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퍼 챠일드 #2

crux2007.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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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은연 중에 한숨이 흘러나온다.

 손끝이 아랫 배쪽에서 계속 머무르는 동안 몸 아래 저 깊은 곳에서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미묘한 저릿저릿함이 발생한다.

 그 느낌은 일순간이고 아주 미약하지만 링 위의 권투선수가 상대방의 약한 잽을 급소에 제대로 맞아 온 몸을 휘청대는 것처럼 관자놀이까지 대번에 치고 올라가 나를 일순간에 멍하게 만든다.

 이런 종류의 쾌감을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느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끔 이런 번개가 우연히 내 몸 속을 뚫고 지나갈 때는 온 머릿 속이 아득해지고 손끝 발끝이 몇 초간 부르르 떨린다.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들여다 보자 쓴 웃음이 나온다.

 얼굴이 완전히 상기되어 있었다. 양 볼이 난로를 들이댄 것처럼 빨갷다. 손을 볼에 갖다대니 깜짝 놀랄 정도의 뜨거운 열기가 서늘한 손바닥을 달궜다.

 

 쯧쯧.

 

 마흔이라는 나이도 훌쩍 넘은데다 결혼 생활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주제에 대체 아침부터 이게 무슨 꼴이람.


거울 속에 잔뜩 상기된 채로 서 있는  내 자신이 민망해서 고개를 돌리고 서둘러 옷장으로 향한다.

흰색 블라우스와 플레어 스커트를 골라 입고 가방을 한 손에 들었다.

현관 쪽으로 향하다가 문득 멈춰서서 거울을 다시 바라본다. 조금 전 속옷차림으로 흥분에 달떠 상기되어 있던 여자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 없다.


직장에서는 나 모르게 ‘얼음’ 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는 서늘한 눈매와 앙다문 입술을 가진 마른 몸매의 한 여자의 모습과 마주쳤다.

왠지 벌거벗었다가 옷을 걸친 것 만큼이나 마음이 평안해진다.

휙 소리가 날만큼 갑작스런 걸음과 함께 현관문을 나섰다.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찾았다. 손에 쥔 자동차 키의 버튼을 눌렀다.

 저 앞에 세워진 은색 폭스바겐 파사트가 헤드라이트를 번뜩인다.

 운전석에 앉아 엔진이 예열되기를 기다린다.

 

 굳이 외제차를 소유할 욕심은 없었다. 2년 전까지는 국산 중형차를 타고 다녔다. 한 번은 주행 중에 다른 차와 부딪히는 접촉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다. 분명한 상대방의 과실인데도 중년 거구의 남성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무턱대고 나를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내가 되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잘못을 지적하자 대답이 궁색해진 탓인지 저질스런 욕설을 섞어 더욱 고함을 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급기야는 내 몸을 밀치기까지 했다. 게다가 남자의 손이 가슴께에 닿아 몸서리가 쳐졌다.


 다행히 길 가던 행인 중에 보다 못한 남자 분이 끼어들었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경찰을 불러줘서 일이 해결되었다. 비록 경찰서까지 가야했고 도움을 주던 사람들이 같이 따라가서 그 몰염치한 남자가 내게 저지른 행위에 대한 증언을 서주는 사태까지 생기긴 했었지만.

 

 그 사건 이후로 차를 처분하고 외제차를 구입했다. 아예 차를 갖지 않을까도 생각 했었지만 출퇴근 시간동안 다른 사람들과 밀폐된 공간에서 같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폐쇄적인 성격의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내게 있어서 차는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아무래도 외제 차에 대한 위축감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잠재해 있단 점에서 앞서와 같은 경우 상대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벤츠 같은 하이클래스의 차는 가격 면에서 만만치가 않았다. 게다가 직장을 다니는 터에 외제차를 모는 것이 전혀 남의 이목을 상관 안 할 수도 없는 일이라 되도록이면 아주 무난한 느낌의 세단을 고르기로 했었다.


 파사트는 비록 차체는 작은 편이지만 전형적인 세단 형이었다. 게다가 여타 독일차 브랜드에 비한다면 가격이 약간 저렴했다. 매장에 두 번째 방문했을때 계약을 결정했었다.


  외제차를 몰고 다니니 왠지 모르게 도로에서 운전하는 것이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전보다 무턱대고 내 앞을 끼어드는 차들이 훨씬 줄었다. 외제차 근처에 접근해서 이로울 게 없다고 생각들을 하는 모양이었다.

 주차장에서도 왠지 내 차 주위에는 차들이 밀착되어 세워져 있질 않았다.

 이런 생각들이 혹시 내 과도한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자 혼자 몸으로 서울이라는 곳에서 차를 몰고 다니는 일이 좀 더 용이해진 건 사실이었다.

 

차는 지상으로 나와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까진 길이 부산하게 막히지는 않았다.    조금 일찍 나와서 교통지옥을 경험 안하는 것이 훨씬 이득 아닐런지.


 나는 엑셀레이터를 서서히 힘을 주어 밟았다.

 차츰 강해지는 자동차 엔진 소리가 내 귀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