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부 S#1. 대산그룹 앞/차 안 비틀거리며 차에 오르는 영희. 눈을 감고 기대어 앉는다. (E)단희 그 운명, 내가 바꿀 거야. 똑바로 봐 둬. 그 운명이 어떻게 바뀌는지. 눈을 뜨고 고개를 드는 영희.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그러다 입술을 깨물며 날카로워지는 표정. 영희 차, 돌려요. 기사 네. S#2. 한식당 점심 식사를 막 끝낸 숙자와 만수. 만수 (휴지를 꺼내 숙자의 입을 닦아주려는) 거, 칠칠하게. 숙자 (뒤로 물러나고) 뭐, 뭐해요? 만수 이리 와 봐요. 숙자 (만수 손에 있는 휴지 뺏어) 내가 닦아요. (거울 꺼내 보며 닦는) 만수 (웃으며) 늙어도 여자는 여자네. 숙자 (흘기고, 거울 집어넣는다) 만수 원래 표정이 그러슈? 숙자 (쌀쌀맞게) 뭐가요? 만수 우거지상이란 말이지. 표정만 좀 풀면, 아주 이쁜 얼굴인데, 그 표정 때문에 추녀 같아 보인단 말이오. (손가락으로 제 입 꼬리를 양쪽으로 올리며) 스마일. 숙자 웃을 일이 있어야 웃죠. 미친년처럼 헤헤, 호호, 히히 그래요? 만수 좀 그러면 어때? 얼굴이 그 사람, 인생이라잖소. 자기 얼굴에 책임질 나이요. 진짜 미 인은, 표정에서 나오는 법이오. 제 아무리 절세미인이라해도, 웃음이 없는 얼굴은 가 짜지. 장수하는 데에 웃음만한 보약이 없수다. 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웃음이지. 숙자 참, 아는 보약도 많아 좋겠수. 평생 보약 지어 먹을 일 없겠네. 만수 왜 먹어?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 그게 다 보약인데. 그리고 무엇보다 마 음을 편하게 가지는 게, 중요하지. 매사에 그저 물 흐르는 대로, 순리대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사는 게 다르지. 길게 살아봐야 칠팔십년인데, 뭐 하러 찡그리고, 싸우고 살 어? 그러다 세월 다 가면, 그거 아까워 어떡해? 숙자 칠팔십년 살 생각 없으니, 댁이나 혼자 오래오래 사슈. (자리에서 일어나는) 만수 녹차 안마시고? 숙자 오전 내내 차만 마셨더니, 생각 없어요. 만수 (일어나고) 당신, 칠팔십년 사나 안사나 내가 두고 볼 거야. 숙자 별꼴이야. (나가는) 만수 (웃고)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니까, 다음엔 당신이 사시구려. (따라 나가며) 숙자 먹기 싫다는 사람, 끌고 온 게 누군데? (가게 문 열고 나간다) 만수 (카운터 앞에 서서 주인 보며) 내가 웬만해선 돈 안 쓰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저절로 지갑이 열리네. 얼마요? S#3. 원룸/실내 텅 빈 실내를 둘러보는 영애. 욕실 문도 열어 보고, 베란다에 나가 본다. (E)휴대폰 울리는 소리. 액정에 뜨는 번호 확인하고 폴더 여는. 영애 (명쾌하게) 하이, 친구. (사이) 이제 막, 도착했어. 생각보다 집이 괜찮네. 혼자 지내기 엔 딱 좋은 것 같아. (돌아보며) 준비를 너무 완벽하게 해서 손 댈 거 하나 없더라고. 고마워. (잠시) 짐이랄 것도 없어. 나머지 짐은 항공편으로 보내서, 받기만 하면 돼. (잠시) 근데, 언제 이걸 다 마련해놨어? (웃으며) 하여튼 일 하는 거 하난 맘에 든다니까. 참, 우리 언니한텐 말 안 했지? (사이) 약속 지켜. 우리 집 식구들 아는 순간 나 정말 혀 깨물고 죽어. (웃으며) 그래, 이따 저녁에 보자구. 수고해. 전화 끊고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켠다. S#4. 대산그룹 회장실 (E)노크소리. 문이 열린다. 비서 사장님이십니다 회장님. (물러가고) 태준 (들어와 목례하는) 동섭 (일어나며) 앉게. 태준 네. (와서 앉는다) 동섭 (나와 앉고) 태준 다음 주 수요일에 출국입니다. 동섭 (끄덕이며) 가동은 순조롭게 되었다고 보고 받았네. 태준 네. 동섭 혼자 나가나? 태준 김상무하고 동행합니다. 동섭 (끄덕이며) 정의원을 만났다고? 태준 네. 노골적으로 자금문제를 꺼내진 않았지만, 조만간 사람을 보낼 것 같습니다. 동섭 그럴 테지. 곧 정권이 바뀔 테니, 지금부터 슬슬 움직이지 않겠나. 태준 우리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동섭 생각 중이야. 시기가 아직은 이르니, 더 두고 봐야지. 태준 이참에 태민이하고도 아주 엮을 생각인 것 같은데. 동섭 나쁠 건 없잖나. 그쪽도 그렇지만, 우리 쪽에서도 안전할 수 있으니 말일세. 태준 하지만, 태민이까지 끌어 들여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동섭 그 맘, 알아. 자네, 잊었나? 자네 결혼 때문에 회장님 입장이 아주 난처하게 되었을 때 말야. 그때 대산이 위기였네. (한숨) 우리 같은 사람들 인생은, 날 때부터 우리 것 이 아니라는 걸 몰라? 더럽고, 불쾌해도 할 수 없는 일이지. 태준 (아무 말 않는) 동섭 (한숨) 골치 아프고, 피 마르는 인생이야. 그건 그렇고, 안산은 언제 마무리가 되나? 태준 다음 달 말이면 마무리가 된다고 하는데, 내일 들어가 볼 생각입니다. 동섭 진작에 HCI는 나왔으니, 완성 되는대로 시험 가동에 착수하면 문제 될 게 있겠나. 태준 아직, 확신할 순 없습니다. 공법, 개발하는 데에만 자그마치 십 오년이 걸렸다고 들었 습니다. 동섭 연구만 십 년이 넘었네. 회장님 계실 때부터 나왔던 공법이긴 하지만, 연구에서도 번 번히 실패만 거듭했어. 다행히 태민이가 실패의 원인을 잡아 시험공장까지 세우지 않 았나. 요즘 중국에선 포항제철의 고로 공법을 응용해서 말이 많네. 이러다 다 뺏기겠 어. 그래서 연구할 때부터 쉬쉬했던 문젠데, 시험가동식 때 참관인들에 대해 철저하 게 감시해야 할 거야. 명성에 박회장도 이 문제 때문에 등을 돌리지 않았나. 그러니 만큼 제대로 성공을 봐야 해. 태준 알겠습니다 회장님. S#5. 안산공장 차에서 내려 뛰어 들어오는 태민. 옆에서 안절부절하는 팀장. 태민 무슨 일입니까? 팀장 HCI이 깨졌습니다. 태민 뭐요? (보며) 뭐가 문제요? 팀장 아직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고열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태민 (답답한) 팀장 아무래도 HCI를 다시 검토해야 할 듯 합니다. 태민 프랑스 쪽엔 연락했어요? 팀장 네. 오늘 출국한답니다. 태민 일주일 만에 깨졌다? (고민하는) 팀장 바꿔봐야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 다시 깨지고 말 겁니다. 태민 (말없이 생각에 빠지는) 팀장 내일 사장님께서 방문하시는데 어쩌죠? 태민 우선 프랑스에서 사람이 들어오면 그때 얘기 합시다. 팀장 (불안한) S#6. 버스 정류장 마을버스에서 내리는 단희. 어둠 속에서 터벅터벅 걸어 올라간다. (E)휴대폰 벨소리. 단희 응, 경애야. (E)경애 낼 동창회 모임 있는 거 알지? 단희 응. (E)경애 올 거지? 단희 글쎄. (E)경애 애들이 너 보고 싶다고 난리다 얘. 그러지 말고, 나와. 데리러 갈까? 단희 그럴 거 없어. (E)경애 참, 너 석주 소식 들었어? 결혼한댄다. 단희 알어. (E)경애 알아? 그 자식이 직접 얘기했어? 낯짝 한 번 두껍다 걔. 얼마나 대단한 집, 여잔지 내가 볼 거야. 동창모임에 나올려나? 단희 그건 나도 모르구. (E)경애 아무튼 내일 오후 3시쯤에 데리러 갈게. 단희 전화 먼저 하구 와. (사이) 응, 끊어. S#7. 극장 안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나란히 어둠 속에 앉아 있는 태준과 완이. 영화를 보며 웃어대는 완이를 돌아보는 태준의 표정은 흐뭇하다. (E)단희 편하게 가족처럼, 딸처럼 그렇게 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 사장님이 아버지 같은 생각이 종종 들었거든요. 단희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린다. S#8. 웨딩샵 문 열고 나오는데 와락 안기는 하나. 놀란 숙희. 하나 하이, 맘. 숙희 (놀란) 뭐, 뭐야 너? 하나 놀랬지? 숙희 어떻게 온 거야? 하나 비행기 타고 왔지. 숙희 (놀라서 입 벌어지고)? 하나 (웃으며) 거짓말 하구 왔어. 숙희 혼자서? 하나 아빠랑 같이 왔어. 숙희 (둘러보며) 아빤? 하나 할머니 댁에 계셔. 뒤에 오시겠대. 난, 엄마 보고 싶어서 여기루 먼저 달려왔지. 숙희 (얼굴 부비며) 이 거짓말쟁이. 이번엔 뭐라고 거짓말하고 온 거야? 하나 울 엄마, 죽게 생겼다 그랬지. 숙희 (흘기며) 뭐? 하나 나, 보고 싶어서 죽게 생긴 거 맞잖어. 숙희 (꿀밤 먹이고) 쪼그만 게, 간만 컸어. 하나 (웃으며) 나도 죽겠더라구. (팔짱 끼며) 배고파 엄마. 숙희 (믿기지 않은) 이게 다 무슨 꿈이야. 하나 꿈, 아냐 엄마. 그리구 나, 배 무지 고프다구. 숙희 그래, 가자. 뭐 먹고 싶어? 먹으면서 얘기하자구. 하나 매운 불고기. 숙희 (얼떨떨) 그래, 매운 불고기 먹으러 가자. S#9. 단희집/대문 앞 문 앞에 서서 올라오는 단희를 내려다보고 있는 영희. 천천히 걸어 내려가는. 단희 (놀란) ? 영희 (앞에 서자마자 따귀를 때리는) 단희 (노려보는) 영희 (차갑게) 가만 안 둔다 했지? 단희 어쩔 건데? 영희 (노여운) 너야 말로 어쩔 셈이야? 단희 내가 왜 그런 얘기까지 해줘야 해? 영희 (삭히며) 당장, 그만 둬. 단희 (단호한) 싫어. 영희 (버럭) 그만 둬. 단희 (노려보는) 영희 (가라앉히고) 이십년을 넘게 남처럼 잘 살다, 이제 와서 왜 이래? 갑자기 내 딸이 되 고 싶은 거니? 아님, 내가 이제와 엄마 노릇해? 단희 (피식) 당신, 딸이라는 게 그리고 당신이 내 엄마라는 게 끔찍해. 영희 (노려보는) 단희 상황이 어쩔 수 없어, 그땐 자식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쳐. 지금 와서 제 자식이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 아니 자신의 인생이 어찌 될까 그것만 생 각하는 여자. 그게 세상의 모든 엄마야? 영희 널 떼어놓고 왔을 땐, 고작 스물 한 살이었어. 어미의 정이 무엇인지, 자식의 정이 무 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나이였어. 자식 낳아 키우면서, 지금 나이 되어 보니 알겠더 라. 그래, 넌 내가 낳은 딸이야. 안쓰러운 마음, 보듬고 싶은 마음 있어. 하지만, 그럴 수 없잖아. 난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그 남자의 자식까지 낳고 살어. 그런 데 이제와 널, 자식이라고 어떻게 그래? 단희 떳떳하게 자식 대접 해달라고 안 했어. 영희 알아. 니 마음 충분히 알고, 니가 원하는 게 뭔지도 알아.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한 번 엮이면, 평생 엮일 수밖에 없어. 내 인생만 무너져? 나 때문에 지금의 가정이 무 너져. 지금의 남편, 자식, 시댁 식구들까지.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어. 너에게만 내가 독하고 모진 사람이 되면 괜찮다 싶었어. 애초에 없었으니까,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으니까. 앞으로도 그냥 전처럼 살면 돼. 단희 (차가운) 누구 좋으라구?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만 찾아 왔어두 이러지 않았 어. 적어도 변명쯤은 하고 눈물 한 방울이라도 보였음 이러지 않았어. 영희 (눈물 고이는) 일부러 그랬어. 약해지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어. 단희 이제 와 왜 변명해? 영희 단희야. 단희 (비켜서서 대문 여는) 돌아 가. 더 이상 할 말 없어. 영희 (잡으며) 이러지 마. 이러지 마라 제발. 단희 (뿌리치고) 이러지 마? (분한) 그렇게 매달리고, 애원해도 못 들은 척 할 땐 언제야? 그래, 아버지는 핑계야. 이십 칠년 동안 지지리 궁상맞게, 엄마도 없이 산 세월을 보 상 받고 싶어 이래. 자식 버린 여자는 너무나도 떳떳하게 부귀영화 누리면서 사는데, 버려진 자식은, 고생고생 하면서 살아도 매일 제자리였어. 그래서 억울해. 억울해서라 도 나, 당신 용서 안 해. 영희 돈 준다고 했잖아. 집도 사줄게. 내가 잘 살면, 너한테도 좋은 일이잖아. 단희 (경멸스러운) 어미젖을 못 먹고 자란 자식, 분유 값 겨우 벌어서 제 자식 입에 물 리는 아버지. 어미 없다 놀림 당하며 산 세월. 자신을 버리고 간 여자, 그리워하며 매 일을 술로 보낸 시간들 (점점 소리 높이는) 학비 벌겠다고 이리저리 뛰어 다니던 학창 시절, 그리워 애가 타 결국 병까지 얻은 아버지. (버럭) 벗어날 수 없는 가난과 과거. 내 결혼까지도 다 망쳐 놓고 이제 와 돈으로 보상하겠다구? (눈물 흘리는) 웃기지 마. 내가 그렇게 산 세월만큼 당신도 그렇게 살어. 남은 인생 그렇게 살다 가. (쾅 닫고 들 어가 안에서 문을 잠근다) 영희 (문 두드리는)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다구. (우는) 제발, 한 번만 봐 줘 단희야. 소리 없이 울다 들어가는 단희. 소용없는 것을 알자 돌아서서 우는 영희. 그러다 터벅터벅 내려간다. S#10. 원룸/실내 (E)현관벨 소리. 영애 (나오며) 누구? 태민이니? (E)태민 어. 영애 (문 열고) 어서 와, 친구. (포옹하고) 태민 세월은 못 속이는군. 영애 (웃으며) 그건 어쩔 도리가 없지. 들어가자. 태민 (들어오며) 냄새 좋은데? 영애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좀 했지. 손 씻구 와. 태민 (욕실로 들어가는) 영애 (문 앞에 서서)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리면서, 꼬박꼬박 반말하는 건 여전하구나? 태민 (손 씻으며) 친구 먹자고 한 사람이 누군데? 그게 불만이면 누나라 불러줘? 아니지, 사돈처녀? 영애 사돈처녀? 그거 괜찮네. (웃는) 태민 형수 안부부터 물어야 되는 거 아냐? (수건에 닦고) 영애 여전하겠지 뭐. (주방으로 가는) 태민 (나와 주방으로) 동생이 뭐 그래? 신세지는 거, 싫다는 말 그냥 하는 말이고, 다른 이유가 있는 거 아냐? 영애 (수저 놓는) 일은 할 만 해? 죽어도 대산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더니. 태민 (앉는) 오늘도 겨우 빠져 나왔어. 내일 새벽부터 현장에 나가 돼. 영애 (피식) 일꾼 다 됐네. (앉고) 보기 좋다 그래두. 언제쯤 마음잡나, 그랬는데 사람 변 하는 것도 순식간이네. 태민 (수저 들고) 한다면 하는 놈이지 내가. (찌개를 맛보는) 좋네. (보며) 아주 들어 온 건 맞어? 영애 응. 태민 그런데 집엔 왜 연락 안 해? 영애 나, 아직 시카고에 있는 줄 알잖어. 그 좋은 자리 때려치우고 들어왔다 그러면, 아마 다들 날 죽이려 들 거야. (웃으며) 독립해서 몇 년을 혼자 살았으니, 당분간 혼자 제 대로 설 때까진 이렇게 지내려구. 태민 알아서 해라. 난 어쨌든, 무조건 빠질 테니까. 골치 아픈 거, 딱 질색이다. 영애 내가 바라던 바다.(웃는) 태민 뭘 먹고 살 거냐? 영애 별 걱정 다 하셔. 걱정 마. 내가 누구니? 다음 주부터 바로 일 시작해. 태민 그렇게 빨리? 영애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셔서, Y대 건축학과 자리 하나 맡았어. 태민 능력 좋은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 영애 내가 좀 잘났잖어. 태민 (피식) 내 주위가 이러니, 내가 변하기가 어렵지. 영애 무슨 말이야? 태민 그런 게 있다. S#11. 패밀리 레스토랑 마주보고 앉아 식사를 하는 태준과 완이. 태준 영화 좋았냐? 완 아버진 별루였죠? 태준 아니다. 나도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좋았어. 완 중간 중간에 딴 생각하시던데요 뭘. 그래도 저 때문에 이런 자리까지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준 (웃는) 사귀는 사람은 없니? 완 없어요. 있어도 정리해야 할 판국인데. 태준 소질이 영, 없는 건 아니고? 완 무시하지 마세요. 이래봬도 아버지 닮아, 여자 보는 눈 까다로워요. (웃는) 엄마 같은 여자 만날 거예요 전. 태준 남자들이 대개 자신의 모친을 이상형으로 삼는다 그러더니, 그 말이 맞나 보네. 완 여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이상형의 기준이 자신의 아버지가 되는 경우, 흔하다잖아요. 태준 진인,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 평범한 직장 다니면서, 평범하게 사는 사내한테 시집 보낼 거야. 완 그게 맘대로 될까요? 진이가 얼마나 눈이 높은데. 그리구 걘, 공주병이 심각해서 더 힘들 걸요? 태준 (웃는) 내 딸이긴 하지만, 공주병이 좀 있지. 완 오랜만에 아버지랑 뭔가 좀 통하네요. 이렇게 대접 받을 수 있는 거면, 군대 두 번 도 더 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태준 (미안한) 요즘 일 때문에, 내가 니들한테 시간을 내지 못했어. 완 에이 아버지두. 농담한 걸 가지구. 아버진, 지금도 충분히 저희들한테 좋은 아버지세 요. 그렇게 자학하실 필요는 없구요. 오늘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요. 태준 (기특한) 완 저 없는 동안, 아버지께서 엄말 잘 지켜 드리세요. (웃는) 두 배로, 아니 세 배로 더 잘 해드리세요. 아셨죠? 태준 오냐, 그러마. S#12. 단희 집/ 방 씻은 얼굴로 거울 앞에 앉아 있는 단희. 슬픈 표정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돌아앉는다. (F.I) S#13. 회상/단희 집 마루 병색이 완연한 철수의 모습. 마루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단희 옆에 앉는다. 단희 뭐 하러 나오셨어요? 철수 (기운 없는) 답답해서. (잡지책을 단희에게 건네는) 단희 (받으며) 뭐예요? 철수 (호흡이 거친, 천천히 잡지책을 넘겨 보여주는) 화제의 인물-아름다운 인연, 대산그룹의 이태준 사장과 김영희 부부. 그들이 결혼하기까지의 영화 같은 사연과 끊임없이 사랑하고 사랑할 줄 아는 아름다운 여자 김영희씨를 만나봅니다. 환하게 웃고 있는 태준과 영희의 사진. (사진에 클로즈업) 단희 (철수를 보는)? 철수 (슬픈 미소) 니 엄마다. 단희 (놀란) 네? 철수 이쁘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쁜 사람이다. 단희 (사진을 보는) 철수 끝까지 너한테는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대로 눈을 감으면, 내 맘이 편치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넌, 니 어미를 꼭 닮았다. (흐뭇한 표정) 특히 눈매가 참, 많이 닮았어. 단희 (사진 속의 영희를 보다 확 덮어 버리는) 철수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 있던 정도 없어지고, 없던 정도 생기기도 하지. 어쩔 수 없는 사람이야. 사람 자체가 그렇게 생겨 먹을 걸 어떡해? 정도 없고, 사랑도 없으면 같이 살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사랑이란 게 그렇다. 식으면, 그걸로 끝이야. 연애하 다가도 맘에 안 맞어 헤어질 수 있는 것이지. 평생 자신만 바라보라는 건, 욕심이다. 마음에도 없는 사람하고 어떻게 한 평생을 살어? 단희 그런 아버진, 왜 한 평생 엄마만 바라보셨는데요? 철수 나는 말이다.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내 마음이 식지 않았을 뿐이다. 사랑은 강요가 아니다. 내가 널 사랑하니까, 너도 날 사랑해야 된다는 식은 없어. 단희 나는요? 그럼 난, 대체 뭐예요? 두 분이 사랑을 했든, 뭘 했든 상관없어요. 난, 도대 체 뭐냐구요? 그 여자한테는 이미 식어버린 사랑의 잔 재물에 불과할 뿐이란 말인가 요? 부모님들의 사랑은 추억거리로 말할 수 있겠지만, 난 추억거리가 아니란 말이예 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철수 (손잡는) 내가 있잖니. 단희야, 니 옆엔 내가 있잖어. (눈물 그렁한) 단희 (파르르 떨리는) S#14. 현실/단희 집 눈에 눈물이 그렁한 단희. 애써 독해지려고 참고, 고개를 젓는다. 불을 끄고 눕는 단희. S#15. 불고기 식당 잘 먹는 모습의 하나. 흐뭇하게 바라보는 숙희. 하나 (보며) 엄만, 안 먹어? 숙희 먹어. 하나 내 얼굴만 봐도 배부르구나? 숙희 (피식) 그래, 배불러 죽겠다. 누구 닮아서 저렇게 이쁠까? 하나 (웃는) 엄마 닮아서 그렇지 뭐. 숙희 또 거짓말 하네. 하나 솔직히 아빠 닮았단 소릴 많이 듣지. 그래두 난, 엄마 딸이니까 분명 엄말 닮은 데가 많을 거야. 숙희 맞어. 우린 이렇게 잘 맞잖아? 하나 당근이지. 숙희 아빤, 여전하지? 하나 여전히 멋지고, 여전히 젠틀하고, 여전히 재미있고, 여전히 여자 많어. 숙희 (흘기며) 아빠가 너무 멋져서 그래. 여자들이 멋진 남자를 가만두겠니? 하나 (매워 호호 불며) 엄만, 내가 어린 앤 줄 아나봐. 엄마랑 아빠랑 왜 이혼했는지 내가 모를까봐? 아빠 바람나서 이혼한 거잖아. 숙희 (놀란) 하나야? 하나 (피식) 나 바보 아니다 뭐. 숙희 다, 알고 있었어? 하나 내가 모른 척 했을 뿐이야. 엄만 요즘 애들, 너무 무시해. 열 세 살이면 알건 다 아는 나이라구. (물마시고) 하지만, 나 엄마 이해해. 솔직히 잘생긴 남자, 좀 부담스럽잖 아. 우리 아빤, 너무 잘생겨서 그게 문제였어. 이쁘게 성형하는 것 말구, 못생기게 성 형하는 것도 있을까? 숙희 (웃는, 그러다 마음 아픈) 너한테 내가 못할 짓 많이 한다. 엄마가 돼서, 딸한테 너무 해 그치? 하나 그래서 엄만 아직, 칠십 점. 더 두고 볼 거야. 숙희 칠십 점씩이나? 난 빵점줄 줄 알았더니. 하나 그래도 나, 이렇게 이쁘게 낳아주고 이만큼 키워줬잖아. 그래서 칠십 점 주는 거야. 숙희 (볼 쓰다듬는) 고마워, 우리 딸. 엄만, 너 땜에 산다 정말. S#16. 방배동 집 앞 한참을 차 안에 앉아 있던 영희. 가방 속에서 거울 꺼내 얼굴을 확인하고 차에서 내린다. 그때 태준의 차가 들어온다. 태준과 완이 차에서 내리고, 영희는 웃으며 부자를 본다. 영희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태준 당신은 늦었네. 완 다녀왔습니다. 영희 부자가 재미있었던 모양이네. 나도 진이랑 둘이만 데이트 해야겠다. 웃으며 셋이 안으로 들어간다. ------------------------------------------------------------------------------ 올해로 마지막 글이 되겠네요^^ 많은 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내년에는 더 좋은 글로 찾아오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요^^;; 연휴 잘 보내시고, 새해에 다시 뵐게요!
위험한 질주(5화-1)
제 5 부
S#1. 대산그룹 앞/차 안
비틀거리며 차에 오르는 영희. 눈을 감고 기대어 앉는다.
(E)단희 그 운명, 내가 바꿀 거야. 똑바로 봐 둬. 그 운명이 어떻게 바뀌는지.
눈을 뜨고 고개를 드는 영희.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그러다 입술을 깨물며 날카로워지는 표정.
영희 차, 돌려요.
기사 네.
S#2. 한식당
점심 식사를 막 끝낸 숙자와 만수.
만수 (휴지를 꺼내 숙자의 입을 닦아주려는) 거, 칠칠하게.
숙자 (뒤로 물러나고) 뭐, 뭐해요?
만수 이리 와 봐요.
숙자 (만수 손에 있는 휴지 뺏어) 내가 닦아요. (거울 꺼내 보며 닦는)
만수 (웃으며) 늙어도 여자는 여자네.
숙자 (흘기고, 거울 집어넣는다)
만수 원래 표정이 그러슈?
숙자 (쌀쌀맞게) 뭐가요?
만수 우거지상이란 말이지. 표정만 좀 풀면, 아주 이쁜 얼굴인데, 그 표정 때문에 추녀 같아
보인단 말이오. (손가락으로 제 입 꼬리를 양쪽으로 올리며) 스마일.
숙자 웃을 일이 있어야 웃죠. 미친년처럼 헤헤, 호호, 히히 그래요?
만수 좀 그러면 어때? 얼굴이 그 사람, 인생이라잖소. 자기 얼굴에 책임질 나이요. 진짜 미
인은, 표정에서 나오는 법이오. 제 아무리 절세미인이라해도, 웃음이 없는 얼굴은 가
짜지. 장수하는 데에 웃음만한 보약이 없수다. 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웃음이지.
숙자 참, 아는 보약도 많아 좋겠수. 평생 보약 지어 먹을 일 없겠네.
만수 왜 먹어?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 그게 다 보약인데. 그리고 무엇보다 마
음을 편하게 가지는 게, 중요하지. 매사에 그저 물 흐르는 대로, 순리대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사는 게 다르지. 길게 살아봐야 칠팔십년인데, 뭐 하러 찡그리고, 싸우고 살
어? 그러다 세월 다 가면, 그거 아까워 어떡해?
숙자 칠팔십년 살 생각 없으니, 댁이나 혼자 오래오래 사슈. (자리에서 일어나는)
만수 녹차 안마시고?
숙자 오전 내내 차만 마셨더니, 생각 없어요.
만수 (일어나고) 당신, 칠팔십년 사나 안사나 내가 두고 볼 거야.
숙자 별꼴이야. (나가는)
만수 (웃고)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니까, 다음엔 당신이 사시구려. (따라 나가며)
숙자 먹기 싫다는 사람, 끌고 온 게 누군데? (가게 문 열고 나간다)
만수 (카운터 앞에 서서 주인 보며) 내가 웬만해선 돈 안 쓰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저절로
지갑이 열리네. 얼마요?
S#3. 원룸/실내
텅 빈 실내를 둘러보는 영애. 욕실 문도 열어 보고, 베란다에 나가 본다. (E)휴대폰 울리는 소리.
액정에 뜨는 번호 확인하고 폴더 여는.
영애 (명쾌하게) 하이, 친구. (사이) 이제 막, 도착했어. 생각보다 집이 괜찮네. 혼자 지내기
엔 딱 좋은 것 같아. (돌아보며) 준비를 너무 완벽하게 해서 손 댈 거 하나 없더라고.
고마워. (잠시) 짐이랄 것도 없어. 나머지 짐은 항공편으로 보내서, 받기만 하면 돼.
(잠시) 근데, 언제 이걸 다 마련해놨어? (웃으며) 하여튼 일 하는 거 하난 맘에 든다니까.
참, 우리 언니한텐 말 안 했지? (사이) 약속 지켜. 우리 집 식구들 아는 순간
나 정말 혀 깨물고 죽어. (웃으며) 그래, 이따 저녁에 보자구. 수고해.
전화 끊고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켠다.
S#4. 대산그룹 회장실
(E)노크소리. 문이 열린다.
비서 사장님이십니다 회장님. (물러가고)
태준 (들어와 목례하는)
동섭 (일어나며) 앉게.
태준 네. (와서 앉는다)
동섭 (나와 앉고)
태준 다음 주 수요일에 출국입니다.
동섭 (끄덕이며) 가동은 순조롭게 되었다고 보고 받았네.
태준 네.
동섭 혼자 나가나?
태준 김상무하고 동행합니다.
동섭 (끄덕이며) 정의원을 만났다고?
태준 네. 노골적으로 자금문제를 꺼내진 않았지만, 조만간 사람을 보낼 것 같습니다.
동섭 그럴 테지. 곧 정권이 바뀔 테니, 지금부터 슬슬 움직이지 않겠나.
태준 우리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동섭 생각 중이야. 시기가 아직은 이르니, 더 두고 봐야지.
태준 이참에 태민이하고도 아주 엮을 생각인 것 같은데.
동섭 나쁠 건 없잖나. 그쪽도 그렇지만, 우리 쪽에서도 안전할 수 있으니 말일세.
태준 하지만, 태민이까지 끌어 들여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동섭 그 맘, 알아. 자네, 잊었나? 자네 결혼 때문에 회장님 입장이 아주 난처하게 되었을
때 말야. 그때 대산이 위기였네. (한숨) 우리 같은 사람들 인생은, 날 때부터 우리 것
이 아니라는 걸 몰라? 더럽고, 불쾌해도 할 수 없는 일이지.
태준 (아무 말 않는)
동섭 (한숨) 골치 아프고, 피 마르는 인생이야. 그건 그렇고, 안산은 언제 마무리가 되나?
태준 다음 달 말이면 마무리가 된다고 하는데, 내일 들어가 볼 생각입니다.
동섭 진작에 HCI는 나왔으니, 완성 되는대로 시험 가동에 착수하면 문제 될 게 있겠나.
태준 아직, 확신할 순 없습니다. 공법, 개발하는 데에만 자그마치 십 오년이 걸렸다고 들었
습니다.
동섭 연구만 십 년이 넘었네. 회장님 계실 때부터 나왔던 공법이긴 하지만, 연구에서도 번
번히 실패만 거듭했어. 다행히 태민이가 실패의 원인을 잡아 시험공장까지 세우지 않
았나. 요즘 중국에선 포항제철의 고로 공법을 응용해서 말이 많네. 이러다 다 뺏기겠
어. 그래서 연구할 때부터 쉬쉬했던 문젠데, 시험가동식 때 참관인들에 대해 철저하
게 감시해야 할 거야. 명성에 박회장도 이 문제 때문에 등을 돌리지 않았나. 그러니
만큼 제대로 성공을 봐야 해.
태준 알겠습니다 회장님.
S#5. 안산공장
차에서 내려 뛰어 들어오는 태민. 옆에서 안절부절하는 팀장.
태민 무슨 일입니까?
팀장 HCI이 깨졌습니다.
태민 뭐요? (보며) 뭐가 문제요?
팀장 아직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고열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태민 (답답한)
팀장 아무래도 HCI를 다시 검토해야 할 듯 합니다.
태민 프랑스 쪽엔 연락했어요?
팀장 네. 오늘 출국한답니다.
태민 일주일 만에 깨졌다? (고민하는)
팀장 바꿔봐야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 다시 깨지고 말 겁니다.
태민 (말없이 생각에 빠지는)
팀장 내일 사장님께서 방문하시는데 어쩌죠?
태민 우선 프랑스에서 사람이 들어오면 그때 얘기 합시다.
팀장 (불안한)
S#6. 버스 정류장
마을버스에서 내리는 단희. 어둠 속에서 터벅터벅 걸어 올라간다.
(E)휴대폰 벨소리.
단희 응, 경애야.
(E)경애 낼 동창회 모임 있는 거 알지?
단희 응.
(E)경애 올 거지?
단희 글쎄.
(E)경애 애들이 너 보고 싶다고 난리다 얘. 그러지 말고, 나와. 데리러 갈까?
단희 그럴 거 없어.
(E)경애 참, 너 석주 소식 들었어? 결혼한댄다.
단희 알어.
(E)경애 알아? 그 자식이 직접 얘기했어? 낯짝 한 번 두껍다 걔. 얼마나 대단한 집, 여잔지
내가 볼 거야. 동창모임에 나올려나?
단희 그건 나도 모르구.
(E)경애 아무튼 내일 오후 3시쯤에 데리러 갈게.
단희 전화 먼저 하구 와. (사이) 응, 끊어.
S#7. 극장 안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나란히 어둠 속에 앉아 있는 태준과 완이.
영화를 보며 웃어대는 완이를 돌아보는 태준의 표정은 흐뭇하다.
(E)단희 편하게 가족처럼, 딸처럼 그렇게 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
사장님이 아버지 같은 생각이 종종 들었거든요.
단희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린다.
S#8. 웨딩샵
문 열고 나오는데 와락 안기는 하나. 놀란 숙희.
하나 하이, 맘.
숙희 (놀란) 뭐, 뭐야 너?
하나 놀랬지?
숙희 어떻게 온 거야?
하나 비행기 타고 왔지.
숙희 (놀라서 입 벌어지고)?
하나 (웃으며) 거짓말 하구 왔어.
숙희 혼자서?
하나 아빠랑 같이 왔어.
숙희 (둘러보며) 아빤?
하나 할머니 댁에 계셔. 뒤에 오시겠대. 난, 엄마 보고 싶어서 여기루 먼저 달려왔지.
숙희 (얼굴 부비며) 이 거짓말쟁이. 이번엔 뭐라고 거짓말하고 온 거야?
하나 울 엄마, 죽게 생겼다 그랬지.
숙희 (흘기며) 뭐?
하나 나, 보고 싶어서 죽게 생긴 거 맞잖어.
숙희 (꿀밤 먹이고) 쪼그만 게, 간만 컸어.
하나 (웃으며) 나도 죽겠더라구. (팔짱 끼며) 배고파 엄마.
숙희 (믿기지 않은) 이게 다 무슨 꿈이야.
하나 꿈, 아냐 엄마. 그리구 나, 배 무지 고프다구.
숙희 그래, 가자. 뭐 먹고 싶어? 먹으면서 얘기하자구.
하나 매운 불고기.
숙희 (얼떨떨) 그래, 매운 불고기 먹으러 가자.
S#9. 단희집/대문 앞
문 앞에 서서 올라오는 단희를 내려다보고 있는 영희. 천천히 걸어 내려가는.
단희 (놀란) ?
영희 (앞에 서자마자 따귀를 때리는)
단희 (노려보는)
영희 (차갑게) 가만 안 둔다 했지?
단희 어쩔 건데?
영희 (노여운) 너야 말로 어쩔 셈이야?
단희 내가 왜 그런 얘기까지 해줘야 해?
영희 (삭히며) 당장, 그만 둬.
단희 (단호한) 싫어.
영희 (버럭) 그만 둬.
단희 (노려보는)
영희 (가라앉히고) 이십년을 넘게 남처럼 잘 살다, 이제 와서 왜 이래? 갑자기 내 딸이 되
고 싶은 거니? 아님, 내가 이제와 엄마 노릇해?
단희 (피식) 당신, 딸이라는 게 그리고 당신이 내 엄마라는 게 끔찍해.
영희 (노려보는)
단희 상황이 어쩔 수 없어, 그땐 자식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쳐. 지금 와서 제 자식이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 아니 자신의 인생이 어찌 될까 그것만 생
각하는 여자. 그게 세상의 모든 엄마야?
영희 널 떼어놓고 왔을 땐, 고작 스물 한 살이었어. 어미의 정이 무엇인지, 자식의 정이 무
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나이였어. 자식 낳아 키우면서, 지금 나이 되어 보니 알겠더
라. 그래, 넌 내가 낳은 딸이야. 안쓰러운 마음, 보듬고 싶은 마음 있어. 하지만, 그럴
수 없잖아. 난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그 남자의 자식까지 낳고 살어. 그런
데 이제와 널, 자식이라고 어떻게 그래?
단희 떳떳하게 자식 대접 해달라고 안 했어.
영희 알아. 니 마음 충분히 알고, 니가 원하는 게 뭔지도 알아.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한
번 엮이면, 평생 엮일 수밖에 없어. 내 인생만 무너져? 나 때문에 지금의 가정이 무
너져. 지금의 남편, 자식, 시댁 식구들까지.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어. 너에게만
내가 독하고 모진 사람이 되면 괜찮다 싶었어. 애초에 없었으니까,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으니까. 앞으로도 그냥 전처럼 살면 돼.
단희 (차가운) 누구 좋으라구?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만 찾아 왔어두 이러지 않았
어. 적어도 변명쯤은 하고 눈물 한 방울이라도 보였음 이러지 않았어.
영희 (눈물 고이는) 일부러 그랬어. 약해지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어.
단희 이제 와 왜 변명해?
영희 단희야.
단희 (비켜서서 대문 여는) 돌아 가. 더 이상 할 말 없어.
영희 (잡으며) 이러지 마. 이러지 마라 제발.
단희 (뿌리치고) 이러지 마? (분한) 그렇게 매달리고, 애원해도 못 들은 척 할 땐 언제야?
그래, 아버지는 핑계야. 이십 칠년 동안 지지리 궁상맞게, 엄마도 없이 산 세월을 보
상 받고 싶어 이래. 자식 버린 여자는 너무나도 떳떳하게 부귀영화 누리면서 사는데,
버려진 자식은, 고생고생 하면서 살아도 매일 제자리였어. 그래서 억울해. 억울해서라
도 나, 당신 용서 안 해.
영희 돈 준다고 했잖아. 집도 사줄게. 내가 잘 살면, 너한테도 좋은 일이잖아.
단희 (경멸스러운) 어미젖을 못 먹고 자란 자식, 분유 값 겨우 벌어서 제 자식 입에 물
리는 아버지. 어미 없다 놀림 당하며 산 세월. 자신을 버리고 간 여자, 그리워하며 매
일을 술로 보낸 시간들 (점점 소리 높이는) 학비 벌겠다고 이리저리 뛰어 다니던 학창
시절, 그리워 애가 타 결국 병까지 얻은 아버지. (버럭) 벗어날 수 없는 가난과 과거.
내 결혼까지도 다 망쳐 놓고 이제 와 돈으로 보상하겠다구? (눈물 흘리는) 웃기지 마.
내가 그렇게 산 세월만큼 당신도 그렇게 살어. 남은 인생 그렇게 살다 가. (쾅 닫고 들
어가 안에서 문을 잠근다)
영희 (문 두드리는)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다구. (우는) 제발, 한 번만 봐 줘 단희야.
소리 없이 울다 들어가는 단희.
소용없는 것을 알자 돌아서서 우는 영희. 그러다 터벅터벅 내려간다.
S#10. 원룸/실내
(E)현관벨 소리.
영애 (나오며) 누구? 태민이니?
(E)태민 어.
영애 (문 열고) 어서 와, 친구. (포옹하고)
태민 세월은 못 속이는군.
영애 (웃으며) 그건 어쩔 도리가 없지. 들어가자.
태민 (들어오며) 냄새 좋은데?
영애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좀 했지. 손 씻구 와.
태민 (욕실로 들어가는)
영애 (문 앞에 서서)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리면서, 꼬박꼬박 반말하는 건 여전하구나?
태민 (손 씻으며) 친구 먹자고 한 사람이 누군데? 그게 불만이면 누나라 불러줘? 아니지,
사돈처녀?
영애 사돈처녀? 그거 괜찮네. (웃는)
태민 형수 안부부터 물어야 되는 거 아냐? (수건에 닦고)
영애 여전하겠지 뭐. (주방으로 가는)
태민 (나와 주방으로) 동생이 뭐 그래? 신세지는 거, 싫다는 말 그냥 하는 말이고, 다른
이유가 있는 거 아냐?
영애 (수저 놓는) 일은 할 만 해? 죽어도 대산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더니.
태민 (앉는) 오늘도 겨우 빠져 나왔어. 내일 새벽부터 현장에 나가 돼.
영애 (피식) 일꾼 다 됐네. (앉고) 보기 좋다 그래두. 언제쯤 마음잡나, 그랬는데 사람 변
하는 것도 순식간이네.
태민 (수저 들고) 한다면 하는 놈이지 내가. (찌개를 맛보는) 좋네. (보며) 아주 들어 온 건 맞어?
영애 응.
태민 그런데 집엔 왜 연락 안 해?
영애 나, 아직 시카고에 있는 줄 알잖어. 그 좋은 자리 때려치우고 들어왔다 그러면, 아마
다들 날 죽이려 들 거야. (웃으며) 독립해서 몇 년을 혼자 살았으니, 당분간 혼자 제
대로 설 때까진 이렇게 지내려구.
태민 알아서 해라. 난 어쨌든, 무조건 빠질 테니까. 골치 아픈 거, 딱 질색이다.
영애 내가 바라던 바다.(웃는)
태민 뭘 먹고 살 거냐?
영애 별 걱정 다 하셔. 걱정 마. 내가 누구니? 다음 주부터 바로 일 시작해.
태민 그렇게 빨리?
영애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셔서, Y대 건축학과 자리 하나 맡았어.
태민 능력 좋은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
영애 내가 좀 잘났잖어.
태민 (피식) 내 주위가 이러니, 내가 변하기가 어렵지.
영애 무슨 말이야?
태민 그런 게 있다.
S#11. 패밀리 레스토랑
마주보고 앉아 식사를 하는 태준과 완이.
태준 영화 좋았냐?
완 아버진 별루였죠?
태준 아니다. 나도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좋았어.
완 중간 중간에 딴 생각하시던데요 뭘. 그래도 저 때문에 이런 자리까지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준 (웃는) 사귀는 사람은 없니?
완 없어요. 있어도 정리해야 할 판국인데.
태준 소질이 영, 없는 건 아니고?
완 무시하지 마세요. 이래봬도 아버지 닮아, 여자 보는 눈 까다로워요. (웃는) 엄마 같은
여자 만날 거예요 전.
태준 남자들이 대개 자신의 모친을 이상형으로 삼는다 그러더니, 그 말이 맞나 보네.
완 여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이상형의 기준이 자신의 아버지가 되는 경우, 흔하다잖아요.
태준 진인,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 평범한 직장 다니면서, 평범하게 사는 사내한테
시집 보낼 거야.
완 그게 맘대로 될까요? 진이가 얼마나 눈이 높은데. 그리구 걘, 공주병이 심각해서 더
힘들 걸요?
태준 (웃는) 내 딸이긴 하지만, 공주병이 좀 있지.
완 오랜만에 아버지랑 뭔가 좀 통하네요. 이렇게 대접 받을 수 있는 거면, 군대 두 번
도 더 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태준 (미안한) 요즘 일 때문에, 내가 니들한테 시간을 내지 못했어.
완 에이 아버지두. 농담한 걸 가지구. 아버진, 지금도 충분히 저희들한테 좋은 아버지세
요. 그렇게 자학하실 필요는 없구요. 오늘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요.
태준 (기특한)
완 저 없는 동안, 아버지께서 엄말 잘 지켜 드리세요. (웃는) 두 배로, 아니 세 배로 더
잘 해드리세요. 아셨죠?
태준 오냐, 그러마.
S#12. 단희 집/ 방
씻은 얼굴로 거울 앞에 앉아 있는 단희. 슬픈 표정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돌아앉는다. (F.I)
S#13. 회상/단희 집 마루
병색이 완연한 철수의 모습. 마루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단희 옆에 앉는다.
단희 뭐 하러 나오셨어요?
철수 (기운 없는) 답답해서. (잡지책을 단희에게 건네는)
단희 (받으며) 뭐예요?
철수 (호흡이 거친, 천천히 잡지책을 넘겨 보여주는)
화제의 인물-아름다운 인연, 대산그룹의 이태준 사장과 김영희 부부. 그들이 결혼하기까지의 영화 같은 사연과 끊임없이 사랑하고 사랑할 줄 아는 아름다운 여자 김영희씨를 만나봅니다. 환하게 웃고 있는 태준과 영희의 사진. (사진에 클로즈업)
단희 (철수를 보는)?
철수 (슬픈 미소) 니 엄마다.
단희 (놀란) 네?
철수 이쁘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쁜 사람이다.
단희 (사진을 보는)
철수 끝까지 너한테는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대로 눈을 감으면, 내 맘이 편치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넌, 니 어미를 꼭 닮았다. (흐뭇한 표정) 특히 눈매가 참, 많이 닮았어.
단희 (사진 속의 영희를 보다 확 덮어 버리는)
철수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 있던 정도 없어지고, 없던 정도 생기기도 하지. 어쩔 수
없는 사람이야. 사람 자체가 그렇게 생겨 먹을 걸 어떡해? 정도 없고, 사랑도 없으면
같이 살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사랑이란 게 그렇다. 식으면, 그걸로 끝이야. 연애하
다가도 맘에 안 맞어 헤어질 수 있는 것이지. 평생 자신만 바라보라는 건, 욕심이다.
마음에도 없는 사람하고 어떻게 한 평생을 살어?
단희 그런 아버진, 왜 한 평생 엄마만 바라보셨는데요?
철수 나는 말이다.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내 마음이 식지 않았을 뿐이다.
사랑은 강요가 아니다. 내가 널 사랑하니까, 너도 날 사랑해야 된다는 식은 없어.
단희 나는요? 그럼 난, 대체 뭐예요? 두 분이 사랑을 했든, 뭘 했든 상관없어요. 난, 도대
체 뭐냐구요? 그 여자한테는 이미 식어버린 사랑의 잔 재물에 불과할 뿐이란 말인가
요? 부모님들의 사랑은 추억거리로 말할 수 있겠지만, 난 추억거리가 아니란 말이예
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철수 (손잡는) 내가 있잖니. 단희야, 니 옆엔 내가 있잖어. (눈물 그렁한)
단희 (파르르 떨리는)
S#14. 현실/단희 집
눈에 눈물이 그렁한 단희. 애써 독해지려고 참고, 고개를 젓는다. 불을 끄고 눕는 단희.
S#15. 불고기 식당
잘 먹는 모습의 하나. 흐뭇하게 바라보는 숙희.
하나 (보며) 엄만, 안 먹어?
숙희 먹어.
하나 내 얼굴만 봐도 배부르구나?
숙희 (피식) 그래, 배불러 죽겠다. 누구 닮아서 저렇게 이쁠까?
하나 (웃는) 엄마 닮아서 그렇지 뭐.
숙희 또 거짓말 하네.
하나 솔직히 아빠 닮았단 소릴 많이 듣지. 그래두 난, 엄마 딸이니까 분명 엄말 닮은 데가
많을 거야.
숙희 맞어. 우린 이렇게 잘 맞잖아?
하나 당근이지.
숙희 아빤, 여전하지?
하나 여전히 멋지고, 여전히 젠틀하고, 여전히 재미있고, 여전히 여자 많어.
숙희 (흘기며) 아빠가 너무 멋져서 그래. 여자들이 멋진 남자를 가만두겠니?
하나 (매워 호호 불며) 엄만, 내가 어린 앤 줄 아나봐. 엄마랑 아빠랑 왜 이혼했는지 내가
모를까봐? 아빠 바람나서 이혼한 거잖아.
숙희 (놀란) 하나야?
하나 (피식) 나 바보 아니다 뭐.
숙희 다, 알고 있었어?
하나 내가 모른 척 했을 뿐이야. 엄만 요즘 애들, 너무 무시해. 열 세 살이면 알건 다 아는
나이라구. (물마시고) 하지만, 나 엄마 이해해. 솔직히 잘생긴 남자, 좀 부담스럽잖
아. 우리 아빤, 너무 잘생겨서 그게 문제였어. 이쁘게 성형하는 것 말구, 못생기게 성
형하는 것도 있을까?
숙희 (웃는, 그러다 마음 아픈) 너한테 내가 못할 짓 많이 한다. 엄마가 돼서, 딸한테 너무
해 그치?
하나 그래서 엄만 아직, 칠십 점. 더 두고 볼 거야.
숙희 칠십 점씩이나? 난 빵점줄 줄 알았더니.
하나 그래도 나, 이렇게 이쁘게 낳아주고 이만큼 키워줬잖아. 그래서 칠십 점 주는 거야.
숙희 (볼 쓰다듬는) 고마워, 우리 딸. 엄만, 너 땜에 산다 정말.
S#16. 방배동 집 앞
한참을 차 안에 앉아 있던 영희. 가방 속에서 거울 꺼내 얼굴을 확인하고 차에서 내린다.
그때 태준의 차가 들어온다. 태준과 완이 차에서 내리고, 영희는 웃으며 부자를 본다.
영희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태준 당신은 늦었네.
완 다녀왔습니다.
영희 부자가 재미있었던 모양이네. 나도 진이랑 둘이만 데이트 해야겠다.
웃으며 셋이 안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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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마지막 글이 되겠네요^^
많은 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내년에는 더 좋은 글로 찾아오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요^^;;
연휴 잘 보내시고, 새해에 다시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