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도 산다오(2)

solof light2003.04.01
조회871

     밝은 햇살이 이제는 쉬려고 서산을 넘을 때,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고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에 왠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낄 때,

흰눈이 소리도 없이 장독대 위에 소복소복 쌓일 때,

까닭 모를 회의에 삶의 의미를 찾으려 가진 애를 쓸 때,

그러다가 눈가에 고이는 눈물을 느끼곤 갑자기 외로움에 가슴을 떨 때,

뭔지도 확실치 않건만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내 가슴의

쾡한 구멍이 발견되어

그리로 불어오는 북극의 차가운 바람에

내 심장이 얼어버릴 것만 같다고 느껴질 때,

누군가 나를 오해하여 내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 벌어져

북바치는 설음을 억지로 참으려고 진땀을 흘리며 눈을 꼬옥 감고 싶을 때,

그리고 정성들여 키우던 화초가 뾰족하게 새 싹을 티우더니

어느 날인가 예쁜 꽃봉오리를 내어 밀어 나를 놀라게 할 때.

믿고 있던 내 자식이 너무도 커다란 실망을 내게 안겨 줄 때,


오래도록 입어서 무릎이 튀어나온 바지에

뒷굽이 접힌 운동화를 질질 끌고서도 그냥 찾아 가

향기 짙은 차 한잔을 앞에 놓고 속내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우리 집 옆에 살았으면 좋겠다.


악의 없는 농담을 즐기거나 다소 수다스러워도 좋고

조용히 앉아서 나와 눈만 맞춰도 좋다.

속내를 들어내어 내 생각을 말해도 조용히 들어주고

그때 한 얘기가 무엇이든

다시 돌아서 남의 입으로 내게 들리게 하지는 않을 친구라면

여자이면 어떻고 남자이면 또 그게 무슨 문제랴.

나보다 나이가 좀 많은들 어떻고 어리던가 동갑내기이면 어떤가?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한다.

다만 나의 어둡거나 가슴 아픈 속내를 보여 주어도

조용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며 같이 아파하다가

내 격정이 갈아 안고 나서야

따뜻한 충고를 아끼지 않을 친구이면 된다.


아내나 남편이나 혹은 자식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픔에

잠을 이룰 수 없을 때가 내게도 있고

그런 아픔은 누군가와 나눠야

비로서 조여오던 내 숨통이 조금은 틔여서

겨우 생존을 위한 한 모금의 공기를 마실 수 있을 게다.

그럴 때 내 얘기에 진정 귀를 기울이면서

나의 아픔이 진정한 제 아픔인양

같이 아파하고,

같이 화도 내고,

같이 열을 올리면서도

가슴속 깊은 곳에 그 아픔을 잠재울 줄 아는 친구.


나 힘들어 할 때면

어떻게 하여야 그 짐을 조금이나마 나눠 질 수 있을지,

무엇이 위로가 될 수 있을 지를 고민하고

언제나 기꺼이 힘이 되어 주려는 친구.

그리고 무거워진 내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어도 짜증내지 않고,

조용하고 따뜻하게 나를 안아줄 줄 아는 친구.


그 친구는 마음이 깊어서 소리내어 흘러가지 않으며

진실이라 하여도 비수 같은 말로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 할 것이고

때로는 우둔한 듯 뻔한 사실에도 애써 눈을 감지만

다정한 눈길로 나의 갈 길을 조용히 일깨워 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어려움을 피하려고

비록 진실이라 하여도 타인을 곤란에 처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며,

구차한 변명을 위하여 거짓으로 꾸미지도 않을 것이며,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고 있고

옳다고 판단한 일에서 이해관계로 물러서지도 않을 것이다.

비록 그리하여 많은 손해를 보거나

손가락질을 받거나 혹여는 그가 서 있는 자리조차 잃을 지라도.


그런 친구가 많을 필요는 없다.

단 하나의 친구라도 내가 이 세상의 먼지를 훌훌 털어 버리고

애증의 강을 건너 깊은 잠에 빠져야만 할 때

내가 즐겨하고 좋아하던 모습으로 내 마지막 길을 배웅해 준다면

그가 턱시도나 웨딩 드레스 차림이라 하여도 나는 기쁠 것이며,

한줄기 있는 듯 마는 듯 한 미소에도

나는 가벼이 한줌의 먼지가 되리니

그리하여 그 친구도 나를 찾아 올 때는

내 제일 예쁜 모습으로 너를 맞으리.


때로 나는 턱도 아닌 일에 가슴을 태우고 속상해 하기도 한다.

나는 성인군자도 아니고 내 친구도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

나는 평범한 중년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멋진 구두와 일류의 복색이나 번쩍이는 장신구와는 다소 거리가 있듯이

그 친구도 화려하거나 아주 세련된 신사이거나 숙녀이지 않아도 된다.

재력이 풍족하거나 아주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우리의 사랑에 장애가 될 것이며,

梅蘭菊竹의 고상함과 절개도 필요치 않다.

그러나 그 친구에게서는 땀내가 짙게 밴 생활 속에서도

梅蘭菊竹의 옅은 향기가 언뜻언뜻 피어나 때때로 나를 놀라게 하며,

중년의 진중함으로 절제를 알고,

수수하지만 멋을 알며,

화려하지는 않아도 깨끗하고 중후하여

심포니의 울려 퍼짐 같이 그 끝이 어디인지를 알기 힘들지만

때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은 부려도 지나치게 가볍지는 않아

그 변덕과 신경질이 애교로 통할 수 있는 정도이면서도

보통은 소처럼 우직하게도 제 갈 길을 충실히 가면서

내게 지켜만 봐 달라는 친구이다.


가끔씩 어린애처럼 토라지기도 할 것이다.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리기도 할 것이고

때로는 눈물을 보이기도 하지만 나약하지는 않으며,

늦은 밤이거나 이른 새벽이라도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하여 단잠을 깨울 때가 있기도 하고,

아무런 대가도 없이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종일토록 땀을 흘리게도 할 것이며,

한겨울 칼바람 속에서 한나절을 서성이게도 하고,

또 냉면을 후루룩- 소리내며 먹거나

소주 한 잔을 마시고 나서 커- 하고 트림을 하기도 하며

어떨 땐 겉옷에 떨어진 머리칼이 붙어 있기도 하여

그가 모르게 때어주기도 하거나 핀잔도 주지만

그럴 땐 멋 적은 미소를 보이고

한 송이 빨간 장미를 내밀어 나를 기쁘게 하기도 하며,

생각에 잠겨서 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나타나 내 어깨를 치거나

다정하게 팔장을 껴서 나를 놀라게 하기도 하고

내가 뭔가에 잔뜩 화가 나 있을 때는 같이 화를 내 주며

내가 힘들어 할 때는 격려의 말로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난데없이 길가의 포장마차로 손길을 이끌기도 하며

몇 잔의 술에 취해서 내게 업히기도 하고

붉어진 얼굴로 아는 이들을 만날까봐 내 등뒤로 숨기도 하지만

전철역에서도 아무런 스스러움 없이

차가워진 내 손을 제 체온으로 녹여 줄 것이다.


난 그게 좋다.

너무너무 사람 내음이 진하게 나서 난 정말로 좋다.

그럴 수 있는 친구이면 정말로 좋겠다.

그것은

제가 그리할 수 있는 줄을 내가 이미 알고 있고,

나 또한 그리할 줄을 제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게서 그런 내음이 나고

내게서 그런 내음이 나기 때문이다.


나는 때때로 친구보다 좋은 것을 차지하고 싶어하기도 하고

많은 일에 인내로 베풀기만 하지도 못할 것이다.

특출한 재간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道 딱는 스님이나

수녀, 신부, 목사처럼 살 재간도 없는 속물로서

성인군자의 길은

애시당초 내게는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만큼은 떨어져 있다.

다만 정직하게 살려고 애는 쓰고,

뉘게도 피해를 주지는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지만

노상 뒤늦은 후회에 괴로워한다.

그리고 어떤 때 나는

친구보다 바람과 물과 산과 나무를 더 좋아하기도 하여

친구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할 것이며,

어쩌다 악의는 없는 거짓을 말하기도 할 것이고

주제넘은 참견으로 친구를 괴롭힐지도 모르며,

취기에 별다른 의미 없이 던진 내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친구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지도 모른다.

그 친구가 이성이라면 내 품에 안고 싶어 할 지도 모르며,

때때로 친구가 나의 독점이기를 바라기도 할 것일 뿐만 아니라

내가 친구보다 잘나 보이고, 힘있어 보이며,

아이들이 딱지나 구슬을 더 많이 가진 것처럼

뭔가 뻐기고 싶어도 하겠지만

그러나,

금새 그런 마음들을 지워버릴 줄도 알 것이며,

내 잘못으로 친구가 상처를 받았다면

눈물로 뉘우치면서 진정으로 친구에게 사과하고

발아래 엎드려 친구의 용서를 빌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사랑은

다소는 유치하고 조금은 불장난 같을 지도 모르지만

내가 그리하는 것은

사랑이,

우정이,

애정이 그 무엇보다 귀중함을 잘 알기 때문이며

친구 또한 나와 같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화초에 물을 주다가도 문득 그를 생각할 것이며,

정원의 잡초를 뽑다가,

푸른 하늘을 흐르는 흰 구름을 보다가,

안개속을 걸으면서도,

또는 걸레로 방안을 구석구석 훔치다가도 문득 그가 생각날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샌가 내 곁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라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될 것이며,

내가 알던 모르던

내게서 숨쉬고 있는 그를 나만이 느끼게 될 것이다.


제 아내나 남편,

그리고 제 자식이나 형제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과연 그것만으로 인생이 행복해진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다가올 날들이 지나온 날들보다는 짧을 것 같기에

내 친구와도

그런 사랑을,

그런 괴로움을,

그리고 그런 아픔들을

애정과 같은 우정, 우정과 같은 애정으로 나누면서

조금은 더 행복해지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과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나

목숨을 거는 만용은 삼가할 줄을 알며,

실타래처럼 복잡해 보여도 처음과 끝이 확실하고

얽힘이 없을 것이며,

그 흐름은 깊은 강물 같고 무겁기가 태산과 같아서

요란한 소리도 화려한 휘날림도 없을 것이지만

이 세상에 그 무엇도 쉽게 그치게 하거나

이리 저리로 휘둘려 지지도 않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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