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에 내리던 눈 - 회상 1. 도피(2)

정군2006.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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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1. 도피(2)

 

"이런……!"


정말 어정쩡하게 위기상황에 맞닥트린 나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녀석이 쥐고 있던 칼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물론 나만큼은 아니었겠지만 적잖이 당황했는지 녀석은 손을 흔들어 칼 잡은 손을 베어낼 생각도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그 녀석도 사람한테 칼질을 한건 처음이었을테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 잠시를 놓치지 않고-만약 놓쳤다면 그때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남은 오른손으로 그 녀석의 코와 눈 주변을 정신 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손에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치자 녀석은 내 앞에 스르르 주저 앉아버렸다.

 칼을 잡았던 손을, 덜덜 떨리던 왼손을 내 눈앞에 펴고 생각보다 큰 상처에 놀라고 있을 그 잠시, 그 녀석은 감겨 있던 눈을 뜰 생각도 안하고 그냥 거꾸로 바꿔 쥔 칼을 높게 들어올렸다가 아무렇게나 아래로 내리그었다. 살다보면 장님이 문고리를 잡는 날이 있다. 엉거주춤하게 서있던 내 무릎에, 눈을 뜨지도 못하고 휘두른 칼이 정확하게 들어가는 광경이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눈에 박혔다.

 칼이 내 몸에 박힌 직후 일어난 일들은 이제와서 어떻게든 기억을 해 보려 해도 소용이 없다. 기억이 징검다리를 탔던 그 시간, 나는 도대체 무슨 짓을 했었던 것일까. 회장형이 그래왔던 것처럼, 그때까지의 나는 쓰러진 녀석에게 화풀이를 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예외적인 일을 저지른 것이 분명했다.

 비로소 정신을 차렸을 때, 녀석은 골목길 모퉁이 전봇대에 머리를 괴고 바닥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혔던 걸까. 불길한 예감에 절뚝거리며 다가가 코에 손을 대 봤지만 숨을 쉬지 않았다. 경악한 나 역시 그 옆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머지 두 놈은 어디로 도망쳤는지 보이지 않았고, 나는 칼을 맞은 통증과 심한 출혈 때문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일으켜 방향도 잡지 못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골목길을 벗어나자마자 이내 거꾸러져 길바닥에 핏자국을 그리던 내 눈에 회장형의 오토바이가 나타났다.  웬일인지 형은 목숨처럼 아끼던 애마를 그냥 놔두고 걸어서 집에 돌아간 모양이었다. 얼마 전 바이크를 마련했을 때, 형은 내게 예비열쇠를 주면서 언제든 내 것처럼 사용하라고 한 적이 있었고, 정말 타 본 적은 없었지만 나는 그 열쇠를 목걸이처럼 걸고 다니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준 동아줄을 잡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리 튼튼한 줄이 아니었다는 것을, 바로 잠시 후에 확인하게 됐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늦은 밤이 되면 환각이 보였다. 내 주위에는 죽은 사람들이 서성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그 환영들은 팔다리가 없는 것도 있었고 심지어 머리가 없는 것들까지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딱 한번 겁에 질려 아버지께 그 일을 말한 적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굳은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나중에 그 이유를 알려준다고만 했었다.

 어두운 밤에 오토바이를 타고 속도를 낸다는 것은 평소 같았다면 절대 하지 못할 일이었지만 그때 나는 도망치고 있는 살인범이었다.  시동을 어떻게 걸었지만 마음이 급한데도, 정말 무서웠는데도 도저히 속도를 낼 수 없었다. 바로 앞의 바닥을 바라보며 저속 운전을 해야 했다. 집이 가까워졌을 때, 바이크는 흘러내린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집이 눈앞에 나타났다. 내가 속도를 줄였을 때, 돌연 누군가가 힘껏 운전대를 낚아채는 것처럼 핸들이 멋대로 홱 돌았다. 집에 도착했다고 마음을 놓고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나는 집 앞 도로에 나뒹굴고 말았다.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대관절 무슨 일인지 주변을 살피자 멀찍이 뒹굴던 앞바퀴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형의 바이크에 손을 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더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속도를 즐기던 형이 그걸 타고 나갔다면 형은 거의 확실히 죽었을 것이었다. 늦은 밤이 아니라 속도를 낼 수 있었던 낮이었다면 나 역시 위험했을 테고. 평소에는 정말 무섭고 싫었던, 밤이 환영들이 결과적으로는 내 목숨을 구한 셈이었다.

 기막혀 할 시간이 없었다. 아버지가 출장 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집으로 뛰어 들어간 나는 낮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힘없이 거실에 주저앉아 버렸다.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일단 무릎의 상처를 싸매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공책을 찢어 편지를 썼다.


 급하게 몸을 피해야 돼요, 당분간 찾지 마세요.

 어떻게 되든 꼭 연락할게요.


 오토바이가 박살이 난 이상, 움직이려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새벽 열차를 타려면 역으로 가야했다. 시간은 충분했지만 쫓기는 기분이었던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다친 다리로 뛰다시피 해서 역 근처에 도착했다. 역으로 들어가지 않고 철로를 따라 걸어 열차를 타는 곳까지 들어갈 작정이었다. 표도 끊지 않고 작은 벤치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나는 그제야 피곤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잠을 자 보려고 몸을 웅크렸지만 몸이 따뜻해지지 않아 잠들 수 없었다.

 정말로, 길고 길었던 밤.  그 아득한 바다에 혼자 남겨졌다. 나는 고립된 섬이었다.


회상 1. 도피 - 끝

 

<계속>

 

 글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관생도-현재 휴학중- 입니다. 짤막한 댓글 평에도 감사할 줄 아는 착하고 편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