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부 S#1. 극장 실내 관람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는 숙자와 만수. 만수 어땠소? 숙자 뭐, 그냥 그랬어요. 현실감 없는 영화. 만수 현실감이 없지만, 사람들이 늘 꿈꾸는 영화지. 숙자 난, 그런 꿈도 꿔 본 적 없어요. 만수 (서서 보는) 카운슬러가 필요한 것 같은데. 숙자 뭐, 뭐가요? 만수 인생 시들하게 느껴지는 거, 부부사이도 시들해졌다는 거 아니오? 숙자 (말 못하고 고개 돌리는) 만수 내가 그런 쪽으론 텄거든. 점심 사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는데. 숙자 (흘기는) 딴 뜻이 있는 게 아니구? 만수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남의 여편네 꼬드길 마음은 없수다. 내가 얼마나 도덕적이고 양심 있는 사람인데. 그리고 우리 나이에는 로맨스도 로맨스가 아니라, 인생으로 보는 거요. 남들 이 아, 저 사람들 사랑하는구나 그렇게 볼 것 같소? 우리 나이에? 숙자 점심이나 먹으러 가요. 만수 (웃으며, 손잡는) 숙자 (보는)? 만수 이렇게 손을 잡아도 남들은 우릴 결코 불륜으로 보지 않는다는 거요. 노부부거나, 사이 좋은 친구 사이로 보지. 내가 조금만 젊었어도, 이렇게 남의 여자 손을 덥석 잡진 않아요. 우리 나이 되면 상대에게 다른 마음이 생기는 게 아니라, 같은 마음이 생기는 거요. 괜히 의심하거나 경계 할 필요 없단 얘기지. 갑시다. 숙자 직업이 뭐였어요? 교장이었어요? 무슨 남자가, 이렇게 말이 많아? S#2. 달리는 차 안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영희. S#3. 회상/철수 집 전경(밤/낡고 초라한 집) (E)영희 (버럭) 미쳤어? S#4. 철수 방(단칸방) 영희 결혼? 능력이나 있어? 우리 처지에 결혼이 가당키나 해? 철수 (고개 숙이는) 그래도, 아이를 지울 순 없잖아. 영희 대체 뭐가 있니? 학비도 버거워서 중퇴까지 한 판국에 아이까지 낳자는 말이 나오니? 철수 뭐든지 할게. 우리, 아직 젊잖아. 아이 하나 키우는 거, 그거 못하진 않아. 영희 (울먹이며) 말이 되는 소리 좀 해. 제 입 하나 건사 못하는 주제에 아이를 어떻게 키워? 내 동생 들에, 아이까지 니가 다 책임질 거야? 얘기 해봐, 어디. 어떻게 먹여 살릴 건지, 동생들 학비는 어떻게 감당할 건지, 대책 있음 어디 얘기 해봐. (울음 터뜨리 는) 니가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대체 뭐냐구. 철수 (영희 손잡고) 나, 취직할거야. 많이 보태주진 못해도, 할 수 있는 데 까진 해볼게. 영희 (뿌리치며) 됐어. 이 단칸방에서 아이까지 셋이 살자구? (소리 지르며) 지긋지긋해. 너도 지겹 고, 우리 가족들도 지겨워. 이 더럽고, 소름끼치는 가난도 지겨워. (일어나며) 지금 내 심정이 어 떤 줄 아니? 아이도 나도 그냥 같이 확 죽어버렸음 좋겠어. 넌, 왜 가난하니? 대체 가진 게 뭐 있 어? 젊음? (비웃는) 평생 죽도록 일만하다 젊음, 다 낭 비하고 나면 뭐가 남는데? 병든 몸뚱이 밖 에 더 남아? 당분간 나, 찾지 마. 내가 너 찾을 때까지 나, 찾을 생각하지 마. (나가버린다) S#5. 현실/달리는 차 안. 눈을 뜨는 영희.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영희 (받는) 네. (E)원장 여기 희망원입니다. 영희 네, 원장님. 어쩐 일이세요, 전화를 다 주시고. (E)원장 이번에 잡지사에서 사람을 소개 해달라지 뭐예요. 이 달의 숨은 일꾼이라는 란에 사모님을 추 천했습니다. 언제쯤 시간이 괜찮을까 해서요. 영희 원장님, 저 그러는 거 싫어요. 누가 알아달라고 한 일도 아니고, 그저 작은 일인데 칭찬 받을 일도 아니구. (E)원장 왜,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작은 일도 모르고 사는 사람 많습니다. 거절하지 마시고, 인터뷰 잠깐 해주세요. 그저 말씀만 잠깐 나누는 일인데요. 영희 정말 저를 부끄럽게 하실 거예요? (E)원장 부끄러운 일이라뇨. 저희로써는 너무나 감사한 일인데요. 날짜를 잡고 연락드릴게요. 그렇게 아시고, 들어가세요. (끊는) 영희 (끊으며 슬밋 웃음) S#5. 영애 원룸 앞 양 손에 장 본 물건 들고 오는 영애. 낯익은 차를 보자 몸을 숨긴다. 조금 후에 밖으로 나오는 영희.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그러다 차에 올라타는 영희. 차가 출발하자 걸어 나오는 영애. S#6.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숙자와 만수. 만수 바람이 제법 차가워졌어. 춥지 않아요? 숙자 괜찮아요. 이렇게 나와 앉아 있으니, 나름 좋네. 만수 당장 사람이 죽는다 생각하면, 못 할 것도 없지. 숙자 (보며)? 만수 사업한다고, 평생 마누라 속을 태웠수다. 어떤 날은 차라리 바람을 피우라 그럽디다. 사업한다 고, 여기저기 끌어다 쓴 빚 때문에 마누라 속병만 생겼지. 내가 뭔 일이라도 벌일라치면 덜컥 겁 부터 나서는 앓아눕기가 일쑤였소. 고생만 하다 갔지. 가고 보니, 그제야 알겠습디다. 사업한다 고, 바쁜 핑계대면서 남편 노릇, 아버지 노릇 제대로 하 길 했나. 다 큰 자식들도 지들 일 보느라, 마누라 혼자 외로운 인생 보냈지. 한 평생 왜 그렇게 살았나 싶은 게. 마누라 가고 나니, 외딴 섬 에 버려진 내 인생이 보입디다. 외롭고, 쓸쓸한 인생. 건강하게 마누라라도 함께 있었다면 내 인 생이 이렇게 외로울 까 싶고, 살아생전에 외롭고 쓸쓸했을 마누라 인생까지도 서럽게 느껴집 디다. 숙자 (한숨) 우리 집 양반하고 똑같네. 만수 진작 깨달았으면, 그렇게 쓸쓸하게 보내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 이겠수.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나, 그 죄 다 받으며 살아야지. 바깥양반, 사 업한다고 들었수. 젊을 땐, 잘 몰랐지만 말을 안 해 그렇지 지금은 알 거요. 후회도 할 거고. 이제와 남편 노릇 해보려니,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모를 거요. 숙자 우리 집 양반은 당신하고 틀려요. 만수 틀릴 게 뭐 있나? 똑같은 사람인데. 나도 남자지만, 남자는 다 애야. 겉으로만 대범한 척, 강한 척 할 뿐이지. 남자다, 남편이다 그런 생각하기 전에 나와 같은 사람이다, 그렇게 먼저 생각하면 아 무 것도 아니오. 당장 내일이면 세상에 없다 생각해보슈. 그 러면 참지 못할 일도, 용서 못 할 일 도 없지. 숙자 (시큰둥) 사람이 사람이지, 신인가. 만수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려요. 오늘이 첫 만남이고, 연애가 시작되는 날이다 생각하면 마음이 새로 워질 테니. 숙자 (말없이 앞만 보는) 만수 까짓 거, 못할 거 뭐 있어? 이 나이에 자존심 세워 뭐해? 하면 하는 거지. 세상 무서 울 나이는 아 니잖소. S#7. 단희집 전경/밤 (E)단희 이게 다 뭐야? S#8. 단희 집/ 방안 경애 (무거운 봉지 내려놓고) 너랑 한 잔 하려구. 단희 (일어나) 안 와도 되는데, 뭐 하러. (나가며) 상 가지고 올게. 경애 (겉옷 벗는) 잠시 후에 작은 상과 잔을 들고 오는 단희. 봉지 속에 든 소주와 갖가지 안주거리를 내놓고 상 위에 올려놓는 경애. 단희 시간도 늦었는데, 집으로 바로 가지. 경애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거야. 울 엄마한테 허락 받고 왔으니까, 확인 안 해도 돼. 단희 (웃는) 경애 언제나 그렇지만, 정말 재미없는 모임이야. 단희 왜애? 경애 기집애들은 하나 같이 남편 자랑에, 시부모 흉에, 아님 애인 자랑하기 바빴어, 남자들 은 어떻구? 아예 지 여자 친구 데리고 온 애들도 있더라. 참, 우혁인 못 왔어. 단희 그래? 경애 (소주병 따며) 장모 생신이래나 뭐래나. 암튼, 정말 잘난 애들 밖에 없더라. 무슨 병 도 아니구, 다들 왜 그런다니? 표정은 나, 엄청 불행해 그러는데 선수 쳐서 자랑이야. 그럼 뭐, 행복해 보이 나? 똥 씹은 표정에, 입 발린 소리 해대니까 구역질나더라. 단희 (웃으며) 그렇게 고깝게 들을 거 뭐 있어. 행복한가 보다 하지. 경애 눈에 다 보이잖어. 속물처럼 그러는 거 정말 보기 싫어 얘. 단희 (잔에 술을 따라 주며) 그러지 마. 경애 석주 왔더라. 누가 반긴다구 꼬박꼬박 참석하나 몰라. 허긴, 다른 애들은 아무 것도 모르지. 나하 구 우혁이 밖에 더 아니? 단희 (씁쓸한 표정, 자신의 잔에 술 채우는) 경애 다음 달에 결혼한대. 날짜 잡았더라구. 단희 (잔 들고) 건배. 경애 (잔 들며) 건배 소리가 나오니? (부딪히고 마시는) 좋다. 단희 (마시는) 석주 얘긴 그만 하자. 나, 이제 걔랑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야. 경애 상관없는 사람인데, 자꾸 화는 나네. 그 집 부모, 어지간히 했니? 상종 못할 인간들. 단희 경애야. 경애 알았어, 그만할게. 단희 (훈제 오징어 뜯어 경애에게 주는) 살면서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냐. 그것보다 더 못할 짓 많이 하고 사는 사람들 많어. 석주 부모님들, 야속하고 원망스럽긴 해도 자 기 자식 일인데, 그 정도 안 하는 부모 없어. 이해해, 난. 경애 속두 좋네. 단희 그게 부모 맘이잖어. (우울한 표정) 부모라도 다 부모는 아니지. 경애 (힐끔) 다시 찾았다는, 니네 엄마 말이니? 단희 (아무 말 않는) 경애 그 후로 연락 없어? 단희 뭐, 그렇지. 경애 어디 살어? 뭐하면서 산대니? 자식도 낳고 산대니? 단희 말 하고 싶지 않어. 경애 나, 전에부터 궁금했었는데 좀 묻자. 대산엔 왜 갑자기 취직 시켜 달라고 했어? (퍼득) 설마, 니 네 엄마하고 연관 있니? 단희 (아무 말 못하는) 경애 (놀란) 그래? 정말 그런 거야? 단희 묻지 마.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어. 때가 되면 말할게. 경애 너, 설마 다른 뜻 있어서 그런 거 아니지? 단희 그런 거 아냐. 경애 별 일 아니었음 좋겠다. 단희 (의미심장한) 별일 아냐. S#9. 방배동 거실에 앉아 있는 태준과 영희. 차를 마시고 있다. 영희 (힐끔 보다) 나 아는 사람이 취직자리 하나 부탁하던데. 태준 (차 마시다) 취직? 영희 네, 혹시 자리 없어요? 나이는 이제 갓 스물 다섯이래나. 마침 전공이 비서과라고 하더라구요. 태준 자리가 있나? 영희 그러니까 당신이 좀 손을 써 봐요. 아는 사람이라 모른 척할 수는 없구. 당신, 비서 입사한 지 얼 마 안됐다면서요? 그 자리, 내어줄 순 없어요? 태준 어떻게 그래? 영희 회장님 비서가 근무한 지 얼마나 됐지? 태준 아마 십 년쯤 됐을 걸. 영희 결혼했죠? 태준 했지. 영희 아인? 태준 재작년에 낳았지. 영희 살림하면서 직장 생활하기 힘들 텐데. 어떻게 안 되겠어요? 회장님 비서, 그만 쉬라 그러고 당신 비서 그쪽으로 인사발령 하면 되잖아요. 태준 회장님이 아끼는 사람이야. 그리고, 그런 거 나도 싫어. 당신, 변했어? 지인이다 뭐다 해서 줄 대 서 들어오는 거 싫어했던 사람이야. 그런 식으로 사람 바꾸는 거, 회사에도 흠만 돼. 왜 안 하 던 짓을 해? 영희 하도 간곡하게 말을 해서. 집안이 좀 어려운가봐요. 나, 그런 거 못 보는 성격이잖아. 태준 그래도 할 수 없어. 그건 말이 안 되지. 영희 내가 부탁해도 안 되는 일이죠? 태준 응. 영희 (실망) 알았어요 그럼. 없던 일로 해요. (난감한 표정) S#10. 서초동 대문 앞 숙자 오늘 저녁에 시간 어때요? 약속 있어요? 동섭 약속은 없어. 숙자 그럼, 회사 근처로 갈 테니까 저녁이나 같이 해요. 동섭 (?) 숙자 다녀와요. 동섭 (의아한 표정, 차에 오르고) 차가 멀어질 때까지 바라보고 서 있는 숙자. 숙자 그래, 해보자구. 뭐 어려운 일인가. S#10. 대산그룹 앞 서둘러 뛰는 단희. 뒤에서 클렉션 울리는 소리. 돌아본다. 태민 (차창 내리고) 지각하는 버릇은 여전하군. 단희 (인사하고) 태민 오늘 저녁에 시간 어때? 단희 (무시하고) 늦었거든요. 태민 나중에 전화하지. (출발하는) 단희 (웃겨 증말) S#11. 대산그룹 사장 비서실 서둘러 들어와 가방 내려놓고 차를 준비하는 단희. 그때 들어서는 태준. 단희 (인사하고) 안녕하세요. 태준 (고개 끄덕이고 사장실 문 열다 돌아보며) 참, 영화 고마웠어. 단희 (웃으며) 네. 괜찮으셨어요? 태준 좋았어. 나중에 밥 사지. 단희 네. 태준 (들어가는) 단희 (들어가는 태준의 뒤를 굳은 표정으로 보는) S#12. 원룸 (E)현관벨 소리. 가방 들고 나가려던 영애. 영애 (문 열고) 누구세요? 영희 (화난 표정으로 들어서는) 영애 (놀라, 뒤로 주춤) 영희 (신발 벗고 들어가는) 너 하나쯤 내가 못 찾아낼까봐? 영애 (돌아서는) 식은 죽 먹기지. 영희 (홱 돌아보는) 아주 숨어버리지, 왜 왔니? 영애 (비아냥) 그러게. 갑자기 후회가 되네. 영희 (다가와 뺨을 때리는) 나쁜 기집애. 영애 (피식) 영희 (버럭)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사는데? 영애 (경멸) 그러게. 그것도 끔찍하게 후회하는 중이야. 영희 너? 영애 돌릴 수 있다면, 다 돌려놓고 싶어. (피식) 걱정 마. 다 돌려 줄 테니까. 영희 (노여운) 그래? 그럼 어디 당장이라두 돌려줘 봐 어디. 영애 (노려보는) 영희 니가 누구 땜에 대학까지 졸업했는데? 유학은? 호시탐탐 내 주머니 노려서 털어 갈 땐, 양심도 없더니 이제 와 없던 양심이 불쑥 생겼어? 영애 그런 돈이었음, 애초에 욕심 안 냈어. 영희 변명이라고 해? 니가 뭘 알아? 뭘 알아서 니가 날 욕 해? 영애 너무 몰랐지 그 동안. 내 언닌, 적어도 양심까지 팔면서 자신의 출세를 탐하진 않았거든. 그런데, 내가 너무 몰랐던 거야.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거, 잊고 살았나봐. 뒤늦게야 없던 양 심까지 생기더라구. 영희 나 아니었음, 그렇게 살았어? 내가 누구 땜에 그랬는데? 영애 지금 우리 가족들 핑계 대? 누구 하나 언니 등 떠민 사람 없어. (버럭) 왜 갖다 붙여? 영희 니가 나였음, 어땠을 게? 방법이 있었겠어? 그럼 그 상황에 애 낳아 모조리 책임 져? 영애 적어도 노력은 했어야 했어. 영희 노력? 무슨 노력? 대학 이 년 동안 장학금 받으려고 코피 터지게 공부하고, 닥치는대 로 아르바 이트해서 생활비 벌었어. 그런데도 남는 건 아무 것도 없었어. 여전히 끼니 걱정에, 집세 걱정에, 아버지 병원비는 턱없이 부족했어. 니네들 학비, 그거 다 어디 서 나온 건데? 양심? 당장 내 입에 풀칠하기도 벅찬데, 아이를 어떻게 책임져? 영애 (경멸) 핑계 대지 마. 언니만 우리 때문에 희생한 거 아냐. 우리도 그렇게 컸어. 언니 가 우리보다 더 고생한 거 알어. 우린 뭐 놀고 먹었어? 언니 같은 심정, 우리도 똑같 어. 하지만 다르잖아. 살기 편할 때, 아이는 찾아야 했어. 버린 건 어쩔 수 없다 쳐. 살만해졌을 땐, 다시 찾아야 했어. 영희 찾아서? 숨겨 둔 자식 있었노라고 지금에라도 떳떳하게 양심 선언해? 아무 것도 모르던 남편, 아이들은 어쩌구? 내 양심보다 내 가족들이 우선이었어. 영애 언닌, 단 한 번도 그 사람을 찾아 가지 않았어. 어디서 살고 있는지 알면서도 언닌, 딸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어. 양심 선언하래? 적어두, 딸을 만나 용서를 빌어야 했어. 우리 가족들한테는 그렇다 쳐. 아이가 무슨 죄야? 그 사람한테 식은 애정도 그만두자 그래. 아이는 뭐냐구 글쎄. 영희 그건 내 문제야. 니가 왜 그런 거까지 관섭해? 영애 독하고 모질어. 우리 엄만 그러지 않으셨어.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댔어. 지금의 자 식이 소중한 것처럼, 그 아이도 언니한테는 소중한 자식이야. 다른 건 몰라도, 부모로써의 책임은 져야 했어. 언니가 조금만 더 진실했다면, 이러지 않아. 언닌, 끝까지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하고 있어. 우리 가족들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람과 그 아이 때문에 무조건 언닌, 피해자야. 가진 걸 하 루아침에 뺏길까 그게 겁이 나는 거겠지. 좀 솔직해져 봐. 남의 탓만 하지 말고, 언니 자신을 돌아 보라구. 비겁하고, 불쌍해. 불쌍해 죽겠어. 영희 (뺨 때리는) 니가 뭘 알아?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냐. 어디서 말을 함부로 해. 적어도 너한테 그런 소리 들을 이유 없어. 그래, 니 맘대로 해. 나두 너 없다 생각하고 살면 그만이야. 두 번 다 시는 가족들 앞에 나타나지 마. (나가다 돌아보는) 그렇게 잘난 애가, 조카라면서 넌 어디 한 번 들여다보기라도 했니? 두렵고 무섭겠지. 그런 니 맘처럼 내 맘도 그랬어. 나도 사람이야. 피도 눈물도 없는 짐승이 아니라, 나두 사람이라구. (쾅 닫고 나가는) 영애 (분노하는 마음 한 순간 무너지는) S#13. 숙희 집 작은 방에서 나오는 영국. 거실에 서 있는 숙희. 영국 (침울한) 숙희 (방문 열고) 하나야. 안 나와 볼 거야? 영국 됐어. 숙희 (문 닫는) 누구 고집을 닮아서 저럴까. 영국 필요한 서류는 항공편으로 다 보낼게. 숙희 그렇게 해. 영국 (미안한) 하나, 잘 부탁해. 숙희 하나 걱정 하지 말구, 잘 살어. 영국 아주 안 보는 거 아냐. 시간이 되면, 한 달에 한 번, 적어도 두 달에 한 번은 올 거야. 숙희 자신하지 마. 살아 보면 그게 쉽진 않어. 영국 약속해. 숙희 당신, 지키지도 못할 약속 잘 하잖어. 매번 왜 그렇게 어리석어? 사람을 왜 그렇게 기대하게 만들 어? 그런 기대, 만들지 말라구. 당신이 그래서, 내가 지금껏 이렇게 산 거야. 그런 터무니없는 약 속, 하지 않았음 진작 새 출발 했어. 영국 (말 못하고) 숙희 하나한테 편지만 자주 해. 난, 신경 쓰지 마. 영국 (고개 끄덕이며) 미안하다. 숙희 진심이었음 좋겠네. 영국 (돌아서 현관으로 나가는) 숙희 (팔짱 끼고 서서) 잘 가. 영국 (신발 신고 보는) 니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아. 그저 나하고 맞지 않았을 뿐이야. 숙희 (피식)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그 말이 더 싫네. 영국 갈게. 숙희 가. 영국 (나가는) 숙희 (닫힌 문 바라보다 눈물 솟는) 하나 (문 열고 나오는) 엄마 울어? 숙희 (서둘러 눈물 훔치며 돌아보는) 울긴 누가 울어? 하나 아빠랑 마지막 포옹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나 엄마 생각해서 안 했어. 나까지 배신감 느끼게 할 까봐. 난, 무조건 엄마 편이야. (다가와) 세상에 남잔, 얼마든지 있어. 숙희 너, 애늙이 같어. 그런 말은 다 어디서 배웠니? 하나 (한숨) 인생이 고달픈 사람은 저절로 알게 되잖어. 누가 가르쳐 줘야 아나? 숙희 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징그러 얘. 어디가서두 그렇게 말하지 마. 미움 받어. 하나 (웃으며) 말만 그렇게 해. 나도 별수 없는 애라구. 숙희 (머리 쓰다듬고) 그래두 넌, 엄마한테 애야. 애처럼 굴어. 그렇게 어른 흉내 내면 엄마 맘이 더 아퍼. 요즘 애들이 아무리 성장이 빠르다고 해도, 너처럼 굴지 않어. 하나 (안으며) 요즘 애들은 유치하고 시시해. 숙희 난, 니가 유치하고 시시했음 좋겠어. 하나 엄만, 유치한 걸 좋아하는 구나? 그래서 촌스럽게 아빠랑 헤어진 거야. 숙희 (말 않고 등을 다독이는) 그래, 나 촌스럽다. 니가 유치한 게 좋은 것처럼, 촌스러워.
위험한 질주(6화-1)
제 6 부
S#1. 극장 실내
관람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는 숙자와 만수.
만수 어땠소?
숙자 뭐, 그냥 그랬어요. 현실감 없는 영화.
만수 현실감이 없지만, 사람들이 늘 꿈꾸는 영화지.
숙자 난, 그런 꿈도 꿔 본 적 없어요.
만수 (서서 보는) 카운슬러가 필요한 것 같은데.
숙자 뭐, 뭐가요?
만수 인생 시들하게 느껴지는 거, 부부사이도 시들해졌다는 거 아니오?
숙자 (말 못하고 고개 돌리는)
만수 내가 그런 쪽으론 텄거든. 점심 사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는데.
숙자 (흘기는) 딴 뜻이 있는 게 아니구?
만수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남의 여편네 꼬드길 마음은 없수다. 내가 얼마나 도덕적이고 양심
있는 사람인데. 그리고 우리 나이에는 로맨스도 로맨스가 아니라, 인생으로 보는 거요. 남들
이 아, 저 사람들 사랑하는구나 그렇게 볼 것 같소? 우리 나이에?
숙자 점심이나 먹으러 가요.
만수 (웃으며, 손잡는)
숙자 (보는)?
만수 이렇게 손을 잡아도 남들은 우릴 결코 불륜으로 보지 않는다는 거요. 노부부거나, 사이 좋은
친구 사이로 보지. 내가 조금만 젊었어도, 이렇게 남의 여자 손을 덥석 잡진 않아요. 우리 나이
되면 상대에게 다른 마음이 생기는 게 아니라, 같은 마음이 생기는 거요. 괜히 의심하거나 경계
할 필요 없단 얘기지. 갑시다.
숙자 직업이 뭐였어요? 교장이었어요? 무슨 남자가, 이렇게 말이 많아?
S#2. 달리는 차 안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영희.
S#3. 회상/철수 집 전경(밤/낡고 초라한 집)
(E)영희 (버럭) 미쳤어?
S#4. 철수 방(단칸방)
영희 결혼? 능력이나 있어? 우리 처지에 결혼이 가당키나 해?
철수 (고개 숙이는) 그래도, 아이를 지울 순 없잖아.
영희 대체 뭐가 있니? 학비도 버거워서 중퇴까지 한 판국에 아이까지 낳자는 말이 나오니?
철수 뭐든지 할게. 우리, 아직 젊잖아. 아이 하나 키우는 거, 그거 못하진 않아.
영희 (울먹이며) 말이 되는 소리 좀 해. 제 입 하나 건사 못하는 주제에 아이를 어떻게 키워? 내 동생
들에, 아이까지 니가 다 책임질 거야? 얘기 해봐, 어디. 어떻게 먹여 살릴 건지, 동생들 학비는
어떻게 감당할 건지, 대책 있음 어디 얘기 해봐. (울음 터뜨리 는) 니가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대체 뭐냐구.
철수 (영희 손잡고) 나, 취직할거야. 많이 보태주진 못해도, 할 수 있는 데 까진 해볼게.
영희 (뿌리치며) 됐어. 이 단칸방에서 아이까지 셋이 살자구? (소리 지르며) 지긋지긋해. 너도 지겹
고, 우리 가족들도 지겨워. 이 더럽고, 소름끼치는 가난도 지겨워. (일어나며) 지금 내 심정이 어
떤 줄 아니? 아이도 나도 그냥 같이 확 죽어버렸음 좋겠어. 넌, 왜 가난하니? 대체 가진 게 뭐 있
어? 젊음? (비웃는) 평생 죽도록 일만하다 젊음, 다 낭 비하고 나면 뭐가 남는데? 병든 몸뚱이 밖
에 더 남아? 당분간 나, 찾지 마. 내가 너 찾을 때까지 나, 찾을 생각하지 마. (나가버린다)
S#5. 현실/달리는 차 안.
눈을 뜨는 영희.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영희 (받는) 네.
(E)원장 여기 희망원입니다.
영희 네, 원장님. 어쩐 일이세요, 전화를 다 주시고.
(E)원장 이번에 잡지사에서 사람을 소개 해달라지 뭐예요. 이 달의 숨은 일꾼이라는 란에 사모님을 추
천했습니다. 언제쯤 시간이 괜찮을까 해서요.
영희 원장님, 저 그러는 거 싫어요. 누가 알아달라고 한 일도 아니고, 그저 작은 일인데 칭찬 받을
일도 아니구.
(E)원장 왜,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작은 일도 모르고 사는 사람 많습니다. 거절하지 마시고, 인터뷰
잠깐 해주세요. 그저 말씀만 잠깐 나누는 일인데요.
영희 정말 저를 부끄럽게 하실 거예요?
(E)원장 부끄러운 일이라뇨. 저희로써는 너무나 감사한 일인데요. 날짜를 잡고 연락드릴게요. 그렇게
아시고, 들어가세요. (끊는)
영희 (끊으며 슬밋 웃음)
S#5. 영애 원룸 앞
양 손에 장 본 물건 들고 오는 영애. 낯익은 차를 보자 몸을 숨긴다.
조금 후에 밖으로 나오는 영희.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그러다 차에 올라타는 영희.
차가 출발하자 걸어 나오는 영애.
S#6.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숙자와 만수.
만수 바람이 제법 차가워졌어. 춥지 않아요?
숙자 괜찮아요. 이렇게 나와 앉아 있으니, 나름 좋네.
만수 당장 사람이 죽는다 생각하면, 못 할 것도 없지.
숙자 (보며)?
만수 사업한다고, 평생 마누라 속을 태웠수다. 어떤 날은 차라리 바람을 피우라 그럽디다. 사업한다
고, 여기저기 끌어다 쓴 빚 때문에 마누라 속병만 생겼지. 내가 뭔 일이라도 벌일라치면 덜컥 겁
부터 나서는 앓아눕기가 일쑤였소. 고생만 하다 갔지. 가고 보니, 그제야 알겠습디다. 사업한다
고, 바쁜 핑계대면서 남편 노릇, 아버지 노릇 제대로 하 길 했나. 다 큰 자식들도 지들 일 보느라,
마누라 혼자 외로운 인생 보냈지. 한 평생 왜 그렇게 살았나 싶은 게. 마누라 가고 나니, 외딴 섬
에 버려진 내 인생이 보입디다. 외롭고, 쓸쓸한 인생. 건강하게 마누라라도 함께 있었다면 내 인
생이 이렇게 외로울 까 싶고, 살아생전에 외롭고 쓸쓸했을 마누라 인생까지도 서럽게 느껴집
디다.
숙자 (한숨) 우리 집 양반하고 똑같네.
만수 진작 깨달았으면, 그렇게 쓸쓸하게 보내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
이겠수.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나, 그 죄 다 받으며 살아야지. 바깥양반, 사 업한다고 들었수. 젊을
땐, 잘 몰랐지만 말을 안 해 그렇지 지금은 알 거요. 후회도 할 거고. 이제와 남편 노릇 해보려니,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모를 거요.
숙자 우리 집 양반은 당신하고 틀려요.
만수 틀릴 게 뭐 있나? 똑같은 사람인데. 나도 남자지만, 남자는 다 애야. 겉으로만 대범한 척, 강한 척
할 뿐이지. 남자다, 남편이다 그런 생각하기 전에 나와 같은 사람이다, 그렇게 먼저 생각하면 아
무 것도 아니오. 당장 내일이면 세상에 없다 생각해보슈. 그 러면 참지 못할 일도, 용서 못 할 일
도 없지.
숙자 (시큰둥) 사람이 사람이지, 신인가.
만수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려요. 오늘이 첫 만남이고, 연애가 시작되는 날이다 생각하면 마음이 새로
워질 테니.
숙자 (말없이 앞만 보는)
만수 까짓 거, 못할 거 뭐 있어? 이 나이에 자존심 세워 뭐해? 하면 하는 거지. 세상 무서 울 나이는 아
니잖소.
S#7. 단희집 전경/밤
(E)단희 이게 다 뭐야?
S#8. 단희 집/ 방안
경애 (무거운 봉지 내려놓고) 너랑 한 잔 하려구.
단희 (일어나) 안 와도 되는데, 뭐 하러. (나가며) 상 가지고 올게.
경애 (겉옷 벗는)
잠시 후에 작은 상과 잔을 들고 오는 단희. 봉지 속에 든 소주와 갖가지 안주거리를 내놓고
상 위에 올려놓는 경애.
단희 시간도 늦었는데, 집으로 바로 가지.
경애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거야. 울 엄마한테 허락 받고 왔으니까, 확인 안 해도 돼.
단희 (웃는)
경애 언제나 그렇지만, 정말 재미없는 모임이야.
단희 왜애?
경애 기집애들은 하나 같이 남편 자랑에, 시부모 흉에, 아님 애인 자랑하기 바빴어, 남자들 은 어떻구?
아예 지 여자 친구 데리고 온 애들도 있더라. 참, 우혁인 못 왔어.
단희 그래?
경애 (소주병 따며) 장모 생신이래나 뭐래나. 암튼, 정말 잘난 애들 밖에 없더라. 무슨 병 도 아니구,
다들 왜 그런다니? 표정은 나, 엄청 불행해 그러는데 선수 쳐서 자랑이야. 그럼 뭐, 행복해 보이
나? 똥 씹은 표정에, 입 발린 소리 해대니까 구역질나더라.
단희 (웃으며) 그렇게 고깝게 들을 거 뭐 있어. 행복한가 보다 하지.
경애 눈에 다 보이잖어. 속물처럼 그러는 거 정말 보기 싫어 얘.
단희 (잔에 술을 따라 주며) 그러지 마.
경애 석주 왔더라. 누가 반긴다구 꼬박꼬박 참석하나 몰라. 허긴, 다른 애들은 아무 것도 모르지. 나하
구 우혁이 밖에 더 아니?
단희 (씁쓸한 표정, 자신의 잔에 술 채우는)
경애 다음 달에 결혼한대. 날짜 잡았더라구.
단희 (잔 들고) 건배.
경애 (잔 들며) 건배 소리가 나오니? (부딪히고 마시는) 좋다.
단희 (마시는) 석주 얘긴 그만 하자. 나, 이제 걔랑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야.
경애 상관없는 사람인데, 자꾸 화는 나네. 그 집 부모, 어지간히 했니? 상종 못할 인간들.
단희 경애야.
경애 알았어, 그만할게.
단희 (훈제 오징어 뜯어 경애에게 주는) 살면서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냐. 그것보다 더 못할 짓 많이
하고 사는 사람들 많어. 석주 부모님들, 야속하고 원망스럽긴 해도 자 기 자식 일인데, 그 정도
안 하는 부모 없어. 이해해, 난.
경애 속두 좋네.
단희 그게 부모 맘이잖어. (우울한 표정) 부모라도 다 부모는 아니지.
경애 (힐끔) 다시 찾았다는, 니네 엄마 말이니?
단희 (아무 말 않는)
경애 그 후로 연락 없어?
단희 뭐, 그렇지.
경애 어디 살어? 뭐하면서 산대니? 자식도 낳고 산대니?
단희 말 하고 싶지 않어.
경애 나, 전에부터 궁금했었는데 좀 묻자. 대산엔 왜 갑자기 취직 시켜 달라고 했어? (퍼득) 설마, 니
네 엄마하고 연관 있니?
단희 (아무 말 못하는)
경애 (놀란) 그래? 정말 그런 거야?
단희 묻지 마.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어. 때가 되면 말할게.
경애 너, 설마 다른 뜻 있어서 그런 거 아니지?
단희 그런 거 아냐.
경애 별 일 아니었음 좋겠다.
단희 (의미심장한) 별일 아냐.
S#9. 방배동
거실에 앉아 있는 태준과 영희. 차를 마시고 있다.
영희 (힐끔 보다) 나 아는 사람이 취직자리 하나 부탁하던데.
태준 (차 마시다) 취직?
영희 네, 혹시 자리 없어요? 나이는 이제 갓 스물 다섯이래나. 마침 전공이 비서과라고 하더라구요.
태준 자리가 있나?
영희 그러니까 당신이 좀 손을 써 봐요. 아는 사람이라 모른 척할 수는 없구. 당신, 비서 입사한 지 얼
마 안됐다면서요? 그 자리, 내어줄 순 없어요?
태준 어떻게 그래?
영희 회장님 비서가 근무한 지 얼마나 됐지?
태준 아마 십 년쯤 됐을 걸.
영희 결혼했죠?
태준 했지.
영희 아인?
태준 재작년에 낳았지.
영희 살림하면서 직장 생활하기 힘들 텐데. 어떻게 안 되겠어요? 회장님 비서, 그만 쉬라 그러고 당신
비서 그쪽으로 인사발령 하면 되잖아요.
태준 회장님이 아끼는 사람이야. 그리고, 그런 거 나도 싫어. 당신, 변했어? 지인이다 뭐다 해서 줄 대
서 들어오는 거 싫어했던 사람이야. 그런 식으로 사람 바꾸는 거, 회사에도 흠만 돼. 왜 안 하
던 짓을 해?
영희 하도 간곡하게 말을 해서. 집안이 좀 어려운가봐요. 나, 그런 거 못 보는 성격이잖아.
태준 그래도 할 수 없어. 그건 말이 안 되지.
영희 내가 부탁해도 안 되는 일이죠?
태준 응.
영희 (실망) 알았어요 그럼. 없던 일로 해요. (난감한 표정)
S#10. 서초동 대문 앞
숙자 오늘 저녁에 시간 어때요? 약속 있어요?
동섭 약속은 없어.
숙자 그럼, 회사 근처로 갈 테니까 저녁이나 같이 해요.
동섭 (?)
숙자 다녀와요.
동섭 (의아한 표정, 차에 오르고)
차가 멀어질 때까지 바라보고 서 있는 숙자.
숙자 그래, 해보자구. 뭐 어려운 일인가.
S#10. 대산그룹 앞
서둘러 뛰는 단희. 뒤에서 클렉션 울리는 소리. 돌아본다.
태민 (차창 내리고) 지각하는 버릇은 여전하군.
단희 (인사하고)
태민 오늘 저녁에 시간 어때?
단희 (무시하고) 늦었거든요.
태민 나중에 전화하지. (출발하는)
단희 (웃겨 증말)
S#11. 대산그룹 사장 비서실
서둘러 들어와 가방 내려놓고 차를 준비하는 단희. 그때 들어서는 태준.
단희 (인사하고) 안녕하세요.
태준 (고개 끄덕이고 사장실 문 열다 돌아보며) 참, 영화 고마웠어.
단희 (웃으며) 네. 괜찮으셨어요?
태준 좋았어. 나중에 밥 사지.
단희 네.
태준 (들어가는)
단희 (들어가는 태준의 뒤를 굳은 표정으로 보는)
S#12. 원룸
(E)현관벨 소리. 가방 들고 나가려던 영애.
영애 (문 열고) 누구세요?
영희 (화난 표정으로 들어서는)
영애 (놀라, 뒤로 주춤)
영희 (신발 벗고 들어가는) 너 하나쯤 내가 못 찾아낼까봐?
영애 (돌아서는) 식은 죽 먹기지.
영희 (홱 돌아보는) 아주 숨어버리지, 왜 왔니?
영애 (비아냥) 그러게. 갑자기 후회가 되네.
영희 (다가와 뺨을 때리는) 나쁜 기집애.
영애 (피식)
영희 (버럭)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사는데?
영애 (경멸) 그러게. 그것도 끔찍하게 후회하는 중이야.
영희 너?
영애 돌릴 수 있다면, 다 돌려놓고 싶어. (피식) 걱정 마. 다 돌려 줄 테니까.
영희 (노여운) 그래? 그럼 어디 당장이라두 돌려줘 봐 어디.
영애 (노려보는)
영희 니가 누구 땜에 대학까지 졸업했는데? 유학은? 호시탐탐 내 주머니 노려서 털어 갈 땐, 양심도
없더니 이제 와 없던 양심이 불쑥 생겼어?
영애 그런 돈이었음, 애초에 욕심 안 냈어.
영희 변명이라고 해? 니가 뭘 알아? 뭘 알아서 니가 날 욕 해?
영애 너무 몰랐지 그 동안. 내 언닌, 적어도 양심까지 팔면서 자신의 출세를 탐하진 않았거든. 그런데,
내가 너무 몰랐던 거야.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거, 잊고 살았나봐. 뒤늦게야 없던 양
심까지 생기더라구.
영희 나 아니었음, 그렇게 살았어? 내가 누구 땜에 그랬는데?
영애 지금 우리 가족들 핑계 대? 누구 하나 언니 등 떠민 사람 없어. (버럭) 왜 갖다 붙여?
영희 니가 나였음, 어땠을 게? 방법이 있었겠어? 그럼 그 상황에 애 낳아 모조리 책임 져?
영애 적어도 노력은 했어야 했어.
영희 노력? 무슨 노력? 대학 이 년 동안 장학금 받으려고 코피 터지게 공부하고, 닥치는대 로 아르바
이트해서 생활비 벌었어. 그런데도 남는 건 아무 것도 없었어. 여전히 끼니 걱정에, 집세 걱정에,
아버지 병원비는 턱없이 부족했어. 니네들 학비, 그거 다 어디 서 나온 건데? 양심? 당장 내 입에
풀칠하기도 벅찬데, 아이를 어떻게 책임져?
영애 (경멸) 핑계 대지 마. 언니만 우리 때문에 희생한 거 아냐. 우리도 그렇게 컸어. 언니 가 우리보다
더 고생한 거 알어. 우린 뭐 놀고 먹었어? 언니 같은 심정, 우리도 똑같 어. 하지만 다르잖아.
살기 편할 때, 아이는 찾아야 했어. 버린 건 어쩔 수 없다 쳐. 살만해졌을 땐, 다시 찾아야 했어.
영희 찾아서? 숨겨 둔 자식 있었노라고 지금에라도 떳떳하게 양심 선언해? 아무 것도 모르던 남편,
아이들은 어쩌구? 내 양심보다 내 가족들이 우선이었어.
영애 언닌, 단 한 번도 그 사람을 찾아 가지 않았어. 어디서 살고 있는지 알면서도 언닌, 딸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어. 양심 선언하래? 적어두, 딸을 만나 용서를 빌어야 했어. 우리 가족들한테는 그렇다
쳐. 아이가 무슨 죄야? 그 사람한테 식은 애정도 그만두자 그래. 아이는 뭐냐구 글쎄.
영희 그건 내 문제야. 니가 왜 그런 거까지 관섭해?
영애 독하고 모질어. 우리 엄만 그러지 않으셨어.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댔어. 지금의 자
식이 소중한 것처럼, 그 아이도 언니한테는 소중한 자식이야. 다른 건 몰라도, 부모로써의 책임은
져야 했어. 언니가 조금만 더 진실했다면, 이러지 않아. 언닌, 끝까지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하고
있어. 우리 가족들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람과 그 아이 때문에 무조건 언닌, 피해자야. 가진 걸 하
루아침에 뺏길까 그게 겁이 나는 거겠지. 좀 솔직해져 봐. 남의 탓만 하지 말고, 언니 자신을 돌아
보라구. 비겁하고, 불쌍해. 불쌍해 죽겠어.
영희 (뺨 때리는) 니가 뭘 알아?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냐. 어디서 말을 함부로 해. 적어도 너한테
그런 소리 들을 이유 없어. 그래, 니 맘대로 해. 나두 너 없다 생각하고 살면 그만이야. 두 번 다
시는 가족들 앞에 나타나지 마. (나가다 돌아보는) 그렇게 잘난 애가, 조카라면서 넌 어디 한 번
들여다보기라도 했니? 두렵고 무섭겠지. 그런 니 맘처럼 내 맘도 그랬어. 나도 사람이야. 피도
눈물도 없는 짐승이 아니라, 나두 사람이라구. (쾅 닫고 나가는)
영애 (분노하는 마음 한 순간 무너지는)
S#13. 숙희 집
작은 방에서 나오는 영국. 거실에 서 있는 숙희.
영국 (침울한)
숙희 (방문 열고) 하나야. 안 나와 볼 거야?
영국 됐어.
숙희 (문 닫는) 누구 고집을 닮아서 저럴까.
영국 필요한 서류는 항공편으로 다 보낼게.
숙희 그렇게 해.
영국 (미안한) 하나, 잘 부탁해.
숙희 하나 걱정 하지 말구, 잘 살어.
영국 아주 안 보는 거 아냐. 시간이 되면, 한 달에 한 번, 적어도 두 달에 한 번은 올 거야.
숙희 자신하지 마. 살아 보면 그게 쉽진 않어.
영국 약속해.
숙희 당신, 지키지도 못할 약속 잘 하잖어. 매번 왜 그렇게 어리석어? 사람을 왜 그렇게 기대하게 만들
어? 그런 기대, 만들지 말라구. 당신이 그래서, 내가 지금껏 이렇게 산 거야. 그런 터무니없는 약
속, 하지 않았음 진작 새 출발 했어.
영국 (말 못하고)
숙희 하나한테 편지만 자주 해. 난, 신경 쓰지 마.
영국 (고개 끄덕이며) 미안하다.
숙희 진심이었음 좋겠네.
영국 (돌아서 현관으로 나가는)
숙희 (팔짱 끼고 서서) 잘 가.
영국 (신발 신고 보는) 니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아. 그저 나하고 맞지 않았을 뿐이야.
숙희 (피식)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그 말이 더 싫네.
영국 갈게.
숙희 가.
영국 (나가는)
숙희 (닫힌 문 바라보다 눈물 솟는)
하나 (문 열고 나오는) 엄마 울어?
숙희 (서둘러 눈물 훔치며 돌아보는) 울긴 누가 울어?
하나 아빠랑 마지막 포옹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나 엄마 생각해서 안 했어. 나까지 배신감 느끼게 할
까봐. 난, 무조건 엄마 편이야. (다가와) 세상에 남잔, 얼마든지 있어.
숙희 너, 애늙이 같어. 그런 말은 다 어디서 배웠니?
하나 (한숨) 인생이 고달픈 사람은 저절로 알게 되잖어. 누가 가르쳐 줘야 아나?
숙희 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징그러 얘. 어디가서두 그렇게 말하지 마. 미움 받어.
하나 (웃으며) 말만 그렇게 해. 나도 별수 없는 애라구.
숙희 (머리 쓰다듬고) 그래두 넌, 엄마한테 애야. 애처럼 굴어. 그렇게 어른 흉내 내면 엄마 맘이 더
아퍼. 요즘 애들이 아무리 성장이 빠르다고 해도, 너처럼 굴지 않어.
하나 (안으며) 요즘 애들은 유치하고 시시해.
숙희 난, 니가 유치하고 시시했음 좋겠어.
하나 엄만, 유치한 걸 좋아하는 구나? 그래서 촌스럽게 아빠랑 헤어진 거야.
숙희 (말 않고 등을 다독이는) 그래, 나 촌스럽다. 니가 유치한 게 좋은 것처럼, 촌스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