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님, 오래오래 사셨으면......

막내며느리2007.01.20
조회805

며칠 전 글올렸던... 눈치없는 신랑 덕에 본의 아니게 시댁 초행길부터 세게(?) 나가게 된 막내며느리입니다. 사사건건 부인과 처가는 젖혀두고 자기 가족 우선이고, 대화하는 듯 하면서도 실제로는 전혀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싸움이 되면 고집까지 부리는 남편한테 질려서 진지하게 이혼을 생각중이라는 고민도 전에 올렸었죠.(둘리... 그 때 달래주고 조언해 주신 분들 고맙습니다.) 이제 그 결과를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마지막 싸움이 있은 뒤 일주일 정도 지나자 신랑도 생고집을 꺾기 시작하면서 사실은 자기가 이래저래 잘못한거 안다, 미안하다 하더군요. 하지만 전 근본적인 생활패턴이랄까 사상 자체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선뜻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냉각기를 가졌고, 남편도 이제 문제점을 스스로 <제대로> 파악하더군요. 이전의 사과도 나름대로 진심이었겠지만, 그것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말에는 얼굴을 마주보고 얘기할까 싶어 서울집에 갔었는데 제가 집에 온줄 몰랐던 신랑이 밤늦게 갑자기 부모님을 모시고 오고 있는 중이라고 해서 제가 서둘러 야반도주하다시피-_-;; 일하러 한국 들어가면 머무는 호텔로 간 적이 있습니다. 이혼하네 마네 그런 얘기 중인데 태연한 얼굴로 부모님 저녁 차려드리고 아침상 봐드리고 다시 일하러 갈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타이밍이... 제가 집에서 나가는 모습을 부모님께서 보셨나봅니다. 그래서 사실은 제가 이런저런 일로 시댁에도 많이 서운하고 무엇보다 신랑한테 너무 맺힌게 많아 이혼까지 고려중인 상태라고 모두 말씀드렸대요.

 

아버님께서... 집안 사람들끼리 그런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며 너무 놀라시고 속상해하시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하시더래요.ㅠㅠ 서운한 말씀으로 가슴에 못박으신 어머님, 여러가지 신경전 벌인 아주버님, 누구보다 남편 노릇 제대로 못한 제 신랑... 아버님이 많이 꾸중하신 것 같습니다. 새식구 받아서 가족답게 처신 못했다고. 당신은 까맣게 모르고 있는 동안 지금까지 저희 둘이 그런 문제로 싸우고 힘들었던거 생각하니 너무 미안하시답니다. 에효~

 

이 얘기를 들어서 맘을 다잡은건 아니고, 먼저 신랑과 다시 같이 잘 살아보려면 앞으로는 어떻게 하자 얘기하던 끝자락에 들은 얘기인데요, 듣는 순간 솔직히 울컥 하고 콧등이 시큰하대요.

 

저희 아버님... 연세 많으시죠. 할아버지뻘입니다. 너무 재밌고 말씀도 잘 하신다는데, 저는 첫인사 드릴 때부터 아버님 몇말씀 하시는걸 못봤어요. 제 앞에선 잘 웃지도 않으시고 입 꾹 다물고 계십니다. 내가 맘에 안드시는 건가? 군기 잡으시려는 건가? 걱정돼서 신랑한테 물어보니, 오랜만에 며느리 보시느라 쑥스럽고 긴장하셔서 그렇답니다. 아버님도 며느리한테 잘 보이고 싶은 거라고.ㅋㅋ 그게 결혼하고 8개월이 되어도 여전하시네요.

 

제가 예단비를 드리면서 편지를 써드렸는데요, 그거 읽으시고 속깊은 며느리 들어온다고 너무 흐뭇하셔서 계속 손에 쥐고 몇 번 읽으시고 당신께서 어머니께 직접 읽어드렸답니다.^^;; 것두 전 편지 써놓고 쑥스럽고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한데 암말씀 안하시더니, 어머니께서 늬아버지 좋아 죽을라고 한다, 그 편지가 자기건 줄 안다 말씀해 주셔서 알았어요.

 

머리가 백발이시니 늙어보이면 신부 창피하다고 결혼식장에 염색하고 가시라는 시누이 말에 "내가 늙은걸 어떡하냐, 쓸 데 없는 소리 말아라"  몇 번이나 하셔놓고, 결혼식날 어머니까지 싹 검은 염색하고 오셨습니다. 이런 말 괜찮으려나... 귀여우시죠.우리 아버님, 오래오래 사셨으면......

 

얼떨결에 용감한 며느리 된 결혼 후 첫인사길, 찌는 삼복더위에 에어컨은 커녕 선풍기도 모자란 섬집에서 막내내외 와서 잘 방이라고 도배지를 사다가 손수 싹 도배하셨답니다. 그 섬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로 예쁜 보라색 꽃무늬로요... 신랑이랑 연애하면서도 옆구리 50번쯤 찔러 절받은 프로포즈 외에는 그런 정성의 이벤트는 받아본 적 없습니다. 형님들께서 "우린 그런거 없었는데 동서만 특별대우받네~" 하고 놀리시는 것도 좋아서 "아버님, 정말 감동이에요!" 만 외쳤죠. (저만 특별대우는 아니고 며느리들 공평하게 이뻐하십니다. 형님들 결혼하셨을 땐 방을 따로 도배할 필요가 없었나봐요. 지금은 섬에 가 계셔서 바닷바람에 방에 곰팡이가 많이 핀다고...)

그 뿐인가요. 종일 일하고 자정 넘어 자러 들어가니 매트리스에 깨끗한 시트가 깔려있고 이불도 펴져 있네요. 어머님께서 봐준 자리인 줄 알고 고맙다고 인사드리니까 아버님이 손수 까셨다네요. 그러고 보니 오후 내내 고친다고 손보시던 선풍기도 저희 방 앞에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가족들 많이 모였는데 시댁에 작동하는 선풍기 하나, 고장난거 하나 있었거든요.)

 

다음날 어린 시조카들과 함께 낚시질한 잔물고기들로 매운탕 끓여드리니 그 때도 어허~ 허~ 하고 말씀 많이 않으시고 약주 하시더니... 그 다음날 아침 어머니께서 늬 아버지 약주 많이 드심 안되는데, 어젯밤 기분 좋다고 그 매운탕 다 드시느라 소주를 두 병 가까이 드셨다고, 칭찬인지 타박인지 모를 소리도 하십니다.

 

이제 우리집의 가장이니까 가족들이 막내야, 막둥아 부르는거 그만 했으면 좋겠다고, 사람은 이름을 불러주면 그 이름의 좋은 뜻이 영향을 미친다더라, 이젠 내가 이 집의 막내가 될 테니 오빠는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말씀드리면 건방지게 보이거나 서운하실 수 있으니까 오빠가 잘 말씀드려달라는걸 곰팅이같은 신랑, "이젠 xx이가 막내 한다고, 저는 이제 가장이니까 이름 불러주시래요~" 이랬죠.우리 아버님, 오래오래 사셨으면......우리 아버님, 오래오래 사셨으면......  뻘쭘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반란군이 된 것 같아 민망한 저... 모두 앞에서 "그건 새아가 말이 이치에 맞는 말이다. 지금껏 나도 생각 못했는데 애비보다 낫다." 하고 방패가 되어주셨습니다. 그 뒤로도 가끔 아주버님이 지가 죽을 때까지 막내지 뭐 하고 심술부리듯 부르면 "이제 이름 불러라. 애비도 이름 부른다." 하십니다.

 

사실 결혼생활 일년도 채 못되지만, 시댁식구들과 알아가려면 아직도 멀었지만, 남편은 딴에는 얼른 적응하게 해준답시고 자꾸 무리하게 자리를 마련하고, 공교롭게도 그 때마다 기분나쁜 일들이 생겨 남편에게 정떨어지고 계명도 도레미파솔라도로 부르면서...... 그렇게 남편+시댁식구들을 한보따리로 미워하기 시작하면서 문득문득 아버님 생각에 양심에도 걸리고 그것 때문에 마음이 이중으로 지옥이었습니다.

 

아무리 가족이 잘못하고 아들이 잘못했어도 며느리 탓 먼저 하는게 보통 시어른들일 텐데, 그 충격적인 얘기를 듣고 그렇게 속상하셔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셨다니, 정말 부모 가슴에 대못박은거 같아서 지금 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납니다. 친정엄마도 속상해서 잠을 못이루셨다는데, 막내네 사는거 구경하겠다고 오셨다가 며느리가 더 이상 못살겠다고 나가는걸 보셨으니 시골 내려가셔서도 계속 가슴 아프셨겠죠. 가만 생각해 보니 어머니가 우리 아들 타령하면서 제 가슴에 못박은 것도, 말씀과 행동이 너무 얄미워 부부싸움 여러번 일으켰던 아주버님도, 어느날 갑자기 막내딸 하겠다고 나선 서른 넘은 저에게 건네주신 아버님 정으로 덮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혼 전 드린 편지에서 부모님께 약속드렸습니다. 예단을 마음껏 못해드리는 대신, 세상에서 어떤 예단에도 비할 수 없는 예쁘고 귀한 막내딸같은 며느리 되겠다고. 사랑 많이 받을 거라고.

저 결혼 뒤로 한번도 딸처럼 해본 적 없습니다. 쑥스러워서 못한 적도 있고, 남편이 미워서 하려던 것도 안한 적도 있습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며느리는 딸이 아닌 것을 인정함이 서로 정신건강에 좋고 오히려 멋진 관계를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만, 그래도 저런 아버님인데...... 제가 그리워하는 저희 아빠에게 해드리듯 조금이라도 해드릴걸 그랬습니다.

 

남편과 냉각기를 거치는 동안 돌아가신 저희 아빠 기일도 있었고, 아버님께서 저리 속상해 하셨다는 소리까지 들으니 정말 이런저런 생각에 가슴이 메이고 눈물이 너무 많이 났습니다. 이제 남편과 다시 화해하고 새로운 각오로 출발하면요... 앞으로도 남편과, 시댁식구와 갈등은 생기겠지만, 또 시자라면 이를 바득바득 갈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버님께 한번이라도 더 고마움 표시하려고 노력하렵니다. 이번 설에 한복 곱게 차려입고 가서 절 드리고, 지금까지 어머님만 주물러 드렸는데 아버님 작은 어깨도 좀 꾹꾹 주물러 드리고, 더 맛있는 안주거리 만들어서 맥주 한잔이면 뻗어 자는 저지만 아버님 혼자 약주 많이 안드시게 신랑이랑 소주도 한잔씩 같이 비워가며 그 좋다는 노래솜씨도 좀 듣고 그래야겠습니다.

결혼 허락받으러 가족들께 첫인사 드리던 날, 저한테는 "오늘... 내가 마음이 흡족하다." 이 한마디 하셨는데, 어머니랑 신랑이 그러더군요. 아버지가 첫자리에서 저런 말씀하신건 내가 기분이 너무 좋아 죽겠다 라는 뜻이라구요. 앞으로 아버님의 흡족하다 소리 많이 듣고 싶습니다.

 

남편과 싸우느라 새해를 맞으면서 속이 상해서 아무 소원도 못빌었었는데, 뒤늦게 빌어봅니다. 우리 아버님,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좀 있음 팔순... 백살 넘기실 때까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첫손주라고 끔찍히 여기시던 저희 외할아버지 암으로 너무 고통스럽게 돌아가시는 과정을 다 지켜봐서, 저희 아빠는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셔서, 이제 그 분들 대신 정주시는 우리 아버님만큼은 고통스러운 병환 없이, 사고도 없이, 건강하게 장수하셨음 좋겠습니다.

 

아버님, 속깊은 며느리 보신다고 그리 좋아하셨는데 이리도 철없이 마음 아프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버님께서  길러주신 남편이니, 다시 한번 믿고 힘 합쳐서 즐겁게 살아보겠습니다. 오래오래 곁에 계셔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