에 있는 새하얀 커튼 뒤에 박윤미가 있을 것이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웨딩드
레스를 입고 있을 것이다. 오상수는 커튼 뒤에 있을 박윤미를 기다리며 오랫만에 박
윤미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오상수는 꽤 인기있는 심부름꾼이었다. 주로 사고로 위장해 뼈 몇개정도 부러뜨려 주
는 일을했으나 가끔은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 살인까지 가주는 쪽이 돈이 더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릴적 고아원에서 만난 형들과 함께 소년원을 드나들며 배운
기술을 총동원해서 맡은 일에 충실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오상수 역시 여자를 믿지 않았다.
꽤 봐줄만한 외모의 오상수는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었으나 오상수는 그런 여자들
을 전부 외면했었다. 본격적으로 이 일을 시작하면서 돈 좀 있는 집안의 딸들의 의뢰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리고 돈의 힘을 빌려 오상수를 유혹하는 여자도 많아졌다. 그 여
자들이 원하는 것은 오상수의 마음이 아닌 오상수의 몸, 오상수와의 하룻밤이었다.
오상수는 그 여자들에게 몸을 주며 그 인기를 더해갔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당골 고객중 하나인 예종백화점의 막내딸이 박윤미를 데리고 그
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오상수에게 박윤미는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그런 고객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름이 나가고 오상수와 둘이 남은 박윤미는 처음 사무실로 들어
올때의 도도했던 모습과는 달리 겁에 질려있는듯 보였다.. 당당하게 보이려는 듯 허리
를 꼿꼿히 세우고 앉아있었지만 흔들리는 눈동자와 떨리는 손이 박윤미가 겁에 질려있
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있었다. 박윤미의 이런 모습에 오상수는 신선함을 느꼈다.
천천히 오상수가 처리해야할 사람들의 명단을 나열하며 그에 따른 이유까지 설명하던
윤미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오상수가 처음으로 여자를 안아주고 싶다고 느끼는 순간
이었다. 작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흘리던 윤미는 금방이라도 부서질것같아
보였으나 꼿꼿히 세운 허리만은 여전히 유지한채였다.
가슴속에 무엇인가가 꿈틀거림을 느꼈지만 오상수는 그 감정을 애써 모른척 해버리고
윤미가 의뢰한 대로 완벽하게 일처리를 해주었다. 나머지 돈을 지불하러 다시 오상수의
사무실로 찾아온 박윤미. 오상수는 당연히 요구할 잠자리를 위해 콘돔까지 준비해둔 상
태였다. 하지만 박윤미는 오상수의 예상을 깨버렸다.
"고마워요. 사람을 죽이는 일에 고맙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요."
박윤미는 조심스럽게 오상수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고맙다... 한번도 고맙다는 말을
들어본적이 없었다. 오상수가 하는 일이 고맙다는 말을 들을만한 일도 아니었을 뿐더
러 그저 의뢰자들이 제시한 돈의 액수만큼만 일을 해줄 뿐이었다.
그런 오상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있는 박윤미. 의뢰를 하러 왔을때보다 수척해진
그녀는 무척이나 슬퍼보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박윤미와의 일은 끝이났다.
왠지 모를 아쉬움을 남긴 박윤미는 그렇게 오상수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듯 싶었다.
2달쯤 지났을까. 박윤미가 다시 오상수의 사무실을 찾았다. 겨우 두번밖에 본적이 없
었지만 그날 윤미의 모습은 오상수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낯설었다.
오들오들 떨며 겁을 내던 윤미의 모습은 더이상 찾아볼수 없었다. 온갖 보석들로 치장
을 하고, 보고 있기 민망할 정도의 야한 차림을 한채 오상수 앞에 앉은 박윤미 거액의
돈다발을 오상수 앞에 올려놓았다.
"이 정도면 될까?"
"명단은 따로 준비하셨습니까?"
"명단? 무슨 명단?"
"의뢰하실.."
"당신. 당신이면돼."
"네?"
"당신이라고. 당신이 내 노예가 되어주는게 내 이번 의뢰야."
"무슨 뜻이지요?"
"확실한 일처리만큼 똑똑한줄 알았더니 아닌가봐? 앞으로 내가 시키는 일만하라고.
당신이 지낼 집은 내가 마련해 줄테니까 이 사무실은 버려. 나 외에 다른 의뢰는 절대
받지마. 대신 난 매달 이만큼의 금액을 지불하지. 어때?"
"이유는요?"
"난 당신처럼 말잘듣는 노예가 필요하거든. 당신은 노예로 삼기에 충분한 조건을 가졌
어. 당신 입장에서도 꽤 괜찮은 제안 아닌가?"
오상수는 어이가 없었다. 툭 치기만 해도 저만치로 떨어져 나갈것 같은 여자가 오상수
앞에 앉아서 시건방을 떨고 있는 것이다. 오상수는 기가차서 웃음을 터트렸다.
건방을 떠는 박윤미의 꼴이 우습기도 했고, 귀엽기도 했다. 하지만 봐주는 것은 여기까
지였다. 오상수는 박윤미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한참동안 오상수를 노려보던 윤미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오상수를 찾아왔
다. 날이 갈수록 박윤미가 들고오는 돈의 액수도 커져갔다.
오상수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다른 여자 같았으면 이미 예전에 쫒아버렸을 것
이었다. 하지만 첫 의뢰때 박윤미의 겁에 질린 표정이 자꾸만 오상수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기에 지금까지 참아온 터였다.
"야, 이년아. 어디와서 돈지랄이야. 몸 성히 나가고 싶으면 좋게 말할때 꺼져."
"머리 빈 년들이 돈지랄 해준 덕에 니가 먹고 사는거 아냐? 그렇게 살고싶어? 손 더럽
혀 가면서까지 살고싶어? 쓰레기같은 인생 구제해 주겠다잖니. 봉잡은거 아니니?"
"근데 이년이 어디와서 지랄이야. 죽고싶어?"
"어. 죽고 싶어, 나. 나 좀 죽여줄래?"
박윤미는 마치 듣고싶었던 말을 들었다는듯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이거 진짜 미친년아니야?"
"죽여주라. 니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자, 여기 돈도 있어. 죽여주라.. 제발 나좀 죽여
주라. 응?"
이상하게도 오상수는 죽여달라하는 박윤미의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부자집 딸래미로
태어나 부족한거 하나없이 살아온 주제에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척하는 박윤미가 오상
수를 자극했다. 오상수가 윤미를 밖으로 내쫒을 생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을때 갑
자기 박윤미가 픽하고 쓰러졌다. 잠시 사태파악이 되지않아 멀뚱히 서있던 오상수. 바
닥에 쓰러진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박윤미. 오상수는 쓰러진 박윤미를 안아 들어 쇼
파에 눕혔다. 그러는 동안 오상수는 터지는 웃음을 겨우 참고있었다. 맹랑하고 당돌하
기까지 해서 어떤 얼굴이 박윤미의 진짜 얼굴일까 헀던 궁금증이 풀려버린 것이었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손에는 땀이 가득 고여있었고 박윤미의 작은 몸은 내부에서 지진
이라도 난듯 요동치고 있었다. 누워있는 박윤미를 바라보며 오상수는 결정을 내렸다.
쓰러져 버릴만큼 겁이 났던 주제에 그토록 끈질기게 자신을 노예로 삼고싶어 했던 박
윤미, 부잣집 딸래미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화려하기만한 삶일 텐데도 죽지 못해 안달
이 난 박윤미. 그녀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재미없어지면 그때 그만두면 되
는 일이었다. 당장은 박윤미가 알고싶었다. 어떤 사람인지, 무엇이 이 여자를 죽고싶게
만드는 것인지 그것이 알고 싶어졌다. 그것이 오상수와 박윤미의 시작이었다.
"신부님 나오십니다."
"네? 네."
웨딩샾의 여직원이 다가와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생각에 잠겨있던 오상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늘 그렇듯이 무표정을 유지한채 박윤미를 기다렸다.
"어이. 서정민."
퇴근 시간, 많은 직원들이 우루루 회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정민 역시 그 틈에 끼어
있었다. 그때 정민을 부르는 재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위에 있던 직원들은 재하를
알아보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안그래도 신문에 약혼자라는 얼토당토한 기사까지 난 터였기에 정민은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는척 퇴근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끼어 가버려야 할지 종잡을수가 없었다.
진짜 약혼자야? 우리 회사 다녔던거야? 언제부터 사귄거래? 여기 저기서 들려오는
수근거림. 정민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서정민!"
재하는 얄밉게도 계속해서 정민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정민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일까. 재하의 이런 행동이 정민을 얼마나 당혹스럽게 만드는지 모를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재하는 아까보다 더 큰소리로 정민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정민은 재하에게 달려가 손을 덥석 잡고 걷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무조건 걸었다. 어린 아이처럼 정민에게 손을 잡힌채 졸래 졸래 따르던 재하는 갑자기
뒤를 돌아 재하를 째려보는 정민때문에 걸음을 멈췄다.
"너 정말 왜 그래? 나 회사 그만두길 바래?"
"속은 좀 어때? 괜찮아? 얼큰한 해장국 어때?"
"재하야. 나 이 회사 오래 다니고 싶어. 이 정도 월급 나 다른데선 못받아."
"해장국은 니가 쏴라. 어제 니 술주정 다 받아줬으니까 그정도는 니가 쏴야지?"
"아... 어제는... 미안했어."
재하를 다그치던 정민은 어제의 얘기가 나오자 재하의 눈을 피하며 쭈삣거렸다.
"야~ 너 술주정 한번 끝내주더라? 여태 왜 시집 못갔는지 알겠네."
"뭐? 내.. 내가 무슨 술주정을 부렸다그래?"
"야. 너 기억안나? 니가 어제 어떤 술주정을 어떤 식으로 얼마나 부렸는지 쫙 설명
해줘?"
"됐어. 됐다고."
"해장국 먹으러 가자. 응?"
어깨를 흔들어대며 애교까지 부리는 재하에게 정민이 이길 방법이 없었다. 어쩔수
없이 근처의 해장국집으로 향하는 정민은 바보같을 정도로 헤헤거리고 있는 재하
를 외면할수 밖에 없었다. 재하의 웃는 얼굴이 너무나 순수해서 정민에게까지 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민은 다시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시작할 필요도 없는 사랑이야. 끝이 너무나도 뻔한 사랑이야. 흔들리면 안돼, 서정
민. 흔들지마... 흔들지마, 재하야.'
어느덧 주문한 해장국이 재하와 정민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놓여졌다.
깨작거리며 한술 한술 천천히 밥을 뜨던 정민은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재하의 모습에
덩달아 바삐 먹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하루종일 속이 쓰리고 부글댔던 터라 해장국
은 더 없이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아, 배부르다. 잘먹었다, 서정민."
"앞으로는 이러지마."
"2차는 내가 쏜다! 뭐해? 빨리 계산해. 2차가자~"
"재하야. 괜한 소문 만들지마. 나 그런데 휩쓸리고 싶지 않아."
"어이, 술주정뱅이 아가씨."
"뭐?"
"흔들려?"
"무... 무슨 소리야."
"나 민재하 때문에 흔들리냐구요. 술주정뱅이 아가씨."
"아니야. 단지 난 소문에 휩쓸.."
"소문이 무서운거야? 니 마음이 흔들리는게 무서운거야?"
"...."
"기회는 줄수 있잖아. 기회는 줘야하는 거잖아. 흔들리는게 아니라면 기회정도는
줄수있는 거잖아. 기회도 줄수 없을만큼 나한테 넘어온거야?"
"아니라니까!"
"그럼 2차 가자~ 응?"
"알았어. 알았다고."
툴툴거리며 계산을 하러가는 정민의 뒷모습을 보고있는 재하.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만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재하에게 정민은 그런 사람이었다.
어젯밤 많은 생각을 했었다. 너무 이기적인 것은 아닌가. 재하 혼자만의 마음때문에
정민이를 힘들게 한다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인 것일까. 더이상 정민이가 힘들어 하
지않게, 그리고 재하를 외면하는 정민이 때문에 더이상 아프지 않게... 이쯤에서 마
음 정리를 하는 것이 좋은 것일까.
서정민을 잊는다, 서정민을 마음에서 버린다. 할수없는 일이었다. 해지지 않는 일이
었다. 이기적이다 욕해도 어쩔수 없었다. 아직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재하의 마음이 미덥지 않다면 그만한 믿음을 주면
되는 것이다. 같은 상처를 겁내고 있다면 그 상처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심어주면 되는 것이다.
오랜 생각과 고민의 결론이었다. 재하는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글귀를 떠올렸다.
-사랑은 일방통행이다.-
재하의 사랑은 이미 시작 되었다. 샛길로 빠져나갈 수도 없었고 유턴은 더더욱 할수
없었다.
'언제쯤이면 니가 내 사랑을 믿어줄지, 내 마음에 의지할지 나는 모르겠어.
그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겠지만 더디게 오더라도 지치지 않을거야. 보채지 않을거
야. 그러니까 서정민. 니 마음 닫으려고만 하지말고, 이것 저것 복잡하게 연결해서
생각하지말고 나 민재하. 민재하의 마음만 봐주라. 봐주기만 하면돼. 그럼 너도 자연
히 알게 될테니까. 내 사랑의 깊이를 너도 자연히 알게 될테니까.'
안녕하세요. 오랫만의 휴식을 즐기느라.. 어제 글을 올리지 못했네요. 오전에 올리려고
했었는데 로맨스가... 희안하게 바껴서; 어찌된 일인가 해서 주춤거리다 이제 올려요
안그래도 잠수를 몇번 탄터라... 조금씩 늦어지는 글이 죄송스럽네요.
그래도 너무 미워하지 마시구..ㅠㅠ
다른 분들처럼 글실력이 뛰어나서 술술~ 잘 써내려갔으면 좋겠지만
그만한 실력이 안되는 터라 글이 한번 막히면 대책없이 막히네요...에휴...
요즘 날씨가 진짜 무지하게 춥죠?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2006년의 마지막 12월 모든 분들에게 행복한 일들만 가득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