孤愛(고애 : 고독한 사랑) -2

나오2007.02.14
조회173

“그러니깐 스캔들을 내고 뒷감당이 안되어서 도망 나왔다?”

“아니 저.. 스캔들이라고 까진.. 제 나이가 아직 파릇한걸요.”

“나무하러 갔다가 우발적인 가출이라.. 니네집 산지기더냐?”

“그렇다기보단 야인(野人)이라고 해 주죠 좀.”

“......"

“왜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주먹을 부르르 떠는 흉켈 어르신. 순간 그의 마음은 얄밉도록 말대답을 하는 이 어린놈의 시건방진 말투를 친히 개조시켜줘야 하나 고심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런 수고를 하기가 영 귀찮아진지라 자신은 검신의 실력에다 성자와 같은 아량을 가진 희대의 인물이므로 아이와 시비를 논하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합리화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심으로 자존과대의 망상속을 헤매이던 흉켈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때 카이라의 수다는 아까의 오크 떼들에게 멧돼지 잡혀가듯 들려갈 적에 느꼈었던 인생 무상함에 대한 것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잠깐만 소년.”

“... 꼴에 그 돼지 머리 쉐이들도 노래 비스무리한걸 하더라구요. 으악~ 생긴것만큼 극악무도한 노래였더랬죠. 음정무시, 박자무시, 곧 죽어도 2절까지 부르더만요.흐미~~ 사람 딱 돌겠더라구요.”

“어이. 어린 친구?”

“응? 아.. 네에.. 귀는 열려있으니 할 말 있으면 어려워 말고 하세요.”

싸가지에 밥 말아 먹은 듯한 카이라의 대꾸에 또 한번 울컥 올라오는 무언가를 애써 삼킨 흉켈은 괜히 구해줬다고 속으로 절규를 하였다. 역시나 이 흉켈이라는 기사는 오크떼들의 자중지란을 틈타 막판에 슬쩍 끼어든 자신의 얍삽함은 전혀 안중에도 두지않는 듯 싶었다. 오히려 이런 깡촌, 그것도 인적이라고는 하루 이틀 거리에도 전혀 없는 첩첩 산골 속에서 맞딱뜨린 아이가 알고봤더니 있는 집 애새끼여서 생명의 은혜를 갚는다며 온갖 금은보화를 안겨준다는 그런 거짓말 같은 행운이 오지 않았다는 것에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아무튼 결론은 괜히 구했다 였으며 이왕 지지리 복도 없는 현실이고보면 최소한의 실리라도 챙겨야지 싶어서 퉁명스레 말을 내뱉었다 .

“에. 또오. 그러니까 어린 친구는 지금 이 길로 집으로 돌아가라. 이 기사님은 공사(公事)가 무지 바빠 널 집까지 바래다 줄 수 없거든. 생각지 못한일로 라마투나이 영지로 돌아갈 시간을 허비하였으니 내가 없는 동안에 영지에 어떤 재앙이 닥쳐왔을런지.. 흐음. 역시 영웅호걸은 스스로 빛을 발하니 세상이 이를 가만 두질 않는거지. 크허험.”

할말을 한 흉켈은 카이라가 어? 할 사이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널브러진 오크떼들 사이로 걸어가 모종의 작업을 하였다. 카이라가 대체 무슨 짓이지 싶은 마음에 빼꼼히 보니 흉켈은 죽을둥 살둥하는 오크 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오크의 삐죽 나온 송곳니 한개씩을 빼고 있었다. 한두번 해보는 솜씨가 아닌 듯 배낭에서 찾아낸 무쇠 집게를 사용해 수월하게 송곳니를 빼서는 가방 한 켠에 달린 꽤 큰 주머니에 소중히 넣고 있었다. 흉켈의 짓을 바라본 카이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리곤 곧 음충맞은 웃음을 클클클 흘리나 싶더니 어느 새 흉켈의 옆에 척하니 달라 붙어 앉았다.

“그거 돈 돼요?”

“아니 전혀~”

“호오. 그렇단 말이죠?”

“뭐냐 꼬마? 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을텐데.”

“아뇨 곧 갈겁니다만.. 기사님의 검 솜씨가 신(神)의 경지에 들어 이렇게 수십 마리도 더 되는 오크 떼를 단신으로 해치운 것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라 생각 되어서요.”

“커험, 본관의 실력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지. 아~ 그 멍청하기 그지없는 마킨과 북부 사령부만 빼곤 말야.”

흉켈의 마지막 말에 주목한 카이라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고로 아부를 싫어하는 인간들은 없는 법 아니겠는가?

  빙고~ 크크크큭

“마킨? 북부 사령부? 어디다 쓰는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뜬 장님들이군요. 어찌 장.군.님.의 하늘이 놀라고 땅이 뒤집어질 실력을 모를 수 있지요?”

“호오.. 어린 친구가 눈이 있구먼. 그래, 그게 바로 조국 휴오니아의 불행인거야. 천년도 더 지난 과거의 망령에 사로 잡혀 이런 북부 벽지에 정예 국왕군을 낭비하고 있으니 말이야. 게다가 그 멍청이들이 저지른 최대의 실책은 이 천재 검사이자 희대의 전략가인 흉켈 어르신.. 아니 장.군.님을 일개 정찰조로 만들어 고작 이딴 오지에 전출을 보냈다는 것이고. 그러고보면 행운의 여신이 진작에 이 나라를 외면했던거야. 암, 그렇고 말고.”

“옳거니!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장군님의 일성(一聲)을 들으니 100년 묵은 체증이 내려 가는 것 같아 참으로 후련하네요.”

바쁘다던 공사는 잠깐 동안에 그새 한가해졌는지 흉켈은 오크의 어금니를 뽑는 중에도 별의 별 불만을 다 토로했다. 군사적 전략이 빈곤하다느니 실권을 장악한 중부 귀족들의 방탕함이 어떠니 동부 전선의 지휘관들의 꽉막힌 부대 운용이 저쩌니 하다가 누가 그 와중에 바람을 피었다는 둥 그래서 그 정부의 동생이 하루 아침에 쫄따구에서 내 상관이 되었는데 그것도 나 아니었으면 진작에 어느 전투에서 야만인들의 돌맹이에 머리 깨져 죽었을 실력으로 온갖 위세를 다 떨치고 다닌다는 둥 한참을 비난하다가 자신은 그런 북새통에도 힘없고 병든 이들과 고아들을 걷어 들여 갱생의 길로 가게 하였노라 침을 튀기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말이지. 인간사 참으로 허망한 것은 그러한 나의 순고한 노력을 날로 먹으려 하는게 또한 인간이란 거야. 본 장군의 은혜에 기껏 돌아온 것이 오직 전출인거 보면 뻔하지. 쓰벌.”

“하여튼 그런 멍청한 치들이 세상을 어둡게 하는 것입죠. 장군님 소인에게 하명만 하십시오. 이 한몸 장군님의 위명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아니 그저 소인이 보고 느낀대로만 말해도 그 눈닫고 귀닫은 멍청이들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을겁니다. 세상에 단신으로 수백 마리의 오크 떼를 괴멸한 무용과 지략을 갖춘 장군님께서 이런 깡촌의 정찰이라뇨. 참으로 천만부당한 노릇이구 말굽쇼. 암요 이건 인류의 불행임에 틀림없지요.”

“커험, 수백마리는 좀 과한것 아닌가?”

“무슨 말씀을. 장군님의 일도(一刀)에 조각난 수가 수십이요. 일수(一手)에 피떡이 된 수가 또한 수십임은 제가 직접 목도했던 바이고 그저 자비로우신 우리 장군님의 생명에 대한 외경과 측은지심을 악용한 이 간악한 몬스터들의 동시 다발적 산개 때문에 팔하나, 다리 하나 정도만 놓고 꽁지빠지게 도망간 오크 쉐이들이 기백은 넘었으리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하니 어찌 기백 뿐이라 하겠습니까마는 아무튼 이 사실을 내 꼭 라.마.투.나.이 영주에게 고(告)해야겠습니다.”

“커허험. 어린 친구가 맘 씀씀이도 깊은 것이 참으로 대견하이.”

“에헤헤헤헤. 아닙니다. 인간의 탈을 쓴 이상 참으로 당연한 노릇입죠.”

어느 덧 해는 제법 기울기 시작하여 흉켈은 배낭에서 건포와 일용할 과일주를 꺼내 카이라와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덤으로 꼬질꼬질 때낀 겉옷까지 내 주었으니 명색이 기사라지만 그 닉네임이 “흉악한 흉켈”이었던 그의 지금 기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이에 슬슬 자신이 원하는 상황으로 되어감을 느끼는 카이라는 자칭 현자 메이슨 영감에게 10여 년을 수학하며 배웠던 여러 가지 중에 가장 유용하리라 생각했었던 “아부신공”을 이용한 결정적 한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휴우~”

“음? 아니 어린 친구가 무슨 근심이라도 있는가?”

“아닙니다 장군님. 그리고 친구라뇨. 농으로라도 그리 부르지 마십시오. 남들이 비웃습니다.”

“뭬야? 내가 친구라고 부르면 친구인거지 감히 어떤 쓰벌 놈들이 비웃고 말고 해. 내 그런 놈들이 있으면 당장 요절을 내 줄테니 걱정일랑 붙들어 매게나.”

“참으로 호쾌하십니다. 장군님을 뵌 후로부턴 이 미천한 놈의 속까지 후련해집니다. 다만...”

“다만?”

“미천한 소인에겐 형이 하나 있는데 이 놈과는 달리 영민하여 한번 들으면 절대 잊는 법어 없고 나아가 능히 열을 헤아릴 머리를 지녔으며 게다가 용맹과 남자의 근엄한 기품마저 두루 갖춰서 한마디 말이 천금과 같은 형이지요. 소인은 장군님을 뵌 후부터 말없이 집을 나온 제 걱정에 온 산을 뒤지고 다닐 제 형님의 모습이 떠올라 이렇게 한숨을 짓고 말았네요. 휴우~~”

이 쯤에서 남자의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 한방울을... 으음.. 바로 흐르는군 크크크크.

“오! 어린 친구에게 그와 같은 형이 있었다니. 틀림없는 대장부감인데 나와는 인연이 안되어 사내끼리의 진정을 나누질 못하는구먼. 허어 애석한지고.”

“아닙니다 장군님. 미천한 소인의 형님이 비록 미타나에서는 성주 류이쿠 자작마저 감탄을 하는 인물이라 하나 감히 어찌 장군님의 풍채를 따르겠습니까? 다만 저는 이제 장군님께 제 한 몸을 의탁하는 마당에 이 기쁨을 형과 식구들에게 미리 알려 제 걱정을 덜어주지 못한 것이 죄스러운 것과 그 보다는 장차 장군님을 보필하며 라마투나이에 갔을때 더 이상 저의 그늘이 되어줄 형이 없다는게 못내 서러워서 이렇게 못난 꼴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무슨 말을 그리 섭하게 하나? 내가 이렇게 두 눈 시뻘겋게 뜨고 있는 한 어떤 놈들이라도 자넬 함부로 대할 수는 없을거야. 혹시나 만약 그런 놈이있다 해도 나에게 말만 하게. 내 수십 수백 수천의 오크떼를 괴멸시킨 위용으로 아낌없이 어루만져줄 테니 말일세.”

 “흑흑흑. 그저 장군님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아니 형님처럼 제 마음속 깊히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형니임~.”

 “엥. 형니임?”

 “어흐흐흑 어디있어 형~~ 무서워 혀엉~.”

 “음하하, 아우는 걱정 말거라. 이 흉켈의 의동생을 간이 붓지않고서야 감히 어떤 놈들이 건들겠느냐?”

 “혀엉~”

귀 얇은 흉켈이 확실히 걸려들었으니 카이라는 망설일 것 없이 결정타를 날렸다. 그래서 흉켈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고 흉켈은 얼결에 카이라를 끌어 안으며 전혀 신뢰성없어 보이는 말들을 호기롭게 외쳤다.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있는 카이라의 표정을 볼 수 없는 흉켈이었기에 가출한 어린아이가 사실은 감동 제대로 받은듯한 말과는 전혀 딴판으로 사악한 웃음을 비죽 흘리고 있음을 알 수 없었다. 반대로 카이라는 입안의 건포를 우물거리며(흉켈은 카이라가 울먹이는 것으로 착각하였던) 득의양양하고 있었다. 흉켈은 자신을 라마투나이 영지로 안락하게 운반해줄 일종의 편도 역마차 티켓일 뿐이었고 그 보다는 흉켈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도된 장면이 제대로 연출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건장한 장년의 사내의 품에 파고 들어가 가슴팍에 머리를 쳐박은 채 열심이 건포를 씹는 카이라는 어느 순간 정말 쾌재를 불렀다. 최고 1옥터까지 그들 가까이 다가왔었던 잘난 형의 기척이 이제야 점점 멀어져감을 확인하였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인간의 길이람.

  얼어죽을 사람다움은 또 무엇이람.

  고작 산지기 둘째 아들이 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키워야 하는거람.

  아니 다 좋다 이거야.

  잘나신 형의 잘남에 탄복하느라 나는 늘 뒷전이었잖아.

  감히 자작가의 여식을 쓰레기 취급하는 형에게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대하시더니

  나라는 놈에게는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자작가의 여식(女息)이니 잊으라고?

  아니야 아니야 그런건 다 참을수 있어.

  갈수록 차갑다 못해 냉정하기까지 하던 눈빛들이 정말 날 괴롭혔던거야.

  과연 나는 아들이 맞는건지, 동생이 맞는건지.

  심지어는 그녀마저 나를 가장 징그럽고 흉물스런 짐승을 보듯 보았잖아.

  아니, 한때는 5월의 햇살마냥 나를 향해 빛나던 미소도 처음부터 나의 것이 아니었던야

  부모님들마저 나를 향해 그렇게 미소지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잖아.

  그래 그것은 오직 형의 몫이었지.

  나의 몫은 한심하다는 듯한, 이젠 실망할 기력도 없다는 듯한 부모님의 시선과 

  제니의 경멸어린 눈빛 뿐이었어.

  그래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야.

  열병처럼 날 뒤흔들었던 제니스 카타나스란 여자와 내 마음의 쉼터 류다인 

  란델하르겐이란 남자. 가장 사랑했던 이들은 나에게 상처만 남겼어.

  그들의 무심한 시선을 피하여 뒤돌아 섰을때 나의 길은 이미 정해졌던거야.

  기다리지도, 심지어는 잡는 시늉도 않는 그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던거야.

  큭큭큭 내가 유일하게 인정할수 있는 말이 여긴 네가 있을곳이 아니다란 말이었어.

  그래 이렇게 떠나가주마.

  수치도 모르고 생각도 없는 놈이라 일생에 오점만을 남기고 떠나게 되어 그저

  송구스럽네요 크크.

  카이라 휴온.. 카이라 휴온.. 휴온.. 휴온??

  카이라 란델하르겐.. 카이라 란델하르겐.. 란델하르겐.. 란델하르겐!!



  빠악~

  꾸에엑~~

쉬파 어떤 쌍놈의 쉐이야란 말을 가까스로 삼킬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카이라에게 정말 다행스러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순간 아득해져가는 시선속에 흉악한 흉켈의 시뻘개진 얼굴과 그 보다 열배는 더 시뻘겋게 충혈된 눈깔이 가득 들어왔기 때문이다. 저 인간이 칠리 소스에 겨자 후추 뿌려서 먹었나 왜 저러고 있지란 의문이 가득했지만 감히 말로 물어볼수는 없었다. 그래서 두 눈 가득 의문부호만 만들어 애처로운 표정에 가득 담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이쒸, 이 싸가지없는 동생좀 보게나. 사나이 천금과 같은 맹세만 아니었어도 의형제 물려버린건데. 아니 성질대로 지금이라도 이걸 확 파묻고 가버려?”

“히잉. 왜 그러세요 하해보다 넓은 가슴의 흉켈 형?”

“후우 후우. 참자 참어.후우 후우. 우어어어~”

  빠악~

  꾸에에엑~

참자 참어 라며 중얼거리길래 정말로 참나 싶어 마음 놓았다가 부지불식간에 한대 더 쥐어터졌다. 그렇게 두어대 맞았어도 선천적, 후천적으로 타고나고 만들어진 맷집 때문에 차마 기절도 못하는 카이라는 차라리 저 흉악한 인간의 발치에서 아직까지 기절해있는 오크들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잔인한 인간 같으니 그렇다고 때린데를 또 때려서 애를 아주 못쓰게 만들고 말다니. 예비용으로 형 삼은거긴 하지만 어째 영 내가 내 무덤 판거 같은 꿀꿀한 기분이 드네. 그냥 확 받어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카이라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본관은 그 이름도 거룩한 흉켈 하스모프라고 한다. 북부군 휘하 라마투나이 영지의 정찰소대의 제2정찰조 부조장이며 세상이 다 아는 비운의 기사이지.”

  멀뚱멀뚱.

그런데 그래서요란 뻘쭘한 눈빛은 내 생명 연장의 꿈에 심대한 악영향이 있을듯하여 얼른 시선을 내리깐 카이라는 속으로 대체 뭔 소리람 투덜거렸다. 그러다 흉켈의 거듭된 재촉을 받고서야 카이라 자신의 이름 자에 대하여 물었던 것이구나 추측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름을 물어오는 질문에는‘나는 어느 가문 누구의 아들 모모씨요’라는 식의 관습적으로 대답해야 했기에 곧장 자신의 가출 동기와 연관이 되었고 파란만장한 열여섯 평생에 꾹꾹 참아왔던 안좋은 가족 이야기로 생각이 발전되어 순간 상념에 빠져들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생각에 빠져 아무 대답없는 카이라에게 몇 번이나 물어보던 흉켈이 흉악한 본성이 순간 표출되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내 결심을 굳힌 카이라는 정식 퉁성명을 하였다.

“미타나의 자작각하 직할령 직속 산지기의 차남 카이라 란델하르겐이라고 합니다 형님.”

이 성질 더러운 기사의 약점이 아부임을 숙지하고있는 카이라는 최대한 공경스러운 자세로 깊히 머리 숙이느라 흉켈의 안광이 자신의 이름자를 듣는 순간 번득였음을 보지못했다.

“오! 원래 동생의 이름은 카이라였군. 좋군 카이라. 카이라 란델하르겐. 란델하이겐이라.”

“형님께 비하겠습니까? 그저 태양불 앞에 조그마한 반딧불이 같은 이름이지요.”

“어허허 사람하곤 기름칠한 것처럼 살살 녹이는 혀를 지녔구먼. 그런데 동생?”

“예 형님.”

“혹 라마투이아의 메이슨 란델하르겐님 과는 친인척인가?”

“아! 그건 아니구요. 그 분이 제 스승님이시구요. 성을 물려받았습니다.”

“오! 아무튼 그렇다면 이거 동생과 난 전혀 외인이 아니었었군. 비록 사적인 친분은 없지만 그분과 난 일종의 뜻을 같이하는 동료인 셈이니 말일쎄. 그런데 그럼 자네 본 성씨는 어찌되나?”

  카이라 휴온.

지워버리고 싶은 이름.

아니 단 한번만이라도 그 이름 안에서 응석을 부리고 싶었지만 언제나 차갑게 울타리 밖으로 내치고 말았던 그 이름 휴온 가(家). 간절히 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철저히 무너뜨려버리고 싶은 이름이 바로 휴온이었다. 그렇게 관심과 기대를 거두어버린 부모님은 역설적으로 자신에겐 휴온이란 성(姓)을, 당신들이 그렇게나 기대하고 또한 그 기대 이상으로 일취월장하는 그의 형에게는 가문의 내리 스승이신 란델하르겐 님의 성씨를 사용하도록 하였었다. 그리고 그 까닭은 달랑 네 가족중에 오직 카이라 자신만이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형과 부모님은 그렇게 자신만 배제한체로 무언가를 곧잘 의논하였었고 의논이 끝나면 이유와 과정은 뭉텅 빼버린체 언제나 넌 이렇게 해라 라고 통고해왔기 때문이었다. 검술과 마법을 수련하면서 무자비할 정도로 다그치는 부모님과 형의 태도 보다도 그렇게 자신만 따돌리는듯한 가족들에게 카이라는 이제껏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받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다 잊고자 하였다. 이러든 저러든 그 울타리 안에 머무르는 이들은 나의 아버지이고 나의 어머니이며 나의 형이었기에 그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나의 무능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지금의 충동적인 떠남도 처음은 날 잡아주세요 라는 어린 아이의 치기어린 응석 정도 였는지 몰랐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느껴지는 형의 파장이 더도 덜도 아닌 그만한 거리를 유지하기만 할때는 일부러라도 오크 떼 속으로 자신을 던지기까지 하였다. 처음에는 자신의 철없는 행동에 화가 나서 거리를 두고 따라 왔겠지만 자신이 위험에 처하면 형은 득달같이 뛰쳐 나오리라 기대했었고 형의 실력으로 미뤄보면 몇십의 오크가 아니라 몇백의 오크라도 쉬이 처리할 진정한 능력자였으므로 그가 나타나면 상황 끝, 자신은 철없는 동생 흉내를 좀 내다가 엉엉 한판 크게 울어버린 다음에 형을 따라 다시 집으로 돌아갈 꿍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도 형은 여전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기만 할뿐, 자신의 생명이 경각에 다다른 시점에서도 전혀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카이라는 왈칵 서러움만 복받쳤다. 그런 이유로 그렇게 난장판, 악다구니에 발버둥을 쳤을 것이다. 하루에 열두번도 더 바뀌는 애증의 그림자. 그리움과 치를 떨게하는 넌덜머리. 사랑과 남보다 못하다는 미움. 혹시나 싶은 희망과 여전히 겉도는 것에 대한 실망.  

 ‘그래서 난 결정했다. 지금부터 난 카이라 란델하르겐이다. 내가 더 이상 란델하르겐이란 성을 따라도 되지 않을때가 내가 진정 있고자 하는 곳에 서 있을수 있을 때이리라. 온전히 내 힘으로 서 보리라. 제니스!! 그래, 그대에게는 류다인이 어울려. 알아. 내가 아닌 류다인이라 해도 또한 제니스 너의 뜨거운 마음만으로는 어쩔수 없는 신분상의 한계가 있음을. 어쩌면 너의 사랑도 나만큼 철저히 깨질지 몰라. 하지만 너라면 그 사랑을 가슴속에 담아둘꺼야. 어느 귀족이 한낱 자기네집 종살이나 다를바 없는 산지기 아들에게 그러한 선망을 보낼수 있을까. 그만큼 너란 아이는 남달랐어. 도대체 자작의 외동딸이 고작 영지의 대물림 산지기일 뿐인 나의 형을 그렇게나 열렬히 사랑할 수 있다는데 나는 감동했었어. 그리고 너에게 일방적인 사랑을 받는 형이 부러웠으며 너의 지순한 마음을 그렇게도 냉정하게 무시하는 나의 형, 류다인이 미웠던거야. 그래 제니스 너는 어떤 화가도 그릴수 없을, 어떤 시인도 노래 부를수 없을 그런 지고지순한 영혼을 지닌이였어. 이제 나는 아이처럼 생때쓰지 않을테니 부디 너와 류다인의 사랑을 이루길 바래. 난 그저 담고 갈께. 너에게 다시 돌아와 앞에 섰을때 네가 실망하지 않을 정도가 될께. 그 때 나에게 웃어주길 바래. 형수여도 좋고 어느 집안의 마님이어도 좋아. 그저 나에게도 환히 웃어주길 바래.’

  안녕 제니스

  안녕 류다인

  안녕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안녕 나의 유년이여 나의......

  음?

  “......중얼 중얼.. 뭐 말인즉.. 이유가.. 미안하군.”

이 인간이 대체 머라고 씨부리는거야. 으악 신이여! 저 인간이 아까 내게 무얼 물어본거 같은데 대체 무얼 물었던것일까요? 성질도 더러운 주제에 주먹도 솥뚜껑만 해서 저거에 맞음 난 최하 중상일꺼야. 대체 방금 무얼 물어본거지?

  “카이라. 누구에게나 말못할 아픔은 있을수 있다. 흐음 본관도 역시 그런 아픔을 좀 알지. 타고난 총명함과 재질로만 지금의 날 이룬게 아니거든. 피눈물 나는 노력 더하기 꺽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나 스스로를 이기고 지금에 이르렀지만 시기와 시샘에 눈 먼 무리들에게는 그저 천재의 오만처럼 보였던거지. 그래도 난 눈 한번 꿈쩍도 안해. 왜냐? 왜냐면 바로 내가 전혀 꿀릴게 없으니까! 날더러 이러쿵 저러쿵 한 놈들치고 본관을 한가지라도 아는 놈들이 있으면 내가 손에 장을지지고 만다. 그래서 그딴 놈들 말은 다 개방귀 헛수작인게야. 그저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장땡이지. 음하하하하하. 어째 말이 좀 어긋난거 같긴 하지만 무릇 평범한 니가 천재의 일면을 넘본걸로 만족하려무나. 아무튼 이름은 되었고 자자~ 남은 오크 송곳니나 얼른 빼서 가자고.”

저 인간 뜬금없이 엄한 말 잘한거 보면 정말 실없는 놈인갑네. 흐음 그래도 꿀릴 것 없으니 마이 웨이를 가겠다란 말은 제법 느낌이 좋군.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써 먹어야겠어.

  “흉켈 형! 어이 흉 형~~ 내가 할께요~~”



                                            

                                          여행

          

                                            


  지난 사흘간을 미타나 산 언저리에서 헤매던 두 사내에게 지금의 풍경은 새삼스러웠다. 길만 알고있다는 가정을 하면 카이라에게는 겨우 하루하고 한나절 정도의 거리였겠지만 명색이 기사이며 북부군 정찰대 제2조의 부조장이란 직함을 가지고 있는 흉켈의 정찰 활동을 위해 꼬박 하루 한나절을 더 미타나 산자락에서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흘을 지나고 제법 야트막한 구릉 지대에 겨우 도달하고 보니 세상은 온통 봄의 물결이었다. 미타나 산의 밤은 여전히 한기가 골속까지 스며드는 그런 기온이었으니 며칠 사이를 두고 어지간한 곳의 겨울과 봄을 경험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더군다나 카이라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이젠 더 이상 류이쿠 카타나스 자작령의 미타나 읍성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하고도 남았을 것을 기어코 꽃피고 새가 지저귀며 나비는 나폴 나폴 토끼는 깡총 깡총 뛰는 별천지라니 여기가 낙원인가 싶기까지 하였다.

 “가만 토끼가 깡총 깡총?? 어이 흉형~ 오늘 저녁은 토끼 통구이로 함 먹어볼라우?”

 “흐흐흐 역시나 동생이 낭만을 아는구먼. 그럼 오늘도 동생이 이 형님을 위해 힘좀 써주게나.”

 “자자~ 각자 위치로 해쳐~”

한두번 해본 솜씨치고는 환상의 복식조였다. 카이라는 잔가지 많이 달린 튼실한 나뭇가지를 꺽어 양손에 쥔채 높은 지대에서 아래를 향해 섰고 흉켈은 반대편 구릉 아래로 내려 가 온갖 크기의 돌덩이들과 단검 심지어는 널판자 같은 예의 바스타드 소드까지 검집 마저 분리한 채로 가지런히 정리하고서는 제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얼마간 그러고 있었을까 이윽고 카이라가 크게 팔을 흔들어 수신호를 보내오자 더욱 낮게 엎드린 흉켈은 아이들 주먹보다 더 큰 돌맹이들을 꼭 쥐어들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언제 보아도 참 대단한 뜀박질이라 흉켈은 생각했다. 특히나 오늘은 장소가 장소이니 만치 뿌연 흙먼지가 아닌 빨갛고 노란 형형색색의 꽃잎들이 그야말로 콩튀는 것처럼 비산을 하였다. 거추장스런 저런 나뭇가지까지 들고 심지어는 그것으로 땅을 할퀴어가며 이름 모를 봄풀들과 꽃잎을 날리며 뛰어 내려오는 모습은 어떤 식으로는 위압감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자칭 어르신이자 장군님인 그러나 진실은 흉악한 흉켈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리던 그의 감상이 이럴진데 하물며 미물들이야 혼비백산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카이라의 눈에 띈 순간 푸짐한 먹거리로 예약되어진 토끼들은 그 서슬을 피한다는 것이 저 아래에 매복하고 있던 흉켈 앞으로 자빠지고 구르며 언덕을 뛰어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흉형~ 준비해요. 쉬파 오늘은 제대로 포식좀 하자구요.”

 “동생은 걱정을 말거라. 오늘 만큼은 저놈의 토끼 새끼들을 맘껏 먹게 해주마 쓰벌.”

흡사 양치는 개가 양을 몰 듯 혹은 꼬리에 선불맞은 멧돼지가 난리발광을 치듯 카이라는 이리 저리 토끼떼들을 몰고 내려왔다. 거의 십여마리는 될성 싶은게 오늘은 대박중에 대박이었다. 이제 한무리 토끼떼는 계곡형의 입구에 해당하는 곳에 엎드려있던 흉켈의 코 앞까지 필생의 도주를 해왔다. 그렇게 자신이 엎드려있는 곳, 막 옆으로 스쳐 빠져 나갈 즈음에 흉켈은 오거같은 괴성을 내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흉켈의 피어가 오늘은 효과 만점이었다. 두려움에 급히 방향을 틀려던 토끼들이 단체로 앞구르기를 하고 말았다.

  "푸헤헤헤헤~ 이 놈들아 어르신의 마력탄을 받아라~.”

가지런히 잘 쌓아두었던 돌맹이들을 닥치는 대로 뿌려대며 흉켈의 매직 스펠이 캐스팅 되었고 태반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날라가고 말았지만 그 중에는 눈 먼 돌덩이들도 있어서 한참 앞구르기를 하고있는 토끼의 뒤통수에 통렬하게 작렬하기도 하였다.

 “비켜요~ 카이라표 신검 뮤온의 일도양단!!!”

뛰어오던 탄력 그대로 하늘로 솟구친 카이라가 그 기세를 백분 살려 잔가지 많은 실한 나뭇가지 두개를 수직으로 내리쳤다.


                                          


 “이거 참 난감하게 된거 맞지요?”

 “떠그럴. 시간을 맟춰도 꼭 이럴때 튀어 나오다니 하튼 무식한것들은 예의를 몰라.”

  미타나와 라마투나이의 중간 어디쯤 꼬불꼬불한 산길을 걷다 둘은 난감한 상황에 몰리고 말았다. 조금 이른 점심으로 토끼 고기를 먹게 되었던건 행운이었으나 한참때의 성장기 소년과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흉켈에게 고기가 알맞게 익기까지 기다릴줄 아는 마음의 수양은 애초에 불가능했었는지도 몰랐다. 설익은 고기를 통째 뜯어다가 입에 처넣자마자 꿀떡 그대로 삼키는 그들의 수양됨에다 비록 의형제(?)라지만 먹을것을 앞에두고 지킬 우애라고는 전혀 갖고있지 않았던 둘이 서로를 견제하는 순간부터 그야말로 먹성 좋은 오거가 그들을 사부님으로 모실 정도의 가공스런 먹성을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양손에 아직 피 뚝뚝 떨어질 정도의 설익은 고기를 넘치게 움켜쥔채로 서로를 견제하기 바쁘기까지 하였으니 당연한 결론으로 그만 설사를하게 되었다. 결국 둘은 천둥 소리 나는 배를 움켜쥐고 대충 덤불 사이로 뛰어들었는데 아무래도 그놈의 토끼들이 영물이었는지 재수가 왕창 꼬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기요. 이거 본의 아니게 열악한 작업환경을 제공하게 되었네요.”

그 와중에도 상대의 노동 환경을 걱정하는 마음 착한 소년 카이라였다.

  쓰벌. 나 뒤처리하고 일어나면 니네들 다 죽었어! 끄응~”

그 와중에도 불만과 협박과 볼일을 동시에 하는 흉켈이었다.

 “이.. 이.. 일어나나나.. 지지.. 일어나지 마. 일어나면 벨거야.”

 “하.. 하.. 한.. 한스. 한스! 일어나면 정말 베어야 해?”

 “무.. 물론.. 당연히 베야지. 이.. 이.. 이봐. 들었지? 그러니 꼼짝도 말고 그대로 있어.”

  뿌지지직~ 파다닥~~

 “!!!.”

 “으악~ 이건 꼼짝한거 아니에요.”

 “끄응~ 동생은 젊어서 일도 시원시원하니 보구먼. 쓰벌 끄응.”

  아무튼 설익은 토끼 고기에 탈이 나 하마터면 바지에 쌀번했던 두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일차 방출을 시원스레 헤치우고 이차를 기다리며 뭘로 뒷처리를 해야하나 고심하고 있는 참에 젊은 사내 몇이 나타났었고 이런 산길에서 하필 이럴때 사람들이 지나가나 싶어 당황하며 멀뚱거리고 있었던 둘은 어어~ 하다보니 그만 두눈 벌겋게 뜬체로 목을 녹슨 흉기(?)에 제압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입고있는 복색하며 제압(?)한 후에 더 당황하는 폼새하며 목에 흉기라고 들이 댄 호미며 낫 등을 보니 아무래도 산적등은 아닌 것 같긴 했어도 오랜 시간을 야지에서 헤맨 듯한 낭패한 몰골을 보자니 절대 이 근방에 있는지도 모를 어느 동네의 청년들은 아닌 듯 싶었다.

 “안돼겠어. 짐! 어른들 나오시라고 하고 묶을만한 넝쿨 좀 찾아와.”

 “알았어 한스. 제리, 나랑 같이 갔다오자.”

이것들은 대체 뭐하는 놈들이지 하는 의문 가득 담긴 눈으로 카이라와 흉켈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카이라야 대충은 얻어들은 가락이 있다 하지만 세상을 얻어 들은걸로 전부 알수 없는 것이었고 흉켈은 산적이란 족속을 토벌하는데 동원되긴 해봤어도 역시나 이런 상황은 난생 처음이었으니 퉁망울스런 눈을 떼룩 떼룩 굴리고만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위험해 보이지 않는 것이 너무나 이들이 순진스러 보인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끝없이 밀려오는 아랫배의 압박감에 도저히 싸우자고 달라들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니 좀 더 두고 보자라는 눈치만 주고 받고 있었다. 슬슬 다리가 저릴때 쯤 웅성이는 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그런데 더 어이없는 것이, 그래도 정체가 정말 산적이라면 두목 등, 이 상황에 걸맞는 인상들의 어깨들이 나올까 했는데 삐죽 삐죽 걸어오는 이들은 거의가 중년의 남녀 몇과 거동하기도 쉬워보이지 않는 노인네들과 꼬맹이들 그리고 젊은 아가씨 서넷 정도였다. 그렇게 나타난 무리는 카이라 등과 충분한 거리를 두고 멈췄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슬쩍슬쩍 살피는 꼬마들과 여자들을 뒤로한채 남자들만이 다가왔다. 그리고 아까의 짐과 제리란 녀석들이 찾아 온 넝쿨을 들고 나와 그 자세 그대로(?) 카이라와 흉켈을 묶기 시작했다.

 “아이고. 그래도 볼일은 마저 보게하고 묶던가 아니면 바지라도 입게하고 묶으세요.”

 “이런 염병. 이 사람들아 난 변비야 변비. 가만 있을께 일이라도 보게 해줘.”

그렇지만 이 인간들은 죄송합니다 라는 말만 되풀이 하며 참 꼼꼼이도 묶고 말았다. 먼저 손을 등 뒤로 돌려 손목을 묶고 팔까지 묶더니 가슴팍에서부터 허리까지 아주 꼬옥 묶었다. 그리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한스야. 저 분들에게 우리가 죄를 짓게 되었지만 그래도 일은 마저 보시게 하거라.”

그리하여 대충 수습을 하게 되었고 친절하게도 누르끼리한 속옷과 때에 절은 바지 자락까지 입혀주는 등 이들은 자신들이 일반 산적이 아님을 몸소 보여주었다. 며칠전 비록 종족은 다르지만 사로잡힌 전과가 있었던 카이라는 그때와는 너무나 다른 인도적인 대우에 감격하여 흉켈의 말 잔등 짐꾸러미에 꼬불쳐 둔 토끼 구이 두 마리를 선듯 일러받쳐 흉켈의 핏발선 시선을 피해야했다. 총 열다섯의 사람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지만 어른은 아이를 위해 아이는 어른들을 위해 애써 시장기를 참는 모습에 둘은 자신들의 식사 예절을 반성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노인네들과 이 사람들은 저기 동부의 키트랑 영지의 훨씬 넘어 쿤타눔.. 머시기 마을에서 일년 전쯤에 도망 나왔단 건데 이해가 안가는건 왜 바로 여기 북부, 세상의 벽 미타나 산에서 강도짓을 하냐는 거지.”

 “시끄러. 어디다가 반말이냐? 어르신 이왕 이리된거 깨끗하게 처리하고 갔으면 합니다.”

 “한스야. 아까는 미쳐 너희들을 말리지 못해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래서는 안돼지.”

 “어르신. 우리가 어쩌다 이리 되었는지 잊으셨습니까? 우리가 왜 저들을 믿어야 합니까?”

 “한스의 말이 맞습니다. 전쟁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도망자 신세가 된 것은 그렇다 쳐도 전에 성에서 사람들은 어땠습니까? 증명서를 미끼로 밑천 다 뜯어가더니 지방군에 신고까지 해서 칼과 마틴 두 녀석은 끝내 붙들려 갔지 않습니까. 한스 말대로 이왕 이리된 일입니다. 깨끗하게 처치하고 사람없는 곳에서 화전이나 일구며 우리들이 살아 남아야할거 아닙니까?”

 “그래도 우리가 어찌......”

돌아가는 얘기를 짐작해보니 이들은 몬스터들과 어둠의 왕국 로스 루다아스 그리고 우리 휴오니츠의 100년 전쟁터가 된 아이멜 강 어디쯤 살던 사람들인거 같았다. 100년이란 세월은 도대체가 죽기는 한것인지 의문마저 들게하는 드래곤들 에게나 대략 견딜만한 시간이지 몇 대(代)를 이어 내려갈 인간들에게는 정말 지긋지긋한 세월 동안을 내내 전쟁을 치루고 있으니 그 피폐한 참상은 이루 말할수 없을 것이다. 카이라가 귀건너 들었던 북부 대로를 타고 전해 오는 풍문에 의하면 양국의 어느 나라든 한때 세가 강해지면 수탈, 약탈이 이루 말할수 없다고 하였다. 심지어는 임산부를 강간하고 적국에 협조적이었던 사람들을 산채로 꿰어 죽여 마을 회관에 못질해서 걸어둔다는 등 끔찍한 일이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이들은 온갖 부역과 징수 징발 그리고 약탈을 견디다 못해 마을 사람들 거의가 몰래 도망을 하였을 것이다. 문제는 평민, 천민은 원칙적으로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으므로 다른 마을에 정착하고자 했다면 필히 증명서가 필요했으리란 점이었다. 그런데 그만 이런 이들의 처지를 이용해 등쳐먹은 이들이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불법 유민 도망자 신분임을 지방군에 고자질을 하여 결국 일년여의 노력이 물거품 되어 젊은이 몇은 기어코 징용을 당했던거 같고 나머지 이들은 다시 한번 도망의 길에 오른걸로 보여졌다.

 “우리가 바라지 않았던 일들을 저들에게 강요할 셈이냐? 저들은 다만 행인일 뿐 추적자나 인간 사냥꾼이 아니지 않느냐? 믿고 못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너희들은 우리가 인간이길 포기하자는 거냐?”

 “그렇지만 어르신...”

 “이미 우리는 우리 고향과 마을 그리고 우리의 부모 형제 자매를 많이 잃었구나. 우리가 처음 도망을 선택한 이유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다면 애초에 몇몇 희생을 감수해서 계속 터전을 지켰으면 될 일이었다. 소중한 이들을 묻고 피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어디있겠니? 그 모든걸 견뎌내며 발버둥 치는 것은 그저 평화로운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아보자는거 아니었더냐? 이 늙은이의 케케묵은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혹시나 하는 염려에 억울한 죽음을 만든다면 그건 먼저 간 우리 형제들의 바램을 져버린 일이라 여겨지구나. 그러니 저들을 놔드리자꾸나.”

각자가 깊은 상념에 잠겼다. 카이라는 처음의 민망함이 가신뒤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순수함과 순박한 모습뒤에 큰 상실감과 세상에 대한 적대감을 어렴풋이 느낄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야 자신의 입장에서는 어이없지만 지금의 상황이 며칠전 오크떼에게 붙잡혀갔던 것 이상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절박한 상황임을 깨달았다. 방금의 마을 어른의 말 때문에 자신들을 놔줄거 같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들을 인간 사냥꾼 취급하는거 같아 언짢기까지 하였다. 문득 흉켈의 표정이 궁금해서 옆을 돌아보았다.      

‘허어. 인간 사냥꾼은 본적은 없고 단지 말로만 들었지만, 아마 이 인간 얼굴에서 그리 틀리지는 않을거야. 내가 봐도 나 극악 무식 흉악한 악당이오 라는 얼굴이잖어.’

마침 흉켈은 음험한 악당이 무언가 어둡고 습한 그런 범죄를 모의하는거 같은 표정이었다. 고슴도치 수염은 토끼 기름 범벅이었는데 삐죽히 말려 올라간 입꼬리는 너무나 불량스러웠고 가끔 혀를 내밀어 입 주위를 슥슥 핥는 것은 카이라 마저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저 쉼없이 데굴데굴 굴리는 눈동자를 보면 무언가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사고처리 과정중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수 없는 거였다. 이건 마치 저쪽에서 걱정하는 대로풀리기만 하면 신고해서 단단히 한몫 챙겨야겠다 라는 표정이잖아~

 “어르신 그리고 형들. 말씀중에 죄송한데요. 여기 흉켈형은 걱정하지 마세요. 보기엔 비록 범죄형 얼굴이지만 그래도 명예를 아는 기사시거든요. 그러니 혹시나하는 걱정은 마시라구요.”

 “카이라!! 이런 쓰벌.”

깜짝 놀란 흉켈이 카이라를 제지하려 했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카이라는 왜라는 얼굴로 순간 멍했지만 곧 알 수 있었다. 눈에 띄게 흠짓 놀라는 일단의 사람들을 통해 무언가 자신이 크게 잘못 말을했구나 싶었던 것이다. 물론 카이라로서는 여전히 자신의 말중에 무엇이 잘못된 건지는 알수 없었지만.

 “어르신!.”

온갖 풍상에 시달린듯한 노인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작고 깡마른 노인의 몸이 잘게 떨고 있음이 헐렁한 옷을 통해 보여졌다. 한스를 위시한 젊은 남자들의 표정은 더 이상 처참할수 없을 정도로 한껏 일그러져 갔으며 좀 떨어진 곳에서 여자들은 아이들을 꼬옥 껴안고서 불안스런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봤고 아이들은 알뜰히 발라먹던 토끼 뼈가 땅에 떨어진지도 모른체 곧 울듯한 표정이 되었다.

 “난 기사다. 지금은 북부 지방군 정찰대 2조의 부조장이지만 바로 몇 달 전까지만해도 나 역시 동부 전선에 있었지. 그대들이 걱정하던 그대로가 맞다. 여기에서 잡히면 아버지들은 화살받이로 어머니들은 사병들 위안부로 아들들은 노예가 아니면 자폭조가 되겠지. 젊은 여자들은 좀 더 낫겠군. 자살만 안한다면 등급에 따라 귀족 장군들의 성노가 되거나 아니면 역시 사병들 차지가 되니깐 그래도 먹을건 충분히 주더라구. 큭큭큭. 그래. 그게 바로 전쟁이고 그게 바로 천한 것들의 운명이지. 그래 바로 이것이 천년 인간 왕국의 현실이며 이 빌어먹을 놈의 휴오니아의 꼬라지가 아니더냐!”

나지막히 자신을 소개하던 흉켈은 말이 이어갈수록 점점 더 격앙되어갔다. 마치 그 자신이 노예나 자폭조 혹은 성노가 된것처럼 분노하고 있었다. 실핏줄이 터진 두 눈을 한껏 부릅뜨며 뻣뻣한 수염이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아니더냐.. 아니더냐.. 아니더냐.. 끝의 고함이 아련하게 울리고 있었다.

“흉켈 하스모프. 마음으로 세상을 보며 세상을 위해 검을 들며 인간으로서 살아 가겠다. 날 죽여라”

그리고는 굳게 눈을 감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