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아득한 길을 걸어왔는데 발자국은 한 사람 것만 찍혔다 한때는 황홀한 꽃길 걸으며 가시밭길도 헤치며 낮은 언덕 높은 산도 오르내리면서 한 사람 한눈 팔면 한 사람이 이끌며 여기까지 왔다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고달프기도 했던 평행의 레일 위에 어느덧 계절도 저물어 가을꽃들이 피기 시작한다. 박성룡의 '동행' 지석은 까페에서 나오자마자 쓰러질 듯한 유진을 차에 태운 뒤 곧장 자신 의 작업실로 향했다. 유진의 유치원 근처에서 레코드점을 하고 있는 지 석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기도 했다. 지쳐있는 몸을 이끌고 나온 탓인 지 아님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나온 잠깐의 시간을 잊고 싶어서 인지 유진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유진씨... 조금 멀리 갈꺼예요. 유진씨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괜찮죠?." 유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난히도 따사로운 겨울 햇살이 유진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눈을 뜨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짙은 어둠만이 자신을 감 싸고 있을것만 같아 두려웠다. 간간히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소리와 간혹 지석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만 이 느껴질 뿐이었다. 어느 새 지석은 자신의 작업실에 도착했다. 그 때까지도 눈을 감고 있던 유진은 정적이 느껴질 때야 비로소 눈을 떴다. 하얗게 뒤덮인 눈밭에 차가 멈춰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앞엔 동화속에 서나 나올법한 빨간 지붕의 집이 보였다. 울타리 안에는 말끔하게 정돈 된 화단이 유독 눈에 띄었다. 집 주위를 감싸고 있는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이 그 모습을 자랑하고 있는 듯 했다. "유진씨.. 깼어요? 자고 있는 것 같아서 깨울 수가 없었어요." "지석씨... 여기 어디예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예전부터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집안으로 들어선 유진은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집 안 벽면에는 그림으로 가득차 있었고, 한 쪽 벽면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여자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 질꺼예요. 커피줄께요." "... 네.." 유진은 아직도 꿈을 꾸는 듯 정신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석은 유진에게 덮어줄 담요와 커피를 가져왔다. "여기.. 제 작업실이예요.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오래전부터 해오던 일이라 인연을 끊을 수가 없나봐요. 살면서 자꾸 오 게되는 곳이 여기더군요. 솔직히 얘기하면 유진씨 만나고부터 더 자주 이 곳에 오게 됐어요. 언젠가는 유진씨 데리고 와봐야지 했는데 어쩌다 보니 오늘에서야 이렇게 됐네요." "전 몰랐어요. 그림을 그릴 줄은... 그럼 여기에 있는 그림들 모두 지 석씨가 그린 건가요?." 지석의 조용한 미소가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고보니 유진은 지석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가 무슨 음악을 즐겨 듣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유진은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가끔 유진씨에게 어린애마냥 막 떠들고 싶어질 때가 있었어요. 내 속을 뒤집어 보여줄 순 없는 노릇이고 그런다해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 이라는 거 알고... 하하.. 그럼 막 떠드는 수밖에 없잖아요. 근데 그 것도 차마 할 수가 없더라고요. 실없는 놈이라고 생각할까봐... 저란 인간 참 우습죠?." 지석이 쓴 웃음을 지어보인다. 유진은 그런 지석을 바라보며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오늘... 정말 미안해요. 지석씨 결국 또 저한테 이용당한 셈이고, 그 거 알면서도 저한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거... 저 실은 지금 고개 도 들 수 없을만큼 지석씨한테 잘못하고 있다는 거 알면서도 어쩌면 지석 씨 이러는 거 즐기고 있는지도 몰라요. 지석씨! 난 아무것도 줄 게 없는데 자꾸 받기만 해서 어떡해요? 그 마음 갚으려고 앞으로 가려고 노력해도 늘 그 자리에서 맴돌기만 하는 거 어 떡해요? 나한테 더 이상 이러지 말아요. 난 늘 그런 식으로 지석씨한테 상처만 안겨줄거구, 언젠가는 지쳐서 나란 여자한테 질려버릴꺼예요." 지석은 아직도 슬픔속에 절망하고 있는 유진이 안쓰러웠다. "유진씨! 오늘에서야 비로소 유진씨에 대해 선명하게 알았어요. 그 동안 아무리 애를 써서 김유진이란 사람에 대해 알려고 노력해도 늘 허무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다 알 거 같아요. 유진씨! 더 솔직해지자면 지금이라도 유진씨 데리고 도망가고 싶다고 얘 기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을께요. 그러지 않을겁니다. 사랑하는 사람 평생을 가슴에 두고 살아가는 유진씨 생각하면 내 마음이 너무 아파와서 그러지 못하는 거예요. 동욱씨와 함께 떠나세요." 유진은 아까부터 고개를 숙인 채 울고 있었다. "세상에 정말 아름다운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그걸 지켜야죠. 그게 유진 씨 몫이라면 무작정 도망가려 하지말고 끝까지 지켜주는 게 당연한 일이 잖아요. 나한테 미안한 마음 같은 건 갖지 말아요. 유진씨 어디에 있든 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소식만 들어도 제 하루하루는 언제나 기쁠테 니까...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도울꺼예요." 유진은 그제서야 까페에서 나올 때부터 가슴속에 담고 있던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지석은 어깨를 들썩인 채 울고 있는 유진을 조용히 안 아주었다. "괜찮아요. 실컷 울어요. 그렇게 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잠깐동안 악 몽꾸는 거라고 생각해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 미안해서 어떡해요? 지석씨한테.......... 늘 미안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괜찮다는 말이 그들의 심장속에 깊이 파묻히고 있었다. --> 계속...11
세 여자 이야기 (13)
두 사람이 아득한 길을 걸어왔는데
발자국은 한 사람 것만 찍혔다
한때는 황홀한 꽃길 걸으며 가시밭길도 헤치며
낮은 언덕 높은 산도 오르내리면서
한 사람 한눈 팔면
한 사람이 이끌며 여기까지 왔다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고달프기도 했던 평행의 레일 위에
어느덧 계절도 저물어
가을꽃들이 피기 시작한다.
박성룡의 '동행'
지석은 까페에서 나오자마자 쓰러질 듯한 유진을 차에 태운 뒤 곧장 자신
의 작업실로 향했다. 유진의 유치원 근처에서 레코드점을 하고 있는 지
석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기도 했다. 지쳐있는 몸을 이끌고 나온 탓인
지 아님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나온 잠깐의 시간을 잊고 싶어서
인지 유진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유진씨... 조금 멀리 갈꺼예요. 유진씨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괜찮죠?." 유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난히도 따사로운 겨울 햇살이 유진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눈을 뜨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짙은 어둠만이 자신을 감
싸고 있을것만 같아 두려웠다.
간간히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소리와 간혹 지석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만
이 느껴질 뿐이었다.
어느 새 지석은 자신의 작업실에 도착했다. 그 때까지도 눈을 감고 있던
유진은 정적이 느껴질 때야 비로소 눈을 떴다.
하얗게 뒤덮인 눈밭에 차가 멈춰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앞엔 동화속에
서나 나올법한 빨간 지붕의 집이 보였다. 울타리 안에는 말끔하게 정돈
된 화단이 유독 눈에 띄었다. 집 주위를 감싸고 있는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이 그 모습을 자랑하고 있는 듯 했다.
"유진씨.. 깼어요? 자고 있는 것 같아서 깨울 수가 없었어요."
"지석씨... 여기 어디예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예전부터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집안으로 들어선 유진은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집 안 벽면에는 그림으로 가득차 있었고, 한 쪽 벽면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여자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 질꺼예요. 커피줄께요."
"... 네.." 유진은 아직도 꿈을 꾸는 듯 정신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석은 유진에게 덮어줄 담요와 커피를 가져왔다.
"여기.. 제 작업실이예요.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오래전부터 해오던 일이라 인연을 끊을 수가 없나봐요. 살면서 자꾸 오
게되는 곳이 여기더군요. 솔직히 얘기하면 유진씨 만나고부터 더 자주
이 곳에 오게 됐어요. 언젠가는 유진씨 데리고 와봐야지 했는데 어쩌다
보니 오늘에서야 이렇게 됐네요."
"전 몰랐어요. 그림을 그릴 줄은... 그럼 여기에 있는 그림들 모두 지
석씨가 그린 건가요?."
지석의 조용한 미소가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고보니 유진은 지석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가 무슨 음악을 즐겨 듣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유진은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가끔 유진씨에게 어린애마냥 막 떠들고 싶어질 때가 있었어요. 내 속을
뒤집어 보여줄 순 없는 노릇이고 그런다해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
이라는 거 알고... 하하.. 그럼 막 떠드는 수밖에 없잖아요. 근데 그
것도 차마 할 수가 없더라고요. 실없는 놈이라고 생각할까봐... 저란
인간 참 우습죠?." 지석이 쓴 웃음을 지어보인다.
유진은 그런 지석을 바라보며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오늘... 정말 미안해요. 지석씨 결국 또 저한테 이용당한 셈이고, 그
거 알면서도 저한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거... 저 실은 지금 고개
도 들 수 없을만큼 지석씨한테 잘못하고 있다는 거 알면서도 어쩌면 지석
씨 이러는 거 즐기고 있는지도 몰라요.
지석씨! 난 아무것도 줄 게 없는데 자꾸 받기만 해서 어떡해요? 그 마음
갚으려고 앞으로 가려고 노력해도 늘 그 자리에서 맴돌기만 하는 거 어
떡해요? 나한테 더 이상 이러지 말아요. 난 늘 그런 식으로 지석씨한테
상처만 안겨줄거구, 언젠가는 지쳐서 나란 여자한테 질려버릴꺼예요."
지석은 아직도 슬픔속에 절망하고 있는 유진이 안쓰러웠다.
"유진씨! 오늘에서야 비로소 유진씨에 대해 선명하게 알았어요. 그 동안
아무리 애를 써서 김유진이란 사람에 대해 알려고 노력해도 늘 허무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다 알 거 같아요.
유진씨! 더 솔직해지자면 지금이라도 유진씨 데리고 도망가고 싶다고 얘
기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을께요. 그러지 않을겁니다.
사랑하는 사람 평생을 가슴에 두고 살아가는 유진씨 생각하면 내 마음이
너무 아파와서 그러지 못하는 거예요. 동욱씨와 함께 떠나세요."
유진은 아까부터 고개를 숙인 채 울고 있었다.
"세상에 정말 아름다운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그걸 지켜야죠. 그게 유진
씨 몫이라면 무작정 도망가려 하지말고 끝까지 지켜주는 게 당연한 일이
잖아요. 나한테 미안한 마음 같은 건 갖지 말아요. 유진씨 어디에 있든
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소식만 들어도 제 하루하루는 언제나 기쁠테
니까...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도울꺼예요."
유진은 그제서야 까페에서 나올 때부터 가슴속에 담고 있던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지석은 어깨를 들썩인 채 울고 있는 유진을 조용히 안
아주었다.
"괜찮아요. 실컷 울어요. 그렇게 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잠깐동안 악
몽꾸는 거라고 생각해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 미안해서 어떡해요? 지석씨한테.......... 늘 미안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괜찮다는 말이 그들의 심장속에 깊이 파묻히고 있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