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마의 제3 예언(5. Planet「Roy」)

[Mr.Crow]2003.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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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net「Roy」







  지구로부터 300억 광년(1광년=10조 km) 떨어져 있는 '로이 은하계'는 소용돌이 구조를 하고 있으며 1,500억 개의 항성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로이 혹성은 로이 은하계의 남서부에 자리하고 있었다.

  혹성 '로이'는 모든 면에서 지구와 유사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공전주기와 자전주기가 그러했고 공기와 햇빛, 그리고 바다와 각종 생명체가 존재하는 것도 그러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혹성의 지름이 지구의 세 배 정도인 36,752km 라는 것과 두 개의 태양을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지구와는 달리 문명의 발생이 인간의 진화에 의해 순차적이고 점진적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2,000년쯤 전, 광활한 우주를 표류하던 지구인들에 의해 하루아침에, 급진적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신을 갖고 있던 지구인들과는 달리 로이 성인은 단 한 존재의 신도 믿지 않는다는 것. 신은 그들에게 있어서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불신과 증오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로이 성에서는 그것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신에 대한 집단적인 증오는 결국 그들에게 인류의 생존을 일깨워주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그들의 지도부는 몇몇 수뇌부의 인물들과 신에 대한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는 실무자들에게만 신과 얽힌 인류의 역사에 대해 교육을 했다. 그들 외엔 그 누구도 신의 존재에 대한 비밀을 아는 이가 없었다. 아니, 로이 성인들은 탄생과 함께 '로이 파멜라'를 신으로 떠받들고 살아가도록 철저히 세뇌되었다.

  '로이 파멜라'. 그는 2,000여 년 전 지구가 평화와 화합으로 가득했던 그 때에 이미 지구의 종말을 예지하고 그것을 세계 만방에 널리 알린 위대한 예언자였다. 또한 지구가 종말을 맞던 그 해에 엄격한 기준에 의거하여 전 세계 각지에서 착출된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 100명을 싣고 새로이 정착할 혹성을 찾아 우주항해에 나선 선지자이기도 했다.

  그들을 실은 'Deja-vu'라는 이름의 초대형 우주선은 13년 동안이나 광활한 우주를 탐사했지만 그 어떤 별에도 정착할 수가 없었다. 생명체가 존재 가능한 조건의 별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최후의 인류인 그들은 절망감에 사로잡혀갔다. 준비해온 연료와 식량이 바닥날 때까지 이렇게 우주의 미아로 떠돌다가 죽어 가는 것을 당연한 자신들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신경이 예민한 몇몇 사람들은 정신분열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그것은 단지 일부에 국한된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모든 상황이 그들에게 불확실한 자신들의 운명을 비관하도록 강요했고 그런 강요는 사람들을 서서히 미쳐가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유성우(遊星雨)를 만났다. 유성우를 피하기 위해 좌충우돌하던 'Deja-vu'호는 부지불식간에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고 말았다. 블랙홀에 빨려들던 그 순간, 그들은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의 몸을 비롯한 우주선 전체가 초미립자로 분해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통 같은 건 없었다. 단지 그 속에 자신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의 의식자체가 그 존재를 상실해 버린 때문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 중 제일 먼저 의식을 되찾은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을 흔들어 깨웠을 때는 이미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별에 불시착한 후였다. 그곳은 십 수년 간 그들이 애타게 찾아왔던 바로 그런 행성이었다. 빛과 담수, 공기가 있고 수많은 종의 생명체가 살아 숨쉬고 있는 그런 아름다운 별이었다.

  그들은 그곳을 '로이'라고 명명했다. 신의 마수에서 벗어나 새로운 유토피아로 자신들을 인도해 준 위대한 예언자 '로이 파멜라'의 이름을 그 후손들이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아직 어린애들이라 사고 없이 테스트를 마칠 수 있을지가 걱정이네요」

  연구실 중앙 허공에 그려진 홀로그램을 바라보며 '사과꽃향기'가 말했다.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그녀였지만 '신 소멸 프로젝트'의 수석 연구원이자 로이성인으로써 최고의 경지라고 할 수 있는 알파(α) 등급의 반열에 오른 최고의 에스퍼이기도 했다.

「모두들 자질이 뛰어난 아이들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게다가 미뉴에트 공주님이 계시니까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후후」

  백발이 성성한 '갈릴레이'가 흐뭇한 웃음으로 턱수염을 쓸어 내렸다. 원로위원회의 의장인 그는 로이 성 최대의 주요 핵심 사안인 '신 소멸 프로젝트'의 자문위원직을 겸비하고 있었다. 연구실 안에는 두 사람 외에도 연구소장이자 본 프로젝트의 최고 책임자인 '헤르도트'와 '큐칸투스' 방위성 장관, 그리고 대여섯 명의 연구원들이 홀로그램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홀로그램은 TV수상기나 스크린과 같은 원리를 이용한 시스템이 아니었다. 마치 연구실 안을 떠다니는 먼지 입자들이 스스로 빛을 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무 것도 없는 빈 허공에 실제와도 같은 상황들이 영상화되고 있었다. 우리 머리 속엔 그 어떤 영상매체도 장치되어 있지 않지만 잠이 든 후, 현실처럼 생생한 장면들을 꿈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로이 성은 크게 '안전지대'와 '경계구역', 그리고 '출입불가지대'로 구분되어 있다. '안전지대'는 그들이 주거지나 휴양지로 사용하고 있는 지역을 말하며 로이 성 전역에 열 곳이 조성되어 있었다. 작게는 5,000㎢에서 크게는 400,000㎢에 이르는 곳도 있다. 그리고 '경계구역'이란 '안전지대'를 둘러싼 주위 10여 km 정도의 구역을 의미하는데 이곳엔 괴수와 해충의 침입을 막기 위한 각종 기관들이 설치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출입불가지대'는 '안전지대'와 '경계구역'을 제외한 그 외의 모든 지대를 일컫는다. 이 섬의 원래 주인인 생명체들이 먹이사슬구조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고로 인간들을 위한 그 어떤 보호장치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극도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신의 마수로부터 살아남은 지구인들이 정착하기 전, 로이 행성은 라뮤크, 타르곤, 파라칸, 로프로사우르스와 같은 거대하고도 광포하기 짝이 없는 맹수들의 지배지(支配地)였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인 인류는 그들을 주변에서 멀리 몰아내야만 했다. '앙골모아'와 '가이아', 두 신의 마수로부터 기사회생한 목숨을 한갓 미물들의 먹이감으로 던져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구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무자비한 학살을 단행하지는 않았다. 불이나 빛을 이용하여 그들을 위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종들도 몇몇 있었다. 라뮤크와 타르곤, 그리고 파라칸과 같은 괴수들은 워낙에 호전성과 자기 영역 수호 본능이 강해서 결코 물러설 줄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높은 싸이클의 파장을 발생케 하는 고주파 발신기를 개발해내기에 이르렀다. 제 아무리 사납기로 유명한 맹수들도 고주파 발신기 앞에서는 줄행랑을 치기 바빴다. 지구인들은 그렇게 자신들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해나갔다. 물론 인구의 증가에 비례하여 자신들에게 꼭 필요한 정도만 안전지대의 범위를 넓혀갔다.

  테라를 비롯한 여섯 명의 꼬마들은 바로 '출입불가지대' 안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위험성이 높다는 '메듀사의 숲'을.

 「가엘이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나무들 틈새로 삐죽 고개를 내민 가엘을 발견한 '아림 우딘'이 그렇게 소리치자 아이들 모두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의 손끝이 가리키고 있는 지점으로 집중됐다.

 「우와……」

 「진짜 가엘이다……」

  '가엘'은 지구의 원숭이와 비슷한 포유류 동물로 얼굴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크고 반짝이는 눈을 가진 온순한 성격의 동물이었다.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을 엄격히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로이 성인들이 녀석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기에 일곱 명의 꼬맹이들은 녀석을 구경하느라 완전히 넋을  놓고 있을 정도였다. 잠시 후 또 다른 꼬마가 반대편 숲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금왕관 열매다!」

  가엘의 움직임을 쫓고 있던 꼬마들의 시선이 이번엔 반대편 숲으로 옮겨졌다. 희귀목(稀貴木)으로 알려진 금왕관 목 한 그루가 한쪽 구석에서 황홀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금색 왕관 모양의 열매는 찬연한 햇살을 머금었다가 온 누리에 방사해내고 있었다.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던지 아이들은 눈살을 찌푸리거나 한 손으로 눈 주위를 가리는 식으로 수정체를 통해 투과되는 빛의 양을 줄이려고 애썼다.

  그 때 숲 속에 어디선가 잡풀들이 들썩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일 먼저 그 소리를 감지한 '카를로스'가 그 쪽을 향해 돌아섰다. 막 풀 섶을 헤치고 나서려던 '랄프' 한 마리가 카를로스와 눈을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그 짧은 내 다리로 분주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들 중 가장 개구쟁이인 카를로스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리 만무했다.

 「형! 어디 가?」

  거머리처럼 카를로스 옆에 바짝 붙어 다니던, 동생 '치코'가 걱정스런 눈길로 그를 불러봤지만 이미 저만큼 멀어진 뒤였다.

 「랄프잖아?」

  카를로스의 앞을 달려가고 있는 랄프를 발견한 미뉴에트 공주가 뛸 듯이 기뻐하며 두 손뼉을 마주쳤다. 랄프의 생김새는 지구의 토끼와 비슷했지만 움직임은 코알라와 맞먹을 정도로 초특급 느림보였다. 그 특유의 느릿느릿한 동작은 보는 이들로부터 웃음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했다. 로이 성 꼬마아이들 사이에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바로 랄프 인형이었다.  

 「어딜 도망가려구!」

  몸을 날려 랄프를 포획하는데 성공한 카를로스가 녀석의 두 귀를 움켜쥔 채 일행을 향해 흔들어 보였다. 랄프를 가까이서 보고 싶었던 꼬마들이 우쭐해 하고 있는 카를로스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모두들 신기한 눈으로 랄프의 구석구석을 살피느라 분주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녀석도 있었고 옆구리를 손가락 끝으로 쿡쿡 찔러보는 녀석도 있었다.

  대충 아이들이 랄프에 대한 관찰을 마쳤다고 생각된 카를로스는 미뉴에트 공주에게 녀석을 내밀었다.

 「제 최초의 전리품을 공주님께 바치겠습니다」      

  미뉴에트 공주가 감격스런 얼굴로 카를로스를 올려다봤다.

 「정말……? 정말 나 주는 거야?」

  랄프는 카를로스의 손에서 미뉴에트 공주의 가슴으로 옮겨져 왔다. 공주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랄프의 몸 이곳 저곳을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결코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인형이 아니었다.

 「공주님. 우리 그거 구워 먹어요!」

  세상에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단 두 가지만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치코가 짙은 눈썹을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말했다. 자신의 의향은 물어보지도 않고 저토록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랄프를 공주한테 상납한 카를로스가 원망스럽다는 듯한 눈초리였다. 그런 동생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카를로스가 셀쭉한 미소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고마워. 카를로스. 그럼 랄프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지?」

 「물론입니다. 공주님」

  랄프는 미뉴에트의 가슴팍에서 살며시 떨면서 "한번만 살려주세요"라며 울먹이고 있었다. 녀석이 인간의 언어를 알리 만무했지만 미뉴에트는 녀석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미뉴에트는 살며시 한쪽 무릎을 땅에 댄 채 두 팔을 풀어냈다. 랄프가 잔디밭 위에 폴짝 내려섰다. 그리고는 촉촉이 젖은 두 눈으로 공주를 올려다보다가 숲을 향해 내달음질 쳤다. 자기 딴에는 젖 먹던 힘까지 총동원한 몸부림이었지만 아이들이 보기에는 제자리걸음으로만 비춰졌다. 랄프의 혼신을 다한 도주를 지켜보며 아이들은 큰 소리로 웃어댔다. 하지만 치코는 멀어져 가는 랄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타, 12, 감마 구역에 루시퍼 성 1개 함대가 출현했습니다. 타, 12, 감마 구역에 루시퍼 성 1개 함대가 출현했습니다!」

  요란스러운 경고음과 함께 방위성의 중앙 통제 시스템인 '지나'의 목소리가 통제탑 안에 울려 퍼졌다. 통제실 중앙 허공에 거대한 영상이 드리워졌다. 루시퍼 성의 함대는 한 척의 거대한 모함을 10대의 소형 전투선이 둘러싼 형태로 로이 성의 심장부인 제1 안전지대와 수직으로 연결되는 대기권 밖 우주에 멈춰서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노스트라다무스' 사령관이 입가에 미소를 한 조각 베어 물었다.

 「드디어 놈들의 항공기술이 우리의 부비트랩을 피할 수 있을 정도까지 성장했군」  

  루시퍼 행성은 로이 성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400광년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조그마한 소행성이었다. 원래 이곳은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자나, 신을 숭배하려는 자들을 추방하는 유배지였다.

  지독한 인류애주의자들의 후예인 로이 성인들은 차마 그들을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처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간이 살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그곳에 내다 버리는 것으로써 형벌을 대신했다.

  예전에는 회개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되는 중범죄자들을 경계구역 밖으로 강제 추방시켰다. 그들은 며칠 가지 못해 포식성 동물들이나 맹독성 해충들에 의해 죄 값을 치렀다. 하지만 우주 공간을 인위적으로 일그러뜨려 목적지를 출발지점 쪽으로 끌어당기는 '공간수축방식'을 개발해 낸 로이력 917년부터는 루시퍼 행성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출격명령 내릴까요. 사령관님?」

  베드로 부사령관이 긴장된 표정으로 노스트라다무스 사령관을 돌아봤다.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그가 한 손을 허공에 저어 보였다.

 「아닙니다. 놈들의 과학력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두고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요. 그저 대기명령만 내려놓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자신의 등뒤에 서 있는 '하킴 바탈다' 소령에게 베드로 부사령관이 낮지만 무게실린 어조로 말했다.

 「전군에 출동대기명령을 하달하도록!」


 「타, 12, 감마 구역에 루시퍼 성 1개 함대가 출현했습니다. 전 대원들은 즉시 출동 태세에 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리아바티아'의 뇌파 싸이클에 맞춰 방위성의 중앙 통제 시스템인 '지나'의 경계경보가 전달되어져 왔다. 한참 시뮬레이션을 통해 가상 전투 훈련 중이던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가상 전투 훈련 중지!」

  그러자 지금껏 그가 탑승해 있던 우주선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망망대해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던 우주도 사라져 버렸고, 그를 향해 폭풍우같은 광자력 포를 쏘아대던 십여 대의 루시퍼 성 전투기들도 순식간에 종적을 감춰버렸다.  

 「전투복 착용!」

  그가 입고 있던 하얀 면 T와 헐렁한 반바지가 별안간 눈부신 빛을 방사해댔다. 그리고 그 잔광(殘光)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의 몸은 검은 빛깔의 전투복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저택 지하 격납고에 잠들어 있는 '화랑―14' 전투기 안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연상했고 순식간에 그의 몸은 그곳으로 텔레포트 되어 있었다.


  '꺄아악!'

  미뉴에트 공주 일행이 숲을 지나 막 드넓은 벌판으로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별안간 하늘에서 천둥소리를 방불케 하는 엄청난 굉음이 들려오더니 온 천지가 어스름해져왔다. 이미 가상현실 체험 시스템을 통해 충분한 지식을 습득한 꼬마들은 그 울부짖음만으로도 자신들의 하늘을 통째로 가리고 있는 거대한 물체의 정체가 무엇인지 간파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고개를 들어 그것을 확인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모두가 메듀사의 눈을 마주본 후 석상으로 변해버린 신화 속의 인물들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로 그렇게 겁에 질려 있을 뿐이었다.

  그들 중 제일 먼저 입을 연 건 가장 덩지가 큰 우딘도 아니었고, 가장 호승심(好勝心) 투철한 카를로스도 아니었다. 일행 중 가장 겁쟁이면서 울보인, 그러나 가장 호기심 많은 5살짜리 꼬마 계집아이인 '루디아'였다.

 「로프로사우르스. 중생대 초기에 출현해서 현재까지 살아 남아 있는 공룡. 몸 길이 25에서 35미터, 너비 50에서 70미터. '하늘마루 고원'과 '식지 않는 강'을 주 서식지로 약 백여 마리밖에 생존해 있지 않는 희귀보호동물. 포악하고 호전적인 타르곤과 파라칸 같은 괴수들을 주식으로 하며 온 몸엔 50센티미터 두께의 철갑과도 같은 표피로 무장되어 있음. E.S.P능력을 보유하고 있어 인간과의 텔레파시가 가능하다. 아직까지 인간을 공격했다는 기록은 없음」

  루디아는 로프로사우르스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자동차 세일즈맨이 판촉을 위해 고객을 상대로 브리핑을 하듯 그렇게 읊어댔다. 공포에 질려 바짝 얼어붙어 있던 아이들은 아직까지 인간을 공격했다는 기록은 없다는 루디아의 마지막 대사가 떨어지자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였다. 다시 한번 '메듀사의 숲'은 로프로사우루스의 울부짖음으로 들썩거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거대한 공기의 파공음(破空音)과 함께 로프로사우르스가 벌판에 서 있는 꼬마들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쇄도해 오기 시작했다. 루디아의 브리핑에 힘입어 팽팽했던 긴장감을 조금이나마 늦추려했던 아이들은 다시금 극도의 공포감에 사로잡혀갔다. 

 「공간 터미널!」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모두가 로프로사우르스의 먹이가 되고 말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한 미뉴에트 공주가 그렇게 외쳤다. 그러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을 중심으로 반경 10미터 주변 공간이 물결처럼 일렁거렸다. 공간 터미널이 소환되기 직전의 전조현상이었다.

  공간과 공간은 공간으로 이어져 있다. 그렇다고 무슨 그림 맞추기 퍼즐처럼 공간과 공간 사이에 구획 따위가 존재하는 건 결코 아니다.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일 뿐이다. 하지만 로이 성인들은 거대한 한 덩어리인 공간을 임의대로 나눌 수 있는 물리학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그들의 과학이 이뤄낸 쾌거들 중 하나였다.

  로이 성인들은 공간을 케잌 자르듯 분할했다. 그 잘라낸 공간 덩어리들을 퍼즐 맞추듯 이리저리 움직여 필요한 곳에 가져다 놓았다. 이것을 '공간퍼즐 방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방식은 그리 오래 쓰이지 못했다. 공간의 이동시 퍼즐을 짜 맞추듯 다른 공간들을 재배치해야 되는 번거로움이 수반되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일정한 공식이 있었는데 가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철저히 공식에 맞춰 이동을 시켜도 기존의 공간과 이동된 공간과의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로 인한 공간의 뒤틀림 현상으로 핵폭발과 맞먹는 대형 폭발사고가 발생한 적도 있었다.

  무언가 좀 더 획기적인 방법을 찾아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로이 성인들은 번거롭고도 불안정한 공간퍼즐방식보다 훨씬 더 수월하고 안정적인 방법을 고안해냈다. 바로 '공간수축방식'이었다.  

  공간수축방식이란 공간을 임의대로 구부려 출발점과 목표점을 교차케 하는 방식을 말한다. 예를 들어 30센티미터 짜리 플라스틱 자의 한 쪽 끝에 있는 개미를 다른 한쪽 끝으로 이동시키려 하는 경우, 정상적인 방법으로 반대편 끝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개미에게 그에 합당한 노동력과 시간을 투자하도록 강요해야 하지만 플라스틱 자를 인위적인 방법으로 구부려 양끝을 서로 맞닿게 한다면 중간 공간을 거칠 필요 없이 두어 걸음만 내 몰아도 개미는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공간수축방식은 바로 이런 원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공간수축방식은 출발지점을 목표지점으로 옮기기 위해 다른 공간들을 재배치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고 그런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타 공간과의 충돌로 인한 빅뱅현상의 위험성도 배제할 수 있었다.     

  공간 터미널이란 이와 같은 방식들과는 사뭇 다른 개념의 이동방식이었다. 로이성인들은 짧은 거리지만 자유자재로 공간을 이동하는 로프로사우르스의 텔레포트를 물리학적인 원리로 분석할 수 있게된 때부터 본격적으로 이 연구에 착수했다. 그들은 입자분해?결합기를 개발했고 분해된 입자를 원하는 목표지점으로 순간이동케 하는 터미널을 만들어냈다. 거기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모든 것을 배출하는 화이트 홀에 대한 그 동안의 연구가 큰 도움으로 작용했다.

  미뉴에트 공주의 일행 주변을 반구형으로 둘러싼 것은 바로 공간 터미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물리학의 지원을 받아 생성된 것이 아니라 E.S.P로 소환해낸 것이었다. 로프로사우르스의 텔레포트를 연구하던 로이 성의 과학자들은 그것의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는 E.S.P를 최대치로 끌어낼 수 있는 시스템도 구축해냈다.

  미뉴에트 공주 일행 모두는 10살 미만의 꼬아 아이들이었지만 초감각적 지각능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탁월한 아이들이었다. 그들 모두는 공간 터미널을 소환해 낼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오늘의 테스트는 그들이 신의 마수로부터 인류의 운명을 보호할 기사단원으로써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 그 여부를 측정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쐐애액!'

  로프로사우르스의 비행 속도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했다. 녀석은 저렇듯 엄청난 속도로 공간의 왜곡현상을 유발시킨 뒤 벌어진 공간의 틈 사이로 자신이 원하는 목표지점을 소환해 낸 뒤 순간이동을 전개한다. 

 「모두들 꼼짝하지 마! 공간 터미널에 휘말리면 대기권 밖에서 폭사하게 될 테니까!」     

  미뉴에트 공주가 불러 온 공간 터미널은 대기권 밖 우주로 연결되어 있었다. 만약 누군가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들을 둘러쌓고 있는 공간 터미널에 휘말리기라도 한다면 그 땐 끝장이었다. 미세한 입자로 분해된 그의 몸은 순식간에 진공 상태인 우주 밖으로 이동할 테고 그 미세한 입자들은 채 다시 재결합되기도 전에 연쇄적으로 폭발되고 말 테니까.

  미뉴에트 공주의 명령에 우딘과 카를로스를 비롯한 몇몇 사내아이들은 공포에 떨고 있는 다른 아이들을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공주의 우려대로 누군가 공간 터미널에 휘말려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지만 자신들의 공포를 서로 나누기 위해서 라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이리라.      

  일행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쇄도해 오는 로프로사우르스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미뉴에트 공주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두 손으로 끌어 모았다. 로프로사우르스는 생래적으로 고감도의 초감각적 지각능력을 보유한 채 탄생한다. 녀석들 중에는 간혹 초감각적 지각능력이 비정상적으로 발달된 돌연변이들이 출현하곤 했다.

  어쩌면 지금 자신의 일행을 향해 돌진해 오는 녀석도 고감도의 E.S.P를 보유하고 있는 돌연변이일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이 소환해낸 공간 터미널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엄청난 능력을 보유한……. 극대한의 에너지를 손끝으로 집결한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공간 터미널이 그 효용가치를 다하지 못하는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     

  '스팟'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의 불안감은 기우에 그쳤다. 로프로사우르스는 공간 터미널을 꿰뚫지 못한 채 미뉴에트 공주의 코앞에서 사라져버렸다.

 「휴……」

  긴 안도의 한숨이 공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그녀의 손끝에서 눈부시도록 파란빛을 명멸하던 에너지들이 그 빛을 거두며 다시 체내의 구석구석으로 회귀되어갔다.

 「이제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로프로사우르스는 공간 터미널이 삼켜버렸으니까」

  풀 섶 위에 주저앉아 바들바들 떨고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주변을 살피는 그들의 두 눈동자는 완전히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꾸에에액!'

  그들의 바로 등 뒤쪽 숲 속에서 등골이 오싹해져 올 정도로 높은 싸이클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놀란 아이들이 덩달아 비명을 질렀다. 미뉴에트 공주는 비명이 터져 나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괴성이 터져 나오는 쪽의 나무들이 심하게 들썩이고 있었다. 그 나무들 틈새로 로프로사우르스의 날개가 살짝 그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 때마다 단말마의 고성이 세어 나왔다.

  숲 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알아내기 위해 공주는 투시능력을 동원했다. 로프로사우르스가 파라칸의 가슴팍을 두 발로 짓누른 채 목덜미를 물고는 이리저리 뒤흔들어대고 있었다. 파라칸은 로이 성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에 가장 난폭하고 호전성이 강한 종으로 다 성장한 녀석은 5미터가 넘는 것도 있는 맹수 중의 맹수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미뉴에트 공주의 살갗들이 파리하게 미동하고 있었다. 로프로사우르스는 그녀가 소환해낸 공간 터미널에 의해 우주 밖으로 날아가 버린 게 아니었다. 녀석은 공간 터미널에 휘말려 들기 직전에 근 거리 순간이동을 시전했던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일행을 덮치기 위해 은밀하게 접근해오고 있던 '파라칸'을 덮쳤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공주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지나갔다.

 《저희들은 당신들을 절대 공격하지 않아요. 당신들이 우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은 말이죠》

  그것은 대기의 흐름을 역류해 미뉴에트 공주의 귓전을 스치고 지나간 로프로사우르스의 텔레파시였다.

 《파라칸으로부터 저희를 지켜주기 위해서 몸을 날린 거였나요?》

 《제게 주의력을 집중하시느라 이 녀석이 등뒤까지 다가온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계시길래……》

  공주의 눈망울엔 금새 물기가 고여갔다.

 《미안해요.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공간 터미널을……》

 《후후. 아니에요. 워낙 다급한 상황이라 미처 님들께 알릴 시간이 없었어요. 저라도 아마 그렇게 오해했을 거에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루시퍼 성인들의 함대가 제 3 저지선을 뚫고 계속 접근하고 있습니다」

  지나의 경고 메시지가 방위성 중앙 통제실에 울려 퍼지자 대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제 3 저지선은 지표면으로부터 약 40km에서 70km 사이의 중간권에 겹겹이 설치되어 있는 레이져 그물 망을 가리킨다.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는 극히 미세한 입자로 구성되어 있기에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루시퍼 성의 우주선들을 얼음처럼 녹여 버릴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베드로 부사령관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사령관님. 더 이상 두고보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출동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하지만 이 시스템은 6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동안 루시퍼 성인들이 보내온 무인 척후함들은 모조리 레이져 그물 망에 의해 한 줌 쇳물로 녹아 대기권 중에 증발해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무인 척후함을 통해 레이져 그물망을 피할 수 있는 해법을 강구해냈다. 루시퍼 성인들의 과학력이 최소한 150년은 뒤져 있다는 과학자들의 분석은 지금 이 시점에서는 대단한 판단착오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노스트라다무스 사령관은 여전히 여유만만해 보였다. 남아 있는 제 2 저지선과 제 1 저지선은 로이 성의 과학력이 총동원된 최첨단 시스템이기에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뜻일까? 아니면 설령 모든 저지선을 뚫고 침투한들, 고작 1개 함대로 너희들이 무얼 할 수 있겠냐는 뜻일까? 그의 심중을 알 수가 없었던 베드로 부사령관은 그저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 때 노스트라다무스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도둑을 완벽하게 막으려면 도둑의 능력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를 수시로 체크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가 행여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도둑이라도 맡게 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합니까?…… 

  베드로 부사령관의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온 말이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세어 나오기 전에 부사령관은 입을 다물었다. 합리주의자이자 완벽주의자인 부사령관의 눈에 그의 투철한 모험정신과 실험정신은 언제 봐도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아마도 그의 만만디적인 느긋함은 오랫토록 전쟁다운 전쟁을 치러보지 않았던 것에 그 근원을 두고 있을 거라고 추측하며 부사령관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사이 루시퍼 성인들의 함대는 중간권을 지나 무서운 속도로 항해해 오다가 제 2 저지선이 펼쳐져 있는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다른 건 몰라도 탐지기술 쪽에서만큼은 혁신적인 성과를 일궈낸 것 같았다.  

  제 2 저지선 앞에 멈춰선 사탄 성의 모함 선두 쪽에서 곤충의 촉수 모양을 한 탐지기가 뻗어 나와 부산스럽게 움직여댔다. 제 2 저지선이 무엇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 파해법(破解法)은 무엇인지를 분석하기 위함이었다. 몇 분 동안 시스템을 분석하기만 하던 모함은 탐지기를 거둬들인 후, 왔던 방향으로 항로를 돌렸다. 아마도 현재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분석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듯해 보였다.

  적의 모함이 선두를 되돌리자 노스트라다무스 사령관이 말했다.

 「요격편대를 출동시키십시오. 한 놈도 돌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파라칸의 심장이 멈춘 것을 확인한 로프로사우르스는 부리로 녀석의 가슴팍을 갈랐다. 그리곤 여전히 펄떡이고 있는 심장을 한 입 가득 물고는 고개를 몇 번 흔들어 끊어냈다. 파라칸의 심장은 로프로사우르스가 제일 좋아하는 특식이었다.

  심장과 연결되어 있던 어른 팔뚝 크기의 대동맥에서 뿜어져 나온 피분수가 초록으로 가득한 숲을 검붉게 물들였다. 투시력을 동원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꼬마 일행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어서 피하세요, 공주님! 빨리요!》

  소리가, 아니 텔레파시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공주는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는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공주는 약간의 E.S.P를 시각으로 집중시켰다. 약 1키로 미터쯤 떨어진 숲 속 자이언트 나무 꼭대기에서 랄프 한 마리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전에 놓아  주었던 바로 그 녀석이었다. 

 《라뮤크와 파라칸 무리가 몰려오고 있어요! 어서 피하세요!》

  '라뮤크까지?'

  라뮤크는 로프로사우르스와 함께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유일한 중생대의 생명체였다. 주로 지상에서 서식하지만 필요할 때는 옆구리에 붙어 있는 긴 날개를 이용해 먼 거리를 비행하기도 한다. 몸길이는 14m에서 20m에 이르며 직립보행을 한다. 녀석 역시 로프로사우르스처럼 고감도의 E.S.P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 지능이 낮은 타르곤과 파라칸을 몸종처럼 부린다. 하지만 야행성 동물이라 빛에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 라뮤크가 이런 대낮에 출현하다니. 그것도 무리를 지어…….

  미뉴에트는 자신의 모든 감각기관을 곤두세웠다. 메듀사의 숲 저쪽 지축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그리곤 두 눈을 감고 자신의 심안을 열었다. 5km쯤 떨어진 곳에 수십 마리의 타르곤과 파라칸이 무서운 속도로 접근해 오고 있었고 세 마리의 라뮤크가 여유있게 그 뒤를 비행해 오고 있었다. 

  로프로사우르스는 인간에게 지극히 호의적이지만 라뮤크를 비롯한 타르곤과 파라칸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배지 일부를 점령한 인류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지금이 인간들에게 보복을 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라고 여기고 있을 지도 몰랐다. 꼬마 아이들로만 구성된 공주의 일행에게 지금까지 맺혀 온 자신들의 원한을 여한 없이 분풀이하겠다는 심산으로 저렇듯 대규모로 몰려들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카라 아줌마. 어서 이곳을 피하세요!》

  느긋하게 음미해 가면서 파라칸의 심장을 뜯어먹고 있던 로프로사우르스가 미뉴에트 공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피하라니요?》

 《라뮤크와 타르곤 떼가 몰려오고 있어요. 어서요!》  

  포만감에 젖어 있던 로프로사우르스의 두 날개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아마도 라뮤크라는 말 때문이었으리라. 라뮤크는 쥐라기 시대 때부터 로프로사우르스와 천적관계였다. 천성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로프로사우르스 족은 라뮤크 족에게 화친을 요구했지만 천상천하 유아독존, 절대강자는 한 종족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라뮤크 족은 끊임없는 도발을 일삼아 왔다. 결국 기나긴 두 종족간의 전투에서 판정승을 거둔 건 라뮤크 족이었다. 로프로사우르스 족이 오지 중에 오지인 '하늘마루 고원'과 '식지 않는 강'으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코 로프로사우르스 족이 라뮤크 족보다 힘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살육과 희생이 안타까웠을 뿐이었다. 

  미뉴에트 역시 그들의 역사에 대해서는 홀로그램 교육을 통해 주입받은 적이 있었다.

 《라뮤크……》

  그건 미뉴에트 공주에게 한 말이 아니라 그저 카라의 혼잣말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공주의 뇌파에는 생생히 들려져 왔다. 그녀의 호흡이 거칠어져 가고 있는 것이.

 《공주님과 그 친구 분들은 어쩌시려구요?》  

 《저희들은 해야할 일이 있어요. 저희들 걱정은 마시고 일단 피하세요》

 《설마 저들과 싸우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저희들도 적당한 곳으로 몸을 피할 거에요》

  카라는 두 다리로 땅을 박차며 공중으로 튀어 올라 공주 일행 앞에 착지해 내렸다. 그리곤 땅바닥에 바짝 몸을 낮췄다.

 《모두 타세요. 이 별 안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어딘지 제가 알고 있으니까요》 


 「요격편대 출동! 루시퍼 성 함대를 모두 격추시키십시오!」

  지하격납고 전투선에 지나의 텔레파시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아리아바티아는 두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중간권을 비행하고 있는 루시퍼 성의 함대를 머리 속에 그렸다.

  지하격납고에 눈부신 빛 무리가 작렬했다. 아리아바티아가 탑승해 있던 화랑 14호기는 어느새 루시퍼 성의 함대가 진행하고 있던 항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의 양옆으로 십여 기의 아군 전투기들이 늘어서 있었다. 

 《광자력 빔!》

  아리아바티아의 뇌파를 통해 명령이 하달되자 도열해 있던 로이성 전투선이 루시퍼인들의 함대를 향해 광자력 빔을 쏘아댔다. 1차 공격에 여섯 기의 적기가 격추되어 형체도 없이 사라졌고 나머지 네 기의 적기는 격추 직전에 근거리 순간이동으로 이를 비껴냈다. 그러나 빈 공간을 꿰뚫고 지나간 광자력 빔은 곧 방향을 바꾸어 형체를 재조합해 가고 있는 4대의 적기를 관통했다. 순식간에 모함을 호위하던 10대의 루시퍼성 전투선이 증발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아리아바티아의 화랑 14호기가 루시퍼 성의 모함을 향해 돌진해가기 시작했다. 화랑 14호는 순식간에 기하급수적으로 가속해가며 허공에 파문을 일으켰고 이내 공간 속으로 그 자취를 감춰버렸다. 단지 한줄기 섬광이 적의 모함 중심부를 가른 후 유성처럼 긴 꼬리를 남겼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3초쯤 후, 루시퍼 성의 모함이 거대한 굉음과 함께 폭발을 일으켰다. 대기권이 심한 진동을 일으킬 만큼 엄청난 폭발이었다. 폭발의 잔해들이 로이 성 전투기까지 밀려 왔다. 


 《어디로 가는 거에요?》

  미뉴에트의 질문에 카라는 부리 끝으로 지평선에 우뚝 솟아 오른 거대한 산맥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산맥을 지나면 '끝없는 골짜기'가 나와요. 신생대에 발발했던 엄청난 지진으로 인해 대륙이 갈라지면서 생긴 거대한 골짜기죠. 일단 거길 지나면 어느 정도 마음을 놓으셔도 될 거에요》

  5,500만여 년 전, 그러니까 신생대 초기에 로이 성엔 엄청난 대지진과 화산폭발이 있었다. 고생대 후기부터 무려 3억 년 가까운 긴 시간동안 로이성을 지배해 왔던 공룡들은 로프로사우스르 족과 라뮤크 족을 비롯한, 비행이 가능했던 몇몇 종을 제외하고는 이때를 전후하여 거의 멸종하고 말았다. '끝없는 골짜기'는 바로 이때의 지각변동으로 인해 지진대를 따라 생성되었다. 그런 협곡들은 로이 성 전역에 약 20여 곳 정도였으며 곳에 따라 그 규모는 다 틀렸지만 미뉴에트 공주 일행이 향하고 있는 협곡은 길이 1,434km에 폭 489m, 89km의 깊이로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미뉴에트는 곧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물론 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협곡이 그들의 추격을 어느 정도 막아줄 수는 있을 테지만 그 협곡 너머 대륙에도 역시 그들의 동류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런 의문들로 한숨을 내쉴 때 나지막한 카라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공주님. 협곡 너머 편에는 화산들 때문에 숲이 거의 없답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지진이 대륙을 가른 뒤에 오랫토록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화산대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용암과 유해가스를 분출해댔죠. 울창했던 나무와 풀들이 대부분 녹아 내리거나 화산재에 뒤덮혔답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협곡 너머 대부분의 땅은 식물들이 자리잡기에는 너무나 척박하기만 했죠》

  영특한 미뉴애트는 카라가 말하고자하는 게 무슨 뜻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무와 풀이 없다면 가엘이나 랄프 같은 초식동물들이 번성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먹이감도 없고 육식동물들로부터 몸을 숨길 마땅한 은신처도 없었을 테니까. 그들은 결국 굶어 죽거나 맹수들의 먹이감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육식동물들은 초식동물들 덕에 좀 더 생을 연명해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으리라. 결국 그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할퀴고 물어뜯어야 했고 마지막까지 살아 남은 몇몇 생명체는 끝내 아사(餓死)하고 말았으리라.

  그제서야 미뉴에트는 로프로사우르스 족이 라뮤크 족을 피해 새로운 정착지로 삼은 곳이 왜 하필이면 '하늘마루 고원'과 '식지 않는 강'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