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화 사랑의 서(書)에 윤리, 도덕의 장(章)을 넣지 마라.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 알고 있는 그 뻔 한 이론으로 하는 것도 아니야. 자신의 사랑은 로맨리스트, 남의 사랑은 리얼리스트. 당신, 아냐?”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 불판 위에서 입이 쩍쩍 벌어지는 조개를 보면서 나는 소주잔을 비웠다. “쉽게 생각해. 당신이 차마 하지 못했던 건, 남도 하지 못하는 것이고, 당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또한 남도 그랬어. 말로는 모든 사랑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당신은 자신의 사랑과 타인의 사랑을 차별하고 있잖아.” “내가 차별하고 있다구?” “당신은 그걸 느끼지 못하나봐?”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인정하기가 싫다. 아니, 인정하기가 부끄러운 것일까. 비워진 잔에 술을 채우다 나는 말을 돌렸다, “저번에 마트에서 같이 있던 여자는 누구야?” “친구.” “친구? 굉장히 어려 보이던데. 난, 첨에 마누란지 알았지.” “나이에 비해서 좀 어려 보이지. 정작 두 살 차인데.” “친구랑 같이 장도 보고 그러니?” “옛 애인이야.” “어?” “왜?”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뭐가?” “어떻게 헤어진 애인과 친구가 될 수 있냐구.” “왜 안 돼?” “아니, 그렇잖아. 연애하면서 뭐, 뽀뽀만 했을 것도 아니구, 잠도 자고 그랬을 텐데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냔 말이지.” “내가 그녀를 아직도 사랑했다면 친구가 될 수 없었겠지. 하지만, 내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친구가 될 수 있는 거야. 그녀 역시 마찬가지고. 어느 한 쪽이든.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면 친구가 되진 못하지.” “이해가 안 돼.”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사랑이 아닌 게 되나. 어떻게 사랑이 우정을 바뀔 수 있을까. 우정은 사랑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사랑에서 우정은 곤란하지 않은가. “또 자기가 생각하는 이론 들먹이면서 해석하지? 세상의 모든 사랑을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알량한 이론에 빗대지마. 우정이 사랑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사랑은 우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야? 굳이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그 사람까지 껄끄럽게 볼 필요는 없는 거야. 우리는 사랑의 궁합보다 우정의 궁합이 더 맞아 떨어졌을 뿐이야.” “모든 사랑에는 너무 많은 변명들이 있어. 지겨워.”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가방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자 액정엔 지란의 번호가 떴다. “응.” “어디야?” “밖이지.” “아직 그 남자랑 같이 있는 거야?” “호기심이 또 발동하셔?” “혜나도 와 있는데, 우리도 같이 합석 하면 안 되니?” “왜 끼실려구?” “심심해서. 같이 좀 놀자.” “둘이서 노셔. 나도 현우 때문에, 너한테 왕따 많이 당했다.” 그리고선 이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짝 잃은 외기러기처럼 남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는 서른 두 살의 비애. “선 자주 봐?” 잔을 비우며 그가 덤덤하게 물었다. “여자 나이 서른이 넘으면 피할 수 없는 일이지.” “노처녀가 자기 나이를 사실대로 말하면 그 뒤의 말은 무조건 믿어도 좋다던데. 내가 보기엔 서영 씨는 원래 솔직한 것 같군.” “내 나이가 부끄러운 건 아니니까.” 서른이 넘으면 여자들은 대개 자신의 나이에 예민해진다. 특히 짝도 없이 솔로일 경우엔 더더욱 그러하다. 나이란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거짓이다. 숫자에 불과하다면서 남자들은 여자의 나이를 궁금해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린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서른이란 나이가 부끄럽지 않다.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뭐 있을까. 나이 먹는데 보태준 거라도 있나? 젠장. “그리고, 댁이 몰라서 하는 소리지 나두 속이는 거 많어. 너무 솔직하다는 거, 그게 상대에게 더 큰 부담을 주기도 하니까. 경험이야.” “솔직한 게 먹히면 그게 인연이지. 여자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 자신의 비밀을 연인과 함께 나누면 꼭 탈이 난다고 생각하거든. 하지만 진짜 사랑은, 그 비밀을 나눠준 것에 대해 고마워 한다는 거야. 남자들을 싸잡아 매도하는 게 영 맘에 안 들어.” “그건 댁이 몰라서 하는 소리지. 자기 여자의 과거를 알게 되는 순간 남자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건, 오래 전부터야. 지금도 그런 남자들 많구.” “그런 남자들만 만나서 그런 거지. 그게 왜 남자, 여자로 구별 되는 거야? 그건 그냥, 그 사람이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뿐이라구.” 대체 나는 매번 왜 그에게서 패배감을 느끼는 걸까. 아무래도 저 자식, 말발이 너무 세. 괜히 억울한 기분까지 든다니까. 너 잘났다 자식아. 세 병째 술이 바닥이 나자 슬슬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의식을 놓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제 볼을 꼬집고,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그것으로 내 의식은 끊어져 버렸다. 눈을 뜨자 묵직한 머리가 흔들렸다. 시계는 이미 오전 아홉시를 넘기고 있었다. 조깅이고 뭐고, 다 틀렸군. 갈증을 느끼며 자리에서 어렵게 일어나 무거운 몸을 이끌고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키자 갈증은 다소 해결이 되었지만 쓰린 속과 무거운 머리는 어찌 하랴. “그런데 내가 어떻게 집에 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술집에서 나오는 시점부터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앉아서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렸던 것 같은데, 도통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술이 죄지, 사람이 무슨 죄냐.” 쓰린 배를 움켜쥐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자 휴대폰이 때마침 울렸다. 액정화면에 뜬 낯선 번호를 보면 폴더를 열었다. “잘 잤어?” 오 마이 갓트! 나는 순간 너무 놀라 폴더를 다시 확 닫아 버렸다. 술에 취해 그에게 전화번호까지 알려준 모양이다. 이 서영, 너 정말 맘에 안 든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순간 나는 갈등을 하고 있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대처를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받지 않으려니 필름이 끊어진 걸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다시 폴더를 열었다. “왜 전화를 끊어?” “끊은 게 아니라, 놓쳤어.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에티켓이지. 같이 술동무를 했던 사인데, 담날 전화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술동무를 했던 사이? 말이 좀 이상하다.” “술동무만 했을려구.” “뭐…….뭐?” 뭐야 이 자식. 그냥 날 떠보는 거야? 아님,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당신, 필름 끊겼지?” “끊…….끊기긴 누…….누가 끊겨?” “정말 다 기억하고 있단 말야?” “아침부터 쓸데없는 얘기 하려면 끊어.” “그럼 맨 정신에 그랬단 말야? 어떻게 감당하시려구?” 넘어가면 안 된다. 분명 떠보는 걸 거야. 나는 애써 진정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내 걱정 말고, 이만 끊지 그래. 나 지금 전화 받을 정신 아니거든? 근무 시간 같은데, 전화질 그만 하시고 쭈욱 일이나 하셔.” “이 서영, 너 하나도 안 변했다?” “뭐?” 뭐야, 이런 말투. 예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나? “이번 주는 내가 좀 바빠서 시간을 낼 수가 없고, 다음 주쯤에 연락하지. 들어야 될 얘기도 많을 거고, 해줘야 할 얘기도 많을 테니까.” “너, 뭐야?” 그 순간에 전화는 끊어졌다. 순간 나는 혼란스러웠다. 대체 그의 말은 다 무엇이며, 기분 나쁜 뉘앙스까지 풍기는 말투가 뭘 의미하는 걸까. 나는 아무리 떠올려봐도 그를 예전부터 알고 지낸 기억이 없다. “이거, 함정 아냐?” 내가 떠올려야 할 기억이 대체 몇 개야? 머리가 온통 뒤죽박죽이다. “못 살아 내가. 아악, 이 서영 너, 왜 이러니.” 나는 냅다 휴대폰을 침대 위로 던져 버렸다. 간밤엔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을까.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기억 하나 잡을 수 없다. “아이고, 머리야.” 나는 머리를 감싸 쥐며 다시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때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을 들고 배터리를 빼려는 순간, 혜나의 번호가 뜬 것을 보며 폴더를 열었다. “응.” “너, 어제 우리 그이 만났니?” 대뜸 묻는 혜나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순간 나는 뭔가 잘못됐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 “내가 시키지도 않은 말을 니가 왜 하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이한테 협박을 해도 내가 하고, 용서를 해도 내가 해. 아무리 친구 사이라고 해도 낄 때, 안 낄 때가 있어. 너, 그런 것도 분간 못할 나이니? 내 남편이야. 나에게 죄를 지은 거지, 너에게 죄 지은 거 없어. 왜, 니가 죄인 취급하듯 그러니? 니가 뭘 알아서.” “혜나야?” 나는 당황스러워 얼결에 혜나의 말을 끊었다. “살다보면 한 눈 팔수도 있고, 사랑에 대해서 헷갈리기도 해. 무슨 잣대로 니가 진실이네 거짓이네 하며 우습게 굴어? 니가 해결사야? 니가 뭘 알아 기집애야.” 그리고선 끊어진 전화. 나는 순간 뒤통수를 세게, 그것도 백 대씩이나 맞은 기분이었다. “뭐야 아침부터?” 조금 전에 받은 혜나의 전화가 믿어지지 않아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무겁던 머리가 퍽하고 깨지는 듯 한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멍하게 십분쯤 앉아 있었나 보다. 시간이 지나자 차츰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며,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일까. 나는 다시 잠들기를 포기하고 화가 난 채 욕실로 향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선 일단 씻어야 했다. 화실로 가는 걸음이 무거웠다. 오늘따라 바람은 더욱 거칠었고, 생수로만 배를 채운 탓인지 몸은 거친 바람에 의해 자꾸만 떨렸다. 아무래도 몸살이 오려나 보았다. 혜나의 일을 떠올리자 서운함이 먼저 밀려 왔다. 혜나를 이해하자 하면서도 나는 억울한 기분이 들어 자꾸만 화가 치밀어 올랐다. 기껏 생각해서 한 일이 엄청난 욕을 먹어야 하는 것일까. 화실에 들어서자 미스 오라고 불리는 여자만 있었다. 목례를 하자 그녀는 넉살좋은 그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쉬는 날인데, 나오셨네.” “쉬는 날요?” 나는 그제야 오늘이 화실의 휴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화실과는 달리 두 째주 월요일이 휴일 이라는 것을 며칠 전에 들었음에도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언니는 왜 나오셨어요?” “별로 할 일도 없고 해서요.” “네에.” 온 길을 다시 돌아가려니 힘이 빠졌다. 나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돌아섰다. 이왕 나온 김에 나는 발길 을 돌려 서초동으로 향했다. 갑자기 엄마가 해주는 시원한 생태 국이 그리웠다. 전화도 없이 찾아 온 나를 엄마는 그닥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현관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래도 딸인데, 좀 반가워 해주면 안 되우?” “그러게, 영 반갑지가 않네.” 엄마의 말에 나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거실로 들어섰다. “왔어?” 올케가 욕실에서 나오며 엄마 대신 반갑게 맞아 주었다. 엄마보다 낫다. 불쌍한 내 신세. “생태 국이 그리워서 발길을 돌렸지.” “안 그래도 어제 생태 두 마리 샀는데. 조금만 기다려 내가 해줄게.” “뭐가 이쁘다고 해다 받쳐?” 엄마는 자꾸 톡톡 쏘아댔다. 소파에 벌러덩 드러눕자, 엄마는 못마땅한 시선을 주며 옆에 앉았다. “집구석에서 노는 주제에 뭐하느라, 제 때 끼니도 안 챙겨?” “노는 주제라 그래.” “이제 맞선 자리도 안 들어와 이것아. 어지간히 니가 딱지를 놔야 말이지. 중매쟁이가 두 손 다 들었음 말 다 한 거지.” “며칠 전에 중매 아줌마하고 어머니랑 한 바탕 하셨어.” 엄마의 말이 끝나자 주방에서 올케가 한 몫 거들었다. “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았다. “별 볼일 없는 딸내미가 콧대만 높아서, 중매하는 일만 어렵게 만든다더라. 두 번 다시는 안 하겠대.” “잘 됐네 뭐.” “잘 되긴 뭐가 잘 돼 이것아.” 엄마는 등짝을 갈기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 때문에 그 여편네랑 머리 쥐뜯고 싸웠어 이 나이에. 너 때문에 내가 별 짓을 다 당한다. 하나 밖에 없는 딸년 때문에 숱도 없는 머리 죄다 뽑힐 뻔 했어. 니 엄마 죽는 꼴 보고 싶니? 가라는 시집은 왜 안 가서 나를 애 먹여?” “기력도 좋으셔. 싸울 기력이 어디서 그렇게 나우?” “지 애비를 닮아서 입만 살았나, 어찌 꼴 보기 싫은 건 저렇게 똑같이 닮았나 몰라.” “엄마아.” 나는 다시 꼬리를 내리며 엄마의 팔을 잡고 애교를 떨었다. “진석이랑 결혼했으면 지금쯤 아이 둘은 낳고 잘 살고 있을 텐데.” “엄마.” 그 순간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잊을 만하면 그의 이름을 들먹거리는 엄마가 야속했다. “틀린 말 했냐? 그만한 남자가 어딨다고 차, 차길. 지 꼬라지 생각은 못하고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도 못하지.” 또 시작이다. 나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니가 어딜 가서 진석이만한 애를 만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저 끝없는 집착. 시집도 가기 전에 엄마 때문이라도 내가 아주 늙고 말지. “그러려니 해.” 올케가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웃어 보였다. “내가 이래서 집에 오기 싫다니까. 내가 도울 건?” “없어. 그것보다, 진석이 얘기 들었어?” “언니까지 걔 얘기에요?” “그런 게 아니고, 얼마 전에 오빠한테 들은 얘긴데 이혼했다 그러더라구.” “이혼?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구? “이유는 오빠도 정확하게 모르던데, 여자 쪽에서 이혼을 요구했단 소리가 있어.” “걔는 잘 살 줄 알았더니.” “그러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사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걔가 붙임성은 있어서 싹싹하고 그랬잖아.” 예의 바르고, 붙임성 좋고, 착하다고 해서 사랑이 언제나 제 편은 아닌 것이다. 사랑하는 데에는 선하고 악한 사람이 따로 없다. 악한 사람도 사랑하면서 선해질 수 있는 것이고, 선한 사람 역시 사랑 때문에 악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진석이 일은 다소 놀랍다. 이 년 만에 이별을 통보했던 내게 석 달 동안 끊임없이 생각을 바꾸게 하려고 애쓰던 진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미 식은 사랑은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세현의 말대로 그와 나는 사랑보다도 우정의 궁합이 더 맞아 떨어졌었는 지도 모르겠다. “오늘 날이 그런가. 아침부터 사람 기분을 망치더니.” “왜, 무슨 일 있어?” 나의 말에 올케가 자른 생태를 냄비에 넣으며 물었다. “혜나 때문에 많이 속상해요.” “혜나가 왜?” “혜나 지금 별거 중이에요.” “왜애? 남편이 바람 피웠어?” “별거의 원인 중에는 가장 흔한 게 남자의 외도인가 봐. 어떻게 다들 똑같이 생각을 할까.” “결혼한 여자들은 대개 그런 생각이 먼저 들지. 그런 이유가 아닌 이상 별거까지 가는 경우가 좀 드물거든.” “우연히 극장에서 혜나 남편을 만났어요. 젊은 년이랑 둘이서 손잡고 있는데, 꼭지가 확 돌잖아. 그래서 한 마디 해줬죠. 일부러 망신도 좀 주고 싶었구.” 나의 말에 올케는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남의 사랑 싸움에 홍이야 항이야 했구나.” “완전 점쟁이네 우리 언니.” “남의 사랑에 함부로 그렇게 참견 하는 거 아냐. 특히 남의 가정사는 더 하지.” “죽네 사네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데 그럼 못 본 척 해요?” “죽네 사네 울고불고 난리를 왜 치는데? 미련 없음 그런 짓도 안 해. 찾아와서 그렇게 구구절절 속사정 얘기하는 이유가 뭐겠어? 그 원망만큼 자신의 사랑을 지키고 싶다는 뜻이야.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말도 모르니? 원래 부부란 게 그래.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알 수 없는 게 부부야. 혜나가 어떤 선택을 확고하게 하지 않은 이상은 참견하지 말았어야지. 너에게 해결을 바라고 하는 말이 아냐.” 나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올케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앞집에 사는 부부 알지? 오다가다 한 번쯤 봤잖아. 그 집은 사흘이 멀다 하고 부부싸움을 해대는 거야. 한 번은 어머니가 가셔서 말리신 적도 있었어. 뭘 때려 부수는 지, 쿵쾅쿵쾅 그러면 서도 다음 날이 되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여자가 대문 앞까지 나와서는 남편 배웅을 하는 거야. 그것도 실실 웃어 가며 말야. 부부라는 게 그래. 아가씨도 결혼해 봐. 그러면 저절로 알게 되니까.” “단순한 부부싸움이 아니잖아요. 사랑에 대한 모독이라구. 도덕적이지 못하잖아.” “하여튼 아가씬, 남의 사랑에 오지랖도 넓어.” 나의 말에 올케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고 내 손을 잡으며 식탁 앞에 끌어 당겼다. 그리곤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모든 사랑은 도덕적이지 않아 아가씨. 내 남편의 외도를 그저 부도덕하고, 한낱 한눈파는 것에 비유 하는 것은 그게 사랑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지, 정말로 도덕적이네 아니네를 가르려는 말이 아냐. 태어나, 한 사람만 사랑하는 사람 봤어? 인간이란 원래 그래. 끝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또 사랑 하는 게 인간이야. 물론 인간이라서 그걸 자제하고 사는 것뿐이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것뿐이지.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모든 사람들은 부도덕한 꿈을 꾸고 있다는 걸 금방 알거야.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느냐, 삭히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도덕적이네 아니네 하고 입을 대는 거지. 생각해봐, 아가씬 지금까지 몇 명의 남자를 사랑했어? 지금 와서 그게 다 사랑이 아니었다고 생각해? 각자 나름대로 다 사랑이었어. 다만, 아가씬 미혼이고, 혜나는 기혼이라는 점이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내가 그동안 생각해왔던 사랑에 대한 이론들이 순간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혼이란 것은 그런 사랑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약속이긴 해.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다 믿어? 불완전한 게 인간의 감정이란 거야. 불쑥불쑥 생기는 사랑에 대한 감정을 자신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으니까, 그렇게 되는 셈이지. 물론 다른 사랑에 한 눈 팔았다는 게 잘했다는 건 아냐. 그 본질을 좀 더 알자는 거지. 그러면 상대를 이해하는 데에 조금은 더 가까워질 수 있으니까. 사랑에는 그 어떤 잣대가 없어.” “언니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야 모르지. 장담할 순 없어. 왜냐구? 그래서 사랑이니까. 원래 사랑은 모순을 축으로 한 감정의 원이다라는 말이 있지.” 혜나의 사랑에 마침표를 찍었다는 건, 순전히 나의 오산이었단 말인가. 미련이 없으니 후회도 없을 것이라는 그녀의 말은 그럼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자신을 그렇게 속이고 싶었던 것일까. 친구 앞에서조차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는 게 끔찍했을까.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생태 국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 그제야 무겁던 머리도, 쓰라리던 뱃속도 풀어지는 것 같았다. 거드름을 피우며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고 앉아 있는 내게 못마땅한 목소리 로 말했다. “넌 언제까지 어머니 속을 썩일래?” “오빠까지 합세 하지 마. 엄마만으로도 난 충분히 벅차다구.” “철딱서니하고는. 너, 내년 봄 안으로 무조건 시집 가.” “정말 오빠까지 왜 그래? 그러는 오빠나 효도 하시지. 그렇게 원하고 있을 손주는 왜 빨리 안겨 드리 지 못해?” 짜증 섞인 투로 내뱉자 오빠는 더욱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잇값 좀 하고 살아. 언제까지 어머니가 너 뒤치닥 할 것 같아? 백 년을 살아, 천 년을 살아? 나중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하는 짓 따위 만들지 마. 내 말, 명심해.” 그러고선 방으로 들어가는 오빠의 뒷모습을 노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하더니 사람이 변한 거야, 아님 밖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거야. 죄다 나에게 분풀이를 해대는군. “결혼이 효도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거야, 뭐야?”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막 로션을 바르고 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힐끔 눈치를 보다가 엄마가 누운 옆 자리를 파고들었다. “엄마아.” 나는 오랜만에 엄마를 안았다. 엄마에게서 나는 냄새는 언제나 눈물 나게 좋았다. “저리 가, 징그럽게.” 싫지 않은 듯 완강하게 뿌리치지 않는 엄마에게 더 달라붙으며 말했다. “우리 엄마, 살이 좀 빠진 것 같네? 요즘 다이어트 하는 거야? 우리 엄마부터 시집 보내야겠다. 나보다 자꾸 날씬해지고, 이뻐지면 곤란한데. 내년엔 꼭 훌륭한 사위 보게 해줄게.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리셔. 응?” “말은 청산유수지.” “이번엔 진짜야. 믿어 보라니까.” 더욱 세게 엄마를 끌어안자 그 순간 엄마는 이불을 내 머리끝까지 덮어 씌우고선 꽉 붙들어 매고 한 마디 했다. “이거나 먹어.” 뿌웅. 엄마의 방귀는 그야말로 독가스다. 그날 밤 나는 두 그릇이나 먹은 생태 국을 다시 게워내야 했다. 오 마이 갓트!
노처녀까발리기(5화)사랑의 書에 윤리, 도덕의 章을 넣지 마라.
제 5 화 사랑의 서(書)에 윤리, 도덕의 장(章)을 넣지 마라.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 알고 있는 그 뻔 한 이론으로 하는 것도 아니야. 자신의
사랑은 로맨리스트, 남의 사랑은 리얼리스트. 당신, 아냐?”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
불판 위에서 입이 쩍쩍 벌어지는 조개를 보면서 나는 소주잔을 비웠다.
“쉽게 생각해. 당신이 차마 하지 못했던 건, 남도 하지 못하는 것이고, 당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또한 남도 그랬어. 말로는 모든 사랑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당신은 자신의 사랑과 타인의
사랑을 차별하고 있잖아.”
“내가 차별하고 있다구?”
“당신은 그걸 느끼지 못하나봐?”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인정하기가 싫다. 아니, 인정하기가 부끄러운
것일까. 비워진 잔에 술을 채우다 나는 말을 돌렸다,
“저번에 마트에서 같이 있던 여자는 누구야?”
“친구.”
“친구? 굉장히 어려 보이던데. 난, 첨에 마누란지 알았지.”
“나이에 비해서 좀 어려 보이지. 정작 두 살 차인데.”
“친구랑 같이 장도 보고 그러니?”
“옛 애인이야.”
“어?”
“왜?”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뭐가?”
“어떻게 헤어진 애인과 친구가 될 수 있냐구.”
“왜 안 돼?”
“아니, 그렇잖아. 연애하면서 뭐, 뽀뽀만 했을 것도 아니구, 잠도 자고 그랬을 텐데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냔 말이지.”
“내가 그녀를 아직도 사랑했다면 친구가 될 수 없었겠지. 하지만, 내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친구가 될 수 있는 거야. 그녀 역시 마찬가지고. 어느 한 쪽이든.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면
친구가 되진 못하지.”
“이해가 안 돼.”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사랑이 아닌 게 되나. 어떻게 사랑이 우정을 바뀔 수 있을까. 우정은 사랑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사랑에서 우정은 곤란하지 않은가.
“또 자기가 생각하는 이론 들먹이면서 해석하지? 세상의 모든 사랑을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알량한
이론에 빗대지마. 우정이 사랑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사랑은 우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야? 굳이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그 사람까지 껄끄럽게 볼 필요는 없는 거야. 우리는
사랑의 궁합보다 우정의 궁합이 더 맞아 떨어졌을 뿐이야.”
“모든 사랑에는 너무 많은 변명들이 있어. 지겨워.”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가방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자 액정엔 지란의 번호가 떴다.
“응.”
“어디야?”
“밖이지.”
“아직 그 남자랑 같이 있는 거야?”
“호기심이 또 발동하셔?”
“혜나도 와 있는데, 우리도 같이 합석 하면 안 되니?”
“왜 끼실려구?”
“심심해서. 같이 좀 놀자.”
“둘이서 노셔. 나도 현우 때문에, 너한테 왕따 많이 당했다.”
그리고선 이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짝 잃은 외기러기처럼 남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는 서른 두 살의 비애.
“선 자주 봐?”
잔을 비우며 그가 덤덤하게 물었다.
“여자 나이 서른이 넘으면 피할 수 없는 일이지.”
“노처녀가 자기 나이를 사실대로 말하면 그 뒤의 말은 무조건 믿어도 좋다던데. 내가 보기엔 서영
씨는 원래 솔직한 것 같군.”
“내 나이가 부끄러운 건 아니니까.”
서른이 넘으면 여자들은 대개 자신의 나이에 예민해진다. 특히 짝도 없이 솔로일 경우엔 더더욱
그러하다. 나이란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거짓이다. 숫자에 불과하다면서 남자들은 여자의 나이를
궁금해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린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서른이란 나이가
부끄럽지 않다.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뭐 있을까. 나이 먹는데 보태준 거라도 있나? 젠장.
“그리고, 댁이 몰라서 하는 소리지 나두 속이는 거 많어. 너무 솔직하다는 거, 그게 상대에게 더 큰
부담을 주기도 하니까. 경험이야.”
“솔직한 게 먹히면 그게 인연이지. 여자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 자신의 비밀을 연인과
함께 나누면 꼭 탈이 난다고 생각하거든. 하지만 진짜 사랑은, 그 비밀을 나눠준 것에 대해 고마워
한다는 거야. 남자들을 싸잡아 매도하는 게 영 맘에 안 들어.”
“그건 댁이 몰라서 하는 소리지. 자기 여자의 과거를 알게 되는 순간 남자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건,
오래 전부터야. 지금도 그런 남자들 많구.”
“그런 남자들만 만나서 그런 거지. 그게 왜 남자, 여자로 구별 되는 거야? 그건 그냥, 그 사람이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뿐이라구.”
대체 나는 매번 왜 그에게서 패배감을 느끼는 걸까. 아무래도 저 자식, 말발이 너무 세. 괜히 억울한
기분까지 든다니까. 너 잘났다 자식아.
세 병째 술이 바닥이 나자 슬슬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의식을 놓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제 볼을 꼬집고,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그것으로 내 의식은 끊어져
버렸다.
눈을 뜨자 묵직한 머리가 흔들렸다. 시계는 이미 오전 아홉시를 넘기고 있었다. 조깅이고 뭐고, 다
틀렸군. 갈증을 느끼며 자리에서 어렵게 일어나 무거운 몸을 이끌고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키자 갈증은 다소 해결이 되었지만 쓰린 속과 무거운 머리는 어찌
하랴.
“그런데 내가 어떻게 집에 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술집에서 나오는 시점부터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앉아서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렸던 것 같은데, 도통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술이 죄지, 사람이 무슨 죄냐.”
쓰린 배를 움켜쥐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자 휴대폰이 때마침 울렸다. 액정화면에 뜬 낯선 번호를
보면 폴더를 열었다.
“잘 잤어?”
오 마이 갓트! 나는 순간 너무 놀라 폴더를 다시 확 닫아 버렸다. 술에 취해 그에게 전화번호까지
알려준 모양이다. 이 서영, 너 정말 맘에 안 든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순간 나는 갈등을 하고
있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대처를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받지 않으려니 필름이
끊어진 걸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다시 폴더를 열었다.
“왜 전화를 끊어?”
“끊은 게 아니라, 놓쳤어.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에티켓이지. 같이 술동무를 했던 사인데, 담날 전화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술동무를 했던 사이? 말이 좀 이상하다.”
“술동무만 했을려구.”
“뭐…….뭐?”
뭐야 이 자식. 그냥 날 떠보는 거야? 아님,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당신, 필름 끊겼지?”
“끊…….끊기긴 누…….누가 끊겨?”
“정말 다 기억하고 있단 말야?”
“아침부터 쓸데없는 얘기 하려면 끊어.”
“그럼 맨 정신에 그랬단 말야? 어떻게 감당하시려구?”
넘어가면 안 된다. 분명 떠보는 걸 거야. 나는 애써 진정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내 걱정 말고, 이만 끊지 그래. 나 지금 전화 받을 정신 아니거든? 근무 시간 같은데, 전화질 그만
하시고 쭈욱 일이나 하셔.”
“이 서영, 너 하나도 안 변했다?”
“뭐?”
뭐야, 이런 말투. 예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나?
“이번 주는 내가 좀 바빠서 시간을 낼 수가 없고, 다음 주쯤에 연락하지. 들어야 될 얘기도 많을
거고, 해줘야 할 얘기도 많을 테니까.”
“너, 뭐야?”
그 순간에 전화는 끊어졌다. 순간 나는 혼란스러웠다. 대체 그의 말은 다 무엇이며, 기분 나쁜
뉘앙스까지 풍기는 말투가 뭘 의미하는 걸까. 나는 아무리 떠올려봐도 그를 예전부터 알고 지낸
기억이 없다.
“이거, 함정 아냐?”
내가 떠올려야 할 기억이 대체 몇 개야? 머리가 온통 뒤죽박죽이다.
“못 살아 내가. 아악, 이 서영 너, 왜 이러니.”
나는 냅다 휴대폰을 침대 위로 던져 버렸다. 간밤엔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을까.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기억 하나 잡을 수 없다.
“아이고, 머리야.”
나는 머리를 감싸 쥐며 다시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때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을 들고 배터리를 빼려는 순간, 혜나의 번호가 뜬 것을 보며 폴더를 열었다.
“응.”
“너, 어제 우리 그이 만났니?”
대뜸 묻는 혜나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순간 나는 뭔가 잘못됐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
“내가 시키지도 않은 말을 니가 왜 하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이한테 협박을 해도 내가 하고,
용서를 해도 내가 해. 아무리 친구 사이라고 해도 낄 때, 안 낄 때가 있어. 너, 그런 것도 분간 못할
나이니? 내 남편이야. 나에게 죄를 지은 거지, 너에게 죄 지은 거 없어. 왜, 니가 죄인 취급하듯
그러니? 니가 뭘 알아서.”
“혜나야?”
나는 당황스러워 얼결에 혜나의 말을 끊었다.
“살다보면 한 눈 팔수도 있고, 사랑에 대해서 헷갈리기도 해. 무슨 잣대로 니가 진실이네 거짓이네
하며 우습게 굴어? 니가 해결사야? 니가 뭘 알아 기집애야.”
그리고선 끊어진 전화. 나는 순간 뒤통수를 세게, 그것도 백 대씩이나 맞은 기분이었다.
“뭐야 아침부터?”
조금 전에 받은 혜나의 전화가 믿어지지 않아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무겁던 머리가 퍽하고
깨지는 듯 한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멍하게 십분쯤 앉아 있었나 보다. 시간이 지나자 차츰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며,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일까.
나는 다시 잠들기를 포기하고 화가 난 채 욕실로 향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선 일단 씻어야 했다.
화실로 가는 걸음이 무거웠다. 오늘따라 바람은 더욱 거칠었고, 생수로만 배를 채운 탓인지 몸은
거친 바람에 의해 자꾸만 떨렸다. 아무래도 몸살이 오려나 보았다. 혜나의 일을 떠올리자 서운함이
먼저 밀려 왔다. 혜나를 이해하자 하면서도 나는 억울한 기분이 들어 자꾸만 화가 치밀어 올랐다.
기껏 생각해서 한 일이 엄청난 욕을 먹어야 하는 것일까.
화실에 들어서자 미스 오라고 불리는 여자만 있었다. 목례를 하자 그녀는 넉살좋은 그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쉬는 날인데, 나오셨네.”
“쉬는 날요?”
나는 그제야 오늘이 화실의 휴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화실과는 달리 두 째주 월요일이 휴일
이라는 것을 며칠 전에 들었음에도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언니는 왜 나오셨어요?”
“별로 할 일도 없고 해서요.”
“네에.”
온 길을 다시 돌아가려니 힘이 빠졌다. 나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돌아섰다. 이왕 나온 김에 나는 발길
을 돌려 서초동으로 향했다. 갑자기 엄마가 해주는 시원한 생태 국이 그리웠다. 전화도 없이 찾아
온 나를 엄마는 그닥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현관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래도 딸인데, 좀 반가워 해주면 안 되우?”
“그러게, 영 반갑지가 않네.”
엄마의 말에 나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거실로 들어섰다.
“왔어?”
올케가 욕실에서 나오며 엄마 대신 반갑게 맞아 주었다. 엄마보다 낫다. 불쌍한 내 신세.
“생태 국이 그리워서 발길을 돌렸지.”
“안 그래도 어제 생태 두 마리 샀는데. 조금만 기다려 내가 해줄게.”
“뭐가 이쁘다고 해다 받쳐?”
엄마는 자꾸 톡톡 쏘아댔다. 소파에 벌러덩 드러눕자, 엄마는 못마땅한 시선을 주며 옆에 앉았다.
“집구석에서 노는 주제에 뭐하느라, 제 때 끼니도 안 챙겨?”
“노는 주제라 그래.”
“이제 맞선 자리도 안 들어와 이것아. 어지간히 니가 딱지를 놔야 말이지. 중매쟁이가 두 손 다
들었음 말 다 한 거지.”
“며칠 전에 중매 아줌마하고 어머니랑 한 바탕 하셨어.”
엄마의 말이 끝나자 주방에서 올케가 한 몫 거들었다.
“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았다.
“별 볼일 없는 딸내미가 콧대만 높아서, 중매하는 일만 어렵게 만든다더라. 두 번 다시는 안 하겠대.”
“잘 됐네 뭐.”
“잘 되긴 뭐가 잘 돼 이것아.”
엄마는 등짝을 갈기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 때문에 그 여편네랑 머리 쥐뜯고 싸웠어 이 나이에. 너 때문에 내가 별 짓을 다 당한다.
하나 밖에 없는 딸년 때문에 숱도 없는 머리 죄다 뽑힐 뻔 했어. 니 엄마 죽는 꼴 보고 싶니? 가라는
시집은 왜 안 가서 나를 애 먹여?”
“기력도 좋으셔. 싸울 기력이 어디서 그렇게 나우?”
“지 애비를 닮아서 입만 살았나, 어찌 꼴 보기 싫은 건 저렇게 똑같이 닮았나 몰라.”
“엄마아.”
나는 다시 꼬리를 내리며 엄마의 팔을 잡고 애교를 떨었다.
“진석이랑 결혼했으면 지금쯤 아이 둘은 낳고 잘 살고 있을 텐데.”
“엄마.”
그 순간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잊을 만하면 그의 이름을 들먹거리는 엄마가 야속했다.
“틀린 말 했냐? 그만한 남자가 어딨다고 차, 차길. 지 꼬라지 생각은 못하고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도
못하지.”
또 시작이다. 나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니가 어딜 가서 진석이만한 애를 만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저 끝없는 집착. 시집도 가기 전에 엄마 때문이라도 내가 아주 늙고 말지.
“그러려니 해.”
올케가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웃어 보였다.
“내가 이래서 집에 오기 싫다니까. 내가 도울 건?”
“없어. 그것보다, 진석이 얘기 들었어?”
“언니까지 걔 얘기에요?”
“그런 게 아니고, 얼마 전에 오빠한테 들은 얘긴데 이혼했다 그러더라구.”
“이혼?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구?
“이유는 오빠도 정확하게 모르던데, 여자 쪽에서 이혼을 요구했단 소리가 있어.”
“걔는 잘 살 줄 알았더니.”
“그러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사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걔가 붙임성은 있어서 싹싹하고
그랬잖아.”
예의 바르고, 붙임성 좋고, 착하다고 해서 사랑이 언제나 제 편은 아닌 것이다. 사랑하는 데에는
선하고 악한 사람이 따로 없다. 악한 사람도 사랑하면서 선해질 수 있는 것이고, 선한 사람 역시
사랑 때문에 악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진석이 일은 다소 놀랍다. 이 년 만에 이별을 통보했던
내게 석 달 동안 끊임없이 생각을 바꾸게 하려고 애쓰던 진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미 식은 사랑은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세현의 말대로 그와 나는 사랑보다도 우정의 궁합이 더 맞아 떨어졌었는
지도 모르겠다.
“오늘 날이 그런가. 아침부터 사람 기분을 망치더니.”
“왜, 무슨 일 있어?”
나의 말에 올케가 자른 생태를 냄비에 넣으며 물었다.
“혜나 때문에 많이 속상해요.”
“혜나가 왜?”
“혜나 지금 별거 중이에요.”
“왜애? 남편이 바람 피웠어?”
“별거의 원인 중에는 가장 흔한 게 남자의 외도인가 봐. 어떻게 다들 똑같이 생각을 할까.”
“결혼한 여자들은 대개 그런 생각이 먼저 들지. 그런 이유가 아닌 이상 별거까지 가는 경우가 좀
드물거든.”
“우연히 극장에서 혜나 남편을 만났어요. 젊은 년이랑 둘이서 손잡고 있는데, 꼭지가 확 돌잖아.
그래서 한 마디 해줬죠. 일부러 망신도 좀 주고 싶었구.”
나의 말에 올케는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남의 사랑 싸움에 홍이야 항이야 했구나.”
“완전 점쟁이네 우리 언니.”
“남의 사랑에 함부로 그렇게 참견 하는 거 아냐. 특히 남의 가정사는 더 하지.”
“죽네 사네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데 그럼 못 본 척 해요?”
“죽네 사네 울고불고 난리를 왜 치는데? 미련 없음 그런 짓도 안 해. 찾아와서 그렇게 구구절절
속사정 얘기하는 이유가 뭐겠어? 그 원망만큼 자신의 사랑을 지키고 싶다는 뜻이야.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말도 모르니? 원래 부부란 게 그래.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알 수 없는 게 부부야.
혜나가 어떤 선택을 확고하게 하지 않은 이상은 참견하지 말았어야지. 너에게 해결을 바라고
하는 말이 아냐.”
나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올케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앞집에 사는 부부 알지? 오다가다 한 번쯤 봤잖아. 그 집은 사흘이 멀다 하고 부부싸움을
해대는 거야. 한 번은 어머니가 가셔서 말리신 적도 있었어. 뭘 때려 부수는 지, 쿵쾅쿵쾅 그러면
서도 다음 날이 되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여자가 대문 앞까지 나와서는 남편 배웅을 하는 거야.
그것도 실실 웃어 가며 말야. 부부라는 게 그래. 아가씨도 결혼해 봐. 그러면 저절로 알게 되니까.”
“단순한 부부싸움이 아니잖아요. 사랑에 대한 모독이라구. 도덕적이지 못하잖아.”
“하여튼 아가씬, 남의 사랑에 오지랖도 넓어.”
나의 말에 올케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고 내 손을 잡으며 식탁 앞에 끌어
당겼다. 그리곤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모든 사랑은 도덕적이지 않아 아가씨. 내 남편의 외도를 그저 부도덕하고, 한낱 한눈파는 것에 비유
하는 것은 그게 사랑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지, 정말로 도덕적이네 아니네를 가르려는 말이 아냐.
태어나, 한 사람만 사랑하는 사람 봤어? 인간이란 원래 그래. 끝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또 사랑
하는 게 인간이야. 물론 인간이라서 그걸 자제하고 사는 것뿐이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것뿐이지.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모든 사람들은 부도덕한 꿈을 꾸고 있다는 걸 금방 알거야.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느냐, 삭히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도덕적이네 아니네 하고 입을 대는 거지.
생각해봐, 아가씬 지금까지 몇 명의 남자를 사랑했어? 지금 와서 그게 다 사랑이 아니었다고 생각해? 각자 나름대로 다 사랑이었어. 다만, 아가씬 미혼이고, 혜나는 기혼이라는 점이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내가 그동안 생각해왔던 사랑에 대한 이론들이
순간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혼이란 것은 그런 사랑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약속이긴 해.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다
믿어? 불완전한 게 인간의 감정이란 거야. 불쑥불쑥 생기는 사랑에 대한 감정을 자신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으니까, 그렇게 되는 셈이지. 물론 다른 사랑에 한 눈 팔았다는 게 잘했다는 건 아냐.
그 본질을 좀 더 알자는 거지. 그러면 상대를 이해하는 데에 조금은 더 가까워질 수 있으니까.
사랑에는 그 어떤 잣대가 없어.”
“언니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야 모르지. 장담할 순 없어. 왜냐구? 그래서 사랑이니까. 원래 사랑은 모순을 축으로 한 감정의
원이다라는 말이 있지.”
혜나의 사랑에 마침표를 찍었다는 건, 순전히 나의 오산이었단 말인가. 미련이 없으니 후회도 없을
것이라는 그녀의 말은 그럼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자신을 그렇게 속이고 싶었던 것일까.
친구 앞에서조차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는 게 끔찍했을까.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생태 국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 그제야 무겁던 머리도, 쓰라리던 뱃속도
풀어지는 것 같았다. 거드름을 피우며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고 앉아 있는 내게 못마땅한 목소리
로 말했다.
“넌 언제까지 어머니 속을 썩일래?”
“오빠까지 합세 하지 마. 엄마만으로도 난 충분히 벅차다구.”
“철딱서니하고는. 너, 내년 봄 안으로 무조건 시집 가.”
“정말 오빠까지 왜 그래? 그러는 오빠나 효도 하시지. 그렇게 원하고 있을 손주는 왜 빨리 안겨 드리
지 못해?”
짜증 섞인 투로 내뱉자 오빠는 더욱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잇값 좀 하고 살아. 언제까지 어머니가 너 뒤치닥 할 것 같아? 백 년을 살아, 천 년을 살아?
나중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하는 짓 따위 만들지 마. 내 말, 명심해.”
그러고선 방으로 들어가는 오빠의 뒷모습을 노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하더니 사람이 변한 거야, 아님 밖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거야. 죄다 나에게 분풀이를 해대는군.
“결혼이 효도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거야, 뭐야?”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막 로션을 바르고 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힐끔 눈치를 보다가 엄마가 누운 옆 자리를 파고들었다.
“엄마아.”
나는 오랜만에 엄마를 안았다. 엄마에게서 나는 냄새는 언제나 눈물 나게 좋았다.
“저리 가, 징그럽게.”
싫지 않은 듯 완강하게 뿌리치지 않는 엄마에게 더 달라붙으며 말했다.
“우리 엄마, 살이 좀 빠진 것 같네? 요즘 다이어트 하는 거야? 우리 엄마부터 시집 보내야겠다.
나보다 자꾸 날씬해지고, 이뻐지면 곤란한데. 내년엔 꼭 훌륭한 사위 보게 해줄게.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리셔. 응?”
“말은 청산유수지.”
“이번엔 진짜야. 믿어 보라니까.”
더욱 세게 엄마를 끌어안자 그 순간 엄마는 이불을 내 머리끝까지 덮어 씌우고선 꽉 붙들어 매고 한
마디 했다.
“이거나 먹어.”
뿌웅. 엄마의 방귀는 그야말로 독가스다. 그날 밤 나는 두 그릇이나 먹은 생태 국을 다시 게워내야
했다. 오 마이 갓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